특집

[경인일보 창간70기획 그때]경인일보 기사로 본 한국현대사(1960~1980년대)·2

71년 특수범 24명 인천서 버스 탈취후 군·경과 충돌 ‘실미도 사건’87년 잇단 강간살해 ‘화성 현지르포’ 첫 보도등 기사 ‘사료적 가치’88년 10대 피의자 경찰 고문수사 사망 심층취재 통해 억울함 밝혀#월요일 오후를 뒤흔든 공포의 6시간1971년 8월 24일자 3면은 ‘실미도 사건’을 다뤘다. 기사를 보면 무장 난동 특수범 24명은 23일 낮 12시20분께 인천 남구 옥련동 송도해변 채석장을 통해 육지로 침투했다. 70대 행상에게 1천200원짜리 떡 한 소쿠리를 2천원에 사먹은 뒤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다. 노량진에서 군인·경찰과 충돌한 특수범들이 자신들이 타고 있던 버스 안에 수류탄을 터트리면서 사건이 종결됐다. 사고 발생 뒤 대간첩대책본부는 ‘무장공비 침투’로 발표했다가 다시 ‘특수범이 무장 탈출한 것’이라고 정정했다.#쥐로 모피를 만들어 수출<해외로 수출되는 쥐 모피(毛皮)>(1972년 2월 5일자)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시흥군 과천면 문원리 한국모피공업의 얘기다. 쥐로 만든 모피를 일본 등지에 수출해 화제가 된 회사다. 모피 하나를 만드는 데 쥐 540마리가 필요했다. 밍크보다 촉감이 부드럽고 털이 매끈하면서도 잘 빠지지 않는 것이 장점이라고 신문은 소개했다. 또 “정부가 막대한 자금을 부여 매년 연중 행사로 쥐잡기 운동을 벌여오던 쥐의 모피가 외화 획득을 위한 국제 시장에 진출했다”고 평가했다.#아파트 시대 개막주거 형태가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변화하는 흐름을 포착한 기사는 1978년 4월18일자에 <인천 수원에 아파트 붐>으로 게재됐다. 인천에서는 9개 건설사가 37개동 1천564세대를 건설 중이었고, 수원에서는 3천100세대 아파트 건설이 추진되고 있었다. 당시 인천 아파트의 3.3㎡당 분양가는 30만~50만원이었다. 분양 아파트의 면적은 14평에서 35평까지 다양했고, 부유층을 타깃으로 고급화된 단지도 등장하기 시작했다.#인천, 경기도에서 분리1981년 7월1일자 1면 머리기사는 <인천직할시 오늘 개청>이었다. 경기도는 인천의 독립을 축하하면서도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경기도 본예산 1천729억원 중 인천시가 611억원을 담당할 정도로 경제적 기여도가 컸기 때문이다. 신문은 같은 날 3면에 <갈대밭 포구 열어 98년…웅비의 새장 열어>란 제목의 전면 기사를 내보내 인천시 독립의 의미와 전망을 짚었다.#63년만에 나온 일제 민간인 학살 유해 1982년 9월 25일 화성군 향남면 도이리에서 ‘제암리 학살 사건 유해’가 발굴됐다. 1919년 4월15일 일제가 주민 29명을 제암리교회에 감금한 뒤 불에 태워 학살한 유골이었다. 신문은 이번 발굴을 계기로 <항일의 민족혼을 찾아>라는 기획을 시작했다. 1편에서 제암리 사건을 다뤘는데 “공포와 위협 앞에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은 마구 쏘아대는 흉탄과 타오르는 불길에 육신을 잃는 생죽음을 당했지만 독립을 위한 그들의 영혼은 결코 잿더미에 묻히지 않았다”라고 썼다.#영구미제로 남은 화성 연쇄살인 첫 보도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국내 첫 보도로 신문은 1987년 1월16일자에 <낯선 사람 나타나면 경계>란 제목으로 ‘연쇄 강간살인사건 태안·정남 현지 르포’를 실었다. 기사는 “해가 지면서 마을이 어둠 속에 묻히기 시작하면 온 마을이 이웃과의 단절 상태에 빠져 오가는 이 없이 쥐죽은 듯 고요할 뿐이다”, “이웃간의 대화마저 줄어 삭막한 마을로 변했으며 낯선 사람이나 젊은이를 보면 혹시 범인이 아닌가 하는 경계 때문에 주민들끼리의 의심 등 불신마저 일어나고 있다”고 적었다.#경찰의 무리한 수사, 10대 고문 사망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있고 1년이 지난 1988년 1월 수원에서 ‘명노열 군 고문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 명군은 여고생 강간 살인 사건 피의자로 경찰에 연행된 후 가혹 행위로 뇌사 상태에 빠진 뒤 곧 숨을 거뒀다. 신문은 심층 취재를 통해 경찰의 고문이 명군의 사망 원인이 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또 명군이 강간 살인 피의자가 아닌 단순 절도 용의자였다는 사실을 알렸다. /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①1988년 경인일보는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국내 첫 보도했다. 사건현장검증 사진. ②주거 형태가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변화하는 흐름을 포착한 1978년 4월18일자 인천 수원에 아파트 붐 기사 사진. ③1919년 4월15일 일제가 주민 29명을 제암리교회에 감금한 뒤 불에 태워 학살한 유골이 1982년 발견됐다. ④1981년 7월1일 개청된 인천직할시청. /경인일보 DB1988년 수원서 열린 명노열 군 고문수사사망 규탄집회. /경인일보 DB

2015-10-06 김명래

[경인일보 창간70기획 그때]경인일보 제호 변천사

‘독자중심주의’ 표방 향토지 1945년 인천기반 대중일보 ‘원뿌리’73년 경기매일·연합신문·경기일보 3개지 ‘경기신문’으로 통합81년 인천직할시 분리 ‘경인일보’ 변경… 쉼없는 ‘수도권 특화보도’경인일보 제호(題號)는 1982년 3월1일자로 경기신문에서 변경돼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경인일보의 ‘경(京)’은 경기도를, ‘인(仁)’은 인천시를 뜻한다. 제호 그대로 풀어보면 경기와 인천지역을 취재 권역으로 삼고 날마다 독자에게 뉴스를 전달하는 신문이다. 경인일보는 1982년 2월26일자 사고(社告)를 통해 제호 변경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수도권 지역이라는 특수성과 경기도와 인천직할시를 대상으로 취재망을 펴야 하는 현실성이 있고 보면 이번 제호를 바꾸어야 하는 이유의 한 가닥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뜻에서 앞으로 펼쳐질 경인일보는 경기도가 기호(畿湖)의 본적지로 역사의 맥락에서 개발을 구도해 보는 민족사의 지침이 제시돼야 하겠으며 인천직할시는 개항 100년에 접어든 국제도시로 세기사(世紀史)적인 문화와 경제를 현실로 수렴하면서 전향적인 미래상을 발진(發進)하는 새로운 인천상(仁川像)으로 부각 시켜나가는데 제작의 초점을 두어야 하겠습니다.제호 변경의 표면적 이유는 1981년 7월1일 이뤄진 인천시의 직할시(현 광역시) 승격에 있다. 무엇보다 경기도에 속해 있던 인천시가 광역시로 분리되면서, 그에 따른 신문 제호의 변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경기도에서 분리되고 1년도 안 돼 제호를 바꿔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인천과 같은 시기 경상북도에서 분리된 대구시에 있는 대구매일신문(현 매일신문)은 왜 경인일보와 같은 방식으로 신문 이름을 변경하지 않았을까. 앞서 인용한 제호 변경 사고에 나왔듯이 ‘수도권의 특수성’을 살펴야 한다. 인천은 경기도청 소재지인 수원과 함께 경인지역의 중심 도시였다. 인천은 일찍이 근대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수원과 그 일대는 1960~1970년대 급격한 인구 유입과 함께 대대적인 개발이 진행 중이었다. 인천과 수원(경기)은 도시의 궤적과 미래상이 달랐고, 문화적 차이도 클 수밖에 없었다. 수도권의 이러한 특성을 반영해 경인일보는 1980년대 타 지역 신문과 달리 제호에 경기, 인천을 모두 표기했다. 인천, 경기지역에서 각각 독자적인 보도·제작 시스템을 가동하면서도 ‘수도권 주민’으로서 인천·경기의 통합을 도모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경인일보는 1945년 창간 이후 늘 향토지(鄕土誌)를 표방했다. 수도권 각 지역의 소식을 신속하게 취재·보도했다. 또 해방 후 1980년대까지는 계몽지로서, 문화 창달 기관으로서의 기능도 담당했다. 경인일보의 전신으로 1973년 9월 출범한 경기신문은 ‘경기도의 성장’ 과정에서 애향심 고취를 목적으로 했다. 신문은 창간 사설에서 “경기신문이 직면한 보다 다급한 문제 중의 하나는 350만 경기도민에게 애향심을 주입하고 환기시키는 일이라고 본다. 고향은 있되 향토가 없는 무적자들에게 자기를 길러준 향토의 고마움과 영예로움을 갖도록 이끌어주는 일이 그것이다”고 적었다. 경기신문을 이룬 3개 뿌리인 경기매일신문, 연합신문(인천신문), 경기일보는 모두 인천에 본사를 둔 일간지였다. 1960년대 이들 3개 일간지는 자사를 홍보하는 광고에서 ‘경기도민 대변지’ 등과 같은 문구를 썼다. 인천에 본거지를 두고 있지만 인천뿐 아니라 경기도 전역의 독자를 대상으로 신문을 제작한 것이다. 이들 신문이 통합된 경기신문은 도청사가 있는 수원에 본사를 두고, 도 전역에 주재 기자를 보냈다. 인천은 지사(支社), 분실(分室) 아닌 분사(分社)체계로 구축, 독립적인 취재 기능을 갖게 했다.경인일보의 원뿌리인 대중일보(1945년)의 제호는 취재·배포 권역이 아닌 ‘지향성’을 담았다.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은 신문 이름이었다. 제호의 ‘대중’은 ‘독자 중심 주의’를 표방한 것으로 풀이된다. 대중일보는 인천을 기반으로 ‘서울 뉴스’와 ‘국제 정세’를 보도했다. 지역을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했다. 해방공간의 신문 독자들은 대중일보라는 여과지를 거친 뉴스를 읽으며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했다.경인일보 70년의 제호 변천 과정을 최근부터 거꾸로 훑었다. 경인일보와 대중일보 사이, 해방 후 수도권 지역 신문의 변화상이 놓여 있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해방의 환희, 분단의 아픔, 펜대 꺾인 기자의 분노, 문화 창달자로서의 자부심, 계도지를 자임한 당당함, 신문 사전 검열의 굴욕, 지역 발전 동반자로서 힘찬 발걸음, 고발자로서의 결기, 생존을 위한 언론사의 이율배반, 기록자로서의 결연함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대중일보에서 시작한 경인일보는 아직 끝나지 않고 진행 중인 역사다. /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경인일보 제호(題號)는 1982년 3월1일자로 경기신문에서 변경돼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경인일보의 경(京) 은 경기도를, 인(仁) 은 인천시를 뜻한다. 제호그대로 풀어보면 경기와 인천지역을 취재 권역으로 삼고 날마다 독자에게 뉴스를 전달하는 신문이다. 경인일보는 1982년 2월26일자 사고(社告)를 통해 제호 변경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2015-10-06 김명래

[경인일보 창간70기획 다음]차세대 IT산업의 요람 ‘판교창조경제밸리’

국토부, 43만㎡ 규모 판교창조경제밸리 2018년 추가조성창조·성장·벤처·혁신기업·글로벌·소통교류 등 6개 공간750개 기업 입주·4만여 신규 고용창출 국가경쟁력 ‘엔진’판교테크노밸리의 성공적인 조성과 기업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판교창조경제밸리(제2판교테크노밸리)에도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판교테크노밸리 북쪽 성남시 금토동 일대의 도로공사 이전부지와 그린벨트 해제용지, 한국국제협력단(KOICA) 용지 등을 활용해 약 43만㎡ 규모의 판교창조경제밸리를 조성하기로 했다.판교창조경제밸리는 창조공간(기업지원허브)과 성장공간(기업성장지원센터), 벤처공간(벤처캠퍼스), 혁신기업공간(혁신타운), 글로벌공간(글로벌 비즈 센터), 소통교류공간(I-스퀘어) 등 크게 6개 공간으로 조성된다.앞서 그린벨트지역인 판교창조경제밸리 서쪽 단지는 IT와 문화 콘텐츠, 서비스 등 3대 신산업 육성을 위한 복합 산업공간으로 개발하며 공공연구기관과 기업연구소를 위한 전용용지로도 공급한다는 청사진이 발표됐다. 도로공사·KOICA 부지가 있는 동쪽 단지는 호텔, 컨벤션센터, 창업기업 지원을 위한 기업지원 허브 등이 들어설 ‘혁신교류공간’으로 조성된다.부족했던 오피스텔과 레지던스 등 도심형 주거시설을 확충하고 교육·문화·복지시설을 유치하는 등 주거의 질을 높이기 위한 계획도 마련됐다.박근혜 대통령도 “판교는 중소벤처의 글로벌 진출 ‘베이스캠프’가 돼 스타트업기업들의 해외시장 개척을 안내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내비쳤다.이와 함께 도로망과 버스노선 등도 개선해 서울 강남과 창조경제밸리까지 20분에 연결한다는 계획이어서 입주를 희망하는 기업들이 줄을 이을 것으로 예상된다. 판교창조경제밸리가 조성되면 300개 창업기업에 300개 성장기업, 150개 혁신기업 등 약 750개 기업이 입주하고 4만여명의 신규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미 성남시와 벤처기업협회, 한국여성벤처협회, 이노비즈협회, 전자부품연구원, 코스닥협회 등은 성남 창조산업 육성협의체를 결성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각 기관별 최적화된 기술을 개발하고 교육연수 사업 개발을 운영하기로 했다. 또 청년실업 해소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상호 협력, 사회공헌사업 등에 참여하는 등의 지원을 펼치기로 했다.판교창조경제밸리가 완성된 이후에는 판교테크노밸리와 함께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은 물론, 성남시의 기존 성남산업단지, 수원시의 광교테크노밸리 등과 함께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된다.판교창조경제밸리의 조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지만 이 새로운 공간에서 펼쳐질 미래가 대한민국의 신성장동력이자, 새로운 기적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성남/김규식·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판교테크노밸리의 성공적 조성에 힘입어 정부가 판교테크노밸리 북쪽에 판교창조경제밸리(제2판교테크노밸리)를 조성하기로 했다. 사진은 판교테크노밸리의 정오 모습. /경기도 제공·아이클릭아트

2015-10-06 김성주·김규식

[경인일보 창간70기획 다음]미래성장동력 경기도

한국의 IT요람 판교TV·새 성공신화 제2판교TV연구개발·인력양성 기반갖춘 수원광교테크노밸리道, 지자체 최초 과기원 설립… 과학기술 발전 노력경기도는 지난 2010년 5월 전국 지자체로는 처음으로 도내 과학기술을 총괄하는 지원기관인 ‘경기과학기술진흥원(이하 경기과기원)’을 설립했다. 경기과기원은 도내 과학기술 정책 및 전략 수립, 중소기업의 기술개발지원, 첨단연구개발 사업수행, 산학연 혁신 클러스터 구축, 과학문화 확산 업무 등을 전담하며 도내 과학기술 발전과 기술혁신을 위해 노력해 오고 있다. 특히 경기도 첨단기술의 메카이자 기술혁신역량의 양축을 담당하고 있는 광교·판교테크노밸리를 기반으로 창조혁신 클러스터 생태계를 조성하고 기술력 확보로 중소기업 R&D지원, 개방형 연구체제 활성화에 앞장 서고 있다.이런 경기도의 노력 덕분에 탄생한 ‘판교테크노밸리(이하 판교TV)’는 현재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성공적인 혁신 클러스터 모델로 손꼽히고 있다. 지난 2004년 출발한 뒤 현재 진행형인 판교TV는 선택적 기업 유치와 기업 간 소통 활성화, 창의적 문화 공유가 성공적으로 이어지면서 내로라 하는 기업들이 몰려 들었고 이제는 국내 ICT(정보통신기술)산업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물론 국내외 관계자들의 벤치마킹 행렬도 이어지고 있다. 판교TV는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출범과 함께 본격 조성되기 시작했다. 경기도와 경기과학기술진흥원은 판교를 ICT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아무 것도 없던 곳에 건물을 세우고 기업을 모아 청년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나갔다. 이런 노력 덕분에 판교TV에는 현재 1천여개의 기업에서 7만여명의 인력들이 일하고 있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매출은 70조원에 달할 정도로 판교TV를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혁신 클러스터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했다. 첨단기술 육성을 통한 국가경쟁력 제고와 판교 신도시의 자족기능 강화를 목적으로 출발한 판교TV.이제는 정부도 제2판교TV(창조경제밸리) 추가조성 계획을 확정, 기존 판교TV와 제2판교TV는 이제 세계적인 혁신 클러스터 단지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제2판교TV에는 총 750여개의 벤처기업들이 2018년까지 입주할 예정이다. 정부는 제2판교TV를 기존 판교TV와 함께 1천600여개의 첨단 기업이 집적되고 10만여명의 인력이 근무하는 첨단 클러스터로 성장시키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상태다.이처럼 판교TV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혁신클러스터로 자리매김하면서 경기도는 또 다른 첨단연구단지 조성사업 계획을 밝히게 된다. 도는 지난 7월 경기 서부지역의 성장을 이끌 첨단연구단지 조성사업계획을 발표했다. 경부축에 비해 첨단연구기능이 상대적으로 열악하고 성장 잠재력이 높은 서부지역의 미래 산업을 이끌 첨단 산업의 거점 육성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도가 밝힌 첨단연구단지 조성사업구역은 광명·시흥 공공주택지구 해제지역 내로, 개발면적 66만여㎡, 총 9천400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도는 이 지역을 판교와 같은 첨단연구단지로 조성하기 위해 주거용지를 원천 배제하고 국내·외 첨단기업들의 연구·업무시설뿐만 아니라 종사자들을 위한 휴식·문화·엔터테인먼트 시설 등이 복합 된 공간으로 조성키로 했다. 또한 연구단지 설계단계부터 에너지 효율을 최적화하는 차세대 지능형 전력망 시설인 스마트그리드(Smart Grid)와 사물인터넷(IoT) 등을 도입할 방침이다. 이밖에 판교TV와 차별화 할 수 있는 자동차부품, 기계, 화학, 지능형 로봇 관련 R&D기능을 도입하고 컨설팅, 금융 등 창업·기업지원 서비스와 근로자 교육 및 교류 공간도 마련하기로 했다.도는 이번 첨단연구단지 조성으로 직접적인 고용유발 4천600명, 생산유발 약 6천400억원, 부가가치 유발 약 2천800억원 정도가 발생, 침체된 지역경제에 큰 활력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첨단연구단지 개발이 완료되면 약 900개사의 입주가 가능하며 7만명의 고용유발 효과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밖에 경기도가 조성한 수원 광교테크노밸리에는 차세대융합기술원, 한국나노기술원, 경기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 경기과학기술진흥원, 경기R&D센터 등이 입주 한 상태다. 서울과 30㎞,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 등이 인근에 위치한 첨단산업단지로서 최적의 지리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또한 광교테크노밸리 내에는 유수 기업과 외국투자기업 200여개가 입주해 있으며 주변에 성균관대, 아주대, 경희대 등 연구개발 및 인력양성 기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판교TV(제1·2판교TV)와 광교테크노밸리, 그리고 광명·시흥 첨단연구단지는 경기도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의 미래성장을 이끄는 동력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김신태기자 sintae@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5-10-06 김신태

[경인일보 창간70기획 다음]한국 IT산업의 요람 ‘판교테크노밸리’

황무지였던 판교테크노밸리, 대한민국 ICT 중심지로 ‘탈바꿈’현재 1천여 입주기업·근로자 7만여명·매출 총합만 70조에 달해첨단기술·문화 어우러진 ‘젊은이들의 놀이터’ 新경영문화 리드성남 남단녹지로 지정돼 성남시에서도 가장 늦게까지 개발되지 않았던 땅, 판교가 판교테크노밸리의 조성으로 개발도상국은 물론 첨단 산업의 주도권을 쥐려는 선진국에서까지도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판교테크노밸리는 이미 세계 산업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명실상부한 IT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이 곳에서 생산되는 각종 아이디어와 상품 등은 각 산업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 같은 성과는 2004년 판교테크노밸리 조성이 추진되던 시기부터 계산하더라도 불과 10년만에 이룬 성과인만큼 21세기의 새로운 성공신화가 됐다. 하지만 그 신화는 아직 진행형이며 미래형이다.판교테크노밸리는 10년전까지만해도 아무 것도 없는 땅이었다. 하지만 현재(2015년 7월 기준) 1천여개 기업이 입주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직원만 7만여명에 매출 총합이 70조원에 달하는 대한민국 ICT산업의 메카가 됐다.이 곳에는 IT관련 업체가 64%를 차지하고 있으며 BT(생명공학기술)관련 업체가 10%, CT(문화기술)관련 업체가 9%, NT(나노기술)가 1%로 그 뒤를 잇고 있다. 게다가 기업규모로 보면 중소기업이 86%, 중견기업이 10%, 대기업이 4% 순으로 젊고 역동적인 산업구조를 형성하고 있다.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직원들의 연령대를 봤을 때도 20대~30대 비중이 약 76%에 달하고 30대의 경우에는 52%로 다른 연령대에 비해 월등히 높다.이들은 판교테크노밸리를 혁신과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산실로 만들어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실현시키고, 실현된 아이디어를 마중물 삼아 다시 아이디어를 이끌어내는 구조가 만들어졌다.판교테크노밸리의 잠재적인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아울러 판교테크노밸리는 이 곳을 종합 관리·지원할 수 있는 전담조직이 형성돼 있고 활발한 산학협력 네트워크가 구축돼 자체적인 발전 시스템을 갖췄다는 점에서 전망이 밝다. 곧 준공될 예정인 산학연R&D센터, ‘스타트업아카데미’는 벤처와 스타트업(혁신적 기술과 아이디어를 보유한 설립초기 창업기업) 생태계 조성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스타트업 프로그램만 가지면 판교테크노밸리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을 펼친다는 것, 스타트업 아카데미가 정착되면 판교테크노밸리에는 더욱 창의적인 인재가 모여 대한민국의 미래를 선도해갈 것으로 기대된다.판교테크노밸리는 ‘산업의 첨단’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성공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대한민국의 기업문화도 판교를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판교테크노밸리가 클러스터를 넘어 새로운 경영문화를 선도하는 것은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청년층이 주를 이루다보니 문화적 요소가 더해져 혁신을 이끌어내고 있다.평소 접하기 어려운 문화생활의 기회를 입주기업의 직원들이 직접 만들거나 사내 동아리가 직접 무대를 꾸며 점심 시간 판교테크노밸리의 광장을 오가는 다른 기업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특히 일부 기업들의 독특한 경영문화가 소문이 나면 기업순환모임을 통해 직접 체감한 효과를 서로 소개하면서 기업문화도 발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개인 책상이 없는 기업이나 호텔뷔페식 구내식당, 사우나가 있는 기업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저마다의 특별한 기업문화를 선보이고 있지만 결국엔 모두 직원을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 창의적 아이디어와 소통을 강화한 기업들은 성과로 기업문화 혁신의 결과를 돌려받고 있다.판교테크노밸리는 단순히 기업이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젊은 세대가 일하는 일터를 넘어 첨단기술과 문화가 만나 판교만의 경영화로 이어지면서 첨단 ICT와 혁신적인 기업문화가 어우러진 한국판 실리콘밸리가 되고 있다. 판교테크노밸리는 현재 마련한 기반을 발판삼아 실력있는 젊은이들의 놀이터에서 최고 실력을 갖춘 젊은이들이 세계로 나가기 위해 경쟁을 펼치는 경연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성남/김규식·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명실상부한 IT 메카로 자리매김한 판교테크노밸리. (왼쪽부터) 판교 테크노밸리의 정오, 야경, 일출 광경. /경기도 제공항공에서 바라본 판교테크노밸리.데미투 함바사(가운데) 에티오피아 장관이 지난 2월 판교테크노밸리 공공지원센터 내 창의디바이스랩에서 3D프린팅으로 제작한 심장모형을 보고 있다.

2015-10-06 김성주·김규식

[경인일보 창간70기획 지금]지표로 본 경인경제

1인당 국민소득, 광복 이후 70여년간 400배 가까이↑경기도, 사업체수 1위·인구 1위 등 고속성장 일등공신인천, 수출 전진기지 인천항 활용… 세계화 선봉 중책‘1953년 67달러, 2014년 2만5천931달러’.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의 변화다. 광복 이후 70여년간 무려 400배 가까이 증가하는 등 우리는 말 그대로 ‘초고속 성장’을 이뤄냈다.그 중심에는 경기도와 인천이 있었다.경기도는 인구수 1위, 사업체수 1위, 인구성장률 1위, 수출 1위 등 각종 경제지표에서 ‘1위 타이틀’을 거머쥐며 한국 경제의 성장에 기여했다. 현재 경기도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314조원으로, 우리나라 총생산 규모의 자그마치 21.9%를 차지하고 있다. 경기도를 바짝 뒤쫓는 경남(100조원)보다 무려 200조원 이상이나 앞서있다. 특히 전국 대비 경기도 GRDP의 비중도 지난 1985년 13.8%에서 1995년 17.4%, 2005년 19.5%, 2012년 19.7%로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최근 2년 연속 수출 1천억달러를 달성시켰다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곳도 경기도다.도의 수출실적은 지난해 1천117억달러, 2013년에도 1천20억달러를 기록하면서 2년 연속 ‘수출 1천억달러 달성’이라는 쾌거를 이뤘다.여기에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기준 수출규모 1위’라는 타이틀 역시 2년 연속 지키고 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주요 IT품목의 수출이 전체 수출의 상승세를 견인하면서 도는 ‘수출 웅도’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인천의 경우 인천항을 빼놓을 수 없다. 인천항은 광복 이후 군수물자 등을 취급하면서 눈에 띄게 성장했다. 이후 산업화와 함께 수출 전진기지로 활용되며 경제 성장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왔다.지난 2013년 12월에는 개항 이래 처음으로 연간 컨테이너 처리 물동량 200만TEU를 넘기는 기록을 달성했다. 1974년 인천 내항에 대한민국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부두가 개장한 지 39년, 2005년 100만TEU를 돌파한 지 8년, 200만TEU 도전에 나선 지 4년 만이다.인천항 컨테이너 물동량은 지난 2005년 100만TEU를 돌파한 뒤 증가세를 이어갔지만 2010년 190만2천TEU, 2011년 199만7천TEU, 2012년 198만1천TEU 등 200만TEU의 벽을 쉽사리 넘지 못했다. 하지만 200만TEU 돌파를 이루면서 인천항은 명실상부하게 글로벌 항만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특히 앞으로 환황해권의 주요 항만이자 중심 거점항만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인천신항까지 전면 개장하면 인천항은 남항의 컨테이너 부두와 함께 환황해권 컨테이너 거점 항만으로 도약할 전망이다.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제조업의 성장’이다. 경기·인천지역의 제조업은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각종 지표에서 양호한 실적을 기록해 주목받은 바 있다.지난 2010년 경기도의 종사자 10인 이상인 제조업 사업체 수는 2만1천662개로 전년(2만50개)보다 1천612개(8.0%)가 증가했고 종사자 수도 72만4천명에서 78만9천명으로 6만5천명(9.0%)이 늘었다.또한 전체 출하액은 234조8천억원에서 289조2천억원(23.2%)으로, 주요 생산비(인건비 제외)는 139조4천320억원에서 177조670억원(27.0%)으로, 부가가치는 95조8천950억원에서 114조3천830억원으로 각각 증가했다.인천시도 같은 기간 제조업 사업체 및 종사자 수가 4천281개, 15만6천명에서 4천653개(8.7%), 16만7천명(6.8%)으로 늘었고 전체 출하액도 7조7천300억원(15.0%)이 증가한 40조5천760억원으로 집계됐다.주요 생산비는 35조2천560억원에서 40조5천760억원으로 높아졌고 부가가치도 2조7천590억원(16.9%)이 늘어난 19조770억원에 달했다.이같은 경인지역 제조업의 성장은 지역의 대표적 주력산업인 자동차, 전자부품, 기계, 금속가공 등 수출환경이 개선되면서 경쟁력이 높아져 전체 제조업을 이끌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2010년 기준으로 사업체 및 종사자, 주요 생산비, 부가가치 등 지표의 증가분 가운데 이들 산업이 60~90%를 차지한 것으로 조사됐다.경제전문가들은 “경기도와 인천은 광복 이후 70년간 전국 평균을 웃도는 역동적인 성장을 이어왔다”고 평가했다. /신선미기자 ssunmi@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5-10-06 신선미

[경인일보 창간70기획 그때]근대화를 이끈 토종기업들·1

SK그룹 뿌리인 ‘선경 직물’ 광복·한국전 거쳐 수원서 주식회사 설립1967년 문 연 팔달로 전진상회, 한국대표 종자기업 ‘농우바이오’ 성장글로벌기업 삼성전자·SK하이닉스… 전자·반도체 분야 리더로 우뚝한국 경제는 지난 1945년 광복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1960년대 후반까지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 걸음만 반복했다. 이후 ‘잘살아보자’는 기치 아래 경제 개발에 매진해 온 결과 단기간 내 최빈국 대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 경제의 중심인 경기도에 향토 기업들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었다.# SK그룹의 발상지재계 서열 4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SK그룹의 발상지가 바로 수원이다. 당시 상호는 ‘선경직물(鮮京織物)’. 창업주 최종건 회장의 청운의 꿈이 서려있는 곳이다.고 최종건 회장은 18세의 나이로 조선 선만주단과 일본 교토직물이 합작한 선경직물에 입사했다. 최 회장에게 직접적인 경영의 기회가 찾아온 건 1945년 광복 이후다. 한-일 합작사인 선경직물은 미군정의 관리를 받다가 정부 수립 이후 국가에 귀속됐다.이후 한국전쟁이 터졌고 당시 최 회장은 잿더미였던 공장 부지와 귀속 재산을 매수, 직기 15대를 두고 ‘선경직물 주식회사’를 설립했다.이것이 SK그룹의 시작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파고를 넘어 기어코 자신의 직물회사를 설립한 최 회장의 집념이 빛을 발했다.그는 1960년대 섬유산업에 주력, 1962년 인견직물을 해외로 수출했고, 이어 선경잔디공업(1965년), 선경화섬(1966년), 선경산업(1962년)을 설립하며 사세를 넓혀나갔다.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된 SK그룹은 정유, 화학, 이동통신사업까지 사업 영토를 확장해나가고 있다.# 종자산업의 근원지(주)농우바이오는 수원의 대표적인 향토기업으로서 국내 종자산업을 이끌어 왔다. 40년 이상 수원과 함께 성장한 농우바이오는 고품질 채소 종자를 연구개발해 700여종의 다양한 채소종자를 국내는 물론 해외에 개발 보급하고 있다.지난 1967년 수원 팔달로에서 전진상회로 시작한 농우바이오는 이후 1981년 삼화육종회사를 인수해 농우종묘사로 탈바꿈했다.1990년대 후반 국내 종묘업계에는 인수합병 바람이 불었다. 이때 대부분의 국내 종묘기업들이 다국적 기업에 인수됐다.농우바이오에도 1천억원이라는 규모의 인수제의가 들어왔지만 경영진은 ‘종자수호’를 내세우며 이를 거절했다.세계적인 종묘회사로 거듭나고 있는 농우바이오는 종묘 연구에서 개발, 생산, 유통을 모두 집적화시킨 대규모 종합단지 건립을 전략사업으로 추진할 방침으로 국내 종자산업의 대들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전자산업의 메카경기도는 오늘날의 삼성그룹을 이야기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곳이다. ‘초일류 글로벌 기업’ 삼성의 모든 것이 사실상 경기도의 틀 안에서 태동했다. 1968년 10월 수원시 매탄동에 본격적인 사업장 건설에 돌입하고 이듬해인 1969년 1월13일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오늘날의 전자왕국 삼성은 시작됐다. 호암 고 이병철 회장은 1968년 6월12일 일본 아사히신문과 인터뷰를 통해 전자산업 진출을 공식 선언한다. 물론 당시엔 일본 산요전자의 협력을 받아 TV를 OEM(주문자상표부착방식)으로 조립했다. 삼성의 전자사업은 1983년 2월 반도체 산업의 진출로 재도약의 기회를 마련했다. 이후 반도체 설비에 대한 과감한 투자는 삼성의 반도체 사업을 단숨에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한해 매출 150조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반도체 산업의 전초기지 이천시 소재 SK하이닉스는 경기도 동부지역의 첨단산업을 이끄는 또 하나의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이닉스 반도체에는 기적 같은 부활의 신화가 있다. 하이닉스 반도체의 뿌리는 현대전자다. 지난 1999년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흡수 합병해 세계 최대 D램 생산 기업으로 출발했다.하지만 2001년 세계 반도체 경기 불황이 닥치면서 무려 15조원의 천문학적인 부채를 떠안고 한 순간에 무너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 9개월 후 바로 그 하이닉스는 기적처럼 다시 일어섰다.힘겨웠던 기업회생 절차를 거친 하이닉스는 SK텔레콤이 2011년 11월 하이닉스 반도체를 인수하는 계약을 맺고 이듬해 3월 26일 SK하이닉스로 새로 태어났다.지난달 SK그룹은 반도체 분야에 46조 원을 투자키로 하는 등 공격 경영을 통해 반도체 시장 패권을 노리는 동시에 국가 경제에 일조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성철기자 lee@kyeongin.com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공장 'M14' /SK하이닉스 제공1950년대 선경직물 생산공장.삼성전자 1997년 기흥사업장 제8라인 준공식.

2015-10-06 이성철

[경인일보 창간70기획 그때] 인천 - 경인일보 탯줄

일제 패망후 인천 대표문인들 의기투합 ‘대중일보’로 지역소통 시작인천신보·기호일보… 1960년대 경기매일·연합신문·경기일보 ‘3강’군사정권 언론 통폐합 아픔 딛고 ‘인천·경기 대표 정론지’로 거듭나경인일보는 해방 직후 인천지역 첫 신문인 ‘대중일보’(大衆日報)로 태어나 수도권 언론의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인천은 경인일보가 태어난 곳이고, 지금껏 살아온 터전이다.물론 긍정적인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군사 정부의 언론 통폐합 정책을 감내해야 했고, 유신 정권에 날카로운 칼끝을 겨누지 못했다. 검열하는 정권에 맞서지 못한 채 억눌려 있었던 시기도 있었다. 이 역시 경인일보 70년에 새겨진 역사다. 이런 역사의 굴곡 속에서도 경인일보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오랜 시간의 무게는 성장의 자양분이다.대중일보는 창간사에서 “오직 불편부당의 진정한 언론의 사명을 다할 것을 만천하 독자에게 공약한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의 경인일보로 이어지는 맥박은 지금도 쉼 없이 뛰고 있다.#해방. 그리고 대중일보대중일보는 해방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45년 10월 7일 ‘창간호’를 발간했다. 인천엔 일제강점기의 신문 제작·보급 인프라가 남아있었다. 자본력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일제가 패망한 뒤 ‘주체적 언로’를 확보하고자 했던 ‘개항장 지식인’들도 많았다. 신문을 만들 인적·물적 기반이 그만큼 탄탄했다.대중일보는 의사 고주철이 창간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인 고유섭의 숙부다. 개항기 인천의 의사들은 본업뿐만 아니라 언론,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활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창간 이사장 송수안은 일제시대 때 일본어 신문 조선시보, 매일신보 인천지사장을 맡았던 인물로, 신문의 역할과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창간 공무국장 이종윤은 일본 도쿄고등공예학교 인쇄과를 나와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서 근무한 뒤 1927년부터 선영사라는 이름의 인쇄소를 운영했다. 편집국장 엄흥섭을 비롯해 김도인, 진종혁, 김차영, 손계언, 이원창 등 편집국 기자들도 당대 이름을 날리던 문인이 많았다.#창간 초기 보도 성향의 변화대중일보는 창간 초기 좌익적 이념 성향을 보인다. 창간호에 대표적 좌파 시인 임화의 시를 축시로 받아 실을 정도였다. 편집국장 엄흥섭은 당시 좌익 문학인들의 모임인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회원으로도 활동한 인물이다. 대중일보의 이런 좌익적 이념 성향은 오랜 기간 지속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미·소 신탁통치 논란 과정에서 대중일보의 보도는 ‘반대 유지’로 당시 우익계 신문으로 평가받는 동아일보와 유사했다. 1946년 1월 엄흥섭과 대중일보 소속 기자 일부가 퇴사하는데, 대중일보의 논조 문제 때문이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편집국장 엄흥섭 등 대중일보 퇴직기자를 주축으로 같은 해 3월 인천신문이 만들어지는데, 인천신문은 지나친 좌익 논조로 창간 초기 필화사건을 겪기도 했다.인천신문이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한때 노골적으로 좌경화해 그와는 반대 논진을 펴고 있는 대중일보와 대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고 1973년에 나온 ‘인천시사’는 기술하고 있다. 대중일보에 누가 근무하느냐에 따라 신문의 논조가 좌우를 오간 것이다. 당시 언론의 좌경화와 진보주의적 색채를 견제하던 미군정(美軍政)의 언론정책 등 정치적 환경도 대중일보 성향 변화에 요인이 됐다는 평가가 있다.#군사정권의 강압, 3사통합대중일보는 이후 인천신보(1950년 9월), 기호일보(1957년 7월), 경기매일신문(1960년 7월)으로 여러 차례 이름을 바꿨다. 경기매일신문은 1960년대 인천신문(1960년 창간), 경기일보(1966년 창간) 등과 3강 체제를 유지했다.경기매일신문은 ‘만년 야당지로서의 지조와 기개’를 중시하고, 인천신문은 지역 문화 창달의 역할에 치중했다고 한다.창간사에서 ‘의견 형성력’을 강조했던 경기일보는 의제 설정 능력을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신문은 당시 경기도 중심도시였던 인천에 본사를 뒀는데, 도내 전역으로 신문망 확대를 추진했다. 경기도 주요 도시에 지사망 시스템도 갖췄다. 1960년대 후반 서울에 있던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이전하자, 인천·경기지역 언론 지형에 지각변동이 생겼다. 경기연합일보로 제호를 바꾼 인천신문은 1969년 수원 교동으로 본사를 옮기고 제호를 연합신문으로 바꿨다.군사 정권의 강압적 언론 통합 조치로 ‘3강’ 경기매일신문, 경기일보, 연합신문은 통합돼 1973년 9월 1일 경기신문으로 출발한다.본사 소재지는 수원이었다. 경기매일신문 발행인이었던 송수안(대중일보 창간 이사장)은 통합에 끝까지 반대했지만 군사 정권의 압력은 컸다. 당시 인천을 비롯해 전국에서 신문은 11개에 달했다. 경기신문은 1면 제호 바로 밑에 ‘본보는…(중략)… 자율적으로 통합한 신문입니다’란 문구를 한동안 내보내며 갑작스러운 통합으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던 독자들에게 ‘자율통합’임을 애써 부각했다.#아픔 속에도 놓치지 않았던 인천경기신문 편집국은 경기매일신문, 경기일보, 연합신문 출신 기자들이 섞여 구성됐다. 경기일보 편집부국장 출신인 조창환이 경기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맡았고, 편집부국장도 경기일보 출신 기자가 맡게 됐다. 편집 방향은 통합 이전과 이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당시 일했던 기자들의 중론이다.인천은 서울지사나 의정부지사보다 격이 높은 ‘분사(分社)’ 형태로 운영됐다.경기신문 인천분사 기자 수는 총 15명으로, 경기매일신문 출신 4명, 경기일보 출신 5명, 연합신문 출신 6명이었다. 이는 경기신문 본사의 기자(데스크 포함) 12명보다 많은 숫자였다. 경기매일신문 편집국장이었던 김형희가 인천분사 편집책임자를 맡았다.3사 통합 이후 언론계에 남은 이들이 있었지만, 떠나야 했던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1972~1973년 전국언론인방명록을 보면 최소한 100명 이상이 직장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인천을 기록하는 경기신문 기자들은 쉬지 않았다. 당시 정치적·사회적 아픔 속에서도 신문의 비판 기능을 잃지 않았다. 밤낮없이 일하는 소방관, 간호사, 경찰관 등을 취재한 ‘심야의 역군’ 시리즈를 비롯해 인천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을 보도했다. 1973년 9월 1일부터 1979년 12월 31일까지 경기신문에 소개된 인천 기사는 약 2만 3천 건에 이른다.#경인일보의 뿌리는 인천경기신문은 1982년 3월 경인일보로 제호를 바꿨다.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나온 자연스러운 조치였다. 신군부의 ‘1도 1사’ 정책은 1987년 언론기본법 폐기로 끝이 난다.언론 자유화 이후 경기일보, 인천신문(현 인천일보), 기호신문(현 기호일보) 등이 창간됐다.‘한국 신문 100년 연표’는 인천에서 창간된 대중일보에서 인천신보, 기호일보, 경기매일신문, 경기신문으로 이어지는 경인일보의 흐름을 명시하고 있다.이 연표는 한국 언론계에서 ‘영원한 사회부장’으로 추앙받는 고(故) 오소백 기자의 대표작 ‘기자가 되려면’에 수록돼 있다.경인일보의 뿌리는 인천에 있다. 인천에서 창간한 대중일보를 시작으로, 역사의 곡절을 거치면서 70년간 꾸준히 성장했다. 그리고 경인일보는 뿌리 인천과 함께 호흡하면서 변함없이 더욱 성장할 것이다. /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아이클릭아트1970년대 경기신문은 ‘지역성 강화’에 주력했다. 인천을 비롯한 경기도 전역의 소식을 고루 전하면서, 역사와 인물을 발굴해 기록하는 일에도 힘썼다. 사진은 경기신문이 1977년 초 발간된 ‘한국신문연감’에 낸 광고사진.한국 언론계에서 ‘영원한 사회부장’으로 추앙받는 오소백(1921~2008) 기자의 대표작 ‘기자가 되려면’(개정·증보 12판)에 수록된 ‘한국 신문 100년 연표’의 ‘경기매일신문’과 ‘대중일보’ 설명란.

2015-10-06 이현준

[경인일보 창간70기획 그때]근대화를 이끈 토종기업들·2

日 국내업체로 출발 섬유업체 동일방직, 전성기때 ‘종업원 1600여명’조선기계·자동차 산업 터전… 대우그룹 위기로 美 GM 매각 아쉬움트럭 한대로 출발 한진상사 베트남戰 거치며 국내 10대 재벌 발돋움인천은 우리나라의 대표 산업 도시다. 일본의 침략, 중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 바다와 가까운 위치 등 여러 이유로 인천에는 다양한 공장이 들어섰다. 반세기를 훌쩍 넘어 이어진 인천 산업 역사에는 대기업으로 성장했거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기업의 이야기도 켜켜이 쌓여 있다.인천은 특히 항만을 낀 입지조건으로 임해공업도시가 됐는데, 정부의 수출주도형 경제 개발 정책에 크게 이바지했다. 인천 산업은 1972년 시작된 3차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으로 성장 기반을 만들었고, 중화학공업이 이를 주도했다. 인천에서 섬유, 목재, 기계공업 등의 기업 성장이 두드러진 게 우연이 아닌 것이다.1955년 세워진 동일방직은 인천을 대표하는 섬유회사다. 일본 5대 방적 업체 중 하나인 동양방적 인천공장으로 시작된 동일방직은 당시 종업원 수 1천600여 명에 이를 만큼 컸다. 아쉽게도 현재 동구에 남아있는 동일방직 인천공장도 규모는 계속 축소되고 있다.대신 동일방직은 제2의 전성기를 꿈꾸며 인도네시아, 중국, 베트남 등으로 사업 무대를 넓혔고 계열사를 통해 화학 섬유 제품 가공, 제조, 수출 및 알루미늄 등으로 사업 범위를 키우고 있다. 특히 동일드방레는 라코스테 같은 브랜드로 지난 2011년 기준 연 150억원 이상의 순이익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인천은 항을 낀 도시로 수입 원목에 의존했던 1970년대, 목재 산업도 번성했다. 대성목재(1936년), 대일목재(1959년), 동양목재(1961년), 영림목재(1969년) 등이 일찍이 지역 내 자리했다. 이 중 대성목재는 1970년 때 이미 합판 수출액이 1천만 달러 이상이었다. 영림목재는 삼립식품과 삼학소주 등에서 쓴 목재상자 제재목 생산, 납품으로 성장했지만 플라스틱의 등장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영림목재는 해결책으로 1979년 파렛트를 신사업으로 선택했고, 1980년대부터 특수목 사업도 시작해 악기, 가구, 조경시설물 등으로 수익 구조를 다각화해 목재 전문 기업으로 남았다.인천의 기계, 자동차 산업은 대우그룹과 연이 깊다.인천 기계 산업의 대표급, 두산인프라코어의 모태는 1937년 세워진 조선기계제작소다. 조선기계제작소는 일본의 전쟁 계획에 따라 광산용 기계 생산 회사에서 해군용 선박 엔진, 잠수함을 만드는 회사로 변화했다. 1976년 대우기계와 합병해 대우중공업으로 이름을 바꾸며 종합기계회사로 성장했고, 굴삭기를 양산했다. 하지만 1999년 대규모 워크아웃으로 12개 계열사가 해체된 대우사태로 그룹이 몰락했고, 이 때 대우종합기계로 분할 설립됐다. 2005년 대우중공업에 인수된 후에는 두산그룹에 속하면서 현재 기업명인 두산인프라코어로 변경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굴삭기, 굴절식 덤프트럭 등 건설기계와 공작기계, 디젤 엔진 등을 주요 생산품으로 삼고 있다.인천의 자동차 산업은 신진자동차-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GM대우-한국GM으로 이어지며 위기와 기회를 고루 경험했는데, 대우그룹은 1975년 석유 파동, 현대자동차 포니 생산 등으로 최대 위기를 맞은 새한자동차를 인수해 대우차로 역사를 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1999년 위기로 미국의 GM에 매각됐고 대우차도 흔적없이 사라졌다.1953년 인천에서 대한중공업공사로 출발한 현대제철은 한국전쟁 전후 부서진 시설 복구에 수요가 커진 철강재 생산으로 회사를 키웠다. 1970년 인천제철과 합병했고, 1978년에는 다시 현대그룹에 흡수됐다.현대제철은 1982년 대형 구조물 골조로 사용되는 H형강 생산에 뛰어들었고, 1999년 매출 1조 원 시대를 열며 IMF 타격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강원산업, 삼미특수강 등을 차례로 인수하며 국내 전기로 제강 최대 회사가 됐다. 2001년 제2의 창업 선언을 한 현대제철은 INI스틸, 2006년 현대제철로 이름을 바꿨다.최근에도 현대제철은 사업 확장을 하고 있는데 2014년 당진에 특수강 공장 건설로 자동차 소재 전문 제철소로 거듭났다.인천은 물류산업과도 뗄 수 없는데 한진그룹이 맏형격이다.트럭 한대로 인천시 항동에서 한진상사로 영업을 시작한 한진그룹은 높은 신용으로 규모를 키웠지만, 한국전쟁으로 기반을 잃었다.하지만 창업주 조중훈이 미군수물자 수송 용역을 따내며 1960년 22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어 월남전 때 베트남에 진출해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수송 업무를 강행하며 엄청난 외화를 벌었다. 한진그룹은 위험 요소가 많은 수송 사업의 특성을 고려해 1967년 동양화재보험을 인수했고, 이어 대한항공도 사들였다. 이로 인해 한진그룹은 순식간에 국내 재벌 서열 10위에 올랐다. 한진그룹은 고속버스사업으로 큰 이익을 냈는데, 고속도로가 전국적으로 확대 된 시점과 맞물린 덕이다. 또 한진그룹은 한일개발, 교육(인하대) 사업 등으로 입지를 다졌다.섬유, 목재, 기계, 자동차, 물류 등에서 성장한 여러 기업은 인천 산업 발전의 바탕이 됐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해당 분야에서 질 높은 기술력을 가졌고, 시대 흐름에 따라 신기술, 신사업을 개척했다. 덕분에 인천 산업은 자연스럽게 전통산업에서 첨단산업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시켰다. /박석진기자 psj06@kyeongin.com인천시 동구에 남아있는 동일방직 공장 전경.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현대제철 인천공장. /현대제철 제공인천신항에 건설중인 한진 컨테이너터미널. /한진그룹 제공

2015-10-06 박석진

[경인일보 창간70기획 다음]‘미래도시’ 송도를 가다

아파트 입구서 차번호 인식 자동으로 엘리베이터 열리고 도착집 온도·조명 한번에 조종 화상통화 SF영화속 장면이 ‘현실로’교통·환경·재난등 도심 실시간 통합관리·정보제공 ‘진화된 삶’A씨가 퇴근 후 집으로 차를 몬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는 차 번호판을 인식해 자동으로 집안에 설치된 월패드에 A씨가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가방에다 아내를 위한 선물까지 든 터라 두 손을 쓰기 어렵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주차장에서 RF(radio frequency) 카드를 인식시키면 자동으로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문이 열린다. 엘리베이터에는 A씨 집이 있는 7층이 자동으로 눌러져 있어 두 손에 물건을 들고 있어도 불편함이 없다. 집안에 들어가 월패드로 집안 온도부터 조명까지 한 번에 조정한다. 월패드에는 아내가 남긴 영상 메시지가 뜬다. 아내는 친구를 만나고 조금 늦을 거라며 주방에 있는 음식을 데워 먹는 방법을 녹화해놨다. 아내의 설명에 따라 밥을 챙겨 먹으니 월패드에 영어 수업 시간이라는 메시지가 뜬다. 화상장비가 설치된 TV를 켜니 미국에 있는 개인 영어 선생님이 반갑게 인사한다. 실제로 마주한 것 같은 생생한 화면을 보며 영어로 토론한다.인천 송도국제도시 한 주민의 실제 퇴근 후 일과다. 송도에서는 SF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최첨단 유비쿼터스 기술이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다. 집안에 설치된 월패드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을 이용해 어디서든 집 안에 조명, 온도 등을 조정할 수 있는 스마트홈네트워크 서비스는 송도국제도시에서 선도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송도국제도시에서는 텔레프레즌스(Telepresence)를 통한 다양한 생활편의 서비스도 누릴 수 있다.송도국제도시 1천200여세대를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는 ㈜유라이프솔루션즈의 ‘마스터 벨’서비스가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글로벌 네트워크 장비업체인 시스코의 고화질 화상장비를 장착한 TV를 통해 단지 내 입주민부터 타국에 있는 사람까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화상영어, 건강관리, 상담 등이 가능하다. 화상통화 등 이와 유사한 서비스가 이미 제공되고 있지만, 마스터벨은 끊김이나 소음이 지속되는 하울링이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많은 콘텐츠가 무료로 제공된다는 것도 강점이다. 마스터벨의 9월 오픈클래스 시간표를 보면 ‘가을 자외선 피부 셀프관리’, ‘요술북 동화나라’, ‘줄리와 함께하는 영어동요’, ‘영어 프리토킹’ 등 다양한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 같은 송도국제도시의 유비쿼터스 기술은 점차 진보하고 있다. 인천유시티주식회사는 송도 1~4공구를 대상으로 도시 안전, 교통 등 주민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주는 시민체감형 유시티(U-City) 구축을 다음 달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또한, 송도·청라·영종, 인천경제자유구역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관리하는 도시통합운영센터를 구축하고 있다. ▲실시간 신호제어, 교통 정체 해소,손쉬운 교통정보 이용,도로정보관리,간편한 전자지불(U-교통) ▲차번인식CCTV, 화재정보 감시체계구축, 이상음원모니터링(위험상황발생시 소리인식), 침하침수모니터링, 재난상황전파(U-방범/방재) ▲악취발생 모니터링, 황사 등 환경상황전파,수질분석,지능형에너지 관리 서비스(U-환경) ▲시설물통합감시제어, 도시기반시설 통합관리,실시간 현장지원(U-시설물관리) 등이 제공된다.다양한 시민체감형 솔루션 개발도 이뤄지고 있다. 악취감시 모니터링, 안전통합 방범시스템, 스마트워크, 홀몸노인 장애인 헬프케어, 장애인 주차관리, 전자도서관, 무인택배시스템, 공기질 개선장치, 재난상황 관제시스템, 지하, 지상 자전거도로 등 시설물통합관리 등 유비쿼터스 기술이 접목된 솔루션을 제공할 예정이다.이 같은 송도국제도시의 유비쿼터스 기술은 외신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기도 하다. 외신은 송도국제도시를 ‘미래도시’라고 소개하고 있다. 올해 송도국제도시를 스마트 도시로 소개했거나 소개할 예정인 주요 외신만 꼽아봐도 프랑스 아르테(ARTE) TV의 ‘Cities of Tomorrow’, 독일 최대 민간방송국 ProSieben(프로지벤)의 과학토크쇼 ‘Galileo’, 영국 BBC 방송국의 간판 과학테크쇼 ‘Click’, 네덜란드 현지 구독율 2위 매체인 알헤멘 다흐블라트(Algemeen Dagblad), 미국 라디오매체 NPR의 ‘All Things Considered’, 덴마크 시청률 1위 방송사 TV2의 ‘Biggest’, 브라질 최대 방송사 TV Globo 등이 있다.송도 국제업무단지(IBD)를 개발하고 있는 NSIC(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 관계자는 “송도의 ‘스마트 도시’로의 비전은 해외에서 더욱 조명받고 있다”며 “미국은 물론,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과 브라질에서도 송도 개발 현황을 취재하려는 열기가 뜨겁다”고 했다. /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몽골 현지와 인천 송도국제도시간 실시간 화상 통화를 하는 모습.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텔레프레즌스를 이용해 강의를 듣는 모습. /(주)유라이프솔루션즈 제공유라이프솔루션즈의 화상관제센터에서 실시간으로 ‘마스터벨’ 강의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모습.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u-City’ 송도 전경.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5-10-06 홍현기

[경인일보 창간70기획 그때]서울에도 경기에도 있는 시흥, 왜?

광명·안산 등 독립으로 해체 위기도현재 42만 산업도시 제2 중흥기 맞아‘서울의 시흥동과 경기도 시흥시, 어느 지역이 먼저일까’.서울을 오가는 경기도민은 한 번씩 의문이 생기는 지역이 있다.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과 경기도 시흥시다. 심지어 한자어 역시 시흥(始興)으로 같다. 이처럼 다른 지자체에서 같은 지명을 사용하는 이유는 쪼개지고 축소된 ‘시흥군’ 행정구역 변천사에 있다.조선시대에만 해도 경기도 시흥군은 오늘날의 서울 영등포·금천·관악·동작구와 경기도 안양·안산·과천·의왕시 등을 포함한 거대한 지자체였다. 시흥이라는 이름은 광활한 곡창과 물줄기로 ‘뻗어나가는 땅’에서 출발했다.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지금의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에 관아가 있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1년 영등포읍으로 청사를 옮겼다. 하지만 1936년 영등포읍이 서울(당시 경성부)로 편입되고 광복 이후 지금의 안양으로 다시 군청을 옮겼다.이에 맞춰 서울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1963년 시흥군의 신림리, 봉천리, 가리봉리, 시흥리가 서울의 동(洞)으로 편입되면서 시흥이라는 명칭을 중복사용하게 됐다. 서울시의 입장에선 조선시대 관아가 있었던 시흥동을 고수했고, 시흥군 역시 전통적인 지역 명칭을 버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두 개의 시흥(始興)은 이 때 시작됐다.시흥의 수난(?)의 역사는 끝이 아니었다.1973년 안양읍이 시로 승격되고, 1981년 광명시가 독립하면서 시흥군의 모습은 동서로 나눈 기형적인 모습이 됐다. 게다가 5년 뒤 시흥군의 서부지역이 오늘날 안산시로 독립하고, 동부지역의 과천면은 시로 승격되면서 행정구역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또 1989년에 시흥군 군포읍과 의왕군이 시로 승격하면서 시흥군의 소래읍, 군자면 수암면이 모여 오늘날 시흥시를 이룬 것이다. 한 때는 해체 직전까지 갔지만 서울과 경기 지자체의 어머니 역할을 한 시흥시는 인구 42만여명의 산업도시로 제 2의 중흥기를 맞고 있다. /김범수기자 faith@kyeongin.com

2015-10-06 김범수

[경인일보 창간70기획·신&구 통하다]최동호 시인 & 박영 소설가

신(박영) : 우리를 ‘희망이 없는 세대’라고 하지만 치열한 경쟁구도에 내몰려 공허함과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는 ‘가엾은 세대’다구(최동호) : 젊은이들이라면 물질보다 인간의 자긍심 우선해야… 기성세대가 갖지 못한 순수함과 당당한 자신감으로 밀어붙여라신 :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시대… 때론 영화라는 장르가 부러워구 : 시대적 흐름 떠밀려가면 안돼… 문학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줘#‘같이 걸을까’ 어색한 첫 만남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린 10월의 첫날. 수원 행궁동 공방거리의 한 찻집 앞에서 시인 최동호(68) 교수와 박영(32·여) 작가가 만났다. 최 교수는 지난 ‘1979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꽃, 그 시적 형상의 구조와 미학’으로 데뷔한 이후 교단과 평단에서 뚜렷한 궤적을 남긴 문단의 원로이다. 박 작가는 ‘2015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서 ‘아저씨, 안녕’으로 당선된 신예 소설가다. 짧은 인사 후 두 사람은 사진 촬영을 위해 찻집 근처를 함께 걸었다.“그냥 걸으면 되나요?” 어색했다. 둘은 살아온 세대가 다르고, 성별도 다르다. 35년의 세월차는 고스란히 두 어깨 사이의 거리감으로 드러났다. 좀 더 가까이 붙어달라는 사진기자의 요청에 몸을 움직여보지만, 몇 걸음 걷다 보면 이내 둘 사이는 다시금 원래대로 떨어져 있었다. 비가 내려 공기가 깨끗이 씻겨진 탓일까. 대화 중간 발생하는 침묵의 순간은 더욱 또렷하고 길게 느껴졌다.하지만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었으니, 바로 ‘문학’이었다. 한 사람은 앞서 수십 년 간 그 길을 걸어왔고 한 사람은 이제 막 발걸음을 뗐다는 차이일 뿐, 둘은 방향점이 같았다. 문학이라는 매개로 어색함의 벽을 허물기 시작한 이들, 과연 이날 ‘신구(新久)’는 ‘통(通)’할 수 있을까.#두 시간으로 압축된 대선배의 70년 인생, 공감을 이끌다“여기 앉는 게 어떤가. 이 자리가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주인공이 앉았던 곳이라는 구만… (허허허)”최 교수는 수원을 배경으로 촬영된 최신영화를 언급하며, 이날 만남의 장소를 정한 배경을 설명했다. 두 사람은 가벼운 대화로 어색함을 조금씩 풀고는, 이내 진중한 대화를 시작했다. 최 교수는 현시대를 급박한 변화의 시대로 진단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역사적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혁신과 발전을 거듭해왔지만, 너무 짧은 시간에 이뤄졌다는 점이 세대 간 이견과 갈등을 낳은 배경이 됐다”며 “디지털 이전과 이후로 나뉠 만큼 활자문화와 디지털문화의 세대감과 괴리감은 실로 크고, 변화의 속도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보니 소통할 여유가 전혀 없다”고 했다. 박도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소통은 고사하고 대화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 같다. 가령 애인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며 공감했다.시대적 배경이 문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뜻을 같이했다. 최 교수는 “현대인들은 길게 얘기하는 것 자체에 피로감을 느끼다 보니, 문학에서도 소설 장르가 약화되고 시도 짧아지는 추세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스마트폰 한 화면에 들어오는 짧은 분량이라야 그나마 읽히는 시대에 와 있다”고 했다. 이에 박 작가는 “빠른 변화 속에서 활자가 최소화되고 눈으로 보는 것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대다 보니, 때론 영화라는 장르가 부러울 때가 있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대선배에게 조언을 구했고, 최 교수는 “시대적 흐름을 꺾을 순 없다. 하지만 활자문화는 사유하도록 하는 근원적인 힘이 있다. 그 힘을 믿고 변화에 편승하거나 떠밀려가지 말고 정도를 걸어야 할 것”이라고 응답했다.최 교수는 문학예술이 갖는 힘을 강조했다. 그는 “문학은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세대 간 단절을 넘어 원활한 소통 속에 문학이 지속성을 갖고, 나아가 문화가 융성해질 때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에 박 작가는 소통의 어려움에 대해 자신의 세대를 대표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이 시대 젊은이들을 향해 흔히 ‘희망이 없는 세대’라는 말을 많이 한다. 교수님 세대가 보시기엔 마냥 편하게만 살아온 나태한 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치열한 경쟁 구도에 내몰린 우리 세대에게도 고충은 있다. 무겁고 깊은 건 기피하고,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니 어느 순간 공허함과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는 ‘가엾은 세대’가 바로 우리 세대”라고 털어놨다.후배 세대의 고민에 대한 선배의 대답은 그래도 젊은이들이 희망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 교수는 “젊은이들이라면 ‘물질’보다 인간의 ‘자긍심’을 우선시했으면 한다. 기성세대가 갖지 못한 순수함과 당당한 자신감으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했다. 또 “선배 세대는 젊은 세대가 좀 더 마음을 열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귀를 열고 공통분모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소통의 출발점이라고 본다”고 강조했다.신예 작가를 향한 격려와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일부 신세대 작가들을 보면 문학에 대한 확신보다는 ‘빨리 뜨고 싶은’ 마음이 많다는 느낌을 받아 안타깝다. 자고 일어나니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졌다는 말은 맞지 않다. 진지하게 근원적인 문제를 파헤치고, 탐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단거리가 아닌 장거리 주자처럼 말이다”고 했다.#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이야기대담은 끝났다. 하지만 모름지기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기 위해선 밥을 같이 먹어야 하는 법. 둘은 자연스레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모처럼 내린 가을비가 두 문학인의 감수성을 자극한 탓일까. 술잔도 곁들여졌다.“교수님, 실은 저 오늘 한 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렸습니다. 어젠 밤새 한숨도 못 잤어요…” 문학계 대선배와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 신예 작가에겐 엄청난 부담이었을 터. 부담은 컸지만, 박 작가는 너무나 뜻깊은 자리였다며 재차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그녀는 “최 교수님도 저도 모두 10대 때부터 이 길을 꿈꿨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험난한 이 길에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앞서 이 길을 걸어가신 분께 조언을 들으니 굉장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둘은 이미 소통할 준비가 갖춰진 사람들이었다. ‘희수(稀壽)’를 앞둔 나이지만, 최 교수는 ‘사도’, ‘베테랑’ 등 최근 개봉영화들을 빠짐없이 보며 감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를 화두로 신세대와 대화를 풀어냈고, 문학인 특유의 시선으로 사회 현상에 비춰보며 자신의 견해를 펼치기도 했다. 박 작가는 활자가 힘을 잃어가는 시대를 사는 젊은이지만, 그래도 ‘활자의 힘’을 믿는다는 아날로그적(?) 시각으로 디지털 시대를 향한 공감의 시선을 이끌어냈다. 이 같은 둘의 노력은 이날 35년 세월차를 극복하는 소통의 징검다리가 됐다. 최 교수는 35년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 박 작가를 격려하고 또 격려했다. "문학은 출발점도 종착점도 외로움이라네. 끊임없이 외로운 길을 걷게 되겠지만, 그래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계속 정진하고 건승하길 비네. 자, 건배!"/황성규기자 homerun@kyeongin.com■최동호 시인▲ 1948년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학 학사▲ 고려대 대학원 국문학 석사·현대문학 박사▲ 전 고려대학교 대학원장▲ 현 고려대 명예교수▲ 경남대 석좌교수▲ 시사랑문화인협의회·황순원학회 회장■박영 소설가▲ 1983년 출생▲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 학사▲ 2015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최동호 시인과 박영 소설가가 수원 행궁동 공방거리에서 만나 35년의 세월차를 극복하고 문학예술과 세대 간의 소통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

2015-10-06 황성규

[경인일보 창간70기획·신&구 통하다]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이기현 길병원 인턴

신(이기현) : 영상의학도 다른 진료과목과 같이 치료에 있어 중요한 분야…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첨단의료분야 개척하는 게 목표구(이길여) : 나는 청진기를 항상 품고 다녔어… 혹시라도 차가운 청진기에 환자들이 놀랄까봐 가슴속에 넣고 온기를 돌게했지신 : 의사를 택한 일, 숙명으로 생각… 시대를 관통한 사명감 변함없어 구 : 생각만 하지말고 당장 실천을… 병원이 꿈을 펼칠수 있는 무대‘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해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수태된 때로부터 지고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의사라면 평생을 마음속에 새겨야 하는 이 문구. 바로 전 세계 의과대학 학생들이 의사로서 첫발을 내디딜 때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문 중 일부다. 사람을 살리고 치료하는 의술도 곧 인술(仁術)이란 말의 의미가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오롯이 담겨 있다. 1958년 인천의 작은 산부인과를 시작으로 지금은 전국에서 내로라 하는 의료기관인 가천대 길병원을 이끌고 있는 가천길재단 이길여 회장. 평생을 의사로서 살아온 이 회장의 인생 또한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지난 5일 오후 이 회장의 집무실이 있는 가천대 길병원 본관 11층. 소화기내과 병동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이 회장의 집무실은 거대 병원을 이끌고 있는 수장의 공간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할 만큼 작아 보였다. 이날 이길여 회장의 집무실을 찾은 이는 이제 막 의사 생활을 시작한 길병원 인턴 이기현(30)씨다. 서울대를 졸업한 그는 지난 2011년 가천대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해 의사로서 꿈을 펼치고 있다.“내가 의사로서 후배에게 해줄 말이 너무 많지.” 하얀색 가운을 입고 소파에 앉은 이 회장은 손주뻘 되는 새내기 의사를 바라보며 지긋이 미소를 지었다.이길여 회장이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인턴 생활을 하던 때가 1964년이다. 이제 막 의사 생활을 시작한 이기현 씨와 50년 이 넘는 세월의 간극을 뒤로하고 마주 앉은 그들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의사로서 본연의 자세, 사람을 살리고 고쳐야 한다는 의사로서의 ‘숙명’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의사는 바뀌지 않는다“환자를 돌보는 의사의 마음은 시대와 공간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진리야 진리.” 이길여 회장이 새내기 의사에게 건넨 첫 마디는 화려한 의술이나 능력이 아닌 바로 의사로서 가져야 할 마음 자세였다. 의사의 경력과 나이를 불문하고 환자를 내 몸 처 럼 돌보고 아낄 줄 아는 자세, 정성을 다해 환자를 대하는 마음이야 말로 구세대, 신세대 의사를 가리지 않고 시대를 관통하는 의사의 숙명이라고 이 회장은 말한다. 이런 이길여 회장의 지론이 담겨 있는 물건이 청진기 이다. 이 회장은 매년 의사로 첫발을 내딛는 학생들에게 청진기를 선물한다. “환자를 가슴으로 대하는 의사가 돼야 한다”는 당부가 청진기 속에 담긴 의미다.“내가 말이야 이 청진기를 항상 가슴 속에 품고 다녔어, 혹시라도 차가운 청진기에 환자들이 놀랄까봐 가슴속에 넣고 다니며 온기를 돌게 했지.” 이 회장은 환자의 입장에서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정신이야 말로 의사로서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이라고 말했다.의사 대선배인 이길여 회장의 당부를 듣고 있던 새내기 의사 이기현 씨도 “지금은 힘들고 배워야 할 것도 많지만 결국 의사란 직업을 택한 이상 회장님의 말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같은 길을 가겠다”며 “결국 시대를 관통하는 의사로서의 사명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네 꿈을 펼쳐라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국내 의료 환경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인천에도 변변한 병원 하나 없어 환자들은 자신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도 모른 채 의사 한번 보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이길여 회장은 회상했다.“지금은 좋아진 거지. 내가 한창 의사 생활을 할 때만 하더라도 병원 한번 가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았어. 죽어가는 자기 부인을 지게에 지고 와 의사 진찰 한번 받아 보고 죽게 하겠다는 사람의 심정을 누가 알겠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이길여 회장은 고국의 이런 열악한 의료 환경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서 더 나은 조건에 의사 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인천으로 돌아와 선진 의료를 펼치며 작은 산부인과를 대형 병원으로 성장시켜 나갔다.현재 가천대 길병원은 병상 수, 환자 수 대비 국내 ‘Big 5’로 성장했다. 지난해에는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과 나란히 국내 대표 연구중심병원으로 선정되는 쾌거도 이뤘다. 암, 심뇌혈관 질환, 응급의료기관, 혈액투석 적정성 평가에서 모두 최우수 등급을 받아 세계적인 의료기관으로 도약할 기틀을 다졌다. ‘사람을 살리겠다’,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을 만들겠다’는 의사로서 이길여 회장의 굳은 의지와 신념이 지금의 길병원을 탄생 시킨 것이다.인턴 과정을 밟고 있는 이기현 씨의 꿈은 영상의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인턴 과정을 마친 이들은 보통 자신의 전공 분야를 찾아 내과나 정형외과, 외과 등 환자를 직접 치료하는 분야로 진출하지만 그는 CT, MRI 등을 분석하는 영상의학과로 자신의 진로를 택했다.그는 “여타 다른 진료 과목과 같이 영상의학도 사람을 살리고 치료하는 데 있어 중요한 분야”라며 “더 나은 의료 기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첨단 의료 분야를 개척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이 씨가 의사로서 자신의 포부를 이야기 하자 이길여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 좋아. 생각만 하지 말고 지금 당장 실천해 나머지는 병원이 다 알아서 해 줄거야. 길병원이 너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무대다”라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인재가 희망이고 자산이다. 그들이 이웃과 세상을 위해 불 환히 밝히면, 나의 꿈은 완성하리라.’ 이길여 회장의 자서전인 ‘아름다운 바람개비’에 나온 한 대목이다.평생을 우리나라 의료 발전에 매진하며 자신의 꿈을 펼쳐왔던 이길여 회장, 또 그 꿈을 이어받아 의사로서 숙명을 걷게 될 새내기 의사 이기현 씨. 이들이 걷고 있는 의사의 길과 꿈은 나이와 경력에 상관없이 어딘가 닮아 있었다.■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전북 군산 출생▲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니혼대학교 대학원 의학 박사▲ 가천대 총장▲ 가천대 길병원 이사장 ■이기현 길병원 인턴▲ 경북 포항 출생▲ 포항고 졸업▲ 서울대 바이오소재 공학과 졸업▲ 가천대 의학전문대학원 졸업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amp;amp;quot;환자를 돌보는 의사의 마음은 시대와 공간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진리 라며 의사로서 가져야 할 마음 자세에 대해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과 이기현 길병원 새내기 의사가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가천대 길병원 본관 이 회장 집무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임순석기자

2015-10-06 김명호

[경인일보 창간70기획·신&구 통하다]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 & 김지환 경기도의원

신(김지환) : 신당창당 문제에 대해 원로들이 나서서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에 조언 해야하는 것 아닌가구(이상수) : 요즘 정치는 신의가 없어 이해관계 따라 움직여… 지역 뛰어넘어 ‘개혁정당’으로 가야하는 데 아닌 것 같아 아쉬워신 : 소신과 당론사이에 괴리 생겨…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지 고민구 : 올바른 결정위한 판단력 중요… 민원 접할땐 가슴으로 들어야# 만남정치분야 ‘신구’ 대담자는 이상수(68) 전 노동부 장관과 김지환(35·새정치·성남8) 경기도의원이다. 이 전 장관은 광주지방법원 판사와 3선 의원, 노동부 장관을 거쳐 현재 법무법인 우성의 대표변호사를 맡고 있다. 지난 2009년 10월 12일 한 언론사에 실린 변호사 개업인사 광고를 보면, ‘인권과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법조인이 되겠다’는 문안이 눈에 띈다. 실제 이 전 장관은 정계 입문(1988년 13대 총선) 전에 부천경찰서 권인숙 양 성고문사건, 대우옥포조선소 근로자 사망사건의 변론을 맡는 등 인권변호사로 맹활약했었다.자신의 정치 이력을 ‘행운’이라고 겸손하게 소개하는 이 전 장관은 핵심 당직을 두루 거쳤다. 대변인을 비롯해 원내총무, 사무총장 등이 대표적이다. 16대 대선을 앞두고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당시 후보)의 대선 자금을 모으고 집행하는 총무본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당의 한 중심에 서지 않고서는 짊어질 수 없는 무게다. 그는 현재의 권력구조를 개선하는 헌법개정 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이를 통해 ‘올 오아 나씽 (All or Nothing)’ 게임으로 대변되는 국내 정치를 변화시키는 데에 힘을 보태겠다는 계획이다.김지환 도의원은 제9대 경기도의회 의원 128명 중 최연소다. 의원 배지를 단지 4개월여만인 지난해 11월18일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주최한 ‘2014 매니페스토(지방선거부문) 약속대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을 정도로 열정적이다. 모처럼 가을비가 내린 지난 1일 서울시 서초동 법무법인 우성 사무실에서 이 둘이 만났다.# 정치원로에게 묻다김 의원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야권에서 일고 있는 신당 창당과 관련해 “원로들이 당(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에 조언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이에 대해 이 전 장관은 “요즘 지도부들이 원로들 조언을 잘 듣지 않는다(웃음)”며 “정치에 ‘신의’가 없어졌다.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게 요즘 정치다. 참 아쉽다. 하지만 (조언을) 표출할 기회가 있으면 할 것”이라고 했다. 다만 그는 “신당이 지역을 뛰어넘어 또 다른 ‘개혁정당’으로 가야 하는데 (특정)지역에 기반을 둔 정당 구조로 가는 것 같아 걱정”이라고 전했다.그는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공천에서 낙천한 경험이 있다. 당을 위해 치른 옥고인데 일명 ‘비리혐의자’로 둔갑돼 내쳐진 것이다.원로는 야당의 무기력함을 비판했다. 이 전 장관은 “정치 어젠다를 주도하고 세팅하지 못한다. 정작 중산층, 서민의 당이라고 하는 (새정치연합)당의 노동정책을 모르겠다”며 “당내 입지만 강화하려 하는 것 같다”고 쓴소리를 했다.김 의원은 이어 청년의 어려운 정치참여 문제를 주제로 이야기를 꺼냈다. 정치 신인인 청년의 경우 지지기반이 취약하고 상대적으로 유권자들에게 자신을 알릴 시간도 물리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의회로 진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이 전 장관은 “(의회정치에 사회 구성원 중 하나인 청년의 입장이 대변될 수 있도록) 비례대표에 청년 몫을 보장하고 경선 때 가점을 주는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며 “전략 공천을 할 때에도 청년후보를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이어 청년의 장점으로 “젊고 참신함을 무기로 열심히 하면 의정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고 소개했다.또 김 의원은 ‘소신’과 ‘당론’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지 물었다. 이 전 장관은 ‘최선’을 추구하지만 ‘차선’에 만족하는 정치의 속성을 해답으로 꺼냈다.그는 “상반된 이해관계의 당사자들끼리 대화, 타협 등을 통해 절충을 해나가는 게 바로 정치”라며 “정말 자기 입장이 옳다면 밀어붙이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명확한 확신을 갖고 열심히 설명하면 상대방을 감동 또는 설득시킬 수 있다”고 했다.관철시키지 못해도 자신의 입장을 결론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 프로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돼야 한다는 게 원로의 조언이다.#정치 후배에게 전하는 당부이 전 장관은 김 의원에게 정치인은 판단력과 열정,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정치는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다. 판단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민의 생명과 재산 등에 미친 결과가 판이해진다”면서 “어떻게 이끌 것인가, 어떤 비전을 제시할 것인가에 대한 그때그때마다의 판단이 필요한데 (최고의 결과를 위한) 판단력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정치인의 열정은 단순한 노력이 아닌 뜨거운 가슴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게 이 전 장관의 당부다. 유권자들로부터 민원사항을 들을 때도 머리(이성적)로 듣지 말고 가슴(정서적)으로 들으라는 게 까마득한 선배의 조언이다. 이밖에 책임감은 자기 일에 대한 성실함의 다른 표현이다.이 전 장관은 “‘운(運)이 좋다’할 때 쓰이는 운은 움직이다란 뜻”이라며 “운도 열심히 움직여야 온다는 의미다. 의안을 만들 때도 쉽게 하지 말고 누가 봐도 잘했구나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끈질기게 파야 한다”고 당부했다.대담을 마친 후 둘은 하나의 우산을 쓰고 서초동 길가를 잠시 거닐었다.이 전 장관의 좌우명은 ‘화이불류(和而不流)’로 알려져 있다. 사이 좋지만 함께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둘은 함께 흘러가지 못하지만 각자의 흐름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길 것이다. /김민욱기자 kmw@kyeongin.com■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 1946년 출생▲ 광주지방법원 판사▲ 제 13·15·16대 국회의원▲ 새천년민주당 원내총무, 사무총장▲ 제 22대 노동부 장관▲ 법무법인 우성 대표변호사■김지환 경기도의원▲ 1980년 출생▲ 삼환기업 프로젝트관리 전문가(미국 PM)▲ 제9대 경기도의회 의원▲ 한국매니페스토 실천본부 참여위원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이 김지환 경기도의원에게 “정치인의 열정은 단순한 노력이 아닌 뜨거운 가슴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조언을 하며 비가 내리는 서초동 거리를 거닐고 있다.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2015-10-06 김민욱

[경인일보 창간70기획 지금]대한민국 문화중심 경기·인천

쇼핑 등 획일적 관광코스 벗어나 한국 문화·생활방식 이해 ‘선호’경기 31개 시·군 특색있는 자연·역사 유산 즐겨찾기 명소로 주목인천, 교통 요지·한류 관문 “한·중 국제교류 거점 역할 톡톡히 해”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첫 번째로 하는 일은 장소를 정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장소에 무엇이 있는지를 찾는다. 국내 대표 여행지인 제주도에는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산일출봉이 있고, 여한 없이 걸을 수 있는 올레길이 있고, 가장 높이 솟은 한라산이 있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국적인 정취가 있다. 육지와 다른 풍경과 문화는 제주의 숨길 수 없는 매력이다. 경상도에는 남도의 빛, 부산의 활기가 있다. 전라도에는 가짓 수를 셀 수 없는 반찬과 육해공의 식재료가 사이좋게 모여있는 거대한 밥상이, 충청도에는 단양팔경을 비롯한 문화유산과 내륙의 여유가 방문객을 반긴다. 강원도의 산과 바다, 서울의 강남과 고궁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경기도에는 무엇이 있나. 경기도에 대해서는 조금 다르게 물어야 한다. 경기도에 없는 게 무엇인가?경기관광공사에 따르면 경기도의 국내외 관광객 수는 지난 2012년 1천500만여명에서 지난해 1천700만명으로 증가했다. 31개 시군마다 특색있는 자연, 문화를 뽐내는 경기도는 국내뿐 아니라 중국의 유커들을 비롯한 세계 여행자들에게 매력적인 장소로 주목받고 있다. 그 중 유커들의 경기 사랑은 유독 두드러진다. 스타를 쫓아 한국을 알게 된 그들은 이제 쇼핑과 획일적인 관광코스를 도는 데서 더 나아가 한국의 문화와 생활을 이해하는 방식의 관광을 선호한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여유롭고 심층적인 여행이 가능한 경기도를 찾는다.최근 ‘사도’,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등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되면서 더욱 관심을 끌고 있는 수원 화성 행궁과 행궁동 일대는 유커들의 필수 방문지가 된 지 오래다. 경기 북부에는 역사와 자연환경, 문화 등을 복합적으로 탐방할 수 있는 DMZ가 있다. 이 밖에 경기도가 가진 다양한 자연, 문화 유산들은 도심과 인접한 인프라의 이점과 맞물려 여행자들의 발길을 붙든다.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도내 방문지도 지난 2009년에는 에버랜드, 수원화성, 민속촌, 임진각 등에 치우쳐 있었지만, 지난해에는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과 쇼핑몰, 자라섬과 뿌띠프랑스가 있는 가평, 킨텍스에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는 일산 등으로 다양화됐다.인천은 경제 및 문화 교류 거점으로서의 복합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항만·항공 요충지로 국내 무역의 큰 축을 담당하는 한편 2009년 ‘인천 방문의 해’ 이후 매년 열리는 ‘인천 한류 관광 콘서트’를 시작으로 인천과 중국, 한국과 중국의 문화·교류 행사가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지난 3일 시작된 ‘제14회 인천-중국의 날 문화축제’에는 어느 때보다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올 상반기 메르스로 침체됐던 기운을 몰아내고 한·중 수교 23주년과 인천의 대중국 친화도시 선포를 기념했다. 인천과 중국의 교류에는 민과 관이 따로 없고,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져 활기차다.한류가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인천과 유커들이 즐겨찾는 경기도가 지닌 매력을 소개한다.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사진/경인일보DB·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한국 전통의 멋을 느낄 수 있는 국악 공연안보 관광지로 인기를 끌고 있는 파주 임진각 내 증기기관차.K-pop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한류페스티벌’ 현장.

2015-10-06 민정주

[경인일보 창간70기획 지금]지표로 본 경기 경제·1

道-전국 경제 성장률, 상관계수 0.96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지역내총생산, 서울 근접한 314조… 3위 경남보다 200조 많아최근 ‘2년 연속 수출 1천억달러’ 우리나라 전체수출 20% 육박경기도는 대한민국의 중심이자 한국 경제 성장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왔다. 경기도 산업의 비약적인 성장에 따라 도는 전국 최고 수준의 경제성장을 거듭했고, 현재는 전국 지역총생산의 20%가량을 담당하고 있다. 또 부가가치생산 및 고용 창출 측면에서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각각 전국 1위와 2위의 위치에 올라와 있다.우리나라 전체의 경제 성장률과 경기도의 성장률이 강한 상관관계를 보이는 점도 경기도가 대한민국 경제의 중심이라는 점을 방증한다. 경기도와 전국의 경제성장률 간의 상관계수는0.96으로 매우 높고(+1에 가까울수록 높은 양적 상관관계를 띤다), 도의 전국 성장 기여도는 32.4%에 달한다.#GRDP로 본 경기 경제경기도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314조원으로, 서울(319조원) 다음으로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우리나라 총생산 규모의 자그마치 21.9%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경기도를 바짝 뒤쫓는 경남(100조원)보다 무려 200조원 이상의 규모 차이를 보인다.경기도의 GRDP는 전국 대비 비중도 지난 1985년 13.8%에서 1995년 17.4%, 2005년 19.5%, 2012년 19.7%로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GRDP 성장률도 2000년 이후 연평균 6.5%를 기록해 전국 평균인 4.2%를 크게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경기도의 인구수도 전국 1위 수준을 견고히 지키고 있다. 지난해 통계청이 집계한 경기도 인구는 1천235만7천830명으로, 2위인 서울(1천10만3천233명)보다도 225만명가량 앞서는 등 압도적으로 많은 수치를 기록 중이다.이밖에 경기도의 사업체수는 2013년 기준 77만3천216개로 전국의 21%, 종사자수는 425만9천215명으로 전국의 22.2%를 차지하고 있다.#수출 1위, 경기도경기도는 최근 2년 연속 수출 1천억달러를 달성했다.한국무역협회 경기지역본부의 ‘2014 경기도 수출입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경기지역 수출은 1천117억달러를 기록했다. 전년도에 총 1천20억달러를 기록하면서 처음으로 수출 1천억달러를 돌파한 이후, 2년 연속 수출 1천억달러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도는 또한 2년 연속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기준 수출규모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전국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지난 2013년 18.2%에서 19.5%까지 증가하는 등 도내 수출이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1/5에 육박하는 수준까지 성장하는 저력을 보였다.경기도의 수출이 이처럼 선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최대 수출품목인 반도체가 수출 호조세를 띠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반도체는 전년보다 41%의 수출증가율을 보였고, 평판디스플레이(14.9%), 무선통신기기(9.3%) 등 주요 IT제품 수출이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전체적인 수출증가세를 견인한 것으로 나타났다.특히 반도체의 경우 윈도우XP 서비스 종료 등에 따른 PC 교체 수요와 주요 스마트폰 제품의 호조세, 글로벌 반도체 생산 과점체제 안정화 등이 맞물려 유례없는 호황기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IT제품 이외에도 자동차(8.7%)와 자동차부품(8.6%) 수출도 전 세계적인 자동차 수요회복에 힘입어 견고한 실적을 기록했다.국가별로는 엔화약세 영향으로 일본 수출은 증가율 0.6%의 약보합세에 그쳤으나 중국(16.4%), 미국(12.1%), 베트남(8.7%) 등 주요국 수출이 전년보다 증가하면서 전반적으로 호조세를 보였다. 도내 총 수출의 3분의 1 이상(비중 33.9%)을 차지한 중국 수출은 반도체(전년동기대비 64.5%), 무선통신기기(12.1%) 등 IT제품을 중심으로 수출이 크게 증가했으며, 반도체제조용장비(48.5%) 등 일부 자본재 및 자동차(33.3%) 수출도 크게 증가했다. 미국 수출의 경우 주택 및 노동시장을 중심으로 한 경기회복세와 소비심리 개선 등으로 자동차(전년동기대비 25.7%), 반도체(12.2%), 반도체제조용장비(13.9%) 수출이 크게 늘었으며, 건설광산기계(20.4%) 등 일부 자본재 수출도 호조세를 기록했다. /신선미기자 ssunmi@kyeongin.com경기도의 수출이 선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최대 수출품목인 반도체가 수출 호조세를 띠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사진은 삼성전자가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생산라인 건설에 착수한 평택 고덕산업단지. /연합뉴스

2015-10-06 신선미

[경인일보 창간70기획 다음]접경지역 남북교류

접경지 거주민 84% 경기·인천 분포 군사도발·대치상황마다 불안‘평화 정착’ 희망 속 협력기금 조성… 대부분 인도적 사업에 쏟아2010년 5·24조치후 대북지원 막혔지만 8월 고위급 합의 새국면2000년 6·15 남북 공동 선언을 전후로 지방자치단체의 남북교류사업이 본격화됐다. 경기도는 2002년 양강도에 경운기 200대, 지붕개량재 1만9천200장 등 10억원 상당을 지원하면서 남북 교류의 첫 발을 내디뎠다. 1999년 이후 매년 감귤을 북쪽에 보내는 제주도, 같은 접경지역으로 2000년 못자리용 비닐 지원사업을 시작한 강원도에 이어 3번째로 경기도는 대북 사업에 나섰다. 인천시는 2005년 도로 포장에 쓰는 피치(Pitch) 1만t, 건물 도색용 페인트 124t 등 30억원 상당의 건설 자재를 북측에 전달하면서 남북 교류 사업을 시작했다. 인천은 2005년 아시아 육상 경기 선수권 대회 때 북한 선수단 참가를 계기로 북한과 교류의 물꼬를 텄다.경기도와 인천시는 지난 10여년 간 남북 교류 협력 기금을 조성해 남북 교류 사업을 추진했고 각각 235억원, 114억원의 예산을 집행했고 대부분 인도적 사업에 투입됐다. 지자체 남북 교류 사업은 지난 2010년 5·24 조치 후 중단되다시피 했다. 정부의 대북 조치에 따라 지자체의 대북 지원 통로 역시 막혀버렸다. 경기도와 인천의 남북교류 전담 부서는 다른 지자체와 마찬가지로 수년간 ‘개점 휴업’ 상태였다. 하지만 지난 8월 남북 고위당국자 합의 후 새 국면을 맞았다. 경기도와 인천은 강원도와 함께 접경 지역 지자체에 속한다. 비무장지대, 서해 북방한계선과 맞닿은 민통선 이남 25㎞ 이내의 지역으로 경기도 동두천시, 고양시, 파주시, 김포시, 양주시, 포천시, 연천군과 인천시 강화군, 옹진군 등이 접경 지역이다. 국내 접경 지역 면적의 절반가량인 4천609㎢, 접경지 거주민의 84%인 223만9천명이 경기·인천에 퍼져 있다. 경기·인천의 접경지역은 ‘북한의 도발’로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등 ‘분단 체감도’가 다른 곳보다 높은 곳이기도 하다. 최근 북한군의 포격 도발로 불안에 떨었던 연천군, 지난 2010년 북한군의 포 사격으로 군인과 민간인 4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부상한 연평도 등 크고 작은 북한의 군사적 도발과 남북 대치 상황이 접경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접경 지역 지자체가 남북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궁극적 이유는 ‘평화 체제 정착’에 있다. 남과 북의 통일이 곧 이뤄질 것이란 전제 아래 중장기적 전망 속에서 지자체가 교류의 끈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자체는 이 과정에서 북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등 통일 이후 역량을 강화할 수 있다. 실제 독일 통일 이전 동·서독 지자체의 경제·인력·행정 교류가 통일 이후 사회 통합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또 접경 지역은 오랫 동안 군사 규제 등에 묶여 있어 주민들이 남북 교류 등 대북 사업을 통한 개발에 관심이 높은 편이다. 경기도와 강원도 등 내륙 접경 지역의 남북 교류가 활성화됐던 시기는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남북 도로·철도 연결 등 이른바 ‘3대 경제협력 사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와 겹친다. 정부 차원의 경제·관광·도로 인프라 구축 사업과 함께 지자체의 남북 민간 교류도 확대되는 경향을 보였다.경기도, 인천 등 접경 지역 지자체의 대북 교류 활성화를 위해 보완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무엇보다 남과 북이 오랜 기간 지속할 수 있는 협력 모델 구축이 필요하다. 남과 북 모두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교류 사업을 발굴해야 한다. 그 대표적 사례로 지자체 남북 교류의 효시인 제주도의 감귤 지원 사업을 꼽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제주도는 감귤 가격을 안정화시키면서 북한 주민에게 고품질 감귤을 보내줄 수 있었다. 경기도는 남북 접경지역 주민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말라리아 공동방역을 2008~2011년 진행했지만, 2012년 이후 중단됐다.또 다른 지자체의 남북 교류와 중복되는 사업의 내용을 조정해야 한다. 체육행사 개최, 영유아 지원, 농자재 지원 등의 사업처럼 여러 지자체에서 진행 중인 교류 사업의 경우 특화된 방안을 수립해 추진하는 등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수익 모델을 창출하는 것도 필요하다. 지자체가 북측에 일방적으로 물품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서, 개성공단처럼 남북의 교류 당사자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 지속가능한 사업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이밖에 전시성·일회성 교류 사업 지양, 남북교류 담당 공무원 전문성 강화 등이 풀어야 할 과제다. 경기연구원 이상대 선임연구위원은 “남북의 접경 지역 지자체 등이 참여하는 (가칭)‘접경지역 관리위원회’를 만들어 사회적 통합을 시도해야 한다”며 “이를 통해 조금이나마 접경지역 주민들의 생활이 개선되고 교류가 증진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통합을 조금씩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명래·박경호·권준우기자 problema@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5-10-06 김명래·박경호·권준우

[경인일보 창간70기획 그때]개항서 국제도시까지 ‘인천항 70년’·1

강화도 조약으로 첫 개항… 1918년 동양 최대 ‘2중갑문식 선거’ 완공해방후 군사항만으로 명맥 잇다 국내 첫 컨테이너 전용부두 새단장2013년 연간 200만 TEU 돌파… 8년여 공사 ‘인천신항’ 시대 문열려인천항은 역사적으로 서구 문화를 처음 받아들인 개항지이자, 국가의 경제 성장을 주도했던 항만이다. 인천항은 1883년 1월, 강화도 조약에 의해 부산항과 원산항 등에 이어 3번째로 개항했다. 초기의 인천항은 제물포항이 개항하면서 항만으로서 첫 기능을 시작했다.이어 1883년 6월 수출입화물에 대한 관세 사무행정을 담당할 해관이 설치됐고, 1903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 등대도 세워졌다.개항 후 빠른 속도로 성장한 인천항은 근현대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그러나 인천항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해방 후 130만t에 달하던 하역능력은 거의 없어진 채 전쟁물자를 보급하는 군사항만으로 간신히 명맥만 잇는다. 인천항은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직후부터 본격적인 개보수 작업에 들어가, 1년여 만에 90만t 수준의 하역능력을 회복했다. 이 시기 인천은 일제강점기에 형성됐던 공장과 신설된 공장 등으로 인해 공업도시로 변모했고, 인천항도 산업원자재 수입항으로서의 새로운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정부도 1955년부터 1959년까지 5개년 계획을 세우고, 한국전쟁으로 파괴되거나 방치된 인천항 등 항만시설에 대한 본격적인 복구를 시작한다. 갑문에서 신항까지,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하는 인천항의 자취를 되돌아본다.# 갑문인천항은 국내 항구 가운데 자연적 입지조건으로는 가장 불리한 항구였다.조석간만 차는 최대 10m에 달했으며, 썰물 때는 선박이 부두에 접안을 할 수 없는 탓에 화물선이 부두가 아닌 월미도 남쪽 수로에 정박한 다음 작은 배를 이용해 하역작업을 했다.아울러 조석간만의 영향으로 토사가 해수면에 계속 쌓이면서 준설 공사를 하더라도 준설지역에 토사가 다시 쌓이는 상황이 벌어졌다.이에 1918년 조석간만 차에 관계없이 선박이 상시 입출항할 수 있는 동양 최대 규모의 ‘2중 갑문식 선거’가 완공돼, 해수의 높이와 상관없이 하역 작업이 가능해졌다.이 때부터 수도권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인천항에 선박이 몰리고, 물동량이 폭증하게 돼 항만시설의 확장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진다.#인천항 내항인천항 갑문은 조석간만 차에 관계 없이 화물을 하역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이와 맞물려 경인공업지역의 원자재와 소비재 물동량이 증가했고, 인천항은 최대 5만t급 대형선박들이 상시 입출항하며 하역이 가능해진 항만으로 변모한다.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부두도 이 때 조성된다. 1974년 내항 4부두에 (주)한진과 대한통운(주)의 민간자본이 투입돼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신설된 것이다. 이로써 인천항 내항은 완전 폐쇄형 항만으로 형태를 갖추게 된다.수년 간 국가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내항은 최근 대형화된 선박과 시민들의 요구 등에 따라 내항 1·8부두를 시작으로 항만재개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인천항 남항, 북항인천항은 조석간만의 차가 큰 지리적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갑문 형태로 운영되는 탓에 선박의 체선율이 높고, 항비가 다른 항만에 비해 비싸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 대중국 교역량이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인천항은 타 항만과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인천항 갑문 바깥에 외항 개발을 추진한다.인천항의 외항 시대는 인천남항의 개발로 시작한다. 세계 최대 컨테이너 터미널 운영사인 싱가포르항만공사(PSA)는 2004년 인천남항에 인천컨테이너터미널(ICT)을 개장하고, 인천의 향토 기업 (주)선광은 2005년 선광인천컨테이너터미널(SICT)의 문을 열었다. 이어 주식회사 E1이 2009년 E1컨테이너터미널을 개장하면서 인천항 남항은 컨테이너 물동량 증가세를 이끌었다. 그 결과 2013년 12월 인천항은 처음으로 연간 컨테이너 처리 물동량 200만TEU를 넘기게 된다.인천북항은 인천항의 만성적인 체선·체화, 공해문제, 교통체증의 해소 등을 위해 개발 논의가 시작됐다. 2003년 3월 철재부두와 7월 다목적부두의 착공을 시작으로 인천북항의 개발은 본격화됐고, 2012년 동부인천항만부두의 개장을 끝으로 9개 부두 17개 선석의 북항개발이 완료됐다.#인천신항 시대인천신항은 국내의 왜곡된 물류 현상의 대안으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다.대형선사들이 중국으로 세계 물류 기지를 옮기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의 항만정책은 부산과 광양 중심의 투 포트(Two Port)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수도권에서 발생하는 화물들이 육상 운송료를 추가하면서 인천항이 아닌 부산이나 광양에서 수출입되는 물류 왜곡 현상이 벌어졌다. 인천신항은 이 같은 물류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 계획됐으며 2007년 12월 인천신항 개발 사업은 첫 삽을 뜬다.8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지난 6월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이 처음으로 개장하면서 본격적으로 그 빛을 내기 시작했다.인천신항이 개장과 동시에 인천과 미주 항로를 연결하는 글로벌 선사 협의체인 G6의 대형 선박도 인천항에 기항한다.오는 2016년 1월께 한진인천컨테이너터미널까지 개장하면 인천항은 남항의 컨테이너 부두와 함께 환황해권 컨테이너 거점 항만으로 도약할 전망이다. /신상윤기자 ssy@kyeongin.com인천신항 I-1단계 B터미널의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이 지난 6월 1일 개장과 동시에 상업 운영을 시작했다. 인천신항 I-1 단계 사업은 2조5천억원(정부 1조1천417억원, IPA 1조3천583억원)을 투입해 각 부두 길이가 800m인 A, B 2개의 컨테이너 터미널(전체 1.6㎞)을 조성하는 사업으로, 이중 B터미널인 SNCT가 지난 6월 개장했다. 내년 상반기 A터미널인 한진인천컨테이너터미널이 개장할 예정이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개항 초기 제물포항 모습.1911년 시작된 인천항 제1도크 공사현장.인천 내항. /인천항만공사 제공

2015-10-06 신상윤

[경인일보 창간70기획 그때]경인일보 특종의 재발견

1994년 굴업도 핵폐기물처분장 지역여론 보도로 수상 물꼬2012년 ‘세계의 전장 인천…’ 경인지역 최초로 ‘한국신문상’GPS 전파교란·CU편의점주 자살보도 3년연속 수상 진기록핵폐기장 후보지였던 9명(5가구)이 살던 인천 굴업도에서도…, 30대 편의점주가 목숨을 끊은 사건의 현장에서도 진실을 향한 경인일보의 펜촉은 날카롭고 예리했다. 창간 70주년을 맞아 이미 대중에게도 많이 알려진 경인일보 특종의 역사를 살펴본다. 지난 1990년 한국기자협회는 ‘이달의 기자상’을 제정해 시상했다. 공식적으로 ‘특종’을 평가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경인일보는 지난 1994년 12월 인천 굴업도 핵폐기물 처분장과 지역 여론 보도를 시작으로 이달의 기자상과 한국기자상 수상의 물꼬를 텄다. 이보다 앞서 같은 해 9월 경인일보는 한국 언론사에 남을 특종을 보도했다. ‘인천 북구청 세금 횡령사건’으로, 이듬해인 1995년 전국을 강타했던 세무비리 수사의 서막이었다. 경인일보는 인천 북구청 세무직 말단 공무원의 비리를 파헤쳐 고위직까지 연결된 뿌리 깊은 세무 공무원들의 비리를 폭로해 1995년 처음으로 한국기자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지난 1999년 변비 등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양잿물이 들어간 공업용 세정제를 관장액으로 주입 받은 환자 5명이 한꺼번에 숨진 사고는 병원의 안일한 의약품 관리가 빚어낸 인재(人災)였다. 이 사고 이후 관장액이 정식 의약품목으로 뒤늦게 지정된 것은 5명의 희생으로 이뤄낸 값비싼 대가였다.이와 함께 지난 1996년 10월부터 6개월에 걸쳐 보도하며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운 ‘갯벌을 살리자’(1997년 한국기자상), 민족적인 울분이 표출되는 도화선이 됐던 2002년 6월의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2002년 한국기자상), 2006년 여름 정가(政街)에 파문을 일으켰던 ‘한나라당 수해 골프’ 보도(2006년 8월 이달의 기자상) 등은 경인일보의 위상을 증명한 기사들이었다.특히 경인일보는 지난 2012년 ‘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 보도로 경기·인천지역 최초로 한국신문상을 받은 뒤 이듬해인 2013년 ‘북한 GPS 전파교란 공격 피해’ 보도에 이어 지난해 ‘용인 CU 편의점주 자살 및 CU 측 사망진단서 변조’ 단독·연속보도로 한국신문상 3년 연속 수상이라는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 당시 용인의 30대 CU 편의점주 자살을 연속 보도했던 경인일보는 대기업의 횡포와 불공정 관행의 실체를 파헤쳤을 뿐만 아니라 국회에서 관련 법을 개정하고 대기업의 일명 ‘갑질’ 관행을 고치게 하는 결실을 이끌어내는 등 언론으로서 공동체 의무를 다한 기사였다는 평을 받았다.이달의 기자상과 한국기자상 수상으로 증명되는 경인일보의 특종 행진은 현재 진행형이다. ‘정서적 학대 첫 유죄 판결 이후의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지난 4월 제294회 이달의 기자상을 받은 것까지, 경인일보는 총 54회의 이달의 기자상과 9회의 한국기자상을 받아 지역 일간지와 전국 일간지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경인일보는 또 1995년부터 2000년까지 5년 연속 한국기자상 수상, 2차례에 걸친 3개월 연속 이달의 기자상 수상, 4차례에 걸친 같은 달 이달의 기자상 2개 부문 동시 석권 등의 이례적인 기록을 경신하며 지금도 한국 언론사 새로운 기록을 써나가고 있다. /조윤영기자 jyy@kyeongin.com대한민국과 함께 걸어온 희로애락 70년 /경인일보 DB·연합뉴스CU편의점 운영자 사망사건과 관련 고개 숙이는 BGF리테일 경영진.(2013년 보도)2008년 지난 2004년부터 정부가 수백억원의 예산을 지원해 공공기관 등에 보급하고 있는 하이브리드자동차가 수원시 한 중고차 매매단지에 매물로 나와있다.(2008년 보도) /경인일보 DB

2015-10-06 조윤영

[경인일보 창간70기획 그때]경인일보 기사로 본 한국현대사(1960~1980년대)·1

71년 광주, 청계천서 쫓겨온 주민 5천명 배고픔·분노에 방화66년 영양실조로 사망·수십여명 사표 등 교사 박봉 ‘이슈화’머리카락 팔아 시아버지 회갑상 차린 며느리 이야기 ‘뭉클’신문은 사회상을 반영한다. 굵직한 사건뿐 아니라 사회 밑바닥의 세세한 흐름을 신문에서 읽을 수 있다. 대중일보를 읽으면 해방기 인천의 풍경과 미군의 모습이 생생하다. 혼란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벌이에만 골몰하던 ‘모리배’의 행태를 고발하는 것도 대중일보의 역할이었다. 압축 성장이 이뤄지던 1960~1980년대 경인일보가 기록한 기사들은 압축성장기 경기도·인천 사회사(社會史)의 사료가 되기에 충분하다.#‘인중·제고와 함께 그 이름 길이 빛나리…’1961년 9월 30일 2면 톱 기사는 인천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 길영희 교장의 정년 퇴임 소식을 전했다. ‘무감독 시험 운영’, ‘부정 입학, 정실 입학 불허’로 유명한, 존경받는 교육자였다. 길 교장은 “갈 때가 되면 가는 것이 인간”이라며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사양했다. 기사 속 사진의 길 교장은 ‘제물포고등학교 교장 길영희’라는 명찰을 부착하고 있는 모습이었다.#50년 전의 ‘세월호 사건’1963년 10월 11일 오후 2시40분. 흥안국민학교 학생, 교사, 학부형 137명이 탄 배가 남한강 한복판에서 뒤집어졌다. 여주 신륵사 소풍을 마치고 돌아오던 배의 전복 사고로 국민학생 37명을 포함한 49명이 익사했다. 정원을 초과해 배를 태운 게 화근이었다. 기사 속 오열하는 부모들의 모습을 읽으면 마음이 아프다. 경찰은 기관사와 인솔교사 등 5명을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긴급 구속했다.#머리카락을 잘라 시아버지 회갑상을 차렸다고?37년간 길러 온 머리카락을 판 돈으로 시아버지 회갑상을 차린 며느리의 이야기는 낯설다. 1966년 5월 29일치 기사는 “가족 몰래 자신의 머리칼을 4백원에 팔아 쇠고기 반근과 술 한 병을 사들고 와 쌀밥을 공양한 갸륵한 며느리” 남궁복순(37)씨의 사연을 소개했다. 막노동을 하는 남편의 하루벌이(40원)의 10배인 400원으로 이웃 노인들을 불러 시아버지 회갑잔치를 치렀다. 정작 이 며느리가 평생 쌀밥 한 끼 먹어보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은 양주군청 공무원은 남궁씨에게 쌀 한 말을 전달했다.#영양실조, 박봉에 시달린 교단1966년 8월 26일자 3면은 <‘굶주린 師道’ 지다>는 기사는 안타까움을 준다. 평택중앙국민학교 4학년 담임교사 권병길(46)씨가 체육대회 중 갑자기 쓰러져 숨졌는데, 원인이 영양실조였다. “직계 가족 9식구를 거느리고 빈곤한 생활을 해왔으며 박봉 생활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굶어서 출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권 교사의 갑작스런 죽음에 동료들은 무척 슬퍼했다. 같은 해 11월 10일자 3면 톱 기사 제목은 <배고파 못하겠다-박봉을 원망, 스스로 교직을 물러나>였다. 1966년 1~10월 인천시에서 사표를 낸 교사는 27명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박봉으로 빨리 직업을 바꾸지 않으면 자녀들의 교육은커녕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대한교련공제조합에서 주는 2, 3만원의 퇴직보험으로 구멍가게나 차리고 살면 이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서울~인천·수원 10분대 진입 시대1968년 12월 21일자 1면은 경인·경수고속도로 개통 기사가 개통식에 온 대통령 사진과 함께 큼지막하게 실렸다. 이 도로가 뚫리면서 서울~인천 간 이동 시간이 18분, 서울~수원 간은 13분으로 단축됐다. 도로 개통 기사에 시멘트, 철근, 아스팔트 등 주요 자재 사용량과 투입 인원·중장비 규모가 세세하게 소개된 것이 지금과 다른 특징이다. 통행료는 지프차 100원, 코로나 150원, 대형차 200~500원이었다.#배가 고파 못 살겠다1971년 8월 10일 오전 10시 광주군 중부면에서 주민 5천여명이 파출소와 경찰차에 불을 지르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들은 1969년 청계천에서 쫓겨난 빈민들이었다. 1970년 12월 기준 광주 대단지에 이주한 1만7천341세대(8만6천705명) 중 7천832세대(3만9천160명)가 판잣집 등에 거주했다. 도로·전기·수도 등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은 황무지였다. 이들 주민은 서울시가 약속과 달리 땅을 무상이 아닌 유상으로 불하하고 가옥에 세금을 매기겠다고 발표한 것에 분노했다. 서울시는 즉각 수습 대책을 마련해 주민들은 안정시켰다. 광주대단지는 1973년 성남시로 승격했다.-> 35면 계속1968년 12월 개통된 서울~수원간 경수고속도로.24.8㎞의 이 도로 완공으로 서울~수원간을 13분만에 주파할 수 있게 됐다.(사진 왼쪽)1963년 10월 여주 익사 사고가 보도된 신문. 소풍을 마치고 학생, 교사 등 137명을 태우고 돌아오던 배가 남한강 한복판에서 전복되면서 국민학생(현 초등생) 등 49명이 익사했다. /경인일보 DB·아이클릭아트납활자를 사용해 신문을 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진은 납활자 주조기.1971년 광주군 중부면에서 발생된 주민 5천여명 난동 모습.

2015-10-06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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