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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미래기술-뿌리산업·(3·끝)'팀 코리아'나아갈 길]무한한 발전 가능성 품은 핵심기술

금형업체 비즈엔몰드, 창업컨설팅과 '융복합' 새영역 확장경량·소형·정밀화 '첨단분야 승부처' 선진국 중요성 강조반도체나 원자재 등 전-후방산업 모두 연쇄효과 가장 높아성장판 가로막는 우리 스스로의 '편견과 한계' 부숴야 할때뿌리산업의 가능성은 무한대다. 뿌리기술의 발달이 기반이 되어야만 4차 산업혁명시대에도 앞서나갈 수 있다는 것은 독일, 일본, 미국 등 기술선진국에선 일반적인 이론이다. 특히 친환경차, 로봇, 바이오 등 현재 대한민국이 열정을 쏟는 첨단산업의 승부수는 '경량화' '소형화' '정밀화'를 통해 기능과 편의성을 증대하는 것인데, 이는 모두 뿌리기술이 발달해야 가능한 일이다. 인천의 금형 업체 '비즈엔몰드'는 창업컨설팅과 금형산업을 접목한 대표적인 융복합 사례다.원용기 비즈엔몰드 대표는 "우리 회사의 목표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한다'이다. 예비창업자가 제품의 아이디어를 구상하면 실제 제품으로 완성될 때까지 프로세스를 설계해주고, 금형을 통해 시제품까지 만들어 상용화의 꿈을 이뤄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주를 받아 고객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는 것이 금형산업의 전통적 역할이었다면 원 대표는 기술을 활용해 경영에까지 영역을 넓혀 산업분야를 새롭게 창조한 셈이다.이 같은 금형의 변신은 그가 기술자에만 국한하지 않고 꾸준히 자기 노력을 더해온 지난 세월의 성과다. 원 대표는 2000년에 기계가공 기능장을 취득한데 이어 2011년 금형 분야의 대한민국 명장이 됐다. 그의 나이 고작 38세, 최연소 명장에 선정되었다. 하지만 안주하지 않았다. 원 대표는 "17년을 한 회사에서 금형기술자로 일했는데 장기근속자여서 그런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혜택을 많이 받았다. 기능장을 따고 나서도 직업훈련교사, 기술지도사, ISO(국제표준화기구) 9001(품질경영시스템)·14000(환경경영시스템) 인증심사원 자격증도 땄다"며 "이런 공부를 하기 전엔 그저 불만만 많은 기술자였는데, 배우고 나니 시야가 확실히 넓어졌다"고 말했다.여기에 2005년 호서대 창업대학원에서 창업학을 공부하면서 금형과 창업의 연결고리를 찾게 됐다. 그는 "창업자의 70%가 제품이 있는 창업을 하는데, 금형은 대량생산이 가능한 틀을 만드는 산업이다. 창업학을 공부하면서 창업자에게 금형은 필수라는 점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 "내가 하는 일은 '융합'이다. 제품 아이디어를 들고 오면 실현가능한 구조와 생산에 필요한 기구, 부품을 설계해 시제품을 만든다. 생산틀이 나왔다면 디자인, 도금 등 후처리 작업까지 상담한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뿌리산업은 산업의 전후방 연쇄효과가 가장 높은 분야다. 전방연쇄효과는 한 산업의 생산물이 중간투입물로 사용돼 다른 산업을 발전시키는 효과이고, 후방연쇄효과는 한 산업에 투입되는 중간투입재를 생산해 산업의 발전을 유발하는 것을 말한다. 뿌리산업을 기준으로 쉽게 설명하면 자동차, 반도체, 조선 등 전방산업은 뿌리산업을 활용해 발전하고, 원자재, 정밀기기 등 후방산업은 뿌리기술을 위해 활용돼 발전하는 효과다. → 그래픽 참조한국노동연구원이 전후방 연쇄효과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기계·전기전자·금속·수송장비·건설·화학산업은 전방효과가, 광산품·석유 및 석탄·전력·가스 및 수도는 후방효과가 높았는데, 이 중 전·후방효과 모두, 가장 높은 분야는 뿌리산업이었다.뿌리산업의 성장을 가로막고 미래로 나아가는 일에 한계를 지은 것은 '우리 모두'가 자초한 일이다. 그간 희생을 당연시하고, 관행을 상식처럼 여겨온 대한민국 산업의 풍토와 이를 눈감아온 정부와 지자체, 편견에 휩싸여 조롱을 일삼았던 사회 구성원 모두의 책임이다. 포스트 코로나시대는 그 편견과 한계를 깨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뿌리산업의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렸다. /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 기획취재팀글 : 공지영차장, 김태양, 이여진기자사진 : 조재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 김영준, 안광열, 박준영차장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인천 비즈엔몰드는 창업컨설팅과 금형산업을 접목해 뿌리산업을 새롭게 확장시켰다. 원용기 대표가 '뿌리산업 증명서'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기획취재팀/아이클릭아트

2020-05-26 경인일보

[가장 오래된 미래기술-뿌리산업·(2)자부심 꽃 피우는 청년들]용광로 같은 열정 '젊은 심장이 뛴다'

20대 입사 '기술로 우뚝 선' 원상준 부사장대기업 나와 외부편견과 싸우며 활로 개척"내 뒤 이을 후배들은 존중받으며 일했으면"올해 마흔 살의 원상준 부사장은 경기도 화성시 '열처리' 전문 뿌리기업 제일에이치티씨(HTC)에서 일한다. 그는 대학에서 신소재공학과를 전공했고, 대기업 조선소에서도 근무했다. 세간에 뿌리산업 종사자에게 씌워지는 부정적 인식을 깨는 인물이다.지난 2008년, 그의 나이 28살에 제일에이치티씨 사원으로 입사했다. 원 부사장은 "대학 졸업 후 나도 남들처럼 대기업에 입사해 2년 정도 조선소에서 일했다. 전공을 살려 즐겁게 일하고 싶어 뿌리산업에 뛰어들었다"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외부의 편견과 싸우는 건 일상이다. 하지만 나는 열처리 산업에 매우 자부심을 갖고있고 전망도 밝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인식이라도 바꾸기 위해 늘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20세기 대한민국 산업 성장을 견인한 뿌리산업은 21세기에 들어 '3D', '재하청의 끝'이라 불리며 벼랑 끝에 서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표한 '뿌리산업 다각화 지원정책의 고용효과'를 보면, 정부가 1차 뿌리산업 진흥 기본 계획을 통해 뿌리기업 고용 촉진정책을 펼쳤지만 2018년 취업자 연령 중 20대 청년층은 8.1%에 그쳤다. 이 보고서는 뿌리산업을 '고령자와 청년층 비중이 극히 낮은 방추형 구조'라고 분석하며 '청년 인구 유입이 없을 경우 산업규모 자체가 소멸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원 부사장이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 기술개발에 매진하는 것도 자신의 뒤를 이을 후배들이 사회의 존중을 받으며 일하길 원해서다. 그는 입사 이후 열처리 기능사 자격증도 취득해 직접 열처리 작업도 하고, 연구개발에도 적극 참여해 신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제일에이치티씨는 항공 부품 관련 열처리 기술을 개발했고 지난 2018년 NADCAP(국가 항공·방위 산업 협력업체 자격 인정 제도) 인증을 받아 항공·방산 열처리 전문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원 부사장이 4년간 공들여온 결과물이었고 이때 얻은 성취감이 그가 뿌리산업에 지속적인 열정을 쏟는 원동력이 됐다. 원 부사장은 "워낙 인증을 받기 어렵고,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다는 점에서 힘들었다"면서도 "미래가 무궁무진한 산업인데 눈으로 효과를 직접 확인하긴 어려운 게 현실이라 사회 전반에 만연한 편견을 바꾸기 쉽지 않다. 안타깝다"고 말했다.원 부사장은 전 산업의 근간이 되는 뿌리산업이 이제 삶의 뿌리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뿌리산업에 들어와 새로운 삶이 시작됐고, 내 인생의 꽃도 새로 피우고 있다"며 "청년들이 편견 없이 뿌리산업의 가치를 보고 일할 수 있도록 정부·지자체·기업 모두가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기획취재팀글 : 공지영차장, 김태양, 이여진기자사진 : 조재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 김영준, 안광열, 박준영차장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뿌리산업에서 20·30대 젊은 인재 유입의 단절은 산업의 생존을 가늠하는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뿌리기업에서 용기있게 내일을 설계하는 젊은 인재들의 도전은 더욱 그 가치가 높다. 원상준(40) 제일HTC 부사장을 필두로 동원파츠 이도경(28)씨와 노환규(30)씨, 제일HTC 정재윤(31)씨는 뿌리산업의 희망이다.(오른쪽부터 역시계방향) /기획취재팀

2020-05-25 경인일보

[가장 오래된 미래기술-뿌리산업·(2)자부심 꽃 피우는 청년들]'IT 편애' 경기도, 지원·예산 등 속빈 강정

■ 경기도= 경기도 뿌리산업 정책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구색은 갖췄지만 먹을만한 것이 없는 맹탕이다.경기도는 2012년 5월 경기도 뿌리산업 진흥 및 육성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전국 광역시도단체 중 최초다. 조례에는 뿌리산업 발전에 필요한 연구개발 및 지원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경기뿌리산업지원센터'를 지정운영하도록 돼 있지만 지금껏 센터도 없고, 전담기관도 없다. 경기테크노파크가 도에서 계획한 지원정책을 '대행'할 뿐이다.뿌리산업 육성을 책임질 전담기관이 없으니, 예산의 규모도 민망한 수준이다. 경기도 뿌리기업은 전국 뿌리기업의 34%를 차지할 만큼 그 수가 가장 많다. 하지만 올해 경기도 뿌리산업 지원예산은 14억5천만원에 불과하다. 이 중 뿌리기업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R&D 지원에 5억4천만원, 시험분석지원 6천200만원 뿐이다. 공급자 품질인증 획득지원사업에 4억4천만원이 소요되는데, 이마저도 국내외 '원청업체 요구 충족'을 위한 품질안전인증이 전제조건이다.특히 경기도 산업정책 전반에서 보면 차별이 심하다. IT산업과 예산, 정책 규모를 비교하면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경기경제과학진흥원이 판교테크노밸리를 중심으로 경기도 첨단기술기업 등에 투자하는 '클러스터 혁신·고도화' 사업은 예산이 올해만 66억6천100만원이다. 반면 경기도가 2013년부터 지금까지 8년간 뿌리산업 지원에는 총 82억8천600만원을 투입했는데, 매년 6억~14억원 정도 예산을 썼을 뿐이다. 이 중 도비는 48억원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기초 지자체와 매칭해 투입했다.이들 기관 관계자는 "(뿌리기업) 이슈가 있으면 추가경정 예산을 받아 약간 늘어난다. 그저 업종이 사장되지 않게 유지하는 정도"라며 "워낙 기업규모들이 영세해 지원규모를 키워도 효과가 적어 필요성을 잘 못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기획취재팀글 : 공지영차장, 김태양, 이여진기자사진 : 조재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 김영준, 안광열, 박준영차장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

2020-05-25 경인일보

[가장 오래된 미래기술-뿌리산업·(2)자부심 꽃 피우는 청년들]'제조업의 도시' 인천, 진흥·육성 조례 무관심

■ 인천시= '대한민국 제조업의 대표도시'로 상징되는 인천시는 제조업의 근간인 뿌리산업을 진흥·육성하는 조례조차 없다.인천은 남동국가산업단지 등 12개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2만5천여개의 제조업체가 있다. 인천지역 제조업의 GRDP(지역 내 총생산)는 지난 2018년 기준 22조원, 인천의 전체 GRDP(88조원)의 25%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중 인천의 뿌리기업은 3천404개로 역시 경기도(1만1천288개), 경남(4천179개) 다음으로 전국에서 3번째로 많다. 정부는 지난 2011년 뿌리산업 진흥·첨단화를 위해 관련법을 제정했다. 뿌리산업에 대한 종합적 지원체계를 마련하고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게 제정 취지였다. 여기에 발맞춰 경기도,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광역 시도가 뿌리산업 진흥·육성 조례를 만들기 시작했다. 반면 인천시는 도시의 핵심 산업인 제조업 강화를 위해 뿌리산업 진흥·육성이 필요한 상황임을 인식하면서도 관련 조례는 제정하지 않았다. '기업활동 지원에 관한 조례'에 뿌리산업 지원 내용을 담고 있을 뿐이다.정책지원의 법적 근거가 되는 조례가 없다는 점은 정책의 유무를 떠나 뿌리산업 육성의 정책적 의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현재 인천시는 뿌리산업 특화단지 지정 신청·지원, 일자리 창출 지원 등의 정책을 산업진흥과와 일자리경제과가 산별적으로 나누어 시행하고 있다. 이마저도 뿌리산업 특화단지 지원은 정부가 내려주는 예산에 인천시가 보조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고, 일자리 창출 지원은 지난 2018년에서야 시작됐다. 결국 조례를 근거로 뿌리산업 진흥계획을 세우고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다른 시도와 비교했을 때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인천시 관계자는 "최근 산업단지 대개조 지역, 고용안정 선제대응 패키지 지원사업 등 선정된 정부 공모사업을 기반으로 뿌리산업 지원을 지속해서 할 계획"이라며 "조례 제정을 준비하는 등 인천시 차원에서도 뿌리산업에 대한 종합적인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기획취재팀글 : 공지영차장, 김태양, 이여진기자사진 : 조재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 김영준, 안광열, 박준영차장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

2020-05-25 경인일보

[가장 오래된 미래기술-뿌리산업·(2)자부심 꽃 피우는 청년들]국가정책과 현장의 괴리감

지원금액보다 자부담 큰 '스마트공장''영세화 특성' 반영 안한채 밀어붙여 3만2천여개 업체중 참여 의사 4%뿐시제품 실험실 등 '현장목소리' 외면'수요처'부터 찾는 정부의 R&D 지원中企 기술 개발·투자 의지까지 꺾어■ "우리는 계단 하나 올라가는 것도 힘든데, 정부 혼자 10계단을 한 번에 뛰고 있다."뿌리산업은 여느 산업보다 규모와 성격이 다양하고 세분화 됐으며 영세하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은 이 같은 특징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며 경기도, 인천 등 지자체는 제대로 된 정책조차 전무하다. 특히 정부가 뿌리기업이 접근하기 어려운 '스마트공장'과 같은 정책과제를 우선순위에 두면서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는 지적이 많다.실제로 지난해 국가뿌리산업진흥센터가 뿌리기술전문기업, 뿌리기업 확인서 발급기업을 포함한 3만2천606개사를 대상으로 스마트공장 참여 여부를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4%만이 참여의 뜻을 밝혔다.설필수 반월도금사업협동조합 이사장은 "현장을 한번만 나와보면 '1억 가지고 스마트 공장은 힘들겠구나'하고 바로 느낄 것"이라며 "생각이 있어도 자부담이 너무 커 엄두를 못 낸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올해 중소벤처기업부(이하 중기부)가 '뿌리기업 자동화·첨단화 지원사업'에 17억원 예산을 배정했는데, 지원대상이 17개 내외 기업인데다, 최대 1억원만 지원한다. 설 이사장은 "영세기업들은 단순히 자동화 프로그램만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화가 가능한 공장설비를 전부 바꿔야 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돈이 10억원 이상이다. 지금으로선 현실에 맞지 않는 정책"이라고 꼬집었다.2018년 말 매출액을 기준으로 경인지역 뿌리산업 현황을 살펴보면 전체 뿌리기업 1만4천692개 중 6천500곳, 전체의 44.2%가 연매출 5억원 미만이다. 정부가 가장 역점적으로 추진 중인 스마트공장과 현실의 괴리를 잘 보여주는 지표다.반면 기술 개발 공동설비, 시제품 실험실 등 개발을 위한 환경 조성을 원하는 목소리가 크지만 현재 경인지역에는 시흥의 뿌리기술지원센터가 유일하다. 인천의 한 금형기업 관계자는 "실험하기 위해 이 무거운 장비를 이끌고 시흥까지 오가다 결국 포기했다"며 "일본 바이어들이 현장에 오면 가장 먼저 보는 것이 '설비'다. 지금은 워낙 산업이 복잡해 설비도 다양해져야 한다. 소기업들이 협업하는 공간을 구축하고 기술개발을 할 수 있는 테스트베드(시험분석)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도 우리를 하청업체 취급한다"'대기업의 3, 4차 하청업체'로 굳어진 산업구조는 뿌리기업 성장에 발목을 잡고 있다. 특성상 수주를 받아 제품을 완성하는 공정의 일부분을 담당하는 본질적 한계가 있지만, 뿌리산업을 '특수공정'으로 인정하고 수평적 파트너십을 가지는 독일, 일본과 달리 우리는 하청구조의 가장 밑바닥에 뿌리산업이 있다.문제는 잘못된 구조에 정부가 부화뇌동하고 있다는 게 뿌리기업의 목소리다. 일례로 중기부는 매년 R&D지원사업인 '구매조건부신제품개발사업'을 진행하는데, '수요처(투자기업)의 구매협약동의서' 혹은 '개발요청서류를 받은 중소기업'이 지원조건이다.경기도 용인의 한 뿌리기업 관계자는 "정부가 지원하는 (중소기업) 연구개발사업 심사를 하면 기술의 특성보다 '수요처'가 어디냐고 물어본다. 이 기술을 개발했을 때 팔 수 있는 업체를 데리고 오라고 요구한다"며 "일본처럼 수요업체(대기업 등)와 기술개발의 방향성을 공유하고 공존하는 산업구조라면 이러한 조건이 맞지만, 우리 현실에선 어렵다"고 털어놨다.또 "기술을 개발해 특허까지 낸 뿌리기업이 지금도 상당수 존재하지만 신기술이 상용화돼 양산되기까지 너무 어렵다. 대기업 납품 확정이 안 났는데도 과감한 투자를 할 수 있는 자본력 있는 기업이 거의 없다"며 뿌리산업의 딜레마를 설명했다.실제로 정부가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진행한 제1차 뿌리산업진흥기본계획에 따라 R&D 분야 지원을 강화했지만, 2018년 기준 뿌리기업은 매출 대비 R&D 비중이 0.9%로 중소제조업 평균(1.5%)보다 낮고 기업부설연구소를 보유한 기업도 전체 뿌리기업의 9.9%에 불과했다.이 때문에 업계에선 '작은 회사는 돈이 없어 기술을 개발 못하고, 큰 회사는 개발해도 돈이 안돼 포기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설 이사장은 "뿌리산업에 대한 정부 인식이 좋지 않다. 뿌리산업을 육성한다지만, 정부 부처 어디에도 제대로 된 지원부서가 없다"며 "정부 인식을 개선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기획취재팀글 : 공지영차장, 김태양, 이여진기자사진 : 조재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 김영준, 안광열, 박준영차장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

2020-05-25 경인일보

[가장 오래된 미래기술-뿌리산업·(2)자부심 꽃 피우는 청년들]편견에 무너지는 아이들의 꿈

진로 결정때 학부모들 '기름밥' 부정적 인식 영향… 뿌리산업 명칭 학과 선택 꺼려특성화고 기계과 3년새 정원 2354명↓… '車·컴퓨터' 등 다른분야와 결합 자구책■ 학과 이름까지 바꿨다오랫동안 정부와 사회, 어른들이 겹겹이 쌓아올린 뿌리산업을 둘러싼 편견은 아이들의 꿈도 가로막았다.경인지역 특성화고등학교에서 '금형과' '기계과' 등 뿌리산업 명칭을 그대로 담은 학과명을 찾아보기 어렵다. 학과 수도 줄고, 이름도 바뀌어서다.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전국 직업계고 1학년을 기준으로 교과군별 학과정원 변동추이를 조사한 결과, 기계과의 경우 2016년 1만7천699명이지만 2019년은 1만5천345명으로 2천354명이 감소했다. 재료와 화학공업도 각각 225, 379명이 줄었다. → 표 참조학생 모집이 어려워지자 최근 학교들은 학과 이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경기도내 특성화고의 경우 기계과는 초정밀기계과· 컴퓨터응용기계과· 산업기계과·자동화기계과·기계산업설계과 등으로, 금형과는 자동차금형과, 금형디자인과 등으로 대부분 변경됐고, 인천도 기계나 금형, 용접 등 뿌리기술 전반을 배우는 학과들이 에코자동차과, 자동차IT과, 그린자동차과, 자동차테크과 등으로 바뀌었다.이 같은 현상에 대해 경인지역의 한 마이스터고 기계과 부장교사는 "순수하게 기계, 금형이라고 하면 모집이 잘 안된다. 수식어를 조금씩 넣어서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한 것"이라며 "중학생들이 진로를 정할 때 학생 혼자 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 의견이 강한데, 부모들이 '노가다' '기름밥' 등 (뿌리산업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가지고 있어 꺼리는 경향이 크다"고 설명했다.이에 따른 부작용도 있다. 컴퓨터, 자동차 등 다른 과목이 덧붙여지면서 교과 내용도 추가돼 뿌리기술 교육의 집중도가 떨어진다.또 학과 명칭이 구체적으로 바뀌면서 오히려 취업의 폭이 협소해 진다는 측면도 있다. 경기도 수원의 한 특성화고 금형과 교사는 "단순히 금형과, 기계과라고 하면 기계를 사용하는 산업 모두에 취업을 할 수 있는데 자동차, 컴퓨터, 폴리 등 수식이 붙으면 기업들에서 타이틀만 보고 관련성이 떨어진다고 여긴다"고 토로했다.수십년 경력의 기성세대 직원들, 나아지지 않는 '저임금·고노동'탓에 무기력 호소업무환경·방식 변화 거부감… 새로 유입된 젊은인재와 잦은 갈등·발길 돌리게해■ 선배들의 낮은 자존감, 젊은 인재 발길 돌린다기술은 숙련기간이 긴 만큼, 뿌리기업은 최소 20년 이상의 숙련된 노동자들이 많다. 하지만 뿌리산업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면서 수십년 간 이들 노동자의 처우도 변한 것이 없다.문제는 오랜 시간 저임금·고노동에 시달렸지만 임금과 근무환경은 나아지지 않고, '3D, 하청업체'라는 사회적 편견까지 덧대어져 뿌리 노동자들의 자존감이 낮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희망을 갖고 새로 유입된 젊은 학생들과 기존 노동자들이 융화되지 못한다는 게 학교와 현장의 목소리다.실제로 2018년 뿌리산업 실태조사를 살펴보면 2017년 기준, 뿌리산업 종사자 임금수준은 중소제조업체의 75.7%에 불과했고 근로시간은 일평균 0.4시간 더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그래픽 참조경인지역 특성화고 관계자는 "기계, 금형 등을 전공하는 아이들이 입학하기 전에는 사회적 시선 때문에 고민했다가도 막상 학교에서 공부한 뒤에 평생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면 오히려 전공을 살려 관련 기업에 취업하려고 한다"면서도 "그렇게 열정을 갖고 취업했다 중도에 퇴사하는 학생들을 보면 일이 힘들어서 보다는 기존 직원들, 선배들과의 갈등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특성화고 학생 등 젊은 인재에 직접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정부나 지자체가 뿌리기업에 근무하는 이들의 처우와 인식 및 환경개선에 적극 지원하는 게 우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경기도 광주에서 소성가공 전문기업 기원MRO를 운영 중인 이석기(35)대표도 기성세대의 인식개선을 호소했다. 이 대표는 "2018년 초에 업체를 인수해 운영하면서 최신 기계에 맞춰 공구 제작 방식을 개선하려고 하자 15년 이상 경력이 있었던 기존 40대 직원이 '쓰던 대로 만들자'고 반발하며 마찰이 심해졌다. 이들 직원은 이 산업에 대해 '할만큼 했다. 그만하겠다' 등 자조의 목소리가 많았다"며 "아직 뿌리기업이 위험하고 깨끗하지 않다는 젊은 층의 인식이 많은데, 사장부터 기성세대들이 생각을 바꿔 조금만 노력하면 생각보다 쉽게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기획취재팀글 : 공지영차장, 김태양, 이여진기자사진 : 조재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 김영준, 안광열, 박준영차장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

2020-05-25 경인일보

[가장 오래된 미래기술-뿌리산업·(2)자부심 꽃 피우는 청년들]정책 컨트롤타워 '빈자리' 담당 부처 엇박자

■ 정부 = 2012년부터 뿌리산업 진흥 기본 계획을 5년마다 수립하며 뿌리산업 육성을 '호언장담'했던 정부가 막상 뿌리산업 주요 정책의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비판을 받고있다. 명목상 최고 전략 결정은 산업통상자원부(이하 산업부)가 수립하지만, 기업 애로사항 수렴 및 기술 개발·시제품 생산 지원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가 담당하고, 자동화·첨단화는 중소벤처기업부(이하 중기부)가 맡으면서 뿌리산업 진흥의 주요 정책마저도 담당 부처가 분산돼 있다. 25일 산업부 등에 따르면 뿌리산업 진흥과 첨단화에 관한 법률 제7조에 의거해 5년마다 뿌리산업 진흥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관련 제도를 도입·변경하는 최고 전략 결정 기구인 뿌리산업진흥위원회는 4년간 한차례도 회의를 열지 않았다. 사실상 뿌리기업 육성 전담기관인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소속 '국가뿌리산업진흥센터'도 2013년 정부부처 개편과 함께 산업부에서 과기부로 소속이 바뀌었다. 그러나 센터는 지금까지도 산업부와 중기부에서 예산을 받고, 정책 수립 및 보고는 과기부에 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인지역 한 뿌리기업 관계자는 "말 그대로 시어머니가 두 명이라 우리 뿌리기업을 지원하는 실질적 기관인 국가뿌리산업진흥센터가 힘이 없다. 2천만원짜리 기술지원사업도 통과시키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정책을 수행하는 부처가 일원화되지 못하고 분산된 모습은 뿌리산업 정책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인력 양성 사업의 경우만 해도 산업부가 석·박사 대학원 선정과 운영을 진행하면서 중기부는 종사자 재교육을, 고용노동부가 중장년층 취업지원을 담당하면서 종합적인 인력양성 정책의 수립이 어렵다.산업부 관계자는 "뿌리산업진흥위원회가 최근 수년간 열리지 않은 것은 맞다"며 "위원들이 굳이 만나서 회의할 필요가 없어 서면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해명했다. 또 "뿌리산업법에 의하면 산업부가 주무부처로서 매년 각 부처가 하는 사업들을 통괄해 실행계획을 마련해 조정한다"고 말했다./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기획취재팀글 : 공지영차장, 김태양, 이여진기자사진 : 조재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 김영준, 안광열, 박준영차장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

2020-05-25 경인일보

[가장 오래된 미래기술-뿌리산업·(1)재도약의 기회]이 쇳물이 '코로나 위기도 녹였다'

'산업역군' 찬사받았던 뿌리산업 노동자4차 산업혁명 선두 대한민국서 '3D' 취급글로벌 악재 속 제조업과 함께 진가 발휘지난날 쇠를 녹이고 자르는 일을 하며 굵은 땀을 흘리는 이가 애국자였다. 그 시절 최고의 찬사가 '산업역군'이었는데, 우리 사회는 그 헌신에 존경을 담아 쇠를 만지는 뿌리산업 노동자를 산업역군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오늘날 4차산업혁명의 선두그룹에 선 대한민국은 뿌리산업을 3D(Dangerous, Dirty, Difficult)로 취급한다. 젊은이들이 일상대화를 즐기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이들 산업역군을 '노가다'로 폄훼한다. 삶이 윤택해진 대신, 성실한 땀을 흘리는 모든 일이 조롱받는 세상이 됐다.코로나19 사태는 공고하다 믿었던 세계의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중에서도 4차산업혁명 대두 이후 우리의 시선 밖으로 밀려난 '제조업'이 진가를 드러냈고 터부시됐던 뿌리산업의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다.IMF(국제통화기금)가 지난달 발표한 세계 경제성장률은 -3.0%이다. 선진국으로 불리는 미국(-5.9), 일본(-5.2) 모두 -5%대로 떨어진 반면 한국은 -1.2%로 예측됐다. OECD국가 중 하향폭이 가장 낮은 것으로 코로나19의 위기를 비교적 선방했다는 평이다.전문가들은 위기 속에서도 우리 경제의 근간에 있는 제조업이 흔들리지 않았고 제조업의 근간인 뿌리산업이 단단하게 잡아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여기에 지난해 일본수출규제에 이어 코로나19까지 2차례 위기를 겪으며 '글로벌밸류체인(공급망)'이 무너지는 경험을 통해 한국경제는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기술의 요체인 '뿌리산업'이 있었다.실제 이들 이슈 이후 각종 산업연구서에는 그동안 정부가 수출 대기업 중심의 정책을 펼쳐 산업구조의 중심추가 기울어졌다는 비판과 함께 뿌리산업의 산업적 파급효과를 높게 평가하며 제대로 된 육성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한발 더 나아가 4차산업혁명 시대는 제조현장에서 공정기술로만 활용됐던 뿌리기술이 IT, 서비스 등 다양한 산업을 융복합하는 핵심기술로 부각될 것이라는 예측도 쏟아지고 있다.모처럼 재도약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지난 한달 여 간 우리가 만난 뿌리기업들은 미래로 나아가는 일에 고통을 호소했다. 뿌리기술에 제값을 내지 않는 대기업의 횡포가 여전하고, 굳어진 사회적 편견에 젊은 인재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랜 탓이다.그럼에도 코로나19 이전과 이후, 변함없이 뜨겁게 흐르는 쇳물은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포스트 코로나'시대가 도래했다. 뿌리산업은 말한다. '우리는 모두에게 늘 든든한 뿌리이다'. /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기획취재팀글 : 공지영차장, 김태양, 이여진기자사진 : 조재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 김영준, 안광열, 박준영차장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우리나라의 산업을 떠받치고 있는 제조업의 품질 경쟁력은 '뿌리산업'에 달려있다. 흔히 3D(Dangerous, Dirty, Difficult)산업으로 취급받는 뿌리산업은 주조, 금형, 소성가공, 용접, 표면처리, 열처리 등이 있다. 사양산업이라는 조롱을 받는 세상이지만 현장에서 만난 뿌리산업 종사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슬땀을 흘리며 묵묵히 일하고 있다. 지난 19일 인천 서부일반산업단지에 자리잡은 한 주조기업에서 근로자들이 대형 선박용 엔진 부속을 만들기 위해 용광로로 녹인 쇳물을 거푸집 사이로 붓고 있다. /기획취재팀

2020-05-25 경인일보

[가장 오래된 미래기술-뿌리산업·(1)재도약의 기회]우리가 대한민국 뿌리입니다

#오금옥 금형기업 제니스텍 대표대기업 인건비 싼 중국이전 여파 일본行검수때 자존심 상해 이 악물고 수주받아타협없는 현지서 "품질만이 살길" 깨달아#이재동 표면처리 동명금속 대표건축업 실패후 도금공장서 '제2의 인생'갑을계약 안해… 단가에 '기술력' 책정"대신 끊임없이 연구개발" 매출로 결실'기술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다'고 청년을 독려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유효하지만 오금옥 제니스텍 대표가 진로를 고민하던 1970년대만큼 기술이 존중받던 때는 또 없었다.오 대표가 기술자로 산 세월은 자그마치 46년이다. 1974년 1월, 고향 선배를 따라 인천 서구의 작은 금형 공장에 취직했다. "공무원을 해볼까 하고 학원도 좀 다녔고, 철도청 기관사를 준비해볼까 고민도 좀 했어요. 근데 당시만 해도 공무원 월급이란 게 너무 적기도 했고, 다들 기술 배우면 먹고 살 수 있다고 하고. 뿌리산업이 당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어요."오 대표는 처음 다닌 직장에서 귀이개, 족집게 등 생활 잡기를 금형 작업으로 제작하는 일을 배웠다. 지금은 기술 발전으로 다양한 기계가 제작의 많은 부분을 책임지지만, 그때는 모든 것이 수작업으로 이뤄졌다. 주변에 널린, 아주 흔한 제품이지만 손기술을 발휘해 미세한 작업을 해야 했다. 이후 자동차 전장 부품 등을 만드는 인천 부평의 큰 금형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감이 너무 많아 철야 작업을 수도 없이 해야 했다. "3일 연속 밤을 새워서 작업을 해야 할 때도 있었어요. 우리 같은 금형 기술자들에게 돈도 많이 주고, 정말 많이 일한 날에는 부서 회식비로 100만원을 받기도 했으니까." 금형공장 월급날이면, 공장 앞 거리는 물건을 팔려는 노점들로 줄을 이었고 식당, 술집 할 것 없이 월급 탄 기술자들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진풍경이 있었다. "그때 우리들 월급이 공무원의 2배가 넘었으니까. 워낙 잔업이 많아 야근을 많이 하니, 월급이 좋을 수밖에요."하지만 뿌리산업 기술자들이 '산업역군'으로 인정받던 20세기가 저물었다. 그 사이 IMF 사태가 터졌고 한국 경제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 종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화성에서 표면처리(도금) 기업을 운영하는 이재동 동명금속 대표는 뿌리산업이 조금씩 하락세로 접어든 이 시기에 오히려 도전장을 내밀었다. 1998년 건축업을 하다 IMF를 맞으며 사업이 망했다. 방황하던 찰나 가족이 다니던 도금공장의 일을 도와주게 된 것이 인연이 됐다. 그는 표면처리 공정이 제품의 완성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현장에서 배우며 이 기술에 완전히 매료됐다. "눈이 확 돌아갔다고 말하면 될까. 건물의 뼈대역할을 하는 철근도 도금을 해야 더 오래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어요. 철근에 녹이 발생하면 콘크리트가 터져버릴 수 있으니. 이런 걸 알고 나니, 이건 안 할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가 뿌리산업에 도전하던 시기는 IMF(외환위기)를 지나 국내 대기업들이 하나 둘 생산공장을 중국으로 이전하던 2000년대 초중반이다. 21세기가 시작된 후 값싼 노동력이 기업경영의 최우선 가치가 됐고, 기술로 먹고 사는 일이 '기름밥'으로 천대받는 시대가 도래한 것도 이와 맞물린다. 경인지역 내 뿌리기업들이 하나 둘 원청인 대기업을 따라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그 사이 20세기 한국 제조업의 신화를 이룩한 뿌리 기술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평생 기술로 번 돈을 투자해 치킨집, 호프집, 빵집 등을 차렸다. 그래도 기술을 저버릴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제니스텍 오 대표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2005년 일하던 회사가 대기업을 따라 중국으로 전부 이전했죠. 기술력이 높아진 우리를 고용하기엔 인건비, 가공비가 너무 올랐대요. 당시 중국인은 우리의 3분의1 가격이면 쓸 수 있으니까. 다들 떠나는데, 나는 이때까지 기술자라는 자부심으로 살았거든요. 마침 사장이 설비를 모두 두고 간다기에, 인수받아 내 공장을 차렸죠." 오 대표는 평생 갈고 닦은 금형기술을 앞세워 그만의 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단가 후려치기에만 익숙한 국내 대기업 대신, 기술력을 인정하는 해외시장에 문을 두드렸다. 일본이었다. "처음엔 기계와 기술만 있으면 먹고는 살 줄 알았는데, 능력이 있으면 뭐해요. 일을 안 주는데…. 차라리 대기업 말고 해외로 눈을 돌려보자고 생각했죠. 중소기업청에 수출초보기업을 지원하는 사업에도 지원해봤는데, 기준에 부합이 안된다며 떨어졌죠. 고민 끝에 일본에 지사를 설립하는 사업을 신청해 일본 사업을 시작했어요."일본은 아직 전통적인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금형기업을 운영하는 곳이 많다. 그만큼 기술력을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커서다. 오 대표는 처음 일본기업에 납품하던 때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엄청 꼼꼼하게 검수해요. 납기를 맞추기 위해 밤새 금형작업을 했는데, 제품 특성도 모른 채 작업을 하다보니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에요. 무척 자존심이 상했어요. 내가 금형 일을 이만큼이나 했는데, 일본애들한테 밀릴 수가 있나. 다시 밤새 수작업을 해서 보냈고 다음 수주를 또 받았을 땐 이 악물고 했죠. 자존심을 살려야 했으니까. 결국 1차에 문제가 됐던 부분들이 2차 수주에선 단번에 오케이를 받았죠." 일본사람을 만족시키니, 그는 기술자로서 자부심이 들었다. "국내는 좀 불량이 나도 이번엔 좀 눈감고 다음에 더 잘해줄 게 라는 식의 타협이 됐는데, 일본은 품질에 있어선 절대 타협이 없었어요. 나도 그때부터 완전히 생각을 바꿨어요. 기술 품질만이 살길이라고."오 대표의 생각은 대한민국 땅에서 뿌리산업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과 같다. 동명금속 이 대표의 경영철학도 기술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됐다. "대기업들이 우리 공정에 대해 하청을 줄 때 기술력은 단가에 넣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스스로 내 기술의 가격을 책정합니다. 원청에서 부른 값이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값을 말해요. 애초에 갑을계약을 안합니다. 상생은 우리만 하는 게 아니라 대기업도 같이 하는 거죠. 우리 회사가 주로 고가의 의료기기 도금작업을 하는데, 제 아무리 물건을 잘 만들어와도 내가 도금을 잘 해서 부착시켜줘야 세상에 나올 수 있거든요. 대신 나는 밤을 새서 기술을 연구해요. 남들이 하기 어려운 작업을 다 해주니까 결국 기술력 있는 곳에 오더라구요." 직원 9명, 그 역시 작업복을 입고 직원들과 땀 흘려 일한다. 경기가 날로 악화돼 모두가 울상을 지었던 지난해도 창립 이래 꺾인 적 없이 매출 11억2천여만원을 달성했다. 코로나19로 긴장하고 있지만 그는 두렵지 않다. 기술이 있고 뿌리산업은 결코 죽지 않을테니까. "가장 기초가 되는 공정이면서 끊임없이 기술을 개발해 성과를 내야 하는 산업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구요." /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기획취재팀글 : 공지영차장, 김태양, 이여진기자사진 : 조재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 김영준, 안광열, 박준영차장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금형기업 '제니스텍' 오금옥 대표.표면처리 기업 '동명금속' 이재동 대표.

2020-05-25 경인일보

[가장 오래된 미래기술]대한민국 뿌리산업-주조·금형·소성가공

■주조(서광금속)서광금속은 철을 녹여 모래틀에 붓고 1~3일 동안 식혀서 엘리베이터나 호이스트·크레인 등 산업기계 부품을 만든다. 주조는 금속을 액체로 녹여 형틀에 붓고 굳혀서 원하는 모양을 만드는 기술로 기원전 3500년 경부터 썼다고 알려져 있다. 서우란 서광금속 사장은 "만일 주조가 없다면 부품을 일일이 용접해야 하는 등의 이유로 기계 가격이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금형(비즈엔몰드(주))비즈엔몰드(주)는 창업자가 구상한 제품 아이디어를 직접 설계하고 생산이 가능하도록 찍어내는 틀을 제작해 시제품을 만들어 준다. 금형은 제품의 최초 틀을 설계, 제작하고 같은 모양의 틀을 동시에 제작할 수 있게 큰 틀을 만드는 기술이다. 원용기 비즈엔몰드 대표이사는 "만일 금형이 없다면 제품을 하나하나 손으로 만들게 될 것"이라고 했다.■소성가공(엠케이전자(주))엠케이전자(주)는 금·은·구리를 구멍(다이스홀)에 넣고 강한 힘으로 잡아당겨서 15~18㎛(머리카락 4분의 1 굵기)의 '본딩 와이어'를 만든다. 소성가공은 재료에 외부적 힘을 줘서 모양을 변형시키는 기술로, 불에 달궈진 쇠를 망치로 두드리는 것이 대표적 예다. 김형주 엠케이전자 기획팀 차장은 "만일 소성가공이 없다면 반도체가 가벼워지고 작아지기(경박단소화)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기획취재팀글 : 공지영차장, 김태양, 이여진기자사진 : 조재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 김영준, 안광열, 박준영차장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서광금속송도 금형업체 비즈엔몰드용인처인 소성가공 엠케이전자

2020-05-25 경인일보

[가장 오래된 미래기술-뿌리산업·(1)재도약의 기회]포스트 코로나 시대… 주목받는 제조업

IMF, 국제 경제성장 -3% 전망속 한국은 -1.2% 그쳐… OECD 36국중 하향폭 최소 제조업 근간 산업구조 코로나 충격 완화… 전문가들 "韓·대만 V자 경기회복 가능"글로벌 공급망 붕괴 여파 '脫세계화 흐름' 안정적인 자국 중심 수급으로 재편될 듯'소성가공' 엠케이전자, 전년比 매출 56.8% 증가… '용접' 동원파츠도 30%이상 ↑■ 코로나19 위기 속 주목받는 한국 제조업IMF(국제통화기금)는 올해 세계 경제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를 겪을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달 발표한 '세계경제전망'에서 2020년 세계 경제성장률을 -3%로 전망했다. 지난 1월 발표한 세계 경제성장률 3.3%와 비교했을 때 6.3%p 하향 조정됐다. '코로나19'가 전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반면 IMF는 올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에 대해선 비교적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올해 -1.2%, 마이너스 성장을 할 것으로 전망하며 세계 경제성장률과 비교해 선방할 것으로 내다봤다. 또 OECD 국가(36개) 중 하향 폭은 가장 작고, 성장률 전망치는 가장 높게 분석한 것도 희망적인 신호다.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경제의 근간에 '제조업'이 뿌리내리고 있어서다. 실제로 코로나19 이후 경제 위기를 다룬 보고서들에서 제조업을 근간으로 한 우리 산업구조가 코로나19 사태의 충격을 완화하고, 향후 경기회복에서도 긍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분석이 심심찮게 등장한다.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GDP(국내총생산) 대비 제조업 비중은 27.8%로, 제조업 강국이라고 평가받는 독일(21.6%), 일본(20.8%)보다도 높고, 미국(11.6%), 영국(9.6%)과는 2배 이상 차이 난다. OECD의 선임 이코노미스트 출신으로 시티그룹의 선임 이코노미스트인 캐서린 만은 최근 블룸버그TV와 인터뷰에서 "더 많은 제조업과 기술 기업을 보유한 국가의 경우 'V자형' 경기 회복이 가능하다"며 "한국과 대만이 그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 포스트 코로나 시대, K-뿌리산업의 기회역설적이게도 코로나19가 그동안 구시대의 산물처럼 여겨온 '제조업'의 중요성을 되새겼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수많은 목소리에 제조업이 강조되고, 그 근간에 있는 '뿌리산업'을 주목하며 도약의 발판이 될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이렇게 뿌리산업에 희망을 이야기하는 데는 코로나19가 몰고 온 '불확실성' 때문이다. WHO(세계보건기구)는 지난 3월 팬데믹(세계 대유행)을 선언했다. 그로 인해 복잡하게 얽힌 세계 인적·물적 교류가 끊어졌고, 제조업 등 전 세계 산업을 촘촘하게 연결하고 있던 글로벌 공급망(글로벌 밸류체인)도 무너졌다. 자동차, 조선, 기계, 디스플레이, 반도체, 자동차 등 세계 각국에서 부품을 수입하고 완성품을 수출하는 우리 제조업 구조 역시 글로벌 공급망의 가동이 중단되며 휘청거렸다. 우리 뿐만 아니라 전세계 기업이 가격 경쟁력을 좇아 글로벌 공급망에 기대왔는데, 와르르 무너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코로나19는 '세계화'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냈다.실제로 지난달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코로나19가 제조업 글로벌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과 대응방안'에서도 코로나19를 계기로 감염병에 의한 생물학적 위험이 생산과 교역활동의 중단 가능성을 높여 불확실성 해소가 산업 전반의 중요한 요인으로 급부상했다고 분석했다.결국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불확실한 글로벌 공급망에 의존하기보다는 자국 중심의 공급망으로 재편돼 안정성을 추구할 가능성이 커졌다. 전문가들은 '탈세계화'가 늘어나고 자연스럽게 제조업 리쇼어링(Reshoring·해외 진출 기업이 본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현상이 점차 확대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특히 공급망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세계적 흐름에 따라 'K-방역'이라 불리며 튼튼한 사회적 안전망을 전세계에 각인시킨 국가 브랜드 이미지는 기술력을 인정받은 뿌리산업 분야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코로나19로 반등의 기회를 잡은 뿌리기업은 속속 그 진가를 드러내고 있다. 용인의 '소성가공' 분야 뿌리기술전문기업인 엠케이전자(주)는 코로나19가 확산된 올해 1분기 매출액이 1천208억원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770억원)과 비교했을 때 56.8% 증가했다. 경쟁사인 일본, 독일 등 해외업체가 생산시설을 동남아에 두고 있어 코로나19 확산으로 공장 가동률이 떨어졌지만 엠케이전자는 시흥, 음성 등 국내에 생산거점을 두고 있어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했다. 시흥의 '용접' 분야 뿌리기술전문기업인 동원파츠 역시 지난해 일본의 수출 규제로 소재·부품 기술력에 대한 국산화 바람이 불면서 기회를 얻어 지난해 346억원의 역대 최고 매출을 기록했다. 동원파츠는 코로나19 확산 속에서도 순항을 이어가고 있다. 동원파츠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 주요고객사가 미국 공장의 일시가동 중단으로 중요부품 공급에 문제가 생길 것을 예상해 우리 쪽에 주문량을 늘렸다"며 "주문량이 늘어나면서 지난달 매출이 코로나19 이전 평상시보다도 30%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장웅성 인하대 융합혁신기술원장은 "우리나라는 강한 제조업을 바탕으로 하고 다른 나라보다 코로나19에 대한 방역체계가 잘 가동됐기 때문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국내 뿌리산업에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며 "탈세계화와 안전한 공급망을 찾는 세계업체 등 다가오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 산업의 기반이 되는 뿌리산업을 지금부터 적극적으로 지원·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기획취재팀글 : 공지영차장, 김태양, 이여진기자사진 : 조재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 김영준, 안광열, 박준영차장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시흥 금속가공 용접 동원파츠시흥 금속가공 용접 동원파츠

2020-05-25 경인일보

[가장 오래된 미래기술]대한민국 뿌리산업-용접접합·열처리·표면처리

■용접접합(동원파츠)동원파츠는 부품을 빠르게 회전시켜 발생하는 마찰열로 알루미늄 판에 기둥을 접합해 반도체 가공 장비의 부품 '가스디스트리뷰터'를 만든다. 용접은 소재·부품을 열이나 압력을 이용해 접합하는 기술이다. 장혜원 동원파츠 과장은 "용접이 없다면 알루미늄 덩어리를 통째로 깎아내야 해 제조 공정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열처리(제일HTC)제일HTC는 자동차·항공기 금속 부품의 온도를 1천℃까지 올렸다가 20℃로 급랭시켜 단단하게 만든다. 열처리는 금속에 가열·냉각을 반복해 재질을 단단하게 만들어 수명을 늘리는 기술이다. 원상준 제일HTC 부사장은 "열처리가 없다면 자동차 기어를 교체하는 주기가 훨씬 짧아질 것"이라고 말했다.■표면처리(동명금속)동명금속은 초음파 진단기·X레이 진단기 등 의료 기기 표면에 아연을 얇게 입혀서 녹이 스는 걸 방지한다. 표면처리는 부품의 표면에 금속을 입히거나 화학물질로 코팅해 보기 좋고 단단하며 전기가 통하거나 통하지 않게 하는 기술이다. 이재동 동명금속 대표는 "표면처리가 없다면 컴퓨터 부품에 녹이 빨리 생겨 심각한 에러가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기획취재팀글 : 공지영차장, 김태양, 이여진기자사진 : 조재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 김영준, 안광열, 박준영차장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시흥 금속가공 용접 동원파츠화성정남 열처리 제일HTC안산상록 도금 동명금속 이재동 대표

2020-05-25 경인일보

[세월호 그후, 또 4월이 간다·(3·끝)우리의 미래-세월호 세대]잊지 않았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참사 당시 너무 어려 "그런 일이 생겼구나…"중학생 돼서야 '비극' 인식… 당시 대응 분노'희생된 형·누나들에 부끄럽지 말아야' 다짐"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형·누나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더 노력해야죠."지난 22일 오전 10시께 안산시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에 마련된 단원고 4·16 기억교실. 수원고등학교에 다니는 조익주(18)군이 기억교실 2학년 1반을 찾았다. 기억교실에 처음 와 본다는 조군은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단원고 한 학생의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달력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2014년 4월 15일부터 18일까지 수학여행 일정을 표시해 놓은 달력이었다.'세월호 장학생'인 조군은 그렇게 책상마다 놓인 유품들을 살폈다. 지난해 수원고 2학년 1반 반장이었던 그는 '416단원장학재단' 장학생으로 선정됐다. 조군이 이날 단원고 기억교실 '2학년 1반'부터 찾은 이유다.안산 단원고 학생과 교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희생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2015년 4월 설립된 단원장학재단은 해마다 경기도 학생과 교사들을 선발해 각각 장학금과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학생 903명과 교사 44명이 장학금과 연구비를 지원받았다.조군은 한때 축구 선수가 꿈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주역인 '영원한 캡틴' 박지성의 모교인 세류초등학교에서 축구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축구 명문인 매탄중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아픈 무릎 때문에 결국 오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조군은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하고 있는 모범 학생이다.조군은 중학교 2학년 때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단원고 형·누나들에게 썼던 편지, '얼마나 두려우셨을까요'라는 첫 구절을 또렷이 기억했다."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형·누나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어요. 세월호 참사 당시엔 제가 너무 어렸어요. 그냥 '그런 일이 생겼구나.' 했거든요. 중학생이 돼서야 엄청난 비극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정부가 조금만 더 대응을 잘했더라면 형·누나들이 모두 살 수 있었던 거잖아요. 그 생각을 하면 정말 화가 나요…."조군에게 세월호 장학금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세월호 장학금을 받은 이후 책임감 같은 것이 생긴 것 같다"며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안타깝게 희생된 단원고 형·누나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이 생긴다"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기획취재팀글: 임승재차장, 배재흥, 김동필기자사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안광열차장, 장주석, 연주훈기자그래픽: 박성현, 성옥희차장'416단원장학재단'에서 지난해 장학생으로 선정된 조익주(18) 군이 지난 22일 오전 안산 4·16 기억교실에서 책상에 앉아 추모물품을 살펴보고 있다. /기획취재팀

2020-04-28 경인일보

[세월호 그후, 또 4월이 간다·(3·끝)우리의 미래-세월호 세대]친구 잃은 또래들의 아픔

"함께 웃었는데… 한순간 사라져"억누른 감정 표출 기회 거의없어"얘기하고 공감하는 자리 마련되길"친구를 잃은 슬픔을 내색하지 않았다. 아니, 내색할 수 없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식의 이름을 부르면서 울부짖는 친구의 부모님 앞에서 내가 가진 슬픔은 왠지 작은 것처럼 느껴졌다.차디찬 바다에서 주검으로 돌아온 친구들의 장례식이 하루가 멀다 하게 안산에서 치러졌다.'난 어디까지 친구였지?', '걔도 날 친구로 생각했을까?'라는 생각에 혼란스러워졌다. 슬픔의 무게가 가늠조차 되지 않던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함께 웃고 떠들었던 친구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는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단원고 희생자들의 한 친구 이야기다.지난 2017년 봄 세월호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의 친구들이 처음 한자리에 모여서 자신들의 아픔을 털어놓는 자리가 안산시 단원구 와동의 '치유공간 이웃'에 마련됐다. 치유공간 이웃은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을 기억하고 보듬는 시민사회단체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또래 26명이 단원고 희생자 친구들의 아픔을 듣고 기록하는 자리였다.'공감기록단'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활동에 참여했던 전종현(23·대학생)씨는 "억누르던 감정을 트이게 해준 고마운 기회"였다고 떠올렸다. 단원중 출신인 전씨는 동네에서 함께 뛰놀던 친구들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에 가슴에서 끓는 슬픔을 충분히 표출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던 그였다. 남은 친구들에게 세월호 참사가 일종의 금기어로 여겨진 까닭이다.세월호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해도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친구도 그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렵게 발걸음을 뗀 장례식장에선 친구 부모님은 웬만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은 대상이었다. 전씨는 "'내 슬픔을 부모님의 슬픔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나'라는 생각에 울지도 못하고, 슬퍼하는 걸 내색해도 되는 건지도 고민했다"고 옛 기억을 더듬었다.전씨는 지난 16일 세월호 참사 6주기를 기해 마련된 제주도 기행에 함께 따라갔다. 그 자리에서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세월호 참사 희생 학생의 부모님과 민간 잠수사, 생존자들을 만났다. 그는 "한 부모님이 '친구 얘기를 처음 듣는데 좋았어'라고 하셨는데, 그동안의 고민과 부담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전씨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표현했다. 공감기록단에 참여해 슬픔을 치유 받을 수 있었다는 의미다. 여전히 많은 동네 친구들이 그날의 아픔을 털어놓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어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는 "저마다 사랑했고, 아꼈던 친구를 잃었는데 슬프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며 "감정을 꾹 누르며 아프게 사는 친구들이 많은데, 함께 얘기하고 공감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기획취재팀글: 임승재차장, 배재흥, 김동필기자사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안광열차장, 장주석, 연주훈기자그래픽: 박성현, 성옥희차장/치유공간 이웃 홈페이지 캡처

2020-04-28 경인일보

[세월호 그후, 또 4월이 간다·(3·끝)우리의 미래-세월호 세대]단원고 학생 생존자 3명의 고민과 다짐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된 단원고 생존 학생들은 6년이란 시간이 지나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참혹했던 그 날을 어떻게 기억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까.극적으로 구조된 한 학생은 전남 진도군 서거차도로 옮겨진 자신에게 따뜻한 담요와 위로의 말을 건넸던 119구조대 응급구조사처럼 생명을 살리는 일이 하고 싶어졌다. 이제는 군 복무까지 마치고 사회에 첫발을 떼려 하는 다른 한 학생은 후회 없는 삶을 다짐하며 미디어 콘텐츠 에디터를 꿈꾼다. 잠시 휴학을 하고 미래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는 학생도 있다. 병원 응급실에서 응급구조사로 경력을 쌓고 있는 장애진(23)씨, 그리고 이지훈(가명·23·대학생), 김소연(가명·23·휴학생)씨 등 세월호 참사를 겪은 청년 3명이 우리 사회에 전하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세월호'라는 낙인이 따라 붙다이들은 6년이란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단원고 출신임을 주변에 드러내는 게 껄끄럽다고 입을 모았다. 익명을 원한 이씨와 김씨도 자신의 신상이 드러나는 걸 걱정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집회에 참석한 경험이 있다는 장씨는 그런 면에선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라고 했다. 그래도 익명성 뒤에 숨어 단원고 생존 학생들을 조롱하는 막말이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장=사실 가장 부담되는 건 '아~그러냐'며 뭔가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알지만, 저희들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죠.김=물론 신경이 많이 쓰여요. 다른 사람들이 제가 생존자라는 걸 알게 됐을 때는 상대 반응부터 살피게 돼요.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에 대해서…. 혼자서 계속 세월호라는 낙인에 대해 생각하고 걱정하게 되죠.이=뒤에서 무슨 말을 하든, 앞에서만 안 하면 다행이라 생각해요. 제 과거에 대해 남들이 폄하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깨달았어요.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로 평가하도록 치열하게 스스로를 개발하고 증명하는 방법이에요. 이렇게 하지도 않고 낙인에 대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건 간절하지 않다고 외치는 것과 같아요. 제가 이런 노력을 했는데도 좋지 않게 보는 이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써요. 그건 억지에 불과하니까요.# 누군가는 지겹다지만… 우린 여전히 아프다.평생 잊지 못할 학창시절, 그 소중한 친구들을 잃은 이들의 상처는 깊다. 왜 친구들이 희생돼야 했는지, 왜 적극적인 구조가 없었는지, 누가 책임을 질 것인지는 여전한 숙제로 남아있다.장=자기가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하는 얘기가 아닐까 싶어요.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 그럴 거니까요. 아니, 그럴 수가 없죠. 저도 예전에는 대구 지하철 참사와 같은 사고를 나와는 상관없는 먼 일로 여겼어요. 하지만 막상 제 일이 돼 보니까 생각이 달라졌어요. 그런 참사를 겪지 않은 이들에게 내 일이라고 생각하라고 강요하긴 힘들겠죠. 하지만 지겹다며 세월호 희생자들을 깎아내리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다시는 이 같은 참사가 없어지려면 계속 말하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이=자연스러운 반응이라 생각해요. 굳이 그 주장에 반박하고 싶지도 않아요. 다만, 확실한 게 하나 있다면 찢어지게 아팠던 경험은 절대 지겨워질 수 없다는 거예요. 아프지 않았다면 지겨울 수 있고, 이 생각이 이상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강요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저 아프지 않았던 사람은 공감하지 못하는 거고, 많이 상처받은 사람은 공감해서 절대 지겹게 생각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다짐의 의미는이들은 '진상규명'이라는 본질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염려했다. 세월호와 관련한 여러 유언비어와 막말 등이 사람들을 이쪽 저쪽 편을 가르게 하고 다투게 한다는 이유에서다. 생존 학생들은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책 마련을 위해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장=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은 곧 재발 방지로 이어지는 거예요. 잊으면 똑같은 유형의 사고가 반복될 겁니다. 참사 당사자인 제가 진상규명이 왜 필요한지 알리는 활동을 하는 이유예요. 사회 안전망은 너무도 중요한데, 쉽게 잊히곤 해요. 참사가 있었다는 걸 기억해야 재발도 없어요. 다른 참사 피해자들을 만나면 듣는 게 '우리가 잘해야 다음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더 노력해보려고요.이=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 편을 나눠 다투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서로에게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다가 싸우는 건데, 강요하면 할수록 사실과 전혀 상관없는 문제로 넘어가고, 정작 중요한 본질은 흐려지고 말아요.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조금씩 서로 이해하면서 싸우지 않는 시대가 오길 바랍니다.김=교양 수업에서 교수님이 '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면 처음에는 관심 없고 지겨워하던 사람들도, 점점 그 무언가에 문제가 있는 거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게 떠올라요. 세월호 참사도 똑같다고 생각해요. 계속 잊지 않고 얘기하면서 기억하는 거죠. 저희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발걸음을 계속할 거예요. /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기획취재팀글: 임승재차장, 배재흥, 김동필기자사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안광열차장, 장주석, 연주훈기자그래픽: 박성현, 성옥희차장28일 오후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친구인 전종현(23·대학생)씨가 안산 단원고 교내 펜스에 달린 노란 리본을 바라보고 있다. /기획취재팀

2020-04-28 경인일보

[세월호 그후, 또 4월이 간다·(3·끝)우리의 미래-세월호 세대]주민과 유가족 연결하는 '4·16 안산시민연대'

추모시설 놓고 일부서 갈등 빚기도 6년 흘러가며 생긴 '벽' 허무는 역할"안전한 사회, 새로운 비전 세울 시점"안산지역 시민들은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세월호 참사 희생자 혹은 그들의 부모, 형제·자매 등과 '아는 사이'였다. 안산 시민들의 아픔과 책임감이 유독 남달랐던 이유다. 참사 초기에 안산시 지역사회는 남은 가족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6년이란 세월은 한결같던 그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기엔 긴 시간이었다. 기억교실 이전, 합동 분향소 폐쇄, 생명안전공원 건립 등 추모시설을 놓고 일부 주민들과 유가족이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이 잦아지기도 했다.생명안전공원이 들어서는 화랑유원지에서 지난 16일 열린 세월호 참사 6주기 기억식 때 '화랑 지킴이'라는 이름으로 유가족을 향해 거친 말을 내뱉던 몇몇 주민들의 모습은 이런 현실의 한 단면이었다.4·16 안산시민연대는 유가족과 일부 주민들 사이에 생긴 벽을 허무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향한 유가족들의 고독한 싸움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 있다.위성태 안산시민연대 사무국장은 "유가족과 안산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만나서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한 과제"라며 "유가족들은 동네에 들어가서 시민들과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반대로 유가족들을 만나 따뜻하게 손을 잡아 주고 싶어 하는 시민들도 많다"고 설명했다.위 사무국장은 안산지역에서 빚어지고 있는 여러 갈등이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라고 봤다. 하나의 사업을 추진할 때 찬성과 반대 입장은 언제든 나뉘기 마련이다. 세월호 참사 추모와 관련한 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다만, 지켜야 할 선을 넘어서는 행동과 발언은 멈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 사무국장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신과 입장을 가지고 누구나 자기의 주장을 펼칠 수 있다. 세월호와 관련한 갈등이 꼭 안산지역이기 때문에 빚어지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며 "소통을 통해 여러 사람의 마음을 모아가는 게 중요한데, 대화는 하지 않고 소란을 피우거나 거친 발언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어 굉장히 안타깝다"고 했다.그는 안산을 생명 존중 도시로 만들기 위해 많은 시민이 안산시민연대라는 이름 아래 모였다고 했다. 그날의 슬픔을 승화시켜 안전사회를 건설하는 일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숙제라고 여겼다.위 사무국장은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아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비전과 계획을 세워야 하는 시점"이라며 "안산시가 세월호 가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응원의 마음을 보태는 따뜻한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기획취재팀▶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기획취재팀글: 임승재차장, 배재흥, 김동필기자사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안광열차장, 장주석, 연주훈기자그래픽: 박성현, 성옥희차장

2020-04-28 경인일보

[세월호 그후, 또 4월이 간다·(3·끝)우리의 미래-세월호 세대]'4·16의 기억' 남기는 화가

이종구 화백, 단원고 학생 화폭 담아작가로서 '마음의 힘' 소진되는 느낌'다시 4월, 봄이 오다' 10월까지 전시"우리나라의 축적된 모순으로 소중한 아이들이 희생됐어요. 기성세대가 반성하고 앞장서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함께 그 길을 가자고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인천에 작업실을 둔 이종구 화백(중앙대 미술학부 교수)을 만났다. 그는 안산시 단원고 근처에 있는 한 전시실에서 보자고 했다. 학교 근처 주택가의 작은 상가 건물 3층에 자리한 '4·16 기억전시관'이었다. 지난 9일 오후 2시께 찾아간 이곳에는 그와 정평한 화백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이 화백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의 생전 모습을 그림으로 담았다. 아이들이 1학년 때 반별로 찍은 단체 사진을 구해 그렸다. 그림 속 아이들은 해맑은 표정으로 한가운데 담임 선생님을 향해 자기 반 숫자를 가리키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이 아이들 중 325명이 이듬해 인천에서 수학여행지인 제주도로 향하는 세월호에 몸을 실었고 그날 사고로 250명이 숨졌다.이 화백은 2017년 여름 해남 임하도의 한 폐교에서 먹고 자면서 꼬박 3개월을 작업했다. 세월호가 다니던 뱃길이 보이는 곳이다. 그는 "이 시대의 작가라면 누구나 세월호를 그대로 지나치기 어려울 것"이라며 "화가로서 아이들의 영혼이라도 되살려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림으로 기록해서 역사적 증언을 해야겠다는 각오였다"고 말했다.이 화백은 이 그림들과 함께 세월호 참사로 촉발된 광화문 광장의 촛불 시위, 이어 탄생한 새 정부, 그리고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실들을 화폭에 담아 2018년 서울 종로 학고재 갤러리에서 '광장-봄이 오다' 개인전을 열었다.작업을 모두 마치고 '4·16 기억교실(현재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에 위치)'을 다시 찾았다는 이 화백은 "초상의 주인공인 아이들을 책상 위에 놓인, 이제는 영정이 된 사진 속에서 만났을 때의 그 충격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작가로서 마음의 힘이 완전히 소진되는 것 같았다"고 기억했다."산 자의 초상이 아닌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을 그리는 작업이라서 마음이 무겁고 힘겨웠어요. 영혼들이 나를 바라보는 그런 긴장감을 느꼈어요. 목숨을 잃은 아이들을 모두 빼면 이 그림들이 어떻겠습니까. 끔찍해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배경색을 핑크 등으로 예쁘고 따뜻한 색으로 채워넣어 아이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이번 '다시 4월, 봄이 오다' 전시회는 '4·16 기억전시관'에서 오는 10월까지 이어진다. /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기획취재팀글: 임승재차장, 배재흥, 김동필기자사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안광열차장, 장주석, 연주훈기자그래픽: 박성현, 성옥희차장안산시 단원고 근처 주택가의 한 작은 상가 건물에 자리한 4.16 기억전시관에서 '다시 4월, 봄이 오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을 화폭에 담은 이종구 화백(중앙대 미술학부 교수)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기획취재팀

2020-04-28 경인일보

[세월호 그후, 또 4월이 간다·(3·끝)우리의 미래-세월호 세대]진상규명·책임자 처벌 어디까지 왔나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문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가 구성됐다. 사참위는 박근혜 정부 때 출범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의 조사 활동을 당시 청와대와 정부 부처가 조직적으로 방해한 증거를 발견하고 최근 수사를 요청했다.2기 특조위로 불리기도 하는 사참위는 27일 서울 중구 포스트타워 18층 사참위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원의 세월호 유가족 등 민간인 사찰 및 개인정보 수집 등과 관련해 조사한 결과 국정원 법상 직권 남용의 금지 및 직권남용죄 등 범죄 혐의에 대한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며 "국정원 전·현직 직원 5명과 불상의 직원 수명에 대해 검찰에 수사를 요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사참위 조사에 따르면 국정원 직원 최소 2명은 2014년 세월호 유가족인 '유민 아빠' 김영오씨에 대한 최소 3건 이상의 보고서를 작성해 국정원 내부망에 보고했다. 또 국정원으로부터 입수한 세월호 참사 관련 동향 보고서 215건 중 48건의 보고서가 유가족 사찰과 관련된 것으로 사참위는 파악했다.여론조작 관련 보고서도 9건이 있었다는 게 사참위 조사 결과 드러났다. '보수(건전) 세력(언론)을 통한 맞대응'과 '침체된 사회 분위기 쇄신을 위한 일상복귀 분위기 조성' 등 제목의 보고서에는 세월호 추모 분위기를 공익광고 등의 캠페인으로 누그러뜨려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게다가 국정원 자체 예산으로 '세월호 참사를 이제 잊고 새로운 사회를 위해 나아가자'란 내용의 동영상을 외주로 제작해 게시하기도 했다.앞선 지난 22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사참위는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한 전·현직 공무원 19명과 국무조정실 등 10개 정부 부처를 특조위 활동을 방해한 혐의로 수사 요청하기로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사참위는 지난 2015년 특조위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 행적을 조사하려 하자 청와대와 여러 정부 부처가 조직적으로 방해 활동을 펼친 증거를 확인했다고 했다.박근혜 정부의 세월호 참사 조사 방해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도 행정안전부와 기획재정부 등을 대대적으로 압수수색하는 등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는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과 김재원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 조대환 전 특조위 부위원장 등 박근혜 정부의 여권 인사들이 특조위 활동을 방해해 왔다고 주장해 왔다. 또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해 황교안 전 국무총리, 김기춘 전 비서실장, 현기환 전 정무수석, 최경환·유일호 전 기재부 장관 등도 조사방해에 가담했다며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앞서 검찰이 불구속 기소한 김석균 전 해양경찰청장 등 해경 지휘부 11명의 재판은 지난 20일 시작됐다. /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기획취재팀글: 임승재차장, 배재흥, 김동필기자사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안광열차장, 장주석, 연주훈기자그래픽: 박성현, 성옥희차장27일 오전 서울 중구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가정보원의 세월호 유가족 등 민간인 사찰 관련 수사요청 기자회견에서 박병우 세월호참사 진상규명국장이 조사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0-04-28 경인일보

[세월호 그후, 또 4월이 간다·(2)미완의 대책-남은 숙제]어느 수학여행 안전요원의 고백

4대 보험 6개월치 내고 여행사 직원으로수료증 대여가능 허점… 잔심부름 도맡아사전답사 제외 현장 대응력 부족도 문제'수학여행 안전요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세월호 참사 이후 교육부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수학여행·수련활동 등 현장체험학습 운영 매뉴얼'을 내놓았습니다. 안전요원도 그렇게 생겨난 겁니다. 작은 이벤트 회사를 운영하는 저도 봄·가을에는 안전요원으로 일합니다. 코로나19 사태만 아니었다면, 지금 한창 바쁠 때죠.부끄러운 고백을 하겠습니다. 3년 전이에요. 한 여행사 대표가 안전요원으로 일할 사람들을 급히 구한다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학교와 수학여행 계약을 하려면 안전요원이 필요했던 거죠.안전요원이 되려면 일정한 교육을 이수해야 합니다. 국내여행안내사, 국외여행인솔자, 소방안전교육사, 응급구조사, 청소년지도사, 숲길체험지도사 등에게만 교육받을 자격을 줍니다.여행사 대표는 어느 민간단체가 발급하는 국외여행인솔자 자격증을 추천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따기가 쉽거든요. 해외를 나가본 적 없는 제게 여권에 도장 하나는 찍혀 있어야 한다더군요. 부랴부랴 여권을 만들고 당일치기로 일본을 다녀왔죠. 이 자격증을 따려면 여행사에 최소 6개월 이상 근무해야 합니다. 여행사 직원인 것처럼 꾸미려고 최저임금 수준으로 4대 보험 6개월 치를 냈어요. 당국에는 신고가 늦었다고 거짓말을 했죠. 자격증 시험이요? 수업도 안 받고 자격증을 손에 쥔 사람도 봤습니다.이렇게 꼼수로 자격증을 따서 교육부가 대한적십자사에 위탁한 안전요원 교육을 받았어요. 그런데 정작 학생 인솔에 필요한 전문 교육은 빠져 있더군요. 응급처치 위주였습니다. 적십자가 발급하는 안전요원 수료증은 사진이 안 들어가 대여도 가능하다는 허점이 있어요.안전요원은 학생들을 안전하게 인솔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매표소 발권 등 잔심부름까지 안전요원 몫이에요. 교사, 학부모 등이 따라가는 수학여행 사전 답사에 안전요원이 빠진다는 점도 문제예요. 안전요원들이 현장을 몰라 허둥지둥합니다.매뉴얼에 따라 학생 50명당 1명씩은 안전요원을 둬야 합니다. 학생이 100명 미만이면 안전요원은 단 1명만 있어도 된다는 계산이 나오죠. 안전요원은 최소 인력만 쓰고 나머지는 알바생으로 채우는 게 현실입니다.혹여 저의 이야기로 원칙을 지키는 여행사, 학교 관계자들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일은 없길 바랍니다. 수많은 안전 대책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정부가 잘 살펴봤으면 합니다. /기획취재팀 ▶디지털 스페셜 바로가기 (사진을 클릭하세요!)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박근혜정부는 '안전혁신 마스터플랜'을 확정, 발표했다. 대한민국의 재난안전 관리 체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한다는 목표로 당시 국무총리실과 국민안전처를 중심으로 17개 부·처·청이 참여한 중장기 종합계획이다. 학생·학교 안전관리, 소방·해경의 현장 대응 역량 강화, 해양(선박) 안전 등 다양한 정책이 수립됐다. 수학여행 안전요원 대책도 이때 나왔다. 경인일보는 이 익명의 제보자와 두 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추가 취재를 통해 사실 관계에 대한 확인 과정을 거쳤다. ■기획취재팀글: 임승재차장, 배재흥, 김동필기자사진: 김금보, 김도우기자편집: 안광열차장, 장주석, 연주훈기자그래픽: 박성현, 성옥희차장

2020-04-27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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