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인천경영포럼]박남춘 시장 "바이오산업 원부자재 국산화 인프라 확대"

헬스밸리·공정전문센터등 만들어인재양성·기업 기술개발체제 구축남동산단 2023년에 '스마트산단화''광범위한 효과' 지역화폐 지속 강조박남춘 인천시장이 올해 바이오산업의 원자재와 부자재를 국산화하기 위한 인프라 확충사업에 총력을 쏟겠다고 밝혔다.박남춘 인천시장은 9일 연수구 라마다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제416회 조찬강연회 연사로 나와 "인천은 바이오 생산도시 세계 1위로, FDA(미국 식품의약국)·EMA(유럽 의약품청)도 인천에 있는 삼성과 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며 "바이오헬스밸리를 조성해 많은 인천기업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다.박남춘 시장은 올해 시정 운영 방향 중 경제 활성화 정책으로 '지역 전략산업 유치·육성'을 꼽았다.바이오공정전문센터 건립을 추진해 2천500명의 인재를 양성하고, 2022년까지 송도에 바이오융합기술단지를 조성해 250곳의 관련기업을 입주시키겠다는 구상이다.박남춘 시장은 "바이오 관련 원부자재의 국산화 수준이 2%밖에 안 되고 98%를 외부에서 수입하고 있다"며 "바이오헬스밸리에 많은 기업들이 들어와 같이 기술을 개발하고 연구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춰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2월에도 삼성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과 함께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덧붙였다.박남춘 시장은 남동산단 구조고도화를 위한 '스마트산단 조성사업'도 2023년까지 준공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박 시장은 "남동산단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밥 먹는 곳조차 변변한 장소가 없다고 한다"며 "민간 전문가, 공단, 남동구 관계자들과 함께 사업 추진단을 만들 예정이며 2022년까지 소재·부품·장비산업 실증화지원센터도 건립해 혁신적 경제 생태계를 조성하겠다"고 말했다.소상공인을 위한 인천형 지역화폐 '이음카드(e음카드)'는 임기 내 흔들림 없이 밀어붙이겠다고 했다.박남춘 시장은 "이음카드 예산으로 833억원 들어가는데 토목사업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효과를 내고 부가세도 774억원 이상 늘었다"며 "올해 발행액(충전액) 2조5천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누가 뭐래도 사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박 시장은 화물주차장 건립, 중고차수출단지 이전 사업 등에 대해서도 "항만공사가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주민 갈등이 많은 만큼 최선을 다해 풀어보겠다"며 "이해와 힘을 실어달라"고 주문했다. /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박남춘 인천시장이 9일 오전 인천시 연수구 라마다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조찬강연회에서 '2020년도 인천시정 운영방향과 기업 지원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20-01-09 윤설아

[줌인 ifez]송도·청라·영종 종합병원 건립 사업 어떻게 진행되나

연대, 협약따라 지연이자 年 15억~20억1공구 부지는 다른 용도 검토 목소리도청라, 3월 말까지 '사업자 제안서' 접수영종, 최적화 방안 마련 연구용역 추진송도·청라·영종국제도시 등 인천경제자유구역(IFEZ)에는 종합병원 부지가 있다. 송도 2곳(세브란스병원 포함), 청라 1곳, 영종 1곳이다. 종합병원 건립은 IFEZ 주민들의 숙원사업이다. 하지만 사업성 부족으로 장기간 지연되고 있다. IFEZ 인구가 증가하고 각종 개발 호재가 이어지면서 종합병원 건립 여건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인천시 산하 인천경제자유구역청도 종합병원 건립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송도·청라·영종에 계획한 종합병원 건립 사업이 올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봤다.■ 송도 세브란스병원 설계 시작송도 7공구 연세대 국제캠퍼스 부지에는 500~800병상 규모의 세브란스병원이 들어온다.인천시는 2006년 1월 연세대와 국제캠퍼스 조성에 관한 협약을 맺었다. 인천시는 송도 7공구와 11공구 땅을 2단계로 나눠 공급하고, 연세대는 캠퍼스·병원·교육연구시설을 조성하기로 했다. 협약 내용대로 연세대 국제캠퍼스는 2010년 3월 개교했다. 하지만 세브란스 병원은 '사업성 부족'과 '대학 내부 사정'으로 장기간 지연됐다. 인천시는 세브란스병원 건립사업이 더 늦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2018년 3월 연세대와 국제캠퍼스 2단계 사업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 세브란스병원 건립이 약속보다 늦어지면 '지연 이자'를 내야 한다는 조항을 2단계 협약서에 넣었다. → 위치도 참조인천경제청에 따르면 연세대 측은 송도 세브란스병원 설계 업체를 선정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올 상반기에는 설계 업체가 결정될 예정이며, 설계 기간은 1년6개월에서 2년으로 예상된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올 하반기 2단계 사업과 관련한 토지 매매계약을 (연세대와) 체결하면, 세브란스병원 건립 지연 시 페널티가 적용된다"며 "지연 이자로 연간 15억~20억원을 내야 하기 때문에 연세대 측도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송도 1공구에도 8만719㎡ 규모의 종합병원 부지가 있다. 이곳은 투자개방형 병원만 입주할 수 있었는데, 정부가 2018년 규제 혁신 차원에서 국내 종합병원 입주도 허용했다. 인천경제청이 민간사업자 유치를 위해 미국 뉴욕 프레스비테리안(NYP) 병원,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 등과 협의를 벌였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정부가 국내 종합병원도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줬지만, 민간사업자를 유치하긴 어려울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세브란스병원 건립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데다, 종합병원이 2개나 필요할 만큼 송도 인구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다. 지난해 11월 말 기준 송도 인구는 15만8천353명이며, 계획인구는 26만5천611명이다. 1공구 종합병원 부지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방법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인천시의회에서 나오기도 했다.세브란스병원 건립이 지연되자, 민간 차원에서 '전문병원 복합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했었다. 사업 대상지는 송도 4공구 인천도시철도 1호선 지식정보단지역 인근이다. 하지만 외국인투자법인 구성에 실패해 사업이 무산됐다고 한다. 이 부지는 지식정보산업단지로 지정돼 있기 때문에 준공 후 5년간 처분 목적의 분양이 제한된다는 문제도 있다.■ 청라 의료복합타운 사업자 선정'스타필드 청라' 부지 밑에 있는 투자2-2, 투자2-3, 투자2-4블록은 '청라의료복합타운' 조성 대상지다. 26만1천635㎡ 규모다. 500병상 이상 규모의 종합병원, 의료바이오 관련 산학연 시설과 업무시설, 상업시설 등이 들어서게 된다.인천경제청은 이곳에 종합병원을 유치하기 위해 차병원그룹과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등 공을 들여왔다. 하지만 산업통상자원부 경제자유구역위원회가 지난해 4월 '수의계약이 아닌 공모로 사업자를 선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으면서 청라의료복합타운 사업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차병원그룹과 수의계약을 체결할 경우, 특혜 시비가 일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인천경제청은 최근 청라의료복합타운 사업자 선정을 위한 공모 지침서를 인천시와 인천경제청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인천경제청은 오는 9일 오전 10시30분 쉐라톤 서울 팔레스 호텔에서 사업설명회를 개최한다. 3월 말까지 사업 제안서를 접수한 후 4월께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할 계획이다.인천경제청은 수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청라 인구는 10만7천665명으로, 계획인구(9만명)를 이미 넘었다. 하나금융그룹의 금융·디지털·글로벌 기능을 집적화한 '청라 하나드림타운' 조성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데다, '스타필드 청라'도 올 하반기 착공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사업 설명회 분위기를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청라의료복합타운 조성) 여건이 나쁘지 않다"며 "주변에 종합병원이 없어서 사업성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청라의료복합타운 지원시설용지(25~30%)에는 오피스텔 건립이 가능하다고 한다.■ 영종 종합병원 최적화 방안 용역 추진영종 의료시설 부지(인천 중구 운남동 1606-3·4 10만5천139㎡)는 인천대교 진입부에 있다. 인천경제청, 중구청, LH, 인천국제공항공사, 시의회는 지난해 9월 '영종 종합병원 건립 공동 노력을 위한 협의체'를 구성했다. 영종국제도시 인구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인천공항 종사자와 환승객 등을 고려하면 종합병원 건립이 시급하다는 게 이들 기관의 공통된 생각이다.인천경제청은 1억원을 들여 '영종 종합병원 최적화 방안 마련을 위한 연구용역'을 추진한다. 올 상반기에 착수할 예정으로, 용역 기간은 약 6개월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어느 정도의 규모가 적정한 것인지 이번 용역에서 조사하게 된다"며 "영종도에 응급의료와 재난의료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안도 검토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영종 종합병원의 적정 모델을 개발하는 용역인 셈이다.인천경제청은 용역 결과를 토대로 관계 기관 및 주민 의견을 수렴한 후 사업자 공모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20-01-05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41·끝)에필로그]이어붙인 기억의 조각 '독립운동' 집대성 출발점 되길…

스치듯 지나가는 임정수립 100년 아로새기기 위해1년 동안 '인천과 독립운동' 하나로 묶는 데 집중항일투사들 '유배지' 기능에 초점 맞춰 시작강화 등 외딴섬까지 지역 3·1운동 범위 넓혀사진 없거나 수의 입은 모습이 대부분 안타까워소중한 자료 제공한 후손·독자들 관심에 감사'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희미한 기억의 조각이라도 주워담아야 한다.'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이 '인천'과 '독립운동'을 하나로 묶는 작업을 올해 1년 동안 이어 온 이유이자 목표였다. 인천에는 생각보다 더 많고 다양한 애국지사들의 이야기가 묻혀 있었다. 하지만 그 흔적들은 생각보다도 더욱 희미해서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기초적인 데이터조차 정리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있기도 했다.'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2019년은 독립운동 재조명 열풍으로 대한민국이 들썩였지만, 그 열기는 3·1절을 거쳐 현충일이 지나면서 금세 식었다. 돌이켜 보면 인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치듯 지나쳐 가는 '100년'을 붙잡아 인천의 것으로 아로새기는 건 취재팀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을 끌고 오면서 잊힐 대로 잊힌 인천의 독립운동을 되살리려 애썼다.초반부에는 어느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로 기능했던 인천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국사학자·국어학자·민속학자·교육자·언론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계봉우(1880~1959)의 유해가 올해 4월 22일 카자흐스탄에서 6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계봉우 선생의 유해 송환을 언급하며 "우리의 보훈은 아픈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앞서 취재팀은 계봉우가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년 동안 인천 영종도의 어촌마을 예단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는 점을 부각했다. 그는 영종도를 떠나면서 '봄날'에 빗댄 조국의 독립이 찾아오길 희망하는 시를 남겼다.강화에서 교육과 종교를 통해 독립운동을 펼친 강화진위대장 출신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1873~1935)가 대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했다는 사실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일단체 '성명회'를 조직한 오주혁(1876~1934)도 소무의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같은 시기 500여m 건너편 대무의도에는 이동휘가 유배 중이었다. 이동휘와 오주혁은 유배 이전부터 이미 교류가 있었고, 이후 활동에서도 접점이 있어 이들이 유배생활 중 어떤 식으로든 교류했을 것으로 연결지을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강화 석모도로 유배된 이안득(1900~?)은 유배지 석모도의 3·1운동을 주도했다. 묻혀 있던 이안득의 석모도 3·1운동 역시 경인일보 연중기획을 통해 처음 소개됐다.인천의 3·1운동은 100년이나 지났는데도 '중·동구와 미추홀구 일부'로 한정된 통계로 축소된 채 통용됐다. 1만 명이 참가한 강화 만세운동, 부평·계양지역과 외딴 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까지 포함해서 인천지역 3·1운동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신간회는 일제강점기 좌익과 우익이 합세해 독립운동사의 큰 줄기를 이루는 항일단체였다. 인천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신간회 인천지회를 처음으로 다뤄 연구자들로부터 후속 연구의 길을 텄다는 평가를 받았다.인천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평가받아야 할 '유관순의 스승' 김란사(1872~1919)는 그 유명세에 비해 출생 연도조차 불확실했을 정도로 연구가 깊게 이뤄지지 못했다. 김란사의 후손으로부터 남편 하상기(1855~1920)의 제적등본(옛 호적등본)을 최초로 확보해 그가 태어난 해를 1872년으로 확정할 수 있었다. 김란사가 어떻게 세상을 떴는지는 추후 밝혀야 할 숙제로 남았다.인천 항만업계를 이끈 기업인 배인복(1911~1997)이 일제강점기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와 교류하며 후원하는 '상인독립군'으로 활동한 행적을 인천은 놓치고 있었다. 한국 미학(美學)의 선구자라 불리는 우현 고유섭(1905~1944)이 14세 소년 시절 용동 만세운동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이가 그동안 몇이나 됐을까.의사 출신 이민창, 육혈포로 자결한 정재홍(1867~1907), 인천고등학교 제39회 졸업생의 '비밀결사단', 부평 조병창에서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펼친 오순환(1921~1992)과 황장연(1923~2008), 노동운동가 김환옥(1914~?), 광주학생운동에 동참한 이두옥(1911~1950)과 신대성(1909~?), 인천 섬지역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인천사건'의 윤응념(1896~?) 등은 여전히 우리가 소홀히 대해 온 인천의 독립운동가들이다. 이들의 나머지 행적을 추적하는 후속연구가 앞으로의 과제다. 백범 김구(1876~1949)와 인천의 깊은 인연은 이미 널리 알려진 듯하지만, 전문가들 역시 인천과 백범을 연결짓는 폭과 깊이에 있어서는 부족했다. 시선을 조금 돌려서 들여다보니 백범의 생소한 인천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게 쏟아져 나왔다. 김구가 인천감리서 감옥을 탈출할 때 사용한 무기 겸 탈출도구인 '삼릉창'(三稜槍)에 처음으로 주목했다. 아버지 김순영이 옥중의 김구에게 몰래 넣어준 삼릉창은 그것을 제작했을 옛 인천의 대장간 이야기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인천에서 김구의 옥바라지를 한 '임시정부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 있는 인천대공원, 김구의 탈옥을 도왔다고 주장한 감리서 순검(경찰) 이야기를 담은 대중일보 1946년 4월 17일자 기사에 다시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인천의 독립운동은 다국적이었다. 강화 출신 김세원(1870~?)·윤원(1877~1920) 형제는 이역만리 멕시코로 이민을 떠나 고된 노동 속에서도 한인사회를 개척하며 독립자금을 모으고 학교를 세웠다. 미국 하와이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조광원(1897~1972) 신부는 미 해병대 종군신부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사이판전투에서 강제징집돼 포로가 돼버린 동포들을 구출해냈다.장봉도 태생 의열단원 이을규(1894~1972)·정규(1897~1984) 형제는 중국 각지를 넘나들며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다 옥고를 치렀다. 인천이 낳은 거물 정치인 죽산 조봉암(1899~1959)은 러시아와 중국에서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강화학파 유학자 이건승(1858~1924)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직후 서간도로 망명해 해외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생전의 사진 한 장조차도 남기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을 취재할 때는 그렇게도 서글플 수가 없었다. 자료를 뒤적이다 어렵게 건져낸 초상은 일제가 그들을 형무소에 가두거나 감시하기 위해 찍은 '감시대상 인물카드' 속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수의를 입은 사진이 유독 많았다.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일제가 남긴 그 자료를 통해서 후대에 기억돼야 한다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후손을 찾지 못해 국가가 추서한 훈장조차 전달받지 못한 채 잊혀 가고 있는 인천 독립유공자들의 이름도 계속해서 되뇌어야 한다.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이 지난 1년간 기억의 조각들을 주워담고 이어붙인 결과물이 인천의 독립운동을 집대성하는 출발점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연중기획을 마친다. 어려운 발걸음으로 취재팀을 만나 소중한 자료를 선뜻 내준 독립운동가의 후손과 취재팀에 조언을 아끼지 않은 전문가들 그리고 많은 관심을 보내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9-12-25 박경호

[zoom in 송도]'송도 바이오클러스터 연구용역' 최종보고회

벤처기업 'R&D 집적시설' 건립의료기기·디지털 헬스케어 유치연관산업과 융합 시너지 극대화기관협의 거쳐 기본안 확정키로인천 송도국제도시 바이오 클러스터를 송도 11공구까지 확장하는 내용의 연구용역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이번 연구용역을 통해 송도 11공구 산업 영역을 정했다. 또 토지 공급 방법과 바이오 클러스터 활성화를 위한 주요 사업을 검토했다.인천경제청은 지난 20일 송도 G타워 투자상담실에서 '송도 바이오 클러스터 활성화 방안 연구용역' 최종 보고회를 개최했다. 이번 연구용역은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글로벌 기업·연구소가 있는 4·5공구 바이오 클러스터를 11공구까지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인천경제청은 국내 바이오·헬스케어 기업 설문 조사, 전문가 자문, 문헌 조사 등을 통해 11공구 바이오 클러스터 입주 수요를 분석하고 기업 유치 방안을 마련했다.인천경제청은 11공구 바이오 클러스터 산업 영역을 '바이오의약', '의료기기', '디지털 헬스케어'로 정했다. 바이오 기업만 유치해선 경쟁력을 갖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바이오의약과 연관성을 가진 의료기기와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까지 유치하면,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할 것으로 봤다. 산업 영역을 바이오의약에 국한하지 말고 연관 산업과의 융합을 유도해야 한다는 전문가 자문도 있었다. 인천경제청은 11공구 바이오 클러스터 토지 공급 방안도 이번 연구용역에서 검토했다.인천경제청은 지난 9월27일부터 10월31일까지 국내 바이오·헬스케어 기업 등을 대상으로 수요 조사를 진행했다. 국내 기업의 78.8%는 확장 또는 이전 의향이 있었다. 토지 규모는 '3천305㎡ 미만'이 37.3%로 가장 많았다. 국내 기업 대부분은 아직 규모가 작으며 성장 과정에 있는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분석했다. 조사 대상 중에는 '3천305㎡ 이상' 등 넓은 토지를 희망하는 기업도 있었다.인천경제청은 기업의 성장 단계를 고려해 다양한 면적의 토지를 공급하기로 했다. 수요에 맞게 토지를 분할해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인천경제청은 성장 초기 단계에 있는 기업들을 집적화할 수 있는 '고밀도 공간' 조성 방안도 계속해서 연구하기로 했다.이번 연구용역에선 인천경제청의 기업 지원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세부 사업으론 ▲자금·인력이 부족한 바이오벤처를 위한 연구개발 특화 집적시설 건립 ▲원·부자재 국산화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 시범 사업 등을 위한 공동 연구개발(R&D) 프로그램 운영 ▲입주 기업 중심의 협력 모델 구축을 위한 오픈 이노베이션 네트워킹 운영 등이 제시됐다. 기업 설문 조사에서도 "연구·실험을 지원하는 시설이 필요하다", "기업 간 연계·협력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입주 기업들이 인프라(지원시설)를 공유하고 기술 교류 등 협력을 강화해야 바이오 클러스터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인천경제청은 최종 보고회에서 나온 의견을 반영해 연내 연구용역을 완료할 계획이다. 또 연구용역 결과를 토대로 관계 기관과 협의를 벌여 송도 바이오 클러스터 활성화 기본계획을 확정할 방침이다.이원재 인천경제청장은 "송도 바이오 클러스터 확대 조성의 핵심 가치는 '혁신'과 '동반성장'"이라며 "선도 기업, 대학, 병원, 벤처 등 클러스터 주체들의 혁신적 교류와 협력이 실현되는 완성형 생태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인천경제청의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지난 20일 송도 G타워에서 '송도 바이오 클러스터 활성화 방안 연구용역' 최종 보고회를 열고 기업 유치 및 토지 공급 방안과 주요 사업에 대해 논의했다. /인천경제청 제공

2019-12-22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40)]후손 찾는 독립운동가들

독립유공자 훈·포장 전달 못한 인천 출신 인물 21명 달해강화 본적 지홍윤·김덕순·서영백·정도향·이재향 '의병투쟁'권태철·정홍문·장연실·최공섭·황준실 만세시위 적극 가담이건영·장라득·방한조·김윤원은 미국·쿠바등 해외서 활동감옥서 숨진 유갑순… 여성운동가 유점선·최덕임·장상림도인천 본적 정기인·황칠성·유완무도 잊지 않도록 재조명해야"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직후부터 최근까지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 세상을 뜬 지 한참이 지나서야 그 행적이 재조명된 경우도 많다. 항일투쟁에 몸 바치다 너무 이른 나이에 절명해 후손을 보지 못했거나 어려운 삶을 살다 후손마저 뿔뿔이 흩어져 찾지 못하는 독립유공자들의 훈장과 포장이 국가보훈처에 6천여 개나 쌓여있다.국가보훈처는 정부가 독립유공자에게 추서한 훈장을 유공자 본인 또는 직계 후손에게 전달한다. 직계 후손이 없을 때는 적정한 방계 후손에게 전하고 있다. 후손들이 독립운동가의 추모사업을 주도하거나, 집안에서 전해지는 자료를 보관하다 추가로 독립운동 행적을 발굴하는 경우가 많다. 그 후손들이 없으면 보훈처가 보관한다.정부가 독립유공자로 추서한 1만5천여 명 가운데 훈장과 포장을 후손에게조차 전달하지 못한 인물은 올 12월 기준으로 5천984명에 달한다. 북한이 본적인 경우가 가장 많고, 본적이 명확하지 않거나 해외에서 활동해 후손 추적이 어려운 경우도 상당수다. 이들은 후손이 없으니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잊힐 수밖에 없는 처지다. 후손을 찾지 못한 인천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꾸준히 기억하고 재조명해야 하는 게 인천의 책무일 터이다.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현재까지 인천을 본적으로 둔 독립유공자 가운데 후손을 찾지 못한 인물은 21명이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본적을 '인천'과 '강화'로 분류하고 있는데, 강화사람이 17명으로 가장 많다. 인천 본적은 4명이다. 일제강점기 인천의 행정구역이 광역시가 된 현재의 인천 행정구역보다 훨씬 작았고, 본적이 확인되지 않은 인물도 상당수이기 때문에 국가보훈처 자료가 인천 모두를 포괄한다고 볼 수는 없다. 본적이 인천은 아니지만, 인천을 기반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중 후손을 찾지 못한 인물도 더 있을 게 분명하다.강화에서는 일본이 국권 침탈을 본격화하던 조선 말기 격렬한 '의병투쟁'과 1919년 3월 1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후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강화지역 독립유공자 17명 중 의병투쟁과 만세운동에 각각 5명이 투신했다.강화진위분견대 장교였던 지홍윤(1865~1909)은 1907년 8월 9일 일본의 군대 해산에 반발한 진위대 봉기를 주도하며 강화성에서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후 지홍윤은 주력부대를 이끌고 황해도 해주로 탈출해 그 지역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하려다가 일본 밀정의 고발로 체포돼 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지홍윤이 충분히 가족을 꾸렸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는 있으나, 1991년 애국장 서훈을 받은 지 30년 가까이 후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김덕순은 1908년 6월부터 강화 교동을 중심으로 의병을 꾸려 일본 선원과 밀정을 처단하다가 붙잡혀 교수형으로 순국했다.서영백(1878~?)은 1908년 초 40여 명 규모의 김태의 의병부대에 합류해 총기와 군도로 무장하고 강화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으다가 붙잡혔다. 그는 내란죄로 기소됐으나, 재판 과정에서 강도죄로 바뀌어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서영백의 판결문에는 '법무대신 고영희(高永喜)' 명의로 일본인 재판장에게 "서영백을 특별히 본 형에서 한 등급을 감한다"는 임금의 뜻이 있다는 훈령을 내린 후 종신형으로 감형받은 내용이 있다. 정도향(1867~1908)은 1908년 9월부터 강화도의 장사들을 모았다는 이능권(1864~1909)의 의병부대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陳)에 가담했다. 정도향은 의병부대에서 관헌의 동정을 살피고, 부대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활동을 하다가 같은 해 12월 20일 일본 경찰에 의해 참살당했다. 이재향(1875~?)은 강화 석모도 출신인데, 1908년 충북 청원군 일대에서 유현서(1882~1909) 의병부대원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된 기록이 있다.후손을 찾지 못한 강화지역 만세운동 유공자들은 대부분 1919년 3월 18일 '결사대장' 유봉진(1886~1956)이 이끈 대규모 강화 읍내 시장 시위에 참가했다. 권태철(1897~?)은 강화 만세시위 때 신문리 시장에서 큰 종이로 만든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강화경찰서 순사 김덕찬이 태극기를 빼앗으려 하자 권태철은 오른손으로 기를 붙잡고, 왼손으로 김덕찬의 따귀를 쳤다. 체포된 권태철은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정홍문(1888~1928)은 유봉진과 함께 강화경찰서 앞에서 3시간 동안 "앞서 유치한 사람을 석방하고, 시장에서 칼을 뽑았던 김 순사를 쳐서 죽일 터이니 인도하라"고 외쳤다. 그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장연실(1868~?)과 최공섭(1902~?)도 이날 강화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가 체포돼 처벌받았다. 황준실(1902~?)은 1년 뒤인 1920년 양사면 철산리에서 오용진 등과 다시 대규모 만세시위를 벌이려다 발각돼 징역 1년형을 받았다.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강화사람들도 눈길을 끈다.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이들의 후손은 찾을 길이 더욱 막막하다.강화 길상면 선두리가 본적인 이건영(1886~1939)은 1910년부터 1930년까지 미주지역 한국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원·회장, 로스앤젤레스지방회 경찰원·대의원·총무, 뉴욕지방회 총무 등을 지냈다.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한민보'를 보면, 이건영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육십원 잡화상점'이라는 가게를 운영하면서 여러 차례 독립금과 국민의무금 등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신한민보' 1939년 12월 7일자 신문에는 그해 12월 1일 이건영이 뉴욕에서 별세했다는 부고가 실렸다.강화 길상면 온수리가 본적일 것으로 추정되는 장라득(1879~?)도 1908년부터 미국 오클랜드 등지에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며 해방이 될 때까지 여러 번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공로가 인정돼 2017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됐다. 1910년대 멕시코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대 쿠바로 건너간 방한조(1886~?)는 강화 선원면 창동이 본적이다. 해방 때까지 쿠바 한인단체 임원을 역임하면서 꾸준히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는데, 2018년에서야 건국포장에 추서됐다. 멕시코에서 한인 이민자 자녀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한 김윤원(1877~1920)도 강화 출신 독립유공자다.서울 경신학교 학생이던 강화 화도면 출신 유갑순(1892~1921)은 1920년 5월 서울에서 상하이 임시정부 교통국 경성 담당 이원직(?~1945)에게 임정이 발행한 공보와 독립신문을 받고, 이를 배포하기 위한 자금과 동지를 모으다가 체포됐다. 유갑순은 주변 사람들에게 임시정부 총감부 명의 특파원증을 보이며 "우리들 청년이 묵시할 시대가 아니다. 서로 함께 조선 독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고 설명했다는 기록이 판결문에 나온다.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유갑순은 1921년 6월 27일 옥중에서 숨을 거뒀다.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 앞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여성 유점선(1901~?)도 강화 출신이다. 1930년 1월 16일 서울 경성여자상업학교 3학년 재학 중에 광주학생운동 영향을 받아 만세운동과 동맹휴교에 참여하다 구류 20일 처분을 받은 최덕임(1912~?)도 강화 출신 여성이다. 같은 시기 서울 근화여학교 2학년에 다니면서 만세운동과 동맹휴교에 동참한 여성 장상림(1913~?)은 인천 화평동이 본적으로 나온다. 최덕임과 장상림은 지난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인천 출신 정기인(1888~?)은 1907년 11월부터 1909년 11월까지 경기도 용인, 광주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돼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역시 인천 출신인 황칠성(1894~?)은 1919년 3월 28일 경기도 수원 송산면 사강리(현 화성시)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일본인 순사를 처단하다 붙잡혀 징역 7년형을 받았다. 인천에서 감옥살이를 하던 백범 김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웠고, 훗날 백범을 만나 김창수였던 이름을 김구(金龜)라고 고쳐주기도 한 민족운동가 인천의 유완무(1861~1909) 역시 서훈을 전달받을 후손이 없는 상황이다. 유완무는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 근거지를 개척하기 위한 활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20년 강화 양사면에서 대규모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려다 발각돼 옥고를 치른 황준실 지사. /국사편찬위원회 제공미국에서 활동한 강화 출신 이건영 지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잡화상점을 운영한다는 '신한민보' 1919년 3월 22일자 기사. 출처/공훈전자사료관쿠바 하바나에서 대한인국민회 하바나지방회 총무를 맡고 있는 강화 출신 방한조 지사가 광복군후원금을 걷는 데 쉬지 않고 있다는 내용의 '신한민보' 1941년 5월 8일자 기사.상하이 임시정부 공보물을 배포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붙잡혀 옥중에서 숨을 거둔 유갑순 지사.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2019-12-18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39)]조병창에서 독립운동 벌인 오순환과 황장연

캠프마켓 부지 옛 일제 병참기지감시속 두 노동자의 용감한 활동인천 부평에 있던 '일본육군인천조병창(이하 조병창)'은 일제의 핵심 병참기지였다. 일제는 조병창을 본격적으로 운영한 1941년부터 매년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일제는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를 대규모로 동원했다. 전쟁 말기에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학생까지 강제 동원했다.한반도 최대 규모의 군수공장인 조병창에선 소총과 포탄, 탄환뿐만 아니라 선박과 무전기까지 만들었는데,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같은 공정만 반복하게 했다. 자신이 무엇을 만드는지도 모르게 했다. 인천대학교 이상의 교수가 2017년 7~8월 조병창 노동자 12명의 구술을 채록한 자료를 보면 한 노동자는 부품검사를 하고 이상이 없으면 탄창에 쇠도장을 찍는 업무만 했다. 다른 노동자는 칼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판단하는 단순한 일만 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무기 제조 종합기술을 습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일제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조선인 노동자들은 조병창에 들어가 무기를 밀반출하거나 무기 제조법을 빼내려고 했다. 독립운동가 오순환(1921~1992)과 황장연(1923~2008)이 대표적이다.오순환은 조병창에 위장취업해 무기 제조법을 배우려고 했다. 그는 조병창에서 배운 기술로 무기를 만들어 조선 총독이나 일제 고관을 처단하고자 했다. 오순환의 계획은 안타깝게도 조병창 내에서 적발돼 실패로 돌아갔으나, 독립운동가들이 암시장에서 총기를 구매했던 점을 고려하면 매우 획기적인 시도였다.황장연은 조병창에서 만든 무기를 빼돌리려 했다. 황장연은 동료 30여 명을 모아 '고려재건당(高麗再建黨)'을 조직했다. 또 임시정부 요원과 접선해 권총 3정과 실탄 50발을 전달하려고 했다.조병창 침투 독립운동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조병창은 해방 이후 미군부지로 징발당했다. '애스컴씨티'와 '캠프마켓'이다. 캠프마켓 부지반환을 앞둔 지금, 조병창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를 우리가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12-11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9)]조병창에서 독립운동 벌인 오순환과 황장연

부평에 위치 매월 소총 4천정·탄환 70만발 등 생산학생까지 강제동원… 헌병·경찰 삼엄한 경비 '통제'오순환, 총독 암살 위해 창천체육회·조기회 만들어제조법 배우려 '위장취업'… 이듬해 발각 고문 당해황장연은 감시 심한 내부서 '고려재건당' 조직 눈길권총·실탄 등 임정요원에 전달하려다 붙잡혀 '옥고'일제는 1930년대 후반 인천 부평을 중국에 진출하려는 일본의 대규모 병참기지로 쓰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중일전쟁 당시 한반도에서 필요한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1941년 부평에 대규모 군수 공장의 문을 열었다. 지금은 '캠프마켓'이라는 이름으로 인천 부평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육군인천조병창(이하 조병창)'이다.당시 조병창은 한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기 제조 공장이었다. 이 때문에 조병창에 들어가 무기를 밀반출하거나 무기 제조법을 빼내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독립운동가 오순환(1921~1992)과 황장연(1923~2008)이 대표적이다. 군수 공장이었던 탓에 조병창의 경비는 매우 삼엄했지만, 오순환과 황장연은 그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에 보탬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연구자들은 조병창 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인물들이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해방 후 조병창 부지는 미군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캠프마켓 부지 반환을 앞둔 만큼 이제라도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공장들도 많았지만, 창고도 많았어요. 공장에서 만든 물건들을 쌓아 두던 곳이죠. 안에 기차가 다녀서 가끔 물건들을 싣고 가기도 했어요."조병창 내 병원에서 3년간 일했던 지영례(91) 할머니는 조병창에 대해 이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천대학교 이상의 교수가 2017년 7~8월 채록한 조병창 노동자 12명의 구술과 관련 자료를 보면 조병창은 3개의 공장으로 구성돼 있었다. 조병창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규모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고 증언하고 있다.일본 육군은 서울과 인천의 중간에 있는 데다, 인천항에서 멀지 않고, 경인선을 이용해 곧바로 물자를 운송할 수 있는 부평 지역을 조병창의 부지로 선택했다. 또 부평에는 일본군 제20사단이 담당하던 부평연습장이 있어서 대규모 부지를 확보하는 데 수월했던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조병창에서는 매달 소총 4천정과 총검 2만개, 소총 탄환 70만발, 포탄 3만발, 군도(軍刀) 2만개, 차량 200량을 생산했다. 1944년부터 광복 때까지는 총 250여척의 선박과 200여개의 무전기를 제작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심지어 당시 일본 육군이 비밀리에 잠수함을 만들던 인천 동구 만석동 조선기계제작소에 관련 부품을 공급했다.조병창이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한 1941년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4년여 동안 조병창의 총생산액은 1억1천330만엔에 달했다. 1940년 우리나라의 쌀 한 가마니(80㎏)의 가격이 22엔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1조300억원에 달하는 제품을 만들어 낸 셈이다. 초기 조병창에서는 공개적인 모집을 통해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았다. 공개 채용 형태로 조병창에 입사한 노동자들은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상의 교수 채록에 따르면 당시 조병창에서 근무했던 노동자들은 "집으로 돈을 부치기는커녕 오히려 집에서 (돈을) 보내줘야만 할 정도로 열악했다"고 증언하고 있다.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조선총독부는 '국민징용령'을 시행했다. 이때부터 조병창에선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까지 강제로 동원해 부족한 노동력을 채웠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는 1944년 5월 "결전비상조치요강에 기초한 제1회 학도동원이 시행돼 '경성공업(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인천중학(현 제물포고등학교)', '인천상업(현 인천고등학교)', '인천공업(현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인천고여(현 인천여자고등학교)', '소화고여(현 박문여자고등학교)' 남녀생도 360명이 인천육군조병창에 입창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육군은 조병창에 강제로 끌려간 학생들에게는 월급도 주지 않았다.조병창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공수하는 공장이기 때문에 일본 육군 헌병대와 경찰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 운영됐다. 조병창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조병창에 들어가면 굴뚝에 들어간 것처럼 어딘지 알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대부분 노동자는 자신의 숙소와 작업장의 한정된 지역에서만 통행할 수 있었다. 노동자 가운데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은 체포되거나 밖으로 추방됐다.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철저한 통제가 계속됐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진행됐다. 오순환은 독립운동을 하고자 스스로 조병창에 들어간 인물이다. 독립운동가 김승학이 1970년 발간한 '한국독립사'에서는 오순환을 1921년에 태어난 독립운동가로 소개하고 있다. 서울 창천감리교회 청년회에 속해 있던 그는 회원 21명을 모아 항일 결사 단체인 '창천체육회(滄川體育會)'와 '조기회(朝起會)'를 조직했다.창천체육회와 조기회는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조선총독과 일제 고관 암살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를 위해 그는 1941년 10월 함께 활동하던 김군회(1918~1963), 정은태(1921~1996) 등과 함께 조병창에 위장 취업했다. 조병창은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군수공장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무기 제조 기술을 배우기 위함이었던 것이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암시장을 통해 구매한 총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순환은 매우 획기적인 시도를 한 셈이다.안타깝게도 오순환의 계획은 이듬해 경찰에 발각됐고, 함께 잠입한 회원들과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오순환이 조병창에서 배운 기술로 실제 무기를 만들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순환은 1944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그의 큰아들인 오세대(73)씨는 9일 경인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해방 후 철공소를 운영할 정도로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었다"며 "조병창에서 몇 달만 일하면 충분히 무기 제조 기술을 배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버지는 매우 강직했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며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허리통증에 시달렸지만, 항상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셨다"고 덧붙였다.조병창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은 오순환뿐만이 아니다. 황장연은 조병창에서 제작된 무기를 빼돌려 임시정부에 전달하려 했던 인물이다.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는 그가 1923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황장연이 조병창에 언제 들어갔는지에 대해선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그가 조선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은 점을 보면 강제로 동원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1943년 5월 황장연은 조병창에서 함께 일하던 30여명의 동료들과 '고려재건당(高麗再建黨)'이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당시 한반도 내에 어느 곳보다 철저한 감시가 이뤄지는 조병창에서 그가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를 만들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1944년 9월 황장연은 임시정부 요원이던 신교선과 접선해 권총 3정, 실탄 50발을 전달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조병창을 관리하던 일본 육군에게 발각됐고, 그는 이듬해 2월 조선군법회의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오순환과 황장연 이외에도 조병창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인물이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 자료도 있다. 재미교민단체가 발행한 '국민보'는 1945년 8월 15일 자 신문에 "군수공장 공인 100여명이 폭력단을 만들어 적의 기관을 파괴할 폭탄과 화약을 감추어 두었다가 붙잡혔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조병창에 강제 동원됐던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학생은 숙소 내 화장실에 '조선 독립만세'라고 적은 종이를 붙이기도 했고,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부는 '일본의 전쟁을 유리하게 만드는 무기를 만들지 말자'며 쟁의행위를 일으키기도 했다.아쉽게도 조병창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본 패망 직후에는 조병창을 관리하는 일본인들이 관련 문서를 파쇄하고 본국에 돌아간 데다, 미군이 오랜 기간 그 터를 차지하고 있어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인천연구원 김창수 부원장은 "오순환과 황장연은 일제가 가장 엄격하게 통제하던 조병창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며 "이들뿐만 아니라 조병창 내에서 활동했던 더 많은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밝혀내기 위한 연구가 절실한 시점"이라고 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미군(軍) 노릅 파이어(Norb-Faye)가 촬영한 1948년 부평 일대의 전경. 하얀색 바탕으로 표기된 부분이 당시 건물이고, 검은 테두리 친 표기가 현재 시설이다. /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제공

2019-12-11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8)]용유도의 3·28만세운동

나수영 前면장 십시일반 기념비 건립보존회 만들어 후손들에 알리기 노력"삼월 찬 바람에 몸을 던져 산과 바다에 울리도록 외친 만세 소리 / 이제 비바람 지나간 하늘에 영겁으로 뻗는 웃음 되어 조국의 미래에 꺼지지 않는 불을 밝히리."인천 용유도 마시안해변 인근에는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있다. 인천 영종·용유도 지역의 유일한 3·1 운동인 '3·28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서울 배재학당을 다니던 조명원(1900~1968)은 3·1운동 소식을 섬마을에 전했고, 조종서(1898~?)·최봉학(1897~1955)·문무현(1899~1970) 등과 함께 '혈성단(血誠團)'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과 만세운동에 나섰다.나수영(91) 전 용유면장은 그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그는 면장으로 일하던 1982년 '용유면 삼일독립만세기념 공적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기념비 제작을 추진했다. 그는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 어른들을 통해 용유도에서 만세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후손들은 독립운동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 것 같았다"며 "당시 용유도에 살던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보탰고, 부족한 돈은 주민 스스로 땅을 팔아서라도 채웠다. 사비를 털어서라도 역사적 사실을 꼭 기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나 전 면장의 노력으로 만세 함성이 울린 지 63년 만인 1983년 3월 28일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이곳에서는 매년 3월 1일 선조들의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열린다. 용유도 주민들은 만세운동을 후대에 계속 알리기 위해 '용유 3·1 독립만세 기념비 보존회'를 만들어 기념비를 관리하고 있다. 인천 중구청도 2017년 추모공원 기념비를 보강했다. 서병구 보존회 회장은 "우리 지역에도 이러한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 전하고 싶은 심정으로 기념비를 관리하고 있다"며 "일제의 압제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벌인 우리 지역의 훌륭한 역사를 후손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지난 3일 오후 인천시 중구 용유동 행정복지센터에서 서병구 3·1운동기념비보존위원회장(왼쪽)과 나수영 전 용유면장이 용유 3·1 만세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12-0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8)]용유도의 3·28만세운동

'혈성단' 조명원·조종서·최봉학·문무현 앞장이기복·유웅렬·이난의 '태극기' 제작 힘보태일본인에 땅 빼앗긴 주민들 불만 극에 달해1919년 3월 28일 관청리 일대 150여명 집결주도자들 복역후에도 고문 후유증 등 '고통'1991년 용유中 학생들, 후손 인터뷰 책 발간'아름다운 내 고장…' 중요 연구자료로 꼽혀1919년 3월의 독립운동은 인천의 작은 섬 용유도에까지 번졌다. 용유도 만세운동은 3월 28일에 일어났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조명원(1900~1968)이 3·1 만세 운동 소식을 섬으로 가져왔고, 조종서(1898~?)·최봉학(1897~1955)·문무현(1899~1970) 등이 함께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만세를 외쳤다. 용유도 사람들은 이를 3·28 만세운동이라 부른다.용유도는 지금은 인천국제공항이 자리 잡은 곳이다. 인천대교와 영종대교 등 연륙교로 연결돼 있어 언제든 드나들 수 있어 육지나 다름 없는 지역이다. 하지만 100년 전만 하더라도 용유도는 인천항에서 20㎞ 떨어진 외딴 섬이었다. 1919년 용유도에서 작은 돛단배를 타고 인근 영종도로 간 뒤, 이곳에서 또 배를 갈아타야만 인천에 나갈 수 있었다. 늦게나마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용유도 주민들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모았다."조선 운동을 거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이라."1919년 3월 27일 밤. 용유도의 7개 마을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긴 격문 80여 통이 배포됐다. 이 격문을 제작한 사람은 조명원과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 등 당시 용유면 남북리에 거주하던 젊은 청년들이었다.서울 배재학당에 다니던 조명원은 서울에서 열린 3·1 운동에 참여한 이후 같은 달 23일 독립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고향 용유도로 돌아왔다. 남북리 대지주의 손자였던 그는 어린 시절 개인 교사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서울로 유학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명원은 5촌 조카 조종서와 최봉학, 문무현과 '혈성단(血誠團)'이라는 비밀 독립운동단체를 만들고, 용유도에서도 만세 운동을 벌이자고 결의했다. 혈성단이 만들어진 곳은 지금 주소로 인천 중구 남북동 868의 '조병수 가옥'이다. 이곳은 조선 말기인 1890년 지어진 옛집으로, 1997년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현재 이 집에 거주하는 조병수 씨는 조명원과 6촌 관계다.이들은 만세운동 거사 일을 5일 뒤인 28일로, 거사 장소는 당시 용유중학교가 있던 관청리 일대로 정했다. 혈성단이 이곳을 만세 운동 장소로 선정한 이유는 용유도에서 가장 넓은 들판이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혈성단은 격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주민들에게 집중적으로 배포했다. 용유면 선임서기로 근무하던 이기복(1889~?)도 거사 소식을 접하고 을왕리에 있는 유웅렬(1896~1939)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독립을 향한 열망까지 꺾이지는 않았던 거였다. 을왕리에 거주하던 이난의(1884~1957)도 만세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태극기를 제작해 마을 주민에게 나눠줬다.28일이 되자 용유도 주민들은 관청리 광장에 모였다. 조선총독부가 3·1 운동 동향을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당시 관청리 광장에는 150여 명의 용유도 주민들이 집결했다. 1894년 발행한 '영종진 사례책'에 용유도에 248호가 거주한다고 기록돼 있는 점을 고려하면 1910년대 용유도의 인구는 1천명~1천500명 안팎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인구의 10분의 1 정도가 만세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많은 수의 용유도 주민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유는 이들이 일본인에게 큰 피해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토지조사령'을 공포했다. 지세 부담을 공정하게 하고,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이었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식민통치에 필요한 조선총독부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토지 조사 사업은 조선 총독이 정한 기간 안에 토지 소유권자가 직접 신고해 소유지로 인정받는 '신고주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구비 서류나 절차가 매우 까다로운 데다, 신고기간도 매우 짧아 많은 조선인이 토지를 빼앗기는 일이 발생했다. 조선총독부는 미신고 토지를 총독부 소유로 전환했고, 이를 일본인에게 헐값에 넘겨줬다.용유도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용유도에는 조선 시대부터 나라에서 운영하던 목장과 염전이 많았다. 1910년대만 하더라도 특정 토지 소유자가 없는 땅이 많았다. 토지 조사가 마무리된 이후 이러한 토지는 모두 조선총독부 소유로 편입됐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일본인에게 판매했다. 조선총독부 관련 서류를 살펴보면 1919년 총독부는 일본인 오구라 류스케에 용유도 토지를 양도한 것으로 나온다. 그는 1926년 용유도에 있는 임야 95만여㎡를 혼자 소유했다. 자신의 땅을 일본인에게 빼앗긴 용유도 주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용유도 주민들은 대형 태극기를 대나무 죽창에 매달아 관청리 광장 중앙에 꽂았다. 이날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주민들은 "대나무 장대에 있는 대형 태극기는 장정 두 사람이 들기에도 힘들 만큼 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주민 150여 명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 혈성단원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고, 주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용유도 전 지역을 돌아다녔다. 당시 만세운동에는 용유면 면장이었던 정우용도 참여했다고 한다. 이날 시작된 용유도 만세 운동은 이후 이틀이나 계속됐다.용유도의 만세 운동은 뱃길로 십분 정도 떨어져 있던 무의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당시 무의도는 인천항 축항 공사에 필요한 석재를 조달하기 위한 채석장이 있었는데, 이곳 주민과 인부들은 인천이 바라다보이는 곳에서 만세를 불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채석장 감독이었던 일본인 마쓰다 미야타로오도 주민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고 전한다.조선총독부가 3·1 운동 동향을 파악한 문서에 따르면 혈성단 단원을 포함한 만세운동 주요 참가자들은 모두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인천경찰서로 옮겨진 뒤 가혹한 구타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재판기록을 보면 만세 운동을 주도한 조명원은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고, 조종서와 최봉학, 문무현 등 나머지 혈성단원은 징역 1년형을 받았다. 을왕리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유웅렬도 태형 90대의 판결을 받는 등 이날 만세운동으로 처벌받은 용유도 주민은 11명이나 됐다. 용유면 서기로 일하던 이기복은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직업을 잃어야만 했다.조명원 등 혈성단원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이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조명원은 고문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데다, 일제의 감시로 평생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조종서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강화도로 이주했지만, 6·25 전쟁 당시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 최봉학과 문무현, 유웅렬 등도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했다고 한다."을왕 해수욕장이 있고 해당화 해송 숲이 해변을 덮고 있는 곳이 내 고장 용유도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내 고장에 일본 제국주의의 군화가 '용유의 얼'을 앗으려 했습니다. 1919년 3월 28일 우리 선조들은 분연히 일어섰습니다."1991년 용유중학교에 다니던 향토조사반 학생 8명은 이들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아름다운 내 고장 용유도'라는 책을 냈다. 당시 학생들은 용유도에 거주하던 만세운동 참가자 후손들을 인터뷰해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3·28 독립운동에 관한 가장 중요한 기록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이들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지난해 기획 전시를 진행한 바 있는 영종역사관 김연희 학예사는 "영종·용유도 지역의 유일한 독립운동이지만, 관련 사료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라며 "용유도의 만세 운동은 외부의 지원 없이 섬 주민들 스스로 실행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지금이라도 관련 연구가 더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영종 용유 만세운동 기념비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사진. 왼쪽부터 조명원,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 지사. 출처/국사편찬위원회조명원 등 혈성단원들이 독립운동을 계획했던 조병수 가옥.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용유도 주민들이 만세 운동을 벌인 관청리 광장의 현재 모습.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용유도 3·28 독립운동 당시 이난의가 사용한 태극기. 가로 40cm, 세로 60cm이며 천이 닳아 주위가 헤졌다. 우측에는 대한독립만세가 쓰여 있고 괘의 좌우가 바뀌어 그려져 있다. 1989년 국가보훈처에 기증했다. /국가보훈처 제공용유중학교 학생들이 만든 '아름다운 내 고장 용유도' 표지.

2019-12-0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37)]정재홍의 육혈포

1907년 박영효 귀국 환영회 자리서암살용 권총으로 사회에 경종 울려'육혈포(六穴砲)'는 탄환을 넣는 구멍이 여섯 개 있는 권총이다. 보통 탄창이 회전식으로 된 연발 권총 리볼버(revolver)를 육혈포라 불렀는데 국립국어원은 그 어원이 확실치 않다고 밝히고 있다.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 육혈포를 비롯한 각종 권총은 애국지사의 무기였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했던 무기도 권총이었다. 안중근이 사용했던 권총은 벨기에산 브라우닝 M1900으로 리볼버가 아니라 손잡이에 탄창을 끼워 넣는 자동권총이었다. 안중근은 자동권총 외에도 스미스&웨슨의 38구경 리볼버(육혈포)도 마련했지만, 암살에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육혈포는 소지가 간편해 품에 숨기기 쉽다는 장점이 있어 일제 관료에 대한 암살에 쓰였고, 친일파를 협박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일제는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해 육혈포로 부호들을 겨눈 애국지사들을 강도죄로 엮기도 했다.이처럼 육혈포는 주로 적을 겨누는 데 쓰였지만, 자신을 겨누는 데 사용한 독립운동가가 인천에 있었다. 계몽운동가로서 인천에 학교를 설립해 인재 육성으로 나라의 독립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썼던 정재홍(1867~1907)이다.조선 말기 근대 문물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개화파들이 을사늑약 이후 자연스럽게 친일의 옷으로 갈아입으려던 시기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이었던 정재홍은 그들의 앞에서 육혈포로 자결했다.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친일파로 변절해 1907년 귀국한 개화파 박영효의 귀국 환영회 자리에서였다. 계몽과 개화를 내세워 친일을 정당화한 이들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정재홍은 변절자를 쏘고 자결할지와 자결만으로 사회에 경종을 울릴지를 번민하다 자결을 택했다. 저격은 복수와 또 다른 적(敵)을 만들고 국가의 행복에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그의 육혈포가 정확히 어떤 총이었는지 어디서 구해서 어떻게 처분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육혈포의 총구만큼이나 뜨거웠던 독립을 향한 그의 열정만이 식지 않고 인천 지역에 전해질 뿐이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11-27 김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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