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독립운동과 인천·(27)]삼연 곽상훈

17세때 동래서 이주…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 초대회장고유섭·조진만 등도 배출한 '문예부' 중심 문화활동 전개3·1운동 확산때 고향 만세시위 주도하다 체포돼 수감생활인천 최초 야구단 '한용단' 지역봉사 '소년군' 단장맡기도민족연합전선 신간회서 '계몽' 앞장… 해방후 정치인 행보삼연(三然) 곽상훈(郭尙勳·1896~1980)은 조봉암, 장면, 이승엽과 더불어 인천이 낳은 거물 정치인이다. 제헌국회부터 5번의 국회의원을 지내고, 국회의장,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맡았던 곽상훈은 우익 진영을 대표했다.곽상훈은 1919년 3월 경성고등공업학교 재학 중 고향인 부산 동래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일제강점기 때 인천을 기반으로 학생운동, 소년운동, 신간회 등 합법적으로 국민을 결집하고 실력을 기르자는 방향의 항일운동을 택했다. 그는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친일로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검찰관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야당 소속 정치인으로 굵직한 행보를 이어갔지만, 만년에는 5·16 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비판받은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곽상훈의 행적이다.곽상훈이 1972년 월간지 '세대'에 연재한 '삼연회고록'을 보면, 경성고등공업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17세 때 동래에서 인천으로 이주했다. 그는 인천에 사는 큰형 집에서 경인선을 타고 서울 경성고공으로 통학했다. 곽상훈은 회고록에서 "경인통학생으로서 아침저녁 불편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무렵부터 인천은 나의 제2 고향이 되어 주었다"고 했다.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학교로 통학하는 학생들은 경인철도를 탔다. 인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다닐 상급학교가 부족해 서울로 진학하는 경우도 상당수였다.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에는 경인선 기차 통학이 1915년 무렵부터 시작됐고, 통학생 수는 한국 학생이 200명, 일본 학생이 100명 정도였다고 나온다.서울로 통학하는 인천 학생들은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를 결성해 교류했고, 초대 회장은 곽상훈이 맡았다. 곽상훈은 학생들 사이에서 야구, 축구, 농구 등 운동을 잘하는 '만능 스포츠맨'으로 이름을 알렸다고 한다. 조선인을 무시하는 일본 학생을 "야구방망이로 늘씬하게 두들겨 주었다"는 일화도 남기는 등 경인통학생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던 게 친목회 초대 회장을 맡은 이유로 보인다. 교육기회를 얻은 학생들이 모인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는 특히 문예부를 중심으로 문화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한국 미학(美學)의 선구자라 불리는 우현 고유섭(1905~1944), 대법원장을 지낸 조진만(1903~1979),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 이길용(1899~?), 흑인시를 개척한 시인 배인철(1920~1947) 등이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 문예부 출신이다.최원식 인하대 명예교수는 2005년 펴낸 인천론집 '황해에 부는 바람'에서 "경인선은 일제의 군사적 목적 아래 계획됐지만, 뜻밖에도 인천의 문화 역량을 한층 북돋았으니, 그 첨병 노릇을 맡아 한 것이 바로 경인기차통학생들이었다"며 "일제의 침략 루트로 건설된 경인선을 오히려 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공간으로 탈환했다"고 평가했다.곽상훈은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자 경인통학생을 대표해 각처의 학생들을 동원했고,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의 동원 책임까지 지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인천상고 학생들과 만세시위를 하고 3월 10일께 고향인 동래로 내려갔다. 독립선언서 내용을 창호지에 베끼고, 노끈을 꼬아 숨겨서 가져갔다고 한다. 동래읍 장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미결수로 8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다가 풀려났다. 이 일로 곽상훈은 경성고공에서 퇴학당했다.곽상훈은 1920년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 소속 16~17세 학생을 중심으로 인천의 첫 야구단인 '한용단'(漢勇團)을 만들고, 자신은 단장을 맡았다. 한용단의 홈구장은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인 '웃터골경기장'(인천공설운동장)이었다. '인천 한 세기'를 보면, 한용단은 인천미두취인소가 주축인 '미신'(米信), 일본철도사무소의 '기관고'(機關庫) 등 일본인 팀과도 맞붙었다. 언론인 고일이 1955년 쓴 '인천석금'에서는 "야구대회가 있다고 소문만 나면 시민 팬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엿장수도 오고 지게꾼도 대섰다. 할머니도 '스트라익' 하고 할아버지도 '호무랑'(홈런의 일본어 발음) 소리를 외쳤다"고 당시 한용단의 한일 야구전 분위기를 전했다.인천시민들의 민족의식을 높였던 한용단은 1924년 해체됐다. 미신 팀과의 결승전에서 일본인 심판의 오심으로 우승을 놓쳤다며 흥분한 곽상훈 단장과 일본인 검도사범 기요다(淸田)가 몸싸움을 벌였는데, 이때 함께 분노한 한국인 관중들이 본부석으로 몰려가 일본인들과 충돌한 사건이 빌미가 됐다. 최원식 교수는 '황해에 부는 바람'에서 한용단을 가리켜 "운동경기의 외피를 쓰고 출현한 민족적 단결체"라고 했다.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 내 조선인들이 대대적으로 학살당했다. 곽상훈은 이듬해 9월 상해청년동맹회 주도로 열린 '제2회 관동진재 참사자 추도회'에 동경진재동포학살조사위원으로 참여해 한국인 희생자 명단을 입수하고, 학살사건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도쿄 현지 조사에도 나섰다. 곽상훈은 1925년 3월 초까지 상하이에서 청년 독립운동가 모임인 상해청년동맹회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했다. 애초 그가 의열단에 참여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인천으로 돌아온 곽상훈은 인천 소년군(보이스카우트) 단장을 맡으며 지역사회 활동을 재개했다. 1925년 7월 '송현리 갈밧 매축(매립)공사'로 인해 민가 30가구가 침수됐을 때 곽상훈 단장이 소년군을 인솔해 비를 맞으며 물을 빼는 공사를 돕고 철야 경계를 섰다고 동아일보 1925년 7월 15일자 신문에 보도됐다. 같은 해 8월 인천 소년군은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 희생자들의 추도식을 월미도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을축년인 1925년 7~9월 4차례에 걸친 집중호우로 한강, 금강, 낙동강, 대동강 등이 범람해 경성과 인천을 포함한 전국 곳곳에서 홍수 피해가 있었다. 홍수로 인한 사망자만 647명에 달했고, 2만3천호가 넘는 가옥이 유실·붕괴했다고 조선총독부는 집계했다.노영택 대구가톨릭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1979년 펴낸 '일제하 민중교육 운동사'에서 인천 소년군과 관련, "이들은 비록 소년들이었다 하지만, 단장 곽상훈의 지도 아래에 민족 문화운동의 한 분야로 소년운동을 전개했으니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그 기반이 되고 있다"며 "이 운동은 조직을 통해 합법적 방법으로 전개됐고, 시민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았다"고 했다. 곽상훈이 가장 공들인 활동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손을 잡은 민족연합전선 조직인 신간회였다. 그는 1927년 12월 신간회 인천지회 창립대회에서 총무간사를 맡았다. 하상훈(1891~1964) 등 우익 인사와 유두희(1901~1945), 권평근(1900~1945) 등 좌익 인사가 곽상훈과 함께 신간회 인천지회 주축이었다. 신간회는 강연활동이나 계몽운동 등 합법적인 방식으로 민족운동을 진행한 당시 국내 최대 좌우합작 단체였다. 곽상훈은 1929년 6월 신간회 중앙검사위원에 뽑혔고, 같은 해 10월에는 인천지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이 시기 일본의 감시대상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신간회는 1931년 5월 해산했는데, 곽상훈은 신간회 해산에 지속해서 반대하며 좌익과 우익의 공조를 주장했다.사회활동가로 신문 보도에 꾸준히 등장했던 곽상훈의 이름은 신간회 해산 이후부터는 찾기 어렵다. 곽상훈의 행적을 언론 등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은 해방 이후 정치판에 뛰어들면서부터다.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된 곽상훈은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으로 항일투쟁 경력을 인정받아 반민특위 검찰관에 임명됐다. 1949년 백엽문화사가 출간한 '반민자 죄상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기로 악명 높았던 일제강점기 고등계 경찰인 김태석(1882~?)의 재판 장면이 나온다. 검찰관 곽상훈이 김태석을 재판에 넘겼다.김태석은 재판에서 독립운동가 강우규(1855~1920)를 체포해 고문한 사실을 계속 부인하고, 체포한 게 아니라 강우규가 자수했다고 잡아뗐다. 당시 격분한 곽상훈은 재판장과 방청객들에게 "이때까지의 피고인 진술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참으로 성현의 말과도 같고, 가장 애국자 같이 보인다"며 "이렇기 때문에 본 재판을 가장 공정하게 진척시키려면 먼저 피고인의 머리를 정신분석하여 정신이상 유무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라고 소리친다. 곽상훈은 김태석에 대해 고등경찰 때 애국지사를 체포한 혐의와 경남 참여관 겸 산업부장을 역임할 때 조선 청년들을 출병시킨 혐의로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김태석에게는 무기징역과 50만원 재산 몰수형이 선고됐고, 1950년 한국전쟁 직전 석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899년 경인선 개통 당시 열차로 모여든 군중 모습. 경인선은 서울로 통학하는 인천 학생들의 교통수단이었다. /인천시사 제공1928년 한용단 모습. 1924년부터 한용단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게 되면서 고려야구단이라는 이름을 썼다. /인천야구 한 세기 제공삼연 곽상훈 선생. /경인일보DB1924년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불령단관계잡건' 문서. 곽상훈이 상해청년회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조사 활동을 한 것과 관련한 보고 문건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1930년 11월 일본 경찰이 작성한 감시대상 인물카드로 가장 위에 있는 인물이 곽상훈이다. 나머지 3명은 신간회 회원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부산 동래고등학교(옛 동래고보) 교정에 있는 곽상훈 흉상. 곽상훈은 동래고보를 졸업한 뒤 서울 경성고공으로 진학했다. /동래고 제공

2019-09-18 박경호

[zoom in 송도]인천경제구역 아트시티 조성사업

국제도시 정주 환경·국내외 투자 유치 활성화자문위 예산 29억… 우수 미술작품 공모 제작센트럴파크 일대에 설치 문화·소통의 장소로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우수한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하는 사업이 추진된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이 같은 내용의 '인천경제자유구역(IFEZ) 아트시티 조성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고 8일 밝혔다. IFEZ 아트시티 조성사업은 국제문화도시 정주 환경 조성과 투자 유치 활성화를 위한 것이다. 도시의 예술적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공공미술 작품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계획됐다.IFEZ 아트시티 조성사업은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에 설치하는 미술 작품과는 차원이 다르다. 관련 법에 따라 연면적 1만㎡ 이상 건축물은 건축비의 약 1%를 미술 작품 설치에 사용해야 한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송도컨벤시아와 아파트 단지 등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에 설치된 미술 작품은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에 따른 것"이라면서 "이번 사업은 IFEZ의 문화적 감수성과 예술적 창의성을 나타내며 IFEZ만의 특별함을 경험할 수 있는 우수한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사업 대상지는 송도 센트럴파크 일원으로, 주된 장소는 '아트센터 인천' 인근이다.인천경제청은 시민과 관광객이 많이 방문하는 공원 부지에 우수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할 계획이다. 총사업비는 29억4천만원이다. 인천경제청은 지난 6~7월 IFEZ 아트시티 조성사업 실행계획을 수립하고 자문위원회를 구성·운영했다. 지난달에는 우수 공공미술 작품 공모 계획을 세웠다. 현재 우수 공공미술 작품 공모 및 계약을 위한 행정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연내 업체 선정·계약이 이뤄지고, 내년부터는 제작·설치 작업이 추진된다. 내년 11월 사업을 완료하겠다는 것이 인천경제청 계획이다.인천경제청은 우수 공공미술 작품을 공모할 때 장르, 규모, 작품 수 등을 제한하지 않을 방침이다.이는 작가와 기획자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활동과 전문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작가와 기획자가 전체 공간을 이해하고 주위 환경과 어우러지는 작품을 설치하는 방향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인천경제청은 시민들이 친근하고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밝고 경쾌한 이미지의 작품을 선정할 계획이다. 또 일방적인 감상보다는 체험 등 관람자의 능동적인 참여와 상호작용이 가능하면서 실용적 기능을 갖춘 작품을 희망하고 있다. 단순히 미술 작품만 설치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시민 문화 활동과 소통의 장소로 활용하겠다는 취지다.인천경제청은 명성 있는 유명 작가의 참여로 예술성과 화제성을 확보하겠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송도 등 IFEZ가 명실상부한 국제도시가 되기 위해선 문화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이를 위해 인천경제청은 IFEZ 아트시티 조성사업, 세계 대표 축제 발굴·개발사업, 아트센터 인천 1단계(콘서트홀)에 이어 2단계(오페라하우스·뮤지엄) 건립사업 등을 추진 중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9-09-08 목동훈

[인천경영포럼]장기표 원장 "트럼프, 사실상 북핵 용인"

"미국 비핵화 전략은 쇼에 불과"北 끌어들여 中 고립·압박정책북미 '한국 패싱현상' 심화 우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사실상 용인했으며 이에 따라 앞으로 북한은 중국이 아닌 미국을 선택, 공조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우리나라 대표 재야 정치인으로 평가받는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전 전태일재단 이사장·사진)은 5일 오전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제409회 조찬강연회 연사로 나와 이같이 주장하며 북한과 미국의 '한국 패싱' 현상이 더 심화 될 것이라고 밝혔다. 장기표 원장은 "북한은 김정은 정권 체제 유지를 위해 절대 핵을 포기할 수 없다"며 "미국도 이를 잘 알고 있으며, 비핵화가 아니라 사실상 핵 보유를 용인해주며 북한을 미국 쪽으로 끌어들여 중국을 고립·압박하는 정책을 펼칠 가능성이 크다"며 강조했다. 그는 "미국은 북한이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과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만 사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핵무기 보유를 용인하는 것이 중국 견제에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을 내린 것으로 안다"며 "미국 측 입장에서 보면 북이 핵을 가지고 있어야 B-52 전략폭격기, F35 스텔스기 등 전략 자산 남한 배치에 명분이 생긴다"고 말했다.이어 "결국 미국은 북한이 아니라 중국 고립을 위해서라도 전략 자산을 남한 내에 배치해야 한다"고 말한 뒤 "미국이 취하고 있는 비핵화 전략은 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장기표 원장은 "실질적으로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중국"이라며 "중국은 미국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이루려 하지만 현재로선 뜻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장 원장은 "현재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 하고 있는 북한이 미국 쪽에 줄을 서게 될 경우 중국은 북한 내 친중 세력을 이용해 쿠데타를 일으켜 김정은 정권을 붕괴시키는 전략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한편 이날 공교롭게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진행된 브리핑 도중 북한과 이란에 대해 "엄청난 잠재력을 가졌다"며 "우리는 정권 교체를 원하지 않으며 그들은 잠재력을 이용하길 바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게 전해져 관심을 끌기도 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인천경영포럼 제공

2019-09-05 김명호

[독립운동과 인천·(26)]황어장터 만세운동

특정집단만 주도한 게 아닌 점 의미지역내 '심혁성' 신임 두터웠을 듯인천 계양구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인천 내륙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독립운동이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 '황어장터 만세운동에 600여 명이 참석했다'고 기록한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1천명이 넘었을 것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이끈 사람은 당시 31세에 불과했던 심혁성(1888~1958)이다. 인천시 계양구 오류동(당시 경기도 부천군 오류리) 출신 천도교도였던 심혁성은 1919년 3월 24일 그 일대에서는 가장 큰 시장인 황어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심혁성은 3시간 만에 일본 경찰에 붙잡혔지만, 마을 주민들은 그의 석방을 위해 경찰과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한 명이 일본 경찰의 칼에 맞아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친일파의 집과 계양면사무소를 파괴하는 등 만세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황어장터 만세운동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대규모 독립운동을 특정 집단에서만 주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황어장터 만세운동 재판 기록을 보면 당시 체포된 40여 명의 인원 중 상당수는 기독교인이었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에 대해 연구한 수원대학교 사학과 박환 교수는 "당시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들에게 종교는 독립운동의 밑바탕이자 원동력이었다"며 "천도교와 기독교를 초월해 독립운동을 이끈 심혁성은 지역 내에서 많은 사람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심혁성은 전 재산을 팔아 빈민들에게 나눠 주고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한평생 일본에 항거한 그는 1958년 숨을 거둘 때 후손들에게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지 마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박환 교수는 "심혁성이 주도한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인천 북부지역뿐만 아니라 문학과 남동 등 인천 다른 지역 만세운동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며 "그의 만세운동을 역사에 기록해야 할 이유다"고 평가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9-0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6)]황어장터 만세운동 주역 심혁성

만세함성 가득한 1919년 3월 손병희 지시받아천도교·기독교인 규합 24일 600명 태극기 들어경찰과 대치중 '이은선' 숨진 탓 저항감 치솟아문학동·남동·월미도 시위 등 지역 활동 '밑거름'출소후 재산 팔아 빈민 돕는 등 평생 이웃 챙겨전국에서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월 24일.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현 인천시 계양구 장기동)에선 당시 대표 우(牛)시장인 황어장이 열렸다.오후 2시가 되자 한 청년은 옷 속에 숨겨 둔 태극기를 펼쳐 들었고, 장터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태극기를 꺼내 들며 '조선 독립'을 외쳤다.인천 내륙지역에서 벌어진 가장 큰 독립운동인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심혁성(1888~1958)이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웠지만, 농사를 지으며 살던 심혁성은 3·1 운동이 들불처럼 번질 때 가만히 있지 않았다.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조선 독립을 외쳤다.심혁성은 1888년 계양면 오류리(현 계양구 오류동)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을 진행하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만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당시 그의 재판기록에 따르면 심혁성은 독실한 천도교도로 생활했다. 1910년대 천도교는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일본에 처절하게 항거한 천도교는 국권이 침탈된 1910년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갔다.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총대표는 천도교도였던 손병희(1861~1922)가 맡았으며,독립선언문도 천도교 교단이 운영하던 '보성사'에서 인쇄돼 전국으로 배포됐다.심혁성이 살던 계양·부평 지역에는 1900년대 초반 천도교가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항일 천도교 기관지 '천도교회월보'는 1914년 4월 15일 발간한 기사를 통해 "'부천군' 교구는 설치한 지 십 년에 교호가 수십호에 지나지 못하고, 또한 모두가 빈한한 까닭에 교구실을 작만티(장만하지) 못함으로 일반교인이 근심하는 바이더라"라며 당시 이 지역 천도교 전파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한다면, 1914년이면 천도교 부천군 교구가 만들어진 지 10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던 셈이다. 부평교구는 부평군 서면 신대리(현 계양구 서운동)에 강습소를 운영했는데, 심혁성도 이곳에서 천도교도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1919년 3월 전국은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 함성으로 가득했다. 인천에서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 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면서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8일에는 인천 시내에 독립선언서가 다수 배포됐고, 이튿날인 9일에는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모여 만세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기도 했다. 3월 중순부터는 강화 지역 곳곳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이 시기 심혁성은 손병희의 지시를 받아 3·1 운동을 은밀히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부천군 계양면 지역의 천도교·기독교인, 농민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알리고 이들을 규합해 나갔으며, 만세운동 장소로 황어장터를 정했다.매월 음력 5일에 열리던 황어장터는 부천군 지역의 가장 큰 시장 중 하나였다. 조선총독부가 1924년 발간한 '조선의 시장'에선 "경기도 부천군에는 2곳의 시장이 있는데 한 곳은 소사리에 있고, 나머지는 장기리에 있다. 이들 시장에는 1곳당 평균 이용인구가 1천~2천명에 달한다"고 설명할 정도로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당시 시장은 일본의 감시 속에서도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였다. 이 때문에 시장을 중심으로 3·1 운동이 진행된 경우도 많았다. 경기도 화성에서는 '발안장'을 중심으로 3·1 운동이 벌어졌고, 평택에서는 '시강장터'가 만세운동의 장이 되었다.일본 경찰은 황어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19년 3월 27일 자 신문에서 "강화도의 소요가 도화선이 돼 그다음에 접근된 김포도 일어났고, 다시 그 동네와 인천경찰서 관내의 경계선 되는 부천군도 불온의 형세가 있으므로 인천경찰서에서는 만일의 경비를 위해 순사부장과 순사 2명을 부내주재소(부평주재소)에 임시 응원을 파견했다더라"고 썼다. 심혁성의 재판 기록을 보면 당시 부내주재소에서 근무하던 순사 2명은 24일 아침부터 황어장터를 순찰하고 있었다.일본 경찰의 경비도 계양 지역 주민들의 독립 염원을 꺾지는 못했다. 오후 2시가 되자 심혁성을 비롯한 600여명의 군중은 품 안에 태극기를 꺼내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선 "계양면 장기리에 장날을 맞아 구한국기(태극기)를 앞세우고 약 600명의 군중이 운동을 개시했다"고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설명했다.일본 경찰이 이날 황어장터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심혁성은 만세 운동을 시작한 지 3시간 만인 오후 5시께 경찰에 붙잡혔다. 이를 본 주민 수백명은 '심혁성을 내놓아라'고 외치며 일본 순사들을 포위하고 주먹으로 경찰들을 때리는 등 거세게 저항했다. 이에 순사들은 칼을 빼 들고 군중을 향해 휘둘렀고, 대열의 선두에 섰던 이은선(1876~1919)이 칼에 맞아 숨지는 등 주민 여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당시 인천경찰서에서 파견 나온 순사는 "면사무소에서 시장을 거쳐 약 3정(町·약 330m)의 지점에 이르렀을 때, 약 200명이 뒤따라오며 '붙잡아라, 붙잡아라'하고 저마다 입으로 큰소리를 지르고 우리 일행 6명을 포위해 심(심혁성)을 빼앗아 가려고 폭행을 시작해 약 10분이 지났을 즈음 심을 묶었던 포승을 끊고서 심을 둘러메고 약 8간(間·약 14m)을 탈거해 사방에서 돌을 던지므로 칼을 뽑지 않으면 심을 탈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경찰관 일행이 위험 상태에 빠져 막을 길이 없기에 칼을 뽑아 방어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이은선의 죽음을 본 주민들의 저항감은 더욱 불타올랐다. 이날 밤 주민들은 친일파로 지목된 면서기의 집을 부수고, 일제의 침략 말단기구였던 계양면 면사무소를 파괴했다. 또 주민들은 임학리와 용종리, 병방리, 박촌리의 민적부와 과세호수대장 등 면사무소 내 주요 서류를 불태웠다. 주민들은 심혁성을 포함한 만세운동 중심 인물이 대부분 구속됐음에도 이튿날인 25일 300여명이 면사무소 앞에 모여 힘차게 만세를 외쳤다.천도교와 기독교인이 합심해 이뤄낸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27일 문학동 시위, 28일 남동 시위, 4월 1일 월미도 시위 등 인천지역에서 벌어진 다른 만세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하지만 심혁성을 포함한 황어장터 만세운동 주동자 주민 40여명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심혁성은 1919년 10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 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1920년 출소한 심혁성은 논과 밭, 집을 팔아 생필품을 장만해 장터에서 빈민들에게 나눠주고, 전국을 떠돈 것으로 알려졌다. 1927년에는 함경도에서 중국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아 활동했고, 1937년 이후에는 충남 공주와 강원도 영월 등지를 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하다 해방을 맞았다.해방 이후 인천으로 돌아온 심혁성은 1958년 12월 인천시 계양구 백석동에서 7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계양구는 2004년 황어장터가 있던 자리에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을 세웠다. 이곳에선 매년 3월 1일 심혁성과 주민들의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심혁성은 평생을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왔다. 일본의 삼엄한 감시 속에 피신생활을 하는 중에도 어려운 이웃을 먼저 생각했으며, 자신도 물론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생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심혁성의 손자 심현교(67) 씨는 3일 경인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에도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혜택받지 마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로 매우 강직한 사람이었다"며 "해방 이후에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어주고 집에 올 정도로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못했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이어 "강직하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성격이 할아버지가 3·1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인천 계양구 장기동에 있는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전경. 인천 계양구는 매년 3월 1일 이곳에서 3·1 운동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다. /인천 계양구 제공심혁성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내부 전시실 모습. /인천 계양구 제공

2019-09-0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5)]이길용과 신낙균

동아일보 손기정 마라톤 우승 보도옥고 치른뒤 언론·사진계 복귀못해올림픽과 같은 국제스포츠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유니폼에 조국의 국기를 달고 출전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올림픽에 참석한 우리나라 선수들은 일본 국적으로 대회에 나서야 했던 탓에 가슴에 태극기를 달지 못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1912~2002)도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겼던 동아일보 기자들은 손기정의 우승 사진을 신문에 게재하면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이른바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이다.일장기 말소사건은 경성(서울)에 있던 동아일보에서 일어났지만 사건 주역들은 인천의 독립운동가들이다.일장기 말소사건을 주도한 체육기자 이길용(1899~?)은 인천영화학교(현 인천영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이길용은 서울과 인천지사를 오가며 취재활동을 벌였고, 운동부(체육부)를 전담했다. 그는 일장기 말소사건 주모자로 지목받아 투옥돼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았고, 40일 뒤에 풀려났으나 언론계를 떠나야 했다.이길용과 함께 일장기 삭제를 주도했던 당시 동아일보 사진부 과장 신낙균(1899~1955)도 인천이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다. 인천상업고등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출신인 그는 일본에서 사진을 배우고 돌아와 언론계에 몸을 담았다. 신낙균은 이길용과 함께 일장기 삭제를 주도했다가 함께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언론계와 사진계로 돌아올 수 없었다.유니폼에 국기를 달고 국제스포츠대회에 참가한 선수는 그 나라의 국민을 대표한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우리 민족이 힘들었던 시절 자긍심을 높이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일장기를 지워버린 이길용과 신낙균을 오랫동안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8-28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5)]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 이길용과 신낙균

1936년 동아일보 손기정 우승 특집기사 게재… 이길용·신낙균 주도 편집국 전체 동참인천서 자란 이길용 배재학당 졸업후 일본서 반일 격문 옮기다 서대문형무소 '수감'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송진우 만나 체육기자 입문… 6·25때 납북돼 행적 묘연인천상고 출신 신낙균 3·1운동 계기 사진 인연… 국내 사진전문가 최초 현충원 안장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36년 8월 25일.동아일보 2면에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 선수가 시상대에 오른 사진이 실렸다.다들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손기정 선수 유니폼 가슴 부근 국적을 알리는 국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어렴풋한 회색빛 먹 자국만 보였기 때문이다.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가 고의로 일장기를 지운 것으로 보고 신문 발행에 가담한 주요 인물들을 체포했다.이른바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인천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이길용(1899~?)과 신낙균(1899~1955)이 있다.이길용은 1899년 경상남도 마산(현 경남 창원시)에서 태어났다.한국체육기자연맹이 1993년 발간한 '일장기 말소의거 기자 이길용'에 따르면 마산 지역 상인이었던 그의 부친은 자식 교육을 위해 인천 동구 창영동으로 이사했다고 한다.인천영화학교(현 인천영화초등학교)를 졸업한 이길용은 서울에 있는 배재학당(현 배재중·고등학교)에 입학했다.이 시기 이길용은 경인선을 타고 서울로 통학하면서 이후 인천 지역 주요 인사로 성장한 이들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이러한 활동은 그가 이후 인천을 연고로 한 배재학당 출신들의 모임인 '인배회'와문화사업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물포 청년회'에서 활동하는 데 초석이 됐다. 1916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후 일본에 잠시 유학한 이길용은 1918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철도 수송업무를 담당하던 그는 중국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인쇄된 반일(反日) 격문을 열차를 통해 옮기다 일본 경찰에 적발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서대문형무소에서 이길용은 그의 일생에서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송진우(1887~1945)와 만났다. 이길용은 출옥 후인 1921년 당시 동아일보 사장인 송진우의 권유를 받아 신문사에 입사해 체육기자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그가 체육기자의 길로 들어선 1920년대는 3·1 만세 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책이 펼쳐지던 시기다. 당시 지식인들은 스포츠가 민족을 단결하고, 세계에 우리나라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배재학당 시절부터 여러 스포츠를 접한 이길용에게 체육은 또 다른 형태의 민족 운동이었다. 그는 1927년 '조선운동기자단'을 조직하고, 1930년부터 새 체육용어 보급 사업에도 힘쓰기 시작했다.베를린올림픽이 열린 1936년. 당시 동아일보에는 독립운동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사장인 송진우는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인물이고, 사회부장이었던 소설가 현진건(1900~1943)은 시인 이육사와 함께 글로써 일제에 저항한 문인이다.인천의 독립운동가인 신낙균도 사진부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인천상업고등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출신인 신낙균은 우리나라 1세대 포토저널리스트다. 그가 사진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은 3·1 운동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191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고향인 경기도 안성에 머물던 신낙균은 친구들과 함께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된 그는 몰래 안성을 빠져나와 서울 매부의 집으로 피신해 8개월 동안 숨어 살았다. 이곳에서 신낙균은 아마추어 사진가였던 매부 정욱진에게 사진을 처음 접했다. 일본 유학길에 오른 신낙균은 1927년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당시 일본의 유일한 사진전문 교육기관인 '동경사진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신낙균은 평소 후배 사진가 교육 과정에서 "사진은 단순히 기념이나 오락이 아니다. 사진의 앵글에 따라 국가의 안위가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을 즐겨 사용했을 정도로 굳은 신념을 지닌 사람이었다.1930년대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의 관찰 대상이었다. 사장 송진우의 주도로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농촌계몽운동의 하나인 문맹 퇴치 운동 '브나로드 운동'을 진행했고,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하며 종교의 자유를 지지했기 때문이다.베를린올림픽 마지막 날인 1936년 8월 10일. 이날 열린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1등으로 들어왔고, 동아일보는 보름이 지난 8월 25일 자 2면에 손기정 우승 특집 기사를 게재하면서 일장기를 고의로 지웠다.당시 언론이 일본 대표로 참여한 조선인의 유니폼에서 일장기를 지운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길용도 자필 수기를 통해 "일제강점기 때 신문의 일장기 사진 말소는 항다반(恒茶飯·차를 마시는 일처럼 흔한 일)으로 부지기수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이길용은 이보다 4년 전인 1932년 LA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마라톤에 참가한 김은배(6위)와 권태하(9위)의 사진 속 일장기를 지운 바 있다. 당시에는 다행히 조선총독부가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조용히 넘어갔다고 한다. 손기정이 우승한 3일 뒤인 8월 13일 자에는 '조선중앙일보' 4면과 동아일보 지방판 2면에 일장기가 없는 사진이 실렸다. 193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발간한 '조선출판경찰개요'에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있는 일장기 마크는 물론, 손 선수 자체의 용모조차 잘 판명되지 않은 까닭에 당국으로서는 졸렬한 인쇄 기술에 의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힌 점을 고려하면, 당시 조선총독부는 인쇄 오류로 일장기가 지워진 것으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8월 25일 자 신문은 조선총독부 감시망에 걸렸다. 사진 속 손기정의 얼굴 등이 너무 선명하게 나와 고의로 일장기만 지운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한체육기자연맹이 발간한 '일장기 말소 사건 의거 기자 이길용'에 따르면 일장기 말소 사실은 일본군 사령부가 신문 발행일인 24일 오후 4시 신문 배송 중지를 명령했으나, 이미 발송이 끝난 상태였다.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경기도 경찰부장은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에 일장기 말소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이길용은 조사부원 이상범에게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24일 자 석간에 실으려 하는 흉부의 일장기를 흐릿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상범은 이를 승낙하고 원화에 착색한 뒤, 사진부 과장 신낙균의 책상 위에 갖다 놓았다. 그런 후에 사회부 기자 장용서가 24일 오후 2시 반경 사진부실에 와서 사진부 과장 신낙균과 사진부원 서형호에게 '이상범이 지우기는 했으나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해 동판에 현출된 사진 중 일장기 부분에 청산가리 농액을 사용해 말소한 뒤 인쇄 부로 넘겨 다음 날 석간에 게재한 것이다."일장기 말소 과정에 동아일보 편집국 전체가 참여한 셈이다. 게다가 이길용이 처음 일장기가 있는 사진 수정을 부탁했던 사람은 월북화가이자 당시 동아일보 삽화가였던 정현웅(1911~1976)이었다고 한다. 그의 유족들의 증언으로는 이날 오전 신문에 들어갈 손기정 사진 수정 작업을 시작한 정현웅은 점심을 먹고 일장기를 지우고 마무리할 생각이었는데, 사무실에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옆자리에 있던 이상범이 대신 일장기를 지웠다. 이 이야기는 정현웅 평전인 '시대와 예술의 경계인 정현웅'에 잘 나와 있다.이길용 본인도 1948년 발간한 '신문기자 수첩'이라는 책에서 "세상이 알기는 백림(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살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총독부에서 일본 본토를 가리킬 때 쓰도록 강요한) 내지(內地)라는 글을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밝혔다.일장기를 지운 대가는 혹독했다. 동아일보는 8월 29일부터 무기정간 처분이 내려져 발행이 중단됐고, 8명의 기자가 경기도 감찰부에 체포됐다.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이길용과 신낙균 등 5명은 40일에 걸쳐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들은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서약서에 강제로 서명한 뒤에야 석방됐다.감옥에서 풀려난 이길용은 이후에도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반일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광복 전까지 4차례나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신낙균도 이 사건으로 언론계뿐만 아니라 사진계에서도 추방당했다.해방 이후 이길용은 우리나라 체육 역사를 정리한 백서 발간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6·25 전쟁 당시 납북돼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신낙균은 수원북중학교에서 물리교사로 일하다가 1955년 숨을 거두었다.2017년 8월 25일 서울시 중구 손기정로 손기정기념관에 이길용 흉상이 손기정 선수의 동상과 나란히 놓였다. 이날은 1936년 이길용이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이 동아일보에 실린 날이다. 같은 해 4월에는 신낙균의 묘소가 국내 사진 전문가 중 처음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길용과 신낙균은 일장기가 삭제된 손기정의 사진과 함께 금메달 소식을 전했다. 이는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이길용의 셋째 아들인 이태영(78) 대한체육회 고문은 지난 23일 경인일보와의 통화에서 "납북 당시에는 내가 10살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확한 모습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성격이 대쪽같고 강인했던 것만큼은 기억이 난다"며 "이런 성격이 일장기 말소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일장기가 지워진 채 발행된 1936년 8월 25일 자 동아일보 2면(사진 왼쪽)과 원본 사진. /손기정기념재단 제공(왼쪽부터)이길용·신낙균경기도 경찰부장이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에 보고한 일장기 말소사건 조직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2017년 손기정 기념관에 설치된 이길용 흉상. /손기정기념재단 제공

2019-08-28 김주엽

[인천경영포럼]윤상현 의원 "문재인대통령이 아베에 비공개 특사 보내야"

한일관계 개선 외교적 해법 제시"그래도 안되면 국제재판소 가야"자유한국당 소속 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천 미추홀구을)은 "문재인 대통령이 아베 총리실에 비공개 특사를 보내 무역 보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윤상현 위원장은 22일 인천 연수구 라마다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408회 조찬강연회에서 한일관계 개선 해법을 이같이 제시했다. 윤상현 위원장은 "이 문제를 끝낼 타임 테이블을 만들어서 양측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하면 12월 31일까지 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윤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관계를 "마주 달려오는 기차"로 비유한 뒤 "감정적 대응을 하지 말고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윤 위원장은 "일본은 수출 규제가 아닌 '수출 관리'라고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강제 징용자의 청구권을 인정한 작년 말 대법원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라며 "결국 정치·역사 문제가 경제보복으로 가게 됐는데 정말 졸렬하기 짝이 없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그러면서 "일본의 요구는 과거 박정희 정권과의 한일협정으로 강제 징용 배상 문제가 해결됐는데 지금의 대법원 판결로 다른 입장이 나왔으니 이를 해소해달라는 것"이라며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일본이 요구하는 외교적 협의와 중재위원회 구성, 제3국을 통한 중재위원회 구성에 대해 모두 답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윤상현 위원장은 "대법원 판결이 한일협정과 불일치하게 나왔다면 외교적 노력을 해야 하지만 정부가 이를 방치했다"며 "대통령이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기꺼이 손을 잡겠다고 했는데 이미 일본은 작년 말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후부터 대화를 계속 요구해왔다"고 말했다. 윤 위원장은 "양국은 현재 진행하는 모든 조치를 올스톱하고, 대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윤상현 위원장은 이 문제가 풀리지 않고 양국의 무역 전쟁이 벌어지면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윤 위원장은 "국제법의 조류가 개인의 청구권은 인정하는 추세"라며 "일부 승소, 일부 패소 판결을 이뤄낼 수 있고 완전히 지지는 않기 때문에 외교적 해법이 안 되면 ICJ라도 가야한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이 22일 라마다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조찬간담회 강연자로 나와 한일관계 전망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인천경영포럼 제공

2019-08-22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24)]장봉도 할아버지 송두용

옥고도 치러… 2010년 유공자 인정해방이후 남북통일 염원 밝히기도인천 장봉도에서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헌신했던 기독교 신앙인 송두용(1904~1986) 선생.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라는 다소 생소한 신념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빈민구제 활동가로 잘 알려진 그는 독립운동 행적과 사상과 관련해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편이다.송두용은 뜻을 함께한 신앙인들과 함께 만든 기독교 잡지 '성서조선'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했다. "매서운 추위에도 살아남는 개구리는 있다"는 내용의 성서조선 158호(1942년 3월)의 권두언은 칼끝과 총부리로 우리 민족을 겨누고 말살하려 했던 일제에 일침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송두용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송두용은 이 사건에 대해 "일본 경찰은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모조리 검거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치성은 전혀 없고 다만 기독자로서 양심생활을 한 것뿐"이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 정치적 행동과 거리가 먼 신앙 그 자체를 위한 활동(신앙만의 신앙)이었다고 밝혔지만, 순수한 신앙심이 결국 민족의 해방과 평화에 대한 갈망을 불러왔다. 정부는 2010년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송두용은 해방 이후에도 신앙과 관련한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많은 글을 남겼다. 3·1 운동 정신은 거창한 행사가 아닌 실력 양성으로 일본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다.그토록 염원하던 해방 이후 송두용은 남북을 비롯한 전 세계의 평화를 원했다. 평화를 바탕으로 남북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그의 바람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송두용은 해방 22주년을 맞았던 1967년 8월 "이제는 각각 남의 나라처럼 또는 피차 독립국가인 양 당연한 것 같이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듯이 체념하고 있는지 모른다. 천만의 말이다. 어서 남북이 합쳐야 한다. 하루속히 통일 국가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8-21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23)]장봉도 할아버지 송두용과 성서조선사건

일본서 성경 중심 무교회주의 들여와 연구회 조직 '성서조선' 발행158호 弔蛙 통해 '한두 마리는 살아남듯' 말살정책 극복의지 표현해방 후 장봉도 푸른학원 이어받아 빈민구호·교육사업에도 힘써태평양전쟁 발발로 일제의 식민지 수탈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 초반 서울에서 발행된 한 기독교 잡지 첫 장에 의미심장한 내용의 권두언이 실렸다.권두언의 제목은 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의 '조와(弔蛙)'. 1942년 3월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기독교 신앙 잡지인 '성서조선(聖書朝鮮)' 158호에 겨울잠을 자다 얼어 죽은 개구리를 빗대 민족의 참담한 현실을 고발한 글이 실렸다.일본은 잡지 발행에 가담한 인물과 독자들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이었다.이 사건의 중심에는 훗날 인천 장봉도에서 빈민구제 활동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던 독립운동가 송두용(1904~1986) 선생이 있었다.송두용은 1904년 7월 31일 충청남도 대덕군(지금의 대전시 대덕구)에서 부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에 입양됐다가 서울로 유학해 제동공립보통학교와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그는 18세 나이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 사건이 발생해 귀국했다. 그리고 21살 때 다시 일본 도쿄농업대학 예과로 진학했다. 그는 일본 유학생활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인생이 바뀌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제도권 아래 있는 교회 제도를 비판하며 성서와 신앙만으로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무교회주의'가 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교인 수를 늘리고 헌금 걷기에만 혈안이 돼 있는 기성 교단을 부정했다.송두용은 일본에서 무교회주의를 설파하던 우치무라 간조의 강연에 감명을 얻어 한국인 유학생인 김교신, 함석헌, 유석동, 양인성, 정상훈과 함께 '성서연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1927년 무교회주의 신앙을 기반으로 한 잡지 '성서조선'을 처음 발행했다. 송두용은 성서조선 6인방 중 가장 나이가 어린 23세였다.1930년 귀국한 송두용은 부천군 오류동(지금의 구로구)을 기반으로 성서집회를 열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송두용 등 6인방은 성서조선 발간과 함께 서울, 인천, 부천 등지를 다니며 강연을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때부터 율목동의 인천모임을 만들어 무교회주의를 알리고 주변에 성서조선을 전달했다.김교신이 1927년 7월에 쓴 성서조선의 창간사는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 신자보다도 조선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에 나뭇군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는 내용이다.민족의식을 가진 기독교인들의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하는 등 종교 운동을 바탕으로 한 항일의식이 확산하자 일제는 기독교를 철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결국 1942년 3월 송두용과 김교신 등이 성서조선 권두언에 실은 '조와'가 일제의 감시망에 잡혔다."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이 바위틈의 빙괴(永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 만에 친구 와군(蛙君)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潭) 속을 구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 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는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潭水)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의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마리 기여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이 글은 혹독한 추위가 와서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죽어 나가더라도 한두 마리는 살아남듯이 일제가 아무리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더라도 끝내 살아남는 한국인이 있다는 얘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일제는 송두용과 김교신 등 6인방과 주요 독자 12명을 치안유지법 혐의로 체포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가뒀다. 이 사건으로 송두용은 10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고 결국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성서조선도 '조와'가 실린 통권 158호를 끝으로 폐간됐다.송두용과 동시대에 무교회주의 활동을 했던 노평구는 당시 일제가 무력 투쟁이나 드러내놓고 하는 독립운동보다는 이 같은 종교·문화 운동을 더 두려워했다고 회상했다. 노평구는 송두용이 잡지에 쓴 글을 모아 총 6권 분량의 송두용신앙문집을 펴내기도 했다. 성서조선사건 당시 일본 경찰은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놈들 가운데서 가장 악질의 부류들이다. 결사니 조국이니 해가면서 팔딱팔딱 뛰어다니는 놈들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에라도 아니 오백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노평구는 밝혔다.송두용은 해방 이후에도 개인의 신앙생활과 함께 구호활동과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1930년 오류동에서 오류학원을 설립해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펼쳤던 송두용은 1969년부터 장봉도에서 지인의 제안을 받아 '푸른학원'이라는 교육기관의 운영을 맡았다. 건강 문제로 요양차 장봉도에 들렀다가 1967년 푸른학원을 설립한 무교회 신앙인 노연태로부터 푸른학원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는 '장봉도 할아버지'라는 별칭이 붙었다.당시 장봉도에는 초등학교밖에 없어 육지의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은 바다에 나가 굴이나 조개를 따거나 선주 밑에서 새우 선별작업을 하는 고된 일을 하면서 자랐다. 강화도와 영종도, 신·시·모도, 장봉도 일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노연태는 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송두용은 '정직'을 교훈으로 내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박정수 등 인천에서 함께 신앙 모임을 갖던 사람들도 푸른학원에서 교사 활동을 했다. 푸른학원은 1974년 정식으로 중등학교 인가를 받아 푸른고등공민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발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육지로의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푸른학원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이 급격히 감소했다.송두용의 건강이 악화되고, 학생 수가 자연스럽게 줄면서 1982년 푸른학원은 결국 문을 닫고 만다. 인천섬연구총서 '장봉도'편을 보면 1982년 장봉도 초등학교 졸업생이 36명이었는데, 푸른학원으로 진학하겠다는 학생은 겨우 4명에 불과했다고 한다.10년 넘게 장봉도의 학생들을 위해 헌신했던 송두용은 1986년 4월 10일 서울 구로구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따르던 제자들과 무교회주의 신앙인들은 송두용의 추모집을 발간하고, 그가 쓴 글을 모아 문집을 내기도 했다.송두용은 무교회주의 종교인이면서 민족의식을 지닌 독립운동가였다. 2010년 송두용은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이 인정돼 독립유공자 서훈(건국포장)을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그를 '인천' 출신으로 분류하고 있다.송두용은 1958년 3월 잡지 '성서인생' 33호에 쓴 '진정한 3·1 정신'이라는 글을 통해 60년 뒤를 내다보기라도 하듯 현세대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을 남겼다.그는 3·1 정신은 말이나 형식이 아니고 마음이며 산 생명이라고 했다.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각종 기념식 행사에만 치중해 진정한 독립의 의미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을 일찍이 우려했던 거다. 그는 "3·1 운동은 한 개인, 한 정당, 또는 한 단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정치인도 근로대중도, 부호도 빈자도, 남녀노유의 구별 없이 도시와 촌락의 차이가 있을 리가 없다"고 했다.그는 특히 3·1 운동의 정신은 국민 개인이 실력을 양성해 각자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일본 아베 정부의 무역보복 조치로 반일 감정이 확산하면서 정부와 국민들이 '극일(克日)'의지를 불태우는 현 시국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송두용은 "우리는 소련의 공산주의를 무서워하거나 일본의 침략정신을 겁낼 것이 없다. 일본을 이기고 소련을 물리치려면 오직 실력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허위와 외식을 버리고 허영과 기만을 떠나서 다만 진실 일로로 매진하는 수밖에 없다. 3·1 정신은 행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실천궁행으로 사는 것이며 이룰 것이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성서조선 158호에 일제 저항정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권두언 '조와(弔蛙)'를 실었다가 옥고를 치른 무교회주의 6인방. 뒷줄 왼쪽부터 양인성, 함석헌, 앞줄 왼쪽부터 유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송두용 등 무교회주의 신앙인 6명이 발행한 잡지 '성서조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1930년 오류학원을 설립할 당시의 송두용.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1958년 3월 송두용이 3·1정신에 대한 글을 썼던 잡지 성서인생.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

2019-08-21 김민재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