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독립운동과 인천·(12)]女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김란사(下)

보훈처 평안남도 안주 기록달리 유족들 평양 출생 주장 논란 '이주 가능성''국제관계 능통' 조선 관리 하상기와 전처 죽은뒤 혼인 '첩·기생설' 사실아냐아내 적극 외조 경찰서장·감리등 역임 인천 총괄 이후 중국 망명 행적묘연김란사 생애 체계적 복원위해 함께 살펴봐야… 파리가던길 독살설도 '과제'김란사(金蘭史·1872~1919)가 여성교육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로 발돋움하는 데에는 남편 하상기(河相驥·1855~1920)의 적극적인 외조가 있었다. 하상기는 인천 개항장의 행정·사법·국제관계 업무를 총괄하는 인천감리를 수차례 지내면서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고위 관료이다. 그렇지만 드러나지 않은 측면이 많은 수수께끼의 인물이기도 하다. 아직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김란사의 생애를 복원하기 위해선 하상기도 함께 연구돼야 한다.지금까지 진행된 바로는 김란사나 하상기와 관련한 연구 작업의 중심에 인천의 이원규 작가와 김창수 인천연구원 부원장 등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생애를 조명해 온 이원규 작가는 김란사와 하상기에 관한 각종 자료를 모으고 행적을 추적해 작품에 반영하거나 강연하고 있다. 이원규 작가가 지난해 쓴 '김경천 평전'(도서출판 선인)에는 1904년 10월 조선 황실유학생단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 방문한 인천감리서에서 황실 유학생 김영은(金英殷·1888~1942)과 그의 아버지 김정우(金鼎愚·1857~1908)가 인천감리 하상기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김란사에 대한 언급도 있다. 훗날 김경천(金擎天)이란 이름을 쓰게 되는 김영은은 '백마 탄 김 장군'의 전설을 낳은 독립군 지도자다. 철저한 고증 없이는 묘사하기 힘든 장면이다. 이원규 작가는 "김란사의 고향이 북한 쪽이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관심을 갖고 연구한 사람이 드물다. 그나마 연고가 있는 인천에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란사와 하상기가 언제 결혼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조차 아직 전해지지 않고 있다. 김란사의 친정 조카손자인 김용택씨가 공개한 하상기의 제적등본에는 딸이 1891년 12월 출생으로 기재돼 있어 혼인시기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1891년 김란사의 나이는 19세이고, 하상기는 36세였다. 하상기는 전처가 있었기 때문에 김란사가 '하상기의 첩이었다'거나 '기생 출신'이라는 설이 오랫동안 나돌았다. 실제로 김란사가 기생 출신이라는 내용이 담긴 기사를 1990년대 보도했다가 현재는 해당 기사를 삭제한 언론사도 있다. 김용택씨는 "증조부(김란사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청나라 포목을 가져와 파는 무역업을 했다"며 "김란사 할머니는 아버지 일을 돕다가 하상기의 전처인 조씨 부인이 사망한 이후 인근에 살던 집안끼리 혼담이 오가서 혼인했다"고 말했다.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장악하기 위해 1906~1910년 설치한 통감부의 '한국 관인의 경력 일반'이라는 문서를 보면, 하상기에 대해 '원래 기부(妓夫)로 학문과 지식이 없지만 종종 협잡에 종사하였다. 일찍이 기녀 하나를 얻어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자 유인운동을 행하였다'고 썼다. 이 문서로부터 김란사가 기생 출신이라는 설이 나왔는데, 일본이 자국과 반대 입장에 있는 조선 관리들에 대해 쓴 문건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연구자들의 분석이 많다. 일본은 해당 문건에 올린 관인 153명 대다수에 대해 비방하는 내용을 담았다.또 일본 통감부는 같은 문건에서 하상기가 '러시아와 일본 양국에 대해서도 임기응변의 운동을 행해 러시아 탐정이라는 혐의가 있다'고도 평가했는데, 그가 국제관계에 능통한 인물이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상기가 사료에 등장하는 첫 기록은 '승정원일기' 1897년 7월 19일 기사로 그가 6품 벼슬에 올랐다는 내용이다. 1895년 봄 김란사와 함께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먼저 돌아온 직후다. 하상기는 1897년 말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입국해 김란사의 미국 유학길에 동행했다가 혼자 돌아왔는데, 이듬해 초 인천항 경무관(경찰서장)을 맡게 된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하상기는 1899년 7월 인천감리 겸 인천부윤으로 승진하고, 1902년 7월 경무청 경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한 달쯤 지나 또다시 인천감리로 부임했다. 이후 육군 보병 정위(대위), 일본공사관 1등 참서관과 주임관 등을 거쳐 1905년 10월 인천감리로 되돌아왔고, 1906년 3월 농상공부 공무국장으로 임명됐다. 7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인천감리를 지내면서 사실상 인천지역을 총괄했다. 러일전쟁을 비롯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던 시기에 고종은 하상기를 국제도시인 인천을 맡을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이원규 작가는 "하상기가 일본 등지에서 첩보를 수집해 왔을 것"이라며 "경찰 간부, 인천감리 등을 지낸 것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하상기가 인천감리로 재직할 때 김란사는 미국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남편과 인천에 머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김란사의 부친은 1911년 인천으로 이주해 평양, 경성, 인천 등 3개 도시를 아우르는 '평경인상회'를 운영하는 등 무역업에 종사했고, 이후 후손들 상당수도 인천에 정착했다고 한다. 김란사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1907년부터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서울에서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란사는 여성교육에 힘쓰면서 황실 통역사 등으로 활동하며 고종에게 은장을 받는 등 황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김란사가 돌아온 이후 관직에서 물러난 하상기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때 그의 행적을 보여주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언론인 김동성(金東成·1890~1969)이 경향신문 1967년 11월 8일자에 기고한 '나의 사우사 <13> 하란사 부인'에는 1908년께 하상기가 중국 상하이에 망명 중이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중국 유학 중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가 상하이에서 김동성을 만난 하상기는 "집에서 아무도 모르게 중국으로 피신한 지 두 달이 되어 나의 생사를 우리 집에서 모르고 있으니 편지 한 장 전해주면 고맙겠소"라고 부탁했다. 김동성은 편지를 갖고 귀국해 서울 동대문 밖에 사는 하상기 집에 들렀고, 김란사가 반갑게 맞으며 극진하게 대접해 줬다고 회고했다. 하상기가 왜 상하이로 망명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하상기의 행적은 묘연하다.김란사는 당시 여성들에게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무산됐던 파리강화회의 한국 대표 파견 계획이 재추진되면서, 여성계에서는 김란사를 파리에 보내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독립운동가 황에스터(1892~1971)는 서울신문이 발행한 월간지 '신천지' 1946년 3월호에 쓴 '3·1운동과 여성의 활약'이라는 글에서 "나는 조선 안 여학생을 단합하여 운동을 일으키고 파리회의에 하란사씨를 파견할 기금 모집을 할 겸 귀국했다"며 "파리회의에 우리 대표를 보낸다 하니까 돈을 낸다 의류를 낸다 노리개 화장품을 내놓는다 야단이었다"고 했다. 황에스터는 일본 유학 중인 1919년 2월 귀국해 3·1운동 이후 평양에서 김란사를 파리로 파견할 비용을 모금했고, 같은 해 3월 19일 기금을 전하려다 서울에서 체포됐다.파리로 향하던 김란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1920년 1월 22일자에 실린 애국부인회의 김란사 등 세 애국여사 추도회 기사에는 그가 1919년 봄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의 밀칙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하려고 중국 베이징에서 여행을 준비하던 중 유행성 감모(감기)에 걸려 세상을 떴다고 나온다. 이원규 작가가 발굴한 베이징 일본영사관의 김란사 사망 관련 보고서도 현지 중국신문을 인용해 유행성 감기가 사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세간에는 독살설도 퍼졌다. 미국 내 한인교포들이 발행한 '신한민보'는 1919년 4월 24일자 신문의 김란사 부고 기사에서 '그 사유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인바'라고 보도했다. 김동성도 앞서 경향신문 글에서 '일본인 앞잡이에게 살해를 당했다고 하나 그 진상은 오리무중에 파묻혀 밝혀지지 않았다'고 썼다. 조선일보 기자였던 최은희(崔恩喜·1904∼1984)도 생전에 김란사에 대해 쓴 글을 통해 '장례에 참가했던 미국 성공회 책임자 베커에 의하면 시체가 시커먼 게 독약으로 인한 타살로 추측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또 최은희는 같은 글에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베이징에 온 하상기가 '베이징에 가는 도중 봉천에서 어떤 동지를 만나 속뜻을 이야기한 게 오히려 그녀가 위해를 입은 원인이 됐다'고 한탄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도 썼다. 3·1운동 전후로 일본의 탄압이 더욱 거세진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김란사의 독살설은 뚜렷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지나칠 수 없는 좀 더 검증이 필요한 역사과제다.출생지 또한 명확하지 않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은 '독립신문' 1920년 1월 22일자 기사를 근거로 김란사의 출생지를 평안남도 안주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유족들은 평양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안주에서 태어나 평양으로 이주했을 가능성도 있다. 김란사가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에서 취득한 한국 여성 첫 '문학사'(Bachelor of Literature) 학위는 최근까지 쓰인 상당수 글에서 현재 통용하는 문학사(Bachelor of Arts)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인천시여성단체협의회가 2008년 펴낸 '역사 속의 인천 여성'에서 '하란사'로 소개된 김란사 이야기는 미국 유학 과정, 문학사 학위 취득 시기, 중국 망명 등 틀린 내용이 허다하다.김란사와 하상기 부부를 인천 개항장의 '도시서사자원'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한 김창수 인천연구원 부원장은 "선각자적 여성인 김란사와 인천감리 하상기 이야기는 교차구조로 극적 구성이 가능한 콘텐츠이지만, 아직 기초연구가 미비하다"며 "연구를 통한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 유학 당시 김란사.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주일공사관 1등 참서관 재직 당시로 추정되는 하상기.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독립신문'에 실린 김란사 등 '삼 애국여사의 추도회' 기사.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고종이 1909년 해외 여성 유학생 환영회와 관련해 김란사에게 수여한 은장.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김란사가 중국 베이징에서 사망한 사실을 담은 주일본공사관 보고서.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김란사는 1916년 미국 뉴욕 사라토가에서 열린 세계감리교총회에 한국교회 평신도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다. 세계감리교총회 한국 대표 파견 기념사진으로 앞줄 왼쪽에서 5번째 서양식 복장을 입은 여성이 김란사다. /이원규 작가 제공

2019-05-15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12)]여성교육자 김란사(下)

감리 출신 사위 하상기 영향력 도움인천고와 인연등 복지·교육에 힘써김란사(金蘭史·1872~1919)와 인천의 인연은 인천감리를 지낸 남편 하상기(河相驥·1855~1920)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평양과 서울에서 객주업을 했던 김란사 집안은 1911년 인천 중구 유동(율목동)으로 이주해 '평경인상회'를 운영했다고 한다. 평양~경성(서울)~인천을 잇는다는 의미인 평경인상회는 평양·서울·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해외에서 비단, 면직물을 떼다 판 무역회사였다. 인천이 평양과 서울의 중간지대이자 상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근거로도 볼 수 있다. 김란사의 친정 조카손자인 김용택씨는 "증조부의 사업을 조부가 이어받았고, 아버지가 평경인상회를 맡아서 해방 직전까지 운영했다"며 "이후에도 후손들이 인천에 정착해 살았다"고 말했다.김란사 집안은 사위인 하상기의 영향력에 도움을 받기 위해 사업거점을 서울에서 인천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하상기는 1899년부터 1906년까지 7년여에 걸쳐 여러 차례 인천감리를 지냈다. 인천감리는 당시 제물포 개항장이 중심인 인천의 행정과 국제관계는 물론 재판소 판사까지 겸임한 지역의 최고 관리였다. 특히나 하상기는 열강의 각축장인 개항장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을 정도로 고종의 신임을 받았다.하상기는 인천에서 복지사업과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대한매일신보는 1906년 3월 8일자 신문에 '하씨미정'(河氏美政)이라는 제목으로, 인천감리 하상기가 인천항의 회사들과 협의해 민의소를 창설하고, 매달 60~70명의 가난한 병자를 무료로 치료해줬다고 보도했다. 황성신문은 1899년 10월 13일자에 '인천감리 하상기씨가 영종진에 소학교를 세워 인민을 교육하겠다고 학부에 청원했다더라'는 기사를 썼다. 하상기가 인천감리로서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임했다는 황성신문 1903년 6월 3일자 기사도 있다. 이 기사에 나오는 외국어학교는 현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인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1895년 개교)다. 하상기가 인천고등학교와도 연결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05-15 박경호

[인천의 얼굴·(10)고려인 빵집 사장 이가인씨]우즈베크서도 한국말·온돌방 잊지 않았던 '한핏줄'

옛 소련지역으로 옮겨 살아온 '한인 3세'2004년 남편과 이주…연수구에 6천명 살아인천 연수구에 사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3세 이가인(36) 씨입니다. 2004년 우즈베키스탄인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왔습니다. 꼭 1년 전인 작년 5월 연수동 함박마을에 '아써르티'란 이름의 빵집을 차렸습니다. '아써르티'는 러시아어로 '종류별로 다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름대로 빵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 식료품도 팝니다. 빵을 주식으로 해서 그런지 종류만 10가지가 넘습니다. 가게를 하기 전 집에서 만든 것을 나누어 먹은 주위 사람들이 '고향의 맛'이라면서 빵집을 권유했습니다. 장사가 잘 됩니다. 한국 사람들이 30% 정도를 차지합니다.옛 소련지역에 이주해 살던 한인과 그 후손을 고려인이라고 하지요. 고려인은 3세까지 동포로 인정받아 재외동포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이주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는 고려인 7만여명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 중 연수구에만 약 6천명이 살고 있지요. 이가인씨의 원래 이름은 '제버 사비로사'입니다. 한국식 이름을 쓰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아 이주하면서 바꾸었습니다. 이주 이듬해 한국에서 태어난 딸은 이제 중학교 1학년이 되었습니다.이가인 씨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한반도 동북쪽인 러시아 연해주에 살았었는데 1930년대 스탈린 정권의 이주정책으로 정반대쪽인 우즈베키스탄 호라즘 지역으로 강제로 옮겨야 했습니다. 이가인 씨의 어머니는 6남매 중 넷째였는데 우즈베키스탄인과 결혼했습니다. 어머니 형제들은 한국말로 대화를 했습니다. 또한 외할머니는 끝까지 온돌방을 고집했습니다. 어머니가 한국말을 쓰고, 외할머니가 한국식을 잊지 않으셨던 것처럼 이가인씨는 한국에서 계속 살 생각입니다.그런데 우리는 왜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은 고려인이라 하고, 중국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조선족이라고 할까요. 이가인씨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5-12 박경호

[zoom in 송도]인천 최대 반려견 놀이터 '송도 도그파크' 개장

달빛축제공원내 5500㎡ 규모 '무료' 전염병·유기방지 '동물등록'해야 입장대형견·중소형견 등 3개공간 안전확보견주 쉼터·물놀이 등 다양한 편의시설인천 송도국제도시에 반려견 놀이터 '도그 파크'(Dog Park)가 생겼다. 지난달 29일 문을 열었으니, 개장한 지 2주일 정도 됐다. 인천에서 가장 큰 반려견 놀이터라고 한다. 지난 10일 송도 도그 파크를 다녀왔다. 송도 도그 파크는 달빛축제공원(연수구 센트럴로 350)에 있다. 달빛축제공원은 매년 여름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Incheon Pentaport Rock Festival)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난달 21일 영국 출신 싱어송라이터 에드 시런의 내한 콘서트가 열리는 등 인천의 대표적인 야외 공연 장소다. 하지만 대중교통으로 가기는 좀 불편하다. 인천도시철도 1호선 국제업무지구역에서 내리면 되는데, 20~30분 걸어야 한다. 공원 정문 옆에 주차장이 있으니 자가용을 이용해도 된다.공원 정문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5천500㎡ 규모의 도그 파크가 있다. 무료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조성했으며, 인천시설공단이 운영을 맡고 있다.도그 파크 입구에 뼈다귀 모양의 귀여운 조형물이 있다. 도그 파크에 들어가면 입장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곳은 동물등록을 한 반려견만 입장할 수 있다. 관리인이 반려견의 내·외장 인식 칩에 리더기를 갖다 대 등록 여부를 확인한다. 이는 전염병과 반려견 유기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인식 칩 또는 인식 표가 없는 반려견의 경우, 보호자는 동물등록증을 소지해야 한다.반려견이 놀이터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반드시 목줄을 채워야 한다. 도그 파크를 이용하는 다른 반려견과 보호자가 놀랄 수 있기 때문이다. 12세 이하 어린이는 보호자와 함께 출입해야 한다. 동물보호법 시행규칙에 명시된 맹견류 또는 질병이 있는 반려견은 등록번호가 있어도 입장할 수 없다. 관리인이 위험해 보인다고 판단한 반려견은 입마개를 착용한 후 입장해야 한다. 놀이터에는 음식물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도그 파크는 ▲대형견 ▲중소형견 ▲대형견+중소형견 등 3개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반려견 간 마찰을 예방하고자 몸높이 40㎝를 기준으로 대형견과 중소형견 이용 공간을 나눴다.각 공간에는 다양한 시설이 있다. 뫼비우스슬로프, 터널, 음수대, 오르락내리락 및 물놀이(분수) 시설 등이 있다. 물놀이 시설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매 정시부터 50분간 가동된다.놀이터별로 격리실이 있다. 격리실은 보호자가 화장실을 갈 때 반려견을 넣어 두는 공간이다. 보호자 화장실은 공원 입구에 있다. 도그 파크에서 멀지 않다. 놀이터 안에는 보호자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벤치가 마련돼 있다. 벤치 위에 그늘막이 설치돼 있지만, 햇빛을 막을 만큼은 충분하지 않다. 여름철 햇빛이 강할 때는 챙이 넓은 모자나 양산을 가지고 오는 것이 좋다. 도그 파크에서 만난 안희연(34·남동구 구월동)씨는 "인천대공원을 이용하다가 처음으로 송도 도그 파크에 왔다"며 "인조단지와 음수대, 물놀이 시설이 있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반려견끼리 싸우는 사고가 발생하면 퇴장 조치를 받을 수 있다. 사고의 책임은 피해를 준 반려견의 보호자에게 있다.도그 파크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오후 5시 이후에는 입장할 수 없다. 매주 월요일은 시설 점검·보수, 토양 소독을 위해 휴장한다. 명절 연휴 기간과 폭우·폭염·한파·폭설·미세먼지 등 기후 여건이 나쁠 때도 문을 열지 않는다. 도그 파크 개장 후 일주일간 600명 이상의 보호자와 반려견이 방문했다고 한다. 주말에는 이용객이 많기 때문에 줄을 서 대기할 수 있다. 도그 파크가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50명이다. 도그 파크에는 교육 공간이 있다. 인천시설공단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외부 강사를 초청해 반려견 관련 강연을 시행하겠다는 계획이 있다. 도그 파크에 왔다가 달빛축제공원에서 반려견과 놀다 가는 시민이 많은데, 공원 이용객들이 놀라지 않도록 목줄을 채워야 한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지난달 29일 개장한 송도 도그 파크 중소형견 놀이터 모습. 달빛축제공원에 있는 송도 도그 파크는 인천에서 가장 큰 반려견 놀이터로,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조성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반려견 보호자를 위한 벤치.반려견 물놀이(분수) 시설.흙먼지 털이기./아이클릭아트

2019-05-12 목동훈

[인천경영포럼]남주홍 前 국정원 1차장 "제재에 막힌 北 한계상황, 문재인 정부 출구전략 마련을"

北 추가도발 예측 9시간만에 현실화경제 병행노선 核 쉽게 포기 안해美최후카드 '봉쇄조치' 혼란 우려북한이 지난 4일에 이어 9일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남북 교착상황이 장기화 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북한의 이런 도발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란 주장이 제기됐다.남주홍 전 국가정보원 1차장(경기대 명예교수)은 9일 오전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경인일보와 인천경영포럼이 공동 주최한 인천경영포럼 제403회 조찬강연회에서 이같이 밝히며 문재인 정부의 위기관리 대응 능력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밝혔다.남 전 차장은 "북한은 핵과 경제를 같이 끌고 가는 병행 노선을 당분간 이어갈 것으로 관측되며 핵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최근 (지난 4일) 북한의 발사체 발사는 북미 하노이 회담 실패 등 여러 정세 속에서 이뤄진 전략적 선택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실제로 남 전 차장이 이날 오전 7시 30분 시작된 강연에서 북한의 추가 발사체 도발 가능성을 언급한 이후 9시간 만인 오후 4시 30분 평안북도에서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그는 제재를 버티고 있는 북한이 올해 겨울쯤 한계에 달할 것이란 게 국내외 정보 당국의 관측이라고 밝힌 뒤 문재인 정부가 이들(북한)의 출구를 마련해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남 전 차장은 "미국의 대북제재는 장기화 할 전망으로, 이를 버티고 있는 북한은 올해 가장 길고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말한 뒤 "이런 격변기 속에서 북한 내 사건·사고가 속출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이어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북한 내부 당·정·군의 사기저하가 심각한 문제로 부각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결국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출구 역할을 해야 하지만 지금으로는 대북 제재에 막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남 전 차장은 "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인도적 차원의 식량 지원 등으로 출구 전략을 모색할 수 있지만 우리 정부가 너무 조급한 모습을 보이면 북한의 전략에 당할 수 있다"며 "미국, 일본 등 우방과의 공조 속에서 여러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현재 북미 관계와 관련해 "미국이 현재 제재 조치를 취하고 있고, 이게 먹히지 않을 경우 남아 있는 마지막 카드는 북한에 대한 봉쇄 조치"라며 "만약 미국의 봉쇄 조치가 우리나라 정권 교체기와 맞물려 실행된다면 남북 모두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고 했다.남주홍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은 "한반도에서 절대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북한과 미국 모두 이를 알고 있다"고 언급한 뒤 "평화냐 전쟁이냐 하는 정치권의 이분법적 논리를 벗어나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북한의 동향을 파악한 뒤 우리 정부가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인천경영포럼 제공

2019-05-09 김명호

[독립운동과 인천·(12)]여성교육자 김란사(上)

조카손자 김용택씨 경인일보 통해남편 하상기씨의 '제적등본' 공개"본관마저 잘못 알려져 바로잡고자"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스승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란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인천과 깊은 관련이 있는 그는 한국의 첫 여성 '문학사' 학위자, 첫 여성 대학교수, 고종의 통역사, 파리국제강화회의 밀사 등 여성교육과 독립운동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하지만 출생 연도, 사망일과 사망장소, 집안, 본관 등 기본적인 인물정보조차 각종 기록이나 글마다 제각각일 정도로 김란사 연구가 깊이 있게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김란사의 조카손자인 김용택(71)씨가 김란사의 남편 하상기(1855~1920)의 제적등본(옛 호적등본)을 지난해 확보하고, 8일 경인일보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했다.인천감리 등을 지낸 관료였던 하상기의 제적등본에 나타난 아내(妻) 김란사는 1872년(개국 481년) 9월 1일생이다. 기존에는 '1875년', '1868년', '1872년' 등 세 가지 추측이 혼용됐다. 김란사는 1919년 중국 베이징에서 숨을 거뒀는데, 사망일은 당시 언론보도나 보고서에 따라 '4월 10일', '3월 10일', '3월 11일', '3월 상순' 등으로 여러 가지로 써 왔다. 등본에서는 사망일을 3월 10일 오전 11시로 명확히 기재했고, 사망장소는 베이징 '부영병원'이라고 밝히고 있다.본관은 상당수 기록에서 밝힌 '김해 김씨'가 아닌 '전주 김씨'였다. 하상기와 김란사 사이에는 딸 하나가 있었다. 일부 구술에 의해 이름은 자옥(子玉)이고, 이화학당에 재학 중 18세(또는 19세)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적등본에는 딸의 이름은 원옥(媛玉)으로 24세에 세상을 떴다고 기록돼 있다. 제적등본이 공문서인 만큼 현재로선 가장 객관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다.김란사애국지사기념사업회 회장인 김용택씨는 하상기의 직계가족은 아니지만, 국가보훈처와 행정안전부 등의 협조로 지난해 7월 제적등본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김용택씨는 "심지어 조상의 본관마저 틀리는 글들이 여럿 있어 이를 바로잡고자 제적등본을 요청해 받았다"며 "앞으로 김란사 할머니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들이 쓰이길 바란다"고 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김란사의 후손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남편 하상기의 제적등본. /김용택씨 제공

2019-05-08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12)]女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김란사(上)

조선말 개항장 감리지낸 남편따라 인천과 인연'뜨거운 학구열' 기혼녀임에도 이화학당 입학독립운동가 서재필 연설에 '감동' 미국行웨슬리언대서 한국 여성 최초 '문학사' 학위귀국후 고종 통역役·이화학당서 첫 여성교수 임명김란사(金蘭史·1872~1919)는 시대를 앞선 여성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문학사'(Bachelor of Literature) 학위를 취득했고, 최초의 여성 대학교수가 된 그의 행보는 당시 여성들이 가지 않은 길이었다. 이후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역사 전면에 등장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기도 했다. 김란사의 남편 하상기(河相驥·1855~1920)는 조선 말기 인천 개항장의 사법·행정과 국제업무를 총괄한 인천감리를 여러 차례 지낸 고위 관료였다. 하상기는 김란사가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여기에서 김란사와 인천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올해는 김란사 서거 100년이 되는 해이지만, 정작 그의 생애는 여전히 빈 칸 투성이다. 김란사와 관련해 근래에 쓰인 글들마저 출생연도, 유학 과정, 사망 경위 등이 제각각이다. 이름조차도 수년 전까지 남편의 성씨를 따랐던 '하란사'로 불렸다. 정부는 1995년 김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할 때 '하란사'로 표기했던 성명을 지난해 2월에서야 본래 이름으로 정정했다. 김란사의 생애를 제대로 복원하기 위한 연구가 절실하다.김란사는 이화학당에 입학할 때부터 일생을 관통한 신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헤아릴 수 있는 일화를 남겼다.이화학당 교장을 지낸 선교사 룰루 프라이(Lulu E. Frey·1863~1921)는 교사로 재직할 당시 김란사의 입학 신청을 한 차례 거절했다. 기혼 여성을 받지 않는 게 이화학당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김란사가 밤중에 이화학당을 직접 찾았지만, 프라이는 재차 입학이 어렵다고 했다. 그러자 김란사는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훅하고 불어 끄더니 "우리나라는 저 등불같이 매우 어둡다"며 어머니들이 배워 자식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결국 이화학당은 교육비용을 자부담한다는 조건으로 김란사의 입학을 허락했다. 프라이는 이 같은 내용을 1895~1896년 미국으로 보낸 이화학당 운영보고서에 담았다.김란사가 이화학당에 입학한 시기는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김란사와 하상기가 함께 1895년 봄 일본 도쿄에 있는 경응의숙(게이오의숙·慶應義塾)으로 유학을 갔다는 내용의 조선정부 문건들을 고려하면, 이화학당은 1894년쯤 들어갔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조선정부는 자비로 일본 유학 중인 김란사를 장학생(관비 유학생)으로 포함해주기도 했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김란사는 미국 유학파 독립운동가인 서재필(徐載弼·1864~1951)의 정동교회 연설에 감화돼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1920년 1월 22일자에 실린 '세 애국여사의 추도회' 기사에 이 같은 내용이 언급된다. 김란사는 1897년 말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입국해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남편도 동행했다가 곧 귀국했다. 이때부터 미국식으로 남편 성을 따라서 '하란사'라는 이름을 썼다. 유학 초기에는 워싱턴 D.C에 있는 하워드대학 예비과정 또는 '디커너스 트레이팅 스쿨'이라는 예비학교에서 수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0년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에 입학해 1906년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김란사의 조카손자인 김용택 '김란사 애국지사 기념사업회' 회장이 제공한 웨슬리언대학 학적부를 보면, 김란사는 3년간의 예비과정을 마치고 본과에 입학했다. 본과 1학년 때는 과학 전공을, 2~3학년 때는 문학 전공을 이수했다. 이름은 'Hahr, Nansa Kim Mrs.'라고 본래 성씨와 남편 성씨를 함께 썼다. 직업은 주부(Housewife)와 교사(Teacher)라고 표기돼 있고, 주소는 서울 이화학당으로 돼 있다. 이화여대가 1966년 웨슬리언대학에 김란사의 학적을 문의한 적이 있는데, 웨슬리언대학의 답장에는 "당시에 전공과목이 따로 없었을 때였으나, 그(김란사)는 영문성경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고 나온다. 김란사는 유학시절 웨슬리언대학 기숙사인 모네트홀에서 지냈다. 이화여대 이화역사관이 소장한 사진 속 김란사의 기숙사 방에 걸린 태극기가 눈에 띈다.긴 유학생활을 마친 김란사의 귀국에 국민적인 관심이 쏠렸다. '대한매일신보'는 1906년 8월 18일자 신문에서 '전 농상국장 하상기 씨 부인이 미국 화성돈에 가서 유학한 지 10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환국하여 동문 외본제에 주재한대 성 내외 사부가에서 여자교육을 부탁하는 이가 다다(多多)하다더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고종의 후비인 엄황귀비(1854~1911)는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 한성고등여학교 등 여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김란사의 자문을 받았다. 김란사는 고종의 통역을 맡으며 황실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1909년 5월 경희궁에서는 '여성 해외유학생 환영회'도 열렸다. 김란사,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1877~1910), 일본 유학생 윤정원(尹貞媛·1883~?) 등 해외 유학파 여성 3명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부인단체를 중심으로 마련한 행사다. 궁궐에서 개최한 만큼 황실과도 교감을 가진 행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인단체 대표들이 연설을 하고, 주인공 3명이 답사를 한 뒤 여학생들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유학생잡지 '대한흥학보' 제3호(1909년 5월 20일 발행)는 환영회에 700~800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전했다. 같은 해 고종은 세 여성에게 직접 은장을 수여하기도 했다.의친왕 파리강화회의 파송 '밀사'로 가던중중국서 급사… 1995년에야 건국훈장 추서 서거 100년 불구 사망 경위·행적등 연구 미흡김란사는 1907년부터 이화학당 교사 겸 기숙사 사감으로 일했고, 이어 총교사(교감)로 승격했다. 조선일보의 첫 여성 기자인 최은희(崔恩喜·1904∼1984)가 생전에 쓴 여성 열전을 묶은 책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2003)의 '하란사'편에서는 기숙사 사감인 김란사가 호랑이 어머니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엄격하고, 욕설을 잘하기로 유명했다고 썼다. 1910년 9월 이화학당에 대학과를 개설하면서 김란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수로 임명됐다.교수 재직 시절에는 개화파 인사인 윤치호(尹致昊·1866∼1945)와 선교잡지인 'The Korea Mission Field'를 통해 여성교육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윤치호가 해당 잡지에 신(新)학교 학생들은 대체로 집안 살림하는 법을 모른다는 취지의 글을 먼저 기고했고, 김란사가 '그 학교들의 목적과 방향은 슬기로운 어머니, 충실한 아내 및 개화된 가정주부가 될 수 있는 신여성을 배출하는 것이지 요리사나 간호원, 침모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글을 실었다.선교활동에도 적극적이었던 김란사는 1916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 감리교 총회에 한국교회 평신도 대표로 선정돼 다시 미국을 찾았다. 이후 2년여간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정동제일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하기 위한 모금활동을 펼쳤다. 도산 안창호(安昌浩·1878~1938)는 교민들에게 김란사의 모금활동을 돕자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재미동포들의 모금으로 1918년 설치한 정동제일교회 파이프오르간은 한국에서는 처음이었고, 동양에서는 두 번째였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됐다가 2003년 복원됐다.고종은 1919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에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1877~1955)을 파송할 계획을 추진했다. 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하는 회의에서 한일 강제병합의 부당함과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오하이오에서 유학한 의친왕과 교류가 있는 김란사도 밀사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김란사의 파리강화회의 비밀 파송과 관련한 공식적인 문건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신문기사와 해방 이후 관련 인사들의 자서전 등을 통한 후일담만 남아 있을 뿐이다. 파리로 향하던 김란사는 1919년 3월 10일 중국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갑작스럽게 숨을 거뒀다. 유행성 독감이라는 기록도 있고, 분사(憤死)했다거나 독살당했다는 설도 당시 떠돌았다. 김란사의 독립운동 행적이나 사망과 관련해 미진한 연구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 기숙사 '모네트홀'에 앉아 있는 김란사. 벽면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다. /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이 1966년 이화여대에 보낸 김란사의 학적 확인 답장. /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의 김란사 학적부. /김용택 '김란사 애국지사기념사업회' 회장 제공정부는 1995년 8월15일 김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면서 남편의 성을 따른 '하란사'(사진 오른쪽)로 성명을 표기했다. 김용택씨 등 후손들의 요청으로 지난해 2월 훈장증 성명을 본래의 이름인 '김란사'로 정정했다. /김용택 '김란사 애국지사기념사업회' 회장 제공일본 도쿄 경응의숙에서 유학한 조선 관비유학단이 1896년 친목회보에 실은 단체사진. 사진 속 하얀 한복을 입은 여성이 김란사다. 김란사 바로 왼쪽이 남편 하상기다. /이원규 작가 제공,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9-05-08 박경호

[인천의 얼굴·(9)필리핀 출신 결혼이주여성 이소혜씨]결혼 2년만에 갑작스럽게 '사별'… 남편 대신 또한명의 엄마를 얻어

얼마전 필리핀 모친마저 떠나 더 각별해연수원로모임 어버이날 효부상 희소식시어머니와 며느리. 우리에게는 마치 지금의 여야 관계처럼 불화와 갈등의 대명사로 다가옵니다. 그만큼 둘 사이는 불편한 관계란 얘기일 겁니다. 왼쪽 이순덕(81) 할머니와 오른쪽 이소혜(33)씨는 정말이지 친정엄마와 딸 같은 고부간(姑婦間)입니다. 이소혜씨는 2008년 필리핀에서 온 결혼 이주여성입니다. 원래 이름은 알디자(Aldiza)였는데 2015년 귀화하면서 시어머니 성을 따라서 이씨로 정했습니다. 결혼 2년 만에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딸이 7개월이었고, 막내아들이 뱃속에 있을 때였습니다. 누구 하나 아는 사람 없이 왔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죠. 고향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신 게 시어머니였습니다. 시어머니에게도 남편은 하나뿐인 아들이었지요. 말 그대로 동병상련이었습니다. 딸이 되기로 했습니다. 소혜씨는 시어머니를 엄마라 부르고,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알디자라고 필리핀 이름을 불러줍니다.필리핀 친정에는 1년에 한 차례씩은 다녀왔는데 몇 년 전부터 시어머니의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가지 못합니다. 시어머니 혼자서는 산책을 나가기조차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친정 가족들이 보고 싶지만 꾹 참고 SNS로 달랩니다. 2년 전에는 필리핀에 계신 친정엄마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뒤로는 더욱 시어머니가 친정엄마 같습니다. 엄마와 딸도 자주 다투듯이 이 둘 사이에도 말다툼이 있습니다. 음식 간을 맞추는 것이 싸움이 되고는 합니다. 필리핀에서 먹듯이 간을 하면 시어머니는 짜다고 타박을 하거든요. 여덟 살, 일곱 살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었으면 좋겠는데 시어머니는 일찍 자라고 성화지요. 목소리를 높여가며 싸우다가도 한나절이면 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수다를 떱니다.효부(孝婦)라는 말이 오히려 불편해진 요즘 세상입니다. 이 딸 같은 며느리에게 인천연수원로모임이라는 단체에서 올해 어버이날에 맞추어 효부상을 준다고 합니다. 인천에 사는 외국인이 10만4천여명인데, 결혼해 이민을 오거나 귀화한 사람은 2만1천여명입니다. 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5-06 윤설아

[독립운동과 인천·(11)]'이을규·정규' 형제

세살터울로 장봉도서 태어나 둘 다 인천고 졸업… 은행 그만두고 나란히 독립운동 길 나서형 이을규 대동단 '의친왕 망명사건' 주도로 옥고, 동생 정규 일본서 2·8독립선언대회 동참1921년 함께 중국행 '아나키스트' 왕성한 활동중 혁명고취 논문으로 동생 '징역 3년형' 고초해방후 각각 이승만정권 감찰위원·성균관대 총장지내… 형만 '유공자 서훈' 재조명 목소리한 배에서 나고 자란 형제이면서 같은 학교를 졸업한 동문인 독립운동가가 얼마나 있을까. 인천 장봉도에서 태어난 이을규(1894~1972)·이정규(1897~1984) 형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킬 무렵 인천고등학교(옛 인천공립상업학교)를 함께 다녔고, 졸업 후 독립운동 동지가 됐다.이을규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망명 사건을 주도했던 대동단의 핵심 인물이었고, 이정규는 우당 이회영과 함께 독립운동계 아나키즘 사상을 정립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두 형제는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죽음과 옥살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치열하게 독립운동 전선에 나섰다.이을규는 의친왕의 바로 옆에서 고비마다 큰 역할을 해냈던 중요한 인물로 1990년 독립유공자 애족장 서훈을 받았지만, 이정규는 생전에 본인의 뜻에 따라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지 않아 공훈기록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천의 독립운동가로서 이들의 생애와 독립운동 궤적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이을규·정규 형제는 각각 1894년과 1897년 인천 장봉도에서 태어났다. 정부 공식 문서라고 할 수 있는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과 백과사전에 이을규를 소개하는 글에는 충남 논산이 본적으로 돼 있으나, 이을규·정규 형제는 생전에 인천 장봉도 출신임을 분명히 밝혀왔다.일제의 강제 병합이 있던 해인 1910년 이을규가 먼저 인천고에 입학했고 이듬해 동생 이정규가 입학했다. 현재 졸업기수로 따지면 13회, 14회다.식민통치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1910년대 초반 학교는 교장과 교사들이 일본인으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교사는 제복을 입고 수업에 들어왔다. 인천고도 마찬가지였다. 이을규·정규 형제는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과 강압적인 교육에 대한 반발심이 커졌다고 한다.이들 형제는 학업에는 성실히 참여했다. 형 이을규는 수석 졸업생이었다. 지금의 도덕 교과목인 수신(修身)과 이과(理科) 분야 성적이 특히 우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생 이정규도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두 형제는 장봉도 출신인데 인천에서 운수업을 하던 큰 형을 따라 나왔다. 이들의 고등학교 학적부를 보면 이을규는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이정규는 인천 우각리(현 동구 금창동)에 있던 인명의숙을 졸업하고, 인천고에 진학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형제는 은행에 취직했지만, 일본인들의 민족 차별에 반발해 둘 다 사직했다. 그리고 나란히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다. 이을규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협·최익환 등이 결성한 대동단에 가입해 1919년 11월 '의친왕 망명사건'에 참여한다.대동단은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친왕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망명시킨 뒤, 조선의 독립을 고취하는 내용의 포고문을 중국과 우리나라에 배포할 계획이었다. 대동단을 소개하는 '대동단실기'를 집필한 건국대학교 정치학과 신복룡 명예교수는 "대동단은 조선 왕조 왕실이 (한일) 합병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친왕의 입을 통해 세계에 알릴 목적으로 망명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이을규는 의친왕을 중국 안둥현(安東, 현 단둥(丹東))까지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중국까지 일본 경찰에 들키지 않고 의친왕의 탈출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였다. 고비 때마다 이을규의 기지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서 의친왕은 이을규의 낡은 외투를 입고 신분을 위장해 3등 칸에 탔다고 한다. 일본 경찰 검문에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도 있었지만, 이을규가 백부(伯父)라고 대신 대답해 모면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의친왕과 이을규는 중국 안둥현에 도착했으나, 의친왕 망명 소식을 접한 일본 경찰에 의해 붙잡히게 된다. 이 사건으로 그는 징역 2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동생 이정규는 일본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도모했다. 게이오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한 그는 조선유학생학우회 일원으로 2·8독립선언대회에 참가했다.이을규는 감옥에서 출소한 1921년 겨울 방학을 맞아 일본에서 귀국한 동생 이정규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이때부터 형제는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다.베이징 대학에 진학한 이정규는 러시아의 시인 에르셍코와 교류하며 아나키즘 사상가로 성장하게 된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 이회영을 아나키즘 사상가로 인도한 이가 바로 이정규다. 그는 아나키즘을 조국의 독립운동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두고 깊은 고민을 했다. 이정규는 훗날 저술한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이회영 선생이 무정부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서 오랜 시간 동안 문답을 하게 됐다. 이것이 선생으로서는 무정부주의 사상의 내용을 들어보는 첫 번째 기회였다. 이때는 마침 선생이 사상적인 진로 모색을 하던 때였으므로 이정규와의 대화는 선생에게 큰 충동을 줬다."이정규의 영향으로 형 이을규도 아나키스트가 됐다. 형제는 1924년 4월 우당 이회영, 화암 정현섭, 구파 백정기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다. 이 단체는 외세에 의존하는 타협론과 소련에 기대는 공산주의 세력을 함께 비판하며,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직접 행동노선을 주장했다. 상하이로 가서 약산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한 것도 이 시기다. 일본 첩보단이 작성한 의열단원 명부에 이들 형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중심 간부로 올라 있다.아나키스트 사상가로서 이정규의 활동은 이후 더욱 활발해졌다. 난징에서는 대만·베트남·필리핀 등 7개국 항일지사들과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를 열고 기관지 '동방'을 발행했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기관지 '탈환'을 간행했다. 그러던 중 탈환에 기고한 논문이 결국 일본의 감시망에 걸렸다. 이정규는 탈환에 '탈환에 제일성', '혁명원리의 탈환'이라는 제목의 두 편의 논문을 가명으로 기고했는데, 일본은 이 글이 조선의 혁명 정신을 고취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정규는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만주 하이린을 근거지로 했던 이을규도 고초를 겪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회영의 지시를 받고 김좌진 장군의 신민부와 연합하는 활동에 전념했는데, 일본과 공산주의자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을규·정규 형제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던 화암 정현섭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이라는 책에서 "그 무렵 만주에서는 이른바 사상 문제로 우리끼리 더 많이 죽였어요. 공산당이라고 잡아 온 젊은이를 죽이려는 것을 내가 뜯어말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러니까 만주에 있을 때 왜놈보다도 우리 동포인 공산주의자가 무서워 잘 때도 신을 신고 옷을 입었습니다."고 1920년대 말 만주의 상황을 설명했다.혼란한 시대 속에서 김좌진 장군은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됐고, 일본이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펼치면서 이을규는 국내로 압송돼 5년이나 투옥하게 된다.해방된 조국에서 아나키스트 형제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들은 농민 스스로 자치 능력을 기르기 위해 농촌자치연맹과 노동자자치연맹을 각 지역에 조직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이을규는 1953년 이승만정권에서 초대 감찰위원을 지냈고, 1963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72년 서울 동대문구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생애 말년에 번역했던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의 저서 '현대과학과 아나키즘'은 사망 이듬해인 1973년에야 출간됐다. 이정규는 1963~1966년 성균관대 총장을 지냈고, 전 재산을 출연해 아나키즘 연구 단체 (사)국민문화연구소를 만들었다. 1984년 사망한 그는 생전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다.인천 출신인 이원규 작가는 "삼형제 중 두 명이 목숨을 내놓은 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국내 아나키스트 사상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인천 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해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며 "인천시 등이 나서서 이제라도 활발하게 연구를 진행해 우리 고장의 독립운동가를 널리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이을규(왼쪽)와 이정규.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왼쪽부터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기관지 '탈환'에 기고한 논문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은 이정규의 판결문 원본, 이을규·이정규가 이름이 담긴 의열단원 관헌문서, '의친왕 망명 사건'으로 징역 2년 형을 받은 이을규 판결문 원본. /인천고 제공

2019-05-01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11)]이을규·정규

1910년 나라의 명이 다하자 많은 사람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온 집안이 독립운동에 나선 경우도 많았다. 전 재산을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일가와 서대문 형무소 1호 사형수로 기록돼 있는 의병장 허위 가문 등이 대표적이다.인천에도 독립운동에 나선 형제들이 있다. 이을규(1894~1972)·정규(1897~1984) 형제다.인천 장봉도에서 태어난 이들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1910년대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에는 독립운동을 했다.이을규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망명 사건에 참여했다. 그는 경성에서 중국 안둥현(현 단둥시)까지 의친왕의 망명 여정을 최측근에서 호위했다. 당시 최고의 아나키즘 사상가로 평가받았던 이정규는 형 이을규, 우당 이회영과 함께 아나키스트 단체를 조직했다.형제는 의열단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일본과 맞서 싸웠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을규는 1990년 독립유공자 애족장 서훈을 받았고, 이정규는 생전 본인의 뜻에 따라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하지 않았다.하지만 인천 지역에서는 이들의 독립운동 행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인천시는 '인천시사'에 나온 인천 지역 인물 409명을 홈페이지에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이을규·정규 형제에 관한 내용은 빠져 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이을규의 본적이 충남 논산으로 돼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을규·정규 형제는 생전에 인천 장봉도 출신임을 분명히 밝혀 왔다. 인천에서 이들 형제의 행적을 연구하고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성이 나오는 이유다.약산 김원봉 서훈에 따른 논쟁이 불거지면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이을규·정규 형제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시기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5-01 김주엽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