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인천경영포럼]윤상현 의원 "문재인대통령이 아베에 비공개 특사 보내야"

한일관계 개선 외교적 해법 제시"그래도 안되면 국제재판소 가야"자유한국당 소속 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천 미추홀구을)은 "문재인 대통령이 아베 총리실에 비공개 특사를 보내 무역 보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윤상현 위원장은 22일 인천 연수구 라마다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408회 조찬강연회에서 한일관계 개선 해법을 이같이 제시했다. 윤상현 위원장은 "이 문제를 끝낼 타임 테이블을 만들어서 양측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하면 12월 31일까지 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윤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관계를 "마주 달려오는 기차"로 비유한 뒤 "감정적 대응을 하지 말고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윤 위원장은 "일본은 수출 규제가 아닌 '수출 관리'라고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강제 징용자의 청구권을 인정한 작년 말 대법원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라며 "결국 정치·역사 문제가 경제보복으로 가게 됐는데 정말 졸렬하기 짝이 없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그러면서 "일본의 요구는 과거 박정희 정권과의 한일협정으로 강제 징용 배상 문제가 해결됐는데 지금의 대법원 판결로 다른 입장이 나왔으니 이를 해소해달라는 것"이라며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일본이 요구하는 외교적 협의와 중재위원회 구성, 제3국을 통한 중재위원회 구성에 대해 모두 답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윤상현 위원장은 "대법원 판결이 한일협정과 불일치하게 나왔다면 외교적 노력을 해야 하지만 정부가 이를 방치했다"며 "대통령이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기꺼이 손을 잡겠다고 했는데 이미 일본은 작년 말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후부터 대화를 계속 요구해왔다"고 말했다. 윤 위원장은 "양국은 현재 진행하는 모든 조치를 올스톱하고, 대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윤상현 위원장은 이 문제가 풀리지 않고 양국의 무역 전쟁이 벌어지면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윤 위원장은 "국제법의 조류가 개인의 청구권은 인정하는 추세"라며 "일부 승소, 일부 패소 판결을 이뤄낼 수 있고 완전히 지지는 않기 때문에 외교적 해법이 안 되면 ICJ라도 가야한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이 22일 라마다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조찬간담회 강연자로 나와 한일관계 전망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인천경영포럼 제공

2019-08-22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24)]장봉도 할아버지 송두용

옥고도 치러… 2010년 유공자 인정해방이후 남북통일 염원 밝히기도인천 장봉도에서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헌신했던 기독교 신앙인 송두용(1904~1986) 선생.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라는 다소 생소한 신념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빈민구제 활동가로 잘 알려진 그는 독립운동 행적과 사상과 관련해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편이다.송두용은 뜻을 함께한 신앙인들과 함께 만든 기독교 잡지 '성서조선'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했다. "매서운 추위에도 살아남는 개구리는 있다"는 내용의 성서조선 158호(1942년 3월)의 권두언은 칼끝과 총부리로 우리 민족을 겨누고 말살하려 했던 일제에 일침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송두용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송두용은 이 사건에 대해 "일본 경찰은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모조리 검거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치성은 전혀 없고 다만 기독자로서 양심생활을 한 것뿐"이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 정치적 행동과 거리가 먼 신앙 그 자체를 위한 활동(신앙만의 신앙)이었다고 밝혔지만, 순수한 신앙심이 결국 민족의 해방과 평화에 대한 갈망을 불러왔다. 정부는 2010년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송두용은 해방 이후에도 신앙과 관련한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많은 글을 남겼다. 3·1 운동 정신은 거창한 행사가 아닌 실력 양성으로 일본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다.그토록 염원하던 해방 이후 송두용은 남북을 비롯한 전 세계의 평화를 원했다. 평화를 바탕으로 남북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그의 바람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송두용은 해방 22주년을 맞았던 1967년 8월 "이제는 각각 남의 나라처럼 또는 피차 독립국가인 양 당연한 것 같이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듯이 체념하고 있는지 모른다. 천만의 말이다. 어서 남북이 합쳐야 한다. 하루속히 통일 국가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8-21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23)]장봉도 할아버지 송두용과 성서조선사건

일본서 성경 중심 무교회주의 들여와 연구회 조직 '성서조선' 발행158호 弔蛙 통해 '한두 마리는 살아남듯' 말살정책 극복의지 표현해방 후 장봉도 푸른학원 이어받아 빈민구호·교육사업에도 힘써태평양전쟁 발발로 일제의 식민지 수탈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 초반 서울에서 발행된 한 기독교 잡지 첫 장에 의미심장한 내용의 권두언이 실렸다.권두언의 제목은 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의 '조와(弔蛙)'. 1942년 3월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기독교 신앙 잡지인 '성서조선(聖書朝鮮)' 158호에 겨울잠을 자다 얼어 죽은 개구리를 빗대 민족의 참담한 현실을 고발한 글이 실렸다.일본은 잡지 발행에 가담한 인물과 독자들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이었다.이 사건의 중심에는 훗날 인천 장봉도에서 빈민구제 활동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던 독립운동가 송두용(1904~1986) 선생이 있었다.송두용은 1904년 7월 31일 충청남도 대덕군(지금의 대전시 대덕구)에서 부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에 입양됐다가 서울로 유학해 제동공립보통학교와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그는 18세 나이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 사건이 발생해 귀국했다. 그리고 21살 때 다시 일본 도쿄농업대학 예과로 진학했다. 그는 일본 유학생활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인생이 바뀌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제도권 아래 있는 교회 제도를 비판하며 성서와 신앙만으로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무교회주의'가 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교인 수를 늘리고 헌금 걷기에만 혈안이 돼 있는 기성 교단을 부정했다.송두용은 일본에서 무교회주의를 설파하던 우치무라 간조의 강연에 감명을 얻어 한국인 유학생인 김교신, 함석헌, 유석동, 양인성, 정상훈과 함께 '성서연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1927년 무교회주의 신앙을 기반으로 한 잡지 '성서조선'을 처음 발행했다. 송두용은 성서조선 6인방 중 가장 나이가 어린 23세였다.1930년 귀국한 송두용은 부천군 오류동(지금의 구로구)을 기반으로 성서집회를 열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송두용 등 6인방은 성서조선 발간과 함께 서울, 인천, 부천 등지를 다니며 강연을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때부터 율목동의 인천모임을 만들어 무교회주의를 알리고 주변에 성서조선을 전달했다.김교신이 1927년 7월에 쓴 성서조선의 창간사는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 신자보다도 조선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에 나뭇군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는 내용이다.민족의식을 가진 기독교인들의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하는 등 종교 운동을 바탕으로 한 항일의식이 확산하자 일제는 기독교를 철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결국 1942년 3월 송두용과 김교신 등이 성서조선 권두언에 실은 '조와'가 일제의 감시망에 잡혔다."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이 바위틈의 빙괴(永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 만에 친구 와군(蛙君)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潭) 속을 구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 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는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潭水)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의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마리 기여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이 글은 혹독한 추위가 와서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죽어 나가더라도 한두 마리는 살아남듯이 일제가 아무리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더라도 끝내 살아남는 한국인이 있다는 얘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일제는 송두용과 김교신 등 6인방과 주요 독자 12명을 치안유지법 혐의로 체포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가뒀다. 이 사건으로 송두용은 10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고 결국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성서조선도 '조와'가 실린 통권 158호를 끝으로 폐간됐다.송두용과 동시대에 무교회주의 활동을 했던 노평구는 당시 일제가 무력 투쟁이나 드러내놓고 하는 독립운동보다는 이 같은 종교·문화 운동을 더 두려워했다고 회상했다. 노평구는 송두용이 잡지에 쓴 글을 모아 총 6권 분량의 송두용신앙문집을 펴내기도 했다. 성서조선사건 당시 일본 경찰은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놈들 가운데서 가장 악질의 부류들이다. 결사니 조국이니 해가면서 팔딱팔딱 뛰어다니는 놈들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에라도 아니 오백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노평구는 밝혔다.송두용은 해방 이후에도 개인의 신앙생활과 함께 구호활동과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1930년 오류동에서 오류학원을 설립해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펼쳤던 송두용은 1969년부터 장봉도에서 지인의 제안을 받아 '푸른학원'이라는 교육기관의 운영을 맡았다. 건강 문제로 요양차 장봉도에 들렀다가 1967년 푸른학원을 설립한 무교회 신앙인 노연태로부터 푸른학원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는 '장봉도 할아버지'라는 별칭이 붙었다.당시 장봉도에는 초등학교밖에 없어 육지의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은 바다에 나가 굴이나 조개를 따거나 선주 밑에서 새우 선별작업을 하는 고된 일을 하면서 자랐다. 강화도와 영종도, 신·시·모도, 장봉도 일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노연태는 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송두용은 '정직'을 교훈으로 내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박정수 등 인천에서 함께 신앙 모임을 갖던 사람들도 푸른학원에서 교사 활동을 했다. 푸른학원은 1974년 정식으로 중등학교 인가를 받아 푸른고등공민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발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육지로의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푸른학원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이 급격히 감소했다.송두용의 건강이 악화되고, 학생 수가 자연스럽게 줄면서 1982년 푸른학원은 결국 문을 닫고 만다. 인천섬연구총서 '장봉도'편을 보면 1982년 장봉도 초등학교 졸업생이 36명이었는데, 푸른학원으로 진학하겠다는 학생은 겨우 4명에 불과했다고 한다.10년 넘게 장봉도의 학생들을 위해 헌신했던 송두용은 1986년 4월 10일 서울 구로구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따르던 제자들과 무교회주의 신앙인들은 송두용의 추모집을 발간하고, 그가 쓴 글을 모아 문집을 내기도 했다.송두용은 무교회주의 종교인이면서 민족의식을 지닌 독립운동가였다. 2010년 송두용은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이 인정돼 독립유공자 서훈(건국포장)을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그를 '인천' 출신으로 분류하고 있다.송두용은 1958년 3월 잡지 '성서인생' 33호에 쓴 '진정한 3·1 정신'이라는 글을 통해 60년 뒤를 내다보기라도 하듯 현세대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을 남겼다.그는 3·1 정신은 말이나 형식이 아니고 마음이며 산 생명이라고 했다.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각종 기념식 행사에만 치중해 진정한 독립의 의미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을 일찍이 우려했던 거다. 그는 "3·1 운동은 한 개인, 한 정당, 또는 한 단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정치인도 근로대중도, 부호도 빈자도, 남녀노유의 구별 없이 도시와 촌락의 차이가 있을 리가 없다"고 했다.그는 특히 3·1 운동의 정신은 국민 개인이 실력을 양성해 각자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일본 아베 정부의 무역보복 조치로 반일 감정이 확산하면서 정부와 국민들이 '극일(克日)'의지를 불태우는 현 시국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송두용은 "우리는 소련의 공산주의를 무서워하거나 일본의 침략정신을 겁낼 것이 없다. 일본을 이기고 소련을 물리치려면 오직 실력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허위와 외식을 버리고 허영과 기만을 떠나서 다만 진실 일로로 매진하는 수밖에 없다. 3·1 정신은 행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실천궁행으로 사는 것이며 이룰 것이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성서조선 158호에 일제 저항정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권두언 '조와(弔蛙)'를 실었다가 옥고를 치른 무교회주의 6인방. 뒷줄 왼쪽부터 양인성, 함석헌, 앞줄 왼쪽부터 유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송두용 등 무교회주의 신앙인 6명이 발행한 잡지 '성서조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1930년 오류학원을 설립할 당시의 송두용.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1958년 3월 송두용이 3·1정신에 대한 글을 썼던 잡지 성서인생.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

2019-08-21 김민재

[인천의 얼굴·(16)]인천화교학교 손승종 교장

1930년대 할아버지부터 정착 5대째 이어학생들 사자·용춤 배워 시민과 가까워지길인천의 대표음식이라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다들 짜장면을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그렇습니다. 인천 하면 짜장면이지요. 그런 점에서 짜장면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인천의 화교(華僑)들은 인천의 대표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화교의 역사는 인천에서 시작합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제물포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를 따라온 40여명의 군역 상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인천에 정착하면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교육기관이 필수적이었습니다. 1902년 소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인천화교중산소학(이하 인천화교학교)의 모태입니다.손승종(60) 인천화교학교 교장도 이 학교 출신입니다. 인천화교학교는 유치원, 초등부·중등부·고등부가 있습니다. '중산'은 중화민국을 세운 쑨원(1866~1925)의 아호입니다. 대만의 교육과정을 따르고 있습니다. 대만과는 달리 한국어 수업시간이 있기는 합니다.손승종 교장의 할아버지가 1930년대 중국 산둥반도에서 한국으로 건너왔다고 합니다. 손 교장의 손자까지 5대째 인천에 살고 있습니다. 1960~70년대에는 학생이 1천200명을 넘었습니다. 지금은 400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화교 배척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이들이 떠났습니다.화교사회도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집에서 중국어만 썼습니다. 그러니 한국말이 서툴 수밖에 없었지요. 영락없는 이방인이었지요.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중국말이 서툽니다. 손승종 교장은 그게 걱정입니다. 화교학생들이 중국말에 서툰 것은 화교들의 한국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손승종 교장은 학부모들에게 당부합니다. 집에서는 되도록 중국어를 쓰도록 해달라고요. 그러면서 하나 더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화교사회와 인천과의 소통입니다. 학생들이 사자춤과 용춤을 제대로 배워, 이를 통해 인천 시민들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손승종 교장은 올해 10월 10일 쌍십절 기념일에 펼칠 춤공연이 인천과의 소통의 장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10월이 벌써 기다려집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8-20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23)]용동 출신 박남칠

내리교회 교인 父영향 日 억압속 '엡윗청년회' 소년운동 주도 야학등 열며 애국심 고취YMCA 중등부에서 '사회주의' 눈 떠… 조봉암과 '운명적 만남' 평생 후원자·동지관계미곡상 경영하며 인천·강화지역 좌익 독립활동가 '구심점 역할' 청년운동도 지속 펼쳐해방후 여운형 '건국준비위' 참여 한국전쟁때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희생' 재평가 필요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인천의 대표적인 좌익 활동가로 올해 서거 60주기를 맞은 죽산 조봉암 선생을 꼽는 데 누구나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조봉암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동지이며 기독교 사회주의자로서 인천의 근현대 좌익 활동을 이끌었던 박남칠(1902~1950)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박남칠은 드러내놓고 독립운동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인천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청년운동과 소년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청년들의 문화·체육 활동과 강연회 개최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힘썼고, 한편으로는 사업가로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또 인천·강화지역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연결고리이자 구심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박남칠 연구는 교사 출신의 인천 향토사학자 이성진 인천골목지킴이 대표의 성과가 유일하다. 이 대표는 인천의 근현대 인물 가운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박남칠에 주목하고, 그의 생애와 사상 전반에 대해 연구해 왔다. 현재 알려진 박남칠의 행적은 대부분 이 대표가 1차 사료를 수집해 정리한 자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박남칠은 과거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천 근현대사의 '엑스트라'로만 남아 있다. 올해 독립운동 100년을 맞아 후학들이 재조명해야 할 산더미처럼 쌓인 인천의 인물 가운데 박남칠이 빠져선 안된다.박남칠은 1902년 5월 20일 인천 용동에서 미곡상을 하는 박삼홍과 허매란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남칠은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 박삼홍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박삼홍은 1890년대 미곡상으로 부를 쌓았고, 한국인 최초의 목사인 김기범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내리교회 교인이었던 박삼홍은 인천 소년운동의 효시이기도 한 '엡윗청년회'의 초기 멤버였다. 엡윗청년회는 1889년 미국 감리교 내 청년단체로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고향 엡윗(Epworth)에서 이름을 따왔다. 엡윗청년회는 선교사들의 해외 파견지에도 조직됐는데 1897년 인천 내리교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엡윗청년회가 만들어졌고, 서울·강화 등지로 퍼져나갔다. 조봉암도 강화 잠두교회의 엡윗청년회 출신으로 훗날 박남칠과 인연을 맺는다.박삼홍은 내리교회 엡윗청년회 회장을 지내면서 계몽운동을 이끌었고, 이는 애국·민족 운동으로 확대됐다. 결국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진남포 지방 총무였던 김구 등 전국 엡윗선교회 임원들이 구국기도회를 개최하고 상소운동을 벌인 일은 유명하다. 이 일로, 이듬해 6월 일본은 감리교 내 친일성향의 선교사를 회유해 엡윗선교회를 해산하도록 했다. 인천 내리교회 엡윗선교회도 창립 9년 만에 해체됐지만, 박삼홍은 1908년 재조직을 감행해 기독교 청년운동의 맥을 이었다. 기독교 신앙과 포교가 바탕이었지만, 문맹퇴치사업과 연극 공연, 강연회 개최 등으로 민족 의식을 배양하는 게 주된 임무였다. 육영사업에도 앞장서 내리교회가 세운 영화학교에 많은 돈을 기부했고, 다른 학교에서 체육행사가 열리면 기꺼이 후원금을 보탰다.박남칠은 이런 아버지 곁에서 소년운동과 청년운동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배우면서 자랐다. 그는 1918년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 있는 YMCA 중등부 과정에 진학했다. 이때 교장이 월남 이상재 선생이었다. 박남칠은 여기서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됐고, 세 살 위인 죽산 조봉암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됐다.소설가 이원규가 쓴 죽산 조봉암 평전에도 둘의 만남이 소설처럼 그려지고 있다."동급생 중에 그를 친형처럼 정겹게 따르는 청년이 있었다. 인천 출신의 박남칠이었다. 조봉암은 그가 신흥우 선생의 수업시간에 맨 앞에 앉아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해 열심히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고 괜찮은 녀석이라고 여겨온 터였다."1920년 5월 죽산이 의친왕 망명을 시도한 대동단 사건에 휘말려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난 뒤 몸을 추스른 곳도 박남칠의 셋방이었다.박남칠은 공부를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와 아버지 밑에서 미곡상 경영을 도왔다. 미곡상에서 정미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아버지는 사업이 번성할수록 상도덕을 지키라고 박남칠에게 늘 당부했다. 당시 곡식의 중량을 속여 파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기독교와 사회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워 서로 반감을 갖고 있지만, 유독 인천은 사정이 달랐다. 1920년대 내리교회 담임 목사는 독립운동가 김진호 목사와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였던 신홍식 목사였다. 방법은 달랐으나 조국의 독립을 위한 목표는 같았던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연대했다. 이런 분위기의 중심에 박남칠이 있었다. 내리교회 엡윗청년회는 일제의 압력 속에서도 꿋꿋이 활동을 이어갔다. 엡윗청년회 출신의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 이길용 등이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이끌었고, 이들은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이 됐다. 야학과 웅변대회, 토론회를 열어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했고, 기독교의 구원은 개인이 아닌 사회를 의미한다고 설파하며 기독교를 식민지 민족의식 배양의 거름으로 삼았다. 사회참여를 고민하는 청년에게 기독교가 하나의 진입 경로 역할을 한 셈이다.서울 YMCA에서 조봉암과 연을 맺은 박남칠은 조봉암이 조직한 신흥청년동맹 전국 순회 시국강연의 인천 행사를 담당했다. 당시 조봉암은 공산당의 심장인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다 국내 사회주의 세력과의 결합을 도모하고 있었다.조봉암이 1924년 4월 19일 인천 산수정 공회당(지금의 송학동 인성여고 부근)에서 연 신흥청년동맹의 인천 강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봉암 일행의 인천 강연 예고 기사를 실으며 분위기를 띄웠다. 조봉암은 이 자리에서 "대중을 본위로 삼는 민중운동이 조선인의 유일한 살길이며 따라서 이러한 신사상을 널리 판매하겠다"고 해 호응을 얻었다.박남칠은 이날 조봉암에 김용구와 이보운, 이승엽, 유두희, 권평근 등 인천의 청년 지도자들을 소개했다. 장차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어갈 이들의 만남에 박남칠이 주선자로 나선 것이다.박남칠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내리교회 소년척후대 활동이다. 내리교회 엡윗청년단이 주도해 만든 단체로 오늘날의 보이스카우트와 비슷한 소년단체다. 신태범(1912~2001) 박사는 '인천 한세기'에서 "내리 소년척후대는 교회대였으므로 지도자도 넉넉했고 후속 대원도 꾸준해서 착실한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여러 차례 큰비만 오면 침수 소동이 나는 화수동 일대의 구원활동을 했고, 어린이날 행사에 협조해 가면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박남칠은 소년척후대 지도자로서 주말마다 정기집회를 갖고, 어린 대원들에게는 한국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높였다. 평일에도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치면서 생활 속 애국을 실천하도록 했다. 이런 왕성한 활동으로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자 일본 경찰은 소년척후대의 야영이나 집회를 감시할 정도였다. 전국 각지 소년척후대 출신들이 항일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일제는 이를 불온 단체로 여겨 행사마다 입회했다고 한다.1940년대 들어 교회가 일제에 순응하고, 미곡상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박남칠도 고비를 맞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 아래 쌀 정량을 지키는 도덕적인 사업가로 알려져 신망이 두터운 터였다. 그는 정미소 이름도 '남이 잘 되는 것을 바란다'는 뜻의 '송무백열(松茂柏悅)'에서 따와 송무정미소로 지었다. 이는 소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측백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인데, 손님이 잘 되는 것을 가게 주인이 기뻐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박남칠은 상공인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1935~1940년 인천상공회의소 평의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는데 훗날 일본의 어용단체에 참여했다는 부정적 인식이 꼬리표처럼 달렸다.그러나 1938년 9월 27일 동아일보 기사는 그를 "공익심이 많은 실업가로 일반의 신망이 두텁다.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아끼지 않고 더욱이 육영사업과 소년지도에 부단히 노력하는 사회적 유지"라고 소개했다. 친일 부역자라면 얻기 힘든 평가이다.미곡상조합장을 맡기도 했던 박남칠은 이 무렵 감옥에서 출옥해 생계가 곤란했던 조봉암이 인천비강업조합장을 맡을 수 있도록 했다. 또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전향을 하고 돌아온 인천 출신 사회주의 활동가 이승엽을 미곡상조합 사무장으로 취직시켰다. 이뿐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동지들이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식민지 수탈 시기 성공한 사업가로서 독립운동자들의 경제적인 버팀목이 되어준 셈이다.그는 해방 이후에도 사회주의 노선을 유지해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보도연맹 학살 사건 희생자가 됐다. 조국 해방으로 건국 준비에 여념이 없던 그가 좌우 이념 대립의 희생양이 된 거였다.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한국전쟁 전후 인천에서 벌어진 민간인학살사건 피해자 62명 중 박남칠이 포함됐다고 밝혔다. 좌익 사상가를 공산당 부역자라는 이유로 무차별 학살한 사건에 희생된 것이다. 박남칠은 1950년 6월 30일 무렵 집에 숨어 있다가 발각돼 살해됐고, 소월미도에 수장됐다고 알려졌다. 과거사위는 "박남칠이 인천시청에서 열린 군중집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당시 보도연맹원 단속을 피해 숨어 있다가 어린 조카가 경찰에게 뒷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 연행된 후 살해됐다"고 밝혔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아이클릭아트내리교회 소년척후대. 사진 가운데가 박남칠. /인천시 역사자료관내리교회 집총고적대. /인천시 역사자료관엡윗청년회 여자야학부. /인천시 역사자료관

2019-08-14 김민재

[zoom in 송도]5공구 글로벌파크 3·4지구… 이달중 개방

3지구, 책읽는 쉼터·야외 공연장피크닉광장·카페테리아 등 마련4지구엔 어린이들 전용 물놀이장축구·풋살장 등 다양한 체육시설인천 송도국제도시 5공구에 조성한 글로벌파크 3·4지구가 이달 중 인천시민에게 개방된다. 글로벌파크 3·4지구는 송도 에듀포레 푸르지오와 인천글로벌캠퍼스(해외 명문대 공동 캠퍼스) 인근에 있다. 면적은 10만8천775㎡다. 2017년 11월 착공한 지 1년 9개월 만에 완공됐다. 현재 개장을 앞두고 마무리 작업 및 시설 점검이 진행되고 있다. 글로벌파크 3·4지구는 주제가 있는 공원이다. 3지구는 '책 읽기 좋은 공원'이고, 4지구는 '운동을 즐길 수 있는 공원'이다. 3지구는 정적이고, 4지구는 동적인 분위기다. → 위치도 참조글로벌파크 3지구에는 '북카페'와 '독서마당' 등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많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우드 데크를 설치하고 그 위에 벤치와 북카페를 만들었다. 많은 사람이 바닥에 걸터앉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우드 데크를 2단의 계단식으로 설치했다. 북카페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거나 비가 내리는 날에도 책을 읽을 수 있으며 책장처럼 쓸 수 있는 선반도 있다. 작은 카페를 공원에 옮겨 놓은 것 같다.독서마당은 반원(半圓) 형태의 돌담으로 돼 있다. 돌담에 앉아 책을 볼 수 있게 설계한 것이다.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지면 아늑한 느낌의 공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3지구 중앙부에는 '물결마당'이 있다. 바다에 물결이 일어나는 것을 표현한 꽃밭이다. 인천이 '해양 도시'이고, 송도가 바다와 가까운 점을 고려해 이같이 설계했다고 한다.3지구에는 음악회 등 공연을 열 수 있는 '야외무대'가 있다. '피크닉광장'(잔디밭)과 '카페테리아'도 있다. 카페테리아는 건물 외관이 거의 완성된 상태로, 운영사업자가 선정되면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거쳐 문을 열 예정이다. 글로벌파크 4지구는 축구장, 풋살장, 농구장 등의 체육시설을 갖추고 있다. 축구장은 인조단지가 깔린 국제 규격 구장이다. 농구장은 풀 코트 1개와 하프 코트 2개로 구성됐다. 풀 코트 바닥은 눈부심이 적고 공이 잘 튀기는 조립식 매트로 돼 있으며, 반 코트는 탄성 우레탄 소재가 사용됐다. 축구장, 풋살장, 농구장에는 LED 조명탑이 설치돼 있어 저녁에도 이용할 수 있다. 구장 옆에는 음수대와 화장실이 있다.4지구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물놀이장'이 있다. 여름에는 물놀이장으로 이용하고 봄·가을·겨울에는 놀이터로 활용하는 시설이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송도에 어린이 물놀이터가 없는 점을 고려해 물놀이장을 조성했다"며 "아이들이 물과 함께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물놀이장에는 부모들을 위한 그늘막 쉼터가 마련돼 있다. 아이들이 물놀이장에 들어가기 전 발을 씻는 세족 시설, 물놀이 후 이용하는 샤워 시설도 갖추고 있다. 시공사 관계자는 "물놀이장은 목재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며 "깨끗한 수질 관리를 위해 수로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물을 공급하는 방식을 채택했다"고 말했다.글로벌파크 3·4지구 보행로는 보도블록을 사용하지 않았다. 보도블록 방식은 유모차를 밀고 다니거나 롤러스케이트·킥보드 등을 타는 데 불편하기 때문이다. 보행로에 아스팔트를 포장한 후 보도블록 문양을 그렸다.인천경제청은 글로벌파크 3·4지구에 소나무 등 큰 나무 4천291그루를 심어 충분한 녹음이 확보될 수 있도록 했다.또 영산홍 등 작은 나무 3만3천46그루와 구절초 등 초화류 4만5천본을 식재했다.글로벌파크는 기존 미추홀공원, 누리공원(문화공원)과 연결돼 약 2.6㎞의 거대한 녹지 축을 형성한다. 인천경제청은 이들 공원을 연결하는 보행 녹도(3개) 건설사업을 내년 3월 준공 목표로 진행 중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송도 5공구 글로벌파크 3지구에 마련한 '북카페'·'독서마당'(사진 왼쪽부터)송도 5공구 글로벌파크 4지구에 조성된 어린이 물놀이장.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9-08-11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22)]강화 출신 죽산 조봉암·(下)

'두차례 검토' 친일흔적 이유 보류근거로 삼았던 기사도 사실과 달라죽산 조봉암(1899~1959)은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대한민국의 초석을 닦은 정치가이다.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고, 제2대 국회의원과 국회 부의장을 거쳐 두 번의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까지 그의 정치적 기반은 늘 인천이었다.인천시는 조봉암 60주기 다음날인 지난 1일 인천시청 본관에 독립운동 관련 죽산의 어록과 태극문양을 조합한 대형 현수막을 걸어 그를 기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3년째 꼬박 죽산의 추도식에 화환을 보내고 있다. 1959년 국가로부터 '사법 살인'을 당한 조봉암이 2011년 대법원 재심을 통해 복권된 지 8년이 지났다. 하지만 국가가 죽산의 명예를 회복하는 최종적인 단계라 할 수 있는 서훈은 아직 소식이 없다.국가보훈처는 2011년과 2015년 각각 조봉암의 서훈을 검토했는데, 친일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보류했다. 국가보훈처가 지난해 서훈을 재검토하기 위해 '조봉암 평전'을 쓴 이원규 작가를 찾아 증언을 수집하기도 했지만, 이후 검토작업이 지지부진한 상황이다.국가보훈처가 내세우는 죽산의 친일 흔적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41년 12월 23일자 신문에 실린 '국방성금 150원 헌납' 기사다. 이 기사에 나오는 조봉암의 주소가 틀렸다는 게 일본 공문서 등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다.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수천만원에 달하는 '국방성금 150원'을 당시 죽산이 낼 형편이 되지 않았다는 여러 사람의 증언도 있다.죽산이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용산 헌병사령부에 체포됐다가 8월 15일 해방을 맞아 풀려난 그 날, 인천 도원동 자택 주변에는 1천여명의 환영 인파가 몰렸다. 인천사람들이 일제에 항거한 정치지도자로 가장 먼저 죽산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2011년 대법원 재심에서 간첩죄 무죄를 선고받기까지는 죽산의 서훈 문제는 공론화조차 할 수 없었다. 죽산 연구자들은 조봉암의 일제강점기 공산당 활동 경력이 복권된 이후에도 국가유공자 추서에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죽산에게 사회주의는 항일운동을 위한 방편이었다. 이원규 작가는 "죽산의 서훈은 어쩌다 소외된 것이 아닌 국가가 회복해야 할 양심"이라며 "반드시 그의 업적에 걸맞은 훈격으로 추서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08-07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22)]강화 출신 죽산 조봉암·(下)

1921년 일본 유학중 공산주의자 교류 '제국주의 반대' 독립운동 최선의 방편으로 선택조선공산당 창단 참여 코민테른 연락책 활동 中서 독립당 조직하다 체포 '6년 옥살이'인천 정착후 또 '구속' 감옥서 해방맞아… 전향 선포 제헌 국회의원·농림부 장관등 역임신뢰성 논란 '친일흔적' 보도에 서훈 보류 "불확실한 기사 1건보다 커다란 업적 주목을"죽산 조봉암(1899~1959)은 해방될 때까지 사회주의자로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동지였던 박헌영(1900~1955 추정) 중심의 조선공산당과 갈라서면서 해방 이후 사상적 전향을 선포하고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죽산이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면서 대한민국의 초석을 닦았다는 평가는 뚜렷하다. 그는 평화통일론의 선구자이기도 했다.조봉암은 1921년 7월 일본 유학을 떠나 김찬(1894~?)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했다. 조봉암은 이들과 엿장수를 하면서 어렵게 학비를 벌었고, 세이소쿠영어학교를 거쳐 주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다. 이 시기 그는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며 사상적으로 성장했다.1년 만에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조봉암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운동에 나섰다.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논객으로 급부상하면서 1922년 11월 소련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열린 한인 공산주의자 연합대회 국내대표로 참가했다. 그해 12월 공산주의 국제연합인 '코민테른'의 호출을 받아 조선인 공산당원 대표단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공부하기도 했다.이후 조봉암은 김찬, 박헌영, 김단야(1901∼1938), 임원근(1900∼1963) 등 청년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인천을 비롯해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했고, 조선일보에서 기자생활도 했다. 1920년대 중반까지 조봉암은 중국 상하이와 러시아를 누비며 코민테른과 조선공산당 간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상하이를 기반으로 한국유일독립당 조직운동에 뛰어들고, 현지 한인들의 사회주의계열 단체를 결성해 이끌었다.조봉암은 항일투쟁을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공산주의를 택했다. 당시 서구 주요 국가들이 일본의 조선 침탈을 묵인하는 국제 정세에서 조선인들의 정당 조직활동이나 빨치산(partisan) 투쟁에 금전적인 지원을 한 것은 국제공산당이 유일했다. 민족주의계열과 더불어 사회주의계열이 독립운동의 주요 흐름을 차지하게 된 원인이었다. 조봉암은 1957년 월간지 '희망' 2·3·5월호에 연재한 자서전 격인 '내가 걸어온 길'에서 일본 유학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볼셰비키들은 국내에서 혁명을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제국주의를 반대했고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침략을 반대하고 한국 독립을 적극적으로 원조한다는 것이며, 그 실증으로는 벌써 수십만 달러의 독립 원조자금을 상해 임시정부를 통해서 국내에 보냈다는 것이다. 우리 동지들은 그때야 비로소 소비에트 혁명의 내막을 약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우리나라가 일본과 싸워서 이기자면 우리 자신이 굳은 조직을 가져야 되겠고, 러시아와 협력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야 되겠다고 작정했다."조봉암은 1932년 9월 중국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체포돼 인천항을 통해 입국해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됐다. 동아일보는 1932년 10월 1일자 신문에서 '제1차 공산당 간부 조봉암 작일 피체'라는 제목의 기사로 죽산의 체포 소식을 다루면서 "조봉암은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때 외국으로 망명해 지금까지 있던 사람인데, 조선에 있을 때는 신흥청년동맹과 화요회 등에서 중요 간부로 활동하였다"고 설명했다. '내가 걸어온 길'에도 당시 상황이 언급됐다."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려니까 나이 삼십 남짓해 보이는 중국복 입은 청년이 내 앞으로 다가서며 중국어로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하기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담뱃불을 내어 주었더니 그 자는 담뱃불을 붙이는 체하면서 내 손을 슬금슬금 훔쳐본다. 좀 기분이 나빴지만 그냥 무심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자 난데없이 일본말로 '고꼬다요'(여기야)하는 소리가 들려서 정신이 번쩍 들어서 사면을 둘러보니 벌써 일본 놈 서넛이 내 앞에 서 있었고 전후좌우에 양복 입고, 사진기를 어깨에 둘러멘 놈들이 내 편을 향해서 모여들고 있지 않은가. (중략) 벌써 수십 명 왜놈 가운데 둘러싸여 있었고 불란서 형사 한 명이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치안유지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조봉암은 1933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됐다. 감옥에서 6년을 보내고 1939년 7월 출소했다. 일본 황태자 탄생에 따른 은사(恩赦)조치로 1년이 감형됐다.조봉암은 출소 이후 인천에 정착했다. 강화 출신 김이옥(1905~1933) 여사와 상하이에서 함께 살 때 낳은 어린 딸이 인천에 있는 먼 친척에게 맡겨져 있었다. 앞서 김이옥 모녀는 1933년 5월 귀국해 강화 친정에서 지냈는데, 그해 10월 김이옥은 지병이 악화해 세상을 떴다. 당시 인천 금곡동과 창영동 쪽에는 창녕 조씨 집안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또 조봉암이 서울에서 YMCA 중학부에 다닐 때 그를 따랐던 박남칠(1902~1950)이 인천 미곡상조합 조합장으로 지역 상공업계의 거물로 성장해 있었다. 미곡상과 객주업을 한 김용규 등 '강화구락부' 출신 지역 유지들도 조봉암에게 우호적이었다. 이들은 인천상공회의소 간부이자 지역 시민운동을 주도하는 인물들이었다.죽산의 후원자들은 인천 소화정(부평구 부평동)에 집을 얻어줬고,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인천비강업조합을 설립해 넘겨줬다. 비강업은 정미소에서 벼를 찧을 때 나오는 왕겨를 모아 사료나 연료로 공급하는 업종이다. 사무실은 현재의 신포시장 건어물거리 쪽에 있었는데,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상주하다시피 조봉암을 감시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일본은 조봉암에게 전향하라고 끊임없이 회유하고 있었다. 1942년에는 현 중구 도원동에 있는 부영(府營)주택으로 이사했다. 인천부(仁川府)가 1940년 직접 지어 분양한 도원동 부영주택은 지금까지도 일부가 남아있다.일제의 감시가 심했던 인천 시절 죽산은 박남칠, 김용규, 유두희(1901~1945), 권평근(1900~1945), 이승엽(1905~1953) 등 좌익계열 인사들의 사상적인 지주로서 합법적인 사회운동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죽산은 1945년 1월 '사상범 예비구금령'으로 구속돼 또다시 용산 헌병사령부에 갇혔다. '외국과 통신했다'는 이유였다. 그해 8월 15일 죽산은 헌병사령부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했다.국가보훈처는 조봉암이 해방 전 인천에 살던 시기에 친일의 흔적이 있다며 죽산에 대한 서훈을 보류하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의 흔적이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1940년 신년광고 1건과 1941년 연말의 기사 1건이다. 매일신보 1940년 1월 5일자 신문에는 '흥아신춘'(興亞新春)이라는 신년광고에 '인천부 본정 내외미곡직수입 성관사 조봉암 방원영'이라는 문구가 실렸다. 매일신보 1941년 12월 23일자 기사에서는 '인천부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씨는 해군부대의 혁혁한 전과를 듣고 감격하여 지난 20일 휼병금으로 금150원을 인천서를 통하여 수속하였고'라는 내용을 보도했다.하지만 '조봉암 평전'을 쓴 이원규 작가는 해당 광고와 기사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1933~1934년 인천상공회의소 편람에는 매일신보 신년광고에 등장한 '성관사'라는 업체가 없고, 동업자로 이름을 올린 방원영에 대한 기록도 찾을 수 없다. 죽산의 서훈과 관련한 결정적인 논란은 국방헌금 150원이다. 우선 조봉암은 서경정(현 중구 내동)에 산 적이 없고, 기사가 보도될 당시에는 부평에 살고 있었다. 이원규 작가는 일본자료 등을 바탕으로 당시 150원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3천만~4천만원의 가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봉암이 비강업조합을 맡고 있었지만, 국방헌금을 150원이나 낼 형편은 되지 않았다. 숭의동에 살았던 조봉암의 처남 김영순씨는 이원규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150원은 커녕 10원도 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회고했다. 죽산이 1952년 7월께 그의 죽마고우이자 독립유공자이기도 한 조광원(1897~1972) 신부를 만난 자리에서도 "비강업조합장 자리가 감옥살이보다 힘들었다"며 "걸핏하면 헌금 내라고 시달렸는데, 주변에서 알아서 해줬다"고 말했다는 증언도 있다.무엇보다도 죽산이 친일을 했다면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체포돼 8월 15일까지 갇혀 있을 이유가 없었다는 게 연구자들 시각이다. 죽산이 헌병사령부로 끌려갈 때 부인 김조이(1904~ ?) 여사는 "전쟁에 불리해지니까 말 안 듣는 사람들을 끌어다 죽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처남 김영순씨가 증언했다. 죽산이 풀려난 8월 15일 도원동 부영주택으로 올라가는 언덕이 1천명 이상의 환영 인파로 덮였다고 한다. 조봉암이 친일이었다면 환영이 아닌 민중의 지탄을 받았을 것이다. 죽산은 자신의 집을 찾아온 청년들을 주축으로 인천보안대를 결성하고,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했다.더군다나 해방 이후 박헌영 등이 조봉암을 축출하려고 맹공을 퍼부을 때도 매일신보의 국방헌금 기사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원규 작가는 "죽산이 국방헌금을 냈다면 일본의 선전 도구가 되어 신문에 크게 실리고 강연회에 불려다녔을 것"이라며 "불확실성이 가득한 1건의 기사 내용보다는 죽산이 남긴 커다란 업적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2017년 7월 31일 서울 망우리공원 죽산 묘역에서 열린 조봉암의 58주기 추도식장에 처음으로 '대통령 화환'이 왔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60주기 추도식까지 3년째 화환을 보내고 있다.중국 상하이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조봉암을 다룬 동아일보 1933년 2월 25일자 신문기사. 기사 속 사진은 조사를 받을 당시 조봉암. 출처/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죽산 조봉암 선생의 생전 법정에서의 모습.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사법 살인'을 당한 죽산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1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경인일보DB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41년 12월 23일자 신문에는 조봉암이 국방성금 150원을 냈다는 기사가 실렸다. 친일 흔적으로 보기엔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게 연구자들 시각이다. 출처/국립중앙도서관조봉암 가족이 1942년부터 해방 이후인 1948년까지 살았던 인천 중구 도원동 부영주택. 현재 대부분 헐리고 일부만 남았다. /경인일보DB

2019-08-07 박경호

[현장에서]인천바로알기종주 동행

지난달 28일부터 지난 3일까지 6박 7일 일정으로 중·고교 학생 34명이 서해5도 백령도·대청도를 걷는 인천바로알기종주대회에 동행했다.19회째를 맞은 올해 인천바로알기종주는 내륙을 걷던 지난 코스와 달리 모든 일정을 서해5도에서 소화했다. 백령도에서 2박 3일 머물고, 대청도에서 3박 4일을 보냈다. 인천의 청소년들이 북한을 코앞에 둔 서해 최북단 섬을 찾아 남북 분단의 현실을 체감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겼다.울산에서 태어나 20년을 산 기자에게도 서해5도는 TV 화면으로만 접했던 낯설고 먼 곳이었다. 한반도 남동쪽 끝자락인 동해안 울산에서 서해 최북단 백령도까지 직선거리는 493㎞에 달한다. 울산에서 인천까지 승용차로 4시간 30분이 걸리는데, 인천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백령도까지가 딱 그 시간이 걸렸다. 인천에서조차 울산에서 인천만큼이나 멀고 먼 곳이 백령도라는 것을 섬에 발을 딛고서야 새삼 깨달았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종주단원 대다수도 백령도와 대청도는 처음이라고 했다. 첫날 백령도 사곶해수욕장과 콩돌해안을 둘러본 학생들은 평소 봤던 인천 앞바다와 크게 다른 게 없다는 푸념 속에 하루 일정을 마무리했다. 기대가 컸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졌다. 손꼽아 기대했던 점박이물범을 보고, 대청도 농여해변에선 직접 물고기를 잡으며 내리쬐는 햇볕에 팔과 다리가 익어가는 것도 모른 채 시간을 보냈다. 학생들은 해안가를 걷는 내내 어렴풋이 무언가가 보일 때마다 "저기가 북한 맞나요?"라고 되물었다.마지막 날 밤에는 대청도 대청고등학교 숙영지 뒷산에 별을 보러 나섰다. 학생들은 "제주도, 강원도 속초 등 여러 곳에서 봤던 별 중에 쏟아지는 듯한 대청도 하늘의 별이 가장 밝았다"며 "접경지역에 있는 섬들은 군사요충지로 위험할 거라는 생각뿐이었는데, 사실 내가 사는 곳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았다"고 했다.종주단원들은 백령도와 대청도 100여㎞ 구간을 완주했다. 백령도에서는 사곶해변, 콩돌해안, 남포리와 두무진을 걸었다. 대청도에서는 동백나무 자생북한지, 서풍받이 등을 거쳤다. 저마다 새긴 의미가 남달랐다고 한다. 학생들은 다시 백령도와 대청도를 찾을 때 남북이 가로막혀 멀기만 한 외진 섬이 아닌 남북을 연결해 가까이 두고 갈 수 있는 섬이 되길 바랐다. /박현주 인천본사 사회부 기자 phj@kyeongin.com박현주 인천본사 사회부 기자

2019-08-05 박현주

[인천바로알기종주 19번째 발걸음]낙오자 한명없이 100㎞ 섬여정 완주… 대원들 값진 성장

잠자리·빨래 등 모든일은 스스로지친 친구들 서로 응원 우정 돈독"내고장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자부심 한껏 느끼며 대장정 매듭제19회 인천바로알기종주대회가 지난 3일 오후 10시께 최종 목적지인 연안여객터미널 도착으로 6박7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사곶해수욕장과 콩돌해안은 물론, 남포리, 두무진 등 백령도 곳곳과 동백나무자생북한지, 모래울해변 등이 있는 대청도를 걸으며 100여㎞를 완주한 종주단원들에게 이번 종주는 저마다 새겼던 의미가 남다른 여정이었다. 이치훈(상정중3·15)군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종주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이야기를 나눠 좋았다"며 "또 새벽에 일어나 직접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빨래도 내 손으로 했는데, 앞으로는 집안일을 도맡아 했던 부모님을 많이 도와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이번 종주가 3번째인 심우혁(인천기계공고1·16)군은 "섬 종주는 처음이었는데 인천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는지 몰랐다"며 "모르는 친구들 밖에 없어서 낯설었지만 단원들이 지칠 때마다 서로 응원해주며 돈독해졌다"고 했다.종주 마지막날은 기상 상황이 좋지 못해 예정됐던 소청도 일정이 취소됐다. 하지만 삼각산 일대 등 미처 둘러보지 못한 대청도 구석구석을 살필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온 학생들은 체육관에서 공놀이를 즐긴 뒤 다시 만날 날을 정하며 아쉬운 시간을 보냈다. 김지호(부평고1·16)군은 "제주도와 강원도, 속초 등 여러 곳에서 봤던 별들 중에 쏟아지는 듯한 대청도 별이 가장 밝았다"며 "대청도의 별 풍경은 이번 종주 중 가장 기억에 남을 추억"이라고 했다.앞선 6일차엔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농여해변에서 나이테 바위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됐다. 겹겹이 쌓인 지층이 나무를 잘랐을 때 보이는 테와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단원들은 이곳에서 물놀이를 즐긴 뒤 직접 그물을 쳐 물고기를 잡았다. 저녁식사 후엔 조별 장기자랑이 진행됐다. 종주단원들은 종주 틈틈이 갈고 닦았던 실력을 뽐냈다. 귀여운 춤으로 1위를 차지한 3조의 단원 이원진(벤자민인성영재학교·17)군은 "처음에는 율동이 어려워 조원들이 힘들어하고 불만도 있었지만 서로 격려해주며 잘 마무리했다"며 "상금으로 친구들에게 맛있는 밥을 사겠다"고 소감을 말했다.1주일간 종주단원들을 이끈 이동열 인천바로알기종주단장은 "단원들이 인천에 있는 아름다운 섬들을 직접 걸으면서 우리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공동체 생활 속에서 함께 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며 "모두 건강하게 종주를 마쳐서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했다. 한편 인천바로알기종주단은 오는 31일 해단식을 갖고 올해 종주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박현주기자 phj@kyeongin.com종주 단원들이 지난 2일 대청도 농여해변 나이테바위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단원들은 3일 오후 종주를 마쳤다./박현주기자 phj@kyeongin.com

2019-08-04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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