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zoom in 송도]인천관광공사 연구용역 '물 축제' 개발 제안

센트럴파크內 인공 수로 '행사 최적지'축제 기간 국제보트전 등 산업·교역전관광객 유치 명소화·새 산업창출 효과경제청 "전문가·여론 수렴 예산 확보"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인천을 상징하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제를 만들고자 연구용역을 했다. '세계 대표 축제 발굴 및 개발' 사업이다. 인천관광공사가 지난해 2월부터 12월까지 11개월간 연구용역을 진행했다. 용역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지난해 4월이다. 인천관광공사는 국내외 유명 축제의 특징을 분석하고 전문가 의견을 수렴했다. 잠재 방문객 조사(2회), 중간 보고회(2회), 국내 전문가 자문회의(3회), 해외 전문가 초청 간담회(2회) 등을 거쳐 결과물을 완성했다.인천경제청이 '세계 대표 축제' 발굴·개발에 나선 것은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관광객 유치로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것이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의 도시 인프라는 어느 정도 구축됐기 때문에 '국제도시'라는 명칭에 걸맞은 소프트웨어 개발이 필요하다는 게 인천경제청의 판단이다. 세계 대표 축제를 만들어 도시 이미지를 탈바꿈시키고 도시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는 것이다.인천에서는 매년 부평풍물대축제, 인천소래포구축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등 다양한 축제가 열리고 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의 경우, 송도에 집중되던 문화 행사가 청라와 영종으로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축제로 내세울 만한 행사는 없다. 영국 에든버러, 브라질 리우 카니발, 독일 옥토버페스트, 일본 삿포로 눈 축제, 스페인 토마토 축제 등은 세계인들이 손꼽는 세계 최대 문화 행사들이다. 축제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천문학적이다.인천관광공사가 이번 연구용역에서 제시한 인천의 세계 대표 축제는 '송도 워터 카니발(Songdo Water Carnival)'이다. 인천관광공사는 인천이 '해양도시'라는 점에 주목했다. 인천은 바다와 섬, 갯벌, 항구를 가지고 있다. 송도 센트럴공원과 6공구에는 수로·호수가 있으며, 송도의 기존 수로·호수를 연결해 'ㅁ'자형 물길을 내는 워터프런트 조성사업도 진행 중이다. 인천연구원의 '인천도시가치 발굴 시민 설문'(2016년) 자료를 보면, 응답자의 약 63%는 항구·공항·바다·섬·갯벌을 인천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꼽았다.'송도 워터 카니발' 장소는 센트럴파크 인공수로 일대다. 센트럴파크는 인천시민 등 송도 방문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며, 인공수로 주변으로 G타워·트라이볼·송도컨벤시아·아트센터 등 주요 인프라가 집중돼 있다. 미국 샌안토니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이탈리아 베니스 등은 강이나 운하를 활용해 보트 퍼레이드 등 물(Water)의 축제를 열고 있다. 국내에서는 보트를 활용한 축제 프로그램이 아직 없다. 특히 송도는 인공수로 주변에 고층 빌딩이 밀집해 있어 행사 장소로서 차별성이 있다. 인천관광공사는 G타워, 트라이볼, 인천도시역사관 외벽에 특수 효과를 연출해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축제 기간 송도컨벤시아에서 '국제 보트 박람회' 등 해양 관련 산업·교역전을 개최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인천관광공사는 송도 워터 카니발을 ▲열린 항구(해외 문화 체험 공간) ▲테마 보트 (해상)퍼레이드 ▲선상 파티 ▲인천시민 (육상)퍼레이드 ▲수상 불빛 쇼 ▲산업·교역전 등으로 구성했다.'열린 항구' 프로그램은 인천 등 해외 유명 항구 도시를 테마로 다양한 문화가 섞이는 퓨전형 콘텐츠다. 인천관광공사는 중국 톈진, 일본 요코하마 등 인천과 연관이 있는 국가의 항구 11개를 선정해 각국의 문화를 체험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테마 보트 퍼레이드'는 각 보트 상단부에 국가별 랜드마크 장식물을 설치하고, 하단부에서는 공연을 벌이는 방식이다. '인천시민 퍼레이드'는 시민들이 직접 만든 테마 차량이 센트럴파크 주변 도로를 천천히 운행하면서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수상 불빛 쇼'는 레이저 쇼, 워터 쇼, 크레인(Crane) 쇼, 아트 쇼 등으로 세분된다.인천관광공사는 용역 보고서에서 "(축제를 통해) 송도 센트럴파크와 주변 인프라 자원을 국내외에 홍보할 수 있다"며 "방문객 유치로 지역 명소화 및 긍정적 시너지 유발이 기대된다"고 했다. 또 "연관 산업 발굴·유치로 새로운 산업군을 창출하는 효과가 있다"고 전망했다. '송도 워터 카니발' 개최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이는 인천관광공사가 연구용역에서 제안한 것으로,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인천경제청은 '송도 워터 카니발'에 대한 전문가와 시민 의견을 수렴해 나갈 계획이다. 또한, 축제 개최를 위해선 전담 조직(추진·조직위원회) 구성과 예산 확보 및 마케팅 활동이 필요하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의견 수렴을 이어 나가면서 내년도 예산에서 사업비를 확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천관광공사는 단기(1~3년), 중기(4~6년), 장기(7년~) 등 단계별로 축제 규모를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축제 예산은 단기 55억원 등 55억~100억원(협찬 등 수입 포함)으로 추산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관광공사가 '송도 워터 카니발' 장소로 제안한 송도 센트럴파크 전경.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송도 워터 카니발' 행사장 구성 이미지. /'세계 대표 축제 발굴 및 개발' 용역보고서에서 발췌/아이클릭아트

2019-06-09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15)]덕적도와 임용우

김포서 태어나 신학문 공부 교직생활하다 1912년 27살에 인천 도서지역 명덕학교 부임가정학습·마을 궂은일 '앞장' 어린 나이에 존경받아… 천도교 통해 서울 3·1운동 참여돌아와 제자들과 '만세운동' 준비 4월 9일 학교 운동회로 사람들 불러모아 "독립" 외쳐日경찰 혹독한 고문 35살에 사망 광복후 주민들 추모비 세워… '섬'탓 활동 아는이 적어1919년 3월, 인천 지역 또한 한반도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 함성으로 가득했다. 인천 중구, 동구와 계양구 황어장터, 강화도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대규모 만세 시위가 일어나며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민중들의 목소리가 커졌다.지금까지 인천시나 각 지자체 주도로 진행된 3·1운동 기념행사는 인천 동구 창영초등학교나 계양구 황어장터에서 열리고는 했다. 그런데 올해 처음으로 옹진군은 3·1운동 기념식을 덕적도에서 열었다. 1919년 덕적도에서 울렸던 만세 함성이 100년을 지나서야 빛을 보게 된 것이다.덕적도에 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린 사람은 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 선생(1884~1919)이다. 그가 덕적도에 머물던 시간은 8년에 불과했지만, 그의 제자들은 덕적도와 강화도 등 인천 지역 섬을 돌며 독립이 왜 필요한지를 주민들에게 전파했다.하지만 그의 독립운동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섬이라는 제한된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소규모로 이뤄진 데다, 접근이 쉬운 인천 시내 독립운동과 비교해 관련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그의 행적에 대해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국가보훈처 공훈록에 따르면 임용우 선생은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하던 그는 김포 통진에 있는 창신학교에서 4년여 동안 신학문을 공부했다고 한다. 졸업 후 모교에서 3년여 동안 교직 생활을 했던 임용우 선생은 1912년 27살 나이로 덕적도 명덕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1910년대 당시 덕적도 주민들의 경제 상황은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서해 민어 파시의 중심지이기는 했으나, 어업권을 일본에 계속 빼앗기고 있었다. 어업을 주업으로 삼았던 덕적도 주민들에게는 큰 피해였다.일제는 우리나라에 식민어촌을 건설하고 일본의 어부들이 이주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를 위해 일제는 1907년 '한국수산지'를 발간해 일본 어민을 돕는 지침서로 사용했다. 1908년에는 어업법, 1911년에는 조선어업령을 시행하면서 모든 어민이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면허를 받도록 했다. 일제는 당시 어업면허의 종류를 세분화 했다.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신식 어업은 일본 어민에게만 허가하는 등 우리 어민을 차별했다. '한국수산지'에 따르면 당시 덕적도 주변 해역에서 주로 잡히던 어종은 민어였다. 민어 조업에도 일본은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1923년 9월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 그해 덕적도 인근에서 출어한 어선 528척 중 일본 어선은 90척에 달했다고 한다.경제적으로 어려운 덕적도 주민들이었지만, 교육에 대한 열정은 매우 컸다. 향토사학자 김광현이 1985년에 출판한 '덕적도사'에서는 1910년대 초기 덕적도에는 명덕학교, 명신학교, 합일학교 등 3개의 사립학교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광현은 "(덕적도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부녀자까지라도 한글 정도는 해독할 수 있게 됐고, 시대의 변천과 교육의 흐름에 따라 신학문에 유의한 인사들이 규합해 학교를 잇따라 설립했다"고 적었다.명덕학교에 부임한 임용우 선생은 밤이면 각 가정에 방문해 학생들의 가정학습을 지도했고, 학교에서는 학생들과 짚신을 만들어 팔아 학교 경영에 보탬을 줬다고 한다. 마을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도왔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덕적도가 고향인 송은호(86) 옹은 지난 5월 31일 경인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나는 나이가 어려 임용우 선생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삼촌이나 아버지가 평소에도 임용우 선생의 말을 인용해 나를 가르쳤다"며 "돌아가신 지 한참 지났을 시점이었으나, 마을 사람에게는 스승으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그가 명덕학교 교사로 일한 지 7년이 흐른 1919년 2월 임용우 선생은 천도교 측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서울에서 대규모 만세 운동을 진행할 예정이니 서울로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서울로 가서 3·1운동에 참여한 그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고향인 김포에 내려왔다.이곳에서 3·1운동을 계속했다. 그는 3월 29일 수백명의 주민들과 함께 김포 월곶면 사무소와 공립보통학교를 돌면서 만세를 불렀다. 당시 독립운동 재판기록을 살펴보면 임용우 선생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한 조남윤, 최우석, 정인교, 윤종근, 민창식 등은 현장에서 붙잡혔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덕적도로 숨어드는 데 성공했다.임용우 선생은 섬에 들어오자마자 명덕학교 제자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을 가져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내륙 지방의 '장날'과 같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날을 잡기 어려워 날짜를 정하지 못했다. 임용우 선생은 학교 운동회를 개최해 주민들을 불러 모으자고 제안했고, 4월 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9일 덕적도 주민들은 진리 해변에 모였다. 주민들은 우선 일제의 눈을 피하려고 줄다리기와 달리기, 씨름 등 체육 행사를 진행했다. 체육 행사가 마무리된 뒤, 임용우 선생은 독립 선언을 외쳤고 그를 따라 많은 주민도 독립 만세를 불렀다. 덕적도 출신으로 해방 후 감리교 통합운동을 주도했던 김광우 목사는 그의 자서전 '나의 목회 반세기'에서 "해변에서 운동회를 하던 중 동네 사람과 학생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일본사람들은 꼼짝 못하고 있었다. 우리의 태도에 겁을 먹은 것이다"고 당시를 회상했다.조선총독부가 3·1운동 동향을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는 이날 독립운동에 대해 '학생 50여명, 학부형 30여명이 모여 종이로 태극기 10장을 만들어 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적었다. 하지만 당시 덕적도 명덕학교와 합일학교, 명신학교의 학생과 주민의 수를 고려하면 100~300여명이 만세 운동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진리 해변에서 만세운동이 끝난 뒤에도 주민들은 국사봉 등 마을 뒷산과 주요 거리에서 봉화를 피우고 만세를 불렀다. 이날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이인응은 자신이 운영하는 덕적도에 딸린 작은 섬 울도 사숙(私塾)에 돌아가 학생 2명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조선총독부가 작성한 문서를 살펴보면 임용우 선생은 만세 운동을 벌인 뒤, 4~5일 이내에 붙잡힌 것으로 추정된다. 임용우 선생의 제자였던 이정옥은 생전에 "덕적도 헌병 주재소에서 일본 경찰과 조선인 헌병보조원은 선생님(임용우)이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했다"고 진술했다. 임용우 선생은 인천경찰서로 옮겨진 뒤에도 가혹한 구타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전해진다.1919년 5월 9일 임용우 선생은 그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던 제자들과 1심 판결을 받았다. 주동자였던 그는 1년 6개월의 형을 받았고, 나머지 제자들에게는 6개월~1년 형이 선고됐다. 제자들은 곧바로 항고했으나, 임용우 선생은 이마저도 할 수 없었다. 심문 도중 들것에 실려 나갈 정도로 건강이 나빠진 그는 선고 이튿날 3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서대문형무소에서 눈을 감았다."순종황제 붕어하시고 3·1 운동이 궐기할 시에 본명 사립 명덕학교 선생 임용우씨가 주최로 합일학교 교사 이재관씨 차경창과 비밀 연락해 기미년 3월 10일(음력으로 추정)에 대 운동회를 개최하고 면민 전반이 대회합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며칠 후에 주최자 3인은 일본 경찰관에게 납치돼 임 선생은 가혹한 고문에 절명케 돼 출옥 치사하니 아-슬프다. (중략) 한국은 해방이 돼 왜적은 그림자를 감추게 되니 애국의인이며, 애국열사의 선혈은 헛됨이 아니었다. 1948년 해방 직후 3월 1일에 임 선생의 영세불망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3·1절에 추도식을 행하니 몸은 지하에 돌아갔으나 영은 천추에 살아있는 것이다."우리나라가 독립한 이후 3년이 되던 1948년 덕적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덕적중고등학교 앞에 세운 비석에 임용우 선생을 추모하는 글이 남아 있다. 송은호 옹은 "비석이 세워질 때, 마을 어르신들이 '참 훌륭하신 분이 먼저 가셨다. 이제라도 위로를 할 수 있게 돼 다행이다'고 말씀하시며 눈물을 훔치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임용우 선생은 덕적도 사람들에게 영원한 스승으로 남아 있다. 그는 육지와 떨어진 작은 섬에서 독립운동에 불씨를 당겼다. 덕적도 주민들은 조국이 해방된 직후부터 그를 추모해 왔지만, 대부분 인천 시민들은 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3·1운동 100년을 맞는 올해부터라도 외딴 섬에서 임용우 선생이 펼친 독립운동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옹진군 제공,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1948년 3월1일 덕적도 주민들이 세운 임용우 선생 추모 기념비. /옹진군 제공지난 3월 1일 인천 옹진군 덕적도에서 3·1운동이 펼쳐진 지 100년만에 기념식이 열렸다. 장정민 옹진군수가 이날 기념식에서 '기미년독립선언 기념비' 앞에서 헌화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1997년에 세워졌다. /옹진군 제공덕적도 국수봉 전경. /옹진군 제공임용우 선생 판결문. /옹진군 제공

2019-06-05 김주엽

[인천의 얼굴·(13)]삼창주철공업 이상만 공무부장

車·기차 부품등 제작 35년 넘은 '최고참''경쟁력'불구 열악한 환경탓 기피 아쉬워뿌리산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무의 뿌리처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면서 제조업의 근간을 이루는 분야를 말합니다. 쇳물을 다루는 주물(鑄物)이 여기에 속합니다. 위험하고, 힘이 드는 일입니다. 이상만(64)씨는 35년 넘게 주물회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금방 떠납니다. 힘이 드는 것도 그렇지만 주물의 특성상 작업 환경이 열악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인천 서구 경서동의 삼창주철공업. 1987년에 주물공장들이 이곳에 몰려들었습니다. 주물공단이라고 합니다. 서울 구로에 있던 회사도 이때 옮겨 왔습니다. 1984년에 입사한 이상만씨는 이 회사 최고참입니다.인천은 뿌리산업의 집합처이기도 합니다. 주물 같은 뿌리산업이 꼭 필요한 존재인데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 따집니다. 자꾸 밀어내려고 합니다. 공장이 집값을 떨어뜨린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자리이기도 한데 사람들은 왜 몰아내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인천은 현재도 역시나 노동자의 도시입니다. 이상만씨가 그것을 증언합니다. 강원도에서 태어났는데 울산 현대중공업에서도 일했고, 영광의 원자력발전소에서도 일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안 다닌 곳이 없습니다. 서울 구로의 삼창주철과 연이 닿았습니다. 회사가 인천으로 이사하면서 이 땅에 뿌리를 내린 것이지요.젊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업종이지만 주물 같은 뿌리산업의 경쟁력은 아직은 괜찮습니다. 우리가 11개를 만들어 1개의 불량을 내고 10개를 납품한다면, 중국은 100개를 만들어야 10개를 납품하는 정도입니다. 불량률이 엄청나지요. 아직 기술력 차이가 큽니다. 하지만 배우려는 젊은이가 없는데 미래가 있겠습니까. 회사에 90명 정도 일하는데 외국인 노동자가 10여 명이나 됩니다. 앞으로는 이들 외국인들이 우리의 뿌리를 이룬다는 얘깁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있을 수 있습니까. 기본을 외면하는 사회, 걱정입니다. 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6-04 정운

[zoom in 송도]인천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

인천대 송도캠서 5공구까지 녹지·수변지대로 연결풍차전망대·골프연습장·캠핑장 등 편의시설 다양카페·전시장 갖춘 '케이슨 24'… 지역 명소 '입소문'출렁이는 바다와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는 공원이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있다. 송도 남측 해안을 따라 조성한 솔찬공원(24호 근린공원)이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송도 4공구 인천대 송도캠퍼스에서 송도 5공구 바이오단지(첨단산업클러스터)까지 녹지·수변 공간이 길게 연결됐다. 전체 넓이는 130만9천408㎡(수로부 포함)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A지구, B지구, C지구, D지구, 복합문화시설지구, 골프연습장지구 등 단계별로 조성사업을 추진했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솔찬공원은 송도에서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공원"이라며 "케이슨24, 야생동물구조관리센터, 캠핑장, 골프연습장 등 다양한 시설이 있다"고 설명했다.내비게이션에 '솔찬공원' 또는 '케이슨24'를 찍으면 솔찬공원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주차장이 있는데, 넓지 않다. 도로변에 주차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차량 통행이 적은 도로인 점을 고려해 봐주는 것 같다. 이중 주차 등 차량 통행을 방해하는 경우에는 불법 주차 단속에 걸릴 수 있다.솔찬공원에 가면 풍차 모양의 건물이 있다. 정식 명칭은 '풍차 전망대'다. 하지만 건물이 높지 않은 데다, 전망대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바다가 잘 보이기 때문에 공원 관리사무소 기능을 하고 있다.풍차 전망대 앞에 직사각형 모양의 넓은 공간이 있다. 인천대교(송도~영종 연결도로) 건설에 필요한 케이슨(토목건축 기초 공사에 쓰는 철근 콘크리트 상자)을 만들던 곳이다. 길이 400m, 너비 33.7m 규모로 공유수면 위에 조성됐다. 바다 위에 커다란 '철재 데크'가 설치된 형태다.케이슨 제작장은 인천대교 건설 당시 교각 구조물 제작 및 자재 반입을 위해 조성한 접안시설이다. 이곳에선 송도 신항 컨테이너 터미널과 LNG 기지, 팔미도와 무의도, 인천대교 주탑이 보인다. 이곳은 인천대교 준공과 동시에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인천경제청이 벤치와 그늘막 등 편의시설을 설치해 2015년 시민에게 개방했다.복합문화공간 '케이슨24'는 솔찬공원의 명소다. 송도 개발사업에 참여한 업체들이 개발이익 환원 차원에서 복합문화시설을 지어 인천경제청에 기부채납했다.인천경제청은 공모를 통해 복합문화시설 운영자를 선정했고, 이 업체가 내부 시설을 꾸며 운영 중이다.케이슨24는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됐다. 1층에는 커피 등 다양한 음료와 디저트를 맛볼 수 있는 '카페 드라페', 공연과 전시회 등의 행사를 열 수 있는 실내문화공간 '컬쳐 뮤지엄'이 있다. 외부에는 야외 공연과 스몰웨딩이 가능한 '사운드 가든', 버스킹 무대, 편의점과 휴게소처럼 여러 물품을 판매하는 '스위트 몬스터'가 있다.컬쳐 뮤지엄은 문재인 대통령이 공연과 토크 콘서트를 관람했던 곳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4월2일 인천 송도 경원재(한옥호텔)에서 열린 확대 국가관광전략회의에 참석한 후 케이슨24를 방문했었다.1층 공간은 개방된 느낌이다. 카페 벽면에는 미술 작품이 걸려 있으며, 컬쳐 뮤지엄에서는 주말 오후 재즈·국악·팝·블루스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열린다.2층은 2개 공간으로 돼 있다. 레스토랑 '키사스'와 '파티룸'이다. 키사스에서는 파스타, 스테이크, 샐러드, 다양한 나라의 특별한 맥주를 만날 수 있다. 파티룸은 34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동호회 및 기업체 모임에 좋을 듯하다. 파티룸과 공연장 등 각 공간은 대관이 가능하다. 케이슨24 박정언 마케팅 실장은 "컬쳐 뮤지엄에서 연극 공연을 여는 방안도 계획하고 있다"며 "포토 스튜디오로 사용했던 지하 1층도 전시 공간으로 쓰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지난해 '인천시 건축상'을 받은 케이슨24는 내부에서 석양을 잘 볼 수 있도록 설계됐으며, 건물 옥상에도 전망대와 소규모 야외공연장이 있다.솔찬공원 송도 5공구 구간에는 송도국제캠핑장이 있다. 인천경제청이 2014년 39억원을 들여 조성한 시설이다. 민간사업자에게 운영을 맡겼는데, 사용료를 제때 내지 못해 위탁 계약이 해지됐다. 캠핑장은 운영되지 않지만, 공원 시설은 이용할 수 있다. 일정 구역에 그늘막(4인용 이하)을 설치할 수 있다. 취사, 음주, 음식 주문, 야간 숙박은 금지하고 있다.인천경제청은 송도국제캠핑장 새 운영자를 찾고 있다. 입찰이 한 차례 유찰됐는데, 인천경제청은 재입찰에 나설 계획이다. 캠핑장 면적은 3만8천㎡다. 근린시설 및 사무실(연면적 632㎡), 데크 56개, 카라반 6개, 취사장 2개, 바비큐장, 화장실, 바닥분수, 어린이놀이터 등이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송도 '솔찬공원' 전경과 복합문화시설 '케이슨24' 모습.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직사각형 모양의 데크가 인천대교 건설 당시 케이슨을 만들던 곳이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6-02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14)]강화 출신 '유두희'

노동투쟁 등 활약에 비해 기록없어인천 강화 출신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유두희(劉斗熙·1901~1945)는 고향에서조차 지워진 인물이다. 1920~40년대 인천에서 청소년단체와 노동단체 결성을 주도했고, 일제의 공산당 탄압으로 체포돼 옥살이를 했다. 그리던 조국의 해방을 맞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다.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 정권과 군사 정권의 '레드콤플렉스' 속에서 오랜 기간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같은 한국인 자본가와 지주도 투쟁의 대상으로 보는 급진적 사상 때문에 민족주의 기반의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늘 외면을 당해왔다.일제강점기 중후반 인천의 사회단체와 노동운동 때마다 빠지지 않고 유두희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그의 연보조차 제대로 확인할 길이 없다.강화 출신으로 인천을 근거지로 활동했다는 기록을 과거 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 신사상(사회주의)을 흡수하고 단체를 조직할 수 있었는지 정확히 연구한 자료가 없다. 내리교회 존스 목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학적부를 통해 확인한 사실은 아니다. 대중강연에 나설 만큼의 지식인이었음은 분명하나 강의와 연설 내용이 전해지지 않는 부분도 못내 아쉽다. 어찌 이렇게 독립운동가 한 명의 흔적이 철저히 묻힐 수가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다.2008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위원회는 유두희의 항일 활동을 '진실'로 규명했다. 인천소년회 창립, 신간회 인천지회 조직, 4차 공산당 사건이 모두 항일 운동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직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인천 지역 사회의 관심과 학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5-29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14)]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유두희

1901년 강화 출생… 1920년대 日 문화식민지배 시기소년회등 이끌며 계몽활동·항일정신 전파인천노동총연맹·조선공산당 간부 역임도1920~40년대 인천에서 청소년·노동단체를 이끌며 일제에 저항했던 독립운동가 유두희(劉斗熙·1901~1945). 공산당 경력과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그의 활동 이력 탓에 그의 항일정신은 아직도 후세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2008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유두희의 항일독립 활동을 진실로 규명했다. 그러나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진실화해위원회의 규명 결정문을 뛰어넘는 추가 연구와 재평가는 미진하다. 기대했던 독립유공자 서훈도 이뤄지지 않았다. 1901년 12월 24일 강화에서 태어난 유두희는 1920년대 초반 인천 지역에서 소년·청년 운동을 주도했고, 1927년에는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을 이끌었다. 제4차 공산당사건에 휘말려 옥고를 치르고 해방 100일을 맞기도 전인 1945년 11월 11일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독한 가난과 병마와 싸우며 생애 마지막을 보냈다고 한다.민족·사회주의 항일단체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 주도제국주의 맞선 계급투쟁 4차 공산당사건으로 고초 해방 맞은 해 고문 후유증 지독한 가난속 숨져1919년 3·1 운동 이후 일본은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식민지배 노선을 변경했고, 1920년대부터 사회단체가 활발하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언론사와 문화·체육·노동단체가 생겼고, 민족주의로 무장했던 항일운동에 사회주의가 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중국과 러시아 망명지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흡수한 독립운동가들과 일본의 유학생들이 한반도에 이를 전파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계급투쟁은 일제의 수탈에 대응할 방편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 흐름은 인천도 예외는 아니었다.진실화해위원회 결정문에 따르면 1920년대 인천에는 55개의 청년단체와 25개의 소년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계몽적, 교육적 성격을 보이고 있었다.유두희가 주축이 돼 1924년 7월 5일 인천 영화학교 강당에서 창립한 인천소년회도 그 80개의 청소년 단체 중 하나였다. 소년회는 겉으로는 가극과 동화구연 행사 모습을 띠었지만, 어린 학생과 청년들에게 항일정신을 전파하는 데 주력했다.인천소년회는 1925년 11월 8일 제물포청년회와 공동으로 전인천소년축구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운동경기를 통해 민족의식을 높이기 위해서였다.유두희는 인천소년회 외에도 인천청년연맹 간부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 대중 강연에 자주 나섰다. 1926년 1월 15일 독일의 사회주의 사상가 로자 룩셈부르그 사망 7주기를 맞아 기념 강연회를 열 계획이었으나 경찰의 개입으로 무산됐다.그는 노동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 인천노동총연맹과 인천청년노동조합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노동자의 이익 보호를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4월에 설립된 인천노동총연맹은 노동자 쟁의를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친일 폭력조직 '상애회'와 투쟁을 선포했고, 유두희는 이승엽과 함께 재일본노동자총연맹과 연대하기 위한 일본 특파원으로 선발됐다.그의 크고 작은 활약은 당시 신문 기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1926년 6월 23일 동아일보는 인천의 한 정미소에서 직원 100여명이 일본인 감독관의 구타를 견디지 못해 파업에 돌입한 사건에서 유두희가 불량 감독관의 퇴직을 두고 벌인 정미소 측과의 교섭에 대표로 나섰다고 보도했다.유두희는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의 주역이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결합해 만든 항일운동단체다. 유두희는 조선공산당 간부로서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에 깊숙이 가담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민족독립운동사는 신간회 인천지회가 시국강연과 계몽활동을 활발하게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유두희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지역 간부로서 활동하다 1928년 7월 27일 일제의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경찰에 붙잡혔다. 1925년 4월 18일 조직된 조선공산당은 일제에 의해 와해 됐다가 2차, 3차, 4차에 걸친 재건을 시도했지만 결국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의해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 일제는 공산주의 계급투쟁이 결국 자본을 바탕으로 둔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협이라고 인식해 이들을 탄압했다. 구속을 하고도 재판을 질질 끌어 일부러 구금기간을 늘렸고, 유두희는 4차 공산당사건으로 치안유지법위반죄를 적용받아 징역 4년형이 선고됐으나 실제 감옥에 갇혀있던 기간은 5년이 넘었다.당시 연해주 한인 공산당 기관지 '선봉'은 유두희 등 4차 공산당사건의 국내 재판 소식을 전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을 잡아다가 공판 없이 2~3년을 가둬두고 육형의 고문으로 거의 생명을 빼앗고는 소위 치안유지법이란 악법의 죄를 씌워 공판에 끌어내오는 일본 제국주의자의 발악을 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유두희의 판결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국기기록원의 서고 어디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 그와 함께 재판을 받았던 동지들의 판결문으로 유두희의 행적을 짐작할 뿐이다. 당시 4차 공산당사건으로 같이 재판을 받은 이광, 조기승, 박경호 등의 판결문을 보면 일제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배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기도함으로서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프롤레탈리아나 독재 사회를 세우고, 이를 통해 공산 사회의 실현을 원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를 혈망하거나 조선을 일본제국의 기반에서 이탈시키고자 하였다"고 이들의 혐의를 적시했다.유두희는 1933년 8월 20일 출옥했지만, 그가 사망한 1945년까지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1934년 인천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며 독서모임(적색독서회)을 결성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는 신문 기사 한 줄로 그가 인천에서 꾸준히 단체 결성에 나섰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인천의 향토사가 신태범 박사(1912~2001)는 저서 '인천 한 세기'에서 "노동공제회 인천지부가 인천노동총동맹으로 개편되어 용동에 간판을 걸고 유두희가 해방 때까지 유지해왔으나 눈에 띌 만한 활동은 없었다"고 했다.유두희는 해방되던 해 11월 11일 생활고를 겪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하고 만다. 대중일보는 '오호 동무여 왜 먼저 갔느냐'라는 제목의 기사로 그의 부고를 타전하면서 "옥중생활에 득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출감 후 계속 활동 중 소위 대동아전쟁 이래 기막히는 탄압아래 기아와 고질로 극도의 생활난과 악전고투하다가 1945년 11월 11일 사망. 인천부 화방정 자택에서 동지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고 했다.2008년 진실화해위서 '독립활동 진실 규명' 불구 사회주의 노선탓 재평가 미진… 유공자 서훈 못받아사망 이듬해인 1946년 5월 1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인천지부 등 60개 단체가 참여한 메이데이기념식에서 그는 항일 활동을 인정받아 표창을 받았지만,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서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는 받지 못했다. 신간회 인천지회 등에서 함께 활동했던 권평근은 2005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음에도 유두희는 깜깜 무소식이다. 수면 아래 잠자던 유두희의 항일운동 행적을 진실이라는 뭍으로 끌어올린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유두희의 자녀들과 면담해 행적을 복원하려 했으나 큰 수확을 거두지는 못했다. 당시 80세가 넘은 장남 대관 씨는 아버지 유두희가 숨질 무렵 고등학생 나이였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청소년기의 고통스러웠던 기억과 소위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 때문이었는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10여 년 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유두희의 항일운동 진실을 규명했던 윤명숙 위안부문제연구센터 조사팀장은 "유두희의 아들은 1940년대 일제 군수공장에 강제 징용됐던 분이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며 "진실 결정문을 유가족에게 전달해 주고 서훈 신청 여부를 확인해 봤지만 아직 신청이 들어오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했다"고 말했다.진실화해위원회의 규명 작업은 2006년 당시 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 교사이자 향토사 연구자인 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의 신청으로 이뤄졌다. 유두희의 말년 행적이 '눈에 띌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고 한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를 읽고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는 "좌익 활동가였던 유두희 선생이 평가절하 당하고 있었다고 생각해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신청했었다"며 "진실로 결정이 나긴 했지만 학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유두희와 유두희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유두희의 부고 기사가 실린 1945년 11월 14일자 대중일보 지면. /미추홀도서관 원문DB4차 공산당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유두희의 소식을 전하면서 일제의 사회주의 탄압을 비판한 러시아 연해주 한인 신문 '선봉'의 1930년 7월 16일자 지면. /독립기념관 제공

2019-05-29 김민재

[인천의 얼굴·(12)]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 '반장' 강정순 할머니

방직공장 다니며 징용 한국인과 결혼지금 생활 '행복' 보상금 일부 기부도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당신들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소설 몇 권이 나올 거라고들 하십니다. 그만큼 격동의 시대를 살았고 그 삶은 고달팠습니다. 아무리 잘 만든 드라마라도 어찌 이들의 아픈 인생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까요.1999년 3월 생겨난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이 연수구에 있습니다. 전국에 하나뿐인 시설입니다. 여기 사는 1932년생 강정순 할머니.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열한 살이 되던 1942년 일본 최북단 사할린으로 이주했습니다. 부모님과 오빠, 남동생 둘, 온 가족이 떠났습니다. 일제가 사할린 탄광에서 일하면 먹고 살 수 있다고 꾀어낸 것이었지요. 아버지와 오빠가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안전시설도 없어 무너지기 일쑤였지요. 참 많이도 죽어 나갔습니다. 사할린에 혼자된 부인들이 많았던 이유입니다. 6개월이나 지났을까요. 일제는 아버지와 오빠를 일본 남쪽 끝 규슈의 탄광으로 옮겼습니다. 생이별이었고, 그게 마지막이 되었습니다.태평양전쟁이 끝날 때 사할린은 옛 소련 땅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거기서 15년 넘게 방직공장에 다녔습니다. 그 덕분에 아직도 러시아 돈으로 연금을 받기는 합니다. 스물이 되었을 때 역시 사할린에 징용돼 온 한국인 남자와 결혼해서 애들도 낳았습니다. 그 아이들은 러시아 사람들하고 결혼해 카자흐스탄 등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착했던 남편은 사할린에서 세상을 떴습니다.20년이 된 사할린동포복지회관에는 82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평균 연령 85세. 1주일에 5명이 세상을 떠날 때도 있습니다. 359명이 거쳐 갔습니다. 강정순 할머니는 2006년 이곳에 왔습니다. 지금은 복지관 입소자들을 대표하는 반장을 맡고 있습니다. 1991년 '사할린 동포 고국 방문행사'가 있었을 때 49년 만에 고향 땅을 밟았습니다. 그때 아버지와 오빠 이야기를 들었지요. 해방이 되자, 아버지와 오빠는 규슈에서 사할린 가는 배를 타려고 했다네요. 그런데 사할린이 불바다가 되어 모두 죽었다는 얘기가 나돌았답니다. 그 둘은 부산으로 오게 되었고요. 고향 방문 행사 때 아버지 산소에도 가봤습니다. 여든여덟 할머니는 지금 여기 복지관 생활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 행복감이 더 어려운 이웃에게 눈을 돌리게 했나 봅니다. 4년 전 남편 앞으로 강제징용 보상금이 나왔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일부를 적십자사에 기부했거든요. 연수구 사할린동포복지회관은 일 년 내내 돌려보아도 질리지 않을, 세상 어디에도 없는 드라마 세트장입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 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5-27 박경호

22번째 '바다그리기' 3만6천여명 참여

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주관한 '제22회 바다그리기 대회'가 지난 25일 월미도 문화의 거리,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 인천항 갑문 등 3개 장소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명실상부한 전국 최대 규모의 미술 축제로 자리 잡은 이번 대회엔 3만6천여명의 학생과 학부모가 몰렸다. 이날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에서 진행된 바다그리기 대회 개회식에는 박남춘 인천시장을 비롯해 이용범 인천시의회 의장, 도성훈 인천시교육감, 이정미 정의당 대표,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고남석 연수구청장, 이태훈 가천대길병원 의료원장, 김광하 신명여고 교장 등이 참석했다. 박남춘 인천시장은 축사에서 "이번 바다그리기 대회가 가족과 함께 즐거운 추억을 쌓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도성훈 인천시교육감은 "바다그리기 대회는 우리가 바다와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굉장히 의미 있는 행사"라며 "상호존중 등 바다가 알려주는 우리 삶의 가치를 더욱 키울 수 있는 교육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박찬대 국회의원은 "아이들에게 이번 대회가 인천을 늘 생각하고 사랑하는 시민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한편 이번 대회 시상식은 7월 11일 오후 2시 인천교육청 대회의실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송도 솔찬공원 가득 메운 인파 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22회 바다그리기 대회'가 지난 25일 인천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 월미도 문화의거리, 인천항 갑문 등 인천지역 3곳에서 초·중·고 학생들과 학부모 등 3만6천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에서 참가자들이 도화지를 배부받고 있다. /취재반

2019-05-26 이현준

고래뱃속 오물·그물감긴 거북… 병든바다 SOS

송명초 장다연, 상어 목 폐타이어 등 현재와 미래 청정 물속 나눠원당초 최성훈, 물고기 수술실 풍경… 깨끗한 바다 염원 도화지에지난 25일 열린 제22회 바다그리기 대회에 참가한 아이들이 그린 그림에는 최근 해양 쓰레기와 관련된 작품이 유달리 많이 보였다. 병들어가는 바다를 어서 구해달라고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듯 했다. 인천송명초 3학년 장다연양은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현재 바다'의 모습과 자신이 꿈꾸는 깨끗한 '미래의 바다'를 도화지 위아래로 나눠 배치했다. 어두운 모습인 현재의 바닷속에서는 폐타이어가 상어의 목을 조르고 있었고, 거북이는 그물에 온몸이 휘감겨 살려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오징어도 시커먼 바닷속에서 인상을 쓰고 있었다. 싱싱한 해초가 자라는 미래의 푸른 바닷속 상어는 웃음을 짓고 거북이도 자유롭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다연양은 "쓰레기 속에 사는 바닷속 물고기들이 너무 불쌍하다"며 "어른들이 바다를 깨끗하게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인천송현초 2학년 박태웅군은 잠수부가 상어 뱃속에서 페트병, 날카로운 캔, 비닐 봉투 따위의 쓰레기를 꺼내주는 모습을 그렸다. 기분이 좋아진 상어는 잠수부를 등에 태우고 바다 쓰레기를 청소했다.인천구산초 3학년 임서원 양은 비닐 봉투, 음료 캔 등이 떠다니는 바다 폐목재 위에서 휴식을 취하며 썩은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있는 갈매기의 모습을 도화지에 옮겼다. 위기에 놓인 바다를 어서 빨리 도와달라는 뜻에서 'HELP'라는 문구도 그림에 넣었다. 서원양은 "학교에서 바다에 마구 버려진 쓰레기 때문에 멀리 북극에 있는 펭귄들도 힘들어하고 있을 정도라고 배웠다"면서 "바다에 쓰레기가 없어져 푸르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렸다"고 했다.인천원당초 2학년 최성훈군은 바다 쓰레기 때문에 아픈 동물을 치료하는 '바다 동물 수술실'의 풍경을 도화지에 담았다. 이날의 수술 목표는 '뱃속에서 쓰레기 빼내기'. 수술실에 대기 중인 환자 '흰 수염 고래님'의 뱃속에는 비닐 조각, 플라스틱, 노끈이 가득 들어있었고 로봇 꽃게 의사가 수술을 준비 중이었다. 성훈군은 "TV에서 본 다큐멘터리에 북극곰과 고래의 뱃속에서 엄청난 양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인천부개서초 4학년 강세희 양은 바닷속에서 페트병, 과자봉지, 담배꽁초 등 쓰레기를 줍는 잠수부를 그렸다.세희양은 "바다에 쓰레기가 많아 어부들이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수업시간에 들어 바다에서 쓰레기를 줍는 그림을 그렸다"며 "바다에 쓰레기가 모두 사라져 물고기와 어부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전했다.한편 이번 제22회 바다그리기 대회는 월미도 문화의 거리와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 인천항 갑문 등에서 동시에 개최됐다. /취재반제22회 바다그리기대회에 참가한 아이들은 작품을 통해 바다 쓰레기로 병들어가는 바다를 어서 빨리 구해달라며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사진왼쪽부터 순서대로 장다연(인천송명초 3) 박태웅(인천송현초 2) 임서원(인천구산초 3) 최성훈(인천원당초 2) 강세희(인천부개서초 4) 학생이 그린 작품. /취재반

2019-05-26 경인일보

[인천 바다그리기대회]도화지 가득 채운 푸른 동심 '작품이 된 인천 바다'

'제22회 바다그리기 대회'가 지난 25일 월미도 문화의 거리와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 인천항 갑문 등 3곳에서 열렸다. 전국 최대 규모의 사생(寫生) 대회로 자리 잡은 이번 대회 참가자들은 '바다사랑'의 마음을 화폭 가득 담았다. 또 준비해 온 음식 등을 가족과 함께 나눠 먹고 사진을 찍으며 즐겁고 특별한 추억을 쌓았다. #이모저모■대회 1주일 전부터 '머릿속에 그린 바다'○…인천 바다의 아름다운 장면들을 도화지에 그리는 학생들이 눈길. 김예은(신흥여중 2)양은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반으로 갈라지는 옹진군의 신비로운 섬 '선재도'를 담은 그림을, 노정아(인천동방중 2)양은 송도에서 바라본 반짝이는 '인천대교'를 담은 그림으로 실력을 자랑. 이들은 대회 전 1주일 동안 아름다운 인천 바다의 모습을 머릿속에 상상. 김예은 양은 "부산과 비교해 작은 편이지만 예쁘고 아름다운 곳이 많은 인천 바다"라며 "인천에 살면서 바다를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좋다"며 웃음.■텐트에서 즐긴 자유, 외국인 가족 '엄지'○…바다그리기 대회에 참가한 외국인 가족들도 웃음꽃. 인도 출신 라오(41)씨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딸 샤리카(인천구월서초 4)양과 함께 이번 그리기 대회에 참가. 솔찬공원 행사장 한편에 자리를 잡은 그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자유롭게 텐트를 치고,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게 이 대회의 매력인 것 같다"고 강조. 라오씨는 "딸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며 미소.■남는건 사진… 인증샷 찍기 위해 긴 줄○…바다그리기 대회 솔찬공원 행사장에선 중앙무대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기 위해 줄지어 기다리는 모습이 진풍경. 직접 그린 그림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자녀의 모습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 학부모들은 힘든 줄 모르고 촬영. 딸의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기다리던 학부모 박은주(44·여·송도동)씨는 "오늘의 모습을 추억으로 남기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며 "소풍 분위기로 나와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 간다"며 웃음. ■대작 완성한 아이들 '물놀이 삼매경'○…바다그리기 대회 월미도 행사장을 찾은 아이들은 일찌감치 그림을 그려놓고 해수족탕과 물놀이장, 분수대에서 물놀이 삼매경. 옷이 흠뻑 젖도록 맘껏 뛰노는 자녀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이모(38·여·부평동)씨는 "평소에 바빠서 자주 못 만났던 친구들과 연락해 모이게 됐다"며 "아이들도 신이 나게 잘 놀아서 좋다"고 만족. 이어 "아는 언니, 동생네 가족들은 솔찬공원 쪽으로 갔다더라"며 "오랜만에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함박웃음.■SNS 수놓은 '#바다그리기대회'○…올해 바다그리기 대회 참가자들은 대회장소에서의 일상을 SNS에 공유. 대회 당일과 이튿날 오전까지 인스타그램에 '바다그리기대회'를 해시태그(#)한 사진은 500여 장. 참가한 학생들과 부모들은 작품 인증샷부터 대회 풍경, 간식 등 소소한 일상을 SNS로 나누며 소통. 게시물에서 참가자들은 '더 이상의 그리기대회는 없다', '빨갛게 불태웠다', '입상은 포기 ㅋ', '더웠지만 즐거웠다' 등 소감도.■월미도 놀이기구 타고 스트레스도 훌훌○…월미도 행사장을 찾은 어린이들은 그림도 그리고, 월미도에 있는 놀이기구를 타면서 즐거운 시간. 초등학생 아들과 월미도를 찾았다는 박정연(40·여)씨는 "고등학생 이후 월미도에서 처음 놀이기구를 타보는 것 같은데 정말 재밌었다"며 "대회에도 참가하고, 오랜만에 월미도를 관광한 것 같아서 좋았다"고 만족감.■경인여대 '뷰티' 부스, 아이들 취향 저격○…인천항 갑문 대회장에는 경인여자대학교 피부미용과 학생 6명이 운영하는 '뷰티' 부스에 300여명의 아이들이 몰리며 인기. 이 부스는 내년에 '뷰티스킨케어과'로 바뀌는 학과 홍보 겸 학생들의 재능 기부 봉사로 이번 대회에 참가. 부스는 70가지 도안이 있는 타투와 다양한 빛깔의 네일아트로 문전성시. 교내 뷰티 동아리 '스윗걸'의 회장 김지은(피부미용과 1) 학생은 "외부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아이들이 재밌어 하니까 기분이 너무 좋다"며 "오늘을 위해 타투 도안과 잉크, 다양한 매니큐어 색을 준비했는데 많이 호응해줬다"고 웃음.■3대가 함께 한 대회, 아름다운 '웃음꽃'○…송도 솔찬공원을 찾은 중국 동포 장영준(35)씨 가족은 3대가 함께 대회장을 찾아 눈길. 딸 장예희(인천장도초 1) 양은 "할머니랑 같이 와서 좋아요. 인어공주랑 조개 그림을 그릴 것"이라며 함박웃음. 영준씨는 "딸 아이 그림 실력도 보고 오랜만에 바닷바람도 즐길 수 있어 기쁘다 "고 설명. /취재반 ■ 취재반 =이진호 부장, 이현준 차장, 김성호 차장, 김태양 기자, 박현주 기자(이상 인천본사 사회부), 김명호 차장, 윤설아 기자( 〃 정치부), 정운 기자, 김주엽 기자(〃 경제부), 임승재 차장( 〃 문화체육부), 김용국 부장, 조재현 기자( 〃 사진부)"제 그림 어때요"-25일 열린 제22회 바다그리기 대회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 행사장에서 참가자들이 완성한 그림들을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취재반한 폭의 그림-월미도 등대길 방파제에 설치된 대회 참가자들의 많은 텐트들이 영종하늘도시를 배경으로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집중-솔찬공원에서 대회 참가자들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진지한 꼬마 화가-인천항 갑문에서 대회에 참가한 언니를 따라온 어린이가 자기만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추억 한 컷-대회에 참가한 한 가족이 솔찬공원 행사장에 설치된 중앙무대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고 있다."응원합니다"-박남춘 인천시장, 이용범 인천시의회 의장, 도성훈 인천시교육감, 박찬대 국회의원, 고남석 연수구청장, 이태훈 가천대길병원 의료원장, 김광하 신명여고 교장, 이영재 경인일보 인천본사 사장 등 참석한 내빈들이 도화지를 배부하고 있다.뜨거운 열기-월미도 문화의 거리가 대회 참가자들이 설치한 형형색색의 텐트로 물결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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