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독립운동과 인천·(7)]구한말 강화 의병운동

1907년 8월 고종 강제퇴위후 진위대 50명 해체 대신 총 들고 군중 500여명과 봉기일본군과 이틀간 치열한 전투… 화력 밀린 연기우·지홍윤등 타지로 옮겨가 '장기전'장교출신 이능권 남아 게릴라전 펼쳐… 대부분 순국하거나 국내외 항일운동 지속 무장투쟁 '정미의병' 시발점·민족주의 강한 강화 만세운동으로 이어진 '밑거름'돼한반도에서 발발했던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전란이 강화도를 비켜간 적은 거의 없었다. 고려 때는 여몽전쟁, 조선 때는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강화를 휩쓸었다. 강화도가 예로부터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지역일 수 있던 데는 이들 전란이 배경이 됐다. 그때마다 외세에 맞서는 의병이 일어났다. 일본이 국권 침탈을 본격화하던 1900년대 말 강화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저항은 유난히 거셌다. 강화에서 봉기한 의병장들은 전국으로 뻗어 나가 활약했다. 이들은 한일 강제합병 이후 일본군의 대토벌작전으로 의병운동이 사라질 때까지 남아 싸웠다.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됐고,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며칠 뒤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했다. 강화도 의병은 같은 해 8월 9일 군대 해산에 반발한 강화진위분견대 군인들이 일으켰다. 진위대 장교였던 연기우(생몰 미상), 지홍윤(?~1909), 유명규(?~1907) 등이 중심이 됐다. 군인 출신인 이능권(1864~1909)도 후기 강화 의병을 이끌었다. 지방대대였던 강화진위대는 1896년 300여명 규모로 설치됐다. 1900년 700여명 규모로 확대됐다가 1905년 수원에 본부를 둔 보병대대 산하 분견대로 축소됐다. 군대 해산 때는 50여명 규모로 병력이 쪼그라들었다. 해산 당일 소대장(분견대장)인 민완식이 병사들을 집합시켜 서울시위대 해체 소식을 알렸다. 급료와 여비를 나눠주면서 무기와 군복을 반납하고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연기우, 지홍윤, 유명규 등 군인 50여명은 소대장에게 무기를 내어달라고 요구했고, 군중 500여명이 호응했다고 전해진다.강화문화원이 1983년 펴낸 '증보 강화사'에는 의병 봉기 현장에 있었던 고제원씨의 증언이 실렸다. 고씨는 "너나없이 무기고 창을 깨트리고 들어가 총 한 자루에 탄환 두서너 줄씩 들고 나와 허리에 두르고 어깨에 늘어뜨리고 나왔다"며 "수백명 군중이 총을 들고 나서고 보니 군대 해산의 여파이기는 하나 대항하러 나서는 군대의 대열이 아니오 울분한 백성들의 폭발 직전의 동요였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총기로 무장한 군인과 군중들은 파출소를 습격한 뒤 관아로 가서 강화군수 정경수를 찾았다. 정경수는 친일단체인 일진회 강화지부 총무이기도 했는데, 의병이 일어난 직후 개성으로 달아났다. 일진회 강화지부장 양학진은 의병들에게 붙잡혀 끌려다니다 강화읍 동문 밖에서 죽임을 당했다.강화 의병의 본격적인 전투는 다음날인 10일부터 시작됐다. 이날 일본군 제14연대 오구라(小倉) 대위는 강화진위대 해산 임무를 맡아 보병 1개 소대와 기관총 2문을 이끌고 서울에서 강화도로 급파됐다. 1913년 일본의 조선주차군사령부가 발간한 '조선폭도토벌지'에는 오구라 부대가 의병 봉기를 모른 채 강화도에 진입했다고 나온다. 일본군은 갑곶으로 상륙해 강화읍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벽에 매복해 있던 의병 50여명이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 기록에 따르면 이날 전투에서 일본군 6명이 사살됐고 5명이 부상당했다. 반면 황현(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은 당시 전투에서 일본군 56명이 사살됐다고 밝혔다. 황현은 이건창(1852~1898), 이건승(1858∼1924) 등 강화에 사는 강화학파 양명학자들과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강화 의병 전투 상황을 상세히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하지만 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의병부대는 강화읍으로 철수해 방어선을 구축했고, 일본군은 갑곶 동북쪽 고지에 진을 쳤다. 의병 10여명이 통진군(현 김포시) 분파소에서 총기 10정과 탄약을 탈취하기도 했다. 이때 의병에 가담한 진위대 군인과 주민은 800여명에 달했다. 일본군은 이튿날 새벽부터 다시 강화읍을 공격했다.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성내로 진입한 일본군은 이날 오전 7시께 진위대 병영을 점령했고, 의병부대는 후퇴했다. 강화전투 이후 연기우는 적성(파주)·삭령(연천)·철원으로, 지홍윤은 황해도 해서지역으로 각각 주력부대를 이끌고 내륙으로 들어가 장기전에 돌입했다. 이처럼 군대 해산에 저항하는 군인들이 주도한 의병부대는 전국에서 강화와 원주뿐이었다. 한일 강제병합 직전까지 이어진 무장투쟁인 '정미의병'(1907∼1910년)의 시발점이다.의병의 모습은 어땠을까. 영국 '데일리 메일'(Daily mail) 극동 특파원으로 1906~1907년 조선에 머물렀던 영국인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Frederick McKenzie·1869~1931)가 1920년 펴낸 '한국의 독립운동'(Korea's Fight for Freedom)에는 충북 제천지역 의병 종군기가 나온다. 다음은 그 내용 중 일부다.'그들은 모두가 18세에서 26세 사이의 청년들이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얼굴이 준수하고 훤칠한 청년이었는데 그때까지도 구식 군대의 제복을 입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군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중략) 여섯 명이 가지고 있는 총 중에서 다섯 가지가 제각기 다른 종류였으며, 그 중의 어느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다'.강화 의병 봉기 진압작전을 지휘한 오구라 대위는 이후 대한제국 무관학교 수석교관으로 부임했다. 1907년 12월에 입학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관생도 가운데는 강화 출신 김영섭(1888~1950)도 있었다. 이원규 작가가 사료를 바탕으로 2016년 쓴 역사소설 '마지막 무관생도들'에는 김영섭이 교관인 오구라 대위에 대해 "내 고향 강화의 원수, 나라의 원수야. 그런데 이동휘 참령님의 추천을 받은 내가 그놈의 훈육을 받게 되다니!"라고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독교 목사가 된 김영섭은 일제강점기 후반 국민정신총동원 기독감리회연맹 이사를 맡는 등 친일의 길을 걸었고, 해방 이후 하와이 총영사를 지내기도 했다.주력부대가 떠났으나, 강화지역 의병투쟁이 사그라지진 않았다. 산악지대로 숨어든 의병부대는 강화읍 국화리, 양사면 철산리, 화도면 덕포리, 교동 등지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 시기 강화 의병을 이끈 의병장은 이능권이다. 중앙군인 서울시위대 장교 출신인 이능권은 군대 해산 후 고향인 강화로 내려와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陳)이라는 이름의 의병부대를 편성했다. 이능권은 1905년 고종의 밀서를 갖고 네덜란드 헤이그로 향한 이준(1859~1907) 열사 일행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을 만큼 뛰어난 군인이었다.강화지역 장사들을 모았다는 이능권의 대동창의진은 일진회 회원들을 처단하거나 군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했다. 일본군이 병력 200여명을 강화도에 급파해 이능권 부대와 전등사 등지에서 교전을 벌였는데, 이때 일본군 100여명을 사살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당시 이능권 부대의 병력은 20여명이었고, 무기는 화승총이 전부였다고 한다. '독립운동사자료집'에 실린 일본군 기록을 보면, 1908년 10월 하순께 강화에 파견된 의병토벌대가 이능권 부대와 전등사 등지에서 지속해서 싸우고 수색했으나 '별무소득이었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게릴라전으로 명성을 날리던 이능권은 1908년 12월 주민의 밀고로 체포됐고, 이듬해 9월 경성재판소에서 강도죄와 모살죄로 교수형이 확정돼 두 달 뒤 순국했다.강화 의병 봉기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1873~1935)의 영향을 받았다는 시각이 있다. 이동휘는 강화진위대 규모가 가장 컸던 1902~1905년 강화진위대장을 지냈다. 진위대장을 사임한 뒤 강화 전역에 보창학교를 설립해 교육사업에 힘썼다. 전문가들은 보창학교 출신 강화도 주민들 상당수가 의병 봉기에 합류했다고 보고 있다. 독립운동가 계봉우(1880~1959)는 1920년 5월 8일자 독립신문에 기고한 '의병전'에서 군대 해산 직전인 1907년 8월 2일 지홍윤 등 군인, 기독교인들과 '거의(擧義)'를 계획했다고 기록했다. 일본 경찰은 강화 의병 봉기 4일 뒤인 8월 13일 이동휘를 체포해 4개월 가까이 경시청에 감금하기도 했다. 일본 경찰은 의병이 일어나는 데 이동휘의 영향력이 컸다고 봤지만, 혐의를 찾지는 못했다.강화를 벗어난 연기우 의병부대는 1907년 가을 '13도 연합 의진'에 참여해 서울 진공을 감행했다. 1908년 전국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활약했는데, 그가 언제 세상을 떴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해서지방에서 활동한 지홍윤은 1909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중에서 순국했다. 강화에 남았던 유명규는 1907년 9월 6일 통진에서 체포돼 순국했다. 강화진위대 출신 오윤영(?~1971)은 강화도 서북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이어가다가 강화를 탈출한 이후 만주 독립군에 입대하는 등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에 나섰다. 김덕순(1878~1909)도 동료 의병 수십명과 함께 1908년 6월부터 교동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1909년 교수형을 받고 세상을 떴다. 짧지만 격렬했던 강화 의병 투쟁의 정신은 1919년 3월 강화지역의 대대적인 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1908년 12월 체포된 강화 의병장 이능권. '헤이그 밀사'의 호위 무사를 맡기도 했던 군인 출신으로, 강화에서 '대동창의진'이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해 친일파 처단 등에 앞장섰다. /독립기념관 제공1907년 8월 10일 일본군 제14연대(빨간색 선)는 갑곶으로 상륙해 강화읍성 동쪽 성벽에 매복해 있던 강화 의병부대(파란색 선)에게 기습 공격을 당했다. 하지만 수세에 몰린 의병은 강화읍으로 철수했다. 갑곶 동북쪽 고지에 진을 친 일본군은 11일 새벽 강화읍 공격에 돌입해 강화진위대 병영을 장악했다. 방어하던 강화 의병부대는 일본군 화력에 밀려 퇴각했다.서양식 무관복을 입은 대한제국 강화진위대 장교들. 앞줄 가운데 있는 인물이 강화진위대장을 지낼 당시의 이동휘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다. /독립기념관 제공1907년 8월 11일 강화읍 전투 이후 강화 의병 주력부대는 섬을 빠져나가 내륙에서 장기전에 돌입했다. 연기우 부대는 현 경기도 북부지역, 지홍윤 부대는 황해도 해서지방으로 진출했다. 강화에 남은 의병부대도 산악지대 등지로 흩어져 활동을 이어갔다.

2019-04-03 박경호

[인천의 얼굴·(5)]동인천 양키시장 터줏대감 신현성 할아버지'

미군부대서 흘러나온 물건 팔던 곳교복·교련복 등 만들며 5남매 키워없는 게 없다던 동인천 양키시장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1930년대 생겨난 인천에서는 가장 오래된 종합시장이지요. 신현성(80) 할아버지는 몇 안 남은 양키시장 지킴이입니다. 50년이 넘었습니다. 양키시장은 그 이름처럼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온갖 것들을 팔았습니다. 인천과 미군, 참으로 질긴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신미양요 때부터 치면 미군의 인천상륙작전만 세 번이나 있었습니다. 1945년 해방 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인천이었습니다. 한반도에서 완전 철수했던 1년여를 제외하고는 줄곧 인천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네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겠습니까. 그 산증인이 할아버지입니다. 저기 할아버지 뒤에 쌓인 실패 더미가 그 삶의 두께를 이야기합니다.할아버지는 군대 제대 후 작업복 만드는 가게에 취직해 어깨너머로 일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양키시장에서 세를 얻어 양복점을 시작했습니다. 학생 교복·교련복, 근로자 작업복 등을 주로 만들었습니다. 찾는 사람이 정말 많았습니다. 새벽 5시에 문을 열어 통금 시간 직전인 밤 11시 50분에 닫았습니다. 한 달에 딱 한 번 쉬었습니다. 일이 밀려 가게에서 쪽잠을 자는 날도 부지기수였습니다. 3~4년 만에 3평짜리 점포를 샀습니다. 그렇게 5남매를 키웠습니다. 끊이지 않을 것 같던 손님,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산합니다. 세를 내는 것도 아니고 해서 문을 열고는 있는데 손님 한 명 구경하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입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을 만나는 법, 이게 인생인가 봅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게 있습니다. 교련복! 이게 무엇인지 아는 분은 제법 나이가 드신 겁니다. 하하하! 글/김태양기자 ksun@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평범하지만 인천을 지탱하는 든든한 얼굴이라고 생각하시는 이가 있다면 문을 두드려 주세요. 굳이 얼굴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인천을 상징하는 손이나 발, 어느 것이어도 됩니다. 모두가 '인천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032)861-3200 이메일 : say@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4-01 김태양

[Zoom in 송도]1년여만에 불어오는 '분양 봄바람'

8공구 M2블록 호반건설 '호반써밋 송도'10개동 아파트 1820가구·아파텔 851가구3일 특별공급 시작 4~5일 청약접수 진행견본주택 2만명이상 발걸음 '높은 관심'NSIC도 F20-1·25-1블록등 6월께 분양6공구는 학교문제·사업방식 갈등 '지연''호반써밋 송도'가 최근 견본주택을 열고 4월 초 분양에 나서면서 인천 송도국제도시 주택 분양 시장이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다. 호반건설은 지난 3월29일 홈플러스 송도점 인근에 견본주택을 열고 분양 일정에 돌입했다. '호반써밋 송도'는 송도 8공구 M2블록에 들어선다. 10개동 규모로 ▲아파트 1천820가구(전용면적 84㎡, 101㎡) ▲아파텔 851실(전용면적 74㎡, 84㎡)로 구성됐다. 아파트는 6개 타입, 아파텔은 5개 타입으로 세분화했다.'호반써밋 송도' 견본주택에는 많은 사람이 몰렸다. 견본주택 외부에는 긴 줄이 늘어섰으며, 내부에는 유니트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상담석도 청약 자격 등을 문의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호반건설 관계자는 "'호반써밋 송도'는 호반건설이 송도에서 진행하는 네 번째 사업장"이라며 "호반베르디움 1~3차 때보다 수요자들의 관심이 높은 것 같다"고 했다. 또 "견본주택 방문객들이 '호반써밋 송도'의 입지를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호반건설은 3월29~31일 2만명 이상이 견본주택을 방문한 것으로 집계했다.송도 8공구에 위치한 '호반써밋 송도'는 2023년 2월 입주 예정이다. 송도 8공구는 현재 아파트 입주와 건설이 진행되고 있는 구역으로, 현재는 대중교통과 편의시설이 충분하지 않다. 이 때문에 호반건설은 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올해 12월 개장 예정), 인천 1호선 송도랜드마크시티역(2020년 개통 예정), 인천아암초등학교(2020년 3월 개교 예정) 등 교통·교육 인프라가 입주 이전에 완료되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인천 송도에서 서울역을 거쳐 남양주 마석까지 운행하는 GTX-B노선은 예비타당성 조사 중이다.'호반써밋 송도' 아파트는 4월3일 특별공급을 시작으로 4일 1순위, 5일 2순위 청약이 진행된다. 아파텔은 4월4~5일 청약 접수가 이뤄진다.송도에서 아파트 분양이 이뤄지는 것은 오랜만이다. '호반써밋 송도'는 지난해 12월 공동주택 신축 사업계획 승인을 얻었다. 2017년 4월 이후 처음이다. 송도에선 1년5개월만에 민간분양이다.올해 '호반써밋 송도'를 시작으로 몇 차례 더 분양이 있을 전망이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NSIC(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가 송도 E5블록, F20-1블록, F25-1블록 분양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 사업장은 2015년 6~7월 사업계획 승인을 얻었는데, NSIC 주주사 간 갈등으로 사업 추진이 늦어졌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NSIC가 F20-1블록, F25-1블록 건축물의 경관을 향상하는 절차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안다"며 "올해 6월 전후로 분양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하지만 송도 B1블록과 B2블록, 송도랜드마크시티(SLC) A14블록 등 송도 6공구 일대 아파트 사업은 지연되고 있다.송도 B1블록과 B2블록은 학교 문제 등으로 사업 추진이 지연되고 있다. 이 때문에 사업시행자, 인천경제청, 인천시교육청 등은 학교 부지 확보 문제를 논의 중이다. 이 중 B2블록은 인천경제청이 사업 주체와 방식 등을 문제 삼고 있어 민간사업자와 갈등이 불거진 상태다. 민간사업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NSIC로부터 토지를 매입했다는 입장이다. 6공구 SLC A14블록도 인천경제청과 민간사업자 간 갈등이 해소되지 않았다. 인천경제청은 SLC 전체 사업의 개발이익 초과분 정산·분배 방식이 확정돼야 A14블록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송도 6공구 중심부를 개발하는 대형 프로젝트는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둘러싼 인천경제청과 민간업체 간 다툼으로 장기간 지연되고 있다.한편, 올해 송도에서 입주가 예정된 아파트 사업장은 송도 8공구 A4블록(송도SK뷰)과 SLC A11블록(힐스테이트 레이크송도1차)이다. A4블록은 7월, A11블록은 6월 준공 예정이다. 이들 아파트 입주예정자들은 아파트 단지 주변 환경 개선, 대중교통 확충, 아이들 통학로 안전 확보 등을 인천경제청에 요구하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호반써밋 송도' 견본주택 앞에 입장을 기다리는 방문객들로 줄이 길게 이어졌다. /호반건설 제공방문객들로 북적이는 '호반써밋 송도' 견본주택 내부 모습. /호반건설 제공

2019-03-31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6)]강화학파 이건승

계명의숙 설립 구국계몽운동 헌신공적심사 미흡 인천시 적극 나서야경재 이건승(1858~1924)은 '강화학파'라 불리는 한국 양명학의 계보를 잇는 유학자이자 1906년 강화도에 민족주의 교육기관인 '계명의숙'을 설립한 계몽운동가였다.그는 1910년 8월 29일 한일 강제병합이 선포된 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9월 24일 강화도에서 만주 서간도로 망명했다. 조선의 지도층인 사대부 대다수가 일제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던 때, 이건승은 나라를 구한다는 신념으로 사대부 중 가장 먼저 망명을 택했다.이건승은 서간도에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과 소통하고, 여러 편의 글을 남겨 조국 독립의지를 드러냈다. 1924년 6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고국 땅을 밟지 않았다. 이건승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를 "만주지역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씨앗을 뿌린 애국지사"라고 평가한다. 이들은 인천시가 나서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정작 선대부터 뿌리내려 살아온 고향에서는 이건승의 망명과 이후 행적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무관심하다. '인천시사'를 포함해 인천시가 공식적으로 발간한 각종 역사책과 자료에는 이건승의 망명 이후 행적을 1~2줄 정도로 간략하게 언급할 뿐이다. 이건승의 형은 당대 명문장가로 꼽히는 영재 이건창(1852~1898)인데,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는 '이건창 생가'에는 이건승과 관련한 안내판조차 없다. 이건승은 강화 사기리에서 계명의숙 교장을 지내며 구국계몽운동에 헌신했다.이건승과 관련이 깊은 우당 이회영(1867~1932), 매천 황현(1855~1910) 등은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됐다. 이건승은 아직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않았다. 강화군이 국가보훈처에 공적조사서를 제출해 2017년 3월 한 차례 공적심사가 있었지만, 이후 강화군이나 국가보훈처의 추가적인 움직임은 없는 상황이다. 강화군의 공적조사서 작성을 도왔던 이은영 성균관대 한문학과 초빙교수는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는 한 번에 통과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데다가 후손을 남기지 않아 자료 발굴이 어렵다"며 "서간도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건승에 대한 독립유공자 추서는 인천시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이회영과 젊은 그들'(2009·위즈덤하우스), '근대를 말하다'(2012·위즈덤하우스), '한국독립전쟁사의 재조명'(2019·만권당) 등 여러 저서를 통해 이건승의 망명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이덕일 소장은 "가장 앞장서서 만주로 망명한 행동 자체가 독립운동"이라며 "이건승의 독립유공자 서훈에 의문을 가질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03-27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6)]강화학파 이건승

1910년 9월 24일 새벽, 강화도의 양명학자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1858~1924)이 만주 서간도로 망명길에 올랐다. 머나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라고 눈치챌 수 없도록 가벼운 옷차림에 지팡이 하나만 들었다. 경술국치(8월 29일)로 나라를 빼앗긴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건승은 1906년 전 재산을 쏟아부어 강화도에 설립한 민족주의 교육기관인 계명의숙(啓明義塾)의 교장을 맡고 있었다. 경술국치 직후 일제가 주려던 위자금도 이미 거부한 터였다. 촘촘해진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판단이 그를 서간도로 향하게 했다. 그해 12월 1일 압록강을 건넌 이건승은 1924년 2월 18일 향년 67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망명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강화를 떠나면서 서간도에 도착할 때까지 지은 26수의 시를 통해서 망명 여정을 기록했다.'강화학의 마지막 행동가'라고 평가받는 이건승의 서간도 망명 이후의 행적은 인천지역에서조차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있다. 인천시가 발간한 '인천시사'나 '인물로 보는 인천사'(2013), 강화군이 펴낸 '신편 강화사 증보'(2015) 등에서는 이건승의 13년 동안 이어진 망명생활에 대해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는 정도로만 간략하게 언급했다. 강화도를 기반으로 하던 그의 활동무대가 이역만리 만주 땅으로 옮겨지면서, 인천을 테두리로만 하는 지역사회의 독립운동연구에서 멀어진 게 아닌가 싶다. 이건승을 깊이 연구한 연구자들은 그를 가리켜 "만주지역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씨앗을 뿌렸다"고 평가하면서 "독립유공자로 추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이건승은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가 뿌리내린 양명학 '강화학파'의 일원이다. 한말삼재(韓末三才) 중 한 명으로 꼽힌 당대 명문장가 이건창(李建昌·1852~1898)이 그의 형이다. 육촌동생인 이건방(李建芳·1861~1939)은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정인보(鄭寅普·1893~1950)의 스승으로 유명하다. 경술국치 직후 순절한 대표적인 우국지사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과도 교우가 깊었다. 이건승은 1905년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정원하(鄭元夏·1855~1925), 홍승헌(洪承憲·1854~1914) 등 양명학자들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당시 황현에게 편지를 보내 "나라가 망했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살아있는 것, 사람이 마땅히 죽어야 할 때 오히려 살아있는 것은 모두 떳떳한 도리가 아닙니다"라며 자결을 암시했다. 하지만 구국계몽운동에 투신하기로 생각을 바꿔 강화도 사기리에 계명의숙을 설립했다.황현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기 직전인 1910년 8월 6일 자결을 택했다. 5년 전 이건승에게 받은 편지가 떠올랐을지 모른다. 황현의 순절 소식을 들은 이건승은 이번에는 죽음으로 망국을 한탄하지 않기로 했다. 강화를 떠난 이건승은 개성에서 홍승헌과 이건방을 만났고, 1910년 10월 2일 홍승헌과 함께 신의주로 올라가는 경의선 열차를 탔다. 이건방은 "강화학을 전승해야 한다"는 이건승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국내에 남았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썰매를 타고 건넌 이건승은 서간도 땅을 밟으며 '십이월일일(十二月一日), 이사막도강(離四幕渡江), 고청인상거발행(雇淸人商車發行)'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이 몸은 마치 요동의 학처럼(此身正似遼陽鶴) 도리어 천년을 기다려 옛 거처로 돌아왔네(却待千年返舊居)"그 시의 일부다. 일제강점기 서간도로 망명한 유학자들을 연구한 이은영 성균관대 한문학과 초빙교수는 "자신이 요동의 학처럼 천년을 기다려 고향인 옛 고구려 땅으로 돌아왔다고 한 것은 처음 정착지로 선택한 회인현 횡도촌을 고향으로 인식했다는 의미"라며 "요동의 서간도를 분명한 우리의 영토로 여기고 망명지로 선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이건승이 정원하, 홍승헌과 함께 정착한 서간도 회인현 횡도촌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 9대가 정승·판서·참판을 지낸 조선 최고 명문가 후손인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 일가가 대표적이다. 이회영을 포함한 6형제 집안 50여명이 1911년 1월 횡도촌으로 집단 망명했다. 이회영 일가가 급하게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독립운동자금은 현재 가치로 약 6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건승과 이회영은 망명 이전부터 대대로 교류가 있었다. 이회영 일가의 집단 망명에 이건승의 망명이 어떻게든 영향을 끼쳤을 터이다. 그러나 이건승은 망명 시절 쓴 문집 등에 이회영과의 만남을 기록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국내외 인사들과 교류했던 편지 등을 모두 태워서 없앤 이건승의 철저한 함구 덕분이라고 평가한다. 이회영 일가는 회인현 북쪽인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를 거쳐 통화현 합니하에 독립군 양성기지인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2009년 쓴 평전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통해 이회영의 사상적 종착점이 모든 인간의 절대 자유와 절대 평등을 주장하는 '아나키즘'인 것은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인정하지 않아 조선 시대 '이단'으로 몰렸던 양명학의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이건승은 망명생활 중에도 활발한 저술활동을 이어갔다. '안중근전', '이재명·김정익전' 등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이은영 교수가 2016년 펴낸 학술서 '요동의 학이 되어'에는 이 교수가 번역한 '이재명·김정익전'의 내용 일부가 실렸다."완용이 수레에서 떨어지자, 재명은 그 배에 걸터앉아 마구 찔렀다. 한 번 찌를 때마다 번번이 대한만세를 외쳤다. 칼날이 들어가서 뱃속의 창자를 끊었는데, 일본 순사들이 그(이완용)를 구하고 재명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고는 살인죄로 교수형에 처했다. 완용은 병원에 입원해서 개의 창자를 이어서 죽지 않았다."이재명(李在明·1887~1910)은 1909년 12월 명동성당 앞에서 총리대신이던 매국노 이완용(李完用·1858~1926)을 처단하려고 공격했으나, 부상만 입히고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독립운동가다. 이건승이 이완용의 창자를 '개의 창자'로 표현한 점이 눈길을 끈다. 장기 이식이 일반적이지 않을 때, 특히나 동물의 장기를 사람에게 옮기는 상상을 한 거다. 물론 이완용을 개로 표현하려는 것이었지만 의학과 문학적 측면 양쪽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1905년 체코에서 각막이식 수술에는 성공했지만, 신장이나 폐 등 사람 간 장기이식은 1950년대 이후에나 가능했다. 사람의 간이나 장이식 수술은 1987년이 돼서야 미국에서 시작됐고, 동물의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하는 수술은 아직도 연구단계다. 장기이식이 첫걸음도 떼지 않은 20세기 초반에 매국노가 동물의 창자를 이어서 살았다고 표현한 이건승의 상상력이 기발하다. 그는 망명 중 여러 시와 글을 쓰며 조국 독립 의지를 드러났다.이건승은 서간도에서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독립운동가 노상익(盧相翼·1849~1941) 등 서간도 망명인사들을 주축으로 한 '서구결사(西溝結社)'라는 이름의 단체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 단체가 어떠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현재까지 발굴되지 않았지만, 참여 인사들 면면을 봤을 때 항일운동을 위한 조직이었을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이건승은 고국에 있는 이건방, 정인보 등과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는 불살랐기 때문에 남아 있지 않다. 정인보는 2차례에 걸쳐 서간도를 방문해 이건승을 만났다.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정인보가 재산을 정리해 이건승에게 군자금으로 전달했다거나 이건방이 이건승에게 보내기 위한 재산을 장독에 숨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건승이 망명 중에도 일본 순사로부터 민단에 가입하라는 협박을 당하는 등 감시가 만만치 않았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동아일보는 1924년 3월 29일자 신문에 '감회 많은 그의 일생'이라는 소제목으로 이건승의 부고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서는 '독립 전에는 다시 고국의 흙을 밟지 아니하기로 결심하고 혈루를 머금고 만주로 달아났다'고 썼다. 이덕일 소장은 이건승의 망명에 대해 "나라가 망하자 온 생애를 걸고 망명했던 소수의 사대부들 가운데 가장 먼저 나섰다"며 "그 결단이 대한민국 건국의 씨앗이었다"고 평가했다.황현, 노상익, 김택영(金澤榮·1850~1927) 등 이건승과 관계가 깊었던 이들은 모두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인천지역이 앞장서서 이건승의 행적을 재평가하고, 새롭게 조명할 때다. 현재 '이건창 평전'을 집필하고 있는 이은영 교수는 "이건승 선생은 후손이 없어 자료 발굴에 적극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지만, 김택영 선생처럼 저술활동만으로도 독립유공자 자격이 충분하다"며 "서간도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점은 동아일보 부고 기사 등 여러 자료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1910년대 서간도 유하현의 이주 한인 마을 모습. 경술국치 이후 많은 애국지사들이 서간도로 이주해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했다. /독립기념관 제공1922년 일제가 작성한 이건승의 동향에 대한 정보보고 문건. '배일선인(排日鮮人)의 정황(情況)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인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는 이건창 생가. 이건승의 형인 이건창은 당대 명문장가이자 대표적인 강화학파 유학자다. 이건승은 사기리에서 생활하며 교육기관인 '계명의숙'을 설립해 민족주의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동아일보가 1924년 3월 29일자 신문에 보도한 이건승의 부고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

2019-03-27 박경호

[인천의 얼굴·(4)]인천항 선광 신컨테이너터미널 홍윤택 크레인 선임 기사

높이보다 바람·안개가 더 무서워대소변 고려 자극적 음식도 자제인천항은 인천의 상징입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의 일터이기도 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일하는 크레인 기사를 '항만 하역의 꽃'이라고 부릅니다. 홍윤택(51) 선임 기사는 17년째 인천항 컨테이너 터미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선광 신컨테이너터미널에서 접안한 배에 컨테이너를 싣거나 내립니다. 대한민국 수출입의 최일선입니다. 45m 높이의 조종실에서 크레인을 조작하는 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발밑이 아찔하지만 무서움을 느낄 새가 없습니다. 항만에는 늘 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기 마련인데, 그게 제일 무섭습니다. 바람이 불면 컨테이너가 흔들리기 때문에 제 위치에 내려 놓기가 어렵습니다. 안개는 컨테이너조차 보이지 않게 합니다. 인천항은 특히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기로 유명하지요. 10m를 더 내려가거나 올라옵니다. 이런 것들이 크레인 기사들을 괴롭힙니다. 인천항 크레인 기사들은 그래서 더욱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3시간 이상 작업하는 게 금지되어 있는 이유입니다. 그만큼 힘이 듭니다. 대소변을 참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조종실을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가 생겨 편해졌지만 아직 화장실은 없습니다. 배탈이라도 나면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근무 전날에는 자극적인 음식은 절대로 먹지 않습니다. 이제는 몸도 일에 생체리듬을 맞추나 봅니다. 쉬는 날에도 소변이 3시간마다 나옵니다. 일본에서 대학 다니는 딸이 부모님을 소개하는 수업 시간에 '우리 아빠는 대한민국의 수출입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발표했다는 말에 오늘도 고된 일과를 힘차게 시작합니다. 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평범하지만 인천을 지탱하는 든든한 얼굴이라고 생각하시는 이가 있다면 문을 두드려 주세요. 굳이 얼굴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인천을 상징하는 손이나 발, 어느 것이어도 됩니다. 모두가 '인천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032)861-3200 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3-24 김주엽

[인천경영포럼]반기문 前 유엔사무총장, "북핵 초당적 과제… 문재인 정부 힘 실어줘야"

남·북·미 비핵화 이해 조금씩 달라2차 북미회담 실패 '시각차' 원인"北, 당장 핵포기 어려울 것" 지적반기문 전 유엔(UN) 사무총장은 2차 북미정상회담의 실패 원인은 남북·북미·한미 간 잘 맞물려야 할 톱니바퀴가 조금씩 어긋나면서 벌어진 결과라며, 우리 정부는 북한 핵 문제의 당사자로서 주인 의식을 갖고 빨리 그 원인을 찾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반기문 전 총장은 21일 경인일보와 인천경영포럼이 인천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공동 개최한 '인천경영포럼 창립 20주년·강연 400회 달성' 기념 특별 초청 연사로 나와 이같이 말했다. 그는 또 "외교가 정치화돼선 안 된다. 여야 가리지 않고 초당적으로 북핵 문제를 풀어가자"고 했다.반 전 총장은 "지난해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1차례의 북미정상회담 과정에서 한반도의 비핵화를 남·북·미가 조금씩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다"며 "당장 북한은 지난해 말 선전매체를 통해 미국의 핵우산 철수를 주장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그는 "한반도 비핵화를 바라보는 남·북·미 시각이 다르다 보니 정상회담 과정에서 조금씩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번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그런 게 폭발한 것으로 분석된다"고 설명했다.반 전 총장은 "1991년부터 북핵 협상 당사자로 나서 일을 해온 경험상 그동안의 북한 패턴을 볼 때 당장 핵을 포기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말한 뒤 "북한은 항상 위기가 있을 때 문을 열었다가 그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면 다시 문을 닫는 방식의 협상을 벌여 왔다"고 주장했다.그는 "경협문제도 당장 풀리면 좋겠지만 지금은 숨을 고르며 지켜봐야 할 시기"라며 "우리가 섣부르게 경협을 추진하다가 오히려 한미동맹 관계에 큰 균열만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반기문 전 총장은 "한미동맹이 그냥 쉽게 이뤄지고 있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며 "특히 현 트럼프 정부에선 미국의 행태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그는 "남북 관계에 있어 중요한 시기에 있고 이럴수록 여·야와 진보·보수 등을 떠나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쳐 현 정부와 함께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한반도 정세가 역대 어느 정부보다 나아지고 있는 만큼 범국민적으로 지지해 주자"고 강조했다.이날 특별 초청 강연에는 박남춘 인천시장을 비롯해 도성훈 인천시교육감, 이용범 인천시의회 의장, 더불어민주당 윤관석·맹성규, 자유한국당 안상수·홍일표 국회의원, 정의당 이정미 대표 등 각계인사 500여명이 참석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21일 오후 인천시 연수구 라마다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창립 20주년 400회 초청 강연에서 '최근 한반도 정세와 북핵문제'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3-21 김명호

[인천경영포럼]반기문 "경협, 안보리 제재 틀안에서… 속도 조절 필요"

너무 빠르면 韓·美 불협화음 우려교섭대표 경험 "과거 되짚어야"정부 '직접 당사자' 역할 강조도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21일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20주년 기념 특별강연회에서 20여 년간 북핵 문제에 관여했던 경험을 소개하며 현 상황을 진단하고 북한 관련 정책에 대해 피력했다. 반기문 전 총장은 "1991년 '남북한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할 때 교섭대표로 임명돼 이 선언이 이뤄지는 과정에 참여했다"며 "이후 20여 년 동안 북핵 문제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재 현상뿐만 아니라 과거를 되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그는 현 정부에 대해서는 '중재자'나 '촉진자'보다는 '직접 당사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반 전 총장은 "'내 문제'라는 자세를 갖는 것이 문제 해결을 촉진시킬 수 있다"며 "옆에서 중재한다는 것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 남북 관계가 좋아지더라도 (북미 관계 등) 다른 지점에서 삐걱거릴 수 있다"고 했다.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협력과 관련해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틀 안에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반 전 총장은 "경제협력에 대해서는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남북 경협을 진행해야 하지만, 너무 빠르면 한미 간 불협화음을 촉발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어 "남북 간 평화 분위기가 조성됐지만, 아직 할 일이 많이 있다"며 "최선을 희망해서 최악에 대비하라는 말이 있다. 아직 유비무환의 자세가 필요한 시기"라고 했다.이날 강연에 앞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는 공로회원 시상이 있었다. 제이씨텍(주) 이영재 대표이사, 제원기업유한회사 김영희 대표이사, 인성의료재단 한림병원 이정희 이사장 등 10명이 수상자로 선정돼 상패를 받았다.인천경영포럼 안승목 회장은 기념사에서 "새로운 20년, 50년, 100년을 위해 쉬지 않고 지역사회를 위해 국민과 함께하는 인천경영포럼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며 "끊임없이 공부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더욱 정진할 것을 약속드린다"고 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창립 20주년' 축하떡 자르는 내빈들-인천경영포럼 창립 20주년과 초청강연 400회 달성을 기념해 21일 오후 인천시 연수구 라마다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초청 특강에서 박남춘 인천시장, 도성훈 인천시교육감, 윤관석 국회의원, 안승목 인천경영포럼 회장, 김진용 인천경제자유구역청장, 정일영 인천공항공사 사장, 이태훈 가천대 길병원 의료원장, 이영재 경인일보 인천본사 사장을 비롯한 내빈들이 축하 떡을 자르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3-21 정운

[이슈&스토리]반쪽 지원에 그친 8년… '평화의 섬' 걸맞은 인프라 구축돼야

22일(매년 3월 넷째 금요일)은 서해수호의 날이다.제2연평해전과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등에 맞서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호국 영웅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이다.서해에서 벌어진 남북 교전은 비단 군인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서해5도 주민들은 연평도 포격 당시 피난 행렬 속에서 느낀 불안과 공포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이러한 서해5도 주민들의 정주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2011년 처음 마련된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이 오는 2020년 종료를 앞두고 있다.서해5도 지원 특별법에 따라 만들어진 이 계획은 그동안 접경지역이라는 이유로 소외됐던 서해5도 지역에 대한 종합적인 발전 계획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정부 예산은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해 '반쪽짜리' 계획에 그쳤다는 지적도 뒤따랐다.8년이 지난 지금, 연평도 포격의 상흔으로 얼룩진 2011년과 달리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자연스레 '제2차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2021~2030)' 수립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남북 관계가 개선된 만큼 대북 사업, 관광 사업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 지원이 주민들의 실질적인 소득 증대로 이어질 수 있는 청사진 수립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北위협 속 정주환경 개선위해 2011년 특별법 제정 9천억대 구상국비 지원율 53% '실망' 노후주택 개량 올해는 30여가구만 수혜 옹진군·의회 노력등으로 정부 2차 계획 수립 용역발주 추진 '다행'민간 자본 관광육성 지지부진… 소득 증대 등 현실적 사업 필요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이 처음 마련된 건 남북 관계가 냉랭했던 2011년이었다. 정부는 2010년 11월 발생한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주민생활 안정대책 차원에서 이듬해 서해5도 지원 특별법을 제정하고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을 수립했다. '풍요로운 평화의 고장, 서해5도'라는 비전을 세우고 주민을 위한 쾌적하고 수준 높은 정주환경 조성과 동시에 북한의 도발로부터 대비하기 위한 대피시설 확충 사업을 동시에 담았다. 또한 섬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해 경쟁력 있는 특화 산업과 관광 산업 육성과 관련한 사업도 포함했다. 사업비는 2011년부터 2020년까지 국·시비, 민간 자본 등 9천109억원이다. 서해5도 도로 개설, 항만시설 정비, 관광 기반 구축, 대피소 확충, 해상 교통망 개선 등을 위한 것이다. 이중 지난해까지 예산 3천128억원이 투입됐다. 그러나 국비는 계획된 4천599억원에서 2천434억원이 지원되는 것에 그쳤다.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시행이 8년이 지났는데도 국비 지원율이 53%로 미흡한 수준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민들에게 호응을 받고 있는 노후주택 개량사업의 경우 신청을 원하는 군민이 200가구를 넘지만, 올해 수혜를 받는 가구가 30여 가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문제는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종료 시점이 다가오자 수면 위에 올랐다. 게다가 지난해 말 옹진군이 서해5도 여건변화에 따라 서해5도 관련 사업 계획을 변경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기획재정부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옹진군과 옹진군의회가 반발하고 나섰다.옹진군의회는 지난해 12월 열린 제207회 제2차 정례회에서 '제2차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연장 마련 촉구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당시 홍남곤 옹진군의회 의원은 "우리 군이 행안부에 최저생계비 증가율, 물가 상승률 등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 서해5도에 대해 대폭 지원할 수 있도록 지속 건의했는데 여러 여건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과거처럼 북한의 위협이 늘 도사리는 여건이 아니라 4·27 판문점 선언 이후 서해5도가 평화의 섬으로 주목받으며 서해평화수역 조성이 가시권에 들어오는 만큼 서해5도의 지역 특성과 주민생활 안전대책을 반영한 종합발전계획을 지속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들은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용역 조속 수립을 촉구하며 용역 수행 기관의 일방적 청사진 수립이 아닌, 옹진군민의 의견이 반영된 실질적이고 장기적인 종합발전대책 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화와 안보가 공존하는 서해5도의 특성을 살린 사업을 추진하되 그 사업이 주민들의 실질적인 소득을 증대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 행정안전부는 '제2차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수립을 위해 내년께 용역 발주를 계획하고 있어 서해5도 주민을 위한 지원은 지속할 수 있을 전망이다. 옹진군과 주민들은 이번 계획에는 옹진군 주민들이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는 사업이 제시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또한 기존에 담긴 계획 중 실현이 불가능하거나 현실에 맞지 않는 사업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다.현재 2020년 종료를 앞둔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에 담긴 사업 78건 중 현재 완료됐거나 진행 중인 사업은 52건이다. 특히 민간 자본을 투입해 조성하는 사업은 대부분 진행되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평화관광육성 및 세계적 평화거점 조성'이라는 목적으로 백령도 남포리 일원에 국제회담장, 숙박시설, 출입국관리시설, 크루즈항, 골프장 등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남포리에 평화공원을 세우고 각종 편의시설에 민간 자본을 일부 투입할 구상이었다. 옹진군은 2021년부터 2030년까지 10년의 청사진이 담길 제2차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에는 이러한 사업을 축소·정리하고 주민들이 꼭 원하는 사업이 담기길 기대하고 있다.옹진군 관계자는 "1차는 대피소 마련, 정주 생활금 지원, 노후주택 개량 사업, 교육비 등에 그쳤고 아예 진행되지 못한 사업도 있었다"며 "이제는 남북 평화 분위기 변화에 따라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영구적인 평화 관련 사업과 관광 활성화 사업, 주민들이 실질적으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주민 소득 증대사업, 인프라 구축, 개발 사업 등에 초점을 맞추는 계획이 담길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 옹진군 연평도 전경. /옹진군 제공인천 옹진군 연평도에 설치된 현대식 대피시설. 비상진료소 등을 갖추고 있다. /옹진군 제공인천 옹진군 소연평도 전경. 이곳에는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에 따라 노후 주택 개량 사업이 진행됐다. /옹진군 제공남북관계 경색 국면 당시 포사격 훈련에 따라 백령도 대피소로 피난한 주민들. /옹진군 제공

2019-03-21 윤설아

[독립운동과 인천·(5)]석모도와 이안득

하바롭스크서 출생 '세미요노프軍' 반혁명군 활동하다 군법관부에 체포반일사상 고취·불온이유 '거주제한처분' 19살에 강화 석모리 일대 유배3·1운동 소식 접한뒤 감시에도 4월 7일 아이들 이끌고 만세외쳐 '징역형'곳곳서 주민들 동참행렬 '영향'… 이후 귀향 또는 월북 가능성 자료미미강화 석모도는 100년 전 3·1 운동과 관련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석모도에서 유배형을 받고 거주 제한 상태에 있던 독립운동가가 만세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그는 1900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이민자 2세로 태어난 이안득(李安得)이다.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그는 일제에 적발돼 19살의 어린 나이에 고향에서 1천㎞나 떨어진 강화군 석모도로 유배를 왔다. 이듬해 우리나라에서는 3·1 운동이 일어났고, 이안득은 유배지의 마을에서도 아이들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 횃불을 피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가 제공하는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에 따르면 이안득은 1900년 12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태어났다. 1800년대 중반 함경도와 평안도의 가난한 농민들은 농사지을 땅을 찾아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크라스키노 등 연해주 지역 주요 도시에는 한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됐다. '신편 강화사' 등 이안득을 기록한 역사서에서는 그의 본적을 함경남도 완산부로 표기하고 있는 데 그의 부모가 함경도 지역에서 농사를 짓다가 러시아로 거주지를 옮겨갔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제의 이안득에 대한 조사서류에도 그의 주소지는 '함경남도 완산부 이하 불명'이라고 적혀 있다. 일제는 이 이유에 대해 '본적이 불분명한 사람은 시베리아에서 태어나거나 십수 년 전에 국외로 떠난 사람이다'라고 명기했다.러시아에서 태어난 청년이 이역만리 강화도 석모도에 거주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국사편찬위원회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아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올려 놓은 이안득에 대한 '거주제한처분의 건'을 경인일보가 전문 번역가에게 의뢰해 해석한 그의 유배 사유는 이렇다."이들은 러시아 '세미요노프'군(軍)에 따라 지도관인 육군 대위 이광열(귀화 조선인)의 명령을 받아 각 부하에 속하는 조선인 군부에 대해 반일사상을 고취시키다 세미요노프 군법 관부에 체포됐다. 이 대위를 제외한 나머지 9명은 하얼빈(哈爾濱) 주재 제국 총영사에 인도되나 모두 품행 불량으로 친일 조선인을 적대시하고 평상시 동포를 능학(凌虐·업신여기고 학대함) 및 협박했으며 종종 일본군 기밀을 찾아내 적대 국민에게 누설했다. 이에 대정7년(1918년) 8월 19일 3년간 중국 재류 금지를 명했으며, 조선 내에서도 치안을 방해할 우려가 있어 보안법 제5조에 따라 거주 제한을 명한다."세미요노프군은 러시아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는 '반혁명군(백위군)' 중 하나로 바이칼호 동쪽 지역(동시베리아)인 자바이칼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부대다. 당시 혁명 정부는 제1차대전 종전을 위해 독일과 단독 강화에 나섰고 연합군에서 탈퇴했다. 연합군은 이러한 조치에 반발해 반혁명군 지원에 나섰다. 특히 일본은 1918년 8월 시베리아 전쟁을 일으키는 등 반혁명군에 무기나 자금을 제공한 연합군 국가 중 하나였다.반혁명군은 제정 러시아에 근무하던 군인이 주축이 된 부대다. 러시아에 살던 조선인 젊은 청년들은 일제와 전쟁을 벌이기 위한 군사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반혁명군에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안득도 이러한 이유로 반혁명군에 가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안득을 이끌었던 이광열은 육군 대위라는 계급을 고려하면 볼셰비키 혁명 이전부터 이곳에서 근무했을 가능성이 높다.만주와 러시아 지역 항일운동사 연구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1918년 8월부터 일제가 시베리아 전쟁을 일으키지만, 같은 해 초부터 반혁명군 지원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대대급 부대를 상륙시키는 등 전쟁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며 "제정 러시아군부터 근무하던 반혁명군 조선인 장교들은 일본이 지휘부를 지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전투 참가를 거부하거나 조선인 병사들과 탈영을 모의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이광열과 뜻을 함께한 조선인은 이안득을 포함해 9명이었다. 군법 관부에 체포된 이광열은 대위라는 계급 때문에 세미요노프군 지휘부가 총살 등의 방식으로 처리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안득 등 9명은 일본 영사관에 넘겨져 조선의 각 섬으로 흩어져 유배를 떠나게 된다. 당시 조선총독부 보안법 5조에는 "내부대신은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동작을 행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에게 그 거주장소로부터 퇴거를 명하거나 1년 이내의 기간 동안 특정한 지역에의 출입금지를 명할 수 있다"고 규정지었다. 재판을 통해서가 아닌 단순 행정처분 형태로 유배가 결정된 것이다. 반 교수는 "191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의 법률이 현대식으로 완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형이나 유배 등 조선시대 형벌을 그대로 적용하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1918년 9월 이안득과 이범우, 김창석은 인천 석모도와 영흥도, 백령도로 각각 유배됐고, 변원정과 황운삼, 문용운 등은 전라도 지도, 가좌도, 초도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강진제는 경상도 욕지도로, 전학만은 평안도 신미도, 민윤식은 충정도 안면도로 옮겨졌다.이안득은 강화군 삼산면 석모리 390-1번지 인근에 살았다. 이곳은 당시 석모도 주민 중 절반 정도가 살았던 지역이라고 한다. 이듬해 이안득은 3·1 운동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안득은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4월 7일 밤 마을 아이들을 이끌고, 마을 뒷산(현 석모도 삼봉산으로 추정)에 올라 횃불을 들고 '조선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삼산면장으로 근무하던 김동헌(金東憲)은 이날 시위에 대해 '성인이 3~4명뿐이었고, 나머지는 어린 학생들이었다는 보고를 들었다'고 상부에 진술했다.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2019년 3월 16일. 이안득이 살았던 석모리 390-1번지 일대를 찾았다. 그가 거주했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집터에는 단층 양옥집이 들어서 있었고, 바로 옆에는 내가성당 석모공소가 30년 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이날 석모리에서 만난 김정섭(88)씨는 "이 근처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유배된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거주지 옆에는 당시 이안득이 만세 운동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봉산이 있었다.까맣게 지워졌지만 이안득은 당시 석모도 지역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의 3·1 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4월 8일 밤 삼산면 석포리 교회당 앞에서 70~80명이 만세를 불렀다. 9일과 10일에도 성공회 교회당 뒤의 산꼭대기(현 석모도 해명산 추정)에서 마을 사람 20여명과 함께 횃불을 피우고 3·1 운동을 했다. 1906년 건립된 석포리 성공회 교회당은 당시에도 지역 주민들이 모이는 광장 역할을 했다고 한다.이안득은 1919년 8월 석모리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조선총독부 서류를 살펴보면 징역형 이후 자신의 고향인 하바롭스크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1922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외무대신에게 보낸 동향정보 서류에 이안득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하바롭스크의 공산당 단체로 들어가 활동했다고 적혀 있다. 남달우 인하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는 "1920년대부터 러시아와 중국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사회주의 사상이 퍼져나갔다"며 "하바롭스크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가 한국사회당을 조직한 지역이기 때문에 영향을 더 받은 것 같다"고 했다.이후 이안득의 이름이 나오는 공식 문서는 없다. 하바롭스크가 연해주 지역 조선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출발지였던 점을 고려하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북한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다. 이안득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절실하다.반병률 교수는 "당시 서류를 살펴보면 러시아 반혁명군에 활동하다 조선으로 유배 온 조선인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들에 대한 연구가 더 진행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이안득의 수형자 기록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이안득의 거주제한처분 서류 원문. /국사편찬위원회 제공한인들이 집단 이주해 거주했던 1918년 당시 하바롭스크 전경. /국사편찬위원회 제공독립운동가 이안득이 유배되었을 때 살았던 강화 석모도 동네. 뒤에 보이는 산은 이안득이 마을 아이들을 이끌고 만세 운동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봉산이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3-20 김주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