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2019 인천 송도국제마라톤]가을 해풍속 경쾌한 첫걸음… '내안의 레이스 본능' 깨웠다

■이모저모#인천지법원장은 '마라톤 마니아'○…인천지방법원 마라톤동호회 회원 23명과 함께 뛴 양현주 인천지법 법원장 눈길. '마라톤 마니아'로 알려진 양현주 법원장은 이날 인천지법 마라톤 동호회원들을 격려하며 10㎞ 코스를 완주. 인천지법의 한 직원은 "양 법원장이 평소 인천지법 동호회 활동을 적극 지원하며 참석하는데, 특히 마라톤을 좋아해 직원들과 가뿐히 뛰었다"며 흐뭇한 미소. 인천지방변호사회의 마라톤 동호회 '인천달변'(회장·김유명)도 이날 회원 40명이 참가. '인천달변' 변호사들은 지역 법조계 현안인 '인천고법 설치', '해사법원 유치' 등 문구를 가슴에 달고 질주. 이날 회원들과 함께 달린 이종린 인천지방변호사회 회장은 "인천고등법원이 신속하게 설치되고, 해사법원 유치까지 성사하길 염원하며 달렸다"며 "인천시민들이 편리하게 사법 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풀코스 100회 완주 '무쇠다리'○… 지난해 송도국제마라톤대회에서 풀코스 300회 완주자를 배출한 인천고마라톤클럽. 올해 대회에서도 장길석(55)씨가 풀코스 100회 완주 기록을 세워 2년 연속 경사. 장길석씨는 2014년 9월 풀코스 첫 완주를 시작으로 5년 만에 풀코스 100회 완주. 2005년 출범한 인천고마라톤클럽은 현재까지 풀코스 완주 700회 기록자를 배출하는 등 인천지역 고등학교 대표 마라톤 클럽으로 자리 잡는 중. 4년째 송도국제마라톤대회에 참여한 장길석씨는 "즐겁고 뛰자는 마음에서 시작한 마라톤인데, 벌써 42.195㎞를 100번이나 달렸다는 점에서 이번 대회는 매우 뜻깊은 대회"라며 "달릴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마라톤을 이어가겠다"고 소감.#10년째 출석도장 70대 노익장○…"10년 째 출석 도장 찍었습니다. 송도마라톤이 인천을 알리는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 올해 10회째를 맞은 송도국제마라톤대회에 한 해도 빠짐 없이 참가했다는 문연경(78·남동구 도림동)씨는 이날 10㎞ 코스에 도전하면서 송도마라톤 '홍보맨'을 자처. 그는 가슴에 '송도 마라톤 10회 참가'라는 문구를 붙이고 달리며 대회를 홍보 눈길. 문씨는 "짜임새 있는 행사로 참가자를 배려하는 대회라는 느낌을 받아 매년 참가하고 있다"며 "10년 동안 인천과 송도지역을 다른 곳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황영조 선수 깜짝 팬 사인회○…인천송도국제마라톤 10주년을 맞아 황영조 바르셀로나 올림픽(1992년) 금메달리스트의 깜짝 '팬 사인회'가 열려 참가자 호응. 마라톤 동호인들은 황영조 선수와 사진을 찍고 황 선수의 사인을 받기 위해 땀도 식기 전에 줄 서는 모습 연출. 이날 10㎞를 완주한 미추홀러너스클럽 소속 이종빈(58)씨는 '1번'으로 선수의 사인을 받아 흐뭇한 미소. 두 번째로 사인을 받은 동호인 안선옥(45·여)씨는 이날 입은 티셔츠 등에 사인 인증. 안 씨는 "평소 팬이었던 황영조 선수를 만나서 기쁘다. 그의 끈기 있고 열정적인 모습이 매력적이며 앞으로도 건강을 유지해 마라톤에 계속 참가하고 싶다"고 다짐. #길병원직원·가족 '651명 하나'○…인천 구월동에 있는 가천대길병원은 이날 직원, 가족들 651명 참가해 화합을 다져. 직원들은 직접 준비해온 풍선을 참가한 모든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즐거운 시간. 서승현(49) 총무과장은 "직원들이 많다 보니 여러 직종 간 모여 화합할 기회를 갖기 어려웠는데 이번 마라톤 대회를 통해서 소통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많은 직원이 마라톤대회에 꾸준히 참여했으면 한다"고 웃음. 세 딸과 함께 참여한 길병원 직원 서인자(42)씨는 "이번에는 5살 막내딸도 함께 걷기로 했다. 아이들이 힘들어해도 스스로 성취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고 올해로 3번째 참가하고 있다"고 웃음.몸푸는 건각들-2019 송도국제마라톤대회가 열린 29일 출발점인 인천대학교 운동장에서 참가한 건각들이 출발에 앞서 준비운동을 하고 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격려하는 내빈들-2019 송도국제마라톤대회가 열린 29일 인천대학교 출발점에서 안상수·민경욱·박찬대·이정미 국회의원,이용범 인천시의회 의장, 조동성 인천대 총장, 곽희상 인천시체육회 사무처장, 이태훈 가천대 길병원 의료원장, 최미리 가천대 부총장, 김양우 가천대 길병원 병원장, 이영재 경인일보 인천본사 사장 등 내빈들이 참가자들에게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유모차 어린이 "우리 아빠 파이팅"-대회에 참가한 한 아버지가 아이들을 태운 유모차를 끌며 송도2교 인근 1차 반환점을 통과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이색복장 외국참가자 풀코스 '손가락 하트'-젖소무늬 옷을 입은 외국인 참가자가 손가락 하트를 보이며 풀코스에 도전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9-29 경인일보

[독립운동과 인천·(28)]신간회 인천지회

사회·민족주의 협동… 1927년 12월 5일 지회 창립지역 인사 곽상훈·하상훈·권충일·이승엽 등 참여식민지 정책 비판 강연… 원산 총파업 뭍밑지원도유두희 등 노동운동… 간부들 청년단체활동 주도합법행동 제약·계열 갈등 심화 1931년 해소 결의1927~1931년 활동한 신간회(新幹會)는 비록 존속 기간은 짧았지만,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가장 강력했던 합법적 사회단체였다.신간회는 사회주의계열과 민족주의계열이 힘을 모은 항일 민족협동전선이었다. 신간회의 지방 지회조직은 한때 150여 개까지 확산했고, 회원 수는 4만여 명에 달했다.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신편 한국사'는 "양 세력의 협조와 협동 경험은 해방 이후 남북 분단이 계속되는 현재에도 귀중한 역사적 경험으로 역할할 수 있을 것" 이라며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이 만나 최대의 협동을 이뤘으나, 이후 양 세력 분열의 원형을 보여주는 신간회에 대한 검토는 남북이 분단된 지금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평가했다.인천에서도 1927년 12월 신간회 인천지회가 창립하면서 좌익 진영과 우익 진영 인사들이 합세해 항일 사회운동을 펼쳤다. 인천지역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곽상훈(郭尙勳·1896~1980), 하상훈(河相勳·1891~1964), 서병훈(徐丙薰·1888∼1949), 이범진(李汎鎭), 양제박(梁濟博) 등이 신간회 인천지회를 주도했다. 당시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유두희(劉斗熙·1901~1945), 고일(高逸·1903∼1975), 권충일(權忠一·1905 또는 1907~1950), 권평근(權平根·1900~1945), 이보운(李寶云) 등이 신간회 인천지회의 주축이었다. 해방 후 북한 초대 사법상을 지낸 거물급 공산주의자 이승엽(李承燁·1905~1954)도 신간회 인천지회 간부로 참여했다.동아일보 1927년 12월 8일자 신문을 보면, 신간회 인천지회 창립대회는 그해 12월 5일 오후 8시 내리(內里)의 인천금융조합에서 개최됐다. 입회 회원 67명 가운데 36명이 참석했다. 창립대회 준비위원 곽상훈이 개회를 선언했고, 신간회 중앙본부에서 파견한 독립운동가 이관용(李灌鎔·1894~1933)이 개회사를 했다. 이날 신간회 인천지회 회장은 하상훈이 선출됐고, 총무간사는 곽상훈과 유두희 등이 맡았다. 지회 사무실은 율목동 인천무도관(仁川武道館)으로 정했다.왜 신간회 인천지회 사무실을 인천무도관에 뒀을까. 인천 향토사학자들은 인천무도관 사범 유창호(柳昌浩)가 신간회 인천지회 간사로 참여했고, 한용단을 이끌었던 곽상훈 등 지역 스포츠계 인사들이 인천지회 핵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유도, 검도, 권투 등을 지도한 인천무도관은 지역 청년들이 몰려 신간회 참여를 독려하기 유리했고, 당시 스포츠는 민족의식을 키우는 활동으로 여겨지기도 했다.신간회 중앙본부가 1927년 1월 창립할 당시 확정한 강령은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 단결을 견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등이다. 전국 각 지역에서는 강연운동이 활발했다. 강연은 신간회가 민족운동의 당면과제로 삼았던 '농민 교양', '경작권 확보', '조선인 본위의 교육 확보',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획득 운동', '협동조합 운동 지지·지도'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일제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면서 사회 각 분야 민족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인천지회는 전국에서 시국강연회와 계몽강연회를 가장 활발하게 개최한 지회 중 하나로 꼽혔다. 하지만 인천지회의 구체적인 활동은 관련 문서나 언론 보도 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까지도 신간회 인천지회 관련 연구 성과가 드문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신간회 인천지회가 조직되기 전까지 인천지역에서 비슷한 역할을 했던 단체인 신정회(新正會) 관련 보도에서 신간회 활동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동아일보 1927년 6월 9일자 신문을 보면, '계급과 파벌을 타파한 전 인천적 집적단체'를 표방한 신정회는 1927년 6월 6일 창립총회를 열고 출범했다. 위원장은 하상훈이었고, 곽상훈, 고일 등 이후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을 주도하게 되는 좌우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신정회 강연 성황'이라는 제목의 1927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신정회가 홍예문 인근에 있던 인천공회당(仁川公會堂)에서 강연회를 개최한 내용이 실렸다. 청중 6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강연회에서는 김준연(金俊淵·1895~1971)이 연사로 나서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의 관계'를 주제로 강연했다. 김준연은 동아일보 주필을 지내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 때 사임한 독립운동가다.신정회는 같은 해 10월 9일 인천공설운동장(웃터골경기장)에서 '인천시민 대운동회'를 주최했는데, 동아일보는 1927년 10월 11일자 신문에서 시민 6만 명이 운집했다고 썼다. 이때 종목 중 하나였던 월미도 일주 마라톤에만 150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또 신정회는 1927년 9월 중국 선원들이 덕적군도에 있는 악험도(惡險島·현 선미도)를 습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진상조사를 위해 신정회 위원인 서병훈을 파견하기도 했다. 신정회의 후신 격인 신간회 인천지회도 이 같은 성격의 활동을 계속했을 것으로 보인다.신간회 인천지회는 1920년대 최대 규모 노동운동인 '원산 총파업'을 물밑에서 지원했다.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일어난 원산 총파업은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54개 노동조합 조합원 2천200여 명이 참가했다. 1928년 9월 함경남도 덕원군의 라이징선(Rising Sun) 석유회사에서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유조공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는데, 노동자 120명이 감독 파면과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한 것이 총파업의 발단이었다.일본인 사업주들이 중심인 원산상공회의소는 파업을 무력화하기 위해 인천에서 노동자 200여 명을 데려와 취업시켰고 어용노조도 조직했다. 인천에서 극우단체인 일본국수회(日本國粹會) 회원들이 원산으로 파견돼 노동자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인천에서 온 노동자들은 원산의 상황을 깨닫고 파업에 동참하기도 했다. 신간회 인천지회는 원산으로 향하는 인천 노동자들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연설활동을 했다. 1929년 1월 25일 곽상훈, 권충일 등 4명이 거리에서 연설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20여 일 동안 인천경찰서에 구류됐다. 유두희, 권평근 등은 인천지역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신간회 인천지회 간부들은 여러 청년단체 활동도 주도했다.신간회 인천지회 관련 자료를 모아온 향토사학자 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는 인천지회를 통해 좌익과 우익 인사들이 결집할 수 있었던 요인을 지연과 학연으로 봤다. 이성진 대표는 "신간회 인천지회 주요 인사들은 '인천 출신', '강화 출신', '영화학교(영화초등학교) 출신',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등학교) 출신'으로 서로 얽히고 묶였다"며 "이념이 다를지라도 한데 뭉쳐 활동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라고 분석했다.일제는 그 영향력이 점점 커진 신간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인천경찰서도 1930년 2월 12일 예정됐던 신간회 인천지회 정기대회를 금지했다. 2년 전까지도 인천지회는 같은 시기 문제없이 정기대회를 개최했었다.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창립 4년 4개월 만에 해소(解消)됐다. 합법적 단체로 적극적인 항일운동에 제약이 많고, 좌우 계열 간 갈등도 심해졌기 때문에 지회별 해소가 이어졌다. 인천지회는 1931년 2월 10일 해소를 결의했다. 해소진행위원은 권충일, 유창호, 곽상훈이었다. 앞서 유두희는 1928년 7월 일제의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옥에 갇혔다.이균영 동덕여대 사학과 교수가 1993년 쓴 '신간회 연구'에 실린 인천지회의 해소안 성명서를 보면, "주체성이 확대된 노동계급의식의 앙양으로 그 조직체의 결함과 오류를 인식하게 됐다"는 내용이 중심이다. 신간회 인천지회의 해산을 주도한 것은 화요회계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세력이었다. 그러나 이균영 교수는 인천지회에서는 민족주의계열인 곽상훈이 적극적인 해소론자로 구성하는 해소진행위원에 포함됐다는 점에서 타 지회처럼 우익 진영이 신간회 해산에 반대했다는 설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신간회 인천지회의 주역들은 해산 이후 각자 속한 노선에서 활동하며 갈라섰다. 전향한 뒤 일제에 협력한 몇몇 인사도 있었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꾸준히 전개한 권평근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입항하는 미군 환영 인파 속에 있다가 치안 유지를 내세우며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곽상훈, 하상훈, 양제박 등은 해방 이후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서병훈의 아들인 서정익(徐廷翼·1910∼1973)은 인천 동양방적의 유일한 한국인 기사였는데, 해방 이후에도 동양방적공사 이사장을 지내다가 1955년 인수해 동일방직을 설립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27년 12월 5일 신간회 인천지회 창립대회를 개최한 인천금융조합 건물. /인천시 역사자료관 제공인천의 첫 공립학교인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 신간회 인천지회 회원 중에는 이 학교 출신이 많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제공'신정회 강연 성황'이라는 제목의 1927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제공

2019-09-25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27)]삼연 곽상훈

17세때 동래서 이주…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 초대회장고유섭·조진만 등도 배출한 '문예부' 중심 문화활동 전개3·1운동 확산때 고향 만세시위 주도하다 체포돼 수감생활인천 최초 야구단 '한용단' 지역봉사 '소년군' 단장맡기도민족연합전선 신간회서 '계몽' 앞장… 해방후 정치인 행보삼연(三然) 곽상훈(郭尙勳·1896~1980)은 조봉암, 장면, 이승엽과 더불어 인천이 낳은 거물 정치인이다. 제헌국회부터 5번의 국회의원을 지내고, 국회의장,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맡았던 곽상훈은 우익 진영을 대표했다.곽상훈은 1919년 3월 경성고등공업학교 재학 중 고향인 부산 동래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일제강점기 때 인천을 기반으로 학생운동, 소년운동, 신간회 등 합법적으로 국민을 결집하고 실력을 기르자는 방향의 항일운동을 택했다. 그는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친일로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검찰관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야당 소속 정치인으로 굵직한 행보를 이어갔지만, 만년에는 5·16 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비판받은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곽상훈의 행적이다.곽상훈이 1972년 월간지 '세대'에 연재한 '삼연회고록'을 보면, 경성고등공업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17세 때 동래에서 인천으로 이주했다. 그는 인천에 사는 큰형 집에서 경인선을 타고 서울 경성고공으로 통학했다. 곽상훈은 회고록에서 "경인통학생으로서 아침저녁 불편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무렵부터 인천은 나의 제2 고향이 되어 주었다"고 했다.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학교로 통학하는 학생들은 경인철도를 탔다. 인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다닐 상급학교가 부족해 서울로 진학하는 경우도 상당수였다.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에는 경인선 기차 통학이 1915년 무렵부터 시작됐고, 통학생 수는 한국 학생이 200명, 일본 학생이 100명 정도였다고 나온다.서울로 통학하는 인천 학생들은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를 결성해 교류했고, 초대 회장은 곽상훈이 맡았다. 곽상훈은 학생들 사이에서 야구, 축구, 농구 등 운동을 잘하는 '만능 스포츠맨'으로 이름을 알렸다고 한다. 조선인을 무시하는 일본 학생을 "야구방망이로 늘씬하게 두들겨 주었다"는 일화도 남기는 등 경인통학생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던 게 친목회 초대 회장을 맡은 이유로 보인다. 교육기회를 얻은 학생들이 모인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는 특히 문예부를 중심으로 문화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한국 미학(美學)의 선구자라 불리는 우현 고유섭(1905~1944), 대법원장을 지낸 조진만(1903~1979),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 이길용(1899~?), 흑인시를 개척한 시인 배인철(1920~1947) 등이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 문예부 출신이다.최원식 인하대 명예교수는 2005년 펴낸 인천론집 '황해에 부는 바람'에서 "경인선은 일제의 군사적 목적 아래 계획됐지만, 뜻밖에도 인천의 문화 역량을 한층 북돋았으니, 그 첨병 노릇을 맡아 한 것이 바로 경인기차통학생들이었다"며 "일제의 침략 루트로 건설된 경인선을 오히려 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공간으로 탈환했다"고 평가했다.곽상훈은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자 경인통학생을 대표해 각처의 학생들을 동원했고,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의 동원 책임까지 지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인천상고 학생들과 만세시위를 하고 3월 10일께 고향인 동래로 내려갔다. 독립선언서 내용을 창호지에 베끼고, 노끈을 꼬아 숨겨서 가져갔다고 한다. 동래읍 장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미결수로 8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다가 풀려났다. 이 일로 곽상훈은 경성고공에서 퇴학당했다.곽상훈은 1920년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 소속 16~17세 학생을 중심으로 인천의 첫 야구단인 '한용단'(漢勇團)을 만들고, 자신은 단장을 맡았다. 한용단의 홈구장은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인 '웃터골경기장'(인천공설운동장)이었다. '인천 한 세기'를 보면, 한용단은 인천미두취인소가 주축인 '미신'(米信), 일본철도사무소의 '기관고'(機關庫) 등 일본인 팀과도 맞붙었다. 언론인 고일이 1955년 쓴 '인천석금'에서는 "야구대회가 있다고 소문만 나면 시민 팬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엿장수도 오고 지게꾼도 대섰다. 할머니도 '스트라익' 하고 할아버지도 '호무랑'(홈런의 일본어 발음) 소리를 외쳤다"고 당시 한용단의 한일 야구전 분위기를 전했다.인천시민들의 민족의식을 높였던 한용단은 1924년 해체됐다. 미신 팀과의 결승전에서 일본인 심판의 오심으로 우승을 놓쳤다며 흥분한 곽상훈 단장과 일본인 검도사범 기요다(淸田)가 몸싸움을 벌였는데, 이때 함께 분노한 한국인 관중들이 본부석으로 몰려가 일본인들과 충돌한 사건이 빌미가 됐다. 최원식 교수는 '황해에 부는 바람'에서 한용단을 가리켜 "운동경기의 외피를 쓰고 출현한 민족적 단결체"라고 했다.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 내 조선인들이 대대적으로 학살당했다. 곽상훈은 이듬해 9월 상해청년동맹회 주도로 열린 '제2회 관동진재 참사자 추도회'에 동경진재동포학살조사위원으로 참여해 한국인 희생자 명단을 입수하고, 학살사건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도쿄 현지 조사에도 나섰다. 곽상훈은 1925년 3월 초까지 상하이에서 청년 독립운동가 모임인 상해청년동맹회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했다. 애초 그가 의열단에 참여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인천으로 돌아온 곽상훈은 인천 소년군(보이스카우트) 단장을 맡으며 지역사회 활동을 재개했다. 1925년 7월 '송현리 갈밧 매축(매립)공사'로 인해 민가 30가구가 침수됐을 때 곽상훈 단장이 소년군을 인솔해 비를 맞으며 물을 빼는 공사를 돕고 철야 경계를 섰다고 동아일보 1925년 7월 15일자 신문에 보도됐다. 같은 해 8월 인천 소년군은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 희생자들의 추도식을 월미도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을축년인 1925년 7~9월 4차례에 걸친 집중호우로 한강, 금강, 낙동강, 대동강 등이 범람해 경성과 인천을 포함한 전국 곳곳에서 홍수 피해가 있었다. 홍수로 인한 사망자만 647명에 달했고, 2만3천호가 넘는 가옥이 유실·붕괴했다고 조선총독부는 집계했다.노영택 대구가톨릭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1979년 펴낸 '일제하 민중교육 운동사'에서 인천 소년군과 관련, "이들은 비록 소년들이었다 하지만, 단장 곽상훈의 지도 아래에 민족 문화운동의 한 분야로 소년운동을 전개했으니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그 기반이 되고 있다"며 "이 운동은 조직을 통해 합법적 방법으로 전개됐고, 시민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았다"고 했다. 곽상훈이 가장 공들인 활동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손을 잡은 민족연합전선 조직인 신간회였다. 그는 1927년 12월 신간회 인천지회 창립대회에서 총무간사를 맡았다. 하상훈(1891~1964) 등 우익 인사와 유두희(1901~1945), 권평근(1900~1945) 등 좌익 인사가 곽상훈과 함께 신간회 인천지회 주축이었다. 신간회는 강연활동이나 계몽운동 등 합법적인 방식으로 민족운동을 진행한 당시 국내 최대 좌우합작 단체였다. 곽상훈은 1929년 6월 신간회 중앙검사위원에 뽑혔고, 같은 해 10월에는 인천지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이 시기 일본의 감시대상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신간회는 1931년 5월 해산했는데, 곽상훈은 신간회 해산에 지속해서 반대하며 좌익과 우익의 공조를 주장했다.사회활동가로 신문 보도에 꾸준히 등장했던 곽상훈의 이름은 신간회 해산 이후부터는 찾기 어렵다. 곽상훈의 행적을 언론 등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은 해방 이후 정치판에 뛰어들면서부터다.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된 곽상훈은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으로 항일투쟁 경력을 인정받아 반민특위 검찰관에 임명됐다. 1949년 백엽문화사가 출간한 '반민자 죄상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기로 악명 높았던 일제강점기 고등계 경찰인 김태석(1882~?)의 재판 장면이 나온다. 검찰관 곽상훈이 김태석을 재판에 넘겼다.김태석은 재판에서 독립운동가 강우규(1855~1920)를 체포해 고문한 사실을 계속 부인하고, 체포한 게 아니라 강우규가 자수했다고 잡아뗐다. 당시 격분한 곽상훈은 재판장과 방청객들에게 "이때까지의 피고인 진술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참으로 성현의 말과도 같고, 가장 애국자 같이 보인다"며 "이렇기 때문에 본 재판을 가장 공정하게 진척시키려면 먼저 피고인의 머리를 정신분석하여 정신이상 유무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라고 소리친다. 곽상훈은 김태석에 대해 고등경찰 때 애국지사를 체포한 혐의와 경남 참여관 겸 산업부장을 역임할 때 조선 청년들을 출병시킨 혐의로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김태석에게는 무기징역과 50만원 재산 몰수형이 선고됐고, 1950년 한국전쟁 직전 석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899년 경인선 개통 당시 열차로 모여든 군중 모습. 경인선은 서울로 통학하는 인천 학생들의 교통수단이었다. /인천시사 제공1928년 한용단 모습. 1924년부터 한용단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게 되면서 고려야구단이라는 이름을 썼다. /인천야구 한 세기 제공삼연 곽상훈 선생. /경인일보DB1924년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불령단관계잡건' 문서. 곽상훈이 상해청년회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조사 활동을 한 것과 관련한 보고 문건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1930년 11월 일본 경찰이 작성한 감시대상 인물카드로 가장 위에 있는 인물이 곽상훈이다. 나머지 3명은 신간회 회원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부산 동래고등학교(옛 동래고보) 교정에 있는 곽상훈 흉상. 곽상훈은 동래고보를 졸업한 뒤 서울 경성고공으로 진학했다. /동래고 제공

2019-09-18 박경호

[zoom in 송도]인천경제구역 아트시티 조성사업

국제도시 정주 환경·국내외 투자 유치 활성화자문위 예산 29억… 우수 미술작품 공모 제작센트럴파크 일대에 설치 문화·소통의 장소로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우수한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하는 사업이 추진된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이 같은 내용의 '인천경제자유구역(IFEZ) 아트시티 조성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고 8일 밝혔다. IFEZ 아트시티 조성사업은 국제문화도시 정주 환경 조성과 투자 유치 활성화를 위한 것이다. 도시의 예술적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공공미술 작품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계획됐다.IFEZ 아트시티 조성사업은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에 설치하는 미술 작품과는 차원이 다르다. 관련 법에 따라 연면적 1만㎡ 이상 건축물은 건축비의 약 1%를 미술 작품 설치에 사용해야 한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송도컨벤시아와 아파트 단지 등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에 설치된 미술 작품은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에 따른 것"이라면서 "이번 사업은 IFEZ의 문화적 감수성과 예술적 창의성을 나타내며 IFEZ만의 특별함을 경험할 수 있는 우수한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사업 대상지는 송도 센트럴파크 일원으로, 주된 장소는 '아트센터 인천' 인근이다.인천경제청은 시민과 관광객이 많이 방문하는 공원 부지에 우수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할 계획이다. 총사업비는 29억4천만원이다. 인천경제청은 지난 6~7월 IFEZ 아트시티 조성사업 실행계획을 수립하고 자문위원회를 구성·운영했다. 지난달에는 우수 공공미술 작품 공모 계획을 세웠다. 현재 우수 공공미술 작품 공모 및 계약을 위한 행정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연내 업체 선정·계약이 이뤄지고, 내년부터는 제작·설치 작업이 추진된다. 내년 11월 사업을 완료하겠다는 것이 인천경제청 계획이다.인천경제청은 우수 공공미술 작품을 공모할 때 장르, 규모, 작품 수 등을 제한하지 않을 방침이다.이는 작가와 기획자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활동과 전문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작가와 기획자가 전체 공간을 이해하고 주위 환경과 어우러지는 작품을 설치하는 방향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인천경제청은 시민들이 친근하고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밝고 경쾌한 이미지의 작품을 선정할 계획이다. 또 일방적인 감상보다는 체험 등 관람자의 능동적인 참여와 상호작용이 가능하면서 실용적 기능을 갖춘 작품을 희망하고 있다. 단순히 미술 작품만 설치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시민 문화 활동과 소통의 장소로 활용하겠다는 취지다.인천경제청은 명성 있는 유명 작가의 참여로 예술성과 화제성을 확보하겠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송도 등 IFEZ가 명실상부한 국제도시가 되기 위해선 문화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이를 위해 인천경제청은 IFEZ 아트시티 조성사업, 세계 대표 축제 발굴·개발사업, 아트센터 인천 1단계(콘서트홀)에 이어 2단계(오페라하우스·뮤지엄) 건립사업 등을 추진 중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9-09-08 목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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