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인천바로알기종주 19번째 발걸음]백령~대청~소청도 '100㎞ 대장정' 출발

인천의 중·고교생이 대학생 멘토 등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인천지역을 걷는 제19회 인천바로알기종주가 28일 시작됐다. 이번 종주는 인천 도심을 떠나 서해 5도에 속하는 백령도와 대청도, 소청도를 걸으며 섬 지역의 역사를 둘러보는 섬 종주로 진행된다. 경인일보는 종주단과 함께 걸으며 그 여정을 기록한다. → 편집자 주 제19회 인천바로알기종주단이 이날 오후 발대식을 열고 6박7일 여정을 시작했다. 발대식이 열린 연안초등학교 강당에는 종주단 참여자들과 가족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발대식에서 참여자들은 종주 일정과 규칙 등에 대해 설명을 듣고 필요한 물품을 지급받았다.이동열 인천바로알기종주단 단장은 "올해 인천바로알기종주는 인천 내륙을 걸었던 이전 프로그램과는 달리 처음으로 섬 지역만 방문하는 코스로 구성했다"며 "서해 최북단에 있는 백령도와 대청도, 소청도를 둘러보며 청소년들과 시민들이 우리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했다.단원 중에는 무릎 부상에도 불구하고 참여한 학생이 눈길을 끌었다. 산곡남중학교 3학년인 우민수군은 "가지 못할까 걱정이 돼 잠을 못 잤는데 치료를 해준 의사 선생님과 무리하지 않기로 약속해 참여하게 됐다"며 "친한 친구가 지난해 종주를 다녀와서 좋았다고 해 같이 왔는데, TV로만 봤던 섬들을 직접 보고 느낄수 있다니 기대가 크다"고 했다.종주단원들은 이날 연안초등학교에서 1박 야영을 한 뒤 '인천연안여객터미널~백령도~사곶해수욕장~콩돌해안'(29일), '남포리~중화동~소갈동~연화리공소~두무진~사향포~대갈동'(30일), '사곶해변~백령면사무소~물범바위~대청노송보호지대~옥죽포모래사막~대진동해변~옥죽동~대청7리'(31일), '서내동~러브브릿지~동백나무자생북한지~모래울해변~광난두정자~서풍받이~고주동~대청성당'(8월1일), '미아동해변~농여해변~옥죽동~옥죽동해변~대청6리~대청성당'(8월 2일), '대청도선착장~소청도선착장~분바위~소청도선착장~인천출발'(8월 3일)의 약 100㎞ 코스를 도보로 답사한다. /박현주기자 phj@kyeongin.com28일 오후 인천시 중구 연안초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제 19회 인천바로알기종주단 발대식에서 단원들이 완주를 다짐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7-28 박현주

[독립운동과 인천·(21)]김세원·윤원 형제

1902~1905년 사이 떠난 8500여명중멕시코서 조국 되찾기 앞장서 의미인천은 우리나라에서 공식 이민이 시작된 지역이다.1902년부터 1905년까지 65차례에 걸쳐 8천500여명의 한국인이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해외로 이주했다.65차례 이민 가운데 딱 한 번 멕시코로 이민을 간 사람들이 있다. 첫 멕시코 이민자 1천33명은 1905년 4월4일 멕시코로 가는 배에 몸을 싣고 인천항을 떠났다. 이들 중에는 인천 강화 출신 김세원(1870~?)·윤원(1877~1920) 형제가 있었다.하지만 이들의 이민은 사실상 사기계약이었다. 멕시코 농장주들은 약속했던 임대주택과 임금을 주지 않았고, 한국인들은 새벽 4시부터 어두울 때까지 쏟아지는 땡볕아래서 에네켄 잎을 자르고 섬유질을 벗겨냈다. 하루 일감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채찍질도 가해졌다.계약 만료로 노예와 같은 생활이 끝난 1909년 이들은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들은 돌아갈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해외 이주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했다. 독립 자금을 모으고 학교를 세웠다. 김세원·윤원 형제도 대한인국민회 임원으로 활동하며 한인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이들의 독립운동은 1920년대 쿠바로 이주한 이후에도 계속됐다.이들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해선 추가적인 연구가 절실한 상황이다.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한민보'를 통해 단편적인 사실만 전달될 뿐이다. 멕시코로 떠난 서울·경기지역 201명의 행방이 묘연하다. 이들 중 인천지역 독립운동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한국이민사박물관 신은미 관장은 "멕시코·쿠바 등 중남미 지역 독립운동 특별전시회를 열기 위해 사료 발굴을 진행하고 있으나, 많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체계적인 연구가 추가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7-2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1)]김세원·윤원 형제

일제 침략 가속화에 한국인 노동자들 '해외로' 강화 출신 형제도 1905년 멕시코行고임금 커녕 처참한 노예생활… 고생끝 '자유몸'불구 나라 뺏겨 돌아갈 곳 없어져 김윤원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초대 총무 활동 독립자금 모금·한글학교 세워형 세원 1921년 쿠바로 이주 임시정부 지원 이어가… 정부 공로 인정 표창등 수여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던 1900년대 초반. 한국인들은 먹고 살길을 찾기 위해 미국 하와이와 멕시코 등으로 떠났다. 1902년 12월 22일 한국인 노동자를 실은 배가 인천 제물포항을 떠난 이후 3년여 동안 65차례에 걸쳐 8천500여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미국 하와이와 멕시코 등지로 이주했다.낯선 땅에 터를 잡은 이들은 하루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이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한 자금을 보내고, 후손들이 나라를 잊지 않도록 교육에도 힘썼다.초기 해외 이주민 대부분이 하와이로 향했기 때문에 멕시코 이민자들의 독립운동사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멕시코 이민자들도 하와이 이민자 못지않게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인천 강화 출신인 김세원(1870~?)·윤원(1877~1920) 형제가 바로 멕시코 이민자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그러나 이들의 고향인 인천에서 김세원·윤원 형제는 사실상 잊힌 존재다. 인천의 독립운동가로서 이들의 생애와 독립운동 궤적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북미 멕시코국은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水土)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나쁜 병질이 없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바다. 그 나라에는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 극히 어려워 근년에 일(日)·청(靑) 양국인이 단신 혹은 가족과 함께 건너가 이득을 본 자가 많으니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한국과 멕시코는 통상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으나 최혜국으로 대우할 것이다.'1904년 12월 24일 황성신문에 게재된 광고 내용이다. 당시 광고를 실은 회사는 일본에 본사를 둔 대륙식민회사 한국지부다. 영국계 멕시코인 존 마이어스(John G. Mayers)는 '에네켄(henequen)' 농장이 노동자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자 조선인의 멕시코 이민을 추진했다. 에네켄은 밀가루 포대를 묶는 끈과 선박용 밧줄의 재료로 사용됐다. 19세기 말부터 에네켄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지만, 당시 멕시코 노동 계층이었던 마야인의 생산성으로는 소비자들의 요구를 맞추기 어려웠다. 이에 에네켄 농장주들은 조선인을 노동자로 채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대륙식민회사는 손쉽게 목표 인원을 모을 수 있었다. 당시 대륙식민회사는 노동자들에게 하루에 최대 3원을 지급한다고 광고했다. 당시 한국인 근로자 하루 임금이 85전임을 고려하면 3배가 넘는 금액인 셈이다. 이들은 대륙식민회사에 한 가족당 4파운드(독신자 1파운드)를 내고 멕시코행 배에 올랐다. 당시의 금 30g의 가격은 4파운드였는데, 한국인 노동자들은 현재 1천126파운드(약 165만원)에 달하는 거금을 지불하고 멕시코로 이주했다.1905년 4월 4일 영국 선적의 '샌 일포드(S.S.Ilford)'호는 인천항을 떠나 멕시코로 출발했다. 당시 인천주재 일본영사였던 가토 모토시가 일본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이 배에는 1천33명의 조선인이 타고 있었다. 이 중에는 김세원·윤원 형제도 있었다.이들은 일본 요코하마를 거친 38일간의 항해 끝에 멕시코 남부 살리나크루즈 항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하루를 머문 그들은 멕시코 유카탄주로 기차를 타고 이동해 그곳에서 에네켄 농장에 보내졌다. 1906년에 멕시코 유카탄주 대농장의 주인이었던 라파엘 페온이 유카탄주 지사에 보낸 보고서를 보면, 당시 유카탄주의 16개 구역 가운데 14개 구역에는 모두 32개의 농장이 분포했다.멕시코에서의 생활은 이들이 꿈꾸던 것과 달랐다. 사실상 노예 신분으로 멕시코로 이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멕시코 에네켄 농장은 채무노예제도 형태로 운영됐다. 형식적으로는 자유고용계약이지만, 실제로 대농장주에게 채무가 있는 노예 형태로 일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채무를 다 갚기 전에는 거주 이전에 자유가 없고, 농장주 간 매매도 이뤄졌다. 참고 견디며 일했지만,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임대주택과 식량도 직접 돈을 주고 구매해야 했다. 대부분 노동자는 일할수록 빚만 늘어나는 나락에 빠졌다. 황성신문은 1905년 7월 29일 자 사설을 통해 당시 한인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족의 노예 등급은 5∼6등급, 한인 노예는 7등급으로 가장 낮은 값이다. 조각난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다. 아이를 팔에 안고 등에 업고 길가를 배회하는 한국 여인들의 처량한 모습은 가축같이 보이는데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실정이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해서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농노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도다. 통탄, 통탄이라."이 신문은 7등급 노예로 전락한 한인들의 참상을 보도하고, 이틀 후 고종의 이민정책을 비판하는 사설도 게재했다. 당시 고종은 눈물을 흘리며 송환 계획을 세웠지만, 일본의 방해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기사로 더는 멕시코에 노동자를 보내지 않았고, 110년 전 사기극은 그렇게 단 한 차례로 막을 내렸다. 4년의 계약 기간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됐지만, 이들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1905년 8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기면서 나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민자들은 가족이 있는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09년 8월 멕시코 이주민들은 당시 한인들의 중심지였던 유카탄주 메리다시에서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를 설립한다.대한인국민회는 헤이그 특사였던 이상설이 미국에 사는 한인 동포단체의 통합을 요청하면서 만들어진 '협성협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멕시코 이민자들 가운데 김윤원 등 일부는 4년의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 남은 채무를 모두 지급해 풀려났다. 이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대한인국민회 총회와 교류하면서 메리다지방회 창립을 준비했고, 모든 이민자의 계약이 끝나자 메리다지방회를 만들었다. 당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하던 신한민보에서는 초기 회원은 314명이었다고 한다.김윤원은 메리다지방회의 초대 총무·재무로 선출되면서 독립을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1917년 메리다지방회는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인 안창호가 멕시코를 방문하자 미화 2만4천달러를 모금해 전달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도형 책임연구위원은 "1910년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면서 당시 (멕시코) 국내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에 따라 한국인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는 등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음에도 나라의 독립을 위한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설명했다.멕시코 이주민들은 자신의 고생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후손에게 모국어와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독립정신과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한글학교를 세웠다. 멕시코 오학기나로 이주한 김윤원은 현지 한국인들과 함께 '일신학교(日新學敎)'를 설립한다. 일신학교는 70~80명의 아이들이 공부하는 소학교와 20명의 청년이 배우는 야학교로 구성됐다.한인 지역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김윤원은 1920년 맹장염으로 숨을 거둔다. 그가 타계하자 신한민보에서는 그의 유족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다. 김윤원이 멕시코 한인사회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김윤원의 형인 김세원은 1921년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쿠바로 이주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설탕값이 폭등하게 되고, 사탕수수 재배가 기간 산업이었던 쿠바 노동자들의 임금도 상승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쿠바로 넘어간 멕시코 이민자는 300여명에 달한다. 그는 1923년 쿠바 카르데나스 지방에서 강흥식, 허영보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 지방회를 설립한다.쿠바에는 모두 3개의 대한인국민회가 조직돼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 쿠바 이민자 임천택이 1954년 발간한 '쿠바이민사'에 따르면 이들이 1938년부터 1945년까지 8년 동안 임시정부에 보낸 성금은 1천489원 70전에 달한다. 1930년대 쌀 1㎏ 가격이 25전임을 고려하면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임금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던 이민자들은 모든 것을 아껴가면서 조선의 독립을 위한 자금을 보낸 것이다.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 '하와이와 멕시코, 쿠바 등지의 교포에서 편지로 금전적 도움을 얻어 이봉창 의거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고 적었다. 해외 이주민이 보낸 독립자금이 큰 힘이 된 것이다.김세원과 김윤원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과 2016년 각각 건국포장과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한인회에서 활동한 기록만 남아 있을 뿐, 구체적인 자료는 전혀 없는 상황이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신은미 관장은 "김세원·윤원 형제가 이민 2세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한인회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보낸 것을 고려하면 더 다양한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교류가 없던 기간이 길어서 사실상 자료 발굴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관련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김윤원 지사. /크리스천해럴드 제공대한일보에 실린 멕시코 이주민 모집 광고.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쿠바 이주 한인노동자들의 모습.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김세원이 활동하던 쿠바 대한인국민회 카르데나스지방회 회관 모습. 현재 한인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2019-07-2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0)]조광원 신부

美국방성 신문에도 활약상 소개사이판 참전 해병 "그는 구세주"대법원의 강제노역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해석되는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조치로 한일 양국은 물론 세계가 시끄럽다.일본 정부가 공개한 통계를 토대로 우리 정부가 추산한 태평양전쟁 강제동원 인원은 782만여명에 달한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제외한 것이어서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이들 대부분은 태평양전쟁에 일본군과 노동자로 강제동원돼 이름도 모르는 섬에서 죽어갔다.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를 구해낸 인천의 독립운동가가 있다. 인천 강화 출신 조광원(1897~1972) 신부다.미국 하와이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그는 1944년 미 해병대 종군 신부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전투현장에서 수많은 조선인을 구출했다.조광원 신부의 영웅 같은 활약상은 당시 미 국방성이 발행한 '스타스 앤드 스트라이프스(Stars And Stripes)' 신문에도 소개됐다. 당시 신문은 '길버트와 마셜 제도의 선두에서 수천 명의 조선인이 전사하는 중에, 사이판에서는 조광원 신부에 의해 여러 명의 포로가 구출됐다'고 보도했다. 사이판 전투에서 조광원 신부와 53일간 생활한 미 해병대의 한 병사는 그를 '구세주'라고 불렀다고 한다.조광원 신부에 대해 연구한 대한성공회 석광훈 신부는 "조광원 신부가 해병대로 태평양전쟁에 참여한 것은 조국의 해방은 물론 조선인을 구해야 한다는 종교인으로서의 그의 사명 때문이었다"며 "조광원 신부에 대한 체계적이고 폭넓은 연구가 지금 시점에서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7-17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인터뷰]일본 교토 성공회성당 마쓰야마 겐사쿠 부제

"당시 조선의 성공회는 사실상 독립운동을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광원 신부는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최일선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이었습니다."일본 교토 성공회성당 마쓰야마 겐사쿠(松山 建作) 부제는 지난 16일 경인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조광원 신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2015년 '미국성공회의 한인교회와 조광원-하와이파송과 항일독립운동'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을 계기로 대한성공회에서 조광원 신부를 재조명하는 사업이 진행됐고, 2017년에는 온수리 성공회성당에 기념비도 세워지게 됐다. 마쓰야마 부제는 "2009년 1년 동안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환학생으로 수업을 받으면서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강의를 들었다"며 "해외에 이주한 한인들이 독립운동에 대해 공부하다가 성공회 사제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마쓰야마 부제는 "개신교는 원래 반민족주의를 기초로 하는 만민주의를 기반으로 하지만, 지역과 시기에 따라서는 국가와 민족의 아이덴티디가 강하게 드러난다"며 "당시 조광원 신부는 식민지 지배 아래 있던 조선인 종교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활동으로 독립운동을 생각했다"고 설명했다.해방 후 일본 고베에서 목회 활동을 이어간 조광원 신부는 일본인에게도 존경받는 성직자였다는 게 마쓰야마 부제의 설명이다. 그는 "해방 직후였기 때문에 일본인들 사이에선 조선인을 무시하는 풍조가 팽배했지만, 그는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신도들에게 다가가 이를 극복해 냈다"며 "고베 지역의 나이 많은 신자 중에선 조광원 신부 때문에 성공회로 개종했다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을 정도"라고 했다.마쓰야마 부제는 "조광원 신부는 한국과 일본 성공회 사회에서 모두 존경받는 지도자"라며 "그를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7-17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0)]조광원 신부

1897년 강화도 출생 어릴적부터 성공회 다녀고교 졸업하던 해 3·1운동 준비중 발각돼 피신적극적 전도활동 1923년 신자중 최초 하와이 파견2년여 노력끝 호놀룰루에 '조선인 성당' 건립 '조 신부가 탄 보트가 차란카노이(사이판)에 상륙했을 때, 일본군 대포와 박격포탄이 바로 그의 등 뒤 물속에서 터지고 있었다. (중략) 포격이 멈추기도 전인데 신부는 비전투원 포로수용소로 날아갔다. 거기서 일본군에 강제징집된 한국인 병사들을 만났다. 조 신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가갔다. "미국 사람을 겁내지 마시오." 그는 자기 모국어로 말했다'.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4년 9월. 미 해병대가 치른 '사이판 전투'에 소위로 참전한 종군기자 짐 루카스(Jim Lukas)가 미 국방성에서 발행하는 '스타스앤드스트라이프스(Stars And Stripes)' 신문에 실은 '노아 신부가 사이판의 해변을 강타'라는 제목의 기사 중 일부분이다.이 기사의 주인공은 조광원(1897~1972) 신부다. 그는 인천의 독립운동가다. 인천 강화도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동기들과 함께 3·1 운동을 준비했고, 졸업 후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자금을 모았다. 태평양전쟁에는 미 해병대 종군신부로 참전해 능통한 일본어로 대일 선전공작 활동을 벌였고, 강제 징집돼 전선에 투입된 조선인 동포를 구하는 데 힘썼다.1897년 강화도 온수리에서 태어난 조광원 신부는 어린 시절부터 성공회 신자로 자랐다. 성공회는 같은 개신교 계통의 장로회·감리교보다 5년 정도 늦은 1890년대 초반부터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유입됐다. 이 때문에 장로회나 감리교가 아직 전도 활동을 제대로 시작하지 않았던 강화도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벌였다는 게 성공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강화공립보통학교(현 강화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조광원 신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났다. 졸업을 앞둔 조광원 신부와 동기들도 3·1 운동을 준비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거리에 배포하고, 내리교회와 내동 성공회성당의 종을 울리는 것을 신호로 거리행진을 벌일 계획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거사는 사전에 발각됐다. 조광원 신부 생전에 출간한 '인고 77년사'를 통해 그는 "기가 막히고 원통한 일이었습니다. 일본 형사들의 추격을 받자 우리는 즉시 각자 해산, 피신하게 된 것이죠. 그 즉시 나는 강화로 피신하게 됐습니다. 원통한 일이었습니다.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이때 체포당한 동지들, 같은 반 학우들은 학생으로 2개월 형을 받기도 했습니다"라고 당시의 심경을 전했다.졸업 후 일본계 은행에 취직한 조광원 신부는 국내 성공회의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았다. 1921년 그는 성공회 전도를 위해 만들어진 '전도장려부' 기초위원 3명 중 1명으로 선임됐다. 성공회 평신도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조광원 신부의 모습은 당시 대한성공회 주교인 트롤로프(M.N.Trollpe·1862~1930)의 눈에 띄었고, 그는 조선에서 세례를 받은 성공회 신자 중 처음으로 1923년 12월 하와이에 파견되었다.일본 교토 성공회성당 마쓰야마 겐사쿠(松山 建作) 부제가 쓴 '미국 성공회의 조선인 교회와 조광원 -하와이로의 월경과 항일 독립운동'에 따르면 조광원 신부가 하와이에 도착할 당시 이곳 성공회 신자들은 조선인 신도만을 위한 성당 설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1923년 하와이에는 80여 명의 조선인 교인이 있었지만, 다른 성공회성당에 더부살이하는 처지였다고 한다. 조광원 신부의 2년여의 노력 끝에 호놀룰루에 '성 루가 성당'을 지었고, 하와이 조선인 성공회 신도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성당을 소유할 수 있게 됐고, 우리말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대조선독립단 가입해 자금 모금·전달 일제만행 알려태평양전쟁 터지자 1944년 美 해병대 입대전장 누비며 '강제 징집' 한국인 포로 구출 '활약'1999년 애족장 추서… 온수리 성당에 기념비 세워조광원 신부는 조국의 독립을 돕고자 박용만(1881~1928)이 설립한 대조선독립단에도 가입했다.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인물로 무장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조광원 신부는 대조선독립단 하와이총지부 위원으로 활동하며 박용만이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중국 베이징(北京)에 세운 '대본농간공사'에 자금을 보내는 역할을 했다. 조광원 신부 등 하와이 교민이 모은 독립자금은 중국 본토와 만주 등지의 독립군 훈련 비용으로 사용됐다. 조광원 신부의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계속됐다. 이와 함께 '태평양시사'와 '국민보'를 간행해 일제의 만행을 우리 동포에게 알리고 독립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했다.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조광원 신부는 '한인자위단(韓人自衛團)'을 조직해 일본인 첩자를 색출해 당시 미국 국방성 지부가 있는 LA로 보냈다. 조광원 신부는 당시 함께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이 일을 '작은 복수'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1944년 조광원 신부는 미 해병대에 입대했다. 입대하기 전 그는 국민보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일본이 우리들의 토지 조선을 훔친 지 무려 40년이다. 몸을 던져 피를 흘려보면 그 피에 의해 되찾은 땅의 권리는 영원할 것이다. 죽자. 피를 흘리자. 피의 가치에 권리가 있고, 사상이 있으며, 독립이 있다'.조광원 신부는 전선 최일선에서 일본군의 포탄이 쏟아지는 속에서도 부상자들을 의료소로 데려갔다. 또 포로수용소에 있는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구출했다. 당시 신문 기사에서는 '조 신부는 자신이 무서워하는 것을 잊고 "미국인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에게 의식을 공급하고, 의료로서 구조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미국 사람들은 우리에게 잔혹한 벌을 준다고 들었다"고 조선인이 물으니 조 신부는 "아닙니다. 미국인들은 나의 친구이며, 따라서 여러분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학대를 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설명했다'고 밝히고 있다.일본 정부가 공개한 통계를 토대로 우리 정부가 추산한 태평양전쟁 강제동원 인원은 782만7천355명에 달한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제외한 것이다.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조광원 신부가 태평양전쟁에서 구한 조선인들은 이처럼 강제로 징집된 사람이었다. 하와이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인 이원순(1890~1993) 전 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광원 신부는)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1944년 사이판 섬 공략에 참전, 탄우 속을 헤치고 징용당한 동포들을 구출해 미국까지 후송했다. 당시 미 해병대 신문은 장문의 기사를 게재했는데, 길버트나 마셜제도 전투에서는 수천명의 한국인들이 일본군과 함께 죽어갔으나 사이판에서는 조 신부의 활약으로 많은 한국인이 구출됐다고 설명했다"고 조광원 신부의 활동에 대해 평가했다. 정부는 1999년 조광원 신부에게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017년에는 조광원 신부가 해방 이후 관할사제로 시무했던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에 그를 기념하는 비석도 세워졌다. 조광원 신부는 해외에서도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애썼다. 목회 생활을 하는 도중 힘들게 번 돈을 독립을 위한 자금으로 보냈고, 전쟁터를 누비며 조선인 구출에 나섰다. 조광원 신부를 연구한 대한성공회 석광훈 신부는 "종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활동해야 한다. 조광원 신부는 이러한 종교의 목적에 가장 부합해 살다간 분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는 조광원 신부에 대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조광원 신부가 미국 하와이 '성 루가 성당' 앞에서 신도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조광원 신부 유족 제공조광원 신부가 유년시절 다녔던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강화 온수리 성공회 성당에 있는 조광원 신부 기념비. /대한성공회 제공

2019-07-17 김주엽

아름다운 세상 그려나갈 미래의 주인공

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22회 바다그리기대회 시상식이 11일 오후 2시 인천시교육청 대회의실에서 진행됐다. 올해 바다그리기대회는 지난 5월 25일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과 인천항갑문, 월미도 문화의거리 등 3곳에서 펼쳐졌다. 3만6천여명의 학생과 학부모가 행사장을 찾아 1만2천여점의 작품이 출품됐다.인천예술고등학교 2학년 오다경(국회의장상)양, 인천장도초등학교 6학년 정지안(해양수산부장관상)양 등 대상 수상자 8명을 비롯해 수상자 50여명과 가족·친지 등이 시상식에 함께 참석해 이들의 수상을 축하했다.허종식 인천시균형발전정무부시장은 "인천은 바다와 맞닿아 있는 도시임에도 시민들이 바다를 접하기는 힘든 도시다. 경인일보 바다그리기대회가 시민들이 바다를 담아내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며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는 미래에는 바다를 더 가깝게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이날 시상식에는 허종식 인천시 균형발전정무부시장, 이용범 인천시의회 의장, 안병배 인천시의회 부의장, 윤성태 가천문화재단 이사장, 이태훈 가천대 길병원 의료원장, 최병국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전광용 인천시교육청 교육국장, 황순형 선광문화재단 사무국장, 심재규 인천해역방어사령부 참모장, 전충남 인천해수청 항만개발과장, 이영재 경인일보 인천본사 사장 등이 참석해 수상자들을 격려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22회 바다그리기 대회 시상식'이 11일 오후 인천시교육청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수상자들이 시상식에 참석한 내빈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7-11 김성호

[인천경영포럼]이석연 前 법제처장 "국가가 민간기업 경영 통제안돼"

헌법 경제민주화 조항 앞세워 개입 '자유주의' 규정 넘어설 수 없어진흥·육성 등 법률, 폐지 바람직정부가 시장경제에 과도하게 개입해 국내 경제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석연 전 법제처장은 11일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제407회 조찬강연회에 강사로 나와 이같이 주장했다.이 전 처장은 "현 정부가 헌법 119조 2항 '경제민주화' 조항을 앞세워 조정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이(경제민주화 조항)를 이념적 차원에서 접근하면 경제는 악화되고 그 부담과 피해는 국민들에게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헌법 119조 2항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줄여서 '경제민주화' 조항이라 부른다.이 전 처장은 경제민주화 조항이 헌법에 명시된 '자유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고 강조했다. 헌법 119조 1항은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돼 있다. 경제민주화 조항을 이유로 헌법의 기본 질서를 무너뜨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경제민주화 조항이 '할 수 있다'로 끝나는 점을 들면서 '보충적인' 조항이라고 강조했다.이 전 처장은 "국가가 민간 기업 경영을 간섭하거나 통제하면 안 된다"며 "국가가 시장경제에 관여하면 시장경제가 자율적 조정 능력을 상실할 수 있다. 이는 IMF 사태와 같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했다. 이어 "경제와 관련해 기업 '진흥', '육성', '발전' 등의 명칭이 붙어 있는 법률은 정부가 기업 경영에 관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폐지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했다.이 전 처장은 정부의 복지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자율을 전제하는 평등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자유를 대체하는 평등은 의미가 없다"며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접하는 것이 평등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모든 것을 '평균화', '일원화'하는 정책이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11일 인천경영포럼 조찬강연회 강단에 선 이석연 전 법제처장은 "헌법에 나와 있는 '경제민주화' 조항(119조 2항)은 보충적 개념이며, 이를 이루기 위해 헌법의 기본 이념인 '경제 질서'(119조 1항)를 흔들면 안 된다"고 했다. /인천경영포럼 제공

2019-07-11 정운

[독립운동과 인천·(19)]한성임시정부와 홍진

고향 아닌데도 인천에 묻히길 원해시립박물관 기념전 등 재조명 활발"靑年 同胞(청년 동포)여 病(병)든 나라 고치는 病院(병원)의 일꾼이 되자."인천에서 태동한 한성 임시정부의 산파 역할을 했던 홍진(洪震·1877~1946)의 묘비명 중 일부다. 1931년 그가 중국 길림성에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에 했던 말을 묘비에 새겨 넣었다. 그는 독립운동을 고통받는 대한민국을 치료하는 것과 동일시했다.구한말 검사와 변호사를 지낸 법조인 출신 홍진은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자유공원)에서 열린 13도 대표자 비밀 회합을 주도하며 한성 임시정부 수립의 기틀을 닦았다. 홍진은 인천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한성 임시정부 수립의 중요한 절차를 인천에서 진행했고, 1946년 9월 사망 후에는 인천 땅에 묻히길 원했다. 인천 관교동·문학동 일대에 집안의 선영(先塋)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가 인천을 특별히 여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아쉬운 점은 1946년 9월 13일 홍진이 묻힌 곳이 인천 어딘지가 정확히 남아 있지 않다는 거다. 홍진의 무덤은 1984년 12월 5일 인천 문학동에서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했고, 1994년 10월 6일 같은 국립묘지 내 임시정부 요인 묘역으로 한 차례 더 옮겨졌다.인천시립박물관이 유족으로부터 홍진의 묘비를 기증받아 그를 기리고는 있지만,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 표시라도 남겨 놨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그의 묘비는 사망 두달 뒤에 건립됐다. 묘비에는 대한민국 28년 11월 9일에 건립됐다고 쓰여있는데 대한민국 28년은 임시정부 수립 해인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삼아 계산한 햇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올해 홍진이 인천에 남긴 발자국을 뒤쫓는 작업이 인천 지역사회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학계에서 홍진을 주제로 토론이 이뤄지고 있고, 인천시립박물관은 홍진 기념 전시회를 열고 있다. 홍진은 인천의 인물로 평가받아야 마땅한 독립운동가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7-10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19)]한성임시정부와 홍진

서울출신 홍진, 의병사건 처리에 '회의' 검사 접고 '만세운동'임정수립 주도 헌법 결정등 '역사적 태동 장소'로 인천 선택 日 감시 피하려 '서울밖', 관교·문학동 선영있는 홍진과의 인연외국조계 밀집 국제적 상징성등 '만국공원 회의' 해석 '분분'올해 수립 100년을 맞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크게 3개의 뿌리에서 출발했다. 중국 상해 임시정부와 노령(露領) 임정이라 불리는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그리고 국내의 한성 임시정부다. 한성 임시정부의 출발점이 바로 인천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지금의 자유공원)의 13도 대표자 비밀 회합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태동했고, 그 중심에는 독립운동가 홍진(洪震·1877~1946)이 있었다. 홍진은 조선 말기 1877년 8월 지금의 서울 서소문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홍면희(洪冕憙)였는데 중국으로 망명을 가면서 이름을 홍진(洪鎭)으로 바꿨다가 다시 '鎭(진압할 진)'을 '震(벼락 진)'으로 바꿨다.갑오개혁과 제국주의 침탈을 경험한 그는 근대 문물에 관심을 가졌고, 법관의 길을 택했다. 1903년 27세의 나이로 법관양성소에 입학해 1906년 충청북도 재판소 검사로 임명됐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던 의병 사건을 처리하는 데 회의를 느껴 검사 생활을 청산하고, 1908년 평양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전국을 뒤덮은 1919년 3월 국내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의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었다. 홍진은 충청북도 청주군 연락책임자로 만세운동에 가담했고, 이규갑과 함께 국내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했다. 이규갑은 충남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3·1 운동 당시 평양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변호사 홍진과 연을 맺었다.홍진과 이규갑은 분산된 만세운동 단체를 하나로 합쳐 임시정부를 수립해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각 지역과 종교계, 학생 대표들을 끌어모아 '비밀독립운동본부'를 만들어 3월 17일 현직 검사 한성오의 서울 집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했다. 여기서 정부 이름을 '한성 임시정부'라 짓고,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 이동휘를 국무총리 총재로 뽑았다. 이규갑은 그의 회고록 '한성임시정부 수립의 전말'에서 "한성정부를 해외 망명정부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임명한 각원들도 전부 그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애국지사들로 충당했다"고 설명했다.문제는 한성정부 수립을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선포하느냐였다. 홍진은 지역의 대표를 소집해 지금의 국회 개념인 13도 대표자 회의를 열어 한성정부 조직안을 통과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어 13도 대표자들이 주도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해 정부 수립을 공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거사를 치를 장소로 인천 만국공원을 택했다.13도 대표자 비밀 회합이 왜 인천에서 열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나온다. 당시 3·1 운동과 한성 임시정부 관련자의 재판기록(공판시말서)을 보면 당시 일제는 이들이 경찰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서울을 벗어난 것으로 추정했다. 1919년 11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진행된 공판에서 조선총독부 검사는 전남 영암 출신의 재력가이자 한성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에 이름을 올렸던 한남수에게 "서울에서 집합하면 경찰의 눈에 띄므로 인천에서 집합한다는 말이 있었는가"라고 물었다. 또 "요릿집에서는 칸막이 너머로 들리니 만국공원에 모이는 것이 비밀이 보장되므로 각 대표자 등을 모아서 임시정부를 만들고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상의를 하기로 했었는가"라고 묻기도 했다.회합을 주도한 홍진과 인천의 남다른 인연 때문에 인천에서 회합이 개최됐다는 해석도 설득력이 있다. 홍진은 조선 후기 명문 사대부 집안인 풍산 홍씨로 선영이 인천 관교동·문학동 일대에 있었다. 인천지역 학계에서는 지금의 미추홀구 백학초등학교에서 연경산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체육공원과 제2경인고속도로 교각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진은 실제 1946년 숨을 거두기 전 인천 선영에 안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인천 선영에 안치됐다가 1985년 동작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인천개항장연구소 강덕우 소장은 "회합의 장소로 서울이 아닌 인천을 택한 것은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제강점기 전까지 외국의 조계가 밀집했던 만국공원의 국제적 상징성을 고려한 결정으로도 여겨진다"고 했다. 또 "돌이켜보면 인천에 홍진의 선영(先塋)이 있었던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상해 임정 소식에 中 넘어가 노령등과 3곳 통합 이끌어임시의정원 의장등 역임 1946년 사망… 1962년 독립장 추서1984년 국립묘지로 이장 묘비 인천시립박물관 옮겨져표지석 없어 선영내 무덤 정확한 위치 확인안돼 '아쉬움'4월 2일 만국공원 회합은 철저한 비밀 회합이었기 때문에 참석자들은 손가락을 흰 천이나 종이로 감싼 것을 표식으로 삼았다. 하지만 3·1 운동 직후 어느 때보다 감시가 삼엄했던 터라 20명 내외의 대표가 참석했을 뿐 많은 이가 참여하지는 못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을 보면 당시 천도교 대표 안상덕, 기독교 대표 박용희·장붕·이규갑·홍면희(홍진)·권혁채, 유림 대표 김규 등이 참석했고 지방대표는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날 13도 대표자회의는 미리 마련한 임시정부 조직안과 헌법을 통과시켰고, 4월 23일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정부 수립을 선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파리강화회의에 나설 인물도 정했다. 13도 대표자 명의로 된 국민대회 취지서와 정부 요인 명단, 선포문 등을 인쇄해 종로 보신각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일 계획도 짰다.국민대회는 4월 23일 종로에서 계획대로 열렸지만 이를 주도한 홍진은 정작 참석하지 못했다. 홍진은 당시 해외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상해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이 추진된다는 소식을 듣고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4월 중순 중국으로 넘어갔다. 덕분에 홍진은 일제가 한성 임시정부 가담자를 잡아들였을 때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 검사가 한남수 등 가담자에게 홍진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궁하고 관계를 캐물은 공판 기록은 홍진이 한성 임시정부에서 차지한 위상을 짐작케 했다. 성냥갑에 각료 명단을 숨겨 압록강을 건넜던 그 무렵 홍면희라는 이름을 버리고 '홍진'으로 개명했다. 홍진이 상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4월 11일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였다. 상해 임시정부 내부에서는 한성정부를 인정할지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고, 홍진은 밀정으로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홍진은 임시정부의 통합을 위해 애썼다. 상해와 노령 임시정부가 서로 근거지를 어디로 둘 것인지를 두고 갈등을 빚을 때 한성 임시정부의 존재가 비로소 부각됐다. 상해 임시정부가 한성을 중심으로 통합하자고 제안했고, 노령 측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3개의 임시정부가 하나가 된 것이다. 1919년 9월 6일 임시의정원(지금의 국회)에 제출된 통합안과 새 헌법이 통과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다.이후 홍진은 임시의정원에서 3번의 의장을 역임했고, 내부 갈등을 빚고 있던 상해와 노령 출신들의 좌우 합작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했다. 또 2021년 11월 극동 지역 군비 축소를 논의하는 워싱턴 태평양 회의에 참가하는 열강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하는 등 외교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또 1925년에는 4대 국무령으로 부임해 임시정부를 이끌기도 했다. 좌우 합작에 의한 민족유일당 건설을 주도하기도 했고, 해외 독립단체들과 한국독립당을 결성해 광복군 편성 추진에 기여했다.홍진은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 요인 2차 환국 때 귀국했다. 해방정국에서 그는 민족의 자주성 수호를 위해 반탁을 지지했고, 반탁운동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돼 건국 사업에 투신했다. 그러다 1946년 9월 9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홍진의 영결식은 9월 13일 명동 천주교성당에서 열렸다. 이승만, 김구를 비롯한 당대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했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1천여명의 군중이 모여 고인의 넋을 기렸다. 영결식이 끝난 뒤 그의 유언대로 시신은 인천 선영에 안치됐다. 대중일보와 동아일보 9월 14일자 신문은 홍진의 장례 소식을 이같이 보도했다. 정부는 1962년 홍진에게 독립장을 추서했다.홍진의 무덤에는 묘비가 함께 세워졌는데 1984년 동작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될 때 인천시립박물관 측이 유가족의 허락을 얻어 당시 중구 송학동에 있던 박물관 앞마당으로 옮겨왔다. 당시 박물관이 자유공원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만국공원 회합의 주인공인 홍진의 묘비를 놓기에는 가장 제격인 곳이었다. 하지만 박물관이 묘비를 이전하면서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표지석을 남겨놓지 않아 지금으로선 홍진의 무덤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다. 시립박물관은 1990년 옥련동으로 이전한 뒤 홍진의 묘비를 수장고에 보관해 오다 올해 3·1운동, 임시정부 100년을 맞아 일반에 공개했다. 그리고 박물관 2층 작은 전시실에서 '만오 홍진, 100년의 꿈을 쓰다'라는 주제의 홍진 특별전을 만국공원 회합이 있던 날인 4월 2일부터 10월 27일까지 연다. 인천시립박물관 이희인 유물관리부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반이 된 한성정부의 수립과 그 가운데 중추적 역할을 한 홍진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전시를 열었다"며 "홍진의 묘비는 가끔 야외 전시를 하기도 했으나 보존 문제로 수장고에 보관하다가 100주년을 맞아 전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홍진의 무덤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지는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1942년 대한민국 제34회 의정원의원 일동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홍진이고 5번째가 백범 김구다. /국가보훈처 제공국민대회 취지서와 홍진의 국무령 취임을 보도한 독립신문 1926년 9월 3일자. /한시준 저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홍진' 발췌홍진의 영결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9월 14일자와 대중일보 9월 14일자 신문.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미추홀도서관 제공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인천시립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는 홍진의 묘비. /인천시 제공임시의정원 100주년을 맞아 지난 4월 10일 국회에 건립된 홍진의 흉상. /국회 제공

2019-07-10 김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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