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인천경영포럼]이석연 前 법제처장 "국가가 민간기업 경영 통제안돼"

헌법 경제민주화 조항 앞세워 개입 '자유주의' 규정 넘어설 수 없어진흥·육성 등 법률, 폐지 바람직정부가 시장경제에 과도하게 개입해 국내 경제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석연 전 법제처장은 11일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제407회 조찬강연회에 강사로 나와 이같이 주장했다.이 전 처장은 "현 정부가 헌법 119조 2항 '경제민주화' 조항을 앞세워 조정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이(경제민주화 조항)를 이념적 차원에서 접근하면 경제는 악화되고 그 부담과 피해는 국민들에게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헌법 119조 2항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줄여서 '경제민주화' 조항이라 부른다.이 전 처장은 경제민주화 조항이 헌법에 명시된 '자유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고 강조했다. 헌법 119조 1항은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돼 있다. 경제민주화 조항을 이유로 헌법의 기본 질서를 무너뜨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경제민주화 조항이 '할 수 있다'로 끝나는 점을 들면서 '보충적인' 조항이라고 강조했다.이 전 처장은 "국가가 민간 기업 경영을 간섭하거나 통제하면 안 된다"며 "국가가 시장경제에 관여하면 시장경제가 자율적 조정 능력을 상실할 수 있다. 이는 IMF 사태와 같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했다. 이어 "경제와 관련해 기업 '진흥', '육성', '발전' 등의 명칭이 붙어 있는 법률은 정부가 기업 경영에 관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폐지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했다.이 전 처장은 정부의 복지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자율을 전제하는 평등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자유를 대체하는 평등은 의미가 없다"며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접하는 것이 평등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모든 것을 '평균화', '일원화'하는 정책이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11일 인천경영포럼 조찬강연회 강단에 선 이석연 전 법제처장은 "헌법에 나와 있는 '경제민주화' 조항(119조 2항)은 보충적 개념이며, 이를 이루기 위해 헌법의 기본 이념인 '경제 질서'(119조 1항)를 흔들면 안 된다"고 했다. /인천경영포럼 제공

2019-07-11 정운

[독립운동과 인천·(19)]한성임시정부와 홍진

고향 아닌데도 인천에 묻히길 원해시립박물관 기념전 등 재조명 활발"靑年 同胞(청년 동포)여 病(병)든 나라 고치는 病院(병원)의 일꾼이 되자."인천에서 태동한 한성 임시정부의 산파 역할을 했던 홍진(洪震·1877~1946)의 묘비명 중 일부다. 1931년 그가 중국 길림성에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에 했던 말을 묘비에 새겨 넣었다. 그는 독립운동을 고통받는 대한민국을 치료하는 것과 동일시했다.구한말 검사와 변호사를 지낸 법조인 출신 홍진은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자유공원)에서 열린 13도 대표자 비밀 회합을 주도하며 한성 임시정부 수립의 기틀을 닦았다. 홍진은 인천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한성 임시정부 수립의 중요한 절차를 인천에서 진행했고, 1946년 9월 사망 후에는 인천 땅에 묻히길 원했다. 인천 관교동·문학동 일대에 집안의 선영(先塋)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가 인천을 특별히 여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아쉬운 점은 1946년 9월 13일 홍진이 묻힌 곳이 인천 어딘지가 정확히 남아 있지 않다는 거다. 홍진의 무덤은 1984년 12월 5일 인천 문학동에서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했고, 1994년 10월 6일 같은 국립묘지 내 임시정부 요인 묘역으로 한 차례 더 옮겨졌다.인천시립박물관이 유족으로부터 홍진의 묘비를 기증받아 그를 기리고는 있지만,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 표시라도 남겨 놨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그의 묘비는 사망 두달 뒤에 건립됐다. 묘비에는 대한민국 28년 11월 9일에 건립됐다고 쓰여있는데 대한민국 28년은 임시정부 수립 해인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삼아 계산한 햇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올해 홍진이 인천에 남긴 발자국을 뒤쫓는 작업이 인천 지역사회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학계에서 홍진을 주제로 토론이 이뤄지고 있고, 인천시립박물관은 홍진 기념 전시회를 열고 있다. 홍진은 인천의 인물로 평가받아야 마땅한 독립운동가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7-10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19)]한성임시정부와 홍진

서울출신 홍진, 의병사건 처리에 '회의' 검사 접고 '만세운동'임정수립 주도 헌법 결정등 '역사적 태동 장소'로 인천 선택 日 감시 피하려 '서울밖', 관교·문학동 선영있는 홍진과의 인연외국조계 밀집 국제적 상징성등 '만국공원 회의' 해석 '분분'올해 수립 100년을 맞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크게 3개의 뿌리에서 출발했다. 중국 상해 임시정부와 노령(露領) 임정이라 불리는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그리고 국내의 한성 임시정부다. 한성 임시정부의 출발점이 바로 인천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지금의 자유공원)의 13도 대표자 비밀 회합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태동했고, 그 중심에는 독립운동가 홍진(洪震·1877~1946)이 있었다. 홍진은 조선 말기 1877년 8월 지금의 서울 서소문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홍면희(洪冕憙)였는데 중국으로 망명을 가면서 이름을 홍진(洪鎭)으로 바꿨다가 다시 '鎭(진압할 진)'을 '震(벼락 진)'으로 바꿨다.갑오개혁과 제국주의 침탈을 경험한 그는 근대 문물에 관심을 가졌고, 법관의 길을 택했다. 1903년 27세의 나이로 법관양성소에 입학해 1906년 충청북도 재판소 검사로 임명됐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던 의병 사건을 처리하는 데 회의를 느껴 검사 생활을 청산하고, 1908년 평양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전국을 뒤덮은 1919년 3월 국내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의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었다. 홍진은 충청북도 청주군 연락책임자로 만세운동에 가담했고, 이규갑과 함께 국내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했다. 이규갑은 충남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3·1 운동 당시 평양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변호사 홍진과 연을 맺었다.홍진과 이규갑은 분산된 만세운동 단체를 하나로 합쳐 임시정부를 수립해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각 지역과 종교계, 학생 대표들을 끌어모아 '비밀독립운동본부'를 만들어 3월 17일 현직 검사 한성오의 서울 집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했다. 여기서 정부 이름을 '한성 임시정부'라 짓고,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 이동휘를 국무총리 총재로 뽑았다. 이규갑은 그의 회고록 '한성임시정부 수립의 전말'에서 "한성정부를 해외 망명정부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임명한 각원들도 전부 그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애국지사들로 충당했다"고 설명했다.문제는 한성정부 수립을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선포하느냐였다. 홍진은 지역의 대표를 소집해 지금의 국회 개념인 13도 대표자 회의를 열어 한성정부 조직안을 통과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어 13도 대표자들이 주도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해 정부 수립을 공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거사를 치를 장소로 인천 만국공원을 택했다.13도 대표자 비밀 회합이 왜 인천에서 열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나온다. 당시 3·1 운동과 한성 임시정부 관련자의 재판기록(공판시말서)을 보면 당시 일제는 이들이 경찰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서울을 벗어난 것으로 추정했다. 1919년 11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진행된 공판에서 조선총독부 검사는 전남 영암 출신의 재력가이자 한성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에 이름을 올렸던 한남수에게 "서울에서 집합하면 경찰의 눈에 띄므로 인천에서 집합한다는 말이 있었는가"라고 물었다. 또 "요릿집에서는 칸막이 너머로 들리니 만국공원에 모이는 것이 비밀이 보장되므로 각 대표자 등을 모아서 임시정부를 만들고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상의를 하기로 했었는가"라고 묻기도 했다.회합을 주도한 홍진과 인천의 남다른 인연 때문에 인천에서 회합이 개최됐다는 해석도 설득력이 있다. 홍진은 조선 후기 명문 사대부 집안인 풍산 홍씨로 선영이 인천 관교동·문학동 일대에 있었다. 인천지역 학계에서는 지금의 미추홀구 백학초등학교에서 연경산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체육공원과 제2경인고속도로 교각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진은 실제 1946년 숨을 거두기 전 인천 선영에 안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인천 선영에 안치됐다가 1985년 동작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인천개항장연구소 강덕우 소장은 "회합의 장소로 서울이 아닌 인천을 택한 것은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제강점기 전까지 외국의 조계가 밀집했던 만국공원의 국제적 상징성을 고려한 결정으로도 여겨진다"고 했다. 또 "돌이켜보면 인천에 홍진의 선영(先塋)이 있었던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상해 임정 소식에 中 넘어가 노령등과 3곳 통합 이끌어임시의정원 의장등 역임 1946년 사망… 1962년 독립장 추서1984년 국립묘지로 이장 묘비 인천시립박물관 옮겨져표지석 없어 선영내 무덤 정확한 위치 확인안돼 '아쉬움'4월 2일 만국공원 회합은 철저한 비밀 회합이었기 때문에 참석자들은 손가락을 흰 천이나 종이로 감싼 것을 표식으로 삼았다. 하지만 3·1 운동 직후 어느 때보다 감시가 삼엄했던 터라 20명 내외의 대표가 참석했을 뿐 많은 이가 참여하지는 못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을 보면 당시 천도교 대표 안상덕, 기독교 대표 박용희·장붕·이규갑·홍면희(홍진)·권혁채, 유림 대표 김규 등이 참석했고 지방대표는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날 13도 대표자회의는 미리 마련한 임시정부 조직안과 헌법을 통과시켰고, 4월 23일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정부 수립을 선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파리강화회의에 나설 인물도 정했다. 13도 대표자 명의로 된 국민대회 취지서와 정부 요인 명단, 선포문 등을 인쇄해 종로 보신각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일 계획도 짰다.국민대회는 4월 23일 종로에서 계획대로 열렸지만 이를 주도한 홍진은 정작 참석하지 못했다. 홍진은 당시 해외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상해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이 추진된다는 소식을 듣고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4월 중순 중국으로 넘어갔다. 덕분에 홍진은 일제가 한성 임시정부 가담자를 잡아들였을 때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 검사가 한남수 등 가담자에게 홍진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궁하고 관계를 캐물은 공판 기록은 홍진이 한성 임시정부에서 차지한 위상을 짐작케 했다. 성냥갑에 각료 명단을 숨겨 압록강을 건넜던 그 무렵 홍면희라는 이름을 버리고 '홍진'으로 개명했다. 홍진이 상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4월 11일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였다. 상해 임시정부 내부에서는 한성정부를 인정할지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고, 홍진은 밀정으로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홍진은 임시정부의 통합을 위해 애썼다. 상해와 노령 임시정부가 서로 근거지를 어디로 둘 것인지를 두고 갈등을 빚을 때 한성 임시정부의 존재가 비로소 부각됐다. 상해 임시정부가 한성을 중심으로 통합하자고 제안했고, 노령 측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3개의 임시정부가 하나가 된 것이다. 1919년 9월 6일 임시의정원(지금의 국회)에 제출된 통합안과 새 헌법이 통과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다.이후 홍진은 임시의정원에서 3번의 의장을 역임했고, 내부 갈등을 빚고 있던 상해와 노령 출신들의 좌우 합작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했다. 또 2021년 11월 극동 지역 군비 축소를 논의하는 워싱턴 태평양 회의에 참가하는 열강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하는 등 외교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또 1925년에는 4대 국무령으로 부임해 임시정부를 이끌기도 했다. 좌우 합작에 의한 민족유일당 건설을 주도하기도 했고, 해외 독립단체들과 한국독립당을 결성해 광복군 편성 추진에 기여했다.홍진은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 요인 2차 환국 때 귀국했다. 해방정국에서 그는 민족의 자주성 수호를 위해 반탁을 지지했고, 반탁운동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돼 건국 사업에 투신했다. 그러다 1946년 9월 9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홍진의 영결식은 9월 13일 명동 천주교성당에서 열렸다. 이승만, 김구를 비롯한 당대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했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1천여명의 군중이 모여 고인의 넋을 기렸다. 영결식이 끝난 뒤 그의 유언대로 시신은 인천 선영에 안치됐다. 대중일보와 동아일보 9월 14일자 신문은 홍진의 장례 소식을 이같이 보도했다. 정부는 1962년 홍진에게 독립장을 추서했다.홍진의 무덤에는 묘비가 함께 세워졌는데 1984년 동작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될 때 인천시립박물관 측이 유가족의 허락을 얻어 당시 중구 송학동에 있던 박물관 앞마당으로 옮겨왔다. 당시 박물관이 자유공원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만국공원 회합의 주인공인 홍진의 묘비를 놓기에는 가장 제격인 곳이었다. 하지만 박물관이 묘비를 이전하면서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표지석을 남겨놓지 않아 지금으로선 홍진의 무덤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다. 시립박물관은 1990년 옥련동으로 이전한 뒤 홍진의 묘비를 수장고에 보관해 오다 올해 3·1운동, 임시정부 100년을 맞아 일반에 공개했다. 그리고 박물관 2층 작은 전시실에서 '만오 홍진, 100년의 꿈을 쓰다'라는 주제의 홍진 특별전을 만국공원 회합이 있던 날인 4월 2일부터 10월 27일까지 연다. 인천시립박물관 이희인 유물관리부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반이 된 한성정부의 수립과 그 가운데 중추적 역할을 한 홍진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전시를 열었다"며 "홍진의 묘비는 가끔 야외 전시를 하기도 했으나 보존 문제로 수장고에 보관하다가 100주년을 맞아 전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홍진의 무덤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지는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1942년 대한민국 제34회 의정원의원 일동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홍진이고 5번째가 백범 김구다. /국가보훈처 제공국민대회 취지서와 홍진의 국무령 취임을 보도한 독립신문 1926년 9월 3일자. /한시준 저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홍진' 발췌홍진의 영결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9월 14일자와 대중일보 9월 14일자 신문.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미추홀도서관 제공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인천시립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는 홍진의 묘비. /인천시 제공임시의정원 100주년을 맞아 지난 4월 10일 국회에 건립된 홍진의 흉상. /국회 제공

2019-07-10 김민재

[인천의 얼굴·(15)]한전 배전운영부 이동균 과장

전선 점검·수리…시민들 위해 위험감수비 잦고 태풍 도사리는 여름철 '초비상'전기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시대입니다. 산소 같은 존재이지만 그 전기는 무서운 놈이기도 합니다. 매일 전기와 싸우는 한국전력공사 인천지역본부 배전운영부 이동균(48) 과장은 출근할 때마다 가족들한테 '조심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전봇대에 올라 끊어진 전선을 잇거나 점검하는 일이 엄청나게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전기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 있습니다. 피복이 벗겨진 전선이 몸에 닿을 때가 있는데 망치로 세게 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 전기와 마주한다는 것, 두려움 자체입니다.고 이가림 시인은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지하철을 움직이게 하는 전기를 빗대어 '2만5천 볼트의 사랑'이란 작품을 남겼습니다. 시인은 2만5천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지하철에는 그 2만5천 볼트만큼의 뜨거운 사랑과 고독이 넘실거린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동균 과장에게는 '2만5천 볼트의 무서움'입니다. 이 과장의 그 무서움이 있기에 시민들은 '2만5천 볼트의 편리함'을 누리는 것이겠지요.일하는 데 가장 힘든 시기인 여름철입니다. 감전을 막기 위해 고무 소매와 고무장갑이 있기는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전기는 물을 만나면 악마로 변하지요. 비가 자주 오고 땀도 많이 나는 여름은 그래서 더욱 힘이 듭니다. 비 오는 날 전선을 만지게 되면 몸에 난 털이라는 털은 죄다 곤두설 정도입니다. 태풍이라도 오는 날이면 초비상이 걸립니다.요즘 새로 만들어지는 도시에서는 전봇대를 찾아보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구도심에는 여전히 전봇대입니다. 차량이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길에서는 꼼짝없이 전봇대에 매달려 작업을 해야 합니다. 두 배로 힘이 들지요. 이동균 과장은 강화 교동 출신입니다.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나왔습니다. 곧바로 전기업체에 취직했습니다. 1995년 경력직으로 한전에 입사해 여태 일하고 있습니다. 글/공승배기자 ksb@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7-09 공승배

[zoom in 송도]인천도시철도망 '송도국제도시 관련노선' 어떻게 추진되나

인천1호선 신국제여객터미널 연장노선정책적 관점 구축 필요 '후보노선' 분류서울 접근 향상 'GTX-B 예타' 연내완료인천남부순환선·'In-트램' 송도 연결도인천 송도국제도시 현안 중 하나가 '교통'이다. 특히 철도 건설과 버스 노선 신설 등 대중교통을 확충해달라는 민원이 많다. 송도 지역 온라인 커뮤니티와 인천시 시민청원 게시판에는 교통 문제에 관한 글이 많이 올라온다. 인천시는 지난 5월 '제2차 인천 도시철도망구축계획 수립 용역'(2021~2040년)에 착수했다. 한국교통연구원, (주)도화, (주)유신이 용역을 수행하고 있다. 용역은 내년 11월 완료될 예정이다. 제1차 인천 도시철도망구축계획(2016~2035년)은 지난해 12월 확정됐다. 제1차 인천 도시철도망구축계획에 반영된 사업을 토대로 송도 관련 노선을 알아봤다. → 지도·표 참조현재 송도를 경유하는 노선은 인천도시철도 1호선뿐이다. 캠퍼스타운, 테크노파크, 지식정보단지, 인천대입구, 센트럴파크, 국제업무지구 등 6개 역사가 송도에 있다. 송도 내부를 'V'자 형태로 통과한다.인천시 도시철도건설본부는 인천 1호선을 송도랜드마크시티(송도 6공구)까지 연장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내년 12월 개통 예정이다.도시철도건설본부에 따르면 송도랜드마크시티 연장선 토목 공사는 81% 정도 진행됐으며, 올 상반기 전기·신호·통신 공사가 시작됐다.본부 관계자는 "내년 12월 개통을 목표로 차질 없이 추진되고 있다"고 말했다.인천 1호선을 송도랜드마크시티에서 신국제여객터미널까지 연장하는 노선은 '후보노선'이다. 후보노선은 편익비용(B/C)이나 계층적 분석(AHP)값이 기준치를 넘지 못했으나, 정책적 관점에서 구축이 필요한 노선을 말한다.B/C값 0.7 이상 또는 AHP값 0.5 이상 등 기준치를 넘은 노선은 '대상노선'(법정노선)이라고 한다.인천 1호선 신국제여객터미널 연장선 B/C값과 AHP값은 각각 0.62, 0.132다. 현 상황에선 사업 추진이 어렵다는 얘기다.송도 주민들의 관심이 높은 노선은 '송도내부순환선'(트램)이다.이 노선은 인천글로벌캠퍼스, 인천대입구, 송도랜드마크시티, 센트럴파크, 캠퍼스타운을 순환하는 것으로 계획됐었다. 길이 21.7㎞, 정거장 31개다.송도내부순환선은 인천시가 제1차 인천 도시철도망구축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2개 단계로 나눠 구축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전 구간 노선은 경제성이 낮기 때문이다.이에 따라 인천시는 인천글로벌캠퍼스~캠퍼스타운~센트럴파크~송도랜드마크시티(7.4㎞, 정거장 15개)를 순환하는 1단계 사업부터 추진할 계획이다. 송도내부순환선 1단계 노선 B/C값과 AHP값은 각각 0.78, 0.394로 나와 '대상노선'에 포함됐다.1단계 사업 완료 후 나머지 구간에 대한 공사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2단계 사업은 '후보노선'으로 분류돼 있다.송도 주민들은 인천시 시민청원 제도를 통해 송도내부순환선 조속 추진 등 교통 환경 개선을 촉구했다.이에 인천시는 "제2차 인천 도시철도망구축계획 수립 용역에 '8자 노선' 등 선형 변경과 사업비 확보 방안 등을 포함할 예정"이라며 "송도내부순환선 구축사업이 조속히 추진되도록 여러 노력을 기울여 나가겠다"고 답변했다. '8자 노선'은 송도 주민들이 제안한 내용이다.현 노선은 '0'자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모양인데, 이를 8자처럼 변경해야 접근성이 향상될 수 있다는 게 주민들의 생각이다.송도내부순환선은 송도 내부에서의 이동 편의는 물론 인천 1호선, GTX-B노선(송도~서울역~마석) 환승을 통해 인천 북부와 서울 접근성을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GTX-B노선은 연내 예비타당성 조사가 완료될 예정이다.정부는 최근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하면서 "GTX-B노선 예타를 신속히 진행해 연내 완료하겠다"고 밝혔다.제1차 인천 도시철도망구축계획에 반영된 '인천남부순환선'과 'In-트램'도 송도와 연결된다.인천남부순환선은 대순환선 일부 구간으로, 이 노선이 개통하면 송도 주민들의 인천 2호선과 수인선 이용이 편리해진다. In-트램은 작전역, 경인고속도로 일반화 구간, 학익시장, 국제업무지구를 연결하는 노선이다.인천시는 제2차 인천 도시철도망구축계획 수립 용역을 통해 인천남부순환선과 송도내부순환선 등 6개 대상노선, 인천 1호선 신국제여객터미널 연장 등 5개 후보노선의 사업 추진 타당성을 재검토할 계획이다.또 신규 노선을 발굴하고, 시민과 군·구에서 요구한 노선을 검토할 방침이다. 인천시는 내년 3월까지 제2차 인천 도시철도망구축계획안을 수립한 후 전문가 자문, 시민 공청회, 시의회 의견 청취 등을 거쳐 그해 6월 국토교통부에 승인을 신청할 예정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9-07-07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18)]백범 김구 부모와 인천

감리서 오가며 삼시세끼 '옥바라지'백범, 인천서 부모 '애틋함' 떠올려1896년 백범 김구가 21살의 나이로 인천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인천항 주변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김구의 얼굴을 보려고 감옥으로 '산(生) 조문'을 왔고, 동료 죄수들은 자기 부모상이라도 당한 듯 애통해 했다. 황해도 해주에서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인천으로 이사와 매일 같이 세끼 밥을 챙겨주던 곽 여사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1911년 안악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면회객은 우느라 말도 못하는데 곽 여사는 태연하게 "나는 네가 경기 감사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그런데 백범 김구는 해방 이후인 1946년 38선 이남 순회 첫 일정으로 찾은 인천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부모님의 '눈물'을 떠올렸다. 그는 곽 여사가 식모살이를 했던 물상객주 집에서 인천감리서로 이어진 길을 보면서 "면회차 부모님이 내왕하시던 길에는 눈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다"고 했다. 곽 여사가 밥이 담긴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짚신 발로 하루에 꼬박 3번씩 오갔던 그 길이다.어머니는 아들이 흔들릴까봐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나 김구는 백범일지에 "어머님이 나를 대하여서는 태연하셨으나 돌아서 나가실 때는 반드시 눈물에 발부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썼다.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인천에서는 백범 김구가 남긴 흔적을 찾는 작업이 한창이다. 백범이 해방 직후 인천에 왔을 때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흘린 '눈물의 흔적'을 찾았다는 사실도 놓치지 말고 다시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류창호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은 "지금 인천대공원 백범의 동상을 인천항 주변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오히려 이전해야 할 것은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라며 "이 동상을 옥바라지 골목으로 옮겨 놓는다면 이야깃거리도 되고 의미도 더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7-03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18)]백범 김구 부모와 인천

아들 인천 감옥에 갇히자 모친 곽낙원 여사 황해도서 전 재산 팔고와 '옥바라지'父 김순영도 객주집 더부살이하며 '구명운동' 김구 탈옥위한 삼릉창 전달하기도자식대신 '옥고' 석방 이듬해 숨져… 곽 여사 가장으로서 독립운동 물심양면 지원中 망명생활중 사망 '임시정부의 어머니'라 불려… 공훈 기려 1992년 애국장 추서백범 김구와 인천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의 부모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김구가 치하포사건으로 인천에서 옥살이를 할 때 고향을 떠나 옥바라지를 하며 아들이 청년 김창수에서 김구로 다시 태어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버지는 김구가 감옥에서 탈출한 후 1년간 대신 인천에서 감옥살이를 하며 고초를 겪어야 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한 말이 딱 백범의 부모에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한다. 백범이 민족 지도자로 나아갈 수 있었던 데는 부모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특히 애국장이 추서된 곽낙원 여사의 경우는 단지 '백범의 어머니'가 아니라 한 명의 독립운동가로 평가해야 한다.김구의 부모는 김구와 관련한 주요 사건 때나 성장 배경을 이야기할 때 잠깐 잠깐 등장할 뿐 인천에서 온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경우는 많지 않다. 비록 인천에 머문 기간이 짧고 황해도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이 인천에 남긴 발자취는 뚜렷하다. 김구가 말한 '의미심장한 역사지대' 인천의 인물로도 손색이 없다.백범 김구는 1876년(고종 13년) 황해도 해주의 텃골이라는 마을에서 김순영과 곽낙원 사이 외아들로 태어났다. 백범일지에 나왔듯이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후손으로서 명망 높은 안동 김씨 집안이었지만 1651년 이 가문의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 멸족의 위기에 놓이자 집안 전체가 황해도로 도망을 쳤다. 이때부터 평민 행색을 하고 농사를 짓고 살았다.김순영·곽낙원 부부와 인천의 인연은 아들 김구가 1896년 일본인 스치다를 살해한 치하포사건으로 인천감옥에 갇히면서다. 김구는 처음에 해주의 감옥에 갇혔다가 이후 인천감리서로 이감됐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내가 인천으로 이감된 이유는 갑오경장 이후 외국인 관련 사건을 재판하는 특별재판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김구의 부모는 전 재산을 팔아 인천으로 동행해 옥바라지를 했다. 형편상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먼저 아들을 따랐다. 해주에서 나진포까지 걸어갔다가 배를 타고 강화를 거쳐 인천항으로 가는 고된 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인천에 도착한 곽 여사는 아들의 밥 동냥을 할 궁리로 인천의 한 물상객주를 찾아가 그간의 사정을 얘기하며 밥 짓는 일과 옷 만드는 일을 거들 테니 아들에게 하루 세끼 밥 한 그릇씩 가져다줄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이때부터 곽 여사는 감옥에 갇힌 아들의 옥바라지에 나섰다. 그때의 감옥제도는 죄수들에게 먹을 것을 규칙적으로 배급하는 게 아니라 죄수들이 일을 해 짚신이라도 삼으면 간수가 길거리에 내다 팔아 얻은 곡식으로 죽을 쑤어먹는 식이었다. 세끼를 꼬박 챙겨 먹는 김구는 동료 죄수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지금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에 있는 곽낙원 여사의 동상은 바가지를 옆에 끼고 치마를 걷어 올린 채 짚신을 신고 있는 모습이다. 남의 집에 얹혀살면서 옥바라지를 했던 바로 그때의 모습이다. 김구가 생전에 직접 고증했고, 조각가 박승구가 빚어냈다.아버지 김순영도 가만히 앉아만 있지는 않았다. 인천으로 뒤따라와 객주의 집에 더부살이하며 옥바라지를 도왔다. 인천 감옥에 유교 경전 중 하나인 대학(大學)을 넣어 김구가 옥중에서라도 학문에 소홀함이 없도록 독려했다. 그러면서 부인과 함께 인천감리서에 아들의 석방을 위해 소장(訴狀)을 수차례 보냈다. 강화의 부호 김주경의 도움으로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법부대신 등을 상대로 탄원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김구의 탈옥은 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김구는 1898년 탈옥을 결심하고 모서리가 3개인 '삼릉창'을 만들어달라고 아버지 김순영에게 부탁했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아버님도 무슨 일을 꾸미는 줄 짐작하시고 즉시 삼릉형으로 만든 쇠창 하나를 의복 속에 넣어주셨다"고 했다. 탈옥의 발각은 곧 죽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아버지는 김구의 결연한 의지를 믿고 인천의 대장장이에게 삼릉창 제작을 맡겼을 게다. 훗날 자신에게 책임이 떨어질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김순영은 아들 대신 인천의 감옥에서 1년 동안 대신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김구는 어렸을 적부터 불의를 참지 못하는 아버지 김순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순영의 학식은 겨우 이름 석 자를 쓸 줄 아는 정도였지만, 기골이 준수하고 성격이 호방했다고 한다. 음주가 한량이 없어 취하면 양반을 만나는 대로 때려 여러 번 관아에 구속되기도 했다. 김구는 아버지에 대해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이셨다. 이로 인해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고 했다. 김순영은 김구를 배움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직접 서당을 차리고 선생을 모셔오기도 했다. 김구가 과거에 낙방하고 동학에 심취했을 때 함께 동학의 길에 뛰어들기도 했다.김구의 부모는 아들이 인천 감옥을 탈출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인천을 떠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뒤따라온 인천 순검에 체포됐다. 부부는 인천 감옥에 갇혀 갖은 형벌을 당했다고 한다. 곽낙원 여사는 곧 석방됐고, 아버지 김순영이 아들 김구 대신 구속돼 1898년 3월부터 1년 동안 인천에서 옥살이를 했다. 김구는 당시에는 이런 사실을 몰랐다가 2년여 뒤 도피처에서 만난 스님을 통해 부모님이 감옥에서 갖은 형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김순영은 인천 감옥에서 석방된 이듬해인 1900년 12월 9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구가 도피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터여서 다행히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김순영은 열나흘 동안이나 아들의 무릎을 베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김구는 이때 왼쪽 허벅지 살 한조각을 베어내 불에 구워 아버지에게 약이라 속이고 먹이고, 흐르는 피를 마시게 했다.남편을 여읜 곽낙원 여사는 그때부터 가장으로서 아들 김구의 애국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1911년 7월 신민회 사건으로 김구가 다시 감옥에 갇혔을 때도 눈물 없이 의연한 태도를 보이며 아들을 응원했다. 김구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고향에 남았던 곽낙원 여사는 1922년 아들과 며느리, 손자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곽낙원 여사가 인천과 다시 인연을 맺은 때는 아들에 부담 주기 싫다며 1925년 말 손자를 데리고 귀국하면서다. 그 전해 며느리 최준례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자 선택한 일이었다. 며느리가 출산한 뒤 몸이 성치 않았을 때였는데 시어머니에게 부탁하기 어려워 2층에서 아래층으로 세숫물을 들고 내려가다가 실족했다가 후유증을 얻어 그만 죽고 말았다. 어린 손주를 키우던 곽 여사는 채소 가게 쓰레기통에서 버린 배추 껍데기를 주워다 소금에 절여 먹고, 항아리를 만들어 내다 팔기도 했다. 하지만 생활이 어려워지자 네 살 짜리 손주를 데리고 고국행을 택했다.동지들의 도움으로 인천항으로 갈 뱃삯은 마련했으나 도착해서가 문제였다. 곽 여사는 무작정 동아일보 인천지국에 찾아가 사정을 말했다. 인천지국은 상하이 특파원의 소식을 듣고 이미 사정을 알고 있었다며 고향에 갈 여비를 챙겨줬다. 실제 1925년 11월 6일자 동아일보는 "죽어도 고국강산, 기박한 생애에 남다른 뜻 가진 상해객창(上海客窓) 김구씨 모친"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로 곽 여사가 며느리의 죽음과 생활고로 인해 고국행을 결심했으나 형편이 암담하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당시 동아일보 인천지국은 문화·체육활동을 통해 인천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사업에 열중했다. 초대 지국장 하상훈은 내리교회 엡윗청년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고, 고전 국악 연구단체 이우구락부는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근거지로 했다. 각종 음악회와 토론회, 웅변대회를 열어 애국계몽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고향으로 돌아온 곽 여사는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생활비를 모아 중국에 있는 김구에 송금하고 구국 기도회에 참석해 독립을 염원했다. 그러다 1934년 김구의 설득으로 다시 중국으로 갔다. 당시 나이 76세였다. 9년 만에 다시 만난 아들에게 "이제부터는 너라고 하지 않고 자네라고 하겠네"라고 했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또 아들과 청년회 동지들이 팔순 잔치 때 전달한 돈으로 권총을 사서 돌려주기도 했다. 그가 단지 백범 개인의 어머니가 아니라 '임시정부의 어머니'라고 불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곽 여사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군사훈련 중인 청년 20여 명의 병영생활을 돌보면서 김구와 고락을 같이하다가 병을 얻어, 1939년 4월 26일 중국 쓰촨성(四川省)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곽 여사는 중국에 안장됐다가 광복 후인 1948년 김구가 고국으로 모셨다. 백범 50주기를 맞은 1999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됐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1948년 백범 김구가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입비 제막식에서 축사를 하는 모습. 출처/백범김구전집1934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찍은 백범 김구 가족 사진. 왼쪽부터 맏아들 김인, 김구, 둘째아들 김신. 앉아있는 사람이 어머니 곽낙원여사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1924년 김구의 아내 최준례의 묘비에서 찍은 사진. 중절모를 쓴 남성이 김구, 오른쪽이 어머니 곽낙원 여사다. 비문은 한글학자 김두봉 선생이 썼는데 숫자를 자음 순서대로 치환해 표기했다. '1'이 'ㄱ', '2'가 'ㄴ'인 방식으로 "4222해 3달 19날 남, 대한민국6해 1달 1날 죽음"으로 해석된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1948년 김구의 둘째아들 김신이 할머니 곽낙원 여사와 어머니 최준례의 유해를 인천항으로 봉환하는 장면. 출처/백범김구전집1949년 백범 김구 서거 직후 완성된 곽낙원 여사의 동상. 사진 왼쪽부터 동상을 만든 조각가 박승구, 김구의 둘째 아들 김신과 그의 부인 임윤연, 백범의 측근 김덕은이다. 이 동상은 경교장에 있다가 1997년 인천대공원에 세운 백범 김구의 동상 옆으로 이전했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

2019-07-03 김민재

[zoom in 송도]'송도 개발 변경안' 산업부 경제구역委 통과

4·5공구 인접 '재배치' 연계 효과산업·연구시설 182만8750㎡ 조성2030년까지 300개 첨단기업 유치전문인력 양성 '혁신생태계' 구축바이오 중심도시 도약 기반 마련인천 송도국제도시 11공구 산업용지를 확대하는 '송도 개발·실시계획 변경안'이 산업통상자원부 경제자유구역위원회를 통과했다. 산업부는 지난 28일 제107차 경제자유구역위원회를 열고 송도 11공구 산업용지를 확대 재배치하는 개발계획 변경안을 의결했다.송도 11공구 산업용지 확대는 바이오 클러스터를 확대 조성하기 위한 조치다. 이번 개발계획 변경으로 송도 11공구 산업·연구시설용지는 175만4천533㎡에서 182만8천750㎡로 확대됐다.또 산업시설용지가 기존 바이오 클러스터인 송도 4·5공구 인접 지역으로 재배치돼 바이오 산업 간 연계 효과가 강화됐다. → 그래픽·지도 참조송도 4·5공구 바이오 클러스터에는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글로벌 바이오 기업이 입주해 연구개발 및 제품 생산 활동을 하고 있다. 셀트리온은 지난 5월 신약 확보 R&D 16조원, 생산시설 확장 5조원, 글로벌 유통망 확충 2조원, 스타트업 지원 2조원 등 총 25조원을 송도에 투자하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경제자유구역위원회는 이날 송도 11공구 개발계획 변경 필요성을 검토하기 위해 인천경제자유구역청으로부터 바이오 클러스터 추진 현황을 보고받았다. 또 송도를 세계 일류 바이오 클러스터로 육성하기 위한 제조·혁신 생태계 조성 방안을 논의했다. 송도 바이오 클러스터에는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50개 기업, 길병원·뇌연구원 등 4개 연구소, 연세대와 인천대 등 3개 대학, GE헬스케어 등 7개 지원기관이 입주해 있다. 하지만 선도·제조기업 중심으로 형성돼 있어 산업·혁신 생태계 고도화가 필요한 상황이다.인천경제청은 2030년까지 300개 기업을 유치하고 1만5천명의 고용을 창출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 '제조·선도기업' 중심의 클러스터를 '제조·선도기업+R&D·중소·중견·창업기업'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인천경제청은 바이오 전문 인력 양성, 바이오벤처 지원센터, 유전체 분석 서비스 규제 샌드박스(유예) 사례 확산 등을 통해 바이오 혁신 생태계를 조성하게 된다. 또 바이오·의약 산업 관련 기자재를 생산·공급하는 중소·중견기업 90개, 벤처·스타트업 150여 개를 유치한다.산업부 관계자는 "인천시, 인천경제청, 기업들로 구성된 TF(태스크포스)팀에 참여해 셀트리온 등의 투자계획이 원활히 진행되도록 제반 사항을 적극 지원할 예정"이라며 "송도 바이오 클러스터 조성계획을 국내외에 홍보해 국내 기업은 물론 외국인투자기업 유치도 촉진할 계획"이라고 했다.인천시는 5월30일 인천바이오헬스밸리 조성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인천경제청, 인천테크노파크, 셀트리온,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참여하는 민관 협력 TF팀을 구성·운영하고 있다.유병윤 인천경제청장 직무대리는 "이번 의결로 송도에 바이오 기업과 연구개발시설을 추가로 유치하는 계획이 탄력을 받게 됐다"며 "송도가 세계 바이오 산업의 중심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입주한 송도는 단일도시 기준으로 세계 최대 바이오의약품 생산 용량을 갖추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9-06-30 목동훈

[인천경영포럼]최정욱 인천국세청장 "세금 문제, 세무서 상담받는 게 유리"

조사확대는 우려… 간이방식 늘려기업경영난 고려 압류등 탄력 운영최정욱 인천지방국세청장은 27일 "국세청은 국가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재정 수입을 확보해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임무"라고 강조했다.최정욱 청장은 이날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제406회 조찬강연회에 강사로 나와 "많은 분이 '국세청' 하면 세무조사를 생각하는데, 국세청은 한마디로 서비스 기관"이라며 이같이 말했다.그는 "국세청 영문은 'National Tax Service'다. 20년 전 최초로 기관 명칭을 서비스로 바꿨다"면서 "실질적으로도 서비스 기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또 "인천국세청 개청으로 세무조사가 확대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며 "개청 전후 세무조사 인력은 큰 변함이 없다"고 했다.강연 주제는 '인천지방국세청 개청과 중소기업 세정 지원'이었다. 인천경영포럼 회원은 기업인이 많다.최 청장은 "기업인 대부분이 정기 세무조사는 어느 정도 예상한다"며 "비정기 세무조사에 당황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비중을 축소해 나가는 추세"라고 했다. 또 "중소기업과 소규모 기업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간편·간이조사 방식을 확대하고 있다"고 했다.그는 세무와 관련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세무서를 방문해 상담받을 것을 권했다. 최 청장은 "주변 얘기만 듣고 세금 납부를 준비하는 분이 적지 않다"며 "세무서에서 상담을 받고 계획을 잘 세운 후 세금을 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세무서에 문의하면 덤터기 씌우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납부 계획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세금이 늘거나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인수·합병 등 거래가 있을 때 복잡한 세금문제가 발생한다"며 "미리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최 청장은 "기업들이 자금 사정 때문에 세금을 못 내는 경우가 생긴다"며 "세법은 체납에 대해 매우 엄격하지만, 기업 경영에 어려움이 없도록 압류와 공매 등을 탄력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또 "영세 납세자에게 세무대리인을 지원하는 제도가 있다"며 "일자리 창출 기업과 혁신성장 기업에 대해서도 정기 세무조사 제외 등 세정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최정욱 인천지방국세청장이 27일 오전 인천시 연수구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제406회 조찬강연회에서 '인천지방국세청 개청과 중소기업 세정 지원'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인천경영포럼 제공

2019-06-27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17)]백범일지 톺아보기·(下)

1946년 인천 방문때 대중일보 보도'일지'엔 없지만 새로운 자료 가치백범 김구(1876~1949)가 치하포사건으로 인천감리서에서 옥살이하다가 1898년 3월 탈옥할 때 감리서 순검(경찰)이 도왔다는 주장이 담긴 73년 전 신문 기사가 있다. 대중일보는 1946년 4월 17일자 2면에 '김구 주석 탈옥 삽화-사형수와 의협의 옥사(獄使)'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김구가 같은 달 15~16일 인천 방문 일정을 마치고 떠난 다음 날 보도한 기사다. 인천 방문 당시 김구는 내리교회에서 인천시민들에게 두 번의 인천 옥살이에 대해 술회했다. 대중일보 기사는 감리서 경무청 순검이던 김정곤, 박고님이 김구의 탈옥을 도왔다고 한다고 전했다. 김구가 나라를 위해 일본인을 죽였으며, 그의 인격에도 위압됐다는 이유라고 한다. 다만 두 순검이 "의복을 장만했다"거나 "탈옥 후 은신할 곳을 준비했다"는 기사 내용은 1947년 12월 출간된 '백범일지'와는 상당히 다르다.대중일보 기사에 따르면, 김정곤은 부두 하역 노동자인 '영신조' 조장으로 인천 부두 노동계에서 크게 활약했다고 한다. 김정곤은 김구의 귀국을 알고 "자기 손으로 (탈)옥을 방조한 김창수가 즉 김구 선생인 것을 육감으로 간파했다"고 나온다. 투병 중이던 김정곤은 1946년 2월 딸을 통해 탈옥 사정을 쓴 편지를 '김창수 각하'라고 적은 봉투에 담아 김구 쪽에 전달했다.다음 달 김구의 비서실장 신현상(1905 ~ 1950)에게 받은 답장이 신문에도 실렸다. 답장에는 '주석께옵서는 풍상 수천(수십의 오식으로 보임) 년에 과거를 일일이 기억키 어려우나 귀 서한의 제반 정사의 말씀은 실로 과거를 회고한다'고 쓰였다. 김구를 만나길 고대했던 김정곤은 김구의 인천 방문 2주일 전인 4월 1일 숨을 거뒀다고 한다.전문가들은 이 한 꼭지의 기사만 가지고는 실제로 김구의 탈옥에 순검이 도움을 줬는지 확인하기 어렵다고 본다. '백범일지'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인천에 얽힌 백범 이야기를 새로이 확장해 볼 수 있는 자료로 보인다. 수많은 인천사람이 김구의 옥살이를 도왔다는 사실을 '백범일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 대중일보 기사에서도 1946년 당시 인천사람들이 백범과의 인연을 얼마나 각별하게 여겼는지 생각할 수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06-26 박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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