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제17회 푸른인천글쓰기대회 수상작-초등부 대상(인천시장상)]벚꽃같은 나의 선생님

나는 벚꽃을 보면 생각나는 분이 있어요.그분은 따뜻한 봄에 우리를 반겨주는 벚꽃처럼 예쁘세요. 머리카락은 꼬불꼬불 덩굴식물을 닮았고요, 목소리는 달콤한 꿀을 머금은 것처럼 향긋해요.벚꽃을 닮은 그 분은 바로 우리 학교 한유라 선생님이에요. 한유라 선생님은 제가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세요.저는 소심하고 소극적인 성격을 가졌어요.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 서면 눈앞이 캄캄하고, 목소리는 졸졸졸졸 시냇물처럼 작아져요. 제 마음속에는 커다랗고 푸르른 산이 있는데, 남들 앞에만 서면 왜 조그마한 개미가 되어 버리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한유라 선생님은 저의 개미같은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여 주시고, 제가 쓴 일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해주셨어요. 저는 제가 일기를 잘 쓰는 것도 몰랐고, 책을 좋아하는 것도 칭찬 받을 일인지 잘 몰랐거든요.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린 아이들에게 주는 작고 귀여운 돼지 인형을 받았을 때, 선생님이 친구들 앞에서 크게 칭찬해 주시고, 예쁘게 사진도 찍어 주셨어요. 저는 선생님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푸르른 산 위에 멋지고 웅장한 바위가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 했답니다. 선생님 덕분에 저는 자신감이 많이 생겨서 이제는 발표할 때 천둥처럼 큰 목소리로 할 수 있어요. 얼마 전 공원으로 벚꽃구경을 갔을 때 봄바람에 날린 벚꽃 잎이 제 얼굴을 보드랍게 쓰다듬어 주었어요. 그 때 벚꽃을 닮은 선생님이 생각났답니다. 선생님은 제 마음 속에 금빛 날개를 심어 주신 것 같았어요. 이제부터는 저의 금빛 날개를 활짝 펼치고 붉은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멋진 나비가 될 거예요.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김태윤·단봉초 3년

2019-05-23 경인일보

[독립운동과 인천·(13)]윤응념과 인천사건

모금·밀항돕는 역할… 재조명 필요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인천 섬 지역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인천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인천의 독립운동가 윤응념(1896~?)은 여전히 반쪽 평가에 그치고 있다. 판결문과 각종 신문기사, 일제의 동향 보고를 통해 그의 국내외 독립운동 행적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밝혀졌으나 독립유공자 명단에서 그를 찾아볼 수 없다. 그가 가족조차 모르게 중국으로 떠난 뒤 어떻게 살았고 언제 생을 마감했는지 등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황해도 재령 출신의 윤응념은 중국 유학 중이던 1920년 가을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해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가의 밀항 루트 개발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그는 1922년 4월 중국 상인으로 가장해 인천으로 들어와 장봉도, 시도, 영종도, 대부도 등지를 다니며 지역 부호를 상대로 독립자금을 모집했다. 일제는 그가 협박으로 돈을 빼앗았다고 보고 강도죄를 적용해 징역 12년이라는 중형을 선고했다. 윤응념은 1924년 병보석으로 풀려나 서울 집에서 치료를 받다 이듬해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아내와 세 아이에게는 재판소에 간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중국으로 탈출했다.그의 탈출은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일제는 추적에 나섰지만 찾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그의 이름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전문가들은 당시 징역 12년형을 받을 정도의 인물이었다면 단순히 중국으로 탈출하는 데에서 활동을 끝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일제가 12년 동안이나 감옥에 가둬두고 싶을 정도의 요주의 인물이라면 그만큼 투쟁심도 강하고 애국심도 강했을 거라는 해석이다. 그는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활동할 때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다른 이름으로 활동했을 가능성도 있다.그는 지금까지 밝혀진 독립운동 활동만으로도 독립유공자의 자격이 충분하지만 문제는 훈격이다. 같이 활동을 했던 동지들은 애족장 또는 애국장을 받았는데, 그가 중국으로 넘어간 뒤 어떤 활동을 했느냐에 따라 훈격이 달라질 수 있다. 윤응념에 대한 재조명과 추가 행적 발굴이 요구되는 이유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5-22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13)]윤응념과 인천사건

황해도 출신 3·1운동 계기 임시정부 참여 1920년 교통국 참사로 임명돼인천·섬 부호 상대 독립자금 수급役 사기꾼 많아 신분상징으로 권총 사용강도 몰려 12년형 선고… '김마리아 망명' 주역 독립운동가 밀입국 돕기도 병보석후 중국으로 탈출 '행방묘연' 유공자 서훈 못받아 추가 조사 필요일제강점기 초기 경기도경찰부는 인천과 주변 섬 지역의 부호들을 상대로 한 연쇄 강도사건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권총으로 무장한 일당이 돈을 빼앗아 달아났다는 이 사건은 이른바 '인천사건'으로 불리며 "인천 부근 일대의 부호를 전율케 한 사건"이라는 내용으로 신문에 대서 특필됐다. 강도죄로 재판에 넘겨진 이들의 실체는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해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하라는 밀명을 받고 활동한 임시정부 교통국 소속의 특파단이었다.인천사건을 이끌었던 인물은 모두 10명으로 총 책임자는 황해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응념(1896~?). 그럼에도 윤응념은 인천사건의 다른 주역과 달리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했다. 인천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다가 병보석으로 잠시 풀려난 틈을 타 중국으로 도망간 뒤로 그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삶과 죽음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다 보니 그에 대한 평가도 뒤로 밀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의 독립운동가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지만, 학계의 관심과 깊이 있는 연구는 미진하다. 2007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윤응념의 항일 활동을 '진실'로 규명했지만, 아직 국가보훈처는 그를 발굴해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윤응념이 이끌었던 인천사건의 배후에는 상해 임시정부가 있었다. 임시정부는 국내 각 지방과 긴밀한 연락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연통제(聯通制)'라는 기구를 설치해 운영했다. 이는 독립운동 자금 모집의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연통제는 초기부터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1919년 7월 교통국이 설치돼 연통제를 계승했다. 윤응념은 1920년 10월 5일 바로 이 교통국의 참사로 임명돼 독립운동가들의 밀입국을 돕고, 문서(정보)를 주고받거나 독립자금의 원활한 수급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았다.1896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윤응념은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10대 후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 선천 등지에서 수학하던 그는 미국으로 다시 유학을 가려 했으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가담할 뜻을 갖고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는 당시 임시의정원 비서였던 김정목의 소개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윤응념은 교통국 참사로 임명된 직후 조선독립을 선전하기 위해 발행한 독립신문과 잡지 신한청년을 국내로 몰래 들여와 배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고향인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수천부의 독립신문을 배포하며 첫 임무에 성공했다.그에게 주어진 다른 임무는 바로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이었다. 임시정부는 지금의 주민세와 같은 인구세 등을 걷어 국내 지방조직을 통해 자금을 공급받았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위축되자 임시정부 요원을 직접 보내 모집을 맡겼다. 윤응념은 1922년 4월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인천으로 들어왔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인천 장봉도, 시도, 영종도, 대부도 등지를 다니며 지역 부호를 상대로 독립자금을 모집했다.이들은 즉석에서 돈으로 받기도 했고, 임시정부가 발행한 공채를 매도하는 방식으로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했다. 국가기록원이 지난 4월 발간한 '판결문에 담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을 보면 독립공채의 이자는 연 100분의 5로 나라가 독립한 뒤 5년부터 30년 이내에 상환하는 방식이었다. 100원권, 500원권, 1천원권의 3종류였다.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알리기 위해 임시정부가 인증한 여러 문서를 보여줬지만, 군자금 모집을 가장한 사기 사건이 발생하기도 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권총'을 신변 보호의 수단이자 신분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윤응념이 권총을 보여주며 군자금을 모집한 일은 결국 '강도사건'이 됐다. 10명 중 1명은 도주했고 1923년 5월 경찰에 9명이 체포됐다. 이들이 훗날 자금 지원을 약속받은 금액을 빼고 실제 걷은 군자금은 561원이었다.당시 판결문을 보면 윤응념은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대해서는 시인했으나 강도에 대해서는 "위협이나 공갈은 없었다. 피해자에게 물어봐도 알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그가 권총을 소지했다는 것만으로 강도사건으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윤응념은 그러나 결국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다른 동지들도 징역 1년 6월~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인천사건이 발생한 이후 여성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 망명 사건의 주역이 바로 윤응념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나게 됐다. 이는 일본 경찰이 윤응념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그는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 외에도 국내와 중국을 연결하는 밀항 루트 확보를 담당했다. 이를 위해선 중개 역할을 하는 외국인 상선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 독립운동가들이 교통국이 확보한 선박에 타고 서해의 섬으로 몰래 이동해 있다가 외국 상선으로 갈아타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일제가 1921년 8월 20일 작성한 보고서 '밀도항자 경로에 관한 건'을 보면 윤응념이 관여했던 항로는 평안남도 남포항에서 출발해 중국의 옌타이 등지를 거쳐 상하이를 왕래하는 코스였다. 중국 상인이나 기독교 선교사들이 밀항을 중개했다. 김마리아 탈출도 바로 이런 방식을 택해 이루어졌다.김마리아는 서울 정신여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항일여성단체인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 체포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을 얻어 치료를 받던 중 상해 임시정부가 그녀의 탈출을 계획했다. 건강 회복은 곧 재수감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교통국 참사인 윤응념이 상해 임시정부의 특명을 받았다. 1921년 4월 중국인으로 위장해 국내에 잠입한 그는 그해 6월 서울에 있는 김마리아를 인천으로 몰래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며칠 뒤 인천과 황해도 사이의 한 섬으로 건너간 뒤 중국 웨이하이로 가는 소금장사 배로 갈아타고 망명했다. 김마리아는 이후 미국으로 떠났다가 1932년 귀국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애국운동을 벌였다.인천사건으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윤응념은 1925년 5월 15일 수감 도중 폐병에 의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이듬해 10월 25일 가족에게는 재판소에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선 뒤 중국으로 탈출했다. 사흘 뒤 창춘에 도착했다는 편지를 집으로 보낸 이후 그의 행적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병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객사했을 가능성도 있고, 신분을 감추고 아예 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해방 이후 고향인 황해도 재령으로 돌아갔을 것이란 추측도 있지만, 윤응념 연구자들은 아직 북한에서의 행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1927년 1월 25일 동아일보에 실린 윤응념 관련 기사에서 부인 김항엽(당시 30세)은 "작년 9월 19일(음력) 나에게 재판소 호출이 있으니 가봐야겠다고 집을 나가서는 들어오지 않더니 그달 22일에 중국 창춘에서 편지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 길림으로 간 모양인데 편지의 내용은 병만 나으면 또 조선으로 가겠다는 간단한 말이었는데 그 편지는 전부 경찰에서 압수하여갔지요. 그리고 요새 매일 형사가 와서 무엇을 조사하고 묻고 합니다"고 했다.진실·화해위원회는 윤응념 가족이 서울 통의동에 살았다는 기록을 토대로 서울 종로구청에 옛 제적등본과 호적등본을 요청해 가족을 수소문하려 했지만, 구청 측은 관련 기록이 없다고 답변했다.윤응념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아직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윤응념과 군자금 모집을 했다가 체포돼 함께 옥살이를 했던 이호승(1878~1939)은 2006년 애족장을 받았다.전문가들은 윤응념의 중국 탈출 이후 행적에 대한 추가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독립유공자 서훈이 늦어지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임시정부 연구자인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는 "윤응념은 징역 12년 형이라는 아주 무거운 형을 받았을 정도로 투쟁심이 강한 독립운동가였는데 중국 탈출 이후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며 "서훈에 대해서는 10여 년 전에 내부적으로 검토 대상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윤응념은 여기서 끝날 게 아니라 분명 더 많은 활동을 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기 때문에 계속 미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 훈격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해야 할지 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인천 군자금 모집사건의 결심공판 모습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3년 9월 19일자 기사의 사진(선두에 선 사람이 윤응념이다).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임시정부 요원들의 국내 진입 경로를 표시한 일제 보고서 '밀도항자의 경로에 관한 건'. 상하이→옌타이→웨이하이 등을 경유해 진남포 또는 황해도로 들어오는 경로다.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왼쪽 아래부터)임시정부가 군자금 모집 때 사용한 공채들과 1919년 조선독립군사령부가 발행한 군자금 납입 명령서·봉투. /독립기념관 제공윤응념 검거 기사가 실린 1923년 5월 20일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지면으로 윤응념을 '수괴'라고 표현했다.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윤응념의 도움으로 망명에 성공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윤응념의 군자금 모집 사건 판결문. /국가보훈처·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제공

2019-05-22 김민재

[인천의 얼굴·(11)]가천대 길병원 조진성 응급실장

전국 첫 운행 2011년부터 자리 지켜와"기피 부서지만 진짜 의료서비스 소명"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이 또 있을까요. 인천의 가장 큰 특성은 바다와 섬입니다. 뱃일은 거센 파도만큼이나 거칩니다. 목숨을 내걸어야 할 정돕니다. 촌각을 다투는 환자가 많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빠른 배를 타더라도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늘을 나는 응급실, 닥터헬기가 있어 인천 앞바다의 섬 주민들은 안도합니다.2011년, 전국 최초로 인천 하늘에 닥터헬기가 떴습니다. 조진성(43) 가천대 길병원 응급실장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닥터헬기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작은 헬기에 탄다는 것은 바이킹 탈 때보다도 더 무서운 일입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의사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지요. 닥터헬기는 당직의사 10명이 돌아가면서 탑니다. 헬기는 웬만한 응급실이 갖추고 있는 장비들을 싣고 있습니다.2012년, 100번째 닥터헬기 이륙 때가 생각이 납니다. 네 살 여자아이가 강화도에서 물놀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20분만에 도착한 학교 운동장에는 아이가 의식을 잃고 사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심폐소생술을 여러 차례 해야 했습니다. 10여 분이 지나서야 심장이 뛰었습니다. 헬기에 태워 이송하는 내내 '꼭 살아야 한다'고 되뇌었습니다. 그 아이는 다행히 1주일 가까이 지나서 건강하게 퇴원했습니다. 벌써 초등학생이 되었겠네요. 이처럼 닥터헬기가 아니면 살릴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충남 일부 지역까지, 사고를 당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닥터헬기를 타고 살아났습니다.닥터헬기는 사람을 살리는 필요 장비인데 어떤 이들은 그 소리가 싫다고 귀를 막습니다. 헬기가 오르내리는 계류장을 군부대로 옮겼는데도 병원 근처 주민들은 이따금 소음 민원을 제기합니다. 내 가족이 사고를 당해 닥터헬기를 타야 할 경우에도 그 소리가 시끄러울까요. 닥터헬기 프로펠러 소음은 생명을 살리는 빛의 소리입니다. 어릴 때 동의보감을 읽고 의사의 꿈을 키웠다는 조진성 응급실장은 응급의학과는 의사들이 기피하는 부서이지만 진짜 의료 서비스를 한다는 생각에 참아냅니다. 헬기 소리를 '오늘도 누군가 살아난다'며 기쁘게 여겨주세요. 그게 힘이 됩니다. 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5-21 윤설아

[독립운동과 인천·(12)]女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김란사(下)

보훈처 평안남도 안주 기록달리 유족들 평양 출생 주장 논란 '이주 가능성''국제관계 능통' 조선 관리 하상기와 전처 죽은뒤 혼인 '첩·기생설' 사실아냐아내 적극 외조 경찰서장·감리등 역임 인천 총괄 이후 중국 망명 행적묘연김란사 생애 체계적 복원위해 함께 살펴봐야… 파리가던길 독살설도 '과제'김란사(金蘭史·1872~1919)가 여성교육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로 발돋움하는 데에는 남편 하상기(河相驥·1855~1920)의 적극적인 외조가 있었다. 하상기는 인천 개항장의 행정·사법·국제관계 업무를 총괄하는 인천감리를 수차례 지내면서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고위 관료이다. 그렇지만 드러나지 않은 측면이 많은 수수께끼의 인물이기도 하다. 아직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김란사의 생애를 복원하기 위해선 하상기도 함께 연구돼야 한다.지금까지 진행된 바로는 김란사나 하상기와 관련한 연구 작업의 중심에 인천의 이원규 작가와 김창수 인천연구원 부원장 등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생애를 조명해 온 이원규 작가는 김란사와 하상기에 관한 각종 자료를 모으고 행적을 추적해 작품에 반영하거나 강연하고 있다. 이원규 작가가 지난해 쓴 '김경천 평전'(도서출판 선인)에는 1904년 10월 조선 황실유학생단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 방문한 인천감리서에서 황실 유학생 김영은(金英殷·1888~1942)과 그의 아버지 김정우(金鼎愚·1857~1908)가 인천감리 하상기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김란사에 대한 언급도 있다. 훗날 김경천(金擎天)이란 이름을 쓰게 되는 김영은은 '백마 탄 김 장군'의 전설을 낳은 독립군 지도자다. 철저한 고증 없이는 묘사하기 힘든 장면이다. 이원규 작가는 "김란사의 고향이 북한 쪽이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관심을 갖고 연구한 사람이 드물다. 그나마 연고가 있는 인천에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란사와 하상기가 언제 결혼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조차 아직 전해지지 않고 있다. 김란사의 친정 조카손자인 김용택씨가 공개한 하상기의 제적등본에는 딸이 1891년 12월 출생으로 기재돼 있어 혼인시기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1891년 김란사의 나이는 19세이고, 하상기는 36세였다. 하상기는 전처가 있었기 때문에 김란사가 '하상기의 첩이었다'거나 '기생 출신'이라는 설이 오랫동안 나돌았다. 실제로 김란사가 기생 출신이라는 내용이 담긴 기사를 1990년대 보도했다가 현재는 해당 기사를 삭제한 언론사도 있다. 김용택씨는 "증조부(김란사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청나라 포목을 가져와 파는 무역업을 했다"며 "김란사 할머니는 아버지 일을 돕다가 하상기의 전처인 조씨 부인이 사망한 이후 인근에 살던 집안끼리 혼담이 오가서 혼인했다"고 말했다.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장악하기 위해 1906~1910년 설치한 통감부의 '한국 관인의 경력 일반'이라는 문서를 보면, 하상기에 대해 '원래 기부(妓夫)로 학문과 지식이 없지만 종종 협잡에 종사하였다. 일찍이 기녀 하나를 얻어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자 유인운동을 행하였다'고 썼다. 이 문서로부터 김란사가 기생 출신이라는 설이 나왔는데, 일본이 자국과 반대 입장에 있는 조선 관리들에 대해 쓴 문건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연구자들의 분석이 많다. 일본은 해당 문건에 올린 관인 153명 대다수에 대해 비방하는 내용을 담았다.또 일본 통감부는 같은 문건에서 하상기가 '러시아와 일본 양국에 대해서도 임기응변의 운동을 행해 러시아 탐정이라는 혐의가 있다'고도 평가했는데, 그가 국제관계에 능통한 인물이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상기가 사료에 등장하는 첫 기록은 '승정원일기' 1897년 7월 19일 기사로 그가 6품 벼슬에 올랐다는 내용이다. 1895년 봄 김란사와 함께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먼저 돌아온 직후다. 하상기는 1897년 말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입국해 김란사의 미국 유학길에 동행했다가 혼자 돌아왔는데, 이듬해 초 인천항 경무관(경찰서장)을 맡게 된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하상기는 1899년 7월 인천감리 겸 인천부윤으로 승진하고, 1902년 7월 경무청 경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한 달쯤 지나 또다시 인천감리로 부임했다. 이후 육군 보병 정위(대위), 일본공사관 1등 참서관과 주임관 등을 거쳐 1905년 10월 인천감리로 되돌아왔고, 1906년 3월 농상공부 공무국장으로 임명됐다. 7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인천감리를 지내면서 사실상 인천지역을 총괄했다. 러일전쟁을 비롯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던 시기에 고종은 하상기를 국제도시인 인천을 맡을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이원규 작가는 "하상기가 일본 등지에서 첩보를 수집해 왔을 것"이라며 "경찰 간부, 인천감리 등을 지낸 것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하상기가 인천감리로 재직할 때 김란사는 미국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남편과 인천에 머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김란사의 부친은 1911년 인천으로 이주해 평양, 경성, 인천 등 3개 도시를 아우르는 '평경인상회'를 운영하는 등 무역업에 종사했고, 이후 후손들 상당수도 인천에 정착했다고 한다. 김란사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1907년부터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서울에서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란사는 여성교육에 힘쓰면서 황실 통역사 등으로 활동하며 고종에게 은장을 받는 등 황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김란사가 돌아온 이후 관직에서 물러난 하상기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때 그의 행적을 보여주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언론인 김동성(金東成·1890~1969)이 경향신문 1967년 11월 8일자에 기고한 '나의 사우사 <13> 하란사 부인'에는 1908년께 하상기가 중국 상하이에 망명 중이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중국 유학 중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가 상하이에서 김동성을 만난 하상기는 "집에서 아무도 모르게 중국으로 피신한 지 두 달이 되어 나의 생사를 우리 집에서 모르고 있으니 편지 한 장 전해주면 고맙겠소"라고 부탁했다. 김동성은 편지를 갖고 귀국해 서울 동대문 밖에 사는 하상기 집에 들렀고, 김란사가 반갑게 맞으며 극진하게 대접해 줬다고 회고했다. 하상기가 왜 상하이로 망명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하상기의 행적은 묘연하다.김란사는 당시 여성들에게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무산됐던 파리강화회의 한국 대표 파견 계획이 재추진되면서, 여성계에서는 김란사를 파리에 보내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독립운동가 황에스터(1892~1971)는 서울신문이 발행한 월간지 '신천지' 1946년 3월호에 쓴 '3·1운동과 여성의 활약'이라는 글에서 "나는 조선 안 여학생을 단합하여 운동을 일으키고 파리회의에 하란사씨를 파견할 기금 모집을 할 겸 귀국했다"며 "파리회의에 우리 대표를 보낸다 하니까 돈을 낸다 의류를 낸다 노리개 화장품을 내놓는다 야단이었다"고 했다. 황에스터는 일본 유학 중인 1919년 2월 귀국해 3·1운동 이후 평양에서 김란사를 파리로 파견할 비용을 모금했고, 같은 해 3월 19일 기금을 전하려다 서울에서 체포됐다.파리로 향하던 김란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1920년 1월 22일자에 실린 애국부인회의 김란사 등 세 애국여사 추도회 기사에는 그가 1919년 봄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의 밀칙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하려고 중국 베이징에서 여행을 준비하던 중 유행성 감모(감기)에 걸려 세상을 떴다고 나온다. 이원규 작가가 발굴한 베이징 일본영사관의 김란사 사망 관련 보고서도 현지 중국신문을 인용해 유행성 감기가 사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세간에는 독살설도 퍼졌다. 미국 내 한인교포들이 발행한 '신한민보'는 1919년 4월 24일자 신문의 김란사 부고 기사에서 '그 사유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인바'라고 보도했다. 김동성도 앞서 경향신문 글에서 '일본인 앞잡이에게 살해를 당했다고 하나 그 진상은 오리무중에 파묻혀 밝혀지지 않았다'고 썼다. 조선일보 기자였던 최은희(崔恩喜·1904∼1984)도 생전에 김란사에 대해 쓴 글을 통해 '장례에 참가했던 미국 성공회 책임자 베커에 의하면 시체가 시커먼 게 독약으로 인한 타살로 추측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또 최은희는 같은 글에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베이징에 온 하상기가 '베이징에 가는 도중 봉천에서 어떤 동지를 만나 속뜻을 이야기한 게 오히려 그녀가 위해를 입은 원인이 됐다'고 한탄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도 썼다. 3·1운동 전후로 일본의 탄압이 더욱 거세진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김란사의 독살설은 뚜렷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지나칠 수 없는 좀 더 검증이 필요한 역사과제다.출생지 또한 명확하지 않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은 '독립신문' 1920년 1월 22일자 기사를 근거로 김란사의 출생지를 평안남도 안주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유족들은 평양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안주에서 태어나 평양으로 이주했을 가능성도 있다. 김란사가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에서 취득한 한국 여성 첫 '문학사'(Bachelor of Literature) 학위는 최근까지 쓰인 상당수 글에서 현재 통용하는 문학사(Bachelor of Arts)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인천시여성단체협의회가 2008년 펴낸 '역사 속의 인천 여성'에서 '하란사'로 소개된 김란사 이야기는 미국 유학 과정, 문학사 학위 취득 시기, 중국 망명 등 틀린 내용이 허다하다.김란사와 하상기 부부를 인천 개항장의 '도시서사자원'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한 김창수 인천연구원 부원장은 "선각자적 여성인 김란사와 인천감리 하상기 이야기는 교차구조로 극적 구성이 가능한 콘텐츠이지만, 아직 기초연구가 미비하다"며 "연구를 통한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 유학 당시 김란사.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주일공사관 1등 참서관 재직 당시로 추정되는 하상기.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독립신문'에 실린 김란사 등 '삼 애국여사의 추도회' 기사.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고종이 1909년 해외 여성 유학생 환영회와 관련해 김란사에게 수여한 은장.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김란사가 중국 베이징에서 사망한 사실을 담은 주일본공사관 보고서. /이원규 작가·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김란사는 1916년 미국 뉴욕 사라토가에서 열린 세계감리교총회에 한국교회 평신도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다. 세계감리교총회 한국 대표 파견 기념사진으로 앞줄 왼쪽에서 5번째 서양식 복장을 입은 여성이 김란사다. /이원규 작가 제공

2019-05-15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12)]여성교육자 김란사(下)

감리 출신 사위 하상기 영향력 도움인천고와 인연등 복지·교육에 힘써김란사(金蘭史·1872~1919)와 인천의 인연은 인천감리를 지낸 남편 하상기(河相驥·1855~1920)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평양과 서울에서 객주업을 했던 김란사 집안은 1911년 인천 중구 유동(율목동)으로 이주해 '평경인상회'를 운영했다고 한다. 평양~경성(서울)~인천을 잇는다는 의미인 평경인상회는 평양·서울·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해외에서 비단, 면직물을 떼다 판 무역회사였다. 인천이 평양과 서울의 중간지대이자 상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근거로도 볼 수 있다. 김란사의 친정 조카손자인 김용택씨는 "증조부의 사업을 조부가 이어받았고, 아버지가 평경인상회를 맡아서 해방 직전까지 운영했다"며 "이후에도 후손들이 인천에 정착해 살았다"고 말했다.김란사 집안은 사위인 하상기의 영향력에 도움을 받기 위해 사업거점을 서울에서 인천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하상기는 1899년부터 1906년까지 7년여에 걸쳐 여러 차례 인천감리를 지냈다. 인천감리는 당시 제물포 개항장이 중심인 인천의 행정과 국제관계는 물론 재판소 판사까지 겸임한 지역의 최고 관리였다. 특히나 하상기는 열강의 각축장인 개항장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을 정도로 고종의 신임을 받았다.하상기는 인천에서 복지사업과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대한매일신보는 1906년 3월 8일자 신문에 '하씨미정'(河氏美政)이라는 제목으로, 인천감리 하상기가 인천항의 회사들과 협의해 민의소를 창설하고, 매달 60~70명의 가난한 병자를 무료로 치료해줬다고 보도했다. 황성신문은 1899년 10월 13일자에 '인천감리 하상기씨가 영종진에 소학교를 세워 인민을 교육하겠다고 학부에 청원했다더라'는 기사를 썼다. 하상기가 인천감리로서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임했다는 황성신문 1903년 6월 3일자 기사도 있다. 이 기사에 나오는 외국어학교는 현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인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1895년 개교)다. 하상기가 인천고등학교와도 연결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05-15 박경호

[인천의 얼굴·(10)]고려인 빵집 사장 이가인씨

옛 소련지역으로 옮겨 살아온 '한인 3세'2004년 남편과 이주…연수구에 6천명 살아인천 연수구에 사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3세 이가인(36) 씨입니다. 2004년 우즈베키스탄인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왔습니다. 꼭 1년 전인 작년 5월 연수동 함박마을에 '아써르티'란 이름의 빵집을 차렸습니다. '아써르티'는 러시아어로 '종류별로 다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름대로 빵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 식료품도 팝니다. 빵을 주식으로 해서 그런지 종류만 10가지가 넘습니다. 가게를 하기 전 집에서 만든 것을 나누어 먹은 주위 사람들이 '고향의 맛'이라면서 빵집을 권유했습니다. 장사가 잘 됩니다. 한국 사람들이 30% 정도를 차지합니다.옛 소련지역에 이주해 살던 한인과 그 후손을 고려인이라고 하지요. 고려인은 3세까지 동포로 인정받아 재외동포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이주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는 고려인 7만여명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 중 연수구에만 약 6천명이 살고 있지요. 이가인씨의 원래 이름은 '제버 사비로사'입니다. 한국식 이름을 쓰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아 이주하면서 바꾸었습니다. 이주 이듬해 한국에서 태어난 딸은 이제 중학교 1학년이 되었습니다.이가인 씨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한반도 동북쪽인 러시아 연해주에 살았었는데 1930년대 스탈린 정권의 이주정책으로 정반대쪽인 우즈베키스탄 호라즘 지역으로 강제로 옮겨야 했습니다. 이가인 씨의 어머니는 6남매 중 넷째였는데 우즈베키스탄인과 결혼했습니다. 어머니 형제들은 한국말로 대화를 했습니다. 또한 외할머니는 끝까지 온돌방을 고집했습니다. 어머니가 한국말을 쓰고, 외할머니가 한국식을 잊지 않으셨던 것처럼 이가인씨는 한국에서 계속 살 생각입니다.그런데 우리는 왜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은 고려인이라 하고, 중국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조선족이라고 할까요. 이가인씨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5-12 박경호

[zoom in 송도]인천 최대 반려견 놀이터 '송도 도그파크' 개장

달빛축제공원내 5500㎡ 규모 '무료' 전염병·유기방지 '동물등록'해야 입장대형견·중소형견 등 3개공간 안전확보견주 쉼터·물놀이 등 다양한 편의시설인천 송도국제도시에 반려견 놀이터 '도그 파크'(Dog Park)가 생겼다. 지난달 29일 문을 열었으니, 개장한 지 2주일 정도 됐다. 인천에서 가장 큰 반려견 놀이터라고 한다. 지난 10일 송도 도그 파크를 다녀왔다. 송도 도그 파크는 달빛축제공원(연수구 센트럴로 350)에 있다. 달빛축제공원은 매년 여름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Incheon Pentaport Rock Festival)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난달 21일 영국 출신 싱어송라이터 에드 시런의 내한 콘서트가 열리는 등 인천의 대표적인 야외 공연 장소다. 하지만 대중교통으로 가기는 좀 불편하다. 인천도시철도 1호선 국제업무지구역에서 내리면 되는데, 20~30분 걸어야 한다. 공원 정문 옆에 주차장이 있으니 자가용을 이용해도 된다.공원 정문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5천500㎡ 규모의 도그 파크가 있다. 무료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조성했으며, 인천시설공단이 운영을 맡고 있다.도그 파크 입구에 뼈다귀 모양의 귀여운 조형물이 있다. 도그 파크에 들어가면 입장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곳은 동물등록을 한 반려견만 입장할 수 있다. 관리인이 반려견의 내·외장 인식 칩에 리더기를 갖다 대 등록 여부를 확인한다. 이는 전염병과 반려견 유기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인식 칩 또는 인식 표가 없는 반려견의 경우, 보호자는 동물등록증을 소지해야 한다.반려견이 놀이터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반드시 목줄을 채워야 한다. 도그 파크를 이용하는 다른 반려견과 보호자가 놀랄 수 있기 때문이다. 12세 이하 어린이는 보호자와 함께 출입해야 한다. 동물보호법 시행규칙에 명시된 맹견류 또는 질병이 있는 반려견은 등록번호가 있어도 입장할 수 없다. 관리인이 위험해 보인다고 판단한 반려견은 입마개를 착용한 후 입장해야 한다. 놀이터에는 음식물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도그 파크는 ▲대형견 ▲중소형견 ▲대형견+중소형견 등 3개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반려견 간 마찰을 예방하고자 몸높이 40㎝를 기준으로 대형견과 중소형견 이용 공간을 나눴다.각 공간에는 다양한 시설이 있다. 뫼비우스슬로프, 터널, 음수대, 오르락내리락 및 물놀이(분수) 시설 등이 있다. 물놀이 시설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매 정시부터 50분간 가동된다.놀이터별로 격리실이 있다. 격리실은 보호자가 화장실을 갈 때 반려견을 넣어 두는 공간이다. 보호자 화장실은 공원 입구에 있다. 도그 파크에서 멀지 않다. 놀이터 안에는 보호자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벤치가 마련돼 있다. 벤치 위에 그늘막이 설치돼 있지만, 햇빛을 막을 만큼은 충분하지 않다. 여름철 햇빛이 강할 때는 챙이 넓은 모자나 양산을 가지고 오는 것이 좋다. 도그 파크에서 만난 안희연(34·남동구 구월동)씨는 "인천대공원을 이용하다가 처음으로 송도 도그 파크에 왔다"며 "인조단지와 음수대, 물놀이 시설이 있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반려견끼리 싸우는 사고가 발생하면 퇴장 조치를 받을 수 있다. 사고의 책임은 피해를 준 반려견의 보호자에게 있다.도그 파크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오후 5시 이후에는 입장할 수 없다. 매주 월요일은 시설 점검·보수, 토양 소독을 위해 휴장한다. 명절 연휴 기간과 폭우·폭염·한파·폭설·미세먼지 등 기후 여건이 나쁠 때도 문을 열지 않는다. 도그 파크 개장 후 일주일간 600명 이상의 보호자와 반려견이 방문했다고 한다. 주말에는 이용객이 많기 때문에 줄을 서 대기할 수 있다. 도그 파크가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50명이다. 도그 파크에는 교육 공간이 있다. 인천시설공단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외부 강사를 초청해 반려견 관련 강연을 시행하겠다는 계획이 있다. 도그 파크에 왔다가 달빛축제공원에서 반려견과 놀다 가는 시민이 많은데, 공원 이용객들이 놀라지 않도록 목줄을 채워야 한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지난달 29일 개장한 송도 도그 파크 중소형견 놀이터 모습. 달빛축제공원에 있는 송도 도그 파크는 인천에서 가장 큰 반려견 놀이터로,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조성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반려견 보호자를 위한 벤치.반려견 물놀이(분수) 시설.흙먼지 털이기./아이클릭아트

2019-05-12 목동훈

[인천경영포럼]남주홍 前 국정원 1차장 "제재에 막힌 北 한계상황, 문재인 정부 출구전략 마련을"

北 추가도발 예측 9시간만에 현실화경제 병행노선 核 쉽게 포기 안해美최후카드 '봉쇄조치' 혼란 우려북한이 지난 4일에 이어 9일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남북 교착상황이 장기화 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북한의 이런 도발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란 주장이 제기됐다.남주홍 전 국가정보원 1차장(경기대 명예교수)은 9일 오전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경인일보와 인천경영포럼이 공동 주최한 인천경영포럼 제403회 조찬강연회에서 이같이 밝히며 문재인 정부의 위기관리 대응 능력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밝혔다.남 전 차장은 "북한은 핵과 경제를 같이 끌고 가는 병행 노선을 당분간 이어갈 것으로 관측되며 핵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최근 (지난 4일) 북한의 발사체 발사는 북미 하노이 회담 실패 등 여러 정세 속에서 이뤄진 전략적 선택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실제로 남 전 차장이 이날 오전 7시 30분 시작된 강연에서 북한의 추가 발사체 도발 가능성을 언급한 이후 9시간 만인 오후 4시 30분 평안북도에서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그는 제재를 버티고 있는 북한이 올해 겨울쯤 한계에 달할 것이란 게 국내외 정보 당국의 관측이라고 밝힌 뒤 문재인 정부가 이들(북한)의 출구를 마련해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남 전 차장은 "미국의 대북제재는 장기화 할 전망으로, 이를 버티고 있는 북한은 올해 가장 길고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말한 뒤 "이런 격변기 속에서 북한 내 사건·사고가 속출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이어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북한 내부 당·정·군의 사기저하가 심각한 문제로 부각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결국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출구 역할을 해야 하지만 지금으로는 대북 제재에 막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남 전 차장은 "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인도적 차원의 식량 지원 등으로 출구 전략을 모색할 수 있지만 우리 정부가 너무 조급한 모습을 보이면 북한의 전략에 당할 수 있다"며 "미국, 일본 등 우방과의 공조 속에서 여러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현재 북미 관계와 관련해 "미국이 현재 제재 조치를 취하고 있고, 이게 먹히지 않을 경우 남아 있는 마지막 카드는 북한에 대한 봉쇄 조치"라며 "만약 미국의 봉쇄 조치가 우리나라 정권 교체기와 맞물려 실행된다면 남북 모두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고 했다.남주홍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은 "한반도에서 절대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북한과 미국 모두 이를 알고 있다"고 언급한 뒤 "평화냐 전쟁이냐 하는 정치권의 이분법적 논리를 벗어나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북한의 동향을 파악한 뒤 우리 정부가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인천경영포럼 제공

2019-05-09 김명호

[독립운동과 인천·(12)]여성교육자 김란사(上)

조카손자 김용택씨 경인일보 통해남편 하상기씨의 '제적등본' 공개"본관마저 잘못 알려져 바로잡고자"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스승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란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인천과 깊은 관련이 있는 그는 한국의 첫 여성 '문학사' 학위자, 첫 여성 대학교수, 고종의 통역사, 파리국제강화회의 밀사 등 여성교육과 독립운동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하지만 출생 연도, 사망일과 사망장소, 집안, 본관 등 기본적인 인물정보조차 각종 기록이나 글마다 제각각일 정도로 김란사 연구가 깊이 있게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김란사의 조카손자인 김용택(71)씨가 김란사의 남편 하상기(1855~1920)의 제적등본(옛 호적등본)을 지난해 확보하고, 8일 경인일보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했다.인천감리 등을 지낸 관료였던 하상기의 제적등본에 나타난 아내(妻) 김란사는 1872년(개국 481년) 9월 1일생이다. 기존에는 '1875년', '1868년', '1872년' 등 세 가지 추측이 혼용됐다. 김란사는 1919년 중국 베이징에서 숨을 거뒀는데, 사망일은 당시 언론보도나 보고서에 따라 '4월 10일', '3월 10일', '3월 11일', '3월 상순' 등으로 여러 가지로 써 왔다. 등본에서는 사망일을 3월 10일 오전 11시로 명확히 기재했고, 사망장소는 베이징 '부영병원'이라고 밝히고 있다.본관은 상당수 기록에서 밝힌 '김해 김씨'가 아닌 '전주 김씨'였다. 하상기와 김란사 사이에는 딸 하나가 있었다. 일부 구술에 의해 이름은 자옥(子玉)이고, 이화학당에 재학 중 18세(또는 19세)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적등본에는 딸의 이름은 원옥(媛玉)으로 24세에 세상을 떴다고 기록돼 있다. 제적등본이 공문서인 만큼 현재로선 가장 객관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다.김란사애국지사기념사업회 회장인 김용택씨는 하상기의 직계가족은 아니지만, 국가보훈처와 행정안전부 등의 협조로 지난해 7월 제적등본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김용택씨는 "심지어 조상의 본관마저 틀리는 글들이 여럿 있어 이를 바로잡고자 제적등본을 요청해 받았다"며 "앞으로 김란사 할머니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들이 쓰이길 바란다"고 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김란사의 후손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남편 하상기의 제적등본. /김용택씨 제공

2019-05-08 박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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