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독립운동과 인천·(26)]황어장터 만세운동

특정집단만 주도한 게 아닌 점 의미지역내 '심혁성' 신임 두터웠을 듯인천 계양구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인천 내륙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독립운동이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 '황어장터 만세운동에 600여 명이 참석했다'고 기록한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1천명이 넘었을 것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이끈 사람은 당시 31세에 불과했던 심혁성(1888~1958)이다. 인천시 계양구 오류동(당시 경기도 부천군 오류리) 출신 천도교도였던 심혁성은 1919년 3월 24일 그 일대에서는 가장 큰 시장인 황어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심혁성은 3시간 만에 일본 경찰에 붙잡혔지만, 마을 주민들은 그의 석방을 위해 경찰과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한 명이 일본 경찰의 칼에 맞아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친일파의 집과 계양면사무소를 파괴하는 등 만세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황어장터 만세운동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대규모 독립운동을 특정 집단에서만 주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황어장터 만세운동 재판 기록을 보면 당시 체포된 40여 명의 인원 중 상당수는 기독교인이었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에 대해 연구한 수원대학교 사학과 박환 교수는 "당시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들에게 종교는 독립운동의 밑바탕이자 원동력이었다"며 "천도교와 기독교를 초월해 독립운동을 이끈 심혁성은 지역 내에서 많은 사람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심혁성은 전 재산을 팔아 빈민들에게 나눠 주고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한평생 일본에 항거한 그는 1958년 숨을 거둘 때 후손들에게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지 마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박환 교수는 "심혁성이 주도한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인천 북부지역뿐만 아니라 문학과 남동 등 인천 다른 지역 만세운동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며 "그의 만세운동을 역사에 기록해야 할 이유다"고 평가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9-0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6)]황어장터 만세운동 주역 심혁성

만세함성 가득한 1919년 3월 손병희 지시받아천도교·기독교인 규합 24일 600명 태극기 들어경찰과 대치중 '이은선' 숨진 탓 저항감 치솟아문학동·남동·월미도 시위 등 지역 활동 '밑거름'출소후 재산 팔아 빈민 돕는 등 평생 이웃 챙겨전국에서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월 24일.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현 인천시 계양구 장기동)에선 당시 대표 우(牛)시장인 황어장이 열렸다.오후 2시가 되자 한 청년은 옷 속에 숨겨 둔 태극기를 펼쳐 들었고, 장터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태극기를 꺼내 들며 '조선 독립'을 외쳤다.인천 내륙지역에서 벌어진 가장 큰 독립운동인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심혁성(1888~1958)이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웠지만, 농사를 지으며 살던 심혁성은 3·1 운동이 들불처럼 번질 때 가만히 있지 않았다.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조선 독립을 외쳤다.심혁성은 1888년 계양면 오류리(현 계양구 오류동)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을 진행하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만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당시 그의 재판기록에 따르면 심혁성은 독실한 천도교도로 생활했다. 1910년대 천도교는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일본에 처절하게 항거한 천도교는 국권이 침탈된 1910년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갔다.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총대표는 천도교도였던 손병희(1861~1922)가 맡았으며,독립선언문도 천도교 교단이 운영하던 '보성사'에서 인쇄돼 전국으로 배포됐다.심혁성이 살던 계양·부평 지역에는 1900년대 초반 천도교가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항일 천도교 기관지 '천도교회월보'는 1914년 4월 15일 발간한 기사를 통해 "'부천군' 교구는 설치한 지 십 년에 교호가 수십호에 지나지 못하고, 또한 모두가 빈한한 까닭에 교구실을 작만티(장만하지) 못함으로 일반교인이 근심하는 바이더라"라며 당시 이 지역 천도교 전파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한다면, 1914년이면 천도교 부천군 교구가 만들어진 지 10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던 셈이다. 부평교구는 부평군 서면 신대리(현 계양구 서운동)에 강습소를 운영했는데, 심혁성도 이곳에서 천도교도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1919년 3월 전국은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 함성으로 가득했다. 인천에서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 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면서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8일에는 인천 시내에 독립선언서가 다수 배포됐고, 이튿날인 9일에는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모여 만세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기도 했다. 3월 중순부터는 강화 지역 곳곳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이 시기 심혁성은 손병희의 지시를 받아 3·1 운동을 은밀히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부천군 계양면 지역의 천도교·기독교인, 농민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알리고 이들을 규합해 나갔으며, 만세운동 장소로 황어장터를 정했다.매월 음력 5일에 열리던 황어장터는 부천군 지역의 가장 큰 시장 중 하나였다. 조선총독부가 1924년 발간한 '조선의 시장'에선 "경기도 부천군에는 2곳의 시장이 있는데 한 곳은 소사리에 있고, 나머지는 장기리에 있다. 이들 시장에는 1곳당 평균 이용인구가 1천~2천명에 달한다"고 설명할 정도로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당시 시장은 일본의 감시 속에서도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였다. 이 때문에 시장을 중심으로 3·1 운동이 진행된 경우도 많았다. 경기도 화성에서는 '발안장'을 중심으로 3·1 운동이 벌어졌고, 평택에서는 '시강장터'가 만세운동의 장이 되었다.일본 경찰은 황어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19년 3월 27일 자 신문에서 "강화도의 소요가 도화선이 돼 그다음에 접근된 김포도 일어났고, 다시 그 동네와 인천경찰서 관내의 경계선 되는 부천군도 불온의 형세가 있으므로 인천경찰서에서는 만일의 경비를 위해 순사부장과 순사 2명을 부내주재소(부평주재소)에 임시 응원을 파견했다더라"고 썼다. 심혁성의 재판 기록을 보면 당시 부내주재소에서 근무하던 순사 2명은 24일 아침부터 황어장터를 순찰하고 있었다.일본 경찰의 경비도 계양 지역 주민들의 독립 염원을 꺾지는 못했다. 오후 2시가 되자 심혁성을 비롯한 600여명의 군중은 품 안에 태극기를 꺼내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선 "계양면 장기리에 장날을 맞아 구한국기(태극기)를 앞세우고 약 600명의 군중이 운동을 개시했다"고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설명했다.일본 경찰이 이날 황어장터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심혁성은 만세 운동을 시작한 지 3시간 만인 오후 5시께 경찰에 붙잡혔다. 이를 본 주민 수백명은 '심혁성을 내놓아라'고 외치며 일본 순사들을 포위하고 주먹으로 경찰들을 때리는 등 거세게 저항했다. 이에 순사들은 칼을 빼 들고 군중을 향해 휘둘렀고, 대열의 선두에 섰던 이은선(1876~1919)이 칼에 맞아 숨지는 등 주민 여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당시 인천경찰서에서 파견 나온 순사는 "면사무소에서 시장을 거쳐 약 3정(町·약 330m)의 지점에 이르렀을 때, 약 200명이 뒤따라오며 '붙잡아라, 붙잡아라'하고 저마다 입으로 큰소리를 지르고 우리 일행 6명을 포위해 심(심혁성)을 빼앗아 가려고 폭행을 시작해 약 10분이 지났을 즈음 심을 묶었던 포승을 끊고서 심을 둘러메고 약 8간(間·약 14m)을 탈거해 사방에서 돌을 던지므로 칼을 뽑지 않으면 심을 탈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경찰관 일행이 위험 상태에 빠져 막을 길이 없기에 칼을 뽑아 방어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이은선의 죽음을 본 주민들의 저항감은 더욱 불타올랐다. 이날 밤 주민들은 친일파로 지목된 면서기의 집을 부수고, 일제의 침략 말단기구였던 계양면 면사무소를 파괴했다. 또 주민들은 임학리와 용종리, 병방리, 박촌리의 민적부와 과세호수대장 등 면사무소 내 주요 서류를 불태웠다. 주민들은 심혁성을 포함한 만세운동 중심 인물이 대부분 구속됐음에도 이튿날인 25일 300여명이 면사무소 앞에 모여 힘차게 만세를 외쳤다.천도교와 기독교인이 합심해 이뤄낸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27일 문학동 시위, 28일 남동 시위, 4월 1일 월미도 시위 등 인천지역에서 벌어진 다른 만세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하지만 심혁성을 포함한 황어장터 만세운동 주동자 주민 40여명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심혁성은 1919년 10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 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1920년 출소한 심혁성은 논과 밭, 집을 팔아 생필품을 장만해 장터에서 빈민들에게 나눠주고, 전국을 떠돈 것으로 알려졌다. 1927년에는 함경도에서 중국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아 활동했고, 1937년 이후에는 충남 공주와 강원도 영월 등지를 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하다 해방을 맞았다.해방 이후 인천으로 돌아온 심혁성은 1958년 12월 인천시 계양구 백석동에서 7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계양구는 2004년 황어장터가 있던 자리에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을 세웠다. 이곳에선 매년 3월 1일 심혁성과 주민들의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심혁성은 평생을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왔다. 일본의 삼엄한 감시 속에 피신생활을 하는 중에도 어려운 이웃을 먼저 생각했으며, 자신도 물론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생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심혁성의 손자 심현교(67) 씨는 3일 경인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에도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혜택받지 마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로 매우 강직한 사람이었다"며 "해방 이후에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어주고 집에 올 정도로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못했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이어 "강직하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성격이 할아버지가 3·1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인천 계양구 장기동에 있는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전경. 인천 계양구는 매년 3월 1일 이곳에서 3·1 운동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다. /인천 계양구 제공심혁성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내부 전시실 모습. /인천 계양구 제공

2019-09-0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5)]이길용과 신낙균

동아일보 손기정 마라톤 우승 보도옥고 치른뒤 언론·사진계 복귀못해올림픽과 같은 국제스포츠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유니폼에 조국의 국기를 달고 출전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올림픽에 참석한 우리나라 선수들은 일본 국적으로 대회에 나서야 했던 탓에 가슴에 태극기를 달지 못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1912~2002)도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겼던 동아일보 기자들은 손기정의 우승 사진을 신문에 게재하면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이른바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이다.일장기 말소사건은 경성(서울)에 있던 동아일보에서 일어났지만 사건 주역들은 인천의 독립운동가들이다.일장기 말소사건을 주도한 체육기자 이길용(1899~?)은 인천영화학교(현 인천영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이길용은 서울과 인천지사를 오가며 취재활동을 벌였고, 운동부(체육부)를 전담했다. 그는 일장기 말소사건 주모자로 지목받아 투옥돼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았고, 40일 뒤에 풀려났으나 언론계를 떠나야 했다.이길용과 함께 일장기 삭제를 주도했던 당시 동아일보 사진부 과장 신낙균(1899~1955)도 인천이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다. 인천상업고등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출신인 그는 일본에서 사진을 배우고 돌아와 언론계에 몸을 담았다. 신낙균은 이길용과 함께 일장기 삭제를 주도했다가 함께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언론계와 사진계로 돌아올 수 없었다.유니폼에 국기를 달고 국제스포츠대회에 참가한 선수는 그 나라의 국민을 대표한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우리 민족이 힘들었던 시절 자긍심을 높이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일장기를 지워버린 이길용과 신낙균을 오랫동안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8-28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25)]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 이길용과 신낙균

1936년 동아일보 손기정 우승 특집기사 게재… 이길용·신낙균 주도 편집국 전체 동참인천서 자란 이길용 배재학당 졸업후 일본서 반일 격문 옮기다 서대문형무소 '수감'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송진우 만나 체육기자 입문… 6·25때 납북돼 행적 묘연인천상고 출신 신낙균 3·1운동 계기 사진 인연… 국내 사진전문가 최초 현충원 안장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36년 8월 25일.동아일보 2면에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 선수가 시상대에 오른 사진이 실렸다.다들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손기정 선수 유니폼 가슴 부근 국적을 알리는 국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어렴풋한 회색빛 먹 자국만 보였기 때문이다.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가 고의로 일장기를 지운 것으로 보고 신문 발행에 가담한 주요 인물들을 체포했다.이른바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인천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이길용(1899~?)과 신낙균(1899~1955)이 있다.이길용은 1899년 경상남도 마산(현 경남 창원시)에서 태어났다.한국체육기자연맹이 1993년 발간한 '일장기 말소의거 기자 이길용'에 따르면 마산 지역 상인이었던 그의 부친은 자식 교육을 위해 인천 동구 창영동으로 이사했다고 한다.인천영화학교(현 인천영화초등학교)를 졸업한 이길용은 서울에 있는 배재학당(현 배재중·고등학교)에 입학했다.이 시기 이길용은 경인선을 타고 서울로 통학하면서 이후 인천 지역 주요 인사로 성장한 이들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이러한 활동은 그가 이후 인천을 연고로 한 배재학당 출신들의 모임인 '인배회'와문화사업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물포 청년회'에서 활동하는 데 초석이 됐다. 1916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후 일본에 잠시 유학한 이길용은 1918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철도 수송업무를 담당하던 그는 중국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인쇄된 반일(反日) 격문을 열차를 통해 옮기다 일본 경찰에 적발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서대문형무소에서 이길용은 그의 일생에서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송진우(1887~1945)와 만났다. 이길용은 출옥 후인 1921년 당시 동아일보 사장인 송진우의 권유를 받아 신문사에 입사해 체육기자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그가 체육기자의 길로 들어선 1920년대는 3·1 만세 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책이 펼쳐지던 시기다. 당시 지식인들은 스포츠가 민족을 단결하고, 세계에 우리나라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배재학당 시절부터 여러 스포츠를 접한 이길용에게 체육은 또 다른 형태의 민족 운동이었다. 그는 1927년 '조선운동기자단'을 조직하고, 1930년부터 새 체육용어 보급 사업에도 힘쓰기 시작했다.베를린올림픽이 열린 1936년. 당시 동아일보에는 독립운동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사장인 송진우는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인물이고, 사회부장이었던 소설가 현진건(1900~1943)은 시인 이육사와 함께 글로써 일제에 저항한 문인이다.인천의 독립운동가인 신낙균도 사진부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인천상업고등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출신인 신낙균은 우리나라 1세대 포토저널리스트다. 그가 사진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은 3·1 운동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191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고향인 경기도 안성에 머물던 신낙균은 친구들과 함께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된 그는 몰래 안성을 빠져나와 서울 매부의 집으로 피신해 8개월 동안 숨어 살았다. 이곳에서 신낙균은 아마추어 사진가였던 매부 정욱진에게 사진을 처음 접했다. 일본 유학길에 오른 신낙균은 1927년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당시 일본의 유일한 사진전문 교육기관인 '동경사진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신낙균은 평소 후배 사진가 교육 과정에서 "사진은 단순히 기념이나 오락이 아니다. 사진의 앵글에 따라 국가의 안위가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을 즐겨 사용했을 정도로 굳은 신념을 지닌 사람이었다.1930년대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의 관찰 대상이었다. 사장 송진우의 주도로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농촌계몽운동의 하나인 문맹 퇴치 운동 '브나로드 운동'을 진행했고,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하며 종교의 자유를 지지했기 때문이다.베를린올림픽 마지막 날인 1936년 8월 10일. 이날 열린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1등으로 들어왔고, 동아일보는 보름이 지난 8월 25일 자 2면에 손기정 우승 특집 기사를 게재하면서 일장기를 고의로 지웠다.당시 언론이 일본 대표로 참여한 조선인의 유니폼에서 일장기를 지운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길용도 자필 수기를 통해 "일제강점기 때 신문의 일장기 사진 말소는 항다반(恒茶飯·차를 마시는 일처럼 흔한 일)으로 부지기수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이길용은 이보다 4년 전인 1932년 LA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마라톤에 참가한 김은배(6위)와 권태하(9위)의 사진 속 일장기를 지운 바 있다. 당시에는 다행히 조선총독부가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조용히 넘어갔다고 한다. 손기정이 우승한 3일 뒤인 8월 13일 자에는 '조선중앙일보' 4면과 동아일보 지방판 2면에 일장기가 없는 사진이 실렸다. 193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발간한 '조선출판경찰개요'에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있는 일장기 마크는 물론, 손 선수 자체의 용모조차 잘 판명되지 않은 까닭에 당국으로서는 졸렬한 인쇄 기술에 의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힌 점을 고려하면, 당시 조선총독부는 인쇄 오류로 일장기가 지워진 것으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8월 25일 자 신문은 조선총독부 감시망에 걸렸다. 사진 속 손기정의 얼굴 등이 너무 선명하게 나와 고의로 일장기만 지운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한체육기자연맹이 발간한 '일장기 말소 사건 의거 기자 이길용'에 따르면 일장기 말소 사실은 일본군 사령부가 신문 발행일인 24일 오후 4시 신문 배송 중지를 명령했으나, 이미 발송이 끝난 상태였다.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경기도 경찰부장은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에 일장기 말소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이길용은 조사부원 이상범에게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24일 자 석간에 실으려 하는 흉부의 일장기를 흐릿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상범은 이를 승낙하고 원화에 착색한 뒤, 사진부 과장 신낙균의 책상 위에 갖다 놓았다. 그런 후에 사회부 기자 장용서가 24일 오후 2시 반경 사진부실에 와서 사진부 과장 신낙균과 사진부원 서형호에게 '이상범이 지우기는 했으나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해 동판에 현출된 사진 중 일장기 부분에 청산가리 농액을 사용해 말소한 뒤 인쇄 부로 넘겨 다음 날 석간에 게재한 것이다."일장기 말소 과정에 동아일보 편집국 전체가 참여한 셈이다. 게다가 이길용이 처음 일장기가 있는 사진 수정을 부탁했던 사람은 월북화가이자 당시 동아일보 삽화가였던 정현웅(1911~1976)이었다고 한다. 그의 유족들의 증언으로는 이날 오전 신문에 들어갈 손기정 사진 수정 작업을 시작한 정현웅은 점심을 먹고 일장기를 지우고 마무리할 생각이었는데, 사무실에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옆자리에 있던 이상범이 대신 일장기를 지웠다. 이 이야기는 정현웅 평전인 '시대와 예술의 경계인 정현웅'에 잘 나와 있다.이길용 본인도 1948년 발간한 '신문기자 수첩'이라는 책에서 "세상이 알기는 백림(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살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총독부에서 일본 본토를 가리킬 때 쓰도록 강요한) 내지(內地)라는 글을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밝혔다.일장기를 지운 대가는 혹독했다. 동아일보는 8월 29일부터 무기정간 처분이 내려져 발행이 중단됐고, 8명의 기자가 경기도 감찰부에 체포됐다.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이길용과 신낙균 등 5명은 40일에 걸쳐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들은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서약서에 강제로 서명한 뒤에야 석방됐다.감옥에서 풀려난 이길용은 이후에도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반일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광복 전까지 4차례나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신낙균도 이 사건으로 언론계뿐만 아니라 사진계에서도 추방당했다.해방 이후 이길용은 우리나라 체육 역사를 정리한 백서 발간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6·25 전쟁 당시 납북돼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신낙균은 수원북중학교에서 물리교사로 일하다가 1955년 숨을 거두었다.2017년 8월 25일 서울시 중구 손기정로 손기정기념관에 이길용 흉상이 손기정 선수의 동상과 나란히 놓였다. 이날은 1936년 이길용이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이 동아일보에 실린 날이다. 같은 해 4월에는 신낙균의 묘소가 국내 사진 전문가 중 처음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길용과 신낙균은 일장기가 삭제된 손기정의 사진과 함께 금메달 소식을 전했다. 이는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이길용의 셋째 아들인 이태영(78) 대한체육회 고문은 지난 23일 경인일보와의 통화에서 "납북 당시에는 내가 10살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확한 모습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성격이 대쪽같고 강인했던 것만큼은 기억이 난다"며 "이런 성격이 일장기 말소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일장기가 지워진 채 발행된 1936년 8월 25일 자 동아일보 2면(사진 왼쪽)과 원본 사진. /손기정기념재단 제공(왼쪽부터)이길용·신낙균경기도 경찰부장이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에 보고한 일장기 말소사건 조직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2017년 손기정 기념관에 설치된 이길용 흉상. /손기정기념재단 제공

2019-08-28 김주엽

[인천경영포럼]윤상현 의원 "문재인대통령이 아베에 비공개 특사 보내야"

한일관계 개선 외교적 해법 제시"그래도 안되면 국제재판소 가야"자유한국당 소속 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천 미추홀구을)은 "문재인 대통령이 아베 총리실에 비공개 특사를 보내 무역 보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윤상현 위원장은 22일 인천 연수구 라마다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408회 조찬강연회에서 한일관계 개선 해법을 이같이 제시했다. 윤상현 위원장은 "이 문제를 끝낼 타임 테이블을 만들어서 양측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하면 12월 31일까지 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윤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관계를 "마주 달려오는 기차"로 비유한 뒤 "감정적 대응을 하지 말고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윤 위원장은 "일본은 수출 규제가 아닌 '수출 관리'라고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강제 징용자의 청구권을 인정한 작년 말 대법원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라며 "결국 정치·역사 문제가 경제보복으로 가게 됐는데 정말 졸렬하기 짝이 없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그러면서 "일본의 요구는 과거 박정희 정권과의 한일협정으로 강제 징용 배상 문제가 해결됐는데 지금의 대법원 판결로 다른 입장이 나왔으니 이를 해소해달라는 것"이라며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일본이 요구하는 외교적 협의와 중재위원회 구성, 제3국을 통한 중재위원회 구성에 대해 모두 답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윤상현 위원장은 "대법원 판결이 한일협정과 불일치하게 나왔다면 외교적 노력을 해야 하지만 정부가 이를 방치했다"며 "대통령이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기꺼이 손을 잡겠다고 했는데 이미 일본은 작년 말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후부터 대화를 계속 요구해왔다"고 말했다. 윤 위원장은 "양국은 현재 진행하는 모든 조치를 올스톱하고, 대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윤상현 위원장은 이 문제가 풀리지 않고 양국의 무역 전쟁이 벌어지면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윤 위원장은 "국제법의 조류가 개인의 청구권은 인정하는 추세"라며 "일부 승소, 일부 패소 판결을 이뤄낼 수 있고 완전히 지지는 않기 때문에 외교적 해법이 안 되면 ICJ라도 가야한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이 22일 라마다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조찬간담회 강연자로 나와 한일관계 전망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인천경영포럼 제공

2019-08-22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24)]장봉도 할아버지 송두용

옥고도 치러… 2010년 유공자 인정해방이후 남북통일 염원 밝히기도인천 장봉도에서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헌신했던 기독교 신앙인 송두용(1904~1986) 선생.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라는 다소 생소한 신념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빈민구제 활동가로 잘 알려진 그는 독립운동 행적과 사상과 관련해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편이다.송두용은 뜻을 함께한 신앙인들과 함께 만든 기독교 잡지 '성서조선'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했다. "매서운 추위에도 살아남는 개구리는 있다"는 내용의 성서조선 158호(1942년 3월)의 권두언은 칼끝과 총부리로 우리 민족을 겨누고 말살하려 했던 일제에 일침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송두용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송두용은 이 사건에 대해 "일본 경찰은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모조리 검거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치성은 전혀 없고 다만 기독자로서 양심생활을 한 것뿐"이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 정치적 행동과 거리가 먼 신앙 그 자체를 위한 활동(신앙만의 신앙)이었다고 밝혔지만, 순수한 신앙심이 결국 민족의 해방과 평화에 대한 갈망을 불러왔다. 정부는 2010년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송두용은 해방 이후에도 신앙과 관련한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많은 글을 남겼다. 3·1 운동 정신은 거창한 행사가 아닌 실력 양성으로 일본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다.그토록 염원하던 해방 이후 송두용은 남북을 비롯한 전 세계의 평화를 원했다. 평화를 바탕으로 남북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그의 바람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송두용은 해방 22주년을 맞았던 1967년 8월 "이제는 각각 남의 나라처럼 또는 피차 독립국가인 양 당연한 것 같이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듯이 체념하고 있는지 모른다. 천만의 말이다. 어서 남북이 합쳐야 한다. 하루속히 통일 국가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8-21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23)]장봉도 할아버지 송두용과 성서조선사건

일본서 성경 중심 무교회주의 들여와 연구회 조직 '성서조선' 발행158호 弔蛙 통해 '한두 마리는 살아남듯' 말살정책 극복의지 표현해방 후 장봉도 푸른학원 이어받아 빈민구호·교육사업에도 힘써태평양전쟁 발발로 일제의 식민지 수탈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 초반 서울에서 발행된 한 기독교 잡지 첫 장에 의미심장한 내용의 권두언이 실렸다.권두언의 제목은 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의 '조와(弔蛙)'. 1942년 3월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기독교 신앙 잡지인 '성서조선(聖書朝鮮)' 158호에 겨울잠을 자다 얼어 죽은 개구리를 빗대 민족의 참담한 현실을 고발한 글이 실렸다.일본은 잡지 발행에 가담한 인물과 독자들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이었다.이 사건의 중심에는 훗날 인천 장봉도에서 빈민구제 활동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던 독립운동가 송두용(1904~1986) 선생이 있었다.송두용은 1904년 7월 31일 충청남도 대덕군(지금의 대전시 대덕구)에서 부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에 입양됐다가 서울로 유학해 제동공립보통학교와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그는 18세 나이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 사건이 발생해 귀국했다. 그리고 21살 때 다시 일본 도쿄농업대학 예과로 진학했다. 그는 일본 유학생활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인생이 바뀌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제도권 아래 있는 교회 제도를 비판하며 성서와 신앙만으로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무교회주의'가 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교인 수를 늘리고 헌금 걷기에만 혈안이 돼 있는 기성 교단을 부정했다.송두용은 일본에서 무교회주의를 설파하던 우치무라 간조의 강연에 감명을 얻어 한국인 유학생인 김교신, 함석헌, 유석동, 양인성, 정상훈과 함께 '성서연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1927년 무교회주의 신앙을 기반으로 한 잡지 '성서조선'을 처음 발행했다. 송두용은 성서조선 6인방 중 가장 나이가 어린 23세였다.1930년 귀국한 송두용은 부천군 오류동(지금의 구로구)을 기반으로 성서집회를 열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송두용 등 6인방은 성서조선 발간과 함께 서울, 인천, 부천 등지를 다니며 강연을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때부터 율목동의 인천모임을 만들어 무교회주의를 알리고 주변에 성서조선을 전달했다.김교신이 1927년 7월에 쓴 성서조선의 창간사는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 신자보다도 조선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에 나뭇군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는 내용이다.민족의식을 가진 기독교인들의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하는 등 종교 운동을 바탕으로 한 항일의식이 확산하자 일제는 기독교를 철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결국 1942년 3월 송두용과 김교신 등이 성서조선 권두언에 실은 '조와'가 일제의 감시망에 잡혔다."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이 바위틈의 빙괴(永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 만에 친구 와군(蛙君)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潭) 속을 구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 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는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潭水)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의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마리 기여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이 글은 혹독한 추위가 와서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죽어 나가더라도 한두 마리는 살아남듯이 일제가 아무리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더라도 끝내 살아남는 한국인이 있다는 얘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일제는 송두용과 김교신 등 6인방과 주요 독자 12명을 치안유지법 혐의로 체포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가뒀다. 이 사건으로 송두용은 10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고 결국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성서조선도 '조와'가 실린 통권 158호를 끝으로 폐간됐다.송두용과 동시대에 무교회주의 활동을 했던 노평구는 당시 일제가 무력 투쟁이나 드러내놓고 하는 독립운동보다는 이 같은 종교·문화 운동을 더 두려워했다고 회상했다. 노평구는 송두용이 잡지에 쓴 글을 모아 총 6권 분량의 송두용신앙문집을 펴내기도 했다. 성서조선사건 당시 일본 경찰은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놈들 가운데서 가장 악질의 부류들이다. 결사니 조국이니 해가면서 팔딱팔딱 뛰어다니는 놈들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에라도 아니 오백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노평구는 밝혔다.송두용은 해방 이후에도 개인의 신앙생활과 함께 구호활동과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1930년 오류동에서 오류학원을 설립해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펼쳤던 송두용은 1969년부터 장봉도에서 지인의 제안을 받아 '푸른학원'이라는 교육기관의 운영을 맡았다. 건강 문제로 요양차 장봉도에 들렀다가 1967년 푸른학원을 설립한 무교회 신앙인 노연태로부터 푸른학원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는 '장봉도 할아버지'라는 별칭이 붙었다.당시 장봉도에는 초등학교밖에 없어 육지의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은 바다에 나가 굴이나 조개를 따거나 선주 밑에서 새우 선별작업을 하는 고된 일을 하면서 자랐다. 강화도와 영종도, 신·시·모도, 장봉도 일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노연태는 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송두용은 '정직'을 교훈으로 내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박정수 등 인천에서 함께 신앙 모임을 갖던 사람들도 푸른학원에서 교사 활동을 했다. 푸른학원은 1974년 정식으로 중등학교 인가를 받아 푸른고등공민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발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육지로의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푸른학원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이 급격히 감소했다.송두용의 건강이 악화되고, 학생 수가 자연스럽게 줄면서 1982년 푸른학원은 결국 문을 닫고 만다. 인천섬연구총서 '장봉도'편을 보면 1982년 장봉도 초등학교 졸업생이 36명이었는데, 푸른학원으로 진학하겠다는 학생은 겨우 4명에 불과했다고 한다.10년 넘게 장봉도의 학생들을 위해 헌신했던 송두용은 1986년 4월 10일 서울 구로구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따르던 제자들과 무교회주의 신앙인들은 송두용의 추모집을 발간하고, 그가 쓴 글을 모아 문집을 내기도 했다.송두용은 무교회주의 종교인이면서 민족의식을 지닌 독립운동가였다. 2010년 송두용은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이 인정돼 독립유공자 서훈(건국포장)을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그를 '인천' 출신으로 분류하고 있다.송두용은 1958년 3월 잡지 '성서인생' 33호에 쓴 '진정한 3·1 정신'이라는 글을 통해 60년 뒤를 내다보기라도 하듯 현세대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을 남겼다.그는 3·1 정신은 말이나 형식이 아니고 마음이며 산 생명이라고 했다.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각종 기념식 행사에만 치중해 진정한 독립의 의미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을 일찍이 우려했던 거다. 그는 "3·1 운동은 한 개인, 한 정당, 또는 한 단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정치인도 근로대중도, 부호도 빈자도, 남녀노유의 구별 없이 도시와 촌락의 차이가 있을 리가 없다"고 했다.그는 특히 3·1 운동의 정신은 국민 개인이 실력을 양성해 각자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일본 아베 정부의 무역보복 조치로 반일 감정이 확산하면서 정부와 국민들이 '극일(克日)'의지를 불태우는 현 시국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송두용은 "우리는 소련의 공산주의를 무서워하거나 일본의 침략정신을 겁낼 것이 없다. 일본을 이기고 소련을 물리치려면 오직 실력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허위와 외식을 버리고 허영과 기만을 떠나서 다만 진실 일로로 매진하는 수밖에 없다. 3·1 정신은 행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실천궁행으로 사는 것이며 이룰 것이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성서조선 158호에 일제 저항정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권두언 '조와(弔蛙)'를 실었다가 옥고를 치른 무교회주의 6인방. 뒷줄 왼쪽부터 양인성, 함석헌, 앞줄 왼쪽부터 유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송두용 등 무교회주의 신앙인 6명이 발행한 잡지 '성서조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1930년 오류학원을 설립할 당시의 송두용.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1958년 3월 송두용이 3·1정신에 대한 글을 썼던 잡지 성서인생.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

2019-08-21 김민재

[인천의 얼굴·(16)]인천화교학교 손승종 교장

1930년대 할아버지부터 정착 5대째 이어학생들 사자·용춤 배워 시민과 가까워지길인천의 대표음식이라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다들 짜장면을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그렇습니다. 인천 하면 짜장면이지요. 그런 점에서 짜장면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인천의 화교(華僑)들은 인천의 대표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화교의 역사는 인천에서 시작합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제물포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를 따라온 40여명의 군역 상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인천에 정착하면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교육기관이 필수적이었습니다. 1902년 소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인천화교중산소학(이하 인천화교학교)의 모태입니다.손승종(60) 인천화교학교 교장도 이 학교 출신입니다. 인천화교학교는 유치원, 초등부·중등부·고등부가 있습니다. '중산'은 중화민국을 세운 쑨원(1866~1925)의 아호입니다. 대만의 교육과정을 따르고 있습니다. 대만과는 달리 한국어 수업시간이 있기는 합니다.손승종 교장의 할아버지가 1930년대 중국 산둥반도에서 한국으로 건너왔다고 합니다. 손 교장의 손자까지 5대째 인천에 살고 있습니다. 1960~70년대에는 학생이 1천200명을 넘었습니다. 지금은 400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화교 배척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이들이 떠났습니다.화교사회도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집에서 중국어만 썼습니다. 그러니 한국말이 서툴 수밖에 없었지요. 영락없는 이방인이었지요.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중국말이 서툽니다. 손승종 교장은 그게 걱정입니다. 화교학생들이 중국말에 서툰 것은 화교들의 한국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손승종 교장은 학부모들에게 당부합니다. 집에서는 되도록 중국어를 쓰도록 해달라고요. 그러면서 하나 더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화교사회와 인천과의 소통입니다. 학생들이 사자춤과 용춤을 제대로 배워, 이를 통해 인천 시민들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손승종 교장은 올해 10월 10일 쌍십절 기념일에 펼칠 춤공연이 인천과의 소통의 장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10월이 벌써 기다려집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8-20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23)]용동 출신 박남칠

내리교회 교인 父영향 日 억압속 '엡윗청년회' 소년운동 주도 야학등 열며 애국심 고취YMCA 중등부에서 '사회주의' 눈 떠… 조봉암과 '운명적 만남' 평생 후원자·동지관계미곡상 경영하며 인천·강화지역 좌익 독립활동가 '구심점 역할' 청년운동도 지속 펼쳐해방후 여운형 '건국준비위' 참여 한국전쟁때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희생' 재평가 필요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인천의 대표적인 좌익 활동가로 올해 서거 60주기를 맞은 죽산 조봉암 선생을 꼽는 데 누구나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조봉암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동지이며 기독교 사회주의자로서 인천의 근현대 좌익 활동을 이끌었던 박남칠(1902~1950)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박남칠은 드러내놓고 독립운동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인천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청년운동과 소년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청년들의 문화·체육 활동과 강연회 개최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힘썼고, 한편으로는 사업가로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또 인천·강화지역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연결고리이자 구심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박남칠 연구는 교사 출신의 인천 향토사학자 이성진 인천골목지킴이 대표의 성과가 유일하다. 이 대표는 인천의 근현대 인물 가운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박남칠에 주목하고, 그의 생애와 사상 전반에 대해 연구해 왔다. 현재 알려진 박남칠의 행적은 대부분 이 대표가 1차 사료를 수집해 정리한 자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박남칠은 과거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천 근현대사의 '엑스트라'로만 남아 있다. 올해 독립운동 100년을 맞아 후학들이 재조명해야 할 산더미처럼 쌓인 인천의 인물 가운데 박남칠이 빠져선 안된다.박남칠은 1902년 5월 20일 인천 용동에서 미곡상을 하는 박삼홍과 허매란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남칠은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 박삼홍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박삼홍은 1890년대 미곡상으로 부를 쌓았고, 한국인 최초의 목사인 김기범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내리교회 교인이었던 박삼홍은 인천 소년운동의 효시이기도 한 '엡윗청년회'의 초기 멤버였다. 엡윗청년회는 1889년 미국 감리교 내 청년단체로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고향 엡윗(Epworth)에서 이름을 따왔다. 엡윗청년회는 선교사들의 해외 파견지에도 조직됐는데 1897년 인천 내리교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엡윗청년회가 만들어졌고, 서울·강화 등지로 퍼져나갔다. 조봉암도 강화 잠두교회의 엡윗청년회 출신으로 훗날 박남칠과 인연을 맺는다.박삼홍은 내리교회 엡윗청년회 회장을 지내면서 계몽운동을 이끌었고, 이는 애국·민족 운동으로 확대됐다. 결국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진남포 지방 총무였던 김구 등 전국 엡윗선교회 임원들이 구국기도회를 개최하고 상소운동을 벌인 일은 유명하다. 이 일로, 이듬해 6월 일본은 감리교 내 친일성향의 선교사를 회유해 엡윗선교회를 해산하도록 했다. 인천 내리교회 엡윗선교회도 창립 9년 만에 해체됐지만, 박삼홍은 1908년 재조직을 감행해 기독교 청년운동의 맥을 이었다. 기독교 신앙과 포교가 바탕이었지만, 문맹퇴치사업과 연극 공연, 강연회 개최 등으로 민족 의식을 배양하는 게 주된 임무였다. 육영사업에도 앞장서 내리교회가 세운 영화학교에 많은 돈을 기부했고, 다른 학교에서 체육행사가 열리면 기꺼이 후원금을 보탰다.박남칠은 이런 아버지 곁에서 소년운동과 청년운동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배우면서 자랐다. 그는 1918년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 있는 YMCA 중등부 과정에 진학했다. 이때 교장이 월남 이상재 선생이었다. 박남칠은 여기서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됐고, 세 살 위인 죽산 조봉암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됐다.소설가 이원규가 쓴 죽산 조봉암 평전에도 둘의 만남이 소설처럼 그려지고 있다."동급생 중에 그를 친형처럼 정겹게 따르는 청년이 있었다. 인천 출신의 박남칠이었다. 조봉암은 그가 신흥우 선생의 수업시간에 맨 앞에 앉아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해 열심히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고 괜찮은 녀석이라고 여겨온 터였다."1920년 5월 죽산이 의친왕 망명을 시도한 대동단 사건에 휘말려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난 뒤 몸을 추스른 곳도 박남칠의 셋방이었다.박남칠은 공부를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와 아버지 밑에서 미곡상 경영을 도왔다. 미곡상에서 정미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아버지는 사업이 번성할수록 상도덕을 지키라고 박남칠에게 늘 당부했다. 당시 곡식의 중량을 속여 파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기독교와 사회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워 서로 반감을 갖고 있지만, 유독 인천은 사정이 달랐다. 1920년대 내리교회 담임 목사는 독립운동가 김진호 목사와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였던 신홍식 목사였다. 방법은 달랐으나 조국의 독립을 위한 목표는 같았던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연대했다. 이런 분위기의 중심에 박남칠이 있었다. 내리교회 엡윗청년회는 일제의 압력 속에서도 꿋꿋이 활동을 이어갔다. 엡윗청년회 출신의 하상훈, 서병훈, 이범진, 이길용 등이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이끌었고, 이들은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이 됐다. 야학과 웅변대회, 토론회를 열어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했고, 기독교의 구원은 개인이 아닌 사회를 의미한다고 설파하며 기독교를 식민지 민족의식 배양의 거름으로 삼았다. 사회참여를 고민하는 청년에게 기독교가 하나의 진입 경로 역할을 한 셈이다.서울 YMCA에서 조봉암과 연을 맺은 박남칠은 조봉암이 조직한 신흥청년동맹 전국 순회 시국강연의 인천 행사를 담당했다. 당시 조봉암은 공산당의 심장인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다 국내 사회주의 세력과의 결합을 도모하고 있었다.조봉암이 1924년 4월 19일 인천 산수정 공회당(지금의 송학동 인성여고 부근)에서 연 신흥청년동맹의 인천 강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봉암 일행의 인천 강연 예고 기사를 실으며 분위기를 띄웠다. 조봉암은 이 자리에서 "대중을 본위로 삼는 민중운동이 조선인의 유일한 살길이며 따라서 이러한 신사상을 널리 판매하겠다"고 해 호응을 얻었다.박남칠은 이날 조봉암에 김용구와 이보운, 이승엽, 유두희, 권평근 등 인천의 청년 지도자들을 소개했다. 장차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어갈 이들의 만남에 박남칠이 주선자로 나선 것이다.박남칠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내리교회 소년척후대 활동이다. 내리교회 엡윗청년단이 주도해 만든 단체로 오늘날의 보이스카우트와 비슷한 소년단체다. 신태범(1912~2001) 박사는 '인천 한세기'에서 "내리 소년척후대는 교회대였으므로 지도자도 넉넉했고 후속 대원도 꾸준해서 착실한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여러 차례 큰비만 오면 침수 소동이 나는 화수동 일대의 구원활동을 했고, 어린이날 행사에 협조해 가면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박남칠은 소년척후대 지도자로서 주말마다 정기집회를 갖고, 어린 대원들에게는 한국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높였다. 평일에도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치면서 생활 속 애국을 실천하도록 했다. 이런 왕성한 활동으로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자 일본 경찰은 소년척후대의 야영이나 집회를 감시할 정도였다. 전국 각지 소년척후대 출신들이 항일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일제는 이를 불온 단체로 여겨 행사마다 입회했다고 한다.1940년대 들어 교회가 일제에 순응하고, 미곡상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박남칠도 고비를 맞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 아래 쌀 정량을 지키는 도덕적인 사업가로 알려져 신망이 두터운 터였다. 그는 정미소 이름도 '남이 잘 되는 것을 바란다'는 뜻의 '송무백열(松茂柏悅)'에서 따와 송무정미소로 지었다. 이는 소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측백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인데, 손님이 잘 되는 것을 가게 주인이 기뻐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박남칠은 상공인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1935~1940년 인천상공회의소 평의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는데 훗날 일본의 어용단체에 참여했다는 부정적 인식이 꼬리표처럼 달렸다.그러나 1938년 9월 27일 동아일보 기사는 그를 "공익심이 많은 실업가로 일반의 신망이 두텁다.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아끼지 않고 더욱이 육영사업과 소년지도에 부단히 노력하는 사회적 유지"라고 소개했다. 친일 부역자라면 얻기 힘든 평가이다.미곡상조합장을 맡기도 했던 박남칠은 이 무렵 감옥에서 출옥해 생계가 곤란했던 조봉암이 인천비강업조합장을 맡을 수 있도록 했다. 또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전향을 하고 돌아온 인천 출신 사회주의 활동가 이승엽을 미곡상조합 사무장으로 취직시켰다. 이뿐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동지들이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식민지 수탈 시기 성공한 사업가로서 독립운동자들의 경제적인 버팀목이 되어준 셈이다.그는 해방 이후에도 사회주의 노선을 유지해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보도연맹 학살 사건 희생자가 됐다. 조국 해방으로 건국 준비에 여념이 없던 그가 좌우 이념 대립의 희생양이 된 거였다.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한국전쟁 전후 인천에서 벌어진 민간인학살사건 피해자 62명 중 박남칠이 포함됐다고 밝혔다. 좌익 사상가를 공산당 부역자라는 이유로 무차별 학살한 사건에 희생된 것이다. 박남칠은 1950년 6월 30일 무렵 집에 숨어 있다가 발각돼 살해됐고, 소월미도에 수장됐다고 알려졌다. 과거사위는 "박남칠이 인천시청에서 열린 군중집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당시 보도연맹원 단속을 피해 숨어 있다가 어린 조카가 경찰에게 뒷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 연행된 후 살해됐다"고 밝혔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아이클릭아트내리교회 소년척후대. 사진 가운데가 박남칠. /인천시 역사자료관내리교회 집총고적대. /인천시 역사자료관엡윗청년회 여자야학부. /인천시 역사자료관

2019-08-14 김민재

[zoom in 송도]5공구 글로벌파크 3·4지구… 이달중 개방

3지구, 책읽는 쉼터·야외 공연장피크닉광장·카페테리아 등 마련4지구엔 어린이들 전용 물놀이장축구·풋살장 등 다양한 체육시설인천 송도국제도시 5공구에 조성한 글로벌파크 3·4지구가 이달 중 인천시민에게 개방된다. 글로벌파크 3·4지구는 송도 에듀포레 푸르지오와 인천글로벌캠퍼스(해외 명문대 공동 캠퍼스) 인근에 있다. 면적은 10만8천775㎡다. 2017년 11월 착공한 지 1년 9개월 만에 완공됐다. 현재 개장을 앞두고 마무리 작업 및 시설 점검이 진행되고 있다. 글로벌파크 3·4지구는 주제가 있는 공원이다. 3지구는 '책 읽기 좋은 공원'이고, 4지구는 '운동을 즐길 수 있는 공원'이다. 3지구는 정적이고, 4지구는 동적인 분위기다. → 위치도 참조글로벌파크 3지구에는 '북카페'와 '독서마당' 등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많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우드 데크를 설치하고 그 위에 벤치와 북카페를 만들었다. 많은 사람이 바닥에 걸터앉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우드 데크를 2단의 계단식으로 설치했다. 북카페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거나 비가 내리는 날에도 책을 읽을 수 있으며 책장처럼 쓸 수 있는 선반도 있다. 작은 카페를 공원에 옮겨 놓은 것 같다.독서마당은 반원(半圓) 형태의 돌담으로 돼 있다. 돌담에 앉아 책을 볼 수 있게 설계한 것이다.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지면 아늑한 느낌의 공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3지구 중앙부에는 '물결마당'이 있다. 바다에 물결이 일어나는 것을 표현한 꽃밭이다. 인천이 '해양 도시'이고, 송도가 바다와 가까운 점을 고려해 이같이 설계했다고 한다.3지구에는 음악회 등 공연을 열 수 있는 '야외무대'가 있다. '피크닉광장'(잔디밭)과 '카페테리아'도 있다. 카페테리아는 건물 외관이 거의 완성된 상태로, 운영사업자가 선정되면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거쳐 문을 열 예정이다. 글로벌파크 4지구는 축구장, 풋살장, 농구장 등의 체육시설을 갖추고 있다. 축구장은 인조단지가 깔린 국제 규격 구장이다. 농구장은 풀 코트 1개와 하프 코트 2개로 구성됐다. 풀 코트 바닥은 눈부심이 적고 공이 잘 튀기는 조립식 매트로 돼 있으며, 반 코트는 탄성 우레탄 소재가 사용됐다. 축구장, 풋살장, 농구장에는 LED 조명탑이 설치돼 있어 저녁에도 이용할 수 있다. 구장 옆에는 음수대와 화장실이 있다.4지구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물놀이장'이 있다. 여름에는 물놀이장으로 이용하고 봄·가을·겨울에는 놀이터로 활용하는 시설이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송도에 어린이 물놀이터가 없는 점을 고려해 물놀이장을 조성했다"며 "아이들이 물과 함께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물놀이장에는 부모들을 위한 그늘막 쉼터가 마련돼 있다. 아이들이 물놀이장에 들어가기 전 발을 씻는 세족 시설, 물놀이 후 이용하는 샤워 시설도 갖추고 있다. 시공사 관계자는 "물놀이장은 목재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며 "깨끗한 수질 관리를 위해 수로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물을 공급하는 방식을 채택했다"고 말했다.글로벌파크 3·4지구 보행로는 보도블록을 사용하지 않았다. 보도블록 방식은 유모차를 밀고 다니거나 롤러스케이트·킥보드 등을 타는 데 불편하기 때문이다. 보행로에 아스팔트를 포장한 후 보도블록 문양을 그렸다.인천경제청은 글로벌파크 3·4지구에 소나무 등 큰 나무 4천291그루를 심어 충분한 녹음이 확보될 수 있도록 했다.또 영산홍 등 작은 나무 3만3천46그루와 구절초 등 초화류 4만5천본을 식재했다.글로벌파크는 기존 미추홀공원, 누리공원(문화공원)과 연결돼 약 2.6㎞의 거대한 녹지 축을 형성한다. 인천경제청은 이들 공원을 연결하는 보행 녹도(3개) 건설사업을 내년 3월 준공 목표로 진행 중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송도 5공구 글로벌파크 3지구에 마련한 '북카페'·'독서마당'(사진 왼쪽부터)송도 5공구 글로벌파크 4지구에 조성된 어린이 물놀이장.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9-08-11 목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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