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독립운동과 인천·(12)]女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김란사(上)

조선말 개항장 감리지낸 남편따라 인천과 인연'뜨거운 학구열' 기혼녀임에도 이화학당 입학독립운동가 서재필 연설에 '감동' 미국行웨슬리언대서 한국 여성 최초 '문학사' 학위귀국후 고종 통역役·이화학당서 첫 여성교수 임명김란사(金蘭史·1872~1919)는 시대를 앞선 여성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문학사'(Bachelor of Literature) 학위를 취득했고, 최초의 여성 대학교수가 된 그의 행보는 당시 여성들이 가지 않은 길이었다. 이후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역사 전면에 등장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기도 했다. 김란사의 남편 하상기(河相驥·1855~1920)는 조선 말기 인천 개항장의 사법·행정과 국제업무를 총괄한 인천감리를 여러 차례 지낸 고위 관료였다. 하상기는 김란사가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여기에서 김란사와 인천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올해는 김란사 서거 100년이 되는 해이지만, 정작 그의 생애는 여전히 빈 칸 투성이다. 김란사와 관련해 근래에 쓰인 글들마저 출생연도, 유학 과정, 사망 경위 등이 제각각이다. 이름조차도 수년 전까지 남편의 성씨를 따랐던 '하란사'로 불렸다. 정부는 1995년 김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할 때 '하란사'로 표기했던 성명을 지난해 2월에서야 본래 이름으로 정정했다. 김란사의 생애를 제대로 복원하기 위한 연구가 절실하다.김란사는 이화학당에 입학할 때부터 일생을 관통한 신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헤아릴 수 있는 일화를 남겼다.이화학당 교장을 지낸 선교사 룰루 프라이(Lulu E. Frey·1863~1921)는 교사로 재직할 당시 김란사의 입학 신청을 한 차례 거절했다. 기혼 여성을 받지 않는 게 이화학당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김란사가 밤중에 이화학당을 직접 찾았지만, 프라이는 재차 입학이 어렵다고 했다. 그러자 김란사는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훅하고 불어 끄더니 "우리나라는 저 등불같이 매우 어둡다"며 어머니들이 배워 자식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결국 이화학당은 교육비용을 자부담한다는 조건으로 김란사의 입학을 허락했다. 프라이는 이 같은 내용을 1895~1896년 미국으로 보낸 이화학당 운영보고서에 담았다.김란사가 이화학당에 입학한 시기는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김란사와 하상기가 함께 1895년 봄 일본 도쿄에 있는 경응의숙(게이오의숙·慶應義塾)으로 유학을 갔다는 내용의 조선정부 문건들을 고려하면, 이화학당은 1894년쯤 들어갔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조선정부는 자비로 일본 유학 중인 김란사를 장학생(관비 유학생)으로 포함해주기도 했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김란사는 미국 유학파 독립운동가인 서재필(徐載弼·1864~1951)의 정동교회 연설에 감화돼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1920년 1월 22일자에 실린 '세 애국여사의 추도회' 기사에 이 같은 내용이 언급된다. 김란사는 1897년 말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입국해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남편도 동행했다가 곧 귀국했다. 이때부터 미국식으로 남편 성을 따라서 '하란사'라는 이름을 썼다. 유학 초기에는 워싱턴 D.C에 있는 하워드대학 예비과정 또는 '디커너스 트레이팅 스쿨'이라는 예비학교에서 수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0년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에 입학해 1906년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김란사의 조카손자인 김용택 '김란사 애국지사 기념사업회' 회장이 제공한 웨슬리언대학 학적부를 보면, 김란사는 3년간의 예비과정을 마치고 본과에 입학했다. 본과 1학년 때는 과학 전공을, 2~3학년 때는 문학 전공을 이수했다. 이름은 'Hahr, Nansa Kim Mrs.'라고 본래 성씨와 남편 성씨를 함께 썼다. 직업은 주부(Housewife)와 교사(Teacher)라고 표기돼 있고, 주소는 서울 이화학당으로 돼 있다. 이화여대가 1966년 웨슬리언대학에 김란사의 학적을 문의한 적이 있는데, 웨슬리언대학의 답장에는 "당시에 전공과목이 따로 없었을 때였으나, 그(김란사)는 영문성경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고 나온다. 김란사는 유학시절 웨슬리언대학 기숙사인 모네트홀에서 지냈다. 이화여대 이화역사관이 소장한 사진 속 김란사의 기숙사 방에 걸린 태극기가 눈에 띈다.긴 유학생활을 마친 김란사의 귀국에 국민적인 관심이 쏠렸다. '대한매일신보'는 1906년 8월 18일자 신문에서 '전 농상국장 하상기 씨 부인이 미국 화성돈에 가서 유학한 지 10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환국하여 동문 외본제에 주재한대 성 내외 사부가에서 여자교육을 부탁하는 이가 다다(多多)하다더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고종의 후비인 엄황귀비(1854~1911)는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 한성고등여학교 등 여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김란사의 자문을 받았다. 김란사는 고종의 통역을 맡으며 황실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1909년 5월 경희궁에서는 '여성 해외유학생 환영회'도 열렸다. 김란사,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1877~1910), 일본 유학생 윤정원(尹貞媛·1883~?) 등 해외 유학파 여성 3명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부인단체를 중심으로 마련한 행사다. 궁궐에서 개최한 만큼 황실과도 교감을 가진 행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인단체 대표들이 연설을 하고, 주인공 3명이 답사를 한 뒤 여학생들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유학생잡지 '대한흥학보' 제3호(1909년 5월 20일 발행)는 환영회에 700~800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전했다. 같은 해 고종은 세 여성에게 직접 은장을 수여하기도 했다.의친왕 파리강화회의 파송 '밀사'로 가던중중국서 급사… 1995년에야 건국훈장 추서 서거 100년 불구 사망 경위·행적등 연구 미흡김란사는 1907년부터 이화학당 교사 겸 기숙사 사감으로 일했고, 이어 총교사(교감)로 승격했다. 조선일보의 첫 여성 기자인 최은희(崔恩喜·1904∼1984)가 생전에 쓴 여성 열전을 묶은 책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2003)의 '하란사'편에서는 기숙사 사감인 김란사가 호랑이 어머니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엄격하고, 욕설을 잘하기로 유명했다고 썼다. 1910년 9월 이화학당에 대학과를 개설하면서 김란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수로 임명됐다.교수 재직 시절에는 개화파 인사인 윤치호(尹致昊·1866∼1945)와 선교잡지인 'The Korea Mission Field'를 통해 여성교육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윤치호가 해당 잡지에 신(新)학교 학생들은 대체로 집안 살림하는 법을 모른다는 취지의 글을 먼저 기고했고, 김란사가 '그 학교들의 목적과 방향은 슬기로운 어머니, 충실한 아내 및 개화된 가정주부가 될 수 있는 신여성을 배출하는 것이지 요리사나 간호원, 침모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글을 실었다.선교활동에도 적극적이었던 김란사는 1916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 감리교 총회에 한국교회 평신도 대표로 선정돼 다시 미국을 찾았다. 이후 2년여간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정동제일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하기 위한 모금활동을 펼쳤다. 도산 안창호(安昌浩·1878~1938)는 교민들에게 김란사의 모금활동을 돕자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재미동포들의 모금으로 1918년 설치한 정동제일교회 파이프오르간은 한국에서는 처음이었고, 동양에서는 두 번째였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됐다가 2003년 복원됐다.고종은 1919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에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1877~1955)을 파송할 계획을 추진했다. 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하는 회의에서 한일 강제병합의 부당함과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오하이오에서 유학한 의친왕과 교류가 있는 김란사도 밀사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김란사의 파리강화회의 비밀 파송과 관련한 공식적인 문건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신문기사와 해방 이후 관련 인사들의 자서전 등을 통한 후일담만 남아 있을 뿐이다. 파리로 향하던 김란사는 1919년 3월 10일 중국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갑작스럽게 숨을 거뒀다. 유행성 독감이라는 기록도 있고, 분사(憤死)했다거나 독살당했다는 설도 당시 떠돌았다. 김란사의 독립운동 행적이나 사망과 관련해 미진한 연구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 기숙사 '모네트홀'에 앉아 있는 김란사. 벽면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다. /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이 1966년 이화여대에 보낸 김란사의 학적 확인 답장. /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의 김란사 학적부. /김용택 '김란사 애국지사기념사업회' 회장 제공정부는 1995년 8월15일 김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면서 남편의 성을 따른 '하란사'(사진 오른쪽)로 성명을 표기했다. 김용택씨 등 후손들의 요청으로 지난해 2월 훈장증 성명을 본래의 이름인 '김란사'로 정정했다. /김용택 '김란사 애국지사기념사업회' 회장 제공일본 도쿄 경응의숙에서 유학한 조선 관비유학단이 1896년 친목회보에 실은 단체사진. 사진 속 하얀 한복을 입은 여성이 김란사다. 김란사 바로 왼쪽이 남편 하상기다. /이원규 작가 제공,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9-05-08 박경호

[인천의 얼굴·(9)]필리핀 출신 결혼이주여성 이소혜씨

얼마전 필리핀 모친마저 떠나 더 각별해연수원로모임 어버이날 효부상 희소식시어머니와 며느리. 우리에게는 마치 지금의 여야 관계처럼 불화와 갈등의 대명사로 다가옵니다. 그만큼 둘 사이는 불편한 관계란 얘기일 겁니다. 왼쪽 이순덕(81) 할머니와 오른쪽 이소혜(33)씨는 정말이지 친정엄마와 딸 같은 고부간(姑婦間)입니다. 이소혜씨는 2008년 필리핀에서 온 결혼 이주여성입니다. 원래 이름은 알디자(Aldiza)였는데 2015년 귀화하면서 시어머니 성을 따라서 이씨로 정했습니다. 결혼 2년 만에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딸이 7개월이었고, 막내아들이 뱃속에 있을 때였습니다. 누구 하나 아는 사람 없이 왔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죠. 고향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신 게 시어머니였습니다. 시어머니에게도 남편은 하나뿐인 아들이었지요. 말 그대로 동병상련이었습니다. 딸이 되기로 했습니다. 소혜씨는 시어머니를 엄마라 부르고,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알디자라고 필리핀 이름을 불러줍니다.필리핀 친정에는 1년에 한 차례씩은 다녀왔는데 몇 년 전부터 시어머니의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가지 못합니다. 시어머니 혼자서는 산책을 나가기조차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친정 가족들이 보고 싶지만 꾹 참고 SNS로 달랩니다. 2년 전에는 필리핀에 계신 친정엄마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뒤로는 더욱 시어머니가 친정엄마 같습니다. 엄마와 딸도 자주 다투듯이 이 둘 사이에도 말다툼이 있습니다. 음식 간을 맞추는 것이 싸움이 되고는 합니다. 필리핀에서 먹듯이 간을 하면 시어머니는 짜다고 타박을 하거든요. 여덟 살, 일곱 살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었으면 좋겠는데 시어머니는 일찍 자라고 성화지요. 목소리를 높여가며 싸우다가도 한나절이면 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수다를 떱니다.효부(孝婦)라는 말이 오히려 불편해진 요즘 세상입니다. 이 딸 같은 며느리에게 인천연수원로모임이라는 단체에서 올해 어버이날에 맞추어 효부상을 준다고 합니다. 인천에 사는 외국인이 10만4천여명인데, 결혼해 이민을 오거나 귀화한 사람은 2만1천여명입니다. 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5-06 윤설아

[독립운동과 인천·(11)]'이을규·정규' 형제

세살터울로 장봉도서 태어나 둘 다 인천고 졸업… 은행 그만두고 나란히 독립운동 길 나서형 이을규 대동단 '의친왕 망명사건' 주도로 옥고, 동생 정규 일본서 2·8독립선언대회 동참1921년 함께 중국행 '아나키스트' 왕성한 활동중 혁명고취 논문으로 동생 '징역 3년형' 고초해방후 각각 이승만정권 감찰위원·성균관대 총장지내… 형만 '유공자 서훈' 재조명 목소리한 배에서 나고 자란 형제이면서 같은 학교를 졸업한 동문인 독립운동가가 얼마나 있을까. 인천 장봉도에서 태어난 이을규(1894~1972)·이정규(1897~1984) 형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킬 무렵 인천고등학교(옛 인천공립상업학교)를 함께 다녔고, 졸업 후 독립운동 동지가 됐다.이을규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망명 사건을 주도했던 대동단의 핵심 인물이었고, 이정규는 우당 이회영과 함께 독립운동계 아나키즘 사상을 정립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두 형제는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죽음과 옥살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치열하게 독립운동 전선에 나섰다.이을규는 의친왕의 바로 옆에서 고비마다 큰 역할을 해냈던 중요한 인물로 1990년 독립유공자 애족장 서훈을 받았지만, 이정규는 생전에 본인의 뜻에 따라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지 않아 공훈기록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천의 독립운동가로서 이들의 생애와 독립운동 궤적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이을규·정규 형제는 각각 1894년과 1897년 인천 장봉도에서 태어났다. 정부 공식 문서라고 할 수 있는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과 백과사전에 이을규를 소개하는 글에는 충남 논산이 본적으로 돼 있으나, 이을규·정규 형제는 생전에 인천 장봉도 출신임을 분명히 밝혀왔다.일제의 강제 병합이 있던 해인 1910년 이을규가 먼저 인천고에 입학했고 이듬해 동생 이정규가 입학했다. 현재 졸업기수로 따지면 13회, 14회다.식민통치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1910년대 초반 학교는 교장과 교사들이 일본인으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교사는 제복을 입고 수업에 들어왔다. 인천고도 마찬가지였다. 이을규·정규 형제는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과 강압적인 교육에 대한 반발심이 커졌다고 한다.이들 형제는 학업에는 성실히 참여했다. 형 이을규는 수석 졸업생이었다. 지금의 도덕 교과목인 수신(修身)과 이과(理科) 분야 성적이 특히 우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생 이정규도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두 형제는 장봉도 출신인데 인천에서 운수업을 하던 큰 형을 따라 나왔다. 이들의 고등학교 학적부를 보면 이을규는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이정규는 인천 우각리(현 동구 금창동)에 있던 인명의숙을 졸업하고, 인천고에 진학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형제는 은행에 취직했지만, 일본인들의 민족 차별에 반발해 둘 다 사직했다. 그리고 나란히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다. 이을규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협·최익환 등이 결성한 대동단에 가입해 1919년 11월 '의친왕 망명사건'에 참여한다.대동단은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친왕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망명시킨 뒤, 조선의 독립을 고취하는 내용의 포고문을 중국과 우리나라에 배포할 계획이었다. 대동단을 소개하는 '대동단실기'를 집필한 건국대학교 정치학과 신복룡 명예교수는 "대동단은 조선 왕조 왕실이 (한일) 합병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친왕의 입을 통해 세계에 알릴 목적으로 망명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이을규는 의친왕을 중국 안둥현(安東, 현 단둥(丹東))까지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중국까지 일본 경찰에 들키지 않고 의친왕의 탈출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였다. 고비 때마다 이을규의 기지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서 의친왕은 이을규의 낡은 외투를 입고 신분을 위장해 3등 칸에 탔다고 한다. 일본 경찰 검문에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도 있었지만, 이을규가 백부(伯父)라고 대신 대답해 모면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의친왕과 이을규는 중국 안둥현에 도착했으나, 의친왕 망명 소식을 접한 일본 경찰에 의해 붙잡히게 된다. 이 사건으로 그는 징역 2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동생 이정규는 일본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도모했다. 게이오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한 그는 조선유학생학우회 일원으로 2·8독립선언대회에 참가했다.이을규는 감옥에서 출소한 1921년 겨울 방학을 맞아 일본에서 귀국한 동생 이정규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이때부터 형제는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다.베이징 대학에 진학한 이정규는 러시아의 시인 에르셍코와 교류하며 아나키즘 사상가로 성장하게 된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 이회영을 아나키즘 사상가로 인도한 이가 바로 이정규다. 그는 아나키즘을 조국의 독립운동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두고 깊은 고민을 했다. 이정규는 훗날 저술한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이회영 선생이 무정부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서 오랜 시간 동안 문답을 하게 됐다. 이것이 선생으로서는 무정부주의 사상의 내용을 들어보는 첫 번째 기회였다. 이때는 마침 선생이 사상적인 진로 모색을 하던 때였으므로 이정규와의 대화는 선생에게 큰 충동을 줬다."이정규의 영향으로 형 이을규도 아나키스트가 됐다. 형제는 1924년 4월 우당 이회영, 화암 정현섭, 구파 백정기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다. 이 단체는 외세에 의존하는 타협론과 소련에 기대는 공산주의 세력을 함께 비판하며,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직접 행동노선을 주장했다. 상하이로 가서 약산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한 것도 이 시기다. 일본 첩보단이 작성한 의열단원 명부에 이들 형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중심 간부로 올라 있다.아나키스트 사상가로서 이정규의 활동은 이후 더욱 활발해졌다. 난징에서는 대만·베트남·필리핀 등 7개국 항일지사들과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를 열고 기관지 '동방'을 발행했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기관지 '탈환'을 간행했다. 그러던 중 탈환에 기고한 논문이 결국 일본의 감시망에 걸렸다. 이정규는 탈환에 '탈환에 제일성', '혁명원리의 탈환'이라는 제목의 두 편의 논문을 가명으로 기고했는데, 일본은 이 글이 조선의 혁명 정신을 고취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정규는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만주 하이린을 근거지로 했던 이을규도 고초를 겪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회영의 지시를 받고 김좌진 장군의 신민부와 연합하는 활동에 전념했는데, 일본과 공산주의자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을규·정규 형제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던 화암 정현섭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이라는 책에서 "그 무렵 만주에서는 이른바 사상 문제로 우리끼리 더 많이 죽였어요. 공산당이라고 잡아 온 젊은이를 죽이려는 것을 내가 뜯어말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러니까 만주에 있을 때 왜놈보다도 우리 동포인 공산주의자가 무서워 잘 때도 신을 신고 옷을 입었습니다."고 1920년대 말 만주의 상황을 설명했다.혼란한 시대 속에서 김좌진 장군은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됐고, 일본이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펼치면서 이을규는 국내로 압송돼 5년이나 투옥하게 된다.해방된 조국에서 아나키스트 형제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들은 농민 스스로 자치 능력을 기르기 위해 농촌자치연맹과 노동자자치연맹을 각 지역에 조직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이을규는 1953년 이승만정권에서 초대 감찰위원을 지냈고, 1963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72년 서울 동대문구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생애 말년에 번역했던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의 저서 '현대과학과 아나키즘'은 사망 이듬해인 1973년에야 출간됐다. 이정규는 1963~1966년 성균관대 총장을 지냈고, 전 재산을 출연해 아나키즘 연구 단체 (사)국민문화연구소를 만들었다. 1984년 사망한 그는 생전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다.인천 출신인 이원규 작가는 "삼형제 중 두 명이 목숨을 내놓은 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국내 아나키스트 사상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인천 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해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며 "인천시 등이 나서서 이제라도 활발하게 연구를 진행해 우리 고장의 독립운동가를 널리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이을규(왼쪽)와 이정규.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왼쪽부터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기관지 '탈환'에 기고한 논문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은 이정규의 판결문 원본, 이을규·이정규가 이름이 담긴 의열단원 관헌문서, '의친왕 망명 사건'으로 징역 2년 형을 받은 이을규 판결문 원본. /인천고 제공

2019-05-01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11)]이을규·정규

1910년 나라의 명이 다하자 많은 사람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온 집안이 독립운동에 나선 경우도 많았다. 전 재산을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일가와 서대문 형무소 1호 사형수로 기록돼 있는 의병장 허위 가문 등이 대표적이다.인천에도 독립운동에 나선 형제들이 있다. 이을규(1894~1972)·정규(1897~1984) 형제다.인천 장봉도에서 태어난 이들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1910년대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에는 독립운동을 했다.이을규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망명 사건에 참여했다. 그는 경성에서 중국 안둥현(현 단둥시)까지 의친왕의 망명 여정을 최측근에서 호위했다. 당시 최고의 아나키즘 사상가로 평가받았던 이정규는 형 이을규, 우당 이회영과 함께 아나키스트 단체를 조직했다.형제는 의열단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일본과 맞서 싸웠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을규는 1990년 독립유공자 애족장 서훈을 받았고, 이정규는 생전 본인의 뜻에 따라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하지 않았다.하지만 인천 지역에서는 이들의 독립운동 행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인천시는 '인천시사'에 나온 인천 지역 인물 409명을 홈페이지에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이을규·정규 형제에 관한 내용은 빠져 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이을규의 본적이 충남 논산으로 돼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을규·정규 형제는 생전에 인천 장봉도 출신임을 분명히 밝혀 왔다. 인천에서 이들 형제의 행적을 연구하고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성이 나오는 이유다.약산 김원봉 서훈에 따른 논쟁이 불거지면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이을규·정규 형제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시기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5-01 김주엽

[인천의 얼굴·(8)]서해5도특별경비단 3005함 김종인 함장

한번 출동에 꼬박 7박8일간 불법조업 단속해경 준비 아들 뿌듯… '따뜻한 시선' 바라목숨을 걸고 서해를 지키는 우리 해경의 서해5도특별경비단 김종인(54) 함장입니다. 서해 NLL 해역에서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더욱 극성을 부리자 해경은 2017년 4월 서해5도특별경비단을 창설했습니다. 우리 어선이 중국 어선을 직접 나포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창설 2년을 맞았습니다. 한 번 출동하면 꼬박 7박8일을 배 위에서 지내며 중국 어선과도, 파도와도 싸워야 합니다. 중국 어선들은 파도가 심하게 칠 때 더 많이 들어옵니다. 해경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바다를 지키는 일, 파도가 높다고 게을리 할 수가 있겠습니까. 칼을 막을 수 있는 방검부력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K-5 권총을 차고, 6연발 고무탄 총을 메고, 방패를 듭니다. 장비 무게만 5㎏이 넘습니다. 잠긴 문을 열기 위해서는 '빠루'라고 불리는 노루발 장구와 그라인더를 전담하는 인력도 있습니다. 김종인 함장의 3천t급 배에는 40명이 근무합니다.불법 어업을 일삼는 중국의 어부들이 목숨을 걸기에 우리도 목숨을 내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진압할 수가 없습니다. 이성을 잃고 무지막지하게 덤비는 중국 어부들에게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친 동료들도 많습니다. 김종인 함장은 지금까지 30여 척의 중국 어선을 나포했습니다. 위급상황에 처한 우리 어선이나 낚싯배를 구조한 것은 25척 정도 됩니다. 8일을 나가 있다가 돌아와서 집에서 쉬는 것은 고작 3일입니다. 4일은 출동 준비를 하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1주일씩 번갈아 바다에 나갑니다. 그런 아빠가 무엇이 좋은지, 대학에 다니는 큰아들이 해경 시험 준비를 합니다. 속으로 뿌듯하지요.김종인 함장은 우리 국민들이 해경을 대하는 태도가 육지 경찰에 비해 좋지 않다는 점을 잘 압니다. 바다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늘 목숨을 내놓고 일하는 해경을 따뜻한 시선으로 봐 주셨으면 하는 게 김종인 함장의 최대의 바람입니다. 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4-28 김주엽

[인천경영포럼]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 "극단적 정치 반복 '양당체제' 바꿔야"

"국회 상황이 복잡, 쉴 겨를 없어"경기부양책 부동산카드 제외 강조'규제샌드박스' 여당 가장 큰 성과다음 달 8일 원내대표직을 마무리하는 더불어민주당 홍영표(인천 부평을) 의원은 "군대로 치면 지금 말년 병장인데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과 관련해 현재 국회 상황이 복잡해 쉴 겨를이 없다"며 "국회에서 국민들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송구스럽지만, 선거제·사법제도의 혁신을 위해서는 패스트트랙을 관철시켜야 한다"고 밝혔다.홍 원내대표는 25일 오전 인천 송도 라마다호텔에서 경인일보와 인천경영포럼이 공동 주최한 '제402회 인천경영포럼 조찬강연회' 연사로 나와 패스트트랙으로 처리하려는 법안인 선거제도 개편과 고위공직자수사처 설치(공수처), 검·경 수사권 조정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홍영표 원내대표는 "지금과 같은 양당 체제로는 극단적인 정치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정치 여건을 바꿔보자는 게 선거제도 개편안"이라며 "공수처 설치 역시 김학의 사건처럼 검찰이 제대로 못하는 수사를 비롯해 대통령 친·인척 비리, 판사 등 고위공직자에 대한 수사를 똑바로 하자는 차원으로 이미 1999년부터 논의됐던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상하 관계인 두 기관을 협력 관계로 만들자는 게 핵심"이라고 언급한 뒤 "이유야 어떻든 지금 국회 상황을 TV로 보는 국민들이 얼마나 화가 나실까 송구스럽다"고 했다.홍 원내대표는 이날 강연에서 여당은 민심을 얻기 위한 경기 부양책으로 절대 '부동산 카드'를 꺼내 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그는 "총선이 1년도 남지 않았다. 솔직히 선거 앞두고 민심 잡기 가장 좋은 게 부동산 규제 완화"라며 "서울 강남 재건축 규제 풀어주고 하는 손쉬운 방법으로 '주사' 한 번 놓으면 되지만 시한폭탄과 같은 국민 가계부채를 생각하면 이런 말을 꺼낼 수조차 없다"고 설명했다.이어 "지난 정권에서는 빚내서 집 사라고 독려했다"며 "가계 소득이 늘지 않는 상황에서 지난 정부가 이런 부동산 정책을 펼쳐 국민들에게 가계부채만 떠안겼다"고 지적했다.홍 원내대표는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회 문제로 양극화를 꼽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 정부의 정책 기조인 포용성장·혁신성장·공정경제를 반드시 실현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 10% 부자가 국내 전체 소득의 47%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면 결국 사회 불안 요소가 되고 갈등의 원인이 된다"고 말한 뒤 "문재인 정부가 욕을 먹으면서 추진했던 최저임금 인상과 대·중소기업 간 격차 해소 정책 등은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홍영표 원내대표는 "여당의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 가장 큰 성과를 꼽으라면 '규제샌드박스(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가 출시될 때 일정 기간 동안 기존 규제를 면제, 유예시켜주는 제도)'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라며 "얼마 남지 않은 임기를 잘 마무리하겠다"고 말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가 25일 오전 인천시 연수구 라마다송도호텔에서 열린 제402회 인천경영포럼 조찬강연회에서 '포용성장을 위한 혁신과제'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4-25 김명호

[독립운동과 인천·(10)]인천고 제39회 졸업생들

인천지역에서 독립운동으로 가장 유명한 학교는 인천의 3·1 운동 발상지로 알려진 인천창영초등학교(옛 인천공립보통학교)다. 하지만 당시 인천고등학교(옛 인천공립상업학교) 학생들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인천고 39회 졸업생은 재학 중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었고, 졸업 후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비밀결사조직에는 39회 조선인 졸업생 47명 중 절반이 넘는 24명이 참여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이들의 행적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이들 중 4~5명이 먼저 '오륜조(五倫組)'라는 이름의 친목단체를 만들었다. 이 소규모 모임이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나리 교장이 그동안 묵인해오던 조선인 학생들만의 졸업앨범 제작을 반대한 것을 계기로 비밀결사조직으로 발전했다. 야마모토 교장은 졸업 앨범 비용을 국방헌금으로 내라고 윽박질렀다. 하지만 이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동구 송림동의 한 사진관에 졸업 앨범 인쇄를 맡겼다고 한다. 당시 중구 인현동에는 훗날 대중일보 창간에 참여했던 이종윤이 운영하는 '선영사'가 있었다. 도심 지역에 조선인 출판사가 있었는데 굳이 송림동의 사진관을 이용한 것이 수수께끼처럼 궁금하다. 이들이 졸업을 앞두고 있던 1940년은 '전시동원체제'가 본격화한 시점이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 국가 총동원법(1938년)을 제정해 자원 수탈을 강행했다.졸업 후에도 학병 거부 운동을 벌이던 이들은 1943년 일본 경찰에 결의문이 적발되면서 모두 구속됐다. 경찰의 모진 고문에 정태윤, 가재연, 고윤희, 김여수 등은 대전형무소에서 숨을 거뒀다. 하지만 국가보훈처 공훈록도 체포 인원과 순국 인원을 혼동할 정도로 이 사건이 제대로 조명돼 있지 않다. 이들의 행적을 연구하고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성이 나오는 이유다.'마지막 무관생도들', '김원봉 평전' 등의 책을 쓴 인천고 출신 이원규 작가는 "동기생 중 절반 이상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일인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 아쉽게 생각한다"고 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4-24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10)]인천고등학교 제39회 졸업생의 '비밀결사단'

'지역 명문고' 일본인 교장의 조선학생 차별에 단체조직… 몰래 졸업앨범 만들기도1941년 졸업후에도 활동 동기생의 절반넘는 청년들이 '학생병 모집 반대' 운동나서일제에 발각돼 송재필등 24명 구속 '참사' 혹독한 고문에 정태윤·김여수등 잇단 순국풀려난 이들도 후유증 앓아 "명예회복 7명뿐" 자료 발굴통해 이제라도 '희생' 알려야인천고등학교(옛 인천공립상업고등학교) 1941년도 졸업생들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역사에서 획기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같은 학교 동기생 중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참여해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했으며 졸업 후에도 이어져 왔다. 조선인 졸업생이 47명이었는데 일제에 발각돼 붙잡힌 이들이 24명이나 되었다. 고문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많은 수가 그 후유증으로 옥에서, 또는 출옥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그러나 이들의 비밀결사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인천고 비밀결사 대원들은 일본의 학생병 모집에 대항하는 활동을 주로 벌였다. 그런데 대구나 평양에서 있었던 학병거부운동 관련 연구는 많지만 인천고 졸업생들의 학병거부 운동에 대해서는 많이 다루지 않고 있다. 인천고 비밀결사 활동을 알고 있는 이들은 "한 학교 동기동창 중 절반이 넘는 수가 졸업생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희생을 당한 사례가 대한민국 고등학교 역사에는 없었던 일"이라며 "이제라도 이들의 활동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일제의 학정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 6월.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다니던 송재필은 여름 방학을 맞아 충북 영동을 찾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송재필이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던 안학순과 함께 일본의 강제 학병모집에 반대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결의문을 작성해 배포한 것이 적발된 것이다. 이른바 '인상 출신 불령분자들의 비밀 결사 사건'의 시작이다. 경찰의 수사는 1년 넘게 대대적으로 진행됐고, 여러 명이 고문을 받아 옥사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송재필과 그의 동기생들이 비밀결사 단체를 만든 것은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나리 교장의 조선인 차별 때문이었다. 교장의 행동에 불만이 있던 학생들은 졸업앨범 제작을 계기로 폭발하게 되었다.1940년 가을 졸업을 앞두고 있던 이들은 조선인 동기생들끼리 졸업앨범을 만들기로 했다. 이전에도 조선인 동기들끼리 졸업앨범을 만들었는데, 일본인 교사들도 이를 암묵적으로 용인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야마모토 교장은 이를 반대했다.비밀결사 대원으로 1941년 인천고 39회 졸업생이자 훗날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역임한 이운성은 1974년 1월 발행된 인천고등학교 교지 '미추홀'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졸업반이 되자 학교에서 졸업 앨범을 만드는 것을 거부했어요. 그 앨범 대(앨범 비용)를 국방헌금으로 바치라는 거죠. 그러나 우리들은 한국 학생들의 교과 성적이 우수한데도 '수련'과 '교련' 차별을 받아 수석을 빼앗겼고, 매사 차별과 굴욕을 받아 부처산(현 재능대학교 일대)에서 한국 학생들만의 집회를 갖고 한국 학생이 나아가야 할 길 등 우국충정(憂國衷情)과 항일정신을 북돋았습니다. 또한, 앨범도 없이 헤어진다는 게 섭섭하고 서운해서 한국 학생들끼리만 앨범을 만들기로 하고 당시 송림동에 있는 한국인 경영 사진관에 부탁했습니다."이듬해 3월 졸업한 이들 동기생들은 몰래 졸업앨범을 만들었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몰라도 자주 모임을 하며 활동을 계속해 왔다.1940년대 초 당시 조선의 20대 청년들의 가장 큰 화두는 학병거부운동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한 일제는 부족한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1938년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했다. 만 17세 이상으로 소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는 육군 특별지원병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칙령의 골자였다. 이 시기부터 최소 18만4천명이 일본군에 입대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조선인 청년들은 학병 지원을 거부했다. 일부는 산악지대에 은신처를 마련해 동지를 규합하고 집단생활을 하면서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일본군에 입대하느니 옥살이를 하겠다며, 술을 마시고 경찰서를 때려 부수는 일도 있었다.송재필이 학병 거부 운동을 독려하는 결의문을 배포한 것도 학병거부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그가 평소 친분이 있던 학생에게 전달한 결의문이 일제의 경찰에 적발됐고, 송재필과 동기생 24명이 경찰에 구속되는 참사로 이어졌다.감옥에 끌려간 이들은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이들과 함께 붙잡힌 정구택(인천고 39회)은 2005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악명 높은 이근안의 고문기술은 비교할 바 안 된다. 전기고문에 물고문은 기본이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머리맡에 고추와 쑥을 섞어 태우면 호흡을 하지 못해 기절한다. 가죽회초리로 맞아 등이 부어올라 누울 수조차 없었다. 겨울에는 새벽 1~2시까지 고문이 이어지기도 했다. 억지로 자백을 받아냈다"고 증언했다. 고문을 견디다 못해 정태윤이 1944년 12월 가장 먼저 숨졌고, 이듬해 3월 가재연도 순국했다. 김여수, 고윤희 등도 그 뒤를 따랐다.대부분은 해방을 맞기 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일본 경찰의 고문이 그만큼 악독했다.송재필도 심각한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의 둘째 아들 송준호(66)씨는 "비나 눈이 오면 항상 몸이 좋지 않다고 누워만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난다"며 "내가 중학교 3학년에 다니던 1968년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는데, 고문을 받았던 영향이 컸던 것 같다"고 했다.이들은 또 먼저 간 동기생들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송준호씨는 "아버지가 일본에서 대학에 다니셨기 때문에 해방 이후 인천에서 고위직을 맡아 달라는 청탁이 많았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말을 어머니에게 들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모교(인천고)에서 교편을 잡았다"고 했다. 이어 "어머니에게는 '먼저 간 친구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고 한다. 죄책감 때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인천고 동문회에서는 인천고 39회 졸업생들이 만든 졸업앨범을 보관하고 있다. 졸업앨범 안에는 그들의 '사인록'이 있다. 여기에는 '인간본능은 무엇일까?', '선술집은 우리들의 파라다이스' 등 장난 섞인 글귀들이 적혀 있다. 20대 꿈 많던 청년이던 송재필과 그의 동기생들은 시대 상황에 따라 독립운동 현장에 뛰어들었다."여기 오랜 역사와 전통의 찬연한 빛이 머물고 이제는 미움도 싸움도 없는 대화가 맑은 바람과 더불어 지나가는 모교의 교정. 본교 39회 동창생 일동은 일제하의 재학시절부터 졸업 후에까지 민족적 자각으로 조직적인 항일애국운동을 전개하다가 마침내 일경(日警)에 24명이 체포, 투옥돼 4명이 옥사했고, 출감 후에도 일경의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11명이 원통하게 호국의 넋이 됐다."인천 미추홀구 인천고등학교 운동장 한쪽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동문을 기리는 추모비가 서 있다.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작사한 인천고 동문 한상억 시인이 쓴 비문이다.정구택(인천고 39회)은 2006년 3·1절 기념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은 뒤 인터뷰에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고문당해 숨진 동지께 면목이 없습니다. 함께 운동했던 동지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24명의 동지 가운데, 명예를 회복한 사람은 7명뿐입니다"라고 말했다.'마지막 무관생도들', '김원봉 평전' 등 항일투쟁과 관련한 책을 써 온 인천고 출신의 이원규 작가는 "당시 인천고는 지역 명문 학교였기 때문에 이들은 좋은 직장과 명문 학교에 다니던 학생이었다. 졸업생 중 절반 이상이 희생당했는데, 이들에 대한 연구가 아직 부족한 실정"이라며 "이제라도 이들에 대한 자료 발굴이 더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인천고 39회 졸업생이 직접 만든 졸업앨범과 사인지들. 오른쪽 하단은 송재필 선생의 인천고 재학중 모습.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송재필 선생 유족 제공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인천 강화군 온수리 성공회 성당에 있는 김여수 순국비. 강화군 온수리 출신인 김여수는 1945년 대전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 미추홀구 주안동 인천고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인천고등학교 39회 졸업생을 기리는 추모비. 1985년 세워진 이 추모비는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작사한 한상억(인천고등학교 45회 졸업생) 시인이 글을 남겼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4-24 김주엽

[푸른인천글쓰기대회]이모저모

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가 20일 1만8천여명의 학생·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에서 열렸다.참여자들은 녹색 도시 인천을 바라는 마음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인천대공원에 완연히 찾아온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수국·튤립… 인근 3만7천송이 꽃전시회 인기○…"인천대공원으로 봄꽃 보러 오세요."푸른 인천 글쓰기대회 행사장 인근에서 열린 '푸른 인천 꽃 전시회'도 관람객들에게 인기. 수국, 튤립, 가자니아 등 30종 3만7천여 송이가 전시된 '푸른 인천 꽃 전시회'는 다음 달 6일까지 인천대공원 꽃 전시관에서 열려. 초등학생 딸들과 함께 전시회를 찾은 김희연(41)씨는 두 딸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눌러. 그는 "수많은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예쁜 꽃들을 볼 수 있어 좋았다"고 소감. #올바른 손 세정법등 생활속 보건교육은 '덤'○…보건교사와 함께하는 '생활 속 보건 교육'이 행사장에서 성황리에 진행. 참가자들은 '올바른 손 세정 방법', '스마트폰 중독 방지 방법 '등을 직접 체험. '하임리히요법'(이물질로 인해 기도가 폐쇄됐을 때 시행하는 응급처치법)을 체험할 때는 학부모와 학생 모두 보건교사 설명에 집중. 초등학교 2학년 아들과 함께 행사장에 온 최윤정(39)씨는 "평소 심폐소생술이나 하임리히요법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는데 유익한 시간이 됐다"고 전해.#"좋은 결과 있기를…" 전년도 수상자들 응원○…전년도 대상 수상자들이 대회장을 찾아 참가자를 응원. 지난 제16회 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김륜원(10·인천청라초4) 군은 "평소에는 글을 쓸 기회가 많지 않은데, 대회에선 자기 생각을 마음껏 글로 쓸 수 있다는 점이 좋다"며 "올해 참가 학생들도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써서 모두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다"고 바람. 이번 대회에 초등학교 3학년 딸을 참가시켰다는 지난해 학부모 부문 대상자인 김경아(48·여)씨는 "자연과 봄을 만끽하면서 글을 쓸 수 있는 좋은 대회"라며 "모든 참가자들이 아이들의 시선으로, 어른들이 생각치 못하는 좋은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웃음.#차세대여성지도자聯 10년 넘은 자원봉사 '눈길'○… 자원봉사자들은 이번 대회의 성공적 개최·운영에 큰 역할. 차세대여성지도자연합회는 10년 넘게 푸른인천글쓰기대회 자원봉사자로 참여. 연합회원 25명은 원고지 배부, 접수 등 대회장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 김성희 연합회장은 "대회에서 봉사를 할 때마다 아이들의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에 힘을 얻고 간다"며 "자연과 어우러져 아이들이 글을 쓰는 모습을 보면 참 대견하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푸른인천글쓰기대회가 열리길 바란다"고 소감. #화재대피법부터 로봇댄스까지 '119 안전체험'도○…인천소방본부가 대회장 인근에 마련한 '119와 함께하는 안전체험장'이 아이들로부터 큰 호응. 대회장을 찾은 아이들은 진지하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구조대, 완강기를 이용한 화재대피법과 심폐소생술을 학습. 또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려는 부모들로 가득. 심폐소생술을 익살스런 동작으로 표현한 'CPR 로봇댄스 공연'도 참가자들에게 인기. /김성호·김주엽·공승배기자 ksh96@kyeongin.com20일 인천시 남동구 인천대공원에서 열린 제17회 푸른인천글쓰기 대회 행사장이 참가자들의 텐트로 가득 메워졌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진지한 꼬마작가-참가한 초등학생들이 진지하게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아빠는 고민중-참가자의 아버지가 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市교육감·학부모 '반갑습니다'-도성훈 인천시교육감이 원고지를 배부하면서 학부모와 악수를 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yong@kyeongin.com'심폐소생술을 춤으로'-로봇댄스 인천소방본부의 '119와 함께하는 안전체험장' 부스에서 심폐소생술을 익살스런 동작으로 표현한 CPR 로봇댄스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4-21 김성호·김주엽·공승배

'푸른 인천 글쓰기대회' 1만8천명 참여 열기

우리 아이들에게 푸르고 맑은 인천을 물려주기 위해 시작된 '푸른 인천 글쓰기대회' 17회 행사가 지난 20일 인천대공원 문화마당(옛 야외극장) 일대에서 개최됐다.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1만8천여명의 학생과 학부모 등이 참여해 봄꽃의 향연을 만끽하며 '푸른 인천'을 만들어 가겠다는 소망을 원고지에 꾹꾹 눌러 담았다.글쓰기 대회에 참석한 박남춘 인천시장은 "인천을 푸르게 가꾸는 일에 시민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며 "2003년부터 시작한 푸른 인천 글쓰기대회는 미세먼지를 줄이자는 시민 공감대 형성에도 큰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도성훈 인천시 교육감도 "학생들이 글쓰기 대회를 통해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푸른 인천을 만드는데 우리 학생들이 앞장서자"고 강조했다.이번 대회 시상식은 오는 6월 13일 인천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릴 예정이며 수상자 명단은 5월 말 경인일보 지면과 홈페이지(www.kyeongin.com·우수상 이상 개별 연락)에 공개할 예정이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대회'가 지난 20일 인천시 남동구 인천대공원에서 1만8천여명의 학생과 학부모 등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됐다. 개막식에서 내빈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참가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원고지를 배부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4-21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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