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이슈&스토리]반쪽 지원에 그친 8년… '평화의 섬' 걸맞은 인프라 구축돼야

22일(매년 3월 넷째 금요일)은 서해수호의 날이다.제2연평해전과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등에 맞서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호국 영웅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이다.서해에서 벌어진 남북 교전은 비단 군인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서해5도 주민들은 연평도 포격 당시 피난 행렬 속에서 느낀 불안과 공포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이러한 서해5도 주민들의 정주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2011년 처음 마련된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이 오는 2020년 종료를 앞두고 있다.서해5도 지원 특별법에 따라 만들어진 이 계획은 그동안 접경지역이라는 이유로 소외됐던 서해5도 지역에 대한 종합적인 발전 계획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정부 예산은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해 '반쪽짜리' 계획에 그쳤다는 지적도 뒤따랐다.8년이 지난 지금, 연평도 포격의 상흔으로 얼룩진 2011년과 달리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자연스레 '제2차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2021~2030)' 수립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남북 관계가 개선된 만큼 대북 사업, 관광 사업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 지원이 주민들의 실질적인 소득 증대로 이어질 수 있는 청사진 수립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北위협 속 정주환경 개선위해 2011년 특별법 제정 9천억대 구상국비 지원율 53% '실망' 노후주택 개량 올해는 30여가구만 수혜 옹진군·의회 노력등으로 정부 2차 계획 수립 용역발주 추진 '다행'민간 자본 관광육성 지지부진… 소득 증대 등 현실적 사업 필요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이 처음 마련된 건 남북 관계가 냉랭했던 2011년이었다. 정부는 2010년 11월 발생한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주민생활 안정대책 차원에서 이듬해 서해5도 지원 특별법을 제정하고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을 수립했다. '풍요로운 평화의 고장, 서해5도'라는 비전을 세우고 주민을 위한 쾌적하고 수준 높은 정주환경 조성과 동시에 북한의 도발로부터 대비하기 위한 대피시설 확충 사업을 동시에 담았다. 또한 섬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해 경쟁력 있는 특화 산업과 관광 산업 육성과 관련한 사업도 포함했다. 사업비는 2011년부터 2020년까지 국·시비, 민간 자본 등 9천109억원이다. 서해5도 도로 개설, 항만시설 정비, 관광 기반 구축, 대피소 확충, 해상 교통망 개선 등을 위한 것이다. 이중 지난해까지 예산 3천128억원이 투입됐다. 그러나 국비는 계획된 4천599억원에서 2천434억원이 지원되는 것에 그쳤다.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시행이 8년이 지났는데도 국비 지원율이 53%로 미흡한 수준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민들에게 호응을 받고 있는 노후주택 개량사업의 경우 신청을 원하는 군민이 200가구를 넘지만, 올해 수혜를 받는 가구가 30여 가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문제는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종료 시점이 다가오자 수면 위에 올랐다. 게다가 지난해 말 옹진군이 서해5도 여건변화에 따라 서해5도 관련 사업 계획을 변경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기획재정부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옹진군과 옹진군의회가 반발하고 나섰다.옹진군의회는 지난해 12월 열린 제207회 제2차 정례회에서 '제2차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연장 마련 촉구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당시 홍남곤 옹진군의회 의원은 "우리 군이 행안부에 최저생계비 증가율, 물가 상승률 등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 서해5도에 대해 대폭 지원할 수 있도록 지속 건의했는데 여러 여건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과거처럼 북한의 위협이 늘 도사리는 여건이 아니라 4·27 판문점 선언 이후 서해5도가 평화의 섬으로 주목받으며 서해평화수역 조성이 가시권에 들어오는 만큼 서해5도의 지역 특성과 주민생활 안전대책을 반영한 종합발전계획을 지속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들은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용역 조속 수립을 촉구하며 용역 수행 기관의 일방적 청사진 수립이 아닌, 옹진군민의 의견이 반영된 실질적이고 장기적인 종합발전대책 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화와 안보가 공존하는 서해5도의 특성을 살린 사업을 추진하되 그 사업이 주민들의 실질적인 소득을 증대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 행정안전부는 '제2차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수립을 위해 내년께 용역 발주를 계획하고 있어 서해5도 주민을 위한 지원은 지속할 수 있을 전망이다. 옹진군과 주민들은 이번 계획에는 옹진군 주민들이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는 사업이 제시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또한 기존에 담긴 계획 중 실현이 불가능하거나 현실에 맞지 않는 사업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다.현재 2020년 종료를 앞둔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에 담긴 사업 78건 중 현재 완료됐거나 진행 중인 사업은 52건이다. 특히 민간 자본을 투입해 조성하는 사업은 대부분 진행되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평화관광육성 및 세계적 평화거점 조성'이라는 목적으로 백령도 남포리 일원에 국제회담장, 숙박시설, 출입국관리시설, 크루즈항, 골프장 등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남포리에 평화공원을 세우고 각종 편의시설에 민간 자본을 일부 투입할 구상이었다. 옹진군은 2021년부터 2030년까지 10년의 청사진이 담길 제2차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에는 이러한 사업을 축소·정리하고 주민들이 꼭 원하는 사업이 담기길 기대하고 있다.옹진군 관계자는 "1차는 대피소 마련, 정주 생활금 지원, 노후주택 개량 사업, 교육비 등에 그쳤고 아예 진행되지 못한 사업도 있었다"며 "이제는 남북 평화 분위기 변화에 따라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영구적인 평화 관련 사업과 관광 활성화 사업, 주민들이 실질적으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주민 소득 증대사업, 인프라 구축, 개발 사업 등에 초점을 맞추는 계획이 담길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 옹진군 연평도 전경. /옹진군 제공인천 옹진군 연평도에 설치된 현대식 대피시설. 비상진료소 등을 갖추고 있다. /옹진군 제공인천 옹진군 소연평도 전경. 이곳에는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에 따라 노후 주택 개량 사업이 진행됐다. /옹진군 제공남북관계 경색 국면 당시 포사격 훈련에 따라 백령도 대피소로 피난한 주민들. /옹진군 제공

2019-03-21 윤설아

[독립운동과 인천·(5)석모도와 이안득]러시아 이민자 2세, '억류된 고국'서 다시 든 '독립횃불'

하바롭스크서 출생 '세미요노프軍' 반혁명군 활동하다 군법관부에 체포반일사상 고취·불온이유 '거주제한처분' 19살에 강화 석모리 일대 유배3·1운동 소식 접한뒤 감시에도 4월 7일 아이들 이끌고 만세외쳐 '징역형'곳곳서 주민들 동참행렬 '영향'… 이후 귀향 또는 월북 가능성 자료미미강화 석모도는 100년 전 3·1 운동과 관련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석모도에서 유배형을 받고 거주 제한 상태에 있던 독립운동가가 만세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그는 1900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이민자 2세로 태어난 이안득(李安得)이다.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그는 일제에 적발돼 19살의 어린 나이에 고향에서 1천㎞나 떨어진 강화군 석모도로 유배를 왔다. 이듬해 우리나라에서는 3·1 운동이 일어났고, 이안득은 유배지의 마을에서도 아이들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 횃불을 피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가 제공하는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에 따르면 이안득은 1900년 12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태어났다. 1800년대 중반 함경도와 평안도의 가난한 농민들은 농사지을 땅을 찾아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크라스키노 등 연해주 지역 주요 도시에는 한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됐다. '신편 강화사' 등 이안득을 기록한 역사서에서는 그의 본적을 함경남도 완산부로 표기하고 있는 데 그의 부모가 함경도 지역에서 농사를 짓다가 러시아로 거주지를 옮겨갔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제의 이안득에 대한 조사서류에도 그의 주소지는 '함경남도 완산부 이하 불명'이라고 적혀 있다. 일제는 이 이유에 대해 '본적이 불분명한 사람은 시베리아에서 태어나거나 십수 년 전에 국외로 떠난 사람이다'라고 명기했다.러시아에서 태어난 청년이 이역만리 강화도 석모도에 거주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국사편찬위원회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아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올려 놓은 이안득에 대한 '거주제한처분의 건'을 경인일보가 전문 번역가에게 의뢰해 해석한 그의 유배 사유는 이렇다."이들은 러시아 '세미요노프'군(軍)에 따라 지도관인 육군 대위 이광열(귀화 조선인)의 명령을 받아 각 부하에 속하는 조선인 군부에 대해 반일사상을 고취시키다 세미요노프 군법 관부에 체포됐다. 이 대위를 제외한 나머지 9명은 하얼빈(哈爾濱) 주재 제국 총영사에 인도되나 모두 품행 불량으로 친일 조선인을 적대시하고 평상시 동포를 능학(凌虐·업신여기고 학대함) 및 협박했으며 종종 일본군 기밀을 찾아내 적대 국민에게 누설했다. 이에 대정7년(1918년) 8월 19일 3년간 중국 재류 금지를 명했으며, 조선 내에서도 치안을 방해할 우려가 있어 보안법 제5조에 따라 거주 제한을 명한다."세미요노프군은 러시아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는 '반혁명군(백위군)' 중 하나로 바이칼호 동쪽 지역(동시베리아)인 자바이칼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부대다. 당시 혁명 정부는 제1차대전 종전을 위해 독일과 단독 강화에 나섰고 연합군에서 탈퇴했다. 연합군은 이러한 조치에 반발해 반혁명군 지원에 나섰다. 특히 일본은 1918년 8월 시베리아 전쟁을 일으키는 등 반혁명군에 무기나 자금을 제공한 연합군 국가 중 하나였다.반혁명군은 제정 러시아에 근무하던 군인이 주축이 된 부대다. 러시아에 살던 조선인 젊은 청년들은 일제와 전쟁을 벌이기 위한 군사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반혁명군에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안득도 이러한 이유로 반혁명군에 가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안득을 이끌었던 이광열은 육군 대위라는 계급을 고려하면 볼셰비키 혁명 이전부터 이곳에서 근무했을 가능성이 높다.만주와 러시아 지역 항일운동사 연구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1918년 8월부터 일제가 시베리아 전쟁을 일으키지만, 같은 해 초부터 반혁명군 지원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대대급 부대를 상륙시키는 등 전쟁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며 "제정 러시아군부터 근무하던 반혁명군 조선인 장교들은 일본이 지휘부를 지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전투 참가를 거부하거나 조선인 병사들과 탈영을 모의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이광열과 뜻을 함께한 조선인은 이안득을 포함해 9명이었다. 군법 관부에 체포된 이광열은 대위라는 계급 때문에 세미요노프군 지휘부가 총살 등의 방식으로 처리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안득 등 9명은 일본 영사관에 넘겨져 조선의 각 섬으로 흩어져 유배를 떠나게 된다. 당시 조선총독부 보안법 5조에는 "내부대신은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동작을 행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에게 그 거주장소로부터 퇴거를 명하거나 1년 이내의 기간 동안 특정한 지역에의 출입금지를 명할 수 있다"고 규정지었다. 재판을 통해서가 아닌 단순 행정처분 형태로 유배가 결정된 것이다. 반 교수는 "191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의 법률이 현대식으로 완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형이나 유배 등 조선시대 형벌을 그대로 적용하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1918년 9월 이안득과 이범우, 김창석은 인천 석모도와 영흥도, 백령도로 각각 유배됐고, 변원정과 황운삼, 문용운 등은 전라도 지도, 가좌도, 초도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강진제는 경상도 욕지도로, 전학만은 평안도 신미도, 민윤식은 충정도 안면도로 옮겨졌다.이안득은 강화군 삼산면 석모리 390-1번지 인근에 살았다. 이곳은 당시 석모도 주민 중 절반 정도가 살았던 지역이라고 한다. 이듬해 이안득은 3·1 운동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안득은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4월 7일 밤 마을 아이들을 이끌고, 마을 뒷산(현 석모도 삼봉산으로 추정)에 올라 횃불을 들고 '조선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삼산면장으로 근무하던 김동헌(金東憲)은 이날 시위에 대해 '성인이 3~4명뿐이었고, 나머지는 어린 학생들이었다는 보고를 들었다'고 상부에 진술했다.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2019년 3월 16일. 이안득이 살았던 석모리 390-1번지 일대를 찾았다. 그가 거주했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집터에는 단층 양옥집이 들어서 있었고, 바로 옆에는 내가성당 석모공소가 30년 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이날 석모리에서 만난 김정섭(88)씨는 "이 근처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유배된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거주지 옆에는 당시 이안득이 만세 운동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봉산이 있었다.까맣게 지워졌지만 이안득은 당시 석모도 지역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의 3·1 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4월 8일 밤 삼산면 석포리 교회당 앞에서 70~80명이 만세를 불렀다. 9일과 10일에도 성공회 교회당 뒤의 산꼭대기(현 석모도 해명산 추정)에서 마을 사람 20여명과 함께 횃불을 피우고 3·1 운동을 했다. 1906년 건립된 석포리 성공회 교회당은 당시에도 지역 주민들이 모이는 광장 역할을 했다고 한다.이안득은 1919년 8월 석모리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조선총독부 서류를 살펴보면 징역형 이후 자신의 고향인 하바롭스크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1922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외무대신에게 보낸 동향정보 서류에 이안득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하바롭스크의 공산당 단체로 들어가 활동했다고 적혀 있다. 남달우 인하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는 "1920년대부터 러시아와 중국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사회주의 사상이 퍼져나갔다"며 "하바롭스크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가 한국사회당을 조직한 지역이기 때문에 영향을 더 받은 것 같다"고 했다.이후 이안득의 이름이 나오는 공식 문서는 없다. 하바롭스크가 연해주 지역 조선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출발지였던 점을 고려하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북한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다. 이안득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절실하다.반병률 교수는 "당시 서류를 살펴보면 러시아 반혁명군에 활동하다 조선으로 유배 온 조선인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들에 대한 연구가 더 진행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이안득의 수형자 기록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이안득의 거주제한처분 서류 원문. /국사편찬위원회 제공한인들이 집단 이주해 거주했던 1918년 당시 하바롭스크 전경. /국사편찬위원회 제공독립운동가 이안득이 유배되었을 때 살았던 강화 석모도 동네. 뒤에 보이는 산은 이안득이 마을 아이들을 이끌고 만세 운동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봉산이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3-20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5)석모도와 이안득]러시아서 항일운동 적발… 강화 유배지 "만세" 앞장

인천 강화군 석모도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곳으로 유배된 이민 2세대가 이끌었다. 그것도 '항일 혐의'로 유배 중인 상태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1919년 4월 7일 강화군 석모도의 첫 3·1 운동은 이안득(李安得)이라는 19세 청년의 주도로 이뤄졌다. 이안득에 대한 1919년 재판 기록에 따르면 그는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적발돼 거주제한 처분을 받고 그 7개월 전 석모도로 유배됐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가 제공하는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를 보면, 이안득은 1900년 12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태어났다. 1918년 6월 러시아 반혁명군(軍)에 참여해 반일 운동을 벌이다 지휘부에 붙잡혀 일제에 넘겨졌으며, 1918년 9월 강화도 석모도로 유배됐다. 그는 고향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섬에 유배를 와 감시대상인 신분으로 마을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당산에 올라 횃불을 피우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하지만 독립운동과 관련한 그의 기록은 불명확하다. 2016년 발간한 '신편 강화사'에서는 그에 대해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거주제한 처분을 받았다'고 출신지가 다르게 기록돼 있다. 같은 해 인천시가 펴낸 '인천시사'에는 '이안득의 주도로 삼산면 석모리에서 십수명이 산정에 올라 봉화를 피우고 독립만세운동을 불렀다'고 적혀 있을 뿐이다.국사편찬위원회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아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올려놓은 자료에는 그의 이름이 '이안덕(李安德)'이라고 명시돼 있다.100년이나 흘렀지만 그의 이름이나 행적 등에 대해 아직 명확히 밝혀진 부분이 없는 셈이다.만주와 러시아 지역 항일운동사 연구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1918년 8월 일본이 시베리아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러시아에서 반일운동을 진행하다 붙잡혀 유배를 온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학계에서 주목한 적이 없다"며 "관계기관 등에서 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3-20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4)인천의 3·1운동]달라진 행정구역따른 관련기록·연구 '부실'

인천시는 100년이나 지났건만 3·1운동과 관련한 정확한 데이터조차 마련해 놓지 못하고 있다. 인천지역 3·1운동 역사를 재정립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919년 당시 '인천'과 지금의 행정구역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인천시는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인천시, 군·구, 관계기관에서 28건의 3·1운동 기념행사가 올해 펼쳐진다.하지만 인천시는 인천에서 몇 건의 만세운동이 벌어졌고, 몇 명이나 참여했는지 제대로 된 통계조차 확보해 놓지 못했다. 인천시 관계자는 "올해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3·1운동과 관련한 역사 기록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고 했다.인천시가 1973년 발행한 '인천시사'에는 3·1운동 때 인천에서 만세운동이 8번 열렸고, 9천명이 집회에 참가했으며, 15명이 투옥됐다고 적혀 있다. 이 통계는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이 1920년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인용한 것이다. 1920년 당시 인천의 행정구역은 '인천광역시'가 아닌 '인천부'였다. 이후 인천시가 발간한 '인천시사'에서는 인천지역 만세운동 건수가 다뤄지지 않았다. 인천시가 가장 최근 펴낸 2013년 '인천시사'는 인천창영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인천에서 벌어진 주요 만세운동만 소개하고 있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919년 당시 인천부는 지금의 중구, 동구, 미추홀구 일부 지역이었다. 미추홀구 문학동과 계양·부평·남동·영종·용유·옹진군은 부천군이었다. 강화군은 별도의 행정구역이었다. 지금의 10개 군·구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하면 인천지역 3·1운동은 8차례보다 훨씬 많은데도 여전히 인천부를 기준으로 한 통계가 통용되고 있다.인천개항장연구소 강덕우 소장은 "황어장터 만세운동, 용유도 관청리 만세운동 등 인천 북부지역과 강화, 옹진 등의 지역에서 이뤄진 3·1운동에 대해 개별적으로는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몇 건이 벌어졌는지는 정리되지 않았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존의 연구에서 한 발짝 더 들어갈 수 있는 통계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3-13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4)인천의 3·1운동]동맹휴학이 당긴 '만세불꽃' 시민속으로 번지다

인천에서 처음 3·1운동이 시작된 곳은 어디일까? 인천에서는 얼마나 많은 만세운동이 벌어졌을까? 3·1운동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인천에서의 3·1운동 관련 통계조차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다.이병헌이 1959년 쓴 '삼일운동비사(三一運動秘史)'에서는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교) 3~4학년 학생들이 선생이 없는 사이에 학교를 뛰쳐 나와서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생도들과 합류해 시내 중심에서 시위했다'고 밝히고 있다. 초등학교 학생들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연대해 만세행진을 벌였다는 얘기다.1919년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펼쳐진 3·1운동 소식을 접한 이 학교 3, 4학년 학생들이 만세 운동의 하나로 동맹 휴학을 결정한 것이다. 당시 동맹 휴학은 학생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항일 투쟁이었다.6일 인천공립보통학교 3·4학년과 공립상업학교 학생들 연대 시위 '시발점'기독교인 중심 만국공원 집회·상인들 가게 문 닫는 철시운동 급속도로 퍼져강화 1만명의 함성·계양 황어장터·석모도 4월 운동… 북부권·섬에서도 '활발'현재 관련통계 중구·동구·미추홀구 일부만 반영 '미흡' 市 전면 재조사 필요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918년 통계연보'에 따르면 4년제로 운영되는 당시 보통학교 1~4학년 학생의 평균 나이는 만 11~15세였다. 만 20세가 넘어 학교에 다니는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인천공립보통학교의 동맹 휴학을 주도했던 김명진·이만용·박철준·손창신 등도 당시 만 16~19세였다.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자 학교 교직원들은 이 사실을 경찰에 알렸다. 김명진과 이만용은 교직원들의 행동에 반발했고, 동맹 휴학 시작 이틀 뒤인 8일 오후 9시 학교 건물 2층에 몰래 들어가 미리 준비한 절단용 가위로 전화선을 끊어 경찰서와 연결된 통신을 차단했다.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 휴학은 열흘 가까이 계속됐다. 경찰이 학부형 회의를 소집해 25명을 처벌하겠다는 강경책을 발표했지만, 학생 405명 가운데 85명이 다음 날 결석할 정도로 항일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이를 시작으로 인천에서 3·1운동은 급속도로 번져 나갔다.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나서자 차츰 일반 시민들도 동조했다. 3월 9일 오후 5시 30분께에는 기독교인과 청년 학생 300여명이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오후 8시 30분께에는 50여명의 시민들이 경인가도(현 경인로) 부근에서 만세 운동을 진행하다 경찰과 충돌하기도 했다. 또 3월 31일에는 상인들이 가게의 문을 닫는 철시운동을 벌이기도 했다.인천시가 1973년 발행한 '인천시사'는 3·1운동 때 인천에서 만세운동이 8번 열렸고, 9천명이 집회에 참가했으며, 15명이 투옥됐다고 적었다. 이는 박은식이 1920년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따른 것이다.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1919년 당시 인천부는 지금의 중구·동구와 미추홀구 일부 지역으로 축소된 상태였다. 인천도호부청사가 있는 미추홀구 문학동 일대도 계양·부평지역과 함께 부천군이 됐고, 강화군도 있었다. 옹진군은 부천군에 속한 지역이었다. 지금 강화 옹진을 포함한 인천 전역을 놓고 보면 당시 인천부는 극히 작은 구역이다.계양과 부평 등 인천 북부지역뿐만 아니라 강화·옹진 등 섬지역, 문학동과 서창동 등 당시 인천이 아니었던 곳에서도 3·1운동은 활발히 벌어졌다. 강화보통학교(현 강화초등학교) 3학년과 4학년 학생 100여명은 3월 12일과 13일 이틀 동안 칠판에 태극기를 그리고, 운동장에서 만세 운동을 했다.당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던 황도문은 자신의 고향인 강화에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유봉진에 전달했고, 이를 지역 주민에게 배포하면서 강화 지역의 3·1운동은 들불처럼 번졌다. 3월 18일에는 강화군 부내면(현 강화읍 관청리) 읍내 장터에서 1만명이 참여한 만세 운동이 있었고, 27일에는 면사무소를 습격하기도 했다.강화 지역의 3·1운동 열기는 김포를 거쳐 계양과 부평 등 인천 북부지역에도 영향을 끼쳤다. 1919년 3월 27일 자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소요사건의 후보·경기도 부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당시 계양과 부평 지역의 상황을 설명했다."인천 시내는 물론이요 부근 일대는 관헌의 취체(일본어로 단속)가 엄중하기 때문에 비교적 평온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일전 강화도의 소요가 도화선이 돼 그 다음에 접근된 김포도 일어났고 다시 그 동네와 인천 경찰서 관내의 경계선 되는 부천군도 불온의 형세가 있음으로 인천경찰서에서는 만일을 경비키 위해 하뢰 순사부장 외 순사 2명을 부평주재소에 임시 응원으로 파견하였더라."매일신보에서 말한 불온의 형세는 계양구 장기동에서 있었던 황어장터 만세운동이다.황어장터는 당시 계양구 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조선총독부가 1924년 발간한 '조선의 시장'에서는 '경기도 부천군에는 2곳의 시장이 있는데 한 곳은 소사리에 있고, 나머지는 장기리에 있다. 이들 시장에는 1곳 당 평균 이용인구가 1천~2천명에 달한다'고 표현했다. 1천명이 넘는 주민이 이용하는 시장이기 때문에 만세 운동 장소로 적합했던 것이다.당시 재판기록에 따르면 계양면 오류리에 거주하던 천도교인 심혁성은 3월 24일 오후 2시께 황어장터에 모인 6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같은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심혁성을 구하기 위해 300여명의 주민이 심혁성이 있던 면사무소를 습격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휘두른 칼에 맞아 이은선이 숨지기도 했다. 황어장터 만세운동 사건으로 40여명이 체포됐고, 심혁성은 징역 8월을 선고 받았다.3월 27일에는 문학면 관교리(현 미추홀구 문학동·관교동 일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이상태 등의 재판기록을 보면 이들은 이날 밤 마을 주민 15명과 함께 마을 뒷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동네를 행진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경찰에 붙잡혔다. 이상태는 재판에서 "할 수 있다면 원래의 한국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만세를 불렀다"고 진술했다.인천 내륙뿐만 아니라 섬 지역에서도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3월 28일 용유면 관청리 광장에는 독립을 염원하는 150명의 만세 운동이 있었다. 당시 서울 배재학당에 다니던 조명원은 23일 독립선언서를 품고 용유도에 귀향했다. 조명원은 조종서, 문무현, 최봉학 등과 함께 '혈성단(血成團)'을 조직하고, 격문을 만들어 28일 관청리 관장에 모여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주민들에게 권유했다. 28일 시작된 시위는 용유도 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이틀 동안 이어졌다.덕적도에서는 4월 9일 학교운동회를 맞은 명덕학교 학생 50명과 학부형 30여명이 참여해 만세운동을 벌였다. 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 선생은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투옥 중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했다. 명덕학교 독립운동의 영향으로 인근에 있는 문갑도와 울도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강화도와 석모도에서도 만세운동은 거세게 일었다. 석모도는 특히 4월에도 펼쳐졌다.1956년 발간된 '경기도지'에 실린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통계를 보면, 부평에서 만세운동이 6번 있었고 950명이 집회에 참가했다. 투옥자도 98명으로 인천보다 많았다. 강화에서도 2번의 만세운동이 있었고, 400명이 참가했다고 나온다.현재 널리 알려진 인천의 만세운동 통계는 '중·동구와 미추홀구 일부'만 범위로 할 뿐이다. 부평·계양지역이나 강화, 옹진, 영종·용유 등지의 만세운동도 반영할 수 있는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인천연구원 김창수 부원장은 "행정구역 변화가 많았고, 과거보다 사료가 더 많아졌다"며 "인천시 등 지자체가 나서 전면적인 재조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인천 계양구 장기동에 있는 황어장터 만세운동 기념비. /인천 계양구 제공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인천 중구 용유동에 있는 3·1 만세 운동 기념비. 당시 용유도 주민 150여 명이 이곳에서 3·1운동을 벌였다. /인천 중구 제공계양구 장기동에서 열렸던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심혁성 지사. /인천보훈지청 제공

2019-03-13 김주엽

[zoom in 송도]삼성바이오에피스, 5공구에 R&D센터 건립사업 본격화

1800억원 투입 내년말 완공 예정통합 연구시설 구축 경쟁력 강화56만ℓ생산량 단일도시 '세계1위'11공구에 '첨단클러스터' 추진도삼성바이오에피스가 인천 송도국제도시(경제자유구역) R&D센터 건립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삼성바이오에피스는 송도 R&D센터 건립사업 본격화와 관련한 '비유동자산 취득 결정'을 최근 공시했다.삼성바이오에피스는 송도 5공구 첨단산업클러스터 내 부지 약 4만3천㎡에 12층짜리 R&D센터를 건립하고 있다. 전체 투자 비용은 약 1천800억원이다. R&D센터는 1천300여명의 임직원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며 완공 예정일은 2020년 12월31일이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통합 연구시설 구축을 통해 연구개발 경쟁력을 강화할 계획이다. 송도 R&D센터는 삼성바이오에피스가 글로벌 바이오제약 기업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초기지 구실을 할 전망이다. → 위치도 참조현재 삼성바이오에피스 사업장은 인천 송도와 경기도 수원으로 이원화돼 있다. 송도 R&D센터가 완공되면, 수원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400여명의 임직원이 송도지역에서 근무할 예정이다.삼성바이오에피스 관계자는 "송도 R&D센터가 지역 전문 인력 양성, 글로벌 수준의 연구개발 시설 확충 등 송도 바이오 클러스터 조성사업에도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기대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바이오에피스, 셀트리온 등이 입주한 송도의 바이오의약품 생산 용량은 56만ℓ로, 단일도시 기준 세계 1위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이들 글로벌 바이오 기업이 있는 송도 5공구 첨단산업클러스터와 연계해 송도 11공구 일부(약 100만㎡)를 첨단바이오클러스터로 조성하는 사업도 추진 중이다.삼성바이오에피스는 2012년 2월 삼성바이오로직스와 미국 바이오젠이 합작해 설립한 바이오제약 전문 기업이다. 창립 이후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 개발 및 상업화에 주력해 왔으며, 2019년 3월 현재 블록버스터급 바이오의약품 4종의 판매 허가를 획득해 미국·유럽·한국 등에서 판매하고 있다.삼성바이오에피스는 지난해 유럽 시장에서 약 6천억원의 매출을 달성하는 등 글로벌 바이오시밀러 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제품별로는 '베네팔리'(성분명 에타너셉트)가 4억8천520만달러(약 5천342억원)로 2017년 대비 31% 증가했고, '플릭사비'(성분명 인플릭시맙)는 2017년보다 380% 증가한 4천320만달러(약 476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임랄디'(성분명 아달리무맙)는 지난해 10월 출시한 지 70여일 만에 1천670만달러(약 184억원)의 매출을 올렸다.삼성바이오에피스는 이러한 연구개발 역량을 신약 개발 분야로 확대하고자 아시아 최대 제약회사인 일본 다케다 제약과 급성 췌장염 후보물질에 대한 공동 개발에 착수, 현재 임상 1상을 진행 중이다.삼성바이오에피스는 지역사회와 상생하기 위한 '나눔 활동'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함께 지역의 소외된 이웃을 위한 기부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지난달 28일에는 창립 7주년을 기념해 임직원 전원이 봉사 활동을 했다. 사업장 인근에서 환경 정화 활동을 펼치고, 생활 형편이 어려운 초등학교 입학생들에게 문구류 선물 키트(kit)를 만들어줬다.삼성바이오에피스 관계자는 "최근 사회공헌 전담 조직을 신설했다"며 "앞으로도 업체의 특성을 살린 미래 세대 교육활동과 소외된 이웃을 위한 다양한 나눔 활동을 펼칠 계획"이라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 송도국제도시 5공구 첨단산업클러스터 삼성바이오에피스 R&D센터 건설 현장. 본관동, 복지동 등 건축물 4개가 들어선다. 현재 기초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삼성바이오에피스 인천 송도국제도시 R&D센터 조감도. /삼성바이오에피스 제공

2019-03-10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3)계봉우와 예단포]어민들과 견뎌낸 시린 유배 '독립 봄날' 꿈꾸다

계몽운동 펼치다 북간도 '망명' 저술·기고등 항일운동으로 추방·압송돼1916년 영종도 귀양·日 허락안해 교사 못하고 주민 도움으로 1년간 생계떠나며 '희망의 詩' 남겨 유배기간 독립계획 구상 추정 '행적 발굴' 필요만세운동후 카자흐스탄 강제 이주… '독립선언서 초안 기여' 연구 절실"일년이 꿈같이 지났으니(一年如夢過) 내가 곧 꿈속의 사람이로다(我是夢中人) 꿈을 깨어 배를 타고 가니(夢罷乘船去) 앞길에 온갖 일이 봄이로다 (前程萬事春)"독립운동가 북우 계봉우(1880~1959)는 1916년 12월부터 1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인천 영종도 예단포를 떠나면서 이 같은 시를 남겼다. 추운 겨울 배를 타고 영종도를 떠나면서 조국의 독립이라는 '봄날'이 머지않아 찾아올 것이라 기대했다. 계봉우가 1940년부터 집필해 1944년 펴낸 자서전의 제목 '꿈속의 꿈'은 그가 영종도를 떠나면서 남긴 시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그가 영종도에 머물던 1년은 추운 겨울을 피해 잠만 잤던 시기가 아니라 독립에 대한 꿈을 꾸며 앞으로 나아갔던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인천이 계봉우를 기억하고 그의 행적을 발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계봉우는 한국과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했던 역사학자이자 한글학자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고향 함경도 함흥을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앞장섰고, 스무 살의 나이에 북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영종도 유배형을 받기 직전 그는 중국의 한반도 접경지에서 활발하게 항일 운동을 했다.계봉우의 영종도 유배는 1916년 11월 일본의 괴뢰국가로 세워진 만주국에서의 추방으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당시 제국주의 통치 범위에 있는 국가의 영사관을 통해 조선인을 해당 국가에서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했다. 추방권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의 올가미가 됐다.국가보훈처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은 계봉우의 '재류금지 명령 집행 보고의 건'을 보면 일제는 계봉우가 중국 연길에서 배일(排日) 기관잡지 '대진(大震)'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안중근 전설'을 기고했고, 배일연설을 하는 등 과격한 언동을 했다는 이유로 만주 재류를 금지했다.조선인들이 연길에 설립한 학교에서 역사, 지리, 한문을 가르치면서 역사교과서 '최신 동국사·最新東國史'를 편찬하고, 왜적의 침입과 한일강제병합의 굴욕 등을 기술해 학생들에게 적개심을 불러오는 데 뜻을 기울였다는 것도 추방 이유였다.만주에서 쫓겨난 계봉우는 회령으로 압송됐다가 서울 남산 아래 일본 경무총감부 유치장으로 이송됐다. 계봉우는 경찰에 체포될 때 압수된 안중근전 초고와 관련한 조사도 받았다. 그는 안중근전 발간을 위해 1916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루를 머문 사실에 대해 집중적인 추궁을 받았다. "안중근 전기를 지었으니 안중근 같은 놈이 아니겠느냐"는 취조였다.1916년 12월 총감부는 계봉우를 1년간의 영종도 유배형에 처했다. 계봉우는 그의 자서전에서 치안법 제5조를 근거로 영종도에 유배를 갔다고 기록했는데 정확히는 '보안법' 제5조가 맞다.보안법 제5조는 "내부대신은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동작을 행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에게 그 거주장소로부터 퇴거를 명하거나 1년 이내의 기간 동안 특정한 지역에의 출입금지를 명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판결을 통해 받는 형벌이 아니라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행정처분이다.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화를 진행하면서 항일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1907년 7월 24일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강제로 제정해 대한제국으로 하여금 반포하게 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최우석 연구원은 "보안법을 통해 일본은 사법권을 비롯해 한국의 모든 것을 장악했고, 보안법 5조를 통해 항일 운동을 할 우려가 있다고 의심이 되는 독립운동가들을 유배 보내기 위해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계봉우가 서울에서 예단포로 온 경로와 그가 예단포에서 머문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계봉우의 자서전을 통해 예단포 주민들의 도움으로 그가 힘든 유배 생활을 버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계봉우는 자서전에서 "그렇게 금고를 당한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먹게 되는데, 그곳에서는 어업을 위주로 하여 나에게는 거기에 소용되는 기능이 없었다. 나를 독선생으로 청하여 자기의 자제를 교육하려는 사람도 있었으나 경무총감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허락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놈의 글은 아이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준다는 그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먹은 일년 밥값 오십삼원은 마침내 그곳의 부형들이 분담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나에 대한 동정의 표현이었다"고 회상했다.영종도의 북쪽 끝에 위치한 예단포는 당시 번창했던 어촌 마을이다. 예단포라는 지명은 강화 천도시기인 고려 고종 때 영종도에서 왕이 있는 강화로 예단으로 보낼 물건을 싣고 왕래했던 곳이라고 해 지어졌다고 한다. 인천대 인천학연구소가 발간한 '인천 섬 지역의 어업문화'에 따르면 예단포는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200여 가구가 어업으로 풍족하게 생활해 "쌀밥을 먹으려면 예단포로 시집을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 하지만 1960년대 말부터 조기잡이가 쇠퇴하고, 어선들이 인천 화수부두로 정박지를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쇠퇴했다. 지금은 주변이 영종도 미단시티 사업부지에 편입돼 옛 모습이 대부분 사라졌고, 포구에는 횟집들이 들어서 있다. 17척의 등록 어선이 낙지와 우럭 따위를 잡고 있다.예단포 토박이인 김윤조(66) 운북어촌계장은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어업을 했던 왜정 때만 해도 예단포는 손꼽히는 포구였고, 배가 200척이 넘었다고 한다"며 "농사도 짓고 물고기도 잡는 풍성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고기도 잘 안 잡히고 점점 위축되고 있다"고 했다. 김 어촌계장은 예단포가 독립운동가의 유배지였다는 얘기를 들어보지는 못했다고 했다. 이곳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조진만(1903~1979) 3·4대 대법원장이라고 했다.인천에 있는 동안 계봉우가 누구와 교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훗날 3·1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했던 애국지사와의 긴밀한 교류가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배 기간 선생으로 모셔 가르침을 구하려 했던 집안이 있었을 정도로 그의 명성은 인천 섬 지역에서도 자자했다. 그는 인천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들과 계획을 구상했을 것이다. 1916년 12월 동짓날 예단포에 온 계봉우는 꼭 1년 뒤인 1917년 12월 동짓날에 고향 영흥으로 떠났다. 그는 영흥에서 3년 동안 거주제한 조치를 당한다. 거주제한 조치를 당하면 주거지 반경 5㎞ 밖을 출입할 때 반드시 일본 경찰에 알려야 했고, 방문지마다 파출소에 통보를 해야 했다.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는 상황이었다. 계봉우는 그런 상황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1919년 3·1 운동 기획에 관여했다.계봉우는 1919년 2월 27일 평양신학교 입학 수속을 핑계로 영흥을 떠나 서울로 왔다. 그는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이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인 강기덕은 계봉우가 서울에 왔을 때 독립선언문 초안을 잡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계봉우는 "나는 그날 밤에 제2회 운동의 지휘적 책임을 부담한 강기덕의 요청에 의하여 세브란스 병원의 어떤 비밀실에 가서 선언서를 초 잡은 일이 있었다. 그 후에 그것이 채용되었는지 나는 알 길이 전혀 없었고 또는 알려고도 아니하였다"고 했다.계봉우는 고종의 장례가 있던 3월 3일까지 서울에 머무르며 만세행렬에 동참하기도 했다. 계봉우는 당시 만세 행렬을 "머리에는 방갓을 쓰고 한 어깨에는 보침을 멘 상인 한 분이 뛰어와서 대한독립이란 말에 어찌나 기뻤던지 춤추는 것을 보았다. 그때의 조선 예절로 본다면 상인으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인데, 그러나 그는 껑정-껑정 뛰면서 춤을 춘다. 그것을 누가 실례라고 할까? 그 춤이야말로 민족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 것이었다"고 회상했다.계봉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독립유공자 추서는 1990년대 이르러서야 이뤄졌다. 그는 1937년 강제 이주한 카자흐스탄에서 1959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았기 때문에 국내에 일찍이 소개되지 않았다. 그가 임시정부에 있을 때 신문에 투고한 글도 본명이 아닌 필명으로 게재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1990년 한·러 수교가 맺어진 뒤에야 그의 저술과 독립운동 활약상이 국내에 소개됐다. 인천에서 유배 생활을 한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인하대 윤병석(89) 명예교수가 1990년대부터 계봉우 행적 발굴과 저술목록 정리에 힘썼고, 그 결실이 인천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맺어지고 있다. 계봉우에 대한 공식 연보에서 일부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있다. 현재 국가보훈처가 제공하는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인천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해 고향 영흥으로 귀향했다"고 나와 있는데, 계봉우 자서전과 학계의 연구자료를 보면 계봉우는 인천 영종도 예단포에서 1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고, 고향 영흥에서 3년의 거주 제한 조치를 당했다는 설명이 옳다. 학계에서는 계봉우에 대한 폭넓은 후속 연구가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남선과 손병희, 한용운 등 기존에 알려진 독립선언문 작성의 주역 외에 계봉우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만주와 러시아 지역 항일운동사 연구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계봉우가 3·1 운동 때 독립선언서 작성에 어떻게 기여했는지에 대해 밝혀진 바가 없어 연구가 필요하다"며 "자서전 외에는 관련 문헌이 남아 있지 않고, 강기덕의 증언에도 그런 내용이 없어 자서전에 나온 초안의 정체가 드러날 경우엔 획기적인 발견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계봉우 자서전에서 영종도 유배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 /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 제공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한 이후의 계봉우. /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 제공계봉우의 장례식 모습. /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 제공카자흐스탄에 있는 계봉우 묘의 흉상. /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 제공독립운동가 계봉우는 1916년 12월 총감부로부터 1년간 영종도 유배형에 처해졌었다. 그가 머물렀던 인천시 중구 예단포 현재 전경.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3-06 김민재

[독립운동과 인천·(3)계봉우와 예단포]독립선언서 초안 작성 '계봉우' 재조명해야

유배생활 등으로 자서전에만 기록'만세운동 역사'서 행적 복원 지적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 일대에서 학생들이 이끈 '제2차 만세운동' 때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인천에서 유배 생활을 했던 북우 계봉우(1880~1959)가 작성한 사실이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새로이 주목받고 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인천 영종도 예단포 유배형 뒤 1919년 3월 만세 시위를 주도한 계봉우에 대한 재조명과 위상 재정립이 요구되고 있다.1880년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난 계봉우는 대한제국 시기 국내에서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북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계봉우는 1916년 독립운동 행적이 드러나 만주에서 국내로 강제 송환됐다가 영종도 예단포에서 1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유배형을 마친 뒤 고향 영흥으로 돌아간 그는 또다시 처한 3년의 거주 제한 조치 탓에 만세 운동에 드러내놓고 나서지는 못했지만,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이었던 강기덕의 요청을 받아 3월 5일 제2차 만세운동의 독립선언서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이 사실은 계봉우의 자서전 '꿈속의 꿈'에 나온다.제2차 만세운동은 당시 보성전문학교 학생이던 강기덕이 서울 남대문역(서울역 광장)에서 주도한 대규모 학생 시위다. 3·1운동 당시 33명의 대표는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예정이었으나 일부 종교계에서는 학생들이 다수 군집한 곳에서 자칫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보여 장소가 식당 태화관으로 변경됐다. 그러자 학생들은 독자적인 시위를 열기로 하고 대규모 군중을 모을 수 있는 남대문에서 만세 시위를 하기로 했다.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는 3월 5일 제2차 만세운동에 학생 1만명이 참여했다고 전하고 있다.강기덕은 대중에게 배포할 독립선언서 초안을 계봉우에게 부탁했다. 마침 고종의 장례식(3월 3일)을 보러 서울에 온 계봉우는 당시 세브란스 병원의 한 비밀 방에서 선언서의 초안을 잡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다만 계봉우는 고종 장례를 마치자마자 서울을 떠나는 바람에 그가 작성한 대로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져 3월 5일 배포됐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의 자서전에도 독립선언서의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제2차 만세운동은 3·1운동이 전국에 들불처럼 번질 수 있도록 한 기폭제 역할을 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만큼 당시 뿌려진 독립선언서 내용도 큰 가치가 있다. 강기덕은 남대문역에서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보안법·출판법 위반, 소요죄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그러나 재판을 받으면서 독립선언서 작성자 계봉우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고, 당시 배포됐던 독립선언서의 실체도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3월 만세운동의 역사에서 계봉우가 빠져 있었다. 3·1운동 100년을 맞이한 지금, 제2차 만세시위 당시 계봉우의 행적을 복원하고, 그를 3월 만세 운동 역사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2019-03-06 김민재

[zoom in 송도]송도 E5블록 건축물 설계안 갈등

"특색있는 건물 경관이 도시경쟁력"온라인커뮤니티 올댓송도 시민청원美 게일사에서 주주사 교체한 NSIC디자인 수정 공사지연 불가피 '난색'인천 송도국제업무단지 E5블록에 짓는 건축물(주상복합) 경관을 놓고 주민단체와 사업시행자 간 갈등이 있다.송도 지역 온라인 커뮤니티 '올댓송도'는 회오리 모양의 설계안으로 건립해달라고 인천시와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송도국제업무단지 사업시행자인 NSIC(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는 바람개비 형태의 현 설계안도 경관이 뛰어나며, 설계 변경 시 시간이 많이 소요돼 전체 사업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입장이다. → 위치도 참조올댓송도는 인천시 온라인 시민청원 게시판에 '송도 경관의 정점 센트럴파크 E5블록 회오리 건물을 부활시켜 주세요'라고 올렸고, 이 글은 답변 충족 요건인 3천명의 공감을 얻은 상태다. 인천시는 답변을 준비하고 있다.■ 주민단체, '회오리 건물 부활' 요구올댓송도는 특색 있는 건축물 등 도시 경관이 송도의 경쟁력이라고 주장한다. E5블록 건축물을 회오리 형태로 지어달라고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회오리 형태의 설계안은 NSIC 주주사였던 미국 게일인터내셔널(이하 게일)의 그림이다. 게일은 회오리가 회전하는 모양을 본떠 E5블록에 건립할 지하 2층, 지상 40층짜리 건물 2개를 설계했다.지난해 8월 게일은 보도자료를 통해 "E5블록 건축물은 국내 최초로 회오리가 회전하는 모양으로 설계했다"며 "송도국제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센트럴파크 주변 경관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킬 것으로 예상한다"고 기대했었다. 현재 게일은 NSIC 주주사가 아니다.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사업은 NSIC 주주사였던 게일과 포스코건설 간 갈등으로 2015년 7월부터 중단됐었다. 중단 상태가 장기화하자, 포스코건설은 지난해 9월 게일과 결별하고 홍콩에 본사를 둔 새로운 투자자와 손을 잡았다.올댓송도는 NSIC 주주사가 변경됐어도 게일의 설계안대로 건축물을 건립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올댓송도는 시민청원에서 "적어도 미국 디벨로퍼(게일)는 성냥갑 아파트를 짓는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라며 "(게일은) 최소한 건물을 아름답게 지어 도시 경관을 만들어 갈 줄 아는 스탠더드를 갖고 있다"고 했다. 또 "현재 포스코건설은 송도국제업무단지를 개발해야 하는 디벨로퍼"라면서 "포스코건설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은 E5블록에 회오리 건물을 부활시켜 주는 일"이라고 했다.■ NSIC, 물리적으로 설계 변경 어려워지난해 9월 주주사를 교체한 NSIC는 사업 정상화 측면에서 설계 변경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E5블록은 금융기관과의 대출 약정에 따라 2022년 12월 말까지 준공해야 한다. 공사 기간(최소 40개월)을 고려하면 늦어도 올해 3/4분기에는 공사 및 분양을 시작해야 한다.올댓송도가 요구하는 회오리 모양으로 설계 변경을 추진할 경우, 준공 시한 안에 공사를 마칠 수 없게 된다. 준공 의무를 지키지 못하면 대출 원리금 수천억 원을 상환해야 하고, 그럴 경우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사업 전체가 또다시 중단될 수 있다는 게 NSIC의 설명이다.NSIC는 바람개비 모양의 설계안이 사업계획 승인을 받은 '원안'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실제로 회오리 모양의 건축물은 송도국제업무단지 D24블록 설계안이다.NSIC 관계자는 "회오리 건물은 원안이 아니다. 바람개비 건물이 2015년 사업계획 승인을 받은 원안"이라며 "적법 절차에 따라 사업을 계획대로 진행할 수 있도록 기업(우리) 입장도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고 했다.E5블록 설계 원안은 바람의 흐름을 형상화한 바람개비 형태의 건축물이다. 이 관계자는 "바람개비 건물도 여느 설계안 못지않은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며 "송도 경관에 기여할 것으로 자신한다"고 했다.■ 인천경제청은 고민 중인천경제청은 송도·청라·영종 등 인천경제자유구역에 들어서는 건축물의 외관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색 있는 건물 하나하나가 도시 경관을 아름답게 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인천경제청은 경관위원회 운영을 통해 건축물 디자인을 심의하고 보완·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경관 심의는 건축 사업의 첫 관문이기도 하다. 경관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건축 심의 등 다음 절차를 밟지 못한다.하지만 경관 개선은 사업비 증가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사업자 입장에선 불만이기도 하다. 외관이 복잡해지면 내부 공간 활용성이 낮아지고, 사업비 증가는 분양가 상승을 초래한다는 게 사업자들의 주장이다.E5블록은 특별한 경우다. 올댓송도 요구에 공감하지만, NSIC 사정도 이해가 된다는 점에서다. 인천경제청은 E5블록 설계 원안(바람개비 형태)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경관을 개선하는 대신, 송도국제업무단지 내 다른 블록에 회오리 모양보다 더 멋진 건축물이 들어설 수 있도록 NSIC에 요구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9-03-03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단독·공동주택 신재생에너지 설치보조금 지원

■인천 국제프리미엄 펫쇼 ■단독·공동주택 신재생에너지 설치보조금 지원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지속가능한 친환경에너지 도시 조성을 위해 송도국제도시 등 인천경제자유구역 단독·공동주택을 대상으로 신재생에너지 설치 보조금을 지원한다.인천경제청은 신재생에너지 설치에 대한 주민 요구를 반영해 지난해보다 보조금 규모를 25% 늘렸다. 또 주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태양광 발전설비와 관련해 시비 증액을 통해 주민 부담을 완화했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연수구와의 협업을 통해) 고층 아파트와 빌딩이 많은 송도의 도시환경 특성에 맞춰 공동주택을 태양광 발전설비 보조금 지원 대상으로 지정했다"면서 "국비 공모 사업에 적극 참여해 상가주택 등 고층 건물의 태양광 보급사업도 적극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다.보조금 신청 방법 등 자세한 내용은 인천시 홈페이지(www.incheon.go.kr)를 참고하거나 인천경제청 환경녹지과(032-453-7242)로 문의하면 된다.■송도컨벤시아, 27일 '국제 화학·바이오장비展'(주)메쎄이상과 인천관광공사는 국내 화학장비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수요 기반 확대를 위해 오는 27~29일 송도컨벤시아에서 '제1회 국제화학·바이오장비 & 분석기기전(CHEMLAB KOREA)'을 개최한다.이번 전시회에서는 이화학, 바이오, 환경·안전 분야에 관련된 장비, 설비 전 품목을 만나볼 수 있다. 세부 품목으로는 화학생산설비, 실험장비, 측정·분석장비를 비롯해 시약·소모품, 데이터 시스템, 제약 패키징, 실험실 및 생산 안전 장비, 수질·대기 관리에 적용되는 장비 등이 전시될 예정이다.전문 세미나와 약 30개 세션 참가기업들의 우수한 제품과 기술력을 발표하는 자리도 마련된다.전시 사무국 관계자는 "장비 시장은 글로벌 주요 국가들이 미래 성장 동력으로 육성 중인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며 "이번 행사가 산업 현황과 최신 기술 동향을 한눈에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www.chemlabkorea.com)에서 확인하거나 전화(02-6121-6378)로 문의하면 된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1일부터 3일까지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2019 인천 국제 프리미엄 펫쇼'. (사)한국애견협회가 주최하고 인천시와 농림축산식품부가 후원한 행사다. 2016년 10월 '인천 국제 펫케어'로 시작해 올해로 네 번째를 맞은 이번 행사에서는 다양한 전시·교육·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더윤컴퍼니 제공

2019-03-03 목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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