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이슈&스토리]반쪽 지원에 그친 8년… '평화의 섬' 걸맞은 인프라 구축돼야

22일(매년 3월 넷째 금요일)은 서해수호의 날이다.제2연평해전과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등에 맞서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호국 영웅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이다.서해에서 벌어진 남북 교전은 비단 군인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서해5도 주민들은 연평도 포격 당시 피난 행렬 속에서 느낀 불안과 공포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이러한 서해5도 주민들의 정주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2011년 처음 마련된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이 오는 2020년 종료를 앞두고 있다.서해5도 지원 특별법에 따라 만들어진 이 계획은 그동안 접경지역이라는 이유로 소외됐던 서해5도 지역에 대한 종합적인 발전 계획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정부 예산은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해 '반쪽짜리' 계획에 그쳤다는 지적도 뒤따랐다.8년이 지난 지금, 연평도 포격의 상흔으로 얼룩진 2011년과 달리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자연스레 '제2차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2021~2030)' 수립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남북 관계가 개선된 만큼 대북 사업, 관광 사업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 지원이 주민들의 실질적인 소득 증대로 이어질 수 있는 청사진 수립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北위협 속 정주환경 개선위해 2011년 특별법 제정 9천억대 구상국비 지원율 53% '실망' 노후주택 개량 올해는 30여가구만 수혜 옹진군·의회 노력등으로 정부 2차 계획 수립 용역발주 추진 '다행'민간 자본 관광육성 지지부진… 소득 증대 등 현실적 사업 필요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이 처음 마련된 건 남북 관계가 냉랭했던 2011년이었다. 정부는 2010년 11월 발생한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주민생활 안정대책 차원에서 이듬해 서해5도 지원 특별법을 제정하고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을 수립했다. '풍요로운 평화의 고장, 서해5도'라는 비전을 세우고 주민을 위한 쾌적하고 수준 높은 정주환경 조성과 동시에 북한의 도발로부터 대비하기 위한 대피시설 확충 사업을 동시에 담았다. 또한 섬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해 경쟁력 있는 특화 산업과 관광 산업 육성과 관련한 사업도 포함했다. 사업비는 2011년부터 2020년까지 국·시비, 민간 자본 등 9천109억원이다. 서해5도 도로 개설, 항만시설 정비, 관광 기반 구축, 대피소 확충, 해상 교통망 개선 등을 위한 것이다. 이중 지난해까지 예산 3천128억원이 투입됐다. 그러나 국비는 계획된 4천599억원에서 2천434억원이 지원되는 것에 그쳤다.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시행이 8년이 지났는데도 국비 지원율이 53%로 미흡한 수준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민들에게 호응을 받고 있는 노후주택 개량사업의 경우 신청을 원하는 군민이 200가구를 넘지만, 올해 수혜를 받는 가구가 30여 가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문제는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종료 시점이 다가오자 수면 위에 올랐다. 게다가 지난해 말 옹진군이 서해5도 여건변화에 따라 서해5도 관련 사업 계획을 변경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기획재정부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옹진군과 옹진군의회가 반발하고 나섰다.옹진군의회는 지난해 12월 열린 제207회 제2차 정례회에서 '제2차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연장 마련 촉구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당시 홍남곤 옹진군의회 의원은 "우리 군이 행안부에 최저생계비 증가율, 물가 상승률 등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 서해5도에 대해 대폭 지원할 수 있도록 지속 건의했는데 여러 여건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과거처럼 북한의 위협이 늘 도사리는 여건이 아니라 4·27 판문점 선언 이후 서해5도가 평화의 섬으로 주목받으며 서해평화수역 조성이 가시권에 들어오는 만큼 서해5도의 지역 특성과 주민생활 안전대책을 반영한 종합발전계획을 지속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들은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용역 조속 수립을 촉구하며 용역 수행 기관의 일방적 청사진 수립이 아닌, 옹진군민의 의견이 반영된 실질적이고 장기적인 종합발전대책 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화와 안보가 공존하는 서해5도의 특성을 살린 사업을 추진하되 그 사업이 주민들의 실질적인 소득을 증대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 행정안전부는 '제2차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 수립을 위해 내년께 용역 발주를 계획하고 있어 서해5도 주민을 위한 지원은 지속할 수 있을 전망이다. 옹진군과 주민들은 이번 계획에는 옹진군 주민들이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는 사업이 제시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또한 기존에 담긴 계획 중 실현이 불가능하거나 현실에 맞지 않는 사업에 대한 정리도 필요하다.현재 2020년 종료를 앞둔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에 담긴 사업 78건 중 현재 완료됐거나 진행 중인 사업은 52건이다. 특히 민간 자본을 투입해 조성하는 사업은 대부분 진행되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평화관광육성 및 세계적 평화거점 조성'이라는 목적으로 백령도 남포리 일원에 국제회담장, 숙박시설, 출입국관리시설, 크루즈항, 골프장 등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남포리에 평화공원을 세우고 각종 편의시설에 민간 자본을 일부 투입할 구상이었다. 옹진군은 2021년부터 2030년까지 10년의 청사진이 담길 제2차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에는 이러한 사업을 축소·정리하고 주민들이 꼭 원하는 사업이 담기길 기대하고 있다.옹진군 관계자는 "1차는 대피소 마련, 정주 생활금 지원, 노후주택 개량 사업, 교육비 등에 그쳤고 아예 진행되지 못한 사업도 있었다"며 "이제는 남북 평화 분위기 변화에 따라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영구적인 평화 관련 사업과 관광 활성화 사업, 주민들이 실질적으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주민 소득 증대사업, 인프라 구축, 개발 사업 등에 초점을 맞추는 계획이 담길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 옹진군 연평도 전경. /옹진군 제공인천 옹진군 연평도에 설치된 현대식 대피시설. 비상진료소 등을 갖추고 있다. /옹진군 제공인천 옹진군 소연평도 전경. 이곳에는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에 따라 노후 주택 개량 사업이 진행됐다. /옹진군 제공남북관계 경색 국면 당시 포사격 훈련에 따라 백령도 대피소로 피난한 주민들. /옹진군 제공

2019-03-21 윤설아

[독립운동과 인천·(5)]석모도와 이안득

하바롭스크서 출생 '세미요노프軍' 반혁명군 활동하다 군법관부에 체포반일사상 고취·불온이유 '거주제한처분' 19살에 강화 석모리 일대 유배3·1운동 소식 접한뒤 감시에도 4월 7일 아이들 이끌고 만세외쳐 '징역형'곳곳서 주민들 동참행렬 '영향'… 이후 귀향 또는 월북 가능성 자료미미강화 석모도는 100년 전 3·1 운동과 관련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석모도에서 유배형을 받고 거주 제한 상태에 있던 독립운동가가 만세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그는 1900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이민자 2세로 태어난 이안득(李安得)이다.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그는 일제에 적발돼 19살의 어린 나이에 고향에서 1천㎞나 떨어진 강화군 석모도로 유배를 왔다. 이듬해 우리나라에서는 3·1 운동이 일어났고, 이안득은 유배지의 마을에서도 아이들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 횃불을 피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가 제공하는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에 따르면 이안득은 1900년 12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태어났다. 1800년대 중반 함경도와 평안도의 가난한 농민들은 농사지을 땅을 찾아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크라스키노 등 연해주 지역 주요 도시에는 한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됐다. '신편 강화사' 등 이안득을 기록한 역사서에서는 그의 본적을 함경남도 완산부로 표기하고 있는 데 그의 부모가 함경도 지역에서 농사를 짓다가 러시아로 거주지를 옮겨갔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제의 이안득에 대한 조사서류에도 그의 주소지는 '함경남도 완산부 이하 불명'이라고 적혀 있다. 일제는 이 이유에 대해 '본적이 불분명한 사람은 시베리아에서 태어나거나 십수 년 전에 국외로 떠난 사람이다'라고 명기했다.러시아에서 태어난 청년이 이역만리 강화도 석모도에 거주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국사편찬위원회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아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올려 놓은 이안득에 대한 '거주제한처분의 건'을 경인일보가 전문 번역가에게 의뢰해 해석한 그의 유배 사유는 이렇다."이들은 러시아 '세미요노프'군(軍)에 따라 지도관인 육군 대위 이광열(귀화 조선인)의 명령을 받아 각 부하에 속하는 조선인 군부에 대해 반일사상을 고취시키다 세미요노프 군법 관부에 체포됐다. 이 대위를 제외한 나머지 9명은 하얼빈(哈爾濱) 주재 제국 총영사에 인도되나 모두 품행 불량으로 친일 조선인을 적대시하고 평상시 동포를 능학(凌虐·업신여기고 학대함) 및 협박했으며 종종 일본군 기밀을 찾아내 적대 국민에게 누설했다. 이에 대정7년(1918년) 8월 19일 3년간 중국 재류 금지를 명했으며, 조선 내에서도 치안을 방해할 우려가 있어 보안법 제5조에 따라 거주 제한을 명한다."세미요노프군은 러시아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는 '반혁명군(백위군)' 중 하나로 바이칼호 동쪽 지역(동시베리아)인 자바이칼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부대다. 당시 혁명 정부는 제1차대전 종전을 위해 독일과 단독 강화에 나섰고 연합군에서 탈퇴했다. 연합군은 이러한 조치에 반발해 반혁명군 지원에 나섰다. 특히 일본은 1918년 8월 시베리아 전쟁을 일으키는 등 반혁명군에 무기나 자금을 제공한 연합군 국가 중 하나였다.반혁명군은 제정 러시아에 근무하던 군인이 주축이 된 부대다. 러시아에 살던 조선인 젊은 청년들은 일제와 전쟁을 벌이기 위한 군사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반혁명군에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안득도 이러한 이유로 반혁명군에 가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안득을 이끌었던 이광열은 육군 대위라는 계급을 고려하면 볼셰비키 혁명 이전부터 이곳에서 근무했을 가능성이 높다.만주와 러시아 지역 항일운동사 연구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1918년 8월부터 일제가 시베리아 전쟁을 일으키지만, 같은 해 초부터 반혁명군 지원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대대급 부대를 상륙시키는 등 전쟁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며 "제정 러시아군부터 근무하던 반혁명군 조선인 장교들은 일본이 지휘부를 지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전투 참가를 거부하거나 조선인 병사들과 탈영을 모의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이광열과 뜻을 함께한 조선인은 이안득을 포함해 9명이었다. 군법 관부에 체포된 이광열은 대위라는 계급 때문에 세미요노프군 지휘부가 총살 등의 방식으로 처리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안득 등 9명은 일본 영사관에 넘겨져 조선의 각 섬으로 흩어져 유배를 떠나게 된다. 당시 조선총독부 보안법 5조에는 "내부대신은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동작을 행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에게 그 거주장소로부터 퇴거를 명하거나 1년 이내의 기간 동안 특정한 지역에의 출입금지를 명할 수 있다"고 규정지었다. 재판을 통해서가 아닌 단순 행정처분 형태로 유배가 결정된 것이다. 반 교수는 "191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의 법률이 현대식으로 완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형이나 유배 등 조선시대 형벌을 그대로 적용하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1918년 9월 이안득과 이범우, 김창석은 인천 석모도와 영흥도, 백령도로 각각 유배됐고, 변원정과 황운삼, 문용운 등은 전라도 지도, 가좌도, 초도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강진제는 경상도 욕지도로, 전학만은 평안도 신미도, 민윤식은 충정도 안면도로 옮겨졌다.이안득은 강화군 삼산면 석모리 390-1번지 인근에 살았다. 이곳은 당시 석모도 주민 중 절반 정도가 살았던 지역이라고 한다. 이듬해 이안득은 3·1 운동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안득은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4월 7일 밤 마을 아이들을 이끌고, 마을 뒷산(현 석모도 삼봉산으로 추정)에 올라 횃불을 들고 '조선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삼산면장으로 근무하던 김동헌(金東憲)은 이날 시위에 대해 '성인이 3~4명뿐이었고, 나머지는 어린 학생들이었다는 보고를 들었다'고 상부에 진술했다.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2019년 3월 16일. 이안득이 살았던 석모리 390-1번지 일대를 찾았다. 그가 거주했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집터에는 단층 양옥집이 들어서 있었고, 바로 옆에는 내가성당 석모공소가 30년 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이날 석모리에서 만난 김정섭(88)씨는 "이 근처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유배된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거주지 옆에는 당시 이안득이 만세 운동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봉산이 있었다.까맣게 지워졌지만 이안득은 당시 석모도 지역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의 3·1 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4월 8일 밤 삼산면 석포리 교회당 앞에서 70~80명이 만세를 불렀다. 9일과 10일에도 성공회 교회당 뒤의 산꼭대기(현 석모도 해명산 추정)에서 마을 사람 20여명과 함께 횃불을 피우고 3·1 운동을 했다. 1906년 건립된 석포리 성공회 교회당은 당시에도 지역 주민들이 모이는 광장 역할을 했다고 한다.이안득은 1919년 8월 석모리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조선총독부 서류를 살펴보면 징역형 이후 자신의 고향인 하바롭스크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1922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외무대신에게 보낸 동향정보 서류에 이안득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하바롭스크의 공산당 단체로 들어가 활동했다고 적혀 있다. 남달우 인하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는 "1920년대부터 러시아와 중국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사회주의 사상이 퍼져나갔다"며 "하바롭스크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가 한국사회당을 조직한 지역이기 때문에 영향을 더 받은 것 같다"고 했다.이후 이안득의 이름이 나오는 공식 문서는 없다. 하바롭스크가 연해주 지역 조선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출발지였던 점을 고려하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북한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다. 이안득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절실하다.반병률 교수는 "당시 서류를 살펴보면 러시아 반혁명군에 활동하다 조선으로 유배 온 조선인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들에 대한 연구가 더 진행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이안득의 수형자 기록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이안득의 거주제한처분 서류 원문. /국사편찬위원회 제공한인들이 집단 이주해 거주했던 1918년 당시 하바롭스크 전경. /국사편찬위원회 제공독립운동가 이안득이 유배되었을 때 살았던 강화 석모도 동네. 뒤에 보이는 산은 이안득이 마을 아이들을 이끌고 만세 운동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봉산이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03-20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5)]석모도와 이안득

인천 강화군 석모도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곳으로 유배된 이민 2세대가 이끌었다. 그것도 '항일 혐의'로 유배 중인 상태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1919년 4월 7일 강화군 석모도의 첫 3·1 운동은 이안득(李安得)이라는 19세 청년의 주도로 이뤄졌다. 이안득에 대한 1919년 재판 기록에 따르면 그는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적발돼 거주제한 처분을 받고 그 7개월 전 석모도로 유배됐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가 제공하는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를 보면, 이안득은 1900년 12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태어났다. 1918년 6월 러시아 반혁명군(軍)에 참여해 반일 운동을 벌이다 지휘부에 붙잡혀 일제에 넘겨졌으며, 1918년 9월 강화도 석모도로 유배됐다. 그는 고향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섬에 유배를 와 감시대상인 신분으로 마을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당산에 올라 횃불을 피우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하지만 독립운동과 관련한 그의 기록은 불명확하다. 2016년 발간한 '신편 강화사'에서는 그에 대해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거주제한 처분을 받았다'고 출신지가 다르게 기록돼 있다. 같은 해 인천시가 펴낸 '인천시사'에는 '이안득의 주도로 삼산면 석모리에서 십수명이 산정에 올라 봉화를 피우고 독립만세운동을 불렀다'고 적혀 있을 뿐이다.국사편찬위원회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아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올려놓은 자료에는 그의 이름이 '이안덕(李安德)'이라고 명시돼 있다.100년이나 흘렀지만 그의 이름이나 행적 등에 대해 아직 명확히 밝혀진 부분이 없는 셈이다.만주와 러시아 지역 항일운동사 연구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1918년 8월 일본이 시베리아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러시아에서 반일운동을 진행하다 붙잡혀 유배를 온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학계에서 주목한 적이 없다"며 "관계기관 등에서 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3-20 김주엽

[인천의 얼굴·(3)]인천공항 안내원 한세진씨와 로봇 '에어스타'

일하는 내내 서서 있어 다리 붓고험한 말 들어도 자부심으로 견뎌오늘 인천의 얼굴은 둘입니다. 누구냐고요? 인천국제공항 안내 데스크에서 일하는 한세진(37)씨와 공항 길 안내 로봇 '에어스타'입니다. 인천에서만 볼 수 있는 얼굴들입니다. 한세진 씨는 밤낮을 바꿔가며 하루 8시간씩 일합니다. 매일 수천 명씩 찾아옵니다. 일하는 내내 서 있어야 합니다. 고객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리가 퉁퉁 붓고 피가 통하지 않아 괴롭지만 '내가 인천과 대한민국의 첫인상'이라는 생각에 꾹 참고 얼굴에 미소를 짓습니다. 그렇게 일한 지 벌써 14년쨉니다. 한세진 씨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민 에어스타는 2017년 태어났습니다. 아직 어립니다. 얼굴도 둥글고, 귀도 둥글고, 눈도 둥급니다. 얘한테는 길을 묻기보다는 사진찍기를 더 원합니다. 어느새 공항의 마스코트가 되어 버렸습니다.작년 인천공항 이용객이 6천만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하루 20만명이 넘는 세계 5위 규모랍니다. 외국인이건 우리나라 사람들이건, 화장실을 찾거나, 어디에서 무엇을 사야 하는지 궁금하면 일단 안내 데스크부터 찾고 봅니다. 이들 중에는 반말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세진 씨는 얼굴을 찌푸리지 못합니다. '인천과 대한민국의 얼굴'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공항에 가면 한세진 씨에게 사탕이라도 하나씩 쥐어주면 어떨까요. 늘 웃어줘서 고맙다고 하면서요. 에어스타를 만나면 그 둥그런 머리를 한번씩 쓰다듬어주자고요. 생각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납니다. 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평범하지만 인천을 지탱하는 든든한 얼굴이라고 생각하시는 이가 있다면 문을 두드려 주세요. 굳이 얼굴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인천을 상징하는 손이나 발, 어느 것이어도 됩니다. 모두가 '인천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032)861-3200 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3-18 정운

'공부하는 경제단체' 인천경영포럼… 창립 20돌맞는 '400번째 아침인사'

'공부하는 경제단체' 인천경영포럼이 오는 21일 400회 강연회를 연다. 인천경영포럼은 1999년 3월18일 첫 강연을 시작으로 매월 둘째·넷째 주 목요일 강연회를 열고 있다. 창립 20년 만에 400회 강연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인천지역 단체·기관이 주최하는 강연 행사 중 400회를 맞은 것은 인천경영포럼이 유일하다고 한다. 인천경영포럼이 20년 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주원인으로는 '순수 민간 경제단체'라는 점이 꼽힌다. 인천경영포럼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을 받지 않고 회원들의 회비로만 운영되면서 '공부하는 경제단체'라는 목표를 위해 활동했다. 처음 50여 명이 시작했던 인천경영포럼은 회원 수가 1천500여 명으로 늘었다.#1999년 첫 강연… 21일 '최장수' 대기록■ 주요 현안 '맞춤형 강연'인천경영포럼이 창립한 1999년은 'IMF' 여파로 기업인 등 전 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다. 인천경영포럼도 "IMF 경제위기에 대응하려면 공부하는 기업인 모임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창립됐다. 이에 맞춰 첫 강연자로는 송자 명지대학교 총장이 초대됐다. 송자 총장은 'IMF 극복을 위한 기업인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했다. 제2회와 제3회 강연에서도 이종훈 중앙대학교 총장과 어윤배 숭실대학교 총장이 각각 '정보화시대 경영인의 자세', 'IMF 하의 한국경제와 중소기업'에 대해 강연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강연이 마련됐다. 그해 6월과 7월에는 이한구 (주)대우경제연구소 대표이사, 김중웅 현대경제연구원 원장 등이 강연자로 나와 기업인들에게 도움을 줬다.이후에도 인천경영포럼은 국내외 주요 현안이 있을 때마다 그에 맞는 주제의 강연으로 기업인들이 사고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국내외 주요현안 맞춤형 명사 초청 '화제'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직전인 2000년 6월3일에는 문정인 연세대 통일연구원장(현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이 강연자로 나와 '정상회담의 의의와 남북관계 전망'을 주제로 이야기했다.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는 지난해 9월6일 '남북, 북미정상회담과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주제로 강연하기도 했다. 세계 금융위기 여파가 컸던 2009년 5월에는 김경수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장이 '글로벌 경제위기와 한국경제 대응과제'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2011년 11월 한미FTA 비준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이듬해 5월에는 한덕수 한국무역협회장이 '한미FTA와 한국경제'로 강연했다.■ '다양성' 20년의 원동력인천경영포럼 강연자는 다양하다. 창립 초기 경제와 연관된 인물이 주로 강연자로 초청됐으나, 이후 점차 회원이 늘어나면서 강연자의 영역도 확장됐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이 인천경영포럼 조찬강연회 강단에 섰다. 보수와 진보 등 정치적 지향점이나 분야를 뛰어넘어 인천 기업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인물이 초청됐다. 이러한 다양성이 있었기에 인천경영포럼이 20년 동안 이어질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정치인 중 대표적으로는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이 취임 전 인천경영포럼에서 강연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해양수산부 장관 재직 중에,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임 기간에 인천에서 강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6개월 전인 2016년 11월 인천경영포럼을 찾았다.정부 부총리와 각 부처 장관, 공공기관장 등은 잇따라 인천 경제인을 만나기 위해 이른 아침 인천을 찾았다.400회까지 이어지는 동안 언론, 학계, 문화계, 경제계, 체육계, 의료계 등 분야를 넘어 많은 인물이 다양한 주제로 인천 경제인들에게 조언했다. 100회 강연은 당시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 200회 강연은 이시형 한국자연의학연구원장, 300회에는 성김 주한 미국대사가 나왔다. 인요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이상벽 방송인, 엄홍길 산악대장,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등 친숙한 인물들도 인천경영포럼에서 강연했다.#시정운영 청사진 인천시장 '새해 단골손님'■ 최다 강연자는 '인천시장'인천경영포럼 창립 이듬해인 2010년부터 매년 1월은 인천시장이 강단에 섰다. 인천경영포럼 새해 첫 강연은 인천시장을 초청해 그해 시정 운영 방향을 듣는 자리가 됐다. 인천시장으로서 첫 강연에 나선 인물은 최기선 시장이며 2000년부터 2002년까지 강연했다. 최기선 시장은 송도국제도시 개발에 대한 밑그림을 그린 인물로, 인천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있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가장 많이 강단에 오른 인물은 안상수 시장으로, 총 8차례 강연했다. 안상수 시장은 재임 기간인 2003년부터 2010년까지 모두 8차례 1월 강연에 빠지지 않고 나오면서 인천경영포럼 최다 강연자로 기록됐다.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인천경영포럼을 찾은 인물은 유정복 시장이다.유정복 시장은 2015~2018년 시장 재임 기간 매년 1월에 강연자로 나왔으며, 취임 이후인 2014년 9월에도 강단에 섰다. 유정복 시장은 시장 취임 전인 2011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으로 인천경영포럼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송영길 시장은 4차례 인천경영포럼 강단에 섰으며, 박남춘 시장은 지난해 7월 첫 강연을 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전인 2016년 11월에 인천경영포럼에서 강연했다. 사진은 강연 뒤 안승목 인천경영포럼 회장으로부터 초청강연기념패를 받는 모습. /인천경영포럼 제공

2019-03-17 정운

[인터뷰]안승목 인천경영포럼 회장, "지역사회 발전·기업 교류 힘쓸것"

"강연 400회 달성과 창립 20년에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 더욱 기업인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인천경영포럼 안승목(71·사진) 회장은 1998년 인천경영포럼 창립준비위원회 때부터 공동대표로 활동했으며 지금까지 인천경영포럼 20년의 세월을 함께했다.안승목 회장은 "가슴이 벅차오르고 만감이 교차한다"며 "기업인들이 만든 순수 비영리단체인 인천경영포럼이 20년 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공부하는 경제단체'라는 창립 초기의 목적을 잃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그는 "인천경영포럼은 'IMF'라는 경제 위기를 맞아 인천지역 경제인들이 교류하고, 더 배우기 위해 만들어졌다"며 "인천경영포럼이 이어지면서 인천의 발전에도 도움이 된 것 같아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는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을 인천에 유치하는 데에도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유엔 산하 국제기구인 GCF 유치전에는 한국과 독일, 스위스 등 여러 나라가 뛰어들었다. 앞서 인천 송도국제도시는 서울을 제치고 한국의 GCF 사무국 유치 후보 도시가 됐다. 당시 인천경영포럼은 정부 중앙부처 장관 등이 인천에 강연을 왔을 때 송도 곳곳에 대해 설명하는 등 인천이 후보 도시로 선정되는 데 힘썼다고 한다. 이후 송도는 GCF 사무국 설립 장소로 확정됐고, 이와 관련해 안승목 회장은 인천경영포럼을 대표해 송영길 인천시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안승목 회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강연자로 제1회 강연 때 강단에 선 송자 명지대 총장을 꼽았다. 그는 "IMF가 가장 큰 화두였고, 이 문제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이 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혔던 송자 총장을 모셨다"고 회상했다. 안승목 회장은 인천경영포럼의 세대교체도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40~50대 젊은 경영인들의 가입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안승목 회장은 "공부하는 경제단체라는 초심을 잃지 않고, 회원들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이어 "인천 지역사회 일원으로서, 인천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

2019-03-17 정운

[인천경영포럼]정일영 인천공항공사 사장, 기내 안내 '서울 인천국제공항'… "서울 삭제 국토부에 요구"

인천국제공항공사가 항공사들이 사용하는 '서울 인천국제공항'이라는 표현을 '인천국제공항'으로 바꿔달라고 국토교통부에 요구하기로 했다. 인천공항은 인천에 있지만 '서울 인천국제공항'이라고 불리고 있다.정일영(사진) 인천공항공사 사장은 14일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제399회 조찬강연회'에 강연자로 나와 "인천공항 개항 초기 인천에 대한 인지도가 낮을 때 항공사들이 '서울'을 넣어서 사용했던 것 같다"며 "지금은 개항한 지 20년 가까이 됐고 '서울'이라는 단어를 빼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해외에서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다다를 때 기내에서는 '서울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합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이는 정부가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인천공항 소재지를 서울로 등록했기 때문이다. 인천시는 2011년부터 이를 수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인천이 서울의 부속 도시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강연 이후 질의응답 시간에 이기우 인천재능대학교 총장 등 강연 참석자들이 이 문제를 지적하자, 정일영 사장은 주저하지 않고 "국토부에 요구하겠다"고 답변했다. 정 사장이 명쾌하게 답변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이날 정 사장은 '인천국제공항의 도전과 혁신 이야기'를 주제로 강연했다. 인천공항 현황과 발전 과정을 소개하고, 인천공항공사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설명했다. 그는 "인천공항을 중심으로 한 '공항경제권'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제2여객터미널 확장 등을 골자로 하는 인천공항 4단계 사업이 마무리되면 인천공항은 연간 1억명 이상이 찾는 동남아 허브공항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인천공항을 중심으로 관광산업이 어우러진 공항경제권이 활성화되면 국가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그는 인천에 대한 다양한 사회공헌사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 사장은 "인천시와 인천에 병원을 건립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면서 "인천시와 지난해 상생협약을 체결했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인천시 발전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

2019-03-14 정운

[독립운동과 인천·(4)]인천의 3·1운동

인천시는 100년이나 지났건만 3·1운동과 관련한 정확한 데이터조차 마련해 놓지 못하고 있다. 인천지역 3·1운동 역사를 재정립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919년 당시 '인천'과 지금의 행정구역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인천시는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인천시, 군·구, 관계기관에서 28건의 3·1운동 기념행사가 올해 펼쳐진다.하지만 인천시는 인천에서 몇 건의 만세운동이 벌어졌고, 몇 명이나 참여했는지 제대로 된 통계조차 확보해 놓지 못했다. 인천시 관계자는 "올해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3·1운동과 관련한 역사 기록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고 했다.인천시가 1973년 발행한 '인천시사'에는 3·1운동 때 인천에서 만세운동이 8번 열렸고, 9천명이 집회에 참가했으며, 15명이 투옥됐다고 적혀 있다. 이 통계는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이 1920년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인용한 것이다. 1920년 당시 인천의 행정구역은 '인천광역시'가 아닌 '인천부'였다. 이후 인천시가 발간한 '인천시사'에서는 인천지역 만세운동 건수가 다뤄지지 않았다. 인천시가 가장 최근 펴낸 2013년 '인천시사'는 인천창영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인천에서 벌어진 주요 만세운동만 소개하고 있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919년 당시 인천부는 지금의 중구, 동구, 미추홀구 일부 지역이었다. 미추홀구 문학동과 계양·부평·남동·영종·용유·옹진군은 부천군이었다. 강화군은 별도의 행정구역이었다. 지금의 10개 군·구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하면 인천지역 3·1운동은 8차례보다 훨씬 많은데도 여전히 인천부를 기준으로 한 통계가 통용되고 있다.인천개항장연구소 강덕우 소장은 "황어장터 만세운동, 용유도 관청리 만세운동 등 인천 북부지역과 강화, 옹진 등의 지역에서 이뤄진 3·1운동에 대해 개별적으로는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몇 건이 벌어졌는지는 정리되지 않았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존의 연구에서 한 발짝 더 들어갈 수 있는 통계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03-13 김주엽

[독립운동과 인천·(4)]인천의 3·1운동

인천에서 처음 3·1운동이 시작된 곳은 어디일까? 인천에서는 얼마나 많은 만세운동이 벌어졌을까? 3·1운동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인천에서의 3·1운동 관련 통계조차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다.이병헌이 1959년 쓴 '삼일운동비사(三一運動秘史)'에서는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교) 3~4학년 학생들이 선생이 없는 사이에 학교를 뛰쳐 나와서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생도들과 합류해 시내 중심에서 시위했다'고 밝히고 있다. 초등학교 학생들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연대해 만세행진을 벌였다는 얘기다.1919년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펼쳐진 3·1운동 소식을 접한 이 학교 3, 4학년 학생들이 만세 운동의 하나로 동맹 휴학을 결정한 것이다. 당시 동맹 휴학은 학생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항일 투쟁이었다.6일 인천공립보통학교 3·4학년과 공립상업학교 학생들 연대 시위 '시발점'기독교인 중심 만국공원 집회·상인들 가게 문 닫는 철시운동 급속도로 퍼져강화 1만명의 함성·계양 황어장터·석모도 4월 운동… 북부권·섬에서도 '활발'현재 관련통계 중구·동구·미추홀구 일부만 반영 '미흡' 市 전면 재조사 필요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918년 통계연보'에 따르면 4년제로 운영되는 당시 보통학교 1~4학년 학생의 평균 나이는 만 11~15세였다. 만 20세가 넘어 학교에 다니는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인천공립보통학교의 동맹 휴학을 주도했던 김명진·이만용·박철준·손창신 등도 당시 만 16~19세였다.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자 학교 교직원들은 이 사실을 경찰에 알렸다. 김명진과 이만용은 교직원들의 행동에 반발했고, 동맹 휴학 시작 이틀 뒤인 8일 오후 9시 학교 건물 2층에 몰래 들어가 미리 준비한 절단용 가위로 전화선을 끊어 경찰서와 연결된 통신을 차단했다.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 휴학은 열흘 가까이 계속됐다. 경찰이 학부형 회의를 소집해 25명을 처벌하겠다는 강경책을 발표했지만, 학생 405명 가운데 85명이 다음 날 결석할 정도로 항일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이를 시작으로 인천에서 3·1운동은 급속도로 번져 나갔다.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나서자 차츰 일반 시민들도 동조했다. 3월 9일 오후 5시 30분께에는 기독교인과 청년 학생 300여명이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오후 8시 30분께에는 50여명의 시민들이 경인가도(현 경인로) 부근에서 만세 운동을 진행하다 경찰과 충돌하기도 했다. 또 3월 31일에는 상인들이 가게의 문을 닫는 철시운동을 벌이기도 했다.인천시가 1973년 발행한 '인천시사'는 3·1운동 때 인천에서 만세운동이 8번 열렸고, 9천명이 집회에 참가했으며, 15명이 투옥됐다고 적었다. 이는 박은식이 1920년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따른 것이다.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1919년 당시 인천부는 지금의 중구·동구와 미추홀구 일부 지역으로 축소된 상태였다. 인천도호부청사가 있는 미추홀구 문학동 일대도 계양·부평지역과 함께 부천군이 됐고, 강화군도 있었다. 옹진군은 부천군에 속한 지역이었다. 지금 강화 옹진을 포함한 인천 전역을 놓고 보면 당시 인천부는 극히 작은 구역이다.계양과 부평 등 인천 북부지역뿐만 아니라 강화·옹진 등 섬지역, 문학동과 서창동 등 당시 인천이 아니었던 곳에서도 3·1운동은 활발히 벌어졌다. 강화보통학교(현 강화초등학교) 3학년과 4학년 학생 100여명은 3월 12일과 13일 이틀 동안 칠판에 태극기를 그리고, 운동장에서 만세 운동을 했다.당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던 황도문은 자신의 고향인 강화에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유봉진에 전달했고, 이를 지역 주민에게 배포하면서 강화 지역의 3·1운동은 들불처럼 번졌다. 3월 18일에는 강화군 부내면(현 강화읍 관청리) 읍내 장터에서 1만명이 참여한 만세 운동이 있었고, 27일에는 면사무소를 습격하기도 했다.강화 지역의 3·1운동 열기는 김포를 거쳐 계양과 부평 등 인천 북부지역에도 영향을 끼쳤다. 1919년 3월 27일 자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소요사건의 후보·경기도 부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당시 계양과 부평 지역의 상황을 설명했다."인천 시내는 물론이요 부근 일대는 관헌의 취체(일본어로 단속)가 엄중하기 때문에 비교적 평온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일전 강화도의 소요가 도화선이 돼 그 다음에 접근된 김포도 일어났고 다시 그 동네와 인천 경찰서 관내의 경계선 되는 부천군도 불온의 형세가 있음으로 인천경찰서에서는 만일을 경비키 위해 하뢰 순사부장 외 순사 2명을 부평주재소에 임시 응원으로 파견하였더라."매일신보에서 말한 불온의 형세는 계양구 장기동에서 있었던 황어장터 만세운동이다.황어장터는 당시 계양구 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조선총독부가 1924년 발간한 '조선의 시장'에서는 '경기도 부천군에는 2곳의 시장이 있는데 한 곳은 소사리에 있고, 나머지는 장기리에 있다. 이들 시장에는 1곳 당 평균 이용인구가 1천~2천명에 달한다'고 표현했다. 1천명이 넘는 주민이 이용하는 시장이기 때문에 만세 운동 장소로 적합했던 것이다.당시 재판기록에 따르면 계양면 오류리에 거주하던 천도교인 심혁성은 3월 24일 오후 2시께 황어장터에 모인 6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같은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심혁성을 구하기 위해 300여명의 주민이 심혁성이 있던 면사무소를 습격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휘두른 칼에 맞아 이은선이 숨지기도 했다. 황어장터 만세운동 사건으로 40여명이 체포됐고, 심혁성은 징역 8월을 선고 받았다.3월 27일에는 문학면 관교리(현 미추홀구 문학동·관교동 일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이상태 등의 재판기록을 보면 이들은 이날 밤 마을 주민 15명과 함께 마을 뒷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동네를 행진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경찰에 붙잡혔다. 이상태는 재판에서 "할 수 있다면 원래의 한국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만세를 불렀다"고 진술했다.인천 내륙뿐만 아니라 섬 지역에서도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3월 28일 용유면 관청리 광장에는 독립을 염원하는 150명의 만세 운동이 있었다. 당시 서울 배재학당에 다니던 조명원은 23일 독립선언서를 품고 용유도에 귀향했다. 조명원은 조종서, 문무현, 최봉학 등과 함께 '혈성단(血成團)'을 조직하고, 격문을 만들어 28일 관청리 관장에 모여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주민들에게 권유했다. 28일 시작된 시위는 용유도 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이틀 동안 이어졌다.덕적도에서는 4월 9일 학교운동회를 맞은 명덕학교 학생 50명과 학부형 30여명이 참여해 만세운동을 벌였다. 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 선생은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투옥 중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했다. 명덕학교 독립운동의 영향으로 인근에 있는 문갑도와 울도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강화도와 석모도에서도 만세운동은 거세게 일었다. 석모도는 특히 4월에도 펼쳐졌다.1956년 발간된 '경기도지'에 실린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통계를 보면, 부평에서 만세운동이 6번 있었고 950명이 집회에 참가했다. 투옥자도 98명으로 인천보다 많았다. 강화에서도 2번의 만세운동이 있었고, 400명이 참가했다고 나온다.현재 널리 알려진 인천의 만세운동 통계는 '중·동구와 미추홀구 일부'만 범위로 할 뿐이다. 부평·계양지역이나 강화, 옹진, 영종·용유 등지의 만세운동도 반영할 수 있는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인천연구원 김창수 부원장은 "행정구역 변화가 많았고, 과거보다 사료가 더 많아졌다"며 "인천시 등 지자체가 나서 전면적인 재조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인천 계양구 장기동에 있는 황어장터 만세운동 기념비. /인천 계양구 제공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인천 중구 용유동에 있는 3·1 만세 운동 기념비. 당시 용유도 주민 150여 명이 이곳에서 3·1운동을 벌였다. /인천 중구 제공계양구 장기동에서 열렸던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심혁성 지사. /인천보훈지청 제공

2019-03-13 김주엽

[인천의 얼굴·(2)]만석동 '굴막' 김군자 할머니

전쟁때 피란 나와 시작된 굴까기크고 작은 상처속 58년째 이어와마디 잘린 손이 훈장입니다. 일흔여덟 김군자 할머니는 58년째 인천 동구의 굴막을 지켜왔습니다. 굴막은 굴을 까는 임시 작업장입니다. 우리는 그저 아연이 풍부한 겨울 음식으로만 알고 굴 먹기에 바쁘지만, 할머니에게는 평생의 목숨줄이었습니다. 평안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온 가족이 피란을 나왔습니다. 충남 안면도에 자리를 잡았다가 인천으로 옮겼습니다. 뭐 특별한 기술이라고는 없는 할머니에게 선택지가 많지 않았습니다. 영종도며 팔미도 등지로 나가 갯벌을 뒤졌습니다. 여름에는 바지락, 겨울에는 굴을 캤습니다. 실향민 대다수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겨울철 차디찬 바닷바람을 막아야 했습니다. 북성포구, 만석부두 여기저기에 굴막이 생겨났습니다. 장갑을 낀다고는 하지만 손 마디는 굵어지고, 크고 작은 상처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바다에 나가 주꾸미를 잡기도 했습니다. 오른쪽 검지 한 마디를 그때 잃었습니다. 할머니는 그래도 굴 까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5남매를 키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구청에서 작업장을 따로 마련해 주었습니다. 힘이 닿는 데까지 굴 까기를 계속할 생각입니다. 굴막은 인천의 역사입니다. 글/김태양기자 ksun@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평범하지만 인천을 지탱하는 든든한 얼굴이라고 생각하시는 이가 있다면 문을 두드려 주세요. 굳이 얼굴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인천을 상징하는 손이나 발, 어느 것이어도 됩니다. 모두가 '인천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032)861-3200 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3-10 김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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