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인천경영포럼]송민순 전 외교장관 "남북 평화 신기루 될수도… 냉철한 대응 필요"

北경제 좋아지면 핵도 포기할 것 트럼프는 잘 안되면 판 엎을 사람 정권과 무관한 일관된 정책 펴야 22일 인천경영포럼 연사로 나온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북한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등이 사막의 신기루가 아닌 현실화 되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송 전 장관은 "북측이 핵을 버릴 것인지 갖고 갈 것인지는 그들 내부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결과를 보고 판단할 것"이라며 "경제가 좋아지고 핵 없이도 살 수 있겠다라고 판단할 수 있는 어떠한 결과가 눈에 보이면 핵을 과감히 포기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좋고 나쁨을 떠나 현 실상을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고 전제한 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대선을 앞두고 북한 핵 문제가 잘 풀릴 것으로 판단되면 '불판'에 올리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과감히 판을 엎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 비핵화와 주한미군 문제는 따로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만큼 이 사안에 대해서도 우리 정부가 피하지만 말고 정면으로 부딪힐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했다. 송 전 장관은 "북한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주한미군 철수와 깊은 연관이 있다. 북측이 핵을 포기하면 남한 내 미군, 즉 언제라도 미국의 핵무기로 자국 군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핵우산도 없애야 한다는 게 그들(북측)의 논리"라며 "우리 정부가 이런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우리는 어떤 방향이든 일관된 대북 정책을 펴는 게 중요하다"면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 정책에 큰 변화가 생기고, 주변국 또한 이런 우리나라 기류를 포착해 정권 말기쯤 가면 대북 정책에 대한 힘이 빠져 더 이상 추진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그는 "독일이 소련 붕괴 이후 통일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바로 정치적 연정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여야 연정을 통해 정권이 바뀌더라도 통일 정책의 기조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송민순 전 장관은 "사막의 오아시스는 언제든 신기루로 바뀔 수 있다"며 "현 상황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대응으로 한반도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22일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열린 인천경영포럼 조찬강연회에 나와 북한 핵과 한반도의 미래 란 주제로 강연을 펼치고 있다. /인천경영포럼 제공

2018-11-22 김명호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8)]인천공회당

인천 송도국제도시 센트럴파크 인근의 인천도시역사관이 1년 전 내부 리모델링 후 현재의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인천도시역사관은 2009년 인천세계도시축전 당시 '인천도시계획관'으로 개관했으며, 얼마 후 관명을 변경해 '컴팩스마트시티'로 운영되다가 2014년 인천시립박물관에 인수됐다. 2017년 12월 인천의 도시 역사와 발전과정을 담는 공간으로 거듭난다는 의미에서 현재의 이름을 달고 시민을 맞이하고 있다. 인천시티투어 버스의 출발지에 면해 있는 인천도시역사관은 전체적인 전시 구성을 크게 1층 근대 도시관, 2층 현대 도시관, 3층 도시 생활관으로 설정했다.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1945년 광복까지 인천의 도시 성격과 공간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볼 수 있는 1층 전시관 한 쪽에선 20세기 초반의 인천 중심가를 만날 수 있다. 전시관에선 모형으로 제작된 당시 건물들 볼 수 있는데, 3개월 여에 걸쳐 붉은 벽돌 모형을 세심하게 구현했다는 '인천공회당(仁川公會堂)'이 단연 눈길을 끌었다. 모형 앞에 설치된 안내문에 '인천공회당'에 대한 설명이 이같이 되어 있다. 1914년 부제(府制) 실시와 함께 각국의 조계가 폐지됨에 따라 인천에 살고 있던 인천일본거류민단은 해체수순을 밟게 되었다. 현재 중구청 인근에 있던 거류민단 사무소는 공회당으로 용도를 바꾸었고, 일본인들을 위한 문화시설, 집회장소로 이용되었다. 1923년 인천공회당은 홍예문 부근에 신축된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이전했다. 이 건물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남쪽 중앙의 현관에는 인천공회당이라는 간판을 걸었고 홍예문 길에 면한 건물 좌측으로 또 다른 문을 내어 인천상공회의소의 입구로 사용하였다. 그 후 인천공회당에서 개항 50주년 기념 축하회, 인천주류품평회, 인천시민대회 등이 개최되었다. 광복 후 한국전쟁으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고, 1957년 그 자리에 시민관이 들어섰다. 건물 개보수 후 지금은 인성여고에서 다목적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23년, 홍예문 부근 2층 붉은벽돌 건물 신축 6·25때 일부 소실, 現 인성여고 다목적관 사용 영화상영·무도회 등 요즘 '문화예술회관' 역할 현재 홍예문에서 인천항 쪽으로 100m 정도 내려오면 왼편에 인성여고 다목적관을 볼 수 있는데 그 자리(인천 중구 송학동3가)가 인천공회당이 있던 곳이었다. 1899년 경인선 철도가 개통하면서 제물포역(현 인천역)과 축현역(현 동인천역)이 개설됐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인천에서 조계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본격적으로 영역을 넓혀 간다. 그 창구가 1908년 건립된 아치형 터널인 홍예문이었다. 홍예문은 조계지에서 축현역과 만석동으로 오가는 가장 짧은 통로가 됐다. 홍예문의 처음 이름은 혈문(穴門)이었다. 때문에 그 길을 '혈문통'이라고 불렀다. 유동 인구가 많았던 혈문통에 인천공회당과 상공회의소 신축 건물이 자리했음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당시 건물 남측에는 인천경찰서가 있었다. 인천공회당 신축 전 개항장 조계지 의회격인 신동공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붉은 벽돌로 이뤄진 2층 규모의 인천공회당이 신축 이전한 것이다. 인천공회당에선 영화상영과 연주회, 무도회를 비롯해 어린이날 행사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문화 이벤트들이 열렸다. 요즘으로 따지면 문화예술회관 혹은 시민회관의 역할을 한 셈이다. 1926년 6월 18일자 동아일보에선 인천 영화학교가 인천공회당에서 운동장 확장비용을 보충하기 위해 교육 강연과 음악회를 열기로 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같은 신문 1927년 4월 7일자와 1933년 11월 21일자에는 각각 인천고려체육회 주최 음악무도회 개최와 현제명 독주 및 4중창단 연주 소식을 게재했다. 또한, 각종 근대음악사 자료에는 홍난파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운 박종성이 인천공회당과 내리교회 등에서 여러 차례 연주회를 개최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만주에서 성악을 전공한 원종철이 1940년 인천공회당에서 독창회를 갖고 1년 후에는 독주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인천공회당이 보다 각별한 장소로 기억되는 이유는 해방 후인 1947년에 열린 인천관현악단 창단 연주회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케스트라인 고려교향악단(서울시립교향악단의 모체)의 1945년 창립 이전 우리나라에는 소규모 관현악과 관악 협주 활동이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인천관현악단은 고려교향악단과 불과 2년 터울을 두고 창단한 것이다. 서양음악의 관문 역할을 한 인천의 선진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해방후 1947년 인천관현악단 창단연주회 열어 1974년까지 시민관… '아트센터 인천' 이어져 인천관현악단은 김기룡 단장과 박수득 악장을 중심으로 현악과 관악, 타악 주자 23명으로 구성된 인천 최초의 오케스트라였다. 한국전쟁 발발로 오랜 기간 활동이 이어지진 못했지만, 1966년 창단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태로서의 의미를 띤다. 한국전쟁은 인천공회당도 역사 속의 장소로 바꿔놨다. 휴전 이후 1957년 그 자리에 1천여석 규모의 '인천시민관'이 들어선 것이다. 시민관에선 콘서트를 비롯해 연극, 쇼, 영화 상영, 웅변대회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렸다. 시민관이 개관한 지 10여년이 지나면서, 시설 노후화가 진행됐다. 때문에 1974년 주안에 문을 여는 '인천시민회관'에 본연의 임무를 넘기고 학교 시설로 바뀌게 된다. 시민회관은 문화예술회관과 올해 개관한 아트센터 인천으로 이어진다. 인천도시역사관에서 만난 배성수 관장은 "관련 사료의 부재로 인해 인천공회당의 내부 공간이 어떻게 나뉘었는지 알 수 없어서 아쉽다"면서 "자료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2층 창문이 1층 창문에 비해 현격히 큰 걸로 봤을 때, 1층이 사무 공간이고 2층이 강당 형태의 공간이 아니었을까 유추해 볼 따름"이라고 말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인천공회당 모습(1923년). /인천 화도진도서관 제공인천공회당에서 열린 공연을 다룬 옛 동아일보 기사. / 인천 합창의 궤적 전 도록 발췌인천도시역사관에 전시된 인천공회당 모형.인천공회당에서 열린 공연을 다룬 옛 동아일보 기사. / 인천 합창의 궤적 전 도록 발췌

2018-11-22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4]인천항운노조

개항기 인천항으로 몰려든 부두 노동자들별다른 장비는 커녕 일자리 불안정 시달려항운노조 시초 '모군청' 조합해 취업 주선인천항운노동조합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동조합'에 그치지 않는다. 130여 년 인천항의 역사를 함께한 주역이자, 지금의 인천항을 있게 한 역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변한 장비 하나 없던 시절 부두 노동자들은 맨몸으로 항을 드나드는 짐을 날랐다. 일제강점기엔 항일 운동에 참여했고, 산업화 시대에는 인천지역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2000년 이후에는 기계화, 상용화(항만 인력 공급 체제 개편), 내항 통합 등의 고비를 극복하며 인천항 격동의 시기마다 온몸으로 맞섰다.우리나라에 부두 노동자가 처음 나타난 건 '개항기'다. 농촌에서 땅 한 평 없어 빌어먹기도 어려웠던 사람들이 '인천 드림'을 위해 제물포로 몰려들면서다. 이들은 처음에 어민, 소농민 등 일시적인 노동에 종사했다. 항만 물동량이 많아지면서 상시적 노동이 필요하게 되자 이들은 부두 노동자가 됐다. 처음에는 화주가 직접 고용하는 방식이었다. 부두 노동자 특성상 일정하지 않은 작업 시간과 작업량으로 안정적인 노동 공급이 어려워지자 한국인 하역원은 중구 내동에 '모군청(募軍廳)'이라는 하역조합을 꾸려 노동자의 취업을 주선했다. 이 하역조합이 항운노조의 시초다. 조합은 개항 이후부터 2007년까지 정부의 관리하에 독점적 노무공급체제를 인정받으며 성장했다.인천 부두 노동자의 노동쟁의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부터 본격화했다. 일제의 침탈이 심해지면서 부두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일본의 군수 물자와 수탈 물자를 하역했다. 강경애(1907~1943) 소설 '인간문제'를 보면 당시 인천항 부두 노동자들의 육체노동은 '고통'에 가까웠다."짐이 와르르하고 부두에 쏟아졌다. 짐에서 떨어지는 먼지며 바람결에 불어오는 먼지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몸부림치는 바람에 가라앉지를 못하고 공중에 뿌옇게 떠돌았다. 사람을 달달 볶아 죽이고야 말려는 듯한 지독한 볕은 신철의 피부를 벗기는 듯했다."일제 수탈시기 파업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산업화 접어들면서 고용대책 등 관철시켜내항 TOC 통합·경쟁 심화로 줄어든 입지정부·정치권 접촉하며 시설투자 활로모색시대흐름 맞춰 성장 "인천항의 주인" 자부부두 노동자들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1926년부터 1936년까지 수차례에 거쳐 파업을 벌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쟁의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들은 민족적 차별에 대항하고 일제의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부두 노동자들은 광복 이후 미 군정, 한국전쟁, 4·19혁명 등의 역사적 혼란기에서도 하역 작업을 계속하며 노동조합을 정비해 나갔다. 1945년 10월 부두노동자들이 '인천자유노동조합'을 창설했을 당시 조합에 가입한 노동자는 6천여 명에 달했다. 운송 사업을 중심으로 한 '인천부두노동조합'이 따로 설립되기도 했다. 이들 노조는 분열과 통합을 되풀이하며 세를 키워 나가다가 항만과 운수 분야 노동자들을 통합한 인천항운노조를 1981년 8월 설립했다. 1998년 경인항운노조로 명칭을 바꿨다가 2004년 인천항운노조로 다시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항운노조는 '기계'와의 투쟁을 시작했다. 1966년 인천항에 지게차와 크레인이 대량 도입되면서 중량화물 하역 작업이 기계화됐다. 1968년에는 마그넷(자석) 사용으로 고철, 철제류 작업도 기계화됐다. 항만 하역의 기계화는 노동조합의 존속을 위협했다.1978년 부두 노동자로 처음 조합에 들어온 이해우(69) 인천항운노조 위원장은 "당시 맨몸으로 일할 때는 어떤 물건이든 어깨에 지고 메는 게 전부였다. 석탄도 실제로 삽으로 떠서 포대에 담았다. 만석부두에 가면 속옷만 입고 막걸리와 원당(설탕)을 먹으며 일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는데 모두 부두 노동자들이었다"고 했다. 이어 "모든 게 기계화가 되면서 몸은 편해졌지만, 이후에는 실직의 두려움에 직면해야 했다"고 했다. 노조는 '근로자에 대한 대책 없는 기계화'를 반대하고 나섰다.대표적인 사건은 1974년 사료 도매업체 대한싸이로주식회사가 인천항에 양곡 전용부두와 진공 흡입식 하역기 2기를 완공한 것이었다. 1995년 인천항운노조가 발간한 '인천항변천사'를 보면, 당시 인천항의 양곡 하역량은 20~30%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합원들의 대량 실직은 불 보듯 뻔했다. 인천지부는 '대한싸이로에서 필요한 노무직은 조합원으로 둘 것', '작업 단계에서 감축한 분야는 보상할 것' 등의 대책을 강력하게 요구해 모두 관철했다.오광민 인천항운노조 쟁의부장은 "기계화로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기계로 인해 손상되는 노동의 대가를 노조의 강력한 요구로 보상받아 실제로 잘리거나 임금이 감소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며 "그럼에도 컨테이너 도입 등 기계화의 큰 흐름을 이길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노조는 1988년 인항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앞장섰다. 당시 노조 간부들이 "부두 노동자의 못 배운 한(恨)을 풀어보자"며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전국 항운노조 중 학교를 설립한 곳은 인천이 처음이다.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노조위원장이 인항학원 재단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다. 조합원 자녀들에 대한 복리 후생도 아끼지 않았다. 일찍이 고등학생과 대학생 자녀의 학비를 지원했다. 1978년부터 최근까지 1만여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2007년에는 '항운노조 상용화 개편'이라는 큰 고비를 맞는다. 상용화 개편이란 기존 조합 소속 일용직 인력을 하역 회사별로 상시 고용하도록 항만 인력 공급 체제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노조 채용 비리 재발 방지, 항만 환경 개선 등을 위해 정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상용화 개편을 추진해왔다. 지난 100여 년간 부두 노동자를 공급해왔던 항운노조의 독점 고용권이 모두 깨지는 순간이었다.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하역 노동자 1천700여 명 중 48%가 희망퇴직을 신청해 노조가 철회 기간을 두기도 했다. 정부가 희망퇴직 시 생계지원금을 최대 1억7천만원까지 줬기 때문이다. 2천800여 명에 달했던 전체 조합원 수는 1천 명 초반대로 추락했다. 노조는 "인천항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한발 양보해 합의를 이뤘다.최근 인천항을 두고 노조에서는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내항 TOC(부두운영사) 통합으로 부두 노동자 수가 대폭 줄어들게 될 처지인 데다, 물동량 유지·확대를 위해 평택항 및 부산항과도 경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이에 항운노조는 '항만 배후단지 조성을 위한 정부 지원', '부두 임대료 인하 촉구' 등 인천항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정부와 기업 관계자, 국회의원 등을 만나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이해우 위원장은 "인천항이 수도권이기 때문에 다른 항보다 비용이 비쌀 수밖에 없다. 인천항만공사는 시설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항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그는 "인천항운노조는 인천항의 주인"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이어 "격동의 인천항 역사와 궤를 함께하며 인천항운노조는 다른 지역 노조보다 더 빨리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변화하며 성장했다"면서 "앞으로도 조합원들이 주인 의식을 갖고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노조의 목표"라고 했다.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항운노조는 지역 내 조합원들의 후생복지시설 마련을 위해 정부에 복지회관 건립을 건의, 2006년 '근로자의집'을 개관했다. 신협, 체력단련실, 인천항운노조 사무실, 휴게실 등의 시설을 갖췄다.1903년 제물포항 건어물 하역장에서 건어물을 나르고 있는 부두노동자들. /인천항운노조 제공1930년대 인천항에서 부두노동자들이 미곡 수출품을 나르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1933년 가마니를 수송하던 우마차. /인천항운노조 제공1960년대 인천항에 하역된 밀가루 포대를 소형차에 싣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1970년대 부두 내 적재한 화물을 나르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

2018-11-21 윤설아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7)]선교와 음악(下)

여성대상 선교 위해 제물포 찾은 마거릿벵겔126년전 국내 첫 서구식 학교 '영화학당' 세워탄압 당하던 우리 음악 대신 찬송가 등 교육이를 시작으로 애국가·계몽가요까지 가르쳐졸업생 김영의, 국내 최고 피아니스트로 성장개항 이후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면서 초기에는 이 두 곳이 음악 활동의 중심지였다. 인천 역시 교회와 학교가 음악 활동의 중심지였는데, 다른 도시와 차이점이 있다면 외국 군함의 입항과 함께 항구에서 울려 퍼지는 군악대의 연주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우선 '교회'는 서양음악의 보급 및 활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선교사'는 서양음악 전달자 및 음악교사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찬송가의 반주 악기인 '풍금'은 서양의 평균율이라는 음감각과 화음감이라는 음감을 심어주었고, 교회에서 찬송가를 익힌 신자들은 후에 서양음악 애호가와 청중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인천근현대문화예술사연구>(인천문화재단 刊)에 수록된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서양음악의 수용과 인천' 중에서1892년 당시 24세였던 미북감리교회 여선교사 마거릿 벵겔(Magaret J. Bengel)은 제물포(인천) 여성 선교를 위해 담당 선교사로 파견됐다. 제1대 전도부인(한국 개신교 초기의 유급 여성 사역자)으로 황해도 곡산 출신의 미망인 백헬렌도 파견돼 벵겔과 함께 본격적인 여성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두 차례 서양의 침략을 겪은 인천 사람들은 미국에서 온 전도사들이 전파하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백헬렌은 가정에서 필요한 물건을 싸게 팔면서 여인들의 인심을 얻는 방식으로 전도를 시작했다.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여성 대부분은 글자를 몰랐다. 이에 벵겔은 전도부인 강세실리아에게 한글과 찬미가를 가르치도록 했다. 벵겔은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온 아이들이 어깨너머로 배운 한글을 엄마보다 더 빨리 깨우치고, 찬미가도 잘 부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로 인해, 아이들만을 위한 교육 선교를 구상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인 인천 영화학당이 126년 전 문을 열었다.영화학당의 개교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위한 근대식 교육기관의 출발을 의미하며, 최초로 음악 교육을 실시한 곳이라는 의미도 지닌다.미션스쿨인 배재학당(1885년)과 이화학당, 경신학교(1886년) 설립에 이어 6년 후 인천 영화학당이 개교한 것이다.<영화 백년사(1892~1992)>(이성삼 박사 집필·영화학원 刊)에 따르면, 1890년 한국에 온 벵겔은 이화학당의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여사의 총애를 받아 1891년부터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성악과 오르간을 가르쳤는데, 주로 성악을 가르쳤다고 한다.이처럼 음악적 소양이 풍부했던 벵겔이 1892년 영화학당 설립 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음악 교육을 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영화 백년사>에는 아펜젤러가 쓴 '대한그리스도인회보' 1900년 7월 18일자를 인용해 그해 6월 23일 개최된 영화학당 방학식 모습을 묘사한 구절이 있다. 이 글은 당시 방학식이 폐회 찬미를 부르면서 마무리 되었음을 알려준다."(전략) … 이와 같이 모든 학도들은 이 말을 기억하여 두 달 동안 쉬일 때에도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고 미귀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오직 지극히 보배로운 진주를 사랑하며 잘 지니고 있기를 구주님의 이름으로 바라노라 하시고 폐회 찬미를 부르고 방학식을 마쳤다."우리 교회사와 근대 음악사 관련 자료에도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는 '창가'라는 이름으로 찬송가 교육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풍금 반주로 찬송가를 가르쳤는데, 이를 시작으로 점차 나라를 사랑하자는 내용의 '애국가'를 비롯해 자주독립의 정신과 자유민권 사상을 고취시키는 '계몽가요', 학업에 열중하고 실력을 배양해 나라를 구하자는 내용의 '교육창가' 등을 가르쳤다.1910년 8월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우리 생활 속 자유를 완전히 박탈했다.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앗아간 것이다.1917년 3대 헤스(M. I. Hess) 교장은 부설 영화유치원을 설립했다. 1914년 이화유치원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유치원이었다.<영화 백년사>에 실린 유치원 보육과목과정을 보면 1년 차 어린이들은 16시수로, 2년 차는 18시수(이상 1주일 단위)로 짜여졌다. 이 중 창가는 1·2년 차 각각 3시수로, 여타 과목에 비해 가장 많은 시수를 배정 받았다.당시 영화유치원에서 창가 과목을 통해 어떤 교육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의 식민지 통치자들은 의도적으로 우리 음악을 탄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찬송가와 함께 일제가 허용한 서구 음악을 교육했을 것으로 추측된다.영화유치원과 영화학당이 서울 지역 선교사들이 지은 학교들과 활발하게 교류한 부분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앞서 언급했듯이 벵겔은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치다가 인천에 와서 영화학당을 설립했다. 이후에도 서울의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경신학교 등과 활발한 소통을 했고, 영화학당 출신들이 이곳으로 많이 진학했다.인천 출신으로, 우리나라 첫 미국 줄리어드 음대에서 유학한 피아니스트 김영의(1908~1986)는 영화학당 출신이다. 김영의는 영화학당 졸업 후 서울 이화학당,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했다.어린시절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접한 음악과 스포츠 등이 20세기 중반 우리나라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을 것이다.화창한 오후에 인천 동구 창영동의 영화초등학교를 찾았다. 언제나처럼 1910년 3월에 준공한 영화초교 본관동(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9호)에 눈길이 갔다.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는 이 건물은 학생들의 예배와 체육 활동을 위한 강당으로 사용됐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930년대 말 건물 출입구 돌출 부분을 증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건물 내부 구조는 'ㅁ자' 형 평면 형태로 설계됐다. 요즘 대부분 학교가 획일적인 일자형 구조로 지어진 점을 감안하면 신선한 시도였다.하상교 영화초교 교장은 "우리나라 교회와 교육 등 중요한 의미를 갖는 옛 본관 건물을 박물관 형태로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며 "순례객들도 많이 찾는 만큼, 인천시와 협의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영화학당 설립 당시 교직원들(왼쪽부터 강세실리아, 마거릿 벵겔, 백헬렌). /인천영화초등학교 제공·경인일보DB1911년에 세워진 영화초등학교 본관의 옛 모습. /인천영화초등학교 제공·경인일보DB1930년대 말 건물 출입구 돌출 부분을 증축한 본관 건물 . /인천영화초등학교 제공·경인일보DB

2018-11-15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3]인천 강화도 새우젓

국내 젓새우 70~80% 잡히는 강화도… 배에서 바로 염장해 뛰어난 품질 '전국 입소문'매년 김장철마다 북새통 이루는 외포항 수산시장, 저렴하고 맛 좋은 '추젓' 인기 높아 현대식 냉동 창고 갖춘 경인북부수협 경매장, 지역 모든 제품 거쳐가는 '유통 중심지'김장에 빠질 수 없는 젓갈의 원재료가 되는 젓새우는 인천의 바다가 선물하는 중요한 수산자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특히 인천 강화도 인근 바다는 젓새우 황금어장으로 불린다. 강화에서 생산하는 새우젓 또한 많은 사람으로부터 명품 대접을 받는다.때문에 해마다 가을이 되면 강화의 포구는 새우잡이 어선으로 들썩이고 전국 각지에서 새우젓을 사러 온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룬다.지난 6일 찾아간 강화군 외포리에 있는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은 김장철을 맞아 새우젓 등 젓갈을 사러 온 손님과 관광객으로 북적였다.현재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에는 18개 젓갈 판매 매장이 성업 중이다. 새우젓을 주력으로 밴댕이, 멸치 등 어림잡아 20여 종류가 넘는 젓갈을 판매하고 있다.이날 시장에서 만난 조경숙(50)씨는 서울 강남 수서에서 이곳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조씨는 추젓 12㎏을 샀다. 김장 100포기를 하려면 10㎏ 정도 필요하다고 한다. 그는 "강화 새우젓이 명품이라기에 올해는 강화 새우젓으로 김장을 담아보려고 멀리까지 찾아왔다"며 "김장 맛이 좋으면 앞으로 계속 강화 새우젓을 쓸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10여 년 동안 충남 논산 강경에서 젓갈을 구매해 김장을 했다고 한다.새우젓은 가을에 담근 것을 '추젓'이라고 부른다. 5월에 잡은 새우로 담근 젓을 '오젓', 6월에 담근 젓을 '육젓'이라고 하고, 겨울에 담근 젓을 '동백하젓'이라 부른다.김장철에는 가격이 저렴하고 맛도 좋은 추젓이 인기다. 오젓과 육젓은 추젓보다 가격이 비싸다. 이날 추젓이 1㎏에 2만원, 오젓은 2만5천원, 육젓은 4만원 선에서 판매됐다.잡히는 시기에 따라 새우 크기도 다른데, 추젓은 길이가 1~2㎝, 오젓은 2~3㎝, 육젓은 3㎝ 이상 된다.짠맛의 세기를 결정하는 염도 또한 시기별로 다르다. 가장 더울 때 잡히는 육젓은 부패 방지를 위해 소금이 많이 들어가야 해 짠맛이 강하다. 오젓이 중간 맛, 추젓이 가장 덜 짜다.이곳 상인들은 강화 새우젓이 다른 어떤 지역의 새우젓보다도 품질이 우수하다고 자랑했다.중국산 등을 속여 팔다가 적발돼 홍역을 치르기도 한 다른 지역과 달리, 오직 국산만을 고집하며 믿을 수 있는 새우젓이란 이미지를 지켜 가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란다.정찬요(54) 강화새우젓축제사무국장은 "우리나라 젓새우의 70~80%가 강화에서 잡히는데, 산지에서 잡아 배에서 바로 염장하는 강화 새우젓은 전국 어디보다 경쟁력이 있다"며 "국내에 유통되는 새우젓의 70~80%는 외국산으로 보면 되는데, 강화에서 사는 새우젓은 원산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젓갈 상점 곳곳에는 새우젓이 가득 담긴 드럼통이 보였다. 매장 한 곳에 진열된 물건만 수천만 원어치가 된다고 한다. 새우젓 국물이 닿지 않아 노랗게 색이 변한 부분을 '윗밥'이라고 부른다. 이 윗밥을 걷어내고 판매하는데 먹어도 상관은 없다. 따로 가져가는 곳이 있다고 한다.강화 새우젓이 명품 소리를 듣게 된 것은 강화의 자연환경과 큰 연관성이 있다. 강화도는 한강이 임진강, 예성강과 만나는 곳이다. 조석 간만의 차가 심하고 물살의 변동이 심해 갯벌도 발달해 있다.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합류 지역이라 어종도 풍부해 큰 새우 어장이 형성될 수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석모도에 염전이 있던 시절에는 품질 좋은 소금이 생산되면서 뛰어난 새우젓이 생산됐다고 전해진다.젓새우는 조업 방법이 크게 두 가지다.'닻배'라고 부르는 배를 이용하는 연안자망 어업 방식과 '꽁지배'를 이용한 안강망 어업 방식이다.자망 어업은 새우가 그물코에 꽂히게 해 잡는 방식이다. 안강망 어업은 조석 간만의 차가 큰 지점에 자루그물을 투하해 닻으로 고정 부설한다. 그러면 새우가 조류에 의해서 자루그물 속으로 들어가 잡힌다.강화도 어민들은 젓새우에 집중하고 있지만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다른 어종도 많이 났다고 전해진다. 과거에는 조기, 밴댕이, 민어, 병어 등을 잡는 데 주력했다. 지금은 홍어, 까나리, 농어, 숭어 등이 대표적이라고 한다. 강화부지(1783년)에는 민어, 숭어, 석수어, 새우, 가리맛조개, 굴 등이 당시 강화의 수산물로 기록돼 있다.어민들이 생산한 새우젓은 창고로 옮겨 보관 숙성된다.수산시장에서 300여m 떨어진 곳에는 경인북부수협이 운영하는 새우젓 보관창고 겸 경매장이 있는데, 이곳이 새우젓 유통의 중심 역할을 한다. 강화도에서 생산되는 새우젓이 모두 이곳을 거친다고 한다. 인천시와 강화군 등이 50억 원의 예산을 지원해 2011년 완공한 수산물 처리·저장시설이다. 저온 냉장창고, 냉동창고, 급속 냉동창고 등을 갖추고 있다.옛날에는 새우젓을 토굴에 보관했는데, 지금은 현대식 냉장·냉동창고 등 체계적인 방법으로 보관하고 있다. 지금은 판매를 위해 물건이 빠져나가 창고가 비어 있지만, 10월 초가 되면 창고들이 모두 새우젓으로 가득 찬다.김용순(54) 경인북부수협 판매사업소장은 "옛날에는 토굴에 새우젓을 보관하다가 이곳에 보관시설을 설치하고 장소를 옮겼다"며 "최신식 시설에서 새우젓을 잘 숙성시켜 강화 새우젓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강화 새우젓은 인천의 명품 수산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특히 가을에 수확한 젓새우로 만든 '추젓'은 김장에 빠질 수 없는 재료로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지난 9일 경인북부수협이 운영하는 수산물 처리·저장 시설에 보관 중인 새우젓이 숙성 중이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에는 판매장 18곳이 운영 중이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김장철을 맞아 시장에서 젓갈을 고르는 손님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낡은 시설을 고쳐 지난 2009년 새롭게 조성된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 전경.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8-11-14 김성호

[zoom in 송도]송도국제도시 브리핑

■IFEZ 스마트시티운영센터 누적 방문객 1만7178명송도국제도시 G타워에 있는 인천경제자유구역 스마트시티운영센터에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센터가 문을 연 2014년 2월부터 올해 10월 말까지 1만7천178명이 방문했다고 밝혔다. 전체 방문객의 65%(1만1천204명)는 외국인이다.지난 7일에는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와 연계해 독일, 중국, 오스트리아, 스위스, 일본, 이탈리아, UAE 등 세계 7개국 18개 주요 해외 언론사 관계자가 센터를 찾았다. 인천경제청은 "올해 46개국 2천215명이 센터를 방문했다"며 "쿠웨이트 주택부 장관, 노르웨이 환경부 장관, 에콰도르 산업부 장관 등 주요 인사들의 센터 방문이 잇따르고 있다"고 했다.365일 24시간 체제로 운영되는 센터는 ▲CCTV 실시간 영상 감시 및 관계기관 공조 체제 구축 ▲비상벨 호출 등 상황 발생 접수 및 전파 ▲방범·방재·교통·환경 정보 제공 등의 기능을 한다.■아·태 방송개발기구,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 견학송도국제도시에 위치한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센터장·이충환)에 아·태 방송개발기구 관계자들이 방문했다.시청자미디어재단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는 최근 아·태 방송개발기구 10개국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국형 미디어교육 현장을 소개하고 센터의 미디어사업을 설명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주최하고 시청자미디어재단이 주관한 이번 행사는 아·태 지역 시청자의 권익 증진과 협력 방안 모색을 위해 마련됐다.말레이시아, 몰디브, 미얀마, 방글라데시, 브루나이, 인도, 캄보디아, 태국, 독일 등 10개국 방송·통신 관계자들은 해송중학교 '찾아가는 미디어나눔버스' 미디어교육 현장을 둘러본 뒤 센터에서 미디어사업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이후 드론교육과 1인 방송 체험에 참여하는 등 스마트 미디어교육 프로그램을 참관했다.■경제청 "송도자원순환센터 고형연료시설 정상 운영"송도자원순환센터 고형연료 사용시설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밝혔다.송도자원순환센터는 연수구 지역에서 발생한 생활폐기물을 고형연료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올해 3~9월 고형연료 사용 시설의 일평균 대기오염 물질 배출 농도는 배출 허용 기준 대비 먼지 4.9%, 질소산화물 6%, 일산화탄소 24.3%, 염화수소 32.5%다. 이 기간 시간당 평균 배출량은 먼지 0.02㎏, 질소산화물 0.2㎏, 일산화탄소 0.38㎏, 염화수소 0.2㎏ 수준이다. 염화수소의 경우, 굴뚝자동측정기 교정 과정 등에서 간헐적으로 배출 허용 기준을 초과했으나, 송도 주민에게 건강상 피해를 줄 정도의 농도와 양은 아니라고 인천경제청은 설명했다.인천경제청은 송도자원순환센터 시설·설비 운영 상황을 확인하는 시민검증단을 구성해 운영할 예정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 제공

2018-11-11 목동훈

[zoom in 송도]美 팝아트 거장 '로버트 인디애나의 HOPE'

오라카이 송도파크호텔 개관5주년 기념희망찬 이미지 마지막 유작 설치 '눈길'오라카이 송도파크 호텔 앞에 미국 팝아트 거장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품 'HOPE'가 설치됐다.오라카이 송도파크 호텔이 2019년 1월 개관 5주년을 앞두고 정문 앞에 조형물을 새롭게 설치했다. 이 조형물은 미국 팝아트 거장 로버트 인디애나(Robert Indiana, 1928~2018)의 작품 'HOPE'다.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LOVE' 'HOPE' 'EAT' 'DIE' 등이 있다.'HOPE'는 올해 5월 타계한 로버트 인디애나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 주요 도시 랜드마크로서 많은 이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는 서울 명동 대신금융그룹 신사옥 앞에 'LOVE'가 설치돼 있으며, 인증샷 스팟으로 유명하다.호텔 관계자는 "내년 1월 개관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HOPE'를 설치했다"며 "오라카이 송도파크 호텔의 희망찬 이미지 형성과 더불어 큰 포부를 가지고 성장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또 "호텔을 방문하는 고객분들이 정문 앞에 있는 작품을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된다"며 "환영 인사와 함께 작품으로 하여금 희망을 발견하고 품길 바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오라카이 송도파크호텔은 'Orakai Hotels & Resorts' 1호 브랜드로, 인천 송도 중심부에 있다. 275개 객실과 2개 연회장, 'Level 19 뷔페 레스토랑', 'Thirsty Monk 탭하우스', 'illy CAFF', 실내외 수영장, 남녀 사우나, 피트니스 센터를 갖추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오라카이 송도파크 호텔 정문 앞에 설치된 미국 팝아트 거장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품 'HOPE'. /오라카이 송도파크 호텔 제공

2018-11-11 목동훈

[zoom in 송도]韓·우즈베크 교류 플랫폼 '송도시대' 열다

주한 무역대표부 포스코타워에 개소관련외국기관 최초 인천에 둥지 틀어수출입·투자 상담부터 특산품 전시장경제청 "통상 핵심役 기대 적극 지원"우즈베키스탄 주한 무역대표부가 인천 송도국제도시에서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우즈베크 주한 무역대표부는 지난 9일 송도 포스코타워(동북아무역센터) 29층에서 개소식을 하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무역대표부는 대한민국과 우즈베크 양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설립한 우즈베크 정부 공식 기관이다. 약 1년간 준비 기간을 거쳐 올해 8월 업무를 시작했으며, 우즈베크에서 파견한 공무원 3명과 주한대사관 상무 관련 외교관 2명 등이 근무하고 있다. 주로 서울에 위치하는 외국 무역대표부가 인천에 둥지를 튼 건 처음이다. 무역대표부 초대 대표는 김창건(에버그린모터스 대표이사) 주한 우즈베크 명예영사다.김창건 대표는 개소식에서 "우즈베크 무역대표부가 한국에 처음 설립돼 양국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됐다"며 "초대 대표를 수행하게 돼 영광"이라고 했다. 이어 "무역대표부가 양국 교류·발전의 플랫폼이 될 수 있도록 개방하겠다. 적극적으로 활용해달라"며 "양국 우호 증진과 경제 발전에 초석을 놓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무역대표부는 수출입과 투자 관련 협의를 진행할 수 있는 회의실등을 갖추고 있으며, 우즈베크에서 만든 제품들을 전시하고 있다.개소식에는 김창건 대표를 비롯해 우즈베크 비탈리 펜(Vitaly Fen) 주한 대사와 묵슨크자(Mukhsinkhuja) 페르가나주(Ferghana Regeion) 부지사, 김진용 인천경제자유구역청장, 신명진 한국수입협회 회장, 김승동 (사)유라시아21 이사장 등 우즈베크와 국내 기관·단체·기업 관계자들이 참석했다.비탈리 펜 대사는 축사를 통해 "(무역대표부는) 우즈베크의 특산품을 전시·수출하고, 관광과 직접 투자를 상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며 "양국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우즈베크는 금, 원유, 가스 등 자원이 많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돼 있다.김진용 청장은 "포스코타워에는 중국 웨이하이(威海)관이 있고, 포스코대우가 들어와 있다"며 "무역대표부가 한국과 우즈베크 간 무역과 통상에서 중추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또 "앞으로 인천경제청은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다.우즈베크 사브카트 미르지요예프(Shavkat Mirziyoyev) 대통령은 경제자유구역 개발 등 한국의 경제·교육·관광 모델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기존 3개 특별산업지구 명칭과 운영 제도를 경제자유구역으로 단일화했으며, 추가로 4곳을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서울이 아닌 인천 송도에 무역대표부를 개설한 것도 인천경제자유구역을 롤모델로 삼고 있기 때문으로 인천경제청은 보고 있다. 이와 관련, 인천경제청은 올해 4월 우즈베크 경제자유구역 개발 및 주한 무역대표부 활동 지원 등에 관한 상호협력 양해각서를 주한 우즈베크 대사관과 체결했다. 7월에는 우즈베크 페르가나주, 3월엔 부하라주(Bukhara Region)와 각각 협력 의향서를 체결했다. 이들 지역은 경제자유구역을 개발하는 등 우즈베크의 경제 성장을 이끌고 있는 도시다.인천경제청은 우즈베크 경제 관계 공무원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송도에서 운영되도록 협의하고, 우즈베크 무역대표부 개소를 계기로 다른 나라의 무역대표부도 유치할 계획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우즈베크 무역대표부가 입주한 송도 포스코타워 전경. /경인일보DB우즈베크 주한 무역대표부 송도 입주 개관식 모습.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옷,와인 등 우즈베크에서 만든 제품이 전시된 무역대표부 모습.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8-11-11 목동훈

[인천경영포럼]차상균 서울대 빅데이터연구원장 "인적자원 투자, 신성장동력 핵심… 데이터·AI 활용할 '사람' 길러야"

'고급일자리' 육성 정부 노력 강조해외인재 영입 美·中 사례 소개도4차 산업혁명에 앞서가기 위해선 빅데이터와 AI(인공지능)를 활용할 '사람'을 길러내기 위한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차상균 서울대 빅데이터연구원장은 8일 "4차 산업혁명의 바탕이 되는 빅데이터와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새로운 서비스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차 원장은 이날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열린 제393회 인천경영포럼 조찬강연회에서 "미국과 중국의 경우 모두 사람을 키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며 이같이 강조했다.미국의 경우, 대학을 중심으로 빅데이터와 AI를 활용한 에너지·의료 등 각 분야에 대한 서비스 개발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대형 펀드 에이전시의 적극적인 투자가 바탕이 된다. 중국은 정부가 직접 관련 서비스 개발 연구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특히 중국은 '천인계획(千人計劃)'을 중심으로, 해외 인재를 끌어들이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4차 산업혁명을 이끌어갈 사람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는 게 차 원장의 설명이다.그는 "중국 알리바바는 1초에 30만 개의 물건을 팔고, 미국 아마존은 제약과 금융분야까지 진출을 모색하는 등 새로운 비즈니스를 구축하고 있다"며 "빅데이터와 AI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이어 "(우리도) 빅데이터와 AI를 써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를 적극적으로 키워야 한다"며 "교육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했다. 차 원장은 "70년대와 80년대, 사람에 대한 투자를 많이 했다"며 "우리나라가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해 어려운 상황인 만큼, 사람에 대한 투자가 더욱 필요한 시기"라고 했다.그는 "4차 산업혁명은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를 누가 선점하는가의 경쟁이기도 하다"며 "사람에 대한 투자로 새로운 유형의 고급 일자리가 생길 수 있도록 정부와 지자체, 기업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중소기업에 대해선 "지금까지 물건을 팔아왔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엔 데이터를 활용해서 서비스를 팔아야 한다"며 "이를 위해선 관련 데이터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을 키우든, 기존 사람을 재교육하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차상균 서울대 빅데이터연구원장은 8일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열린 제393회 인천경영포럼 조찬강연회에서 빅데이터와 AI 전문 인력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천경영포럼 제공

2018-11-08 이현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