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zoom in 송도]컨벤션전시산업硏 지난해 분석

경제청 우수박람회 발굴·육성지원금 투자 대비 13.8배 달해인천경제자유구역청의 '송도컨벤시아 우수전시회 개최 지원사업'이 260억 원에 달하는 경제적 파급효과를 거뒀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인천경제청에 따르면 한국컨벤션전시산업연구원이 지난해 2~12월 인천경제청의 지원을 받은 5개 전시회의 참관객 지출액 등을 분석한 결과, 경제적 파급효과가 26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인천경제청은 우수 전시회 발굴·육성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리는 우수전시회를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국제코팅접착필름산업전 ▲인천프랜차이즈 창업박람회 ▲케이펫 페스티벌 송도 ▲인천카페쇼 ▲인천국제식품음식박람회 및 홈·리빙생활용품전시회 등 5개 전시회에 예산을 지원했다. 케이펫 페스티벌 송도 행사에는 120개사가 286개의 부스를 차렸으며, 인천카페쇼는 3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 이들 5개 전시회의 직접지출효과는 94억 원, 생산유발효과는 115억 원, 부가가치유발효과는 51억 원, 취업유발효과는 140명으로 조사됐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전시회 개최 지원금 투자 대비 효과는 13.8배(경제적 파급효과 기준)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며 "마이스(MICE)산업이 인천의 미래성장 동력이 되고 송도컨벤시아가 그 중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송도컨벤시아 2단계 시설 확충 공사는 오는 7월 완료될 예정이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송도컨벤시아 전체 연면적은 11만7천27㎡로 확대돼 900개 이상의 부스를 설치할 수 있게 된다. 대형 행사 개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인천경제청은 송도컨벤시아가 송도 랜드마크 구실을 할 수 있도록 2단계 시설 확충과 함께 야간 경관시설물 구축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국제코팅접착필름산업전인천국제식품음식박람회 및 홈·리빙생활용품전(왼쪽부터)인천프랜차이즈 창업박람회·인천카페쇼·케이펫 페스티벌 송도

2018-01-21 목동훈

[zoom in 송도]인천경제청 '송도 국제도시' 새해 주요사업은

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 상반기 개관송도 5·7 공구에 유시티 기반시설 갖춰300억 예산투입 송도 상징시설물 조성조류 인공섬 '버드 아일랜드' 4월 첫삽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최근 유정복 인천시장에게 '2018 주요업무계획'을 보고하고 새해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인천경제청은 주요업무계획에서 '2017 뉴시티 서밋(New Cities Summit)' 행사 개최로 송도국제도시 등 인천경제자유구역을 전 세계에 알리고 미래도시의 모델을 제시한 점, 삼성바이오로직스 제3공장이 준공돼 단일 도시 기준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바이오의약품 생산 역량을 확보한 점, 세계 5대 패션스쿨로 손꼽히는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가 인천글로벌캠퍼스에 개교한 점 등을 지난해 성과로 꼽았다. 지난해에는 송도 워터프런트 1단계 1-1공구 실시설계 착수, '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 준공, 제3연륙교 건설 확정 등의 현안도 해결됐다. 지난해 미흡 또는 개선할 점으로는 송도 6·8공구 개발사업이 차질을 빚은 점, 영종지구 관광단지 조성사업들이 무산되거나 지연된 점 등이 제시됐다.인천경제청은 송도를 고품격 도시로 만들고, 영종과 청라의 투자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올해에도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2018 주요업무계획'에 담긴 송도국제도시 주요 사업을 정리했다.■ '아트센터 인천' 개관 등 중점 추진인천경제청이 중점(핵심)사업으로 꼽은 과제 5건에 ▲아트센터 콘서트홀 개관 ▲송도 워터프런트 조성 ▲송도 6·8공구 개발이익 환수 등이 포함됐다.아트센터 콘서트홀은 1천727석 규모로, 지난달 29일 준공됐다. 인천경제청은 시설 인수, 시험운영, 전문가 확보, 조례 제정 등의 절차를 거쳐 개관할 계획이다. 올 상반기에 문을 열겠다는 계획인데, 하반기 중 개관할 가능성도 있다.송도 워터프런트 조성사업은 수로와 호수를 연결해 친수공간 및 해양생태도시를 만드는 프로젝트다. 인천경제청은 기본·실시설계 및 타당성 조사(3월)와 지방재정 투자심사(5월)를 거쳐 올 10월 공사를 시작하겠다는 계획이다. 1단계 1-1공구 사업은 길이 950m, 너비 40m의 수로를 조성하고 교량 3개를 설치하는 내용이다. 사업비는 490억원이며, 2021년 12월 준공될 예정이다.송도 6·8공구 송도랜드마크시티 개발사업은 내부수익률 12% 초과분에 대한 개발이익을 사업시행자와 인천경제청이 50%씩 갖게 돼 있다.개발이익 정산·분배 시기가 쟁점이다. 인천경제청은 블록별로 나눌 것을 요구하는 반면, 사업시행자는 모든 사업이 완료된 후 정산·분배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인천경제청은 사업시행자와 협의를 벌여 개발이익 정산·분배에 관한 세부합의서를 체결할 계획이다.■ 스마트시티 조성, 기반시설 건설 '지속'ICT 기술을 활용해 편리하고 안전한 도시를 조성하는 스마트시티 구축·운영 사업은 올해에도 계속된다. 송도 5·7공구 유시티 기반시설 구축, 송도 6공구 대2-1호선 유시티 관로 설치 등이 계속사업으로 진행된다. 송도 8공구 유시티 기반시설 실시설계 수립 용역은 올해 새로 추진된다. 기반시설의 경우, 송도 11-1공구 기반시설 기본설계가 올해 8월 완료되고, 12월부터는 송도 6·8공구 2단계 기반시설 건설공사가 시작된다.송도 11공구의 개발계획과 실시계획을 변경하는 작업도 올해 본격화된다. 올해 계획된 공원·녹지사업은 ▲5·7공구 공원·녹지 신규 조성 등(29만 3천㎡, 254억 원) ▲6·8공구 공원·녹지 신규 조성 등(11만5천㎡, 37억 원) ▲달빛축제공원 등 이용자 편익시설 보완(138억원)이다. 올해 송도에서 열리는 문화행사로는 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 인천송도불빛축제, 굿마켓 등이 있다.인천경제청은 송도 상징시설물 기본·실시설계 수립 용역을 오는 7월 발주해 12월부터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예상 사업비는 300억원이며, 준공 시기는 2020년 12월이다. 인천경제청은 도시 브랜드 향상, 관광객 유치를 위해 랜드마크 구실을 할 상징시설물을 송도에 설치할 계획이다.송도 11공구 앞바다에 인공섬 형태의 조류 대체 서식지를 만드는 송도 버드 아일랜드 조성사업은 4월부터 공사가 진행된다.인천경제청은 송도전문병원 복합단지 조성과 관련해 1분기에 토지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4분기에는 공사에 들어간다는 목표도 세웠다. 송도 국제병원 유치와 관련해선 상반기 중 사업 추진안을 마련할 방침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8-01-21 목동훈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바다의 길잡이' 해상교통관제사

대이작도 인근~영종대교 남단 598㎢ 3교대 근무하는 18명, 밤낮없이 살펴하루 수백척에 달하는 선박들과 교신위치·움직임 파악… 정박·운항 지시바람·조류 등 끊임없이 바뀌는 환경첨단장비 발달에도 '사람' 역할 중요"인천항 VTS. 여기는 시노코인천호입니다. 콜사인(선박 호출부호) DSFR9. 현 시각 장안서 2마일 지점 통과 중 인천 관제 구역에 진입했습니다. 팔미도 도선점 통과예정시간은 9시 50분, 목적지는 송도 한진컨테이너터미널입니다."지난 9일 오전 9시 인천 연안부두 인근에 있는 인천항 해상교통관제센터(VTS, Vessel Traffic Service)에서 인천항에 들어오는 선박의 '입항 보고' 무전이 울렸다. 이 배는 중국 옌타이(煙臺)에서 인천항에 들어오는 컨테이너 선박이다. 인천항에 입항하는 화물선과 특수목적선, 대형 어선은 대이작도 인근 해상 3㎞(장안서 2마일) 전에 반드시 인천항 VTS에 입항 보고를 하게 돼 있다. 자유롭게 운항하다가 인천항 VTS 관제 구역에 진입하면 해경의 통제를 받는다.VTS는 인천 앞바다의 안전 길잡이다. 연안에 들어온 배가 안전하게 항만에 정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곳에서 일하는 해상교통관제사의 역할이다. 인천항 VTS에서 근무하는 방호철(31) 해상교통관제사는 "관제사의 임무는 인천항에 드나드는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사고 예방을 위해 조언하고 지시하며, 사고가 발생할 경우 이 사실을 재빨리 전파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업무를 설명했다.방 관제사가 근무하던 지난 9일 인천항에 입항하는 도선(導船) 대상 선박은 46척이다. 이날은 전날 밤 10시부터 풍랑주의보가 내려졌기 때문에 다른 날보다 입항 선박이 적은 것이라고 한다. 평상시 인천항 도선 대상 선박은 60여 척 수준이다. 외국적 선박과 2천t 이상의 대형 선박에만 도선사가 탑승하기 때문에 일반 선박까지 합치면 하루 수백 척의 선박이 인천항 VTS와 교신하고 있다.방 관제사가 일하는 관제실은 6층 규모의 인천항 VTS 제일 꼭대기에 있다. 삼면이 바다가 보이도록 탁 트여 있는 관제실이지만,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부분은 인천해양경찰서 전용부두에서 내항 일부분에 불과하다. 대이작도 남방 10㎞ 해상에서부터 영종대교 남단 5㎞ 해상까지 598㎢의 넓은 관제 구역을 관제사들은 이곳에 설치된 24개의 모니터를 통해 확인하고 있다. 모니터에는 전산화된 해도(海圖)가 펼쳐져 있다. 각 선박에서 보내는 신호를 수신한 해도는 인천 앞바다를 지나는 배들의 위치를 표시해준다. 이를 보고 충돌이 예상되면 관제사가 해당 선박에 사고 위험을 알리게 된다. 방 관제사는 "자동차는 브레이크가 있어 제동할 수 있지만, 배는 급브레이크가 없다. 이 때문에 관제사가 보고 있다가 속력과 중량을 가늠해서 사고 위험성을 일찌감치 선박에 알려야 한다. 그날 조류와 풍속 등도 끊임없이 살펴야 안전하게 관제를 할 수 있다"고 했다.이러한 이유로 관제사는 해당 항만이나 연안을 천리안처럼 꿰뚫고 있어야 한다. 배와 바다에 대한 소양을 갖춰야 하므로 5급 항해사 면허와 함께 1년 이상 승선 경력은 필수다. VTS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레이더 등 최첨단 장비를 갖추게 됐지만, 여전히 해상교통관제의 중심에 '사람'이 건재한 이유다.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로 필요성 커져1948년 英, VTS 첫 설립 세계로 전파국내, 1980년대 잦은사고 탓 요구 늘어포항제철 지원으로 1993년 포항에 첫선기술없어 노르웨이 전문가에 교육 받아인천 1998년 도입·2006년 현위치 둥지지금은 바다의 안전을 위해 해상교통관제가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아 전 세계 모든 국가가 VTS를 운영하고 있지만, 100여 년 전만 해도 필수 요소는 아니었다. 해상교통관제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게 된 것은 우리에게 영화로 잘 알려진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때문이다.1912년 대서양을 항해하던 타이타닉호는 거대한 빙산에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배에 타고 있던 통신사들은 사고 직후 주변을 항해하던 선박에 구조 요청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이에 응답한 배는 단 한 척. 당시에는 무선통신 설비를 24시간 가동해야 하는 규정이 없었다. 결국, 통신 장비를 작동하고 있던 한 척의 배가 구조 보트에 타고 있던 타이타닉 승객 700여 명을 구했지만, 1천500여 명의 승객과 승무원은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국제해사기구(IMO)는 '국제해상인명안전협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을 채택했다. 협약에 따라 모든 배는 무선통신기기를 장착하고, 이를 24시간 가동해야 하며, 각 나라의 해안국은 이를 반드시 수신해야 하는 의무가 생겼다.1·2차 세계대전을 통해 발전한 레이더는 해상교통관제에도 영향을 끼쳤다. 1948년에는 영국 리버풀항에 전 세계 최초로 VTS가 만들어졌으며, 1960년대 이후 역할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급속도로 확대됐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초반까지 무선통신에 의한 해상 관제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대형 선박들이 오가는 해상의 안전을 무선통신에만 의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1989년부터 10년 동안 포항지방해양항만청에서 통신사로 근무했던 인천항 VTS 김영국(58) 센터장은 "VTS는 레이더를 통해 선박의 현재 위치를 알 수 있지만, 통신 관제는 선박이 보내주는 신호를 그대로 믿어야 했다"며 "이 때문에 관제사가 지시하는 부두에 정박하지 않고 허위 신고를 하거나 정박해 있는 배들과 접촉 사고를 내고 도주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1980년대부터 급격히 늘어난 선박 사고도 VTS 설립에 대한 목소리를 키우기 충분했다. 해양수산부가 2013년 발간한 해상교통관제백서에 따르면 1980년 우리나라 선박 사고는 255건이었지만, 1990년에는 515건으로 10년 사이에 두 배 이상 증가했다.VTS 설립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됐지만, 문제는 예산이었다. 당시 11억원에 달하는 VTS 설립 비용을 정부가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포항해운항만청은 포항항 항로 준설공사를 시행할 예정이었던 포항제철에 도움을 요청했다. 포항제철이 VTS 공사에 필요한 자금을 대고, 공사가 완공된 이후 포항항 항만 이용세에서 공사비를 공제하는 방식이었다. 포항제철도 철을 만드는 데 필요한 철강석을 실은 대형 선박이 사고라도 난다면 그 피해가 막대했기 때문에 선박 안전 확보는 시급한 문제였다. 김 센터장은 "당시 이우극 포항항만청장이 '한 건의 선박 사고만 막아내더라도 11억 원의 설치비를 충분히 의미 있게 사용한 것'이라고 말하며 포항제철을 설득했다"고 말했다.포항제철은 VTS 도입에 적극적으로 찬성했고, 1993년 포항 VTS가 전국 최초로 문을 열었다. 김 센터장은 "당시에는 국내에 VTS 기술자가 없었기 때문에 노르웨이에서 기술자가 방문해 장비를 설치하고, 국내 통신사에게 장비 운용 방법을 교육했다"며 "1년 정도 교육을 받은 뒤, 7명의 직원에게 국내 최초의 해상교통관제사 자격증을 발급해줬다"고 말했다.1970년부터 운영되던 인천항 항무통신국에도 1998년 해상교통관제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이후 2006년 건물을 신축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곳에서 일하는 18명(6명이 1개 팀으로 3교대 근무)의 관제사는 CCTV 18대, 기상장비 7대와 레이더 등 관제장비 24대를 이용해 인천항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방 관제사는 "우리가 직접 배를 운항하지는 않지만, 선박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며 "관제사는 바다를 의지해서 먹고사는 많은 사람의 버팀목이 돼야 한다. 그들이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뒤에서 묵묵히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지난 9일 오전 인천시 중구 항동 연안부두 인근 인천항 해상교통관제센터(VTS, Vessel Traffic Service). 방호철 해상교통관제사가 인천항에 들어오는 선박의 '입항 보고' 무전 교신을 하고 있다. 인천항 연안에 입·출항하는 배가 안전하게 항만에 정박하고 출항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곳에서 하는 해상교통관제사의 역할이다./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해상교통관제센터 전경.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1992년 12월 전국 최초로 발급된 해상교통관제사 자격증. 당시에는 노르웨이 기술자들이 우리나라 통신사를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해 자격증을 발급해줬다고 한다. /인천항 VTS 김영국 센터장 제공1975년 마산지방항만관리청 충무항무통신실 모습. /해양경찰청 제공해상교통관제센터 외경.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8-01-18 김주엽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작은 어촌마을서 물건너온 수많은 사연

식민지·전쟁·산업화등 역사 순간도시를 움직인 인물·사건 재조명인천은 바다의 도시다. 바다는 인천이 성장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지금도 그렇다. 바닷길은 사람과 물품이 오가는 통로가 됐고, 인천 앞바다 섬들은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자 소중한 자원이 됐다. 135년 전, 작은 어촌마을 '제물포'가 개항하면서 인천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전에도 인천은 서해안 주요 도시와 서울, 그리고 중국과 일본까지 뱃길이 이어지는 등 해상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1883년 개항은 닫혀 있던 도시를 연 것이 아닌, 기존 국제무역항의 기능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로 봐야 할 것이다.일제 강압의 개항이라는 점에서 많은 아픔도 겪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식민지 경제 수탈의 창구가 됐고, 조선의 항만노동자들은 일제의 압박과 착취에 맞서 싸워야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항만시설 대부분이 파괴돼 항만기능을 상실했다.그 어려웠던 개항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인천항은 역사를 써 나갔다. 1918년 갑문식(閘門式) 제1선거가 건설되면서 10m가 넘는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했으며, 1974년 제2선거 건설로 최대 5만t급 대형 선박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그해 내항 4부두에는 대한민국 제1호 컨테이너터미널이 건설됐다. 이후 인천항은 남항·북항·신항 개발로 외항시대를 열었으며, 지난해 드디어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300만TEU'를 달성했다. 이제 인천항은 세계 30위권 컨테이너항만 진입을 목표로 뛰고 있다.인천항 발전에는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부두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기술자를 비롯해 선장, 등대지기, 어민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인천항을 움직이고,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고 있다.인천에 올해는 큰 의미가 있다. 15년 만에 '바다의 날' 기념식이 개최되며 등대 올림픽이라고 불리는 '국제항로표지협회(IALA) 콘퍼런스'도 열린다. 인천항 갑문이 축조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경인일보는 이같이 의미 있는 해에 연중기획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를 진행한다. 인천항과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관련한 역사·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독자들이 1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인천항과 바다에 관한 깊이 있는 기사를 만날 수 있을 터이다. 인천항과 바다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높아졌으면 한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8-01-11 목동훈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1)프롤로그]2018년 바다의 날 기념식 개최지 '인천'

고대부터 대중교역 중심지였던 인천근대개항기 선진문물 유입 통로 역할현대엔 농어촌·물류·관광 복합도시로시민들 항만시설·섬등 소중함 잘몰라지역경제 대들보 '혐오 낙인' 안타까움2018년 대규모 관련 행사 연이어 열려'해양도시'로서 정체성 되돌아볼 적기①프롤로그인천은 다양한 빛깔을 가진 복합도시다. 농촌과 어촌, 공장지대와 주거단지, 70·80년대 모습을 재현해 놓은 듯한 구도심과 마천루가 즐비한 신도시를 갖추고 있다. 해방 이후 또는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부터, 일자리를 찾아 삼남 지방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사는 곳이 '인천'이다.인천의 다양한 색깔 중 하나는 '해양도시'다. 태생부터 그렇다. 바다를 접하고 있는 인천은 삼국시대부터 국제무역항 구실을 했다. 중국과 가까운 데다 서울 접근성도 좋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덕분에 인천은 해상 교역이 발달할 수 있었다.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 인천이 개항된다. 조선 장악과 대륙 진출을 노린 일제의 강제적 개항이었다. 이로 인해 인천항은 쌀과 소금 등 자원 수탈의 창구이자 군사 기지가 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개항은 인천이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고 인천항의 국제무역항 기능을 강화하는 계기도 됐다. 인천항은 1918년 10월 갑문식(閘門式) 제1선거가 건설되면서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했다. 이전에는 10m가 넘는 조수 간만의 차로 인해 썰물 때 대형 선박의 접안이 불가능했었다. 1974년 5월에는 제2선거가 완공됐고, 선거 남측에 소형 선박을 수용하기 위한 연안부두를 건설하게 됐다.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 부두 조성, 하역장비 기계화 등 인천항은 근대적 항만시설을 하나둘씩 구축해 나갔고,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끌었다. 1992년 한중수교는 인천항 발전의 중요 계기가 됐다. 인천항을 통한 대(對)중국 수출은 매년 두 자릿수의 높은 증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2004년 남항을 시작으로 북항과 신항이 개발되면서 물동량이 많이 증가했다. 인천항은 2015년 광양항을 제치고 전국 2위의 컨테이너항만으로 자리 잡았으며, 지난해에는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이 3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돌파했다. 이제는 세계 30위권 컨테이너항만 진입을 희망하고 있다. 인천항은 새 국제여객부두·터미널 및 배후단지(골든하버) 조성, 항만 기능 재배치 등을 통해 새로운 도약도 준비 중이다.특히 인천항은 인천경제를 지탱하는 축이다. 인하대학교 산학협력단이 2015년 4월 만든 '인천항이 지역 경제에 미치는 경제적 파급효과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인천항(인천의 포괄적 항만물류산업)이 지역 경제에 미치는 생산유발효과는 지역내총생산(GRDP)의 33.8%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2007년(33.3%)보다 0.5%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보고서는 2007년과 2013년 각종 수치를 비교·분석해 경제적 파급효과 등을 추정했는데, 모두 증가했다. 또 '크루즈산업 발전' '신항 개발' 등이 원활하게 이뤄질 경우, 항만물류산업이 지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측했다.인천은 다른 광역시에 비해 운수업(항만물류산업) 비중이 높은 수준이다.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이 있기 때문이다. 운수업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인천의 공항·항만 관련 산업의 비중이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인천항은 대북 교류의 중심지다. 남북 관계가 개선될 경우 인천항에서 더욱 많은 경제적 효과와 일자리 창출이 기대된다. 또한 인천시는 해양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인천 바다에 항만시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천은 덕적도, 굴업도, 연평도, 대청도, 백령도 등 아름다운 섬을 갖고 있다. 섬 주민들은 중국어선의 불법 조업, 기후변화에 따른 어족 자원 감소, 식수와 농업용수 부족, 때론 남북의 군사적 긴장감 속에서도 묵묵히 섬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인천 앞바다에서 잡은 수산물은 몇 단계의 유통 과정을 거쳐 우리 식탁에 오르기도 한다.안타까운 것은 시민들이 인천항과 바다, 그리고 섬의 소중함을 잘 모른다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항만을 혐오시설로 여기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인천은 해양도시'라고 외쳐왔지만, 시민들에겐 멀게만 느껴졌던 것이 '바다'인 것 같다.경인일보는 2018년 연중기획에서 인천, 바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인천항과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와 관련된 역사와 옛 인물을 정리할 계획이다. 팔미도 등대지기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인천 등대의 역사를 알아볼 것이고, 한중카페리 선장을 소개하면서 한중 항로의 변화를 살펴볼 셈이다. 올해 10월 축조 100주년을 맞는 인천항 갑문도 찾아갈 예정이다. 인천항에 얼마나 다양한 직업이 있는지, 그 일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도 이번 연중기획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제23회 바다의 날' 기념식은 올 5월31일 인천 중구 내항 8부두에서 열린다. 1929년부터 4년마다 열려 '등대 올림픽'으로 불리는 '제19차 국제항로표지협회 콘퍼런스'는 5월27일부터 일주일간 송도컨벤시아에서 진행된다. 오는 10월에는 갑문 축조 100주년 기념행사가 있을 예정이다. 이들 굵직한 행사 외에 국립 인천해양박물관 예비타당성 조사 결과, 크루즈 전용 부두 준공, 인천항 330만TEU 돌파 여부 등의 관심사도 있다. 경인일보가 올해 연중기획 주제를 '바다'로 정한 이유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격려, 조언을 바란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항 북항 전경. /경인일보DB어시장 전경. /경인일보DB인천항 신국제여객부두에 입항한 크루즈선 '퀀텀 오브 더 시즈(Quantum of the Seas)'호. /경인일보DB인천해사고 실습생들이 오전 인천항에 입항 하선하고 있다. /경인일보DB인천항 내항 2부두에서 항만근로자가 배에서 화물을 내리고 있다. /경인일보DB어민들이 그물에 걸린 꽃게를 걷어 올리고 있다. /경인일보DB인천항 갑문 전경. /경인일보DB인천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인천검역소 직원들이 승객들의 체온을 열감지 카메라를 통해 확인하고 있다. /경인일보DB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 등대. /경인일보DB

2018-01-10 목동훈

[zoom in 송도]'아트센터 인천' 1단계 시설 준공… '바다 + 아트 + 인간' 담은 대표문화공간 설레는 하모니

글로벌 금융위기·주주사 갈등 극복8년6개월만에 준공 '국내 3위' 규모경제청 시험 운영 거쳐 상반기 개관오페라하우스 등 '2단계 사업' 계획 NSIC와 추진여부·운영 방식 '숙제'인천 송도국제업무단지에 건립된 '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이 마침내 준공 절차를 완료했다. 공사를 시작한 지 8년 6개월 만이다.그동안 글로벌 금융위기, 사업시행사 내부 갈등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국제업무단지 사업시행사인 NSIC(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로부터 콘서트홀을 넘겨받아 올 상반기 중 개관할 계획이다.'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 건립 과정과 과제를 정리했다.■ 착공 8년 6개월 만에 드디어 준공인천경제청은 인천을 대표하게 될 문화시설 '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이 지난달 29일 준공됐다고 밝혔다.송도국제업무단지 사업시행사인 NSIC는 2009년 6월 '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콘서트홀 건립공사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중단됐다. 2012년 10월 공사가 재개됐지만, 이번엔 NSIC 주주사 간 갈등이 발목을 잡았다.NSIC 주주사인 게일인터내셔널과 포스코건설이 갈등을 겪으면서 2015년 하반기부터 또다시 사업이 정상적으로 추진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콘서트홀은 완성됐다. 그러나 게일과 포스코건설 간 갈등이 지속되면서 준공(사용승인) 신청은 1년 넘게 지연됐다.'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은 NSIC가 주거시설(아파트 1천861세대) 개발이익금으로 건립했으며, 인천시에 기부채납하게 돼 있었다.인천경제청은 게일과 포스코건설의 갈등으로 송도국제업무단지 개발이 지연되자, 중재에 나섰다. 인천경제청·게일·포스코건설은 지난해 10월 회의에서 콘서트홀 준공부터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그 후속 조치로 NSIC는 문화예술진흥기금을 납부하고 12월22일 건축물 사용 승인 신청서를 인천경제청에 제출했다.인천경제청은 연수구청 등 관계 기관 협의를 거쳐 12월29일 준공 절차를 마무리했다. 인천경제청은 기부채납 완료, 시험운영 등의 절차를 거쳐 올 상반기 중 콘서트홀을 개관할 계획이다.■ 국내 3위 규모의 콘서트홀'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은 지휘하는 마에스트로의 손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됐다. 독특한 외관을 가지고 있어 송도의 또 다른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기대하고 있다.콘서트홀은 '바다+아트+인간'의 개념이 고려된 독창적인 정체성(Identity)을 부각했으며, 외장은 컬러콘크리트를 적용해 건축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내부는 세계적인 수준의 음향을 위해 내·외부 소음과 진동 차단시설을 갖추는 등 기능적으로도 우수하다. 1천727석으로, 규모 면에서 국내 3위에 해당한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콘서트홀이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송도국제도시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고 세계적인 공연을 감상하려는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등 인천의 새로운 자랑이 될 것"이라고 했다.■ 콘서트홀 운영은 어떻게NSIC는 당초 '아트센터 인천'을 인천시에 기부채납하면서 운영비를 지원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운영비 지원'은 일부 부대시설을 기부채납하는 것으로 변경됐다.인천경제청이 NSIC에게서 넘겨받은 부대시설을 임대해 운영비를 마련해야 하는 구조다. 인천경제청은 NSIC로부터 호텔(202실)을 기부채납 받을 예정이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호텔 수익 일부를 콘서트홀 운영에 쓰고, 부족한 운영비는 예산에서 충당할 계획"이라고 했다. 올해 인천경제청 예산에는 콘서트홀 비품 구매비 및 관리·운영비로 63억 원이 반영돼 있다.내년부터는 콘서트홀 운영에 약 50억 원이 필요할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추산하고 있다. 공연기획비를 어느 수준으로 책정하느냐에 따라 운영비 규모가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운영 조직 및 NSIC 내부 갈등 해소 필요인천경제청 조직에 '아트센터인천운영준비단'이 있지만, 이는 정식 부서가 아닌 TF(태스크포스)팀이다. 콘서트홀이 준공했기 때문에, 이제는 정식 부서를 만들 필요가 있다. 홍보·공연기획 전문가 등 인력 충원도 필요하다.콘서트홀 건립은 '아트센터 인천' 1단계 시설이다. 오페라하우스(1천439석)와 뮤지엄(2만 373㎡)을 짓는 2단계 사업이 계획돼 있다.그러나 NSIC 주주사 갈등, 사업성 악화 등으로 추진 여부와 방식도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NSIC 주주사 간 갈등이 해소되지 않으면, 콘서트홀 기부채납도 늦어질 수 있어 올 상반기 개관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인천경제청은 향후 2단계 시설과 함께 운영비 마련을 위해 상업시설 2만9천388㎡를 기부채납 받을 예정이며, 1·2단계 사업이 모두 완료되면 (가칭)아트센터인천운영재단 설립을 검토할 방침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아트센터 인천' 1단계 시설인 콘서트홀 외관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콘서트홀 공연장 모습콘서트홀 연회장 모습

2018-01-07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50(끝)]평안남도 강서군 봉황리 출신 황윤걸 할아버지(下)

부친 자수성가 땅 수천평 가진 '중농' 집안목화가꾸기 좋은 최씨 집성촌 '최촌' 거주밤참 '냉면' 손님 대접용 '노티' 맛 못 잊어고구마·함종밤도 유명… 바다와도 가까워고당 조만식 배출한 교육열 높은 강서지방유격부대 전력 탓 이산상봉 신청조차 못해"나 때문에 피해 본 가족위해 밤마다 기도"황윤걸(85) 할아버지 고향은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다. 1952년 군·면·리 폐합에 따라 증산군 안석리로 개편됐다가 1958년 온천군 안석리가 됐다. 황윤걸 할아버지의 부친은 자수성가했다. 부친은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본가가 있는 최씨네 집성촌에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농사일을 했다.낫 놓고 기역(ㄱ)자도 모를 정도로 일자무식이었지만, 누구보다 부지런했다. 돈을 모아 조금씩 땅을 샀다. 황윤걸 할아버지가 태어날 즘에는 수천 평을 가진 중농(中農)이 됐다. 근면과 성실로 가난을 극복한 것이다. "부모님은 해 뜨기 전에 논에 나가서 별을 보고 들어오곤 했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생한 것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그 정신(근면·성실)을 잊은 적이 없어."황윤걸 할아버지가 살던 마을은 '최촌'이다. 최씨네 집성촌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최촌은 마을 옆에 큰 다리가 있다고 해서 '큰다리마을'이라고도 불렀다. 그 주변에 '어촌'과 '한촌'이 있어서 3개 마을 간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어촌은 고기 어(魚)자를 써. 어촌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았어. 한촌은 머리 좋은 사람이 많았고, 우리 마을 최촌은 돈이 많았어."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은 '택리지'에서 오곡과 목화 가꾸기에 알맞은 땅을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황윤걸 할아버지 고향인 최촌이 바로 그랬다. 최촌은 목화가 많아서 겨울철 농한기에도 일거리가 있었다. 한 해 농사가 끝나면 아낙네들이 목화로 천을 만들어 팔았다. '택리지'에도 '평안도는 산속 고을 가운데는 심는 곳이 드물지만, 들판 고을에는 목화 가꾸기에 알맞지 않은 곳이 없다'고 기록돼 있다.고려 말 문신 문익점(1329~1398)과 그의 장인 정천익(생몰년 미상)이 목화 재배에 성공한 것은 1365년이다. 목화 재배는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이뤄지다가 점차 평안도와 황해도 등 전국으로 퍼졌다. 1475년 성종 6년 4월27일자 '성종실록' 기록을 보면 국가 정책적으로 평안도에서 목화 재배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목화는 백성들의 옷감인데 남쪽에서만 생산되고,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도에서는 생산되지 않습니다. 평안도 등에 목화씨를 보내 백성들이 재배해야 한다"는 신료들의 건의를 받고, 성종은 목화씨를 이들 지역에 보내 심게 한 후 관찰사에게 수확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여성의 일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사 분담도 이뤄졌다. "여자들이 물레로 목화에서 실을 뽑고 베틀로 천을 짜야 하니까 바쁘지. 우리 동네는 겨울철에 남자들이 애를 봐야 했어."최촌 남자들은 겨울철에 윷놀이를 많이 했다. 날씨가 추우니까 방 안에 모여 앉아 팥알의 절반을 쪼개 윷놀이를 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팥으로 하는 윷놀이지. 바쁜 부녀자들 도와줘야 하니까 남자들이 등에 애를 업고 윷놀이를 했다"고 말했다.겨울철에는 냉면을 밤참으로 먹었다. 동치미 국물에 메밀로 만든 면을 넣어 만들었는데, 고향에서는 냉면이 아닌 '국수'라고 불렀다고 한다."겨울에 목화 일을 도와주면 냉면으로 밤참을 주는 집이 있어. 동치미 국물에 면은 메밀이지. 이북 곡식은 풀기가 많아서 메밀 면을 만들 때 밀가루를 조금만 넣어도 돼. 추운 날씨에도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먹었었지. 웬만한 집에는 면 뽑는 기계가 있었어."할아버지는 '칼국수'와 '노티'도 기억이 난다고 했다. 고향의 칼국수는 닭고기를 우려낸 국물로 만들었으며, 큰손님이 왔을 때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전병의 일종인 '노티'는 추석 때 먹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기장가루를 엿기름으로 삭혀서 만들면 설탕을 넣은 것처럼 달게 된다"며 "단지에 차곡차곡 넣어 두었다가 명절 때나 귀한 손님이 오면 기름에 지져서 먹었다"고 했다.작가 황석영은 지난 2001년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라는 책을 냈다. 책 제목은 평양 출신의 모친이 암으로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몇 번이나 며느리에게 하셨던 말씀이다. 황석영은 1989년 방북했을 당시 평양에서 어머니의 여동생인 막내 이모를 만났다. 이모는 노티를 주면서 만드는 법까지 알려줬다.'요즈음 구수한 기장쌀을 구하기 힘들 테니 찹쌀을 빻아다 시루에 찐다. 엿기름가루에 물을 내려 우려낸다. 익은 찹쌀가루와 엿기름가루를 섞어 우려낸 엿기름 물을 붓고, 소금 간을 하고 참기름 넣어서 반죽을 한다.'"이남 것은 과일도 밭작물도 별로 맛이 없다"고 황석영의 어머니는 말씀하시곤 했다. 황석영은 위도나 기후상 이북 지방의 작물 맛이 월등한 것도 있지만 "어머니의 입맛은 고향을 그리는 향수였던 셈이기도 했다"고 여긴다.황윤걸 할아버지가 살던 집은 'ㄷ'자형 벽돌집이었다. 흙집과 초가집에서 살다가 부친이 마을 변두리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동향집이며 안채·사랑채·부엌·광·외양간·뒷간으로 이뤄졌다. 'ㄷ'자 가운데 마당에는 우물이 있었다. 겨울에 고구마 등의 곡식은 안방에 보관했다고 한다."농사지은 거 밖에 못 내놔. 얼어버린다고. 안방 구석에 수숫대를 엮어서 그 안에 고구마를 뒀지."1997년 나온 '평안남도지'를 보면, 1938년 강서군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채소는 고구마다. 강서군의 고구마 생산량은 평남 16개 시·군 가운데 용강군 다음으로 많았다.할아버지 고향은 밤도 유명했다. 평남 함종은 밤이 많이 나는 곳으로, 여기서 나오는 밤을 '함종밤'이라고 했다. 최영전씨가 쓴 '한국민속식물'에 따르면 평안도에서 나는 함종밤은 알이 잘고 단 약밤으로, 중국 종의 감율(甘栗)이다. 함종밤은 속껍질이 쉽게 벗겨지는 특징이 있다."그게 함종밤이야. 유명하다고. 크지도 않은데 까면 잘 벗겨져. 푸석푸석하지 않고 차지면서 달아. 한 달 정도 둔 뒤에 발로 누르면 밤알이 쑥쑥 나와. 닦아서 말리면 오래 보관할 수 있지."황윤걸 할아버지 고향 '안석리'는 바닷가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바다와 가깝다.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망둥이 낚시를 많이 다녔다. 조개도 많이 잡았다"며 "겨울철에 논에서 썰매를 타는데 물에 많이 빠졌다. 바닷가 옆이라서 염분 때문에 딱딱하게 얼지 않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서해 바닷가에서 놀았던 추억 때문인지 강화도에 가면 고향에서 낚시했던 생각이 난다고도 했다.황윤걸 할아버지의 부친은 교육열이 대단히 높았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2대 독자다. 일제강점기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해방 후 마을 근처에 개교한 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중등교육을 받아서, 한국전쟁 때 잠시 인민학교 교사로 일할 수도 있었다.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인 고당 조만식(1883~1950)도 평남 강서군 출신이다. 고당기념사업회가 엮은 조만식 전기(북한 일천만 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겠소) 발간사에는 강서군에 대한 설명이 있다.'1910년 한일병탄이 일어나기 전, 평안도에서 교육 열풍이 가장 크게 불어 닥친 곳이 바로 강서 일대였다. 강서 지방은 스스로 개화하고 근대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힘도 컸지만 교육의 힘이 더욱 컸다.'평양 출신 시인 양명문(1913~1985)은 함종을 찾았다가 밤나무골에 있는 한 연못을 보고 시(詩) 한 편을 얻었다. '샘가에서'라는 시다.'푸른 산 솟은 밑에 솟는 맑은 샘 / 복숭아 꽃이파리 샘물에 떨어지니 / 그 옛날의 네 모습이 샘물 위에 그려진다 / 아 지나간 그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이여 / 아롱진 가지가지 감격에 찬 그때 일이 / 내 가슴에 펴오른다 내 가슴에 사무친다''샘가에서'는 평남 안주 출신의 작곡가 김동진(1913~2009)이 곡을 붙여 가곡으로도 사랑을 받았다.황윤걸 할아버지 가족은 조모, 부모, 누나, 여동생 3명 등 모두 8명이었다. 하지만 혼자 월남했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동키 제9부대(평남부대)에 소속돼 평남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휴전 한 달 전에 남한에 왔다. 동키 부대 유격대원으로 활동한 전력 때문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도 하지 못했다. 북한 땅에서 군번도, 계급도 없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했다."그냥 피란 나온 것도 아니고 서해안에서 작전하며 다닌 유격군 출신인데, 이산가족을 찾아? 이북에서 말하는 제일 악질분자가 바로 나야." 할아버지는 "내 신분이 노출됐을 거야. 나 때문에 가족들이 피해를 봤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도 나는 밤에 기도를 하고 자. 우리 가족에게 문안을 올리는 거지."황윤걸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꼭 한 번 고향 집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특히 몸이 아플 때 고향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 아프면 그냥 고향 생각이 떠올라." 할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배구와 축구 등 운동을 좋아했던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 최촌 마을의 청년이 80대 중반의 노인이 됐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홀로 고향을 떠나 유격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월남했다. 인천 부평 벽돌공장에서 일하는 등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것보다 유격대원으로 활동한 자신 때문에 이북에 있는 가족이 피해를 본 것 같아 죄스럽다고 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한다. 이북에 있는 가족에게 문안을 올리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실향민으로서의 아픔과 괴로움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 가족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딱 한 장 남은 사진! 황윤걸 할아버지는 배구와 축구 등 운동을 잘했다. 평안남도 강서군 신정면에 있는 신정중학교를 다닐 때는 배구선수를 했다. 이 사진은 강서군에서 주최한 배구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기념해 촬영한 것으로,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황윤걸 할아버지다. 1948년이나 1949년이라고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중학교 3학년 때 군(郡)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학교에 와서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한편, 신정면은 1952년 군·면·리 폐합에 따라 증산군에 편입되면서 폐지됐다. /황윤걸 할아버지 제공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2017-12-27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9]평안남도 강서군 봉황리 출신 황윤걸 할아버지(中)

8남매 둔 황인옥씨 부부 친아들처럼 챙겨평남부대·육군 복무하다 건강 탓에 제대부친 따라 몇년간 부평 벽돌공장서 일해당시 사택을 본적으로, 회사 주소와 일치브로커 통해 의정부 미군부대서 15년 근무이후 서울 수유리서 통닭집 열어 큰돈 벌어인천으로 터전 옮기자 장사안돼 다시 서울로1980년에 돌아와 우유 보급소·대리점 운영도한국전쟁 때 평안남도 앞바다 섬에서 동키 평남부대 유격대원으로 활동하던 황윤걸(85) 할아버지는 휴전을 한 달 정도 앞둔 1953년 6월 중순 인천 용유도에 왔다. 약 400명의 대원이 용유도에 왔는데, 이 중 절반은 각자 살길을 찾아 떠났다. 황윤걸 할아버지 등 나머지 대원들은 이듬해 2월 부대가 육군에 편입될 때까지 용유도 24인용 막사에서 군 생활을 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용유도에서 새로운 부모님을 만났다. 1911년생 황인옥 씨 부부다."부대가 주둔해 있으려면 주민들 협조가 필요하잖아. 면장도 지내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그 집이 마침 황씨야. 그래서 나랑 결연이 됐어. 부모가 된 거야." 황윤걸 할아버지는 "슬하에 8남매가 있었는데, 나까지 9명이 됐다"며 "어머니가 나를 친아들처럼 잘 챙겨주셨다"고 덧붙였다.그때는 용유도와 영종도가 지금처럼 하나의 섬이 아니었다. 이 지역은 염전과 농경지 조성을 위한 소규모 매립만 있었는데, 1992년 인천국제공항 건설을 위해 대규모 매립사업이 이뤄졌고, 이때 용유도와 영종도 사이의 갯벌이 매립됐다. 영종·용유지역은 기존 토지 면적보다 매립된 토지 면적이 더 크다. '인천 중구사'에 따르면, 1990년대 국가사업으로 공항과 배후 신도시 건설이 이뤄지면서 4천813만5천㎡ 규모의 해안 매립이 시행됐다. 이 일대에서는 영종도 준설토 투기장 조성, 영종2지구 개발 등 지금도 공유수면 매립이 진행되고 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에 돌다리가 있어서 바닷물이 빠지면 건너다닐 수 있었다"며 "인천공항 전망대 아래쯤에 돌다리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할아버지는 평남부대가 육군에 편입된 뒤 505수송단 자동차대대에서 계속 군 생활을 하다가 간부후보생을 뽑는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교육을 받던 중 건강에 문제가 생겨 1955년 9월 제대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는 인천 부평으로 왔다. 새 아버지 황인옥 씨가 부평 벽돌공장에 취직하면서 가족이 용유도에서 부평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아버지가 부개동 벽돌공장에 총무로 계셨어. 연와공장이라고 하는데, 허허벌판에 있는 공장이 엄청 컸어."황윤걸 할아버지도 벽돌공장을 다녔다. 기술이 없어서 모래와 흙을 차에 싣는 일을 했다."그때는 먼저 삽자루를 쥐는 놈이 일을 하는 거야. 새벽 4시쯤 통행금지가 해제되면 창고로 뛰어가는 거지. 지금으로 따지면 일당을 받는 거야."할아버지 본적은 부평구 부개동 120번지로 돼 있다. 황인옥 씨 집 주소를 본적으로 정한 것인데, 이는 부평연와주식회사 주소와 일치한다. 황인옥 씨 가족이 벽돌공장 사택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공장 주소와 황윤걸 할아버지 본적이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 벽돌사'라는 책에는 연도별 연와공장 현황이 정리돼 있다. 황윤걸 할아버지가 일했던 '부평연와합자회사'는 최성순 씨가 1946년 경기도 인천시 부개동 120번지에 설립한 것으로 돼 있다.벽돌공장은 일제강점기에 많이 생겼다. 일제가 우리나라의 좋은 흙과 인력을 활용해 벽돌을 대량 생산한 것이다. 일종의 자원·노동력 착취였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사람이 불하를 받아 운영했다. 한국전쟁으로 부산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벽돌공장이 문을 닫았다. 하지만 휴전 이후 복구 작업이 이뤄지면서 벽돌공장은 호황을 누리게 됐다.인천 최초 벽돌공장은 1906년 4월 아키타(秋田)가 창립한 '추전상회요업부'다. 주소는 경기도 인천 비랑리로 돼 있다. 지금의 남구 용현동이다. 이후 1920년 4월 산야정(山野井)요업공장, 1932년 2월 인천요업주식회사, 1939년 4월 조선요업주식회사 등 일본인 벽돌공장이 생겼다.이들 공장에서 나온 벽돌은 인천 개항장 일대의 건축물을 짓는 데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인천의 건축'에 따르면 1889년 인천에서 길성(吉盛)이라는 청국인 건축청부업자가 벽돌 성형기를 반입해 서구식 벽돌을 제조했다고 한다. 청국과 각국공동거류지에는 연와 또는 석재 혹은 철재로 견고하게 건축물을 지어야 한다는 규정(각국조계장정 제2조)이 있었다. 건축 자재는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으며, 1910년 이후 건축용 재료로 벽돌의 대량 제조가 가능해졌다.부평연와합자회사는 한국인이 운영한 인천의 첫 벽돌공장이다. 1947년에는 차태열 씨가 간석동 542번지에 조선요업주식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는 한국적벽돌주식회사, 한국적연와주식회사, 한국적연와공업주식회사 등으로 상호가 변경되기도 했다. 1971년 북구 작전동에는 한일연와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됐다.황윤걸 할아버지는 1957년 3월까지 부평 벽돌공장에서 일했다."구산동에 중앙병원(근로복지공단 인천병원) 있지? 그 근방에서 벽돌 만드는 모래가 나왔다고. 4명이 한 조가 돼 덤프트럭에 싣는 거지. 그때는 일반 트럭이 없으니까 군에서 후생사업이라고 해서 트럭이 나왔어." 모래를 한 차 가득 실을 때마다 마패를 1개씩 줬다고 한다. 이것을 사무실에 주면, 보름 또는 한 달 단위로 계산해 돈을 줬다.벽돌공장에는 다양한 일이 있었다. 황윤걸 할아버지처럼 모래와 흙을 차에 싣는 일부터, 벽돌을 굽는 사람, 차에 벽돌을 싣거나 내리는 사람 등도 있었다.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에는 1955년 부평연와합자회사 직원 수가 102명으로 나온다. 그 당시 부평지역 기업체 가운데 종업원 수가 가장 많다."상하차 작업은 벽돌 5장을 한 번에 던지고 받는거야. 맨손으로 하면 손바닥을 다치니까 자동차 타이어 튜브로 장갑을 만들어 썼어. 여자들은 '다대기'라고 해서 판때기로 벽돌을 두들겨 모양 잡는 일을 했지."부평연와합자회사가 있던 곳은 신도시 개발 등 택지개발사업으로 아파트 단지와 공원이 됐다. 부평연와합자회사는 부평동중학교 앞 사거리 북쪽에 있었다. 부평동중 인근 백영아파트와 대촌공원 자리에 사택이 있었다. 흙을 쌓아 놓고 흙벽돌을 만들던 공장 자리는 부개여고와 부개주공아파트가 차지했다. 가마 터에는 상일고와 웅진플레이도시가 들어섰다. 경기도 부천시 상동에 포함한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사택이 두 군데 있었다. 벽돌공장 위쪽 대부분이 논인데, 부천 상동 쪽으로 마을이 하나 있었다"며 "(인천과 부천 경계) 도로 가운데에는 수리조합에서 만든 개울이 있었다"고 했다.할아버지는 벽돌공장 일을 그만두고 의정부에 있는 미군 부대에 취직했다. 당시 미군 부대에 들어가려면 브로커에게 돈을 줘야 했는데, 황인옥 씨가 6개월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일수쟁이에게 빌려 마련해줬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1971년까지 미군 부대에서 일하다가 서울 수유리에 통닭집을 열어 큰돈을 벌었다."미군 부대를 15년 가까이 다니면서 집을 못 샀어. 근데 통닭집을 해서 4년 만에 수유리에 집을 산 거야. 생맥주를 함께 팔기 잘했지."처음에 7평짜리 가건물에서 장사를 시작했는데, 4년 만에 31평까지 확장했다. 장사가 잘되자, 건물주가 점포를 내놓으라고 했다. 그래서 권리금을 두둑하게 받고 그곳을 떠났다.황윤걸 할아버지는 1977년 인천 남구 주안동 인천법원·검찰청 도로 맞은편 건물 상가에 통닭집을 차렸다. 주안주공아파트 단지 옆에 있는 3층짜리 건물의 1층 코너 점포를 얻은 것이다. 집(주안주공 64동 501호)도 샀다. 하지만 벌이는 형편없었다."상권이 좋다고 해서 왔는데, 서울과 인천은 수준이 다른 거야. 인천사람들은 통닭을 안 먹더라고. 또, 아파트 사는 사람들은 죄다 석바위 쪽으로 가는 거야."통닭과 술장사로는 매출이 오르지 않자 점심에 순두부백반과 찹쌀막걸리를 팔았다. 하지만 석바위 사거리 상권을 이길 수는 없었다."석바위 쪽이 번창했지. 양주 파는 집도 있고, 생활필수품도 거기 다 있었으니까. 석바위가 신흥도시라고 해서 중구와 동구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사 왔어. 그때는 석바위가 엄청 커지는 줄 알았다고."법원·검찰청은 남구 학익동으로 이전했고, 공장이 차지하고 있던 그 자리엔 2016년 3월 인천가정법원과 인천광역등기국이 들어섰다. 5층짜리 연탄 난방의 주안주공은 고층 아파트(더월드스테이트)로 재건축됐고, 할아버지의 점포가 있던 곳에는 17층짜리 주상복합(보미리즌빌) 건물이 섰다.황윤걸 할아버지는 주안동 가게를 접고 서울에서 가구장사를 하다가 1980년 여름 인천에 다시 왔다. 서울우유 인천지구 구월보급소를 맡으면서 인천에 다시 정착한 것이다.할아버지는 간석동 희망백화점 인근에서 7년 정도 영업을 하다가 구월동 길병원 근처에 건물을 지어 1995년까지 직접 서울우유 대리점을 운영했다. 지금도 그 건물에 살고 있다."지금 시청 있는 곳은 배나무 과수원이었어. 주변에 인분을 모아 놓는 곳이 있어서 '똥고개'라고 했지. 구월주공, 상인천여중, 길병원 매점·식당에 우유를 납품해서 장사가 잘됐어."구월주공은 재건축을 통해 9천 세대에 가까운 대단지로 변했고, 상인천여중이 있던 곳에는 상인천초등학교가 들어왔다. 길병원은 본관을 중심으로 확장해 구월동에 '의료 타운'을 형성했다.할아버지는 도시가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매제가 명절 때면 소래에 가서 고향 사람들을 만나고 했는데, 지금은 다 개발되고 없어지지 않았어? 요즘은 명절에 갈 곳이 없대. '형님은 고향이 있어 부러워요'라고 하더라고. 구글 지도로 고향(평남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을 봤더니 건물만 바뀌었지 마을 형태는 변하지 않았어. 지금 당장에라도 찾아갈 수 있지. 갈 수 있어." 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사진의 장소는 부평동중학교 앞 사거리다. 이 사거리 북쪽에 벽돌을 만드는 부평연와합자회사가 있었다. 황윤걸(85) 할아버지는 이 벽돌공장에서 모래와 흙을 덤프트럭에 싣는 일을 했다. 인천 부평과 경기도 부천 경계에 개울이 있었고, 그곳에서 목욕도 했었다고 한다. 황윤걸 할아버지가 1955~1957년 당시 벽돌공장 생활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1980년대 부평연와합자회사 벽돌막 모습. /부평역사박물관 제공황윤걸 할아버지가 부평연와합자회사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 첫 번째가 황윤걸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1955년 9월 군에서 제대한 후 1957년 3월까지 부평 벽돌공장에서 일했다. /황윤걸 할아버지 제공

2017-12-20 목동훈

[zoom in 송도]'이름 바뀌는' 송도 컴팩스마트시티

시설 정체성 이해 어려워 지역 특성 담긴 명칭 변경1층 근대도시관으로 리모델링… 2·3층 단계적 공사인천모습 변화상등 다양한 체험·교육프로그램 준비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컴팩스마트시티가 '인천도시역사관'으로 새롭게 출발한다.컴팩스마트시티는 2009년 9월 인천세계도시축전 당시 '인천도시계획관'으로 문을 열었다. 도시축전이 끝난 후 '컴팩스마트시티'로 명칭이 변경됐으며, 2014년부터 인천시립박물관이 분관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시립박물관은 전시관 콘셉트를 '도시 인천의 역사와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설정하고 명칭을 인천도시역사관으로 변경했다. 새 명칭은 '인천시 행정기구 설치 조례' 개정안이 공포되는 19일부터 사용하게 된다. 시립박물관 배성수 컴팩스마트시티부장은 "전시관 이름만 봐서는 이곳이 무슨 공간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었다"며 "전시관의 정체성을 고민해왔고, 그 차원에서 명칭 변경을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인천도시역사관은 근대도시관(1층), 현대도시관(2층), 도시생활관(3층)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1층을 근대도시관으로 만드는 공사는 최근 완료됐다. 내년에는 2층, 2019년에는 3층 전시관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된다. 1층 전시관은 인천이 근대도시로 출발했던 1883년 개항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인천의 공간 변화와 도시역사를 다루고 있다. ▲개항도시 인천(1883~1906) ▲감리서 폐지와 이사청 설치(1906~1914) ▲진센(Jinsen)과 인천-도시의 양면(1914~1936) ▲군수공업도시 인천(1936~1945)으로 구분돼 있다. 일본인 등 외국인이 만든 '조계지'가 아닌, 조선인이 생활한 '내동'을 중심으로 개항장을 봤다는 점이 특별하다. 배 부장은 "개항장을 조계지로만 보다 보니 외국 사람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문제가 있다"며 "감리서가 있었던 내동에 중점을 뒀다. 강제 개항이 아니더라도 우리 스스로 충분히 근대화할 수 있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개항도시 인천' 전시 공간은 '개항장의 중심 내동'과 '그들만의 공간 조계'로 분리돼 있다.근대전시관에는 1879년 7월1일 설치된 화도진과 8개 소속 포대 등의 방어시설을 그린 관방지도인 '화도진도', 감리서 관련 문서, 해관 사진, 조선인 부두 위치도, 인천에서 생산된 군수품, 1907년 화재 감시를 위해 자유공원에 설치된 사이렌 탑 등이 전시돼 있다. 원본, 모형, 사진 등 다양한 형태로 돼 있다.시립박물관은 2층 전시관 일부 공간을 리모델링해 '작은전시실'을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현재 '나도 인천도시계획가' 전이 열리고 있다. 내년에도 인천도시역사관에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올해에는 와글와글 박물관(100년 전 인천의 역사와 문화 체험), 고고박물관(도시계획을 중심으로 한 전시·체험), 수요다과회(인천사람의 소울푸드), 컴팩인문아카데미(한국 근대공원 산책)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됐다.배 부장은 "하루 평균 200~300명이 방문하고 있다. 접근성이 좋고 공간이 넓다는 장점이 있다"며 "2층과 3층 리모델링 등 콘텐츠를 강화해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인천도시역사관은 연수구 인천타워대로 238번지에 있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1월1일과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에는 문을 열고, 그 다음 날 쉰다. 관람료는 없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12-17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한국조지메이슨大 첫 졸업생 탄생

■한국조지메이슨大 첫 졸업생 탄생송도국제도시 인천글로벌캠퍼스에 있는 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가 졸업생을 배출했다.한국조지메이슨대는 지난 16일 제1회 졸업식을 개최했다. 올해 한국조지메이슨대를 졸업하는 학생은 회계학과 1명, 국제학과 4명, 경영학과 6명 등 총 11명이다.한국조지메이슨대 스티븐 리 총장은 "한국조지메이슨대가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며 "대학에서 습득한 리더십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글로벌 사회의 중요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한국조지메이슨대는 미국 버지니아 주의 최대 주립대학인 조지메이슨대의 글로벌 한국캠퍼스다.한국캠퍼스 학생들은 졸업 시 미국 조지메이슨대와 동일한 졸업장을 취득하게 된다.■송도 등 문화행사 매우만족 72%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송도·청라·영종에서 열리는 문화 행사와 관련해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72%가 '매우 만족 또는 만족한다'고 했다. '불만족'은 3%, '매우 불만족'은 1%에 그쳤다.'문화 행사가 인천경제자유구역 인지도 제고에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에는 '매우 그렇다 또는 그렇다'는 응답 비율이 64%를 기록했다.송도국제마라톤대회 만족도 조사 결과는 매우 만족 22%, 만족 51%, 보통 25%, 불만족 1%, 매우 불만족 1%로 나왔다.인천경제청은 송도국제마라톤대회, 인천송도불빛축제, 미래도시그리기대회 등 7개 행사 참가자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으며, 1천862명이 응답했다.■'스마트시티 모델' 마련 연구용역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인천경제자유구역 산업특화형 스마트시티 서비스 모델'을 마련하고자 연구용역을 추진한다.연구용역은 인천경제자유구역의 스마트시티 비전을 수립하는 것으로, 5개월 동안 진행된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은 공공 기반시설 위주의 '유시티'에서 민간과 협업이 가능한 '스마트시티'로 발전해야 하는 전환기에 있다.인천경제청은 이번 용역에서 인천에 특화된 스마트시티 모델을 발굴한 뒤, 내년 예정된 국토교통부의 스마트시티 실증단지 R&D 사업 공모에 참여할 계획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12-17 목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