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8]평안남도 강서군 봉황리 출신 황윤걸 할아버지(上)

한달간 환자 시늉하는 등인민군 되기 싫어 도망다녀노동당원인 담임선생님과전세 따라 서로의 피신 도와사범학교 들어가 신분 세탁교사 생활하다 월남 성공취라도 평남부대 대원으로환경 열악 위험한 작전수행가족들 두고 내려온 탓전쟁 끝나면 빨리 돌아가려고향 인근 부대에 잔류전쟁이 길어질 줄도 모르고1953년 6월 용유도에 도착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황윤걸(85) 할아버지. 1951년 11월 고향에서 피란을 떠났는데, 한국휴전협정 한 달 전에야 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1951년 겨울과 1953년 여름 사이의 오랜 기간, 황윤걸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인민학교 교사 생활, 유격대원 활동 등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 같았다.황윤걸 할아버지는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18살이었다. 인민군이 되기 싫어서 도망 다녔다.한 번은 '인민군 동원 지도원'과 싸움이 붙었고, 목 부위를 크게 다친 것처럼 속여 한 달 동안 환자 시늉까지 했다.부친은 인민군을 속이기 위해 3일마다 한 번씩 동네 의원에 가서 아들의 약을 지어오기도 했다.9월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어졌다. 유엔군과 국군이 황윤걸 할아버지 마을을 거쳐 북쪽을 향해 진격했고, 할아버지는 치안대원으로 활동하게 됐다.어느 날, 고등학교 담임선생이 집으로 찾아왔다. 노동당원이었던 담임선생은 오갈 데 없는 신세였다.북으로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피란을 가자니 도중에 적군의 공격을 받을 거 같고, 자기 집으로 가자니 잡힐 것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황윤걸 할아버지는 "담임선생님은 내가 빨갱이가 아닌 것을 알고 계셨거든. 낮에는 내가 인민군에 안 가려고 파놓은 땅굴에, 밤에는 우리 집 사랑방에 모셨다"고 했다.담임선생은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떠나기를 원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치안대에서 통행증을 여러 장 끊어 담임선생에게 줬고, 담임선생은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그때는 통행증이 있어야 했어. 치안대 직인이 찍힌 통행증 5~6장과 함께 보자기에 고구마와 밤 등 먹을거리를 싸서 드렸지."운명의 장난인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됐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치안대원으로 활동한 전력 때문에 산에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집에서 연락이 왔다. 담임선생님이 찾아왔단다."집에 갔더니 안방에 담임선생님이 있는 거 아니겠어. 내가 치안대 생활을 했으니 걱정이 된 모양이야. '사흘 있다가 다시 올 테니 인민군에 잡히지 말고 있어'라고 하시고 떠나셨지."이틀 만에 담임선생이 다시 왔다. 담임선생은 "인민군에 잡히지 않으려면 사범전문학교에 들어가 교사가 되어야 한다"며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할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신분 세탁'을 하기로 한 것이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담임선생 추천으로 1951년 3월 인민교원양성소에 입학했다."학생이 40~50명 정도 됐어. 그 당시에 강의실이 어디에 있어, 동네 교회에서 수업을 받았지. 8월까지 교육을 받고 9월에 발령받았어. '어느 학교에 가겠냐'고 물어보기에 (치안대 활동 전력이 탄로 날 수 있어서) 고향에서 먼 곳을 희망했지."할아버지는 한 인민학교 4학년 담임을 맡게 됐다. 이름만 학교이지 교실도 없고 학생도 몇 안 됐다."1학년은 어느 부락, 2학년은 어디 교회 등 지역을 정해주는 거야. 나도 교회에서 수업을 했는데, 학생이 있어야지. 오전에는 수업하고 오후에는 학생을 모집하러 다녀야 했어."그렇게 2개월 정도 생활했다. 그러던 중 집에서 연락이 왔다. 월남하려면 며칠까지 어디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학교 교감에게 "주민등록 주소를 인민교원양성소에서 학교로 옮기러 간다"고 거짓말을 둘러대고 약속한 장소로 떠났다. 접선 장소는 인민교원양성소 반대편에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산을 넘어 먼 길을 왔건만, 그곳엔 월남을 안내하기로 한 사람이 없었다. 길이 엇갈린 것이다."그날 월남을 돕겠다는 사람이 내가 안 온다고 누나네 집으로 찾으러 갔다는 거야. 그래서 그날 월남하지 못했어."월남에 실패한 황윤걸 할아버지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밤늦은 시간 험한 산을 다시 넘어 학교로 돌아갔다. 다시 기회가 왔다. 할아버지는 "날짜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10월28일 연락을 받고 다음 날 동창 집에서 만났다"며 "나 말고도 국군 패잔병 2명, 반공인사 등 10명 정도가 더 있었다. 해안가에 있는 지뢰를 피해 월남하는 배를 탔다"고 했다.엔진이 없는 작은 목선이었다. 밤 11시에 30명 정도가 배에 탔다. 배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 풍랑에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은 배는 다음 날 오후 8시께 섬에 도착했다. 진남포 남서쪽에 있는 '취라도'라는 섬이다."아침에 일어나니까 밥을 주는데, 안남미 밥이야. 석유 냄새까지 나서 먹을 수가 있어야지. 밥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아. 토할 거 같아서 세 끼를 굶었어."황윤걸 할아버지는 이튿날 심사를 받고 유격대원이 됐다. 동키 제9부대(평남부대) 대원이 된 것이다. 노인, 여성, 아이 등 노약자는 연대본부가 있는 황해도의 '초도'라는 섬으로 옮겨졌다. 동키 평남부대는 적지를 드나들며 식량 확보, 반공인사·피란민 구출, 인민군 주둔지 기습 등의 작전을 벌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한국전쟁의 유격전사'에 따르면 1951년 3월 중순 백령도에 동키 제9부대가 창설됐다. 평남 지방에서 온 치안대원 등 반공인사와 청년들로 구성됐다. 동키 제9부대는 미 제8군으로부터 식량, 무기와 탄약, 무전기 등을 받아 초도에 본부를 차렸다. 그리고, 취라도와 덕도 등에 파견대를 보내 작전을 수행했다.취라도에는 약 30명의 대원이 있었던 것으로 황윤걸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작전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식량은 안남미가 전부였는데, 겨울철에는 보급로가 끊겨 그마저도 먹기 힘들었다. 할아버지는 "소금이 반찬이었다. 새우젓이랑 밥을 먹으면 진수성찬"이라며 "담요가 부족해서 3명이 1장을 덮고 자고, 해안가에 떠내려온 나무로 불을 땠다"고 회상했다. 또 "피복 보급을 51년인가 52년에 처음 받았다. PW라고 적혀 있는 포로수용소 포로들이 입었던 옷이었다"고 했다.작전은 위험했다. 작전을 수행하다가 인민군에 잡혀 처형을 당하거나 적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은 경우도 많았다."저수지를 폭파하려고 대원들이 들어갔는데, 분대장이 인민군이 매설한 지뢰를 밟은 거야. 대원이 부상당한 분대장을 업고 오다가 또 '꽝'하고 지뢰가 터졌어. 분대장은 다리 하나를 잃고, 대원은 한 눈의 시력을 잃었지."1953년 4월께 덕도에서는 새로 지급된 무기(무반동포)를 시험하던 중 조작 미숙으로 오발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대원 1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안병기 대대장 등 5~6명이 중상을 입었다. 황윤걸 할아버지는 "초도에도 백령도 백사장처럼 비행장 같은 곳이 있었다"며 "안병기 대대장은 초도에서 남한으로 후송하던 중 비행기에서 숨졌다. 나중에 부대에 온 유품 손목시계에는 피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기억했다.평남부대에는 여성 대원도 있었다. 그녀들의 임무는 식사 준비, 빨래, 부상병 치료 등이다. 인천 동구 만석동에 사는 김찬일(86, 평남 강서군 함종면 계산리) 할머니도 평남부대원이었다. 황윤걸 할아버지와 비슷한 시기에 부모님 등 가족과 함께 취라도에 왔다. 김찬일 할머니는 "아버지가 치안대 활동을 해서 고향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며 "섬으로 내려와 대원들의 작전을 도왔다"고 했다. 또 "주먹밥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안남미는 부스러진다"며 "보급품이 부족해 탄띠를 풀어 남자 대원들의 속옷을 만들어줬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김찬일 할머니는 휴전 후 인천에 정착했다. 역전에서 짐 나르는 일, 이 집 저 집 다니며 허드렛일도 하고, 인천항 부두 앞에 떠 있는 원목의 껍데기를 벗겨 내다 팔기도 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1953년 6월 중순 미군의 LST(상륙함)를 타고 용유도 을왕리해수욕장 부근에 내린 것으로 기억했다. 한국휴전협정(1953년 7월27일) 무렵에야 남한으로 온 것이다. 할아버지는 동키 평남부대가 육군에 편입된 이듬해 2월까지 200여 명의 대원과 용유도에서 훈련을 했다.황윤걸 할아버지는 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 평남부대 전우회 D-9 1호 회원이다. "80년대 초반에 유격군연합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 사무실을 찾아가서 평남부대에서 왔다고 했더니, 평남부대는 아직 등록되지 않았다는 거야. 우리 부대 옆에 안용부대 D-12라고 있었어. 여기 회장인 안용호씨와 사무국장 변철준씨가 인우보증을 서 등록할 수 있었지."황윤걸 할아버지는 1954년 용유도에서 헤어진 전우들을 수소문해 찾아 모았다. 그렇게 해서 60여 명의 대원을 참전유공자로 등록해줬다. 이북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숨진 대원 등 전사자 9명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봉안하는 일에도 앞장섰다.황윤걸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조모, 부모님, 누나, 그리고 여동생 3명을 고향에 두고 혼자 월남했다. 고향과 가까운 섬에 주둔하면서 작전 수행을 위해 고향 근처를 드나들었지만, 집에는 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인민군에 잡히기라도 하면 할아버지는 물론 가족까지 위험하기 때문이다. 가족의 곁에 있으면서도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황윤걸 할아버지는 "취라도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동키 평남부대에 남아 있기로 했다"며 "전쟁이 끝나면 집에 빨리 돌아갈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때는 전쟁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고 했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황윤걸 할아버지는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봉황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한국전쟁 때 고향 근처 해변에서 목선을 타고 진남포 서남쪽에 있는 작은 섬 '취라도'로 내려왔다. 여기서 동키 제9부대(평남부대) 대원이 된 황윤걸 할아버지는 적지를 드나들며 작전을 수행했다. 동키 제9부대는 백령도에 창설됐으며, 황해도 '초도'에 연대본부를 뒀었다. 취라도는 '상취라도'와 '하취라도'가 있는데, 동키 제9부대 파견대는 '상취라도'에 있었다.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황윤걸 할아버지가 인민군이 되기 싫어서 도망 다닌 일, 인민학교 교사 생활, 동키 제9부대(평남부대) 대원 활동 등 한국전쟁 당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12-13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7]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 차학원 할아버지(下)

연평도 30㎞ 거리… 할아버지는 서쪽 온동리에 살아젓새우 많이 잡혀 말리거나 젓갈 담가 국내·외 유통외침 방어 진보 위치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 역할용매도 회담 앞두고 터진 '황태성 간첩사건'의 배경망둥어에 소주한잔으로 여생 보내 "신도가 제2 고향"차학원(76) 할아버지의 고향 용매도(龍媒島)는 해주만 어귀에 있는 섬이다. 과거부터 황해도 해주의 일부 지역이었던 용매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최소한 고려 때에는 살고 있었다는 것이 역사 기록에 남아 있다. 조선 중종(1531년)때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해주목(海州牧)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설치됐고 그 영역은 동쪽으로 평산부(平山府)까지 69리요, 용매량(龍媒梁)까지 95리다'고 했다. 용매도는 1938년 해주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황해도 벽성군이 만들어지면서 벽성군 소속이 됐다가 1945년 해방 후 미군정 치하에 놓이면서 경기도 연백군 소속이 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황해남도 청단군 영산리 소속이 됐다. 연평도와는 30㎞ 떨어져 있다.1942년생인 차학원 할아버지는 벽성, 연백 시절을 겪었고 지금은 청단군이지만 복잡한 이력이 귀찮은지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으니 '황해도 벽성군 청용면'이라 대답했다. 1986년 이곳 실향민들이 모여 만든 용매도민회도 회칙에 공식 명칭을 '황해도 벽성군 청용면 용매도민회'라 칭하고 있다.용매도는 동쪽의 진동리(鎭洞里)와 서쪽의 온동리(溫洞里), 섬 중앙의 한동리(寒洞里) 3개 마을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한동리 정상에 올라가 보면 진동산과 온동산이 황룡(龍)이 뒤틀어져 암룡과 숫룡이 맺어 있는(媒) 모양이라고 해 용매도라고 칭했다고 한다.할아버지는 온동리에서 살았다. 온동리는 300가구에 1천300여명이 사는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이었다. 온동 주위에는 크고 작은 섬이 있다. 여러 부속 섬 중에 육읍도(陸邑島)라는 섬이 있었는데 물이 빠지면 육지가 되는 곳이다. 겨울철에 아낙들이 건너가 며칠씩 굴이나 바지락을 캐오면 수입이 쏠쏠했다. 이곳은 여러 날 묵어가면서 일하는 곳이라고 해 '묵골'이라고 불렀다. 묵골은 바로 할아버지가 장봉도로 피란을 나오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묵골의 서남쪽으로 있는 귀염도, 소렴도에서는 주꾸미가 많이 잡혔다. 낚싯줄에 소라 껍데기를 매달아 바다에 던져 놓으면 주꾸미가 산란을 하러 소라껍데기에 들어가 잡혔다고 한다."묵골은 연평도 방향에 있는 조그만 섬이었는데 원래는 노인네 한두 분밖에 안 사는 작은 동네였어. 여자들과 어린애들이 망둥어도 잡고 상합도 잡으며 사는 조용한 섬이었는데 전쟁이 나면서 미군이 주둔하게 됐지."차학원 할아버지네는 조와 수수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는데 아버지는 가끔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 배를 부렸다. 할아버지는 "해산물이 흔하디흔했지만 그중에서도 젓새우가 가장 유명했지. 그때만 해도 마을 어르신들이 한강 마포나루까지 새우젓을 팔러 나가기도 했어"라고 말했다.용매도 앞바다 어장에서는 6~7월에 새우가 많이 잡혔다. 동아일보 1932년 7월 2일 자는 "해주군 청룡면 룡매도는 새우의 산지로서 해마다 생산고가 10여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이 막 새우의 어획 시기인데 금년도는 특히 기후의 순조로 예년에 없는 풍산(豊産)을 보게 되어 앞으로 생산 예상고가 평년보다 약 오할 이상이나 증가 될듯하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당시 일제의 부역 노동자 하루 평균 임금이 80전(1원=100전)이었으니 엄청난 생산량인 셈이다. 새우는 소금에 절여 젓갈을 담가 먹는 것도 일반적이었지만 용매도 사람들은 새우를 쪄서 말린 뒤 중국과 일본 등지에 수출하기도 했다. 말린 새우는 가루로 만들어 '미원'처럼 국물에 넣어 먹으면 맛이 그만이었다고 한다. 용매도에는 1920~30년대 새우 건조 작업장이 40~50군데 생겨나기 시작했다.용매도의 새우젓은 한강 마포나루를 통해 육지로도 유통됐다. 마포는 양화진, 서강과 더불어 조선 초기 한강 하류의 항구로 발전했다. 그 마포는 삼남지방의 양곡이 모이는 곳이었고, 서해안의 소금배가 드나드는 곳이었다. 이곳에 황해도와 인천, 강화 지역의 새우젓 배가 본격적으로 드나들기 시작한 때는 일제시대 무렵이다. 서울시가 1985년 발간한 '한강사(漢江史)'는 "경인선의 부설로 한강의 선운(船運)이 활발치 못하게 되었으나 일제 때 이곳 마포는 서해에서 유입되는 새우젓 배의 선창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6·25 동란으로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이 휴전선으로 인하여 서해에서 마포강으로 배가 직접 들어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연평도 어장과 가까워 조기가 많이 나 조기잡이 배도 마포를 오갔다.용매도는 과거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큰 역할을 했다. 외침을 방어하는 진(鎭)이나 보(堡)가 용매도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해주목 내에는 '진보(鎭堡)'가 있었는데 그중 '용매량진'은 섬 가운데 있었고, 옛날에는 만호(萬戶)를 두었는데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가 한 명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만호는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된 진을 다스리는 무장을 일컫는다. 조선조 수군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예하에 첨절제사(僉節制使)가 큰 진을 관장했다. 그 밑에 동첨절제사와 만호가 관할하는 진이 있었다. 용매도에는 봉수(烽燧)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해주와 연평도를 이어주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이 같은 군사 지리적 이점 때문에 한국전쟁 때도 남북은 용매도를 두고 끝까지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휴전을 앞두고 철수령이 내려지면서 북한의 차지가 됐다.이런 용매도에서 휴전 이후 최초의 남북회담이 열렸다는 것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남북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있기 전 첫 비공식 회담을 용매도에서 가졌다. 지금도 공식 기록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비사(秘史)처럼 전해지지만 일명 '황태성 간첩사건'의 배경을 설명할 때 꼭 등장하는 것이 '용매도 회담'이다. 할아버지는 고향 용매도를 이야기할 때 남북회담 이야기를 꼭 써달라고 당부했다.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과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자료실장이 황태성 간첩사건의 전모를 밝힌다며 2015년 출간한 책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에 용매도 회담 얘기가 나온다. 이 책은 황태성에 대한 자료와 그의 친손녀인 황유경씨 등 유족을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책에 따르면 1961년 9월 28일 첩보부대 HID 소속 강성국 중령과 김석순 대위가 배를 타고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용매도에 갔다. 이들은 사실 '가짜 군인'으로 각각 광주와 서울에서 시의원을 지낸 민간인이었다. 이들은 첩보 훈련을 받고 회담 전 북한의 의중을 떠보는 임무를 수행하러 북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대표성을 확보하지 못한 회담은 성과가 없었고 빈손으로 돌아오게 됐다.1997년 용매도민회가 낸 용매도지(龍媒島志)에는 용매도회담의 장면을 각색해 극적으로 꾸몄다. 여기에는 비공식 회담의 합의사항도 나오는데 '서울과 평양에 각각 상대방의 비공식 대표부를 둔다', '대표위원의 교환은 유도(강화도 앞의 한강하구 섬)에서 한다' 등의 내용이 나와 있다.반대로 북한은 경북 상주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형 박상희와 죽마고우였던 황태성을 남파해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접촉을 시도했다. 용매도 회담 이전부터 남한에 와있던 황태성은 1961년 10월 15일 박상희의 부인 조귀분, 그러니까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장모를 통해 고위층과 접촉하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종필은 대공수사 인력에게 검거를 지시했고 황태성은 간첩 혐의로 체포돼 처형됐다. 황태성은 재판에서 자신의 남하(南下)를 "남한에서 간 (용매도 회담)밀사에 대한 환례(還禮)"라고 주장했지만, 2015년 중앙일보가 엮은 '김종필 증언록'에서 김종필은 이를 "육군첩보부대(HID) 서해지구 파견대가 정보수집을 위해 자체적으로 벌인 대북 공작"으로 규정했다. 또 "중앙정보부와는 관계가 없다"고 못박았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용매도에서 비밀스러운 남북 접촉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차학원 할아버지는 용매도에 산 기억이 많지는 않지만 고향을 잊어본 적이 없다. 직장을 잡아 인천에 나와 살면서도 늘그막에 굳이 배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 신도에 자리 잡은 것도 어쩌면 섬 용매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고향 사람들과 함께 일군 신도4리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는 틈틈이 낚시로 잡은 망둥어를 깨끗이 손질해 빨랫줄에 널어 바닷바람에 말리는 일이 낙이다. 잘 말린 망둥어를 노릇노릇 구워 소주 한 잔 걸치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함께 피란 나온 어르신들이 점점 돌아가시고 1세대가 사라지면서 고향에 대한 기억도 사라지고 있지만, 나라도 어르신들에게 들은 얘기를 섞어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이제는 신도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여생을 보내려고."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차학원 할아버지는 300가구 1천300여명이 사는 용매도 서쪽에 위치한 온동리에 살았다. 사진은 동쪽 진동리 마을 전경.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온동리 거무녕뿌리에 있는 마을 주민들. 뒤에 보이는 섬이 소렴도다. /용매도지 제공용매도 앞바다에서 잡은 젓새우를 말리는 건하장 모습. /용매도지 제공

2017-12-06 김민재

[zoom in 송도]'송도 버드 아일랜드' 내년 상반기 착공

멸종위기종 저어새등 대체서식지11공구 동쪽 바닥면적 5600㎡규모실시설계 용역 완료 2020년 준공생태자원 콘텐츠·관광지 활용기대'송도 버드 아일랜드(Bird Island)' 조성사업이 내년에 본격화한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 버드 아일랜드 조성사업(1단계) 실시설계 용역을 완료하고 내년 상반기 공사를 시작한다고 3일 밝혔다. 이 사업은 송도 11공구 앞바다에 인공섬 형태의 조류 대체 서식지를 만드는 것이다.버드 아일랜드를 만드는 1단계 사업과 그 주변에 먹이터, 염생습지, 조류 관찰대, 완충녹지 등을 조성하는 2단계 사업으로 계획돼 있다. 1단계 사업은 2020년 준공을 목표로 진행된다. 2단계 사업은 송도 11공구 공유수면 매립과 송도 워터프런트 조성계획을 고려해 사업 시기가 결정될 예정이다.■조류 서식지로 인공섬을 조성하는 첫 사례인천경제청은 송도 11공구 동쪽 약 350m 지점에 바닥면적 5천600㎡, 노출면적 2천400㎡ 규모의 '버드 아일랜드'(1단계)를 조성한다. 공유수면 매립으로 갯벌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멸종위기종인 저어새 등 새들이 서식할 수 있는 인공섬을 만드는 내용이다. 바닥면적은 바닷물이 완전히 빠졌을 때, 노출면적은 만조 시 인공섬의 넓이를 말한다. 1단계 사업 공사비는 72억원으로, 이 중 13억원은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돼 있다.인천경제청은 내년 상반기에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공사 기간이 24개월인 점을 고려하면 2020년 준공이 가능할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예상하고 있다.버드 아일랜드 조성공사는 '공사용 도로'를 설치해 인공섬을 만든 뒤, 그 도로를 없애는 방식으로 추진된다. 인천경제청은 저어새 서식을 유도하기 위해 새 모형을 제작·설치하고, 저어새가 둥지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나뭇가지와 풀 등)를 공급할 계획이다. 또 유지관리계획을 수립해 서식 환경 변화를 점검하고 방해 요인을 제거할 방침이다. 버드 아일랜드 조성은 송도 11공구 공유수면 매립 환경영향평가 협의 조건이며, 인공섬을 조류 대체 서식지로 조성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위치도 참조■'생태자원 콘텐츠' 활용 기대감인천경제청은 버드 아일랜드가 송도국제도시의 중요한 생태자원 콘텐츠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인천경제청은 실시설계 용역을 진행하면서 송도 11공구 지역의 조류 서식 현황을 조사했다.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월 2회 조사했는데, 총 48종 1만9천352개체가 관찰됐다. 민물도요, 큰뒷부리도요, 혹부리오리, 괭이갈매기, 알락꼬리마도요 등이 많았다. 조사 지역을 송도 6~11공구, 남동유수지, 오이도, 시화호, 시흥갯골 등 송도 일대 전체로 확대했을 때는 물닭, 홍머리오리, 흰죽지, 청머리오리, 민물도요 등 총 90종 9만5천362개체가 관찰됐다. 저어새의 경우에는 남동유수지(441개체)에서 가장 많이 관찰됐다. 다음은 오이도와 시화호, 송도 갯벌 일대, 시흥갯골 및 관곡지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도요·물떼새류는 송도 갯벌(1만3천341개체)에 가장 많았다.인천경제청은 버드 아일랜드 모니터링 활동을 통해 저어새의 생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보전·관리 및 생태 교육에 활용할 계획이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새들에게 안정적인 서식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송도의 중요한 생태자원 콘텐츠가 될 것"이라며 "조류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많이 찾는 조류 생태 관광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 송도국제도시 11공구 앞바다에 인공섬 형태의 조류 대체 서식지를 만드는 송도 버드 아일랜드 조성사업이 본격 시작될 예정이다. 송도 공유수면 매립으로 갯벌이 사라지고 있어 멸종위기종인 저어새 등 송도 갯벌을 찾는 새들이 서식할 수 있는 인공섬을 만드는 사업이다. 사진은 송도 11공구 매립 전에 갯벌에서 먹이 활동을 하고 있는 저어새들. /경인일보 DB

2017-12-03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목재산업박람회' 7일부터 나흘간 송도컨벤시아

■'목재산업박람회' 7일부터 나흘간 송도컨벤시아'2017 대한민국 목재산업박람회'가 7일부터 나흘간 송도컨벤시아에서 진행된다.이 행사는 목재산업 활성화를 위해 인천시와 산림청이 공동 주최하고 (사)목재산업단체총연합회가 주관하는 문화·전시·체험 행사로, 올해 주제는 '목재, 환경과 에너지를 아우르다'이다. 목재 산업계의 인력난을 해소하고자 한국산림복지진흥원, 산림조합중앙회 등 22개사가 참여하는 '산림 일자리 박람회'도 동시에 개최된다. 우드 스피커, 탁상시계, 모니터 받침대 만들기 등 목재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자세한 내용은 공식 홈페이지(www.woodexpo.kr)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등록을 신청하면 전시회 무료 참관 혜택을 받을 수 있다.■유타大 아시아캠서 9일 '캠퍼스 일일 체험의 날'송도국제도시에 있는 유타대학교 아시아캠퍼스는 9일 오전 10시 '캠퍼스 일일 체험의 날' 행사를 개최한다.참가자들은 유타대 아시아캠퍼스에 개설된 4개 학부(커뮤니케이션학·심리학·영화영상학·도시계획학) 전공 중 원하는 강의를 들을 수 있다. 또 유타대 아시아캠퍼스를 돌아보며 영어글쓰기센터 등 다양한 시설과 캠퍼스 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는 참가자에게 수료증과 함께 소정의 기념품을 주고, 희망자에 한해 일대일 맞춤형 입시 면담도 진행할 예정이다. 참가 희망자는 유타대 아시아캠퍼스 홈페이지에서 사전 참가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하면 된다. 신청서에는 간단한 에세이 작성이 포함돼 있으며, 신청서 및 에세이 내용에 따라 참가 여부가 확정된다.■솔찬공원 케이슨제작장, 밤 12시까지 연장 개방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 케이슨제작장을 1일부터 밤 12시까지 개방하고 있다고 밝혔다.케이슨제작장은 센트럴파크와 더불어 송도의 대표적인 친수 공간으로, 인천대학교 송도캠퍼스 인근에 있다. 안전사고 발생 우려 등의 문제로 오후 10시까지만 개방했는데, 불편함을 제기하는 민원이 계속 발생해 개방 시간을 12월1일부터 자정까지 2시간 연장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외국인 김장담그기 체험-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최근 송도국제도시 등 인천경제자유구역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외국인 김장 담그기 및 전통문화 체험행사'를 개최했다고 3일 밝혔다. 이번 행사에 참가한 외국인 20여 명은 김치를 직접 만들고 전통부채에 민화를 그려보는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체험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경제청 제공

2017-12-03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6]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 차학원 할아버지(中)

1960년대 초반 사진 DP점 '미광사' 취직숙식 해결돼 현상·인화작업 배우며 일해입대후 통신소대 배치 엉뚱한 지시 받아'남양사'로 불법 파견… '사진 업무' 수행결국 군인신분 민간인 행세로 체포 당해이후 베트남전 앨범제작위해 파병길 올라맹호부대 전쟁사 담긴 앨범 아직도 '간직'제대후 DP점 운영하다 목재사에서 새삶용매도 출신 실향민 차학원(76)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얘기하려면 '사진'을 빼놓을 수 없다. 할아버지는 옹진군 북도면 신도4리 땅 9천900㎡을 맨손으로 일궜지만, 정작 농사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1960년대 초반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에게 땅을 맡기고 지인의 소개로 인천 도심으로 넘어가 싸리재에 있는 사진 DP점(店) '미광사(美光社)'에 취직했다. 'DP점'은 현상(現像·Developing)과 인화(印畵·Printing)의 영어 앞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현상은 필름에 담긴 잠상(潛像)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작업이고, 인화는 종이로 사진을 뽑는 과정을 말한다. 여기에 'E(확대·Expansion)'까지 더해 'DP&E'라고 했지만, 흔히 DP점이라 불렀다고 한다. DP점은 현상·인화만 하는 곳이라 가게에서 사진을 직접 찍은 뒤 현상·인화를 해주는 사진관과는 달랐다. 당시만 해도 사진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100년도 안 된 때였다. 할아버지는 먹여주고 재워주며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조건에 사진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뭍으로 나왔다.동아일보 사진부장 출신 최인진이 1999년에 낸 '한국사진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처음 사진이 들어온 것은 1880년대 개화파들이 서양 신문물에 관심을 가지면서다. 본격적으로 사진을 수용한 것은 1882년 개화기 청년을 이끌고 중국에 신문물을 배우러 간 영선사 김윤식(1835~1922)이 처음이다. 사진이 도입되기 전에도 '사진'이라는 말은 있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1168 ~ 1241)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19권에 '사진'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그는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상(像)에 대한 찬(贊)'이라는 시에서 '어찌 반드시 상을 그려야 하나'라는 글귀를 '하필사진(何必寫眞)'으로 썼다. '베낄 사'에 '참 진', "실물의 있는 그대로를 똑같이 그린다"는 뜻이다. 지금의 '사진(Photography)'이란 개념은 1863년 중국에 있는 러시아인 사진관에서 초상사진을 촬영한 조선시대 문인 이익의(1794~?)가 처음으로 썼다고 한다.초창기 사진기는 일명 '어둠상자(暗箱)'라고 불리는 대형 사진기였는데 검정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찍는 식이었다. 이후 사진기가 소형화 돼 휴대할 수 있는 크기가 됐다. 우리가 흔히 아는 '롤 필름' 사진기가 등장한 것은 1910년대 전후다. 미국의 코닥(Kodak)이 대중적이었고 독일의 라이카(Leica)가 최고급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DP점에서 일할 때는 캐논 카메라를 주로 사용했어. 라이카는 지금 자동차로 치면 벤츠급이었지. 돈 많은 사람만 카메라가 있던 시절이니까"라고 말했다.미광사는 지금의 중구 율목동 인천기독병원 인근 옛 상업은행 맞은 편에 있었다. 주인은 따로 있고 동료 1명과 함께 암실에서 현상과 인화 작업을 했다.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다른 DP점은 하인천 '신호양행', 경동의 '군성양행' 정도였다. 대부분 DP를 하면서도 인화지와 필름을 팔고, 사진 약품 따위를 함께 파는 가게였다.미광사의 주 고객은 자유공원의 '출사원(出寫員)' 10여 명이었다. 꽃 피는 봄이나 낙엽이 지는 가을, 눈 내리는 겨울이면 자유공원에서 출사원이 찍어주는 사진이 전부였다. 사진 인화는 명함판(2×3인치), 중판(3×4), 대판(5×7) 등 크기에 따라 가격이 달랐다. 사진을 인화하는 데 드는 비용은 중판 한 장에 20원 정도였지만 출사원은 손님들에게 몇 백 원씩 받으며 이문을 챙겼다. 수학여행철이나 소풍 때가 되면 할아버지는 DP점에서 이틀 밤을 새워가며 사진을 뽑아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미광사에서 몇 해 일하다가 군대에서 영장이 날아와 1964년 9월 육군 논산훈련소로 입대했다.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원주통신훈련소에서 '보이스병'(무전병) 교육을 수료해 자대에 배치됐다. 강원도 홍천에 있는 수도사단 1연대 본부 통신소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제대 날짜를 세기도 어려운 신병 시절 뜻밖의 임무가 찾아왔다. 당시 통신대장 서모 대위가 사진광이었는데 마침 할아버지가 사진 DP점 근무 경력이 있다는 걸 알았다. 서 대위는 갓 전입한 할아버지에게 휴가를 준 뒤 고향에 가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오라는 엉뚱한 지시를 했다. 신병이 자대 배치 일주일 만에 휴가를 받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서 대위는 할아버지를 차에 태워 부대 인근 사진 DP점 '남양사'로 데려갔다. 남양사 사장은 경찰 간부 출신으로 역시 사진에 취미를 두었다가 퇴직 후 아예 DP점을 차린 경우였다. 서 대위는 할아버지를 남양사에 파견 보냈다. 당시 통신부대는 민간 통신 교환 업무도 수행했는데 외부로 파견을 보냈다고 적당히 서류를 꾸민 것이다. 할아버지를 직원으로 부려 먹고 남양사 사장이 서 대위에게 어떤 대가를 지급했는지는 모를 일이다.처음에는 머리가 짧아 암실에서만 근무하다가 머리가 자라면서 대놓고 카운터에 자리 잡았다. 할아버지는 "여고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어. 당시 홍천여고에 사진을 찍으러 가기도 했는데 젊은 총각이라 인기가 좋았지. 월급을 안 받아도 편하게 생활을 하니까 나도 별다른 불만이 없었지"라고 회상했다.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할아버지가 군인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어느 날 밤 사단 사령부 감찰대에서 남양사에 들이닥쳤다. 늦은 밤 '똑똑'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감찰대원들이 할아버지를 체포해 지프에 태워갔다. 불법 파견돼 민간인 행세를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됐다. 서 대위도 공범 신세가 됐다.할아버지를 구원해 준 것은 남양사 사장이었다. 그는 홍천경찰서 경무과장을 지내다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공화당 관리장을 했다. 원래 정당은 면 단위 이하 행정구역에는 정당 기구를 둘 수 없는데 공화당은 면에 '관리장'을 두고 공공연하게 활동을 했다. 관리장이라는 완장을 찬 남양사 사장은 감찰대에 전화 한 통으로 할아버지를 꺼내왔다. "남양사 사장이 전화를 안 해줬으면 그날로 바로 영창에 갔겠지. 그때 관리장이 제일 '끗발'이 좋을 때였어. 서 대위도 징계를 안 받고. 옛날이야 그랬겠지만 지금도 뭐 뇌물이니 비리들이 많잖아."자대로 복귀한 할아버지는 1965년 9월 베트남 전쟁 파병(파월) 길에 올랐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베트남전쟁 연구총서'를 보면 수도사단은 1965년 월남파병 전투부대 1진으로 선정돼 그해 9~10월 베트남으로 떠났다. 수도사단은 부대 재창설 수준의 개편을 거쳐 '맹호부대'라는 이름으로 베트남에 병력을 보냈다. 총인원 1만3천672명의 대규모 병력이었다. 할아버지는 직접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무전기 등 통신장비를 관리하는 '기재계'에 소속됐다. 월남에 가서도 할아버지는 사진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공보실에서 파월기념 앨범을 만드는 데 할아버지를 차출해 간 것이다. 할아버지는 사진병과 각 중·소대 통신병이 사진을 찍어오면 필름을 현상해 인화한 뒤 한국으로 보냈다. 편집은 귀국한 뒤 마무리했다.할아버지가 보여준 흑백사진 앨범은 맹호부대 베트남 전사(戰史)의 축소판이었다. 파병 준비 훈련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여의도 환송식 장면, 부산항에서 가족과 헤어지는 부대원들의 모습, 베트남 '퀴논'에 상륙하는 장면과 전투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또 각 작전마다 사살 인원과 적 무기 노획 등 전과(戰果)를 사진과 함께 기록했다. 우리 군에 사살된 일명 '베트콩(월남민족해방전선)'의 시신 사진도 모자이크 처리 없이 날것 그대로 담긴 것이 인상적이었다. 사진에는 "1965. 10. 28. 수색중대 전방 10m까지 전급하여 사살된 베트콩 2명"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또 네이팜(Napalm)탄의 공중폭격으로 정글과 마을이 불타는 장면, 헐벗은 전쟁 난민들의 사진은 전쟁의 참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이밖에 1960년대 전쟁 속 베트남의 일상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사진도 많이 수록됐다. 1966년 6월 24일 앨범 편집후기를 쓴 앨범 편집자 권병주 중위는 "우리들이 흘린 땀과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고 또 앞으로의 영광스런 역사발전에 밑거름이 되리라. 이런 뜻에서 미흡하나마 이 조그마한 파월기념앨범이 지닌 뜻은 크다"고 했다. 이 앨범은 파월 1진 맹호부대 1연대 간부와 병사들 전원에게 배포됐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그 앨범을 가보처럼 간직하고 있다.1967년 12월 월남에서 돌아온 할아버지는 다음 해 3월 제대했다. 할아버지는 제대하면 남양사에서 일해달라는 주인의 말에 다시 홍천으로 갔다. 그리고 남양사 주인의 사촌 처제를 소개받아 결혼해 홍천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남양사에서 일하던 할아버지는 1973년 드디어 DP점을 따로 차려 독립했다. 말은 독립이었지만 사실 남양사의 자회사 개념의 사업이었다. 홍천 버스 회사 한편에 사무실을 내고 필름이나 인화지, 만년필을 팔면서 사진 DP도 했다. 할아버지 가게에는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밤에 남양사에서 작업을 한 뒤 낮에 손님들에게 사진을 줬다. 하지만 내기 당구와 노름에 한눈을 팔면서 문제가 생겼다. 가게를 자주 비우다 보니 손님이 줄기 시작했고 결국 사업을 접고 인천으로 돌아와야 했다. 할아버지는 인천으로 와서 선창산업이라는 목재회사에 취직해 통나무 제재 일을 했다. 이후 삼미사 원목반에 들어가 나무 수입 관련 업무를 했다. 삼미가 망하면서 주식회사 중동이라는 목재사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할아버지는 60세에 정년퇴직을 하고 5년간 촉탁직으로 더 일했다.할아버지는 지금도 틈만 나면 북도면 신도4리 집에서 일출 사진을 찍는다. 영종도에서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한 해가 할아버지네 집 앞의 나무에 걸리는 때가 포인트다. 사진 DP점을 했지만 정작 사진기에 대한 욕심은 없어 조작이 간단한 스마트폰이 최고의 사진기란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차학원 할아버지가 근무했던 맹호부대 1연대 본부 통신소대 단체 사진. /차학원 할아버지 제공차학원 할아버지가 맹호부대 파월기념 앨범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맹호 파월부대 1진이 1965년 10월 베트남 퀴논 해변에 상륙한 직후 찍은 사진. /차학원 할아버지 제공차학원 할아버지가 홍천에서 사진 DP점을 했을 당시 인화한 사진 중 하나. 반공의식을 다지는 1970년대 군민승공대회 모습이다. /차학원 할아버지 제공차학원 할아버지가 DP점 취직을 위해 북도면을 떠나 인천으로 가는 길에 찍은 부두 사진. /차학원 할아버지 제공할아버지가 인화한 사진으로 만든 맹호부대 파월기념 앨범.

2017-11-29 김민재

[zoom in 송도]'송도 워터프런트 조성사업' 진행 상황은

방재기능·수질개선 위해선 필수경제성 문제 논란 사업일정 지연수로모양 ㅁ자 → ㄷ자 변경 불구송도 11공구쪽 별도로 물길 추진인천 송도국제도시 주요 사업 가운데 '워터프런트 조성'이 있다. 송도 주민들의 숙원 사업이기도 하다. '송도 워터프런트 조성사업'이 어떤 내용이고 어떻게 추진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주민이 많다. '경제성 문제'에 발목을 잡히면서 사업 추진 일정과 방식 등 조성계획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송도 워터프런트 조성사업의 진행 상황을 질의응답 형태로 정리했다. 답변은 최근 인천경제자유구역청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했다. ┃사업계획도 참조- 송도 워터프런트 사업은."쉽게 설명하면, 송도국제도시에 물길을 만드는 사업이다. 기존 수로와 호수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물길을 만들어 수질 개선, 친수 공간 조성, 방재 기능 강화 등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마련해 관광산업을 활성화하겠다는 취지도 있다. 수로 길이와 너비는 각각 16㎞, 40~300m다. 면적으로는 5.33㎢가 된다. 물길 주요 지점에는 수변가든, 수변로드, 인공해변, 수상터미널, 교량 등이 설치된다. 총 사업비는 6천215억 원이며, 이 중 설계비 18억 원과 시설비 50억 원 등 68억 원이 내년에 투입된다. 사업 기간은 2027년까지다. 2012년 상반기에 워터프런트 타당성 용역을 추진하고, 2013년 2월부터 2014년 8월까지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했다. 작년 3월 시작한 기본설계는 57%(올 10월 기준)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경제성 문제'가 불거졌고, 현재 타당성 재조사를 진행 중이다."- 워터프런트는 왜 필요한가."방재 기능이 강화된다. 유수지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용량을 확보하고 수문을 설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집중호우 발생 시 재산·인명 피해를 예방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또 하나의 기능은 수질 개선이다. 현재 송도에서는 악취와 녹조 등의 문제가 간간이 발생한다. 물이 순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워터프런트 조성사업은 연결수로 및 수문 설치를 통해 수(水)순환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인천은 바다와 접해 있는 '해양도시'이지만, 친수 공간이 매우 부족하다. 안전하고 깨끗한 물가에 다양한 시설을 조성해 시민들이 직접 바닷물을 접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게 워터프런트 조성사업이다. 관광산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 관광객 유치 등 지역경제 활성화도 기대된다."- 수로가 원안(ㅁ자)과 달리 'ㄷ'자로 축소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결론부터 말하자면, 최종적으로 'ㅁ'자 수로가 된다. 인천경제청은 지난 2014년 기본계획을 수립할 때 수순환 체계 등을 고려해 'ㅁ'자로 계획했다. 'ㄷ'자 모양의 수로를 만들고, 송도 11공구 자체적으로 수로를 만들어 'ㅁ'자 수로를 완성하는 방안이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경제성 문제'가 불거지면서 사업이 지연됐다. 인천경제청은 불필요한 논란을 해소하고 조속한 사업 추진을 위해 기본계획상 수로 모양을 'ㅁ'자에서 'ㄷ'자로 수정했다. 하지만 원안(ㅁ자)과 달라진 것은 없다. 송도 11공구 자체 기반시설로 수로를 건설하기 때문에, 'ㅁ'자 모양이 완성된다."- 앞으로 추진 일정은."현재 타당성 재조사와 기본·실시설계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내년 상반기에 '타당성 조사' '투자 심사' '설계' '각종 영향평가' 등의 절차가 완료되면, 하반기 착공이 가능하다. 내년 하반기 착공을 위한 사업비 50억 원도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했다. 내년 하반기에 착공할 수 있도록 모든 행정력을 집중할 방침이다. 시민을 위한 시설이기 때문에 수로·산책로·시설의 세심한 부분까지 고민해서 설계하고 있다. 사업설명회를 열어 시민들 의견도 청취할 계획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 송도국제도시에 물길을 만들어 안전하고 깨끗한 물가에 다양한 시설을 조성, 시민들이 직접 바닷물을 접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송도 워터프런트 사업. 송도 11공구 자체 기반시설로 수로를 건설해, 'ㅁ'자 모양이 완성될 예정이다. 송도 워터프런트 1단계 북측 수로 현재 모습.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11-26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벨기에 국회의원단, 경제청·인천글로벌캠퍼스 방문

■벨기에 국회의원단, 경제청·인천글로벌캠퍼스 방문인천경제자유구역청(청장·김진용)은 벨기에 국회의원단 및 주한 벨기에 대사가 지난 24일 인천경제청과 인천글로벌캠퍼스를 방문했다고 26일 밝혔다.아드리앙 테아트르 주한 벨기에 대사와 로엘데세인, 얀센 베르네르, 베르뮬렌브레흐트 등 벨기에 국회의원들은 인천경제청 지창열 차장을 만난 자리에서 벨기에와 인천이 협력하기를 원했다. 벨기에 아스트리드 공주는 지난 6월 벨기에 겐트대학교가 입주한 인천글로벌캠퍼스를 방문해 유정복 인천시장과 교류 협력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지창열 차장은 "인천은 짧은 시간에 세계적 도시로 발돋움한 저력을 가진 도시다. 이번 국회의원단의 방문을 계기로 앞으로 더욱 다양한 분야에서 벨기에와 협력 모델을 개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했다.벨기에 국회의원단은 지창열 차장 면담 이후 인천경제청 홍보관과 스마트시티 운영센터 등을 둘러봤다. ■'국제기구 - MICE 커리어 페어' 840건 상담 등 성황인천시는 지난 17일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2017 국제기구-MICE 커리어 페어'에 1천200여 명의 참가자가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고 밝혔다.올해 3회째를 맞은 이번 커리어 페어는 인천시가 외교부와 공동으로 개최했으며, 국내 소재 주요 19개 국제기구가 참여했다. 진로·채용 상담 부스에서는 약 840건의 상담이 이뤄졌다.MICE 분야에서는 '뜨거운 열정, 끝없는 도전'이라는 주제로 인천 출신 개그맨 박지선의 강연이 있었다. 더플랜 이주현 대표(PCO 분야), 이노션 김진문 국장(이벤트 분야) 등 총 5명이 멘토로 참가하는 토크콘서트도 진행됐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경제자유구역청을 방문해 지창열(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차장과 면담을 가진 벨기에 국회의원단과 주한 대사. /인천경제청 제공

2017-11-26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5]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 차학원 할아버지(上)

작은 섬에 황해도 육지 피란민들 몰려 새우잡이 배로 수송 1·4후퇴때 부모와 동생들 먼저 떠나고 곡식 지키다 노모 모시러 온 청년따라 노모 대신 '작은 배' 타고 南으로 거처 옮겨 다니느라 국민학교 4학년만 4번 다녀 천주교 지원으로 '공생조합' 만들어 수십만 평 간척"매일같이 돌·흙짐 지고 손바닥이 가죽이 되도록 땀 흘려" 인천서 정년퇴직 후 돌아와… 당시 땅은 다 팔고 없어인천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뱃길로 10분이면 닿는 섬 신도(信島). 일명 '삼형제섬'이라 불리는 옹진군 북도면 신도·시도(矢島)·모도(茅島) 중에 가장 큰 섬이다. 신도선착장을 빠져나와 차량으로 1㎞ 정도 달리면 나오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신도4리다. 올해 10월 기준 57가구, 인구 126명의 작은 마을 신도4리에 펼쳐진 너른 논과 폐염전이 실향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황해남도 청단군 용매도 출신의 실향민 차학원 할아버지는 고향을 잃고 신도에 정착해 맨손으로 땅을 일궈냈다. 1942년생 말띠, 일흔 여섯이다.전쟁은 할아버지가 국민학교 4학년 때 발발했다. 황해도 육지의 피란민들이 용매도로 밀려왔고 작은 섬은 난민촌이 됐다. 용매도 청년들은 '난민수송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새우잡이 배로 난민들이 원하는 곳까지 연평도, 덕적도, 영흥도 등 남쪽 섬과 군산, 목포 등지로 수송했다. 피란길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용매도민회가 1997년 발간한 '용매도지(龍媒島誌)'는 "선창가에서 배를 타려는 가족과 자식을 찾는 소리, 엄마 아빠를 찾으며 울부짖는 비명소리, 먼저 배에 오르려다 바닷물에 빠져 텀벙대며 허우적거리는, 어떤 여인은 젖먹이 아이를 해변가에 버려둔 채 홀로 배에 오르는 비정한 장면도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전쟁 직후 용매도에는 북한군이 들이닥치지는 않았지만 공산당 조직은 상주하며 사상 교육을 했다. 차학원 할아버지는 "선생들이 수업은 안 가르치고 맨날 '김일성 장군의 노래'나 가르쳤어. '장백산 줄기줄기 피 어린 조국, 우리는 자유조선 꽃다발에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내가 아직도 가사를 안 까먹었어"라고 말했다.고향을 지키고 있던 용매도 주민들은 1·4후퇴 때에야 피란 행렬에 동참했다. 차학원 할아버지네는 조와 수수 농사를 지었는데 수확한 곡식을 그냥 두고 가기가 영 아까웠다. 아버지는 먼저 어머니와 어린 두 동생을 피란시키고 꼭 다시 돌아오겠으니 곡식을 잘 지키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떠났다. 마을에는 '고향을 어찌 떠나냐'며 끝내 피란하지 않은 노인들이 주로 남았다. 이들은 밀물이면 바닷물이 차 섬이 되고 썰물이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용매도 끝자락 '묵골'이 안전하다며 이곳에 모여 살았다.차학원 할아버지는 할머니, 고모와 함께 아버지를 기다렸지만 뱃길이 막혔는지 몇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1951년 여름 용매도에 한 청년이 작은 배를 타고 홀로 나타났다. 노모를 두고 장봉도로 피란한 청년이 혼자 노를 저어 어머니를 모시러 온 거였다. 청년은 함께 떠나자고 했지만 노모는 고향을 못 떠난다며 버텼다. 아들과 한창 실랑이를 하던 이 노인은 어르신들 틈에서 그 광경을 보던 차학원 할아버지를 지목하며 "너는 어리고 남자니까 나 대신 이 아저씨를 따라가라"고 했다. 청년이 타고 온 배는 두 사람이 겨우 탈 수 있는 작은 배였다. 마을 주민 누구도 자기가 대신 타겠노라 나서지 않고 당시 11살이던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노모의 희생으로 가족이 있는 남한으로 가게 된 할아버지는 지금도 그 배를 잊을 수가 없다. 할아버지가 기자의 취재수첩에 그려 준 배는 앞이 뾰족했고 뒤에서 노를 젓는 식이었다. "밤새 물살을 갈라 장봉도에 도착했지. 날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도착했을 때 매미가 울더라고. 할머니가 오이 먹으면 멀미 안 한다고 오이를 챙겨주셨으니 여름이 확실해."장봉4리 해안가 백사장에는 피란민들이 한데 모여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난민촌에서 먼저 피란 온 외삼촌을 우연히 만났다. 황해도 피란민 대부분 인천 만석동에 모여 산다는 소문이 돌았다. 2달여 뒤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타고 만석동으로 무작정 떠난 할아버지는 수소문 끝에 괭이부리마을 움막집에 사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전쟁이 끝나자 아버지는 돈을 벌러 간다며 집을 나갔다. 할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이 있는 장봉도로 다시 건너갔다. 그러다가 신도에서 바다를 막아 땅을 만드는 피란민 정착사업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사업을 하는 신도4리로 이주했다. 그때 나이가 18살 무렵이었다고 한다. 그 어린 나이에 한군데 있을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국민학교를 4학년으로만 4번이나 다녔다. 용매국민학교 4학년 때 피란했고 아버지를 찾아 인천 만석동에 와서 축현국민학교 4학년을 다녔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러 다니느라 학교는 가는 둥 마는 둥 했다. 장봉국민학교도 4학년에 편입했다가 신도로 건너가느라 유급했다. 그리고 신도에서 와서야 국민학교를 제대로 마칠 수 있었다. 신도국민학교 12회 졸업생인 할아버지는 동창들보다 나이가 4~5살 많다.1996년 옹진군이 발행한 '옹진군향리지(甕津郡鄕里誌)'에 따르면 신도4리는 사람 왕래가 거의 없는 땅이었다가 실향민이 모여 살아 새로 생긴 마을이라 '신촌'(新村)이라고 불렀다. 실향민들은 먹고 살길이 없다 보니 난민정착사업소의 구제사업 인가를 받아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천주교구제회(NCWC·National Catholic Welfare Conference)는 개간을 하는 실향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곡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곳 신도4리뿐 아니라 영종도, 시흥 등에도 실향민들이 조합을 결성해 갯벌을 메웠다. 1958년 3월 31일 경향신문에는 "천주교구제회가 65개소의 농지개간, 염전개발 등 거주민 1만 세대에 대해 매달 쌀, 밀가루, 옥수수 1만 포대를 자활하는 날까지 지급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2006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발행한 '교회사연구(26집)'도 "NCWC가 1955년부터 미공법(PL) 480호에 따른 잉여 농산물 공여가 시작되면서 응급 구호에 사용됐던 양곡이 개간 사업, 정착 사업 지원용으로 사용돼 1955년부터 1963년까지 8억8만464파운드의 양곡이 지원됐다"고 설명하고 있다.신도4리 실향민들은 '공생조합'이라는 이름의 조합을 결성했다. 말 그대로 '서로 도우며 함께 살자(공생·公生)'는 의미였다. 당시 150가구 수백 명의 실향민이 제대로 된 도구도 없이 수십만 평의 땅을 만들었다. 한 집에 배당되는 땅은 3천 평씩이었다. 조합원들은 긴 제방을 쌓기 위해 맨몸으로 부딪혔다.지난 16일 오후 3시께 공생조합이 만든 신도4리 방조제를 할아버지와 함께 찾았다. 바다 너머 영종도가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보이는 곳이다. "싸리나무로 만든 지게를 짊어지면 양옆에서 두 명이 삽으로 흙을 퍼다가 쌓아줬어. '구루마'(손수레)도 없이 그저 지게로 옮겨 실어 '뚝매기(둑막이)'를 했지. 그때 천주교에서 구호를 많이 해주니까 천주교 신자들도 많이 늘어났어." 제방을 쌓는 데 필요한 돌은 당시 선착장이 있던 '하머리'와 섬 아랫자락에 있는 '고두구지'에서 가져왔다. 할아버지는 왼쪽을 바라보며 "저기 보이는 곳이 하머리인데 돌산에 다이너마이트를 박고 폭파해 돌을 떼어냈어. 도구도 없이 장갑 하나만 끼고 돌을 날랐어"라고 설명했다. 옹진군향리지는 "매일같이 나가 돌과 흙짐을 지고 갯벌에 빠지면서 등에 못이 박이고 손바닥이 가죽이 되도록 땀 흘려 일했다"며 그들의 처절함을 소개했다.땅을 만들고 나서는 3천 평씩 나눠 갖는 일이 문제였다. 산 쪽에 붙어 민물을 많이 머금은 땅은 좋았고 바닷가 쪽 땅은 소금기가 있어 땅의 질에 편차가 컸다. 결국 제비뽑기로 좋은 땅 하나 나쁜 땅 하나씩 2필지를 나눠 가졌다. 할아버지 땅의 토지 이력(5천94㎡)을 확인해보니 신규등록일(매립 준공)이 1964년 7월 3일이었다. 1989년 12월 발행한 '옹진군지(甕津郡誌)'의 염전 현황에 신도4리 염전의 준공일은 1964년 9월 19일로 돼 있다.신도4리 주민들은 새로 얻은 땅에서 농사를 지었지만, 썩 잘되지는 않았다. 일반 땅의 절반밖에 수확이 되지 않는 땅이었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은 염전 사업자에게 땅을 팔고 육지로 떠나기도 했다. 정착사업을 위한 매립이 끝나 천주교구제회의 양곡 지원도 끊겼다. 누구 산인지도 모르면서 아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다가 육지에 내다 팔았다. 나무를 한 짐 실어주면 보리쌀 한 됫박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직장을 구하러 인천으로 떠났고 바다에 나갔던 아버지가 신도로 들어와 농사를 지었다.할아버지는 그때 받은 2필지를 모두 팔았다. 1필지는 아버지가 일찍이 팔았고, 나머지 1필지는 할아버지가 5년 전 아들, 딸들 결혼시키느라 팔았다고 한다. 2017년 5월 기준 이 땅의 개별공시지가는 1평(3.3㎡) 당 22만5천원이다. 실거래가는 더 비싼데 5년 전 판 땅은 평당 42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피땀이 고스란히 배어 든 재산이다.할아버지는 직장을 구하러 인천으로 떠났다가 정년퇴직한 뒤 신도에 돌아왔다. 예전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집은 사라져 같은 용매도 출신 고(故) 서상호 할아버지가 살던 집을 고쳐 살고 있다. 기자가 할아버지와 인터뷰를 하던 중 마침 서상호 할아버지의 딸과 사위가 할아버지네를 찾아왔다. 이들 부부도 신도4리에 살고 있다. 텃밭 농사 얘기며 말린 생선 얘기를 하다가 할아버지가 "신문기자가 와서 예전에 공생조합 얘기하고 있었어…"라고 하니, 부부는 "우리 아버지가 그 얘기 잘 아시는데 지금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말을 받았다. 한때 150가구였던 실향민은 1990년대 후반 20여 가구로 줄었고, 지금은 할아버지네를 포함해 몇 가구 남지 않았다고 한다. "여든이 넘은 1세대 어르신이 살아 계시는데 귀가 어두워 공생조합에 대해 설명해 줄 사람들은 이제 남지 않았지. 아마 신도4리 실향민 1세대도 내가 마지막일 거야."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차학원 할아버지가 공생조합이 만든 옹진군 북도면 신도4리 방조제 위에 올라 실향민들과 함께 바다를 막아 둑을 세운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할아버지 뒤쪽으로 보이는 언덕이 방조제 쌓는 돌을 구하던 '하머리'지역이다.차학원 할아버지가 옹진군 북도면 신도4리 자신의 집에서 피란 생활과 신도4리에 정착하기까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차학원 할아버지가 용매도에서 장봉도로 피란할 때 탔던 배의 모양. 할아버지가 기자의 취재 수첩에 직접 그렸다.

2017-11-22 김민재

[zoom in 송도]'스마트시티' 해외수출 나선 인천경제청

플랫폼 개발 '저작·특허권' 획득IDC 도시행정분야 '최우수' 선정해외기업·정부 벤치마킹 러브콜태국 아마타그룹 기술협력 MOU송도국제도시 등 인천경제자유구역(IFEZ)에 구축된 '스마트시티'가 국내외에서 많은 관심과 호평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태국 최대 산업단지 개발회사 아마타(AMATA)그룹과 스마트시티 기술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등 해외 수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스마트시티 구축 공공서비스 향상스마트시티는 첨단 유비쿼터스 기술로 교통·방범·방재·환경·시설물 등을 통합 관리하는 미래형 도시 모델이다. 송도국제도시 유시티(U-City) 1단계 구축사업이 지난 3월 준공되면서 스마트시티 운영센터는 4월부터 송도와 청라국제도시를 통합 관리하게 됐다. 올해 말 영종하늘도시와 미단시티의 유시티 구축사업이 완료되면, 송도에 위치한 스마트시티 운영센터에서 IFEZ 모든 지역을 통합 관리할 수 있게 된다. 스마트시티 운영센터는 버스정보안내단말기를 통해 한국어·영어·중국어·일본어 등 다국어로 버스 도착 정보를 제공한다. IFEZ 곳곳에 설치된 CCTV를 활용해 거동 수상자를 탐지·조치하는 등 생활방범 서비스를 제공하고, 주요 교차로를 통과하는 차량의 번호를 수집한다.고층 건물 화재 감시, 환경 정보 수집·제공 등의 기능도 한다. 인천경제청에 따르면 수사기관에 CCTV 영상자료를 제공(열람 포함)한 것은 2014년부터 올 10월까지 1천353건에 달한다. CCTV 모니터링을 통해 특이 사항을 발견·조치하거나 민원을 처리한 건수도 611건이나 된다.■스마트시티 기술력 인정받아글로벌 시장 분석기관 IDC(International Data Corporation)는 지난 8월 IFEZ 스마트시티 운영센터를 도시행정 분야 최우수 프로젝트로 선정했다. IFEZ 스마트시티는 'GeoSmart Asia 2017 in Malaysia' 콘퍼런스에서도 전자지도·GIS를 활용한 소프트웨어 분야 최우수상을 받았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스마트시티 해외 수출 기술의 공신력을 확보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우리 정부도 IFEZ 스마트시티의 우수성을 인정했다. 행정안전부의 '전자정부 우수서비스 사례 발굴'에서 IFEZ 스마트시티 프로젝트가 우수 사례로 뽑혔다. IFEZ 스마트시티 기술력의 중심에는 '스마트시티 플랫폼'이 있다. 인천경제청은 스마트시티 플랫폼을 자체 개발하고 올 3월과 6월 각각 저작권, 특허권까지 획득했다. 또한 인천경제청은 송도·청라·영종의 스마트시티를 통합 관리함으로써, 전문기관에서 설계한 사업비보다 120억원을 절감했다.■벤치마킹 및 협력 요청 쇄도송도 G타워 문화동 3·4층에 있는 스마트시티 운영센터는 세계 각국의 공무원과 기업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첨단 기술을 적용한 'IFEZ 스마트시티 모델'을 벤치마킹하기 위해서다. 2014년 개소 이후 올 10월까지 누적 외국인 방문객 수는 8천413명이다. 여기에 내국인 방문객을 합하면 총 1만2천356명이 스마트시티 운영센터를 찾았다. ┃표 참조인천경제청은 지난 16일 태국 아마타(AMATA)그룹과 스마트시티 기술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교환했다. 이를 계기로 '도시개발(스마트시티 분야) 기술 협력 체계 구축'과 '인적·노하우 교류' 등에 협력하기로 했다. IFEZ 스마트시티 플랫폼과 국내 업체의 스마트시티 구축·운영 기술을 해외에 수출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다. 인천경제청은 베트남 주요 도시에 스마트시티 플랫폼을 수출하고자 타당성 용역을 진행하고 있으며, 인도에 수출하게 될 스마트시티를 기반으로 한 드론 환경모니터링 구축 R&D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인천경제청은 에콰도르, 콜롬비아와 각각 계약을 체결해 스마트시티 구축사업과 관련해 타당성 조사 용역 또는 컨설팅에 참여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등 다른 아시아 국가와도 스마트시티 수출에 관해 협의하고 있다.김진용 인천경제청장은 "스마트시티 서비스를 도시 공간에 융합해 시민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도시의 경쟁력을 높여 나가고 있다"며 "스마트시티 모델 해외 수출도 적극 추진하겠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송도국제도시 G타워 문화동에 있는 스마트시티 운영센터.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

2017-11-19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접근성 향상' 한국조지메이슨大 서울사무소 문열어

■'접근성 향상' 한국조지메이슨大 서울사무소 문열어인천 송도국제도시 인천글로벌캠퍼스에 입주해 있는 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는 지난 14일 서울 강남빌딩 16층에서 서울사무소 개소식을 개최했다. 서울사무소는 서울과 지방의 학생·학부모의 지속적인 요청에 따라 그들의 접근성을 높이고자 설립됐다.이날 행사에는 스티븐 리 한국조지메이슨대 총장,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 송희연 아시아개발연구원 이사장, 김현명 한국수입협회 부회장, 김석오 수원세관장, 정헌 전 SK가스 대표, 이인자 한국조지메이슨대 학부모회장 등이 참석했다.서울사무소는 ▲입학전형, 모집요강에 대한 상담 ▲지원 전략 및 최신 정보 자료와 전망 제공 ▲입학접수 등 학생·학부모·교사들을 위한 다양한 입학 업무를 제공한다.■경제청, 30일 G타워서 '송도바이오프론트 심포지엄'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오는 30일 오후 2시 송도국제도시 G타워 23층 아뜨리움홀에서 '2017 송도바이오프론트 심포지엄'을 개최한다.올해 심포지엄은 '바이오산업 동향과 업종별 공간 수요의 특성'을 논의하는 자리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좌담회 형식으로 진행된다.좌담자는 바이오스펙데이터 이기형 대표(좌장), 셀트리온 윤정원 수석부사장, 코오롱생명과학 김수정 소장, 마크로젠 정현용 대표 등 5~6명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송도바이오단지 잔여 부지와 11공구 신규 부지의 공간 수요를 파악하고 투자유치 계획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송도바이오프론트 인지도 제고도 기대된다"고 했다.인천경제청은 2012년 12월 송도바이오단지 명칭을 '송도바이오프론트'로 정하고, 2013년부터 심포지엄을 열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는 지난 14일 서울 강남빌딩 16층에서 서울사무소 개소식을 했다. /한국조지메이슨대 제공

2017-11-19 목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