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2)]엡윗청년회와 이우구락부

'엡윗청년회' 인천 내리교회서 최초 결성을사늑약 항의시위 해산…1916년 재조직이후 국악연구단체 '이우구락부' 멤버로인천광역시는 2015년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인천역사문화총서 74)을 간행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책에는 인천의 역사·문화 속에서 한국 최초이자 인천 최고(最古)의 사실들이 담겼다. 간행 이후 시는 해당 건물이나 장소에서 자체 개발한 상징 아이콘 현판식을 진행했다. 지난해 6월 시는 인천 중구의 내리교회에서 현판식을 개최했다. 1885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내리교회를 세상에 다시 한 번 알린 자리였다. 더불어 '엡윗(Epworth)청년회'에 대한 현판식도 함께 열렸다. 엡윗청년회는 1888년 미국 시카고에서 창설한 감리교회 청년단체이다. 감리교회 창시자인 존 웨슬리(1703~1791)의 출생지가 엡윗이었다. 국내에서 엡윗청년회는 1897년 중앙 조직을 갖췄다. 이후 지역 교회로 전파되는데, 가장 먼저 엡윗청년회가 생긴 곳이 인천 내리교회였다.내리교회 엡윗청년회는 인천 청년운동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을사늑약 이후 조약에 항의하는 무력시위를 벌인 게 빌미가 돼 엡윗청년회는 1906년 해산한다. 1916년 재조직 후 이전 회원에 신규 회원들까지 가세하면서 사회, 경제, 문화 등 다 방면에서 활동했다.동아일보 1921년 10월 29일자에 '인천엡윗음악강연'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인천남자엡윗청년회 음악부가 주최한 내리예배당 강연회를 예고하고 있다. 기사 상에는 회원과 함께 일반 시민의 참여도 독려하고 있다. 1920년 2월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 문예지 '개척(開拓)'을 펴내기도 했던 인천 엡윗청년회의 활동은 고전 국악 연구단체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와도 맥이 닿아있다. 이우구락부는 우리 음악 연구와 공연을 통해 민족혼을 고취 시키려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문 기사와 각종 기록에 따르면 이우구락부는 일제가 문화정책을 실시하자 국악을 통한 민족 문화의 전통을 모색하면서 각종 음악회와 토론회, 웅변대회 등을 열거나 참여했다. 이를 통해 애국계몽활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것이다.인천교대 기전문화연구소의 <기전문화연구 4집>에 수록된 노영택의 논문 '일제하 인천의 청소년운동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이우구락부의 간부는 하상훈, 서병훈, 최선향, 이범진 등이었다. 감리교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영화초등학교 초기 졸업생인 하상훈은 내리교회 앱윗청년회 회장이었다. 기타 간부들 역시 내리교회의 신자들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논문에선 이우구락부를 내리교회 계열의 청년들로 구성된 단체로 정의한다.또한, 이우구락부는 동아일보 인천지국 안에 본거지를 두었다. 동아일보 초대 인천지국장이 하상훈, 부지국장이 서병훈이었으며, 총무는 최선향, 경제부 기자는 이범진이었다. 이처럼 동아일보와 연관이 깊은 인물들이 이우구락부에 참여했다.<인천시사>에 이우구락부에 대해 기록한 대목이 있다. "이 단체의 창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처음에 인천부 내리에 임시 본부가 있다가 후에는 용강정에 회관이 있었다. 이 단체 역시 전체적인 임원 명단은 알 수 없으나 1923년 4월 27일 제7회 정기총회에서 개선된 임원은 부장 하상훈, 총무 서병훈, 학습과장 고주연, 도서과장 박충의, 운동과장 라시극, 식산과장 전두영, 평의원 윤육 외 9인 등이다. 1924년 직제를 간부제로 변경하여 임원을 개선한 뒤에도 역시 하상훈이 간사장이 되고 서무 서병훈, 학습 최선경, 도서 이범진이었다."<인천석금>에서 저자 고일 선생은 자신의 견해를 더해서 이우구락부를 소개하고 있다. "인천의 음악 운동을 살펴보면, 초기 고전 국악 연구 단체로 동아일보 인천지부 건물에 있던 이우구락부가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죽림칠현 격으로 세상을 등지고 살았던 것은 고상한 음악 동지가 필요한 데서 나온 성싶다. 구락부 명칭은 '이문회우(以文會友)'라는 말에서 따온 것 같다. 주요한 부원으로는 최선경, 송균, 서병훈 씨와 동아일보 사원들이었다. 이들 7인은 일주일에 한 번씩 회식을 하면서 정담을 나누기도 했다." '청년회' 회장 하상훈 등 사회 다방면 활동동아일보 사원 다수, 음악동지로 정기모임국악·양악 어우러진 공연 후원 대성황도<인천시사>에서 보듯이 이우구락부의 창단과 해산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이우구락부 관련 기사는 1920년부터 1927년에 걸쳐 동아일보에서 검색된다. 기사에선 이우구락부가 당시 인천에서 개최한 각종 음악회와 관련된 내용을 볼 수 있다. 음악회 기사에 표출된 출연자 항목에 이우구락부로 표기된 것을 봤을 때 회원 각자가 연주 활동을 한 전문 음악인들로 보이진 않는다. 이 글에서 소개된 이우구락부에 가담한 인물들을 소개한 후대 기록에서 악기를 잘 다뤘다고 표현한 부분도 있지만, 예술인이라기 보다는 주로 언론인 혹은 사회활동가로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음악애호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각종 공연을 적극 주최하고 후원한 부분도 확인할 수 있다.동아일보 1920년 8월 24일자에 '인천의 음악대회' 기사가 있다. 인천부 가무기좌에서 열린 음악회는 우리음악과 서양음악이 어우러졌으며, 대성황을 이뤘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음악회는 한용단과 이우구락부가 후원했다고 표기돼 있다.지역 문화계 원로 중 한 명인 김윤식 시인은 "개항 이후 새로운 사회 풍조와 더불어 신문물이 도입되는 와중에 우리 국악을 애호하고 보전하기 위해 처음으로 단체를 결성하고 활동했다는 것은 대단히 선구적이고 동시에 우리 인천 문화사에 있어서 상당히 의미 있는 부분"이라고 의의를 설명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01년 준공된 내리교회. /인천시 제공현재 인천 내리교회 모습.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인천 엡윗청년회가 1920년 2월 펴낸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 문예지 '개척(開拓)'의 표지. /인천문화재단 제공하상훈 /인천문화재단 제공

2018-12-20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8]인천항 운영기관(하)-인천항만공사

내년 4월 수도권 1호 크루즈전용터미널 개장 중~일~러 항로운영신국제여객터미널·골든하버 프로젝트 순항 '해양명소' 자리매김'300만TEU 돌파' 인천항 하역 능력 넘어서… 신항 컨 부두 개발남항 배후에 車물류클러스터 조성 중고차 판매·재생센터 등 구축2025년 인천 송도국제도시 9공구에 있는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에는 세계 최대 크기의 크루즈 '심포니 오브 더 시즈'호(22만5천t급)에서 내린 9천여 명의 승객으로 북적거린다. 크루즈에서 하선한 승객들 가운데 일부는 인근에 조성된 상업·업무·레저 복합단지 '골든하버' 리조트로 향했다. 크루즈 전용 터미널 인근에 있는 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도 한중카페리에서 내린 중국인 관광객들로 가득했다.신규 개장한 인천 신항 컨테이너 부두 1-2단계 구역에는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인천항은 2025년 400만TEU의 컨테이너를 처리했다. 남항에 있는 자동차 물류클러스터에서는 쉴 새 없이 차량이 수출되고 있다. 이는 인천항만공사가 목표하는 2025년의 인천항 모습이다.인천항은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3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돌파했다. 1974년 인천 내항 4부두에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부두가 문을 연 지 43년 만에 이룬 성과다. 300만TEU를 달성한 인천항은 '해양관광의 메카'로 도약할 준비에 나서고 있다.우선 내년 4월 송도 9공구에 수도권 최초의 크루즈 전용 터미널이 문을 연다.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22만5천t급 크루즈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자랑한다. → 위치도 참조5천~6천명의 관광객이 탈 수 있는 초대형 크루즈가 인천항에 기항하게 되는 것이다. 국내 크루즈 전용부두는 부산 북항(22만t급), 서귀포 강정항(15만t급), 제주항(15만t급), 속초항(10만t급) 등지에 있는데 인천항이 가장 크다.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이 문을 열면 국내 해양관광 시장에 일대 지각변동이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내년 4월과 10월에는 크루즈 전용 터미널 개장을 기념해 롯데관광개발과 이탈리아 선사 코스타크루즈가 인천을 모항(母港)으로 하는 크루즈선을 운항한다. 모항은 크루즈선이 중간에 잠시 들렀다 가는 곳이 아니라 출발지로서 승객들이 타는 항구를 말한다. 11만4천t급 '코스타세리나'호는 내년 4월 인천∼상하이∼후쿠오카∼부산을 운항하고, 10월에는 인천에서 출발해 상하이∼일본 후쿠오카∼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속초에 입항할 예정이다. 이를 포함해 내년 총 22척의 크루즈가 입항해 5만500여명의 여객이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을 이용할 전망이다. 이는 올해 인천항 임시 크루즈 부두와 내항에 총 10척(여객 수 2만6천120명)이 입항한 것보다 두 배가량 늘어난 수치다. 지난 18일 열린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 준공식에서 남봉현 인천항만공사 사장은 "크루즈터미널은 인천이 동북아 해양관광 거점으로 도약하는 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크루즈 전용 터미널 인근에 자리 잡은 신국제여객터미널은 내년 12월 개장한다. 인천항과 중국을 정기적으로 오가는 10개 항로 한중카페리의 새 둥지가 될 신국제여객터미널은 지상 5층, 전체 넓이 6만7천㎡ 규모로 축구장 9개 넓이보다 크다. 현재 인천항 제1국제여객터미널(2만5천587㎡)과 제2국제여객터미널(1만1천256㎡)을 합친 면적의 1.8배에 이른다.인천과 중국을 오가는 카페리 여객 수는 2016년 92만391명에 달했다가 '사드 갈등'이 불거진 지난해에는 60만359명으로 34.8% 줄었다. 올해 들어서는 11월까지 71만9천261명의 여객 수를 기록하며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인천항만공사 조주선 항만시설팀장은 "신국제여객터미널이 인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준공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 배후단지를 개발하는 '골든하버' 프로젝트도 내년부터 진행된다. 신국제여객터미널 배후단지에 호텔, 쇼핑몰, 컨벤션, 콘도, 럭셔리 리조트 등을 유치하는 사업이다. 골든하버는 삼면으로 바다 조망이 가능하다. 친수 공간이 부족한 인천시민은 물론 국내외 관광객들이 해양관광문화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인천 신항 1-2단계 컨테이너 부두 개발사업도 본격적으로 추진될 예정이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에 따르면 2025년 인천항 컨테이너 물동량은 363만TEU에 달하지만, 하역 능력은 286만TEU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77만4천TEU의 컨테이너를 처리할 수 있는 하역 시설이 부족한 셈이다. 하역 시설이 부족하면 컨테이너 화물 처리 속도가 늦어져 선박과 트레일러 등 화물 운송 장비 대기시간이 길어진다. 남북 경협이 활발히 이뤄지면, 컨테이너 물동량이 최대 120만TEU까지 추가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 시설 확충이 필요한 상황이다.해양수산부는 인천 신항 1-2단계 컨테이너 부두 개발사업을 내년 초 발표되는 신항만기본계획에 반영했다. 신항만기본계획은 인천 신항을 포함해 전국 10개 항만 건설 방향을 담은 중장기 계획으로, 2040년까지 인천 신항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 옆에 4천TEU급 선박 접안이 가능한 선석 4개를 추가로 건설하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인천항만공사는 인천항 자동차 수출 물량 유치를 위해 자동차 물류클러스터 조성 계획도 세웠다. 인천항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중고차 수출항이다. 지난해 인천항을 통해 수출한 중고차는 25만2천 대로, 전국 수출 물량 28만6천 대의 88.1%를 차지했다. 올해(1~9월) 인천항 중고차 수출 물동량은 20만4천 대를 기록하며 전국 수출량(23만1천 대)의 88.3%에 달한다. 인천시와 인천항만공사는 2025년까지 인천 남항 배후단지(중구 항동 7가 82의 7 일원 39만6천㎡)에 자동차 물류클러스터를 만들 예정이다. 여기에는 중고차 판매·경매장, 검사장, 정비장, 자원재생센터, 주차장 등이 들어선다.남봉현 사장은 "인천항을 동북아 물류 허브로 도약시킬 뿐만 아니라 그동안 소홀했던 해양 관광 부분도 균형 있게 발전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이 과정에서 인천 지역사회 등 관계기관과 꾸준히 소통하겠다"고 밝혔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18일 제막식을 연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의 모습. 국내 최대 규모의 인천항 크루즈터미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22만5천t급 크루즈가 정박할 수 있는 430m 길이의 부두를 갖췄다.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 공사 현장 모습. /인천항만공사 제공/아이클릭아트인천 남항 자동차 물류클러스터 조감도. /인천항만공사 제공동북아 지형을 형상화한 용을 테마로 바다와 물에 관련된 수룡 또는 해룡을 디자한 인천항만공사 캐릭터. /인천항만공사 제공

2018-12-19 김주엽

[zoom in 송도]임대료 걱정 던 송도컨벤시아 '안정궤도'

임대형민간투자 2단계사업 年123억 '부담' 40% 20년간 988억 정부예산 반영·국비확보박남춘 시장 안상수·박찬대 의원 '지원사격'인천시 산하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인천지역 정치권이 송도컨벤시아 임대료와 관련한 국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국비 확보로 송도컨벤시아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됐다.인천경제청에 따르면 최근 국회 본회의에서 송도컨벤시아 임대료와 관련한 국비 지원액 988억 원(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 지역지원계정)이 의결됐다. 이에 따라 인천경제청은 내년부터 연간 49억여원 등 20년에 걸쳐 송도컨벤시아 임대료를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게 됐다.송도컨벤시아 2단계 건립사업은 1단계 시설 옆 부지 약 7만3천840㎡에 전시·회의·판매시설 등을 조성하는 것으로, 올해 7월 준공됐다. 송도컨벤시아는 2단계 사업으로 전시시설에 900개 이상 부스를 설치하고, 2천명 이상 규모의 대형 국제회의를 유치·개최할 수 있게 됐다.문제는 임대료였다. 송도컨벤시아 2단계 사업은 BTL(Build Transfer Lease·임대형 민간투자사업) 방식으로 건립됐다. 인천경제청은 재정사업으로 2단계 사업을 추진하려 했는데, 국회에서 BTL 사업으로 승인했었다. 그래서 민간사업자 '더송도컨벤시아(주)'가 시설을 조성하고, 인천경제청이 20년간 임대료를 주는 조건으로 추진됐다. 인천경제청이 더송도컨벤시아(주)에 줘야 하는 연간 임대료는 123억원(시비 60%, 국비 40%). 이번에 국비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20년간 매년 이 금액을 인천시가 모두 부담해야 했다.인천경제청은 국회와 해당 중앙 부처를 찾아가 국비 지원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해왔다. 특히 경제자유구역 활성화를 위한 기반시설이고, 투자 유치 및 일자리 창출 등 국가 경쟁력 강화에 기여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 과정에서 박남춘 인천시장과 안상수·박찬대 의원 등 인천지역 국회의원들의 도움이 컸다. 김진용 인천경제청장은 "많은 분의 노력으로 송도컨벤시아 임대료 국비 지원이 확정됐다"며 "송도컨벤시아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인천은 송도컨벤시아 2단계 준공,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개장 등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마이스(MICE) 인프라를 갖추게 됐다. 2022년까지 세계 10대 마이스 도시로 진입하겠다는 게 인천시 목표다. 이를 위해 인천시는 국내 첫 '국제회의 복합지구'로 지정된 송도컨벤시아 일원(298만1천666㎡)과 복합리조트 개발사업이 진행 중인 영종국제도시를 연계해 인천형 마이스 벨트를 구축할 계획이다.한편, 인천시는 내년도 국비 예산(국가직접·보조사업)으로 3조815억원을 확보했다. 송도 관련 사업으로는 송도컨벤시아 임대료 지원을 비롯해 ▲인천 신항 건설 351억원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건립 134억원 ▲인천도시철도 1호선 송도 연장 300억원 등이 내년도 정부 예산에 반영됐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송도컨벤시아 '2018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요 고객 초청행사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인천관광공사는 최근 송도컨벤시아에서 '송도컨벤시아 고객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이번 행사에는 올해 송도컨벤시아를 이용한 관계기관, 학회·협회, 전시·컨벤션·이벤트 주최사, 호텔 등 주요 고객 120여 명이 초청됐다. 인천경제청은 사업 소개·강연·공연 등을 진행하고, 인천경제자유구역 발전 및 송도컨벤시아 운영 활성화에 기여한 우수 고객 6개사에 감사패를 줬다. 2008년 개관한 송도컨벤시아는 물류산업전시회, 해양안전대전, 세계한상대회, 아태도시 정상회의, G20 재무차관회의, OECD 세계포럼 등 다양한 국제행사를 개최했다. 올해 7월 2단계 시설이 준공됐으며, 8월에는 송도컨벤시아 일대가 국내 첫 '국제회의 복합지구'로 지정됐다. /인천관광공사 제공

2018-12-16 목동훈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1)]기생조합 권번(券番)

조선시대 국가서 궁중의식 음악·춤 등 집중훈련갑오개혁후 관기 사라지고… 일제하 '권번'으로공창제 등 이미지 왜곡 불구 일부 '아이돌' 부상중구 용동권번 출신 장일타홍·이화자 등 유명세1930년대 민요·가요 레코드 녹음… 재조명 필요 인천 기생은 인천기생조합에서 어린 시절부터 기생 공부를 했다. 조합은 권번(券番)이라 했다. 권번에서는 노래와 춤을 가르쳤는데, 평양의 기생학교만은 못 했어도 선생을 앉히고 가르쳤다. 지금 용동권번 자리에는 미용사기술전수학교가 들어섰다. 기생조합 시대에 걸출한 포주 최성인이 조합장이 되었었고, 최후의 권번 대표는 낙원 주인이었다. 인천 기생은 수준이 서울보다 낮고, 개성보다는 높았다. 개성은 갑, 을 2종이었으나, 인천에는 을종이 없었다. 그 옛날의 관기보다는 신세대에 속했고, 카페나 바 종사자보다는 틀이 잡힌 예술가였다. 유행 가수로 진출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이화자는 인천 기생으로 '어머님 전상서'를 레코드에 취입했으며, 같은 레코드 가수 장일타홍도 용동권번 출신이었다. -고일 著 <인천석금> 중에서조선의 기생((妓生)은 악(樂)·가(歌)·무(舞)·시(詩)·서(書)·화(畵)에 능통한 종합예술인이었다. 그들은 당대 우리 문화예술의 수준을 대변하는 예술가였으며 자유인들이었다.이들은 궁중의식에서 음악과 춤을 담당했던 관청인 장악원에 소속돼 오늘날 '예술 영재교육'과도 같은 집중 훈련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술은 물론, 산술과 해외 문화까지 두루 섭렵했다.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 당시 나라에서 관리하는 관기 제도가 사라졌으며, 일제는 기생을 춤과 노래를 공연하는 '기생'과 성매매를 하는 '창기'로 구분 지었다. 또한 기생에게 자체적으로 조합을 설립하라는 규정을 만들었으며, 1915년 기생조합은 일본식 표현인 '권번'으로 명칭이 바뀌었다.이때까지만 해도 기생은 독립 자금을 몰래 마련해 전달하고, 지역 학교 신축을 위한 기금 마련 행사에 참여해 쾌척하는 등 신여성으로서의 이미지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조합이 생기면서 이들의 공연 무대는 요릿집으로 한정됐으며, 일제가 만든 공창제도가 더해지며 기생의 이미지는 철저히 왜곡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자부심을 지녔던 기생들은 신분을 숨기고 더더욱 음지로 들어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와 반대 급부로 공연 예술에 능통했던 기생들은 라디오와 잡지, 영화가 보급되면서 '대중 스타'로 급부상하기도 했다.100년 전 기생의 삶을 떠올리며 인천 중구의 용동권번 자리를 찾았다. 현재 권번의 흔적은 1929년에 만들어진 돌계단과 그 곳에 새겨진 '용동권번(龍洞券番)' 뿐이다. 비교적 선명하게 음각된 이 글자는 2011년 동사무소에서 계단 보수 공사를 하면서 이 돌계단을 시멘트로 덮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지역 문화계의 요구에 시멘트를 벗겨냈다. 현재 보행 안전 때문인지, 골목길 전체는 붉은색 바닥으로 마감되어 있다. 철판이 덧대어진 위에서 5번째 계단에 새겨진 '龍洞券番'을 볼 수 있는데, 철판이 빛을 가려서 자세히 들여다 봐야 확인할 수 있다.1920년대로 다시 돌아가 보자. 고 신태범 박사가 쓴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는 인천의 권번에 관한 구절이 있다."목로주점과 방술집도 늘어났지만 격이 높은 유흥업소가 등장했다. (미두장의 번창으로) 돈을 벌었다고 마시고, 잃었다고 마시는 것이 술이고, 술에는 으레 여자가 따르게 마련이다. 씀씀이가 크고 돈 출입이 잦은 미두꾼이 늘면서 요릿집과 기생 권번이 생긴 것이다. 일월관, 용금루, 조선각 등이 문을 열고 소성권번이 출현했다."용동권번은 인천의 옛 이름을 따 소성권번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1930년대 들어 우리나라엔 유행가와 댄스 바람이 일기 시작했고, 앞서 언급했듯이 기생이 대중 스타로 부상한다. 용동권번 출신 기생에 관한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1935년 8월 1일 발간된 잡지 <삼천리>에 게재된 '삼천리 기밀실'이라는 가십 기사에 인천권번의 장일타홍이 서울 콜럼비아 레코드회사 소속 유행가수로 나와 있다. 현재까지 장일타홍의 출생 연대나 가계, 결혼 등 개인 신상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장일타홍의 노래는 확인된다. 1934~1935년 콜롬비아에서 20곡을 녹음했다. 주로 경기잡가를 비롯한 민요곡이며 가요도 몇 곡 있다.용동권번 출신으로 이화자도 장일타홍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가수다. 1938년 8월 1일 발간된 잡지 <삼천리>에서 이서구는 '유행가수 금석 회상'이란 글을 통해 "이화자의 신민요는 선우일선에 비하야 선이 굵다. 그 대신 깊은 맛이 있다. 이 점에 이화자의 새로 개척할 길이 있지나 않을까 한다"고 평가했다. 신인급인 이화자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린 것이다.가수가 되기 이전이었을 1934년 8월 12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인천지국발로 '인천권번 기생들도 의연금 모집 활동, 홍등 하에서 웃음 파는 그들의 이 가상한 독행!'이라는 기사에서 이화자를 거명하기도 했다. 이화자는 1935년 혹은 1936년 신민요 스타일의 가요 '초립동'으로 데뷔했다고 한다. 1940년까지 해마다 곡을 발표하고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아편에 손을 댄 이후 나락의 길을 걸은 이화자는 1950년에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지역 문화계 원로인 김윤식 시인은 "기생을 달리 이르는 말인 '해어화(解語花·말을 알아듣는 꽃)'에서 알 수 있듯이 한 송이 꽃으로서 웃음을 팔았지만, 그들은 인천인으로서 분명 우리 음악사를 장식한 인물"이라고 말했다.역사학자인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는 "용동권번과 그 곳에 몸 담았던 인물들로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용동권번 기생들의 모습. /'골목, 살아(사라)지다' 발췌현재 용동권번 계단 모습. (위에서 네번째 철갑을 두른 계단)용동권번 기생들의 공연 모습. /'골목, 살아(사라)지다'(인천광역시 刊) 발췌

2018-12-13 김영준

[인천경영포럼]급변하는 세상, 한발 앞서가는 정보교류의 장

내·외빈 등 200명 참석 화합 다져74명에 장학금·우수기업인 시상김소형 한의사 '건강보감' 강연도인천경영포럼은 13일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2018년 가족동반 송년의 밤' 행사를 열었다.이날 행사엔 안승목 인천경영포럼 회장을 비롯한 내외빈과 경영포럼 가족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안 회장은 송년사에서 "다른 어느 때보다 2018년은 어려운 한 해였지만 급변하는 환경에 민첩하게 대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해왔다"고 말했다. 또 "새해에도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을 모셔서 회원분들이 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습득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회원 친목 도모와 결속은 물론, 이업종 교류 등에 부족함이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인천경영포럼은 이번 행사에서 장학금 전달식도 가졌다. 인천경영포럼은 학생들의 꿈을 응원하기 위해 올해로 16회째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인천경영포럼은 이번에 74명의 학생에게 총 3천7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누적 장학금액은 2억4천500만원에 달한다.인천경영포럼은 포럼 발전과 기업 매출 확대 등 인천경제 활성화에 기여한 우수 기업인에게도 상을 줬다.이날 경인일보와 인천경영포럼이 함께 마련한 올해 마지막 강연회(395회)엔 김소형 한의사가 '미스코리아 출신 웰빙 한의사 김소형의 CEO 건강보감'을 주제로 강연했다. 장학금 지급 업체(단체)와 주요 수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장학금 지급 업체>■ (주)만승전기, 동건공업(주), 제이씨텍(주), (주)에몬스가구, (주)정호이앤씨, 제원기업유한회사, (주)코릴, (주)백석개발, 인성의료재단 한림병원, 인천시 재향군인회, 태화전력(주), 공명가구, (주)명성전력, (주)엔아이씨이렌트카, KW개발(주), (주)서한안타민, 인천 남동구, 하림코리아푸드, 영일카디오넷(주), 새한볼트, 논현사랑치과의원, (주)명윤, (주)티엘텍, (주)엠에스씨, 선경테크, 인천충남전화번호부, 강운공업(주), (주)대신스틸, (주)삼정유앤디, 아이거산업, 남촌에코산업단지개발(주), 세강세무법인, (주)대일산기<수상자>■ 인천경영포럼 회장 △감사패 = 농협중앙회 인천지역본부 조영철 본부장, (주)임산업 임익찬 회장, IB손해사정사 조석용 대표 △최우수출석패 = 신생테크놀러지(주) 차익정 대표이사, 착한생막창 이강만 대표, 우진공인중개사무소 양연숙 소장, 우리복지센터 이재인 대표, (주)이삭모터스 양병준 대표이사 ■ 인천시장 △표창장 = (주)정호이앤씨 최호선 대표이사, 대아METAL 정천섭 대표, (주)엔아이씨이렌트카 안종배 대표이사, (주)동양기계 김병기 대표이사, 하림코리아푸드 임남례 회장, 논현사랑치과의원 김기영 원장, 남촌에코산업단지개발(주) 김경식 대표이사, (주)청호이엔씨 우종훈 대표이사■ 인천대 총장 △우수기업인패 = (주)신세계자원 김장성 대표이사, 에스제이티 승지전자(주) 이중경 대표이사, (주)진명프릭스 유창환 대표이사■ 경인교대 총장 △표창패 = (주)티엘텍 김성학 대표이사, 한국생산성본부 최진택 경영컨설턴트, 베스킨라빈스 인천서창점 홍승욱 점주■ 인천재능대 총장 △우수기업인패 = (주)삼환운수 김석우 대표이사, (주)안스베이커리 안복현 대표이사, 승일자동차공업(주) 김영목 대표이사, (주)공간아트 유병갑 대표이사■ 인천지방중소벤처기업청장 △표창장 = (주)명윤 한동한 대표이사, (주)대일산기 홍의주 대표이사, (주)그린이엔테크 송재민 대표이사, 성림엘리베이터(주) 이재원 대표이사■ 경인일보 인천본사 사장 △표창패 = 황재갑세무회계사무소 황재갑 대표세무사, (주)극동이씨티 정충의 대표이사, (주)TJB KOREA 김태연 대표이사■ 경인방송 i-FM 대표이사 사장 △표창패 = 도담이앤씨 안병탁 대표, 재진종합물류 이태호 대표, 창영정공 지연우 대표인천경영포럼이 13일 라마다 송도호텔에서 연 '2018년 가족동반 송년의 밤' 행사에서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인천경영포럼 제공

2018-12-13 이현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7]인천항 운영기관(상)-인천항만공사

개항 이래 국가가 주도해온 항만 개발·운영1990년대 후반 국제경쟁 위해 도입논의 불구정부 예산 탓·투포트 정치적 논리 밀려 방치시민들, 서명 운동등 펼쳐 2005년 출범 이뤄인천항을 관리하는 기관은 어디일까? 인천항이 개항한 1883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항만시설을 구축하는 업무는 관세 사무행정을 맡았던 인천해관(세관의 중국식 이름, 1907년 세관으로 개정)이 담당했다. 해방 이후에는 미 군정청 교통국 인천부가 업무를 맡았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 교통부 인천해사국이 인천항 업무를 수행한 이후에는 기관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인천항의 개발과 관리·운영 업무는 모두 정부에 의해 이뤄졌다.인천항 관리권은 2005년 7월 기업에 이관됐다. 1997년 부두운영사 제도 도입으로 민간 하역사들이 정부로부터 부두 시설을 임차해 운영한 적은 있지만, 인천항 전체 운영 권한이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업에 넘어간 건 개항 이후 처음이다. '인천항만공사'가 그 주인공이다.항만공사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등 관(官)이 주도하던 항만 개발과 운영을 담당한다. 정부는 급변하는 국제물류환경과 갈수록 치열해지는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중심 항만(Hub-Port)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1999년 3월 국무회의를 통해 항만공사제도를 도입하기로 하고, 재정자립도가 높았던 인천항과 부산항을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인천항의 경우 기존의 정부 관리 체제로는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북중국 항만들과의 경쟁이 버거울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하지만 정부 내에서도 항만공사 설립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해양수산부는 항만공사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선 4천억원의 정부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고 추산하고, 정부가 일정부분 예산을 보조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반면, 기획예산처(현 기획재정부)는 항만공사에 예산 지원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도 물류비 상승 등을 이유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인천시민들은 인천항 발전을 위해선 항만공사제도를 조기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시민들은 부산항과 여수·광양항을 중심으로 하는 '투 포트 정책' 등 정치적 논리에 밀리면서 20여 년 동안 답보 상태에 빠져 수도권 지역 물동량의 15%밖에 처리하지 못하는 인천항의 현실을 지적했다. 시민들은 항만공사 조기 설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 등 범시민적인 운동을 펼치며 항만공사 설립을 요구했다. 인천경제정의실천연합은 2001년 7월 논평을 통해 "국가 발전을 위해선 낙후된 인천항의 개발이 시급하다. 그러기 위해선 인천항이 자율권을 갖고 발전할 수 있도록 항만공사제도를 하루빨리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우여곡절 끝에 2003년 4월 항만공사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인천항만공사 설립이 확정됐다. 인천시와 정부 관계자들로 구성된 '인천항만공사설립위원회'는 2005년 7월 인천항만공사 출범에 합의했다. 인천시 공무원 출신으로 '인천항만공사 설립추진기획단'에서 근무했던 인천항만공사 신용주 홍보팀장은 "인천항만공사 설립에 필요한 기초 자료를 수집하느라 설립추진기획단 10명은 휴일도 없이 일했다"며 "그래도 당시에는 새로운 조직이 만들어진다는 설렘으로 힘든 줄 몰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수익 필요한 '기업' 형태… 마케팅 적극 펼쳐물동량 크게늘어 작년 '컨 300만 TEU' 돌파신항등 인프라 예산 투자 '선순환 구조' 갖춰인천항만공사 설립은 물동량 증가와 인프라 확충 등 인천항 발전의 계기가 됐다.인천항 물동량은 빠르게 늘어났다. 1974년 인천 내항 4부두에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만들어진 이후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1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달성하는 데 3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그런데 2013년 200만TEU를 돌파하며 물동량 증가 속도가 빨라졌고, 지난해에는 부산항에 이어 국내 두 번째로 300만TEU를 넘어섰다. 2005년 인천항만공사 출범 당시 114만9천TEU였던 물동량이 지난해 304만TEU로 2.6배 증가한 것이다. 출범 당시 29개였던 정기 컨테이너 항로도 49개까지 늘었다. 여수·광양항에 이어 국내 3위였던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규모는 지난 2015년을 기점으로 여수·광양항을 완전히 따돌렸다. 해수부에서 근무하다 인천항만공사로 자리를 옮긴 김영국 여객터미널사업팀장은 "해수부에서 인천항을 관리하던 당시에는 안정적인 운영에 방점을 뒀다.인천항만공사는 공기업이라도 수익을 발생시켜야 하는 기업이기 때문에 물동량 창출을 위해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벌였다"며 "전 세계 컨테이너 물동량이 늘어난 부분도 있지만, 증가속도를 고려하면 마케팅 효과가 크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물동량이 늘면서 인천항의 인프라를 갖추는 공사 속도도 빨라졌다. 2012년 벌크 물동량을 처리하는 북항이 문을 열었고, 2016년에는 송도국제도시에 신항이 개장했다. 항만 활성화에 필수적인 시설이 들어서는 배후단지 면적도 2005년 47만8천㎡에서 152만6천㎡로 3배 넘게 확장됐다. 조주선 인천항만공사 항만시설팀장은 "해수부에 속해 있을 때보다 예산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프라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며 "시설 투자를 바탕으로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는 선순환 구조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2005년 7월 인천항만공사 창립 기념식에 참석한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는 "인천은 항공과 해운이 결합한 강점이 있는 곳이다. 이제 역사적인 인천항만공사의 출범으로 인천항이 동북아의 물류 중심 항만으로 발전할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인천항만공사와 함께 인천항은 성장하고 있다. 내년 4월에는 송도 9공구에 국내 최대 규모의 크루즈 전용 터미널이 문을 열 예정이며, 2020년에는 신국제여객터미널도 개장한다. 2025년에는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500만TEU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김영국 여객터미널사업팀장은 "인천항만공사가 설립된 이후 신규 물동량을 창출하면서 인천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며 "인천시민들과 함께 인천항이 계속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아이클릭아트2005년 7월 인천항만공사 청사에서 진행된 현판식 모습.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만공사가 입주해 있는 정석빌딩과 현판.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위치한 인천 신항 전경. 인천항은 신항 개장 이후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300만TEU를 돌파했다.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 조감도.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만공사 캐릭터. /인천항만공사 제공

2018-12-12 김주엽

[zoom in 송도]'인구 5만 돌파' 송도2동, 2·4동으로 나뉜다

내년 3·6~9공구 일대 '송도4동' 분동아라플라자에 임시청사 조성공사중6·8공구 아파트입주땐 주민 더 늘듯인천 연수구 송도2동이 내년 1월 '송도2동'과 '송도4동'으로 나누어진다. 송도1~3동에 이어 송도4동이 신설되는 것이다.9일 연수구에 따르면 송도국제도시는 현재 송도1동, 송도2동, 송도3동으로 돼 있다. 공구별로 보면, 송도 1·3공구(국제업무단지 등)와 6·8공구(송도랜드마크시티 등), 9공구(신국제여객터미널과 아암물류단지)가 송도2동에 해당한다. 이 중 송도 3공구와 6~9공구 일대가 내년 1월 신설되는 송도 4동에 포함될 예정이다.올 11월 말 기준 송도2동 인구는 5만4천823명으로, 송도1동(3만4천391명)과 송도3동(4만3천661명)보다 많다. 거주 외국인까지 합하면, 송도2동 인구는 5만 5천 명이 넘는다. 송도2동은 면적이 3㎢ 이상인 데다, 3개월 동안 5만명 이상의 인구수를 유지했기 때문에 분동(分洞) 대상이 된다. 송도2동 인구는 올해 1월 5만명을 돌파한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 표·그래픽 참조연수구는 '송도2동 분동 준비단'(직원 3명)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송도아라플라자(컨벤시아대로230번길 42) 일부 공간을 송도4동 임시청사로 정해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임시청사는 동장실, 민원실, 회의실 등으로 구성된다. 연수구 총무과 관계자는 "내부 리모델링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다. 현재 냉난방 기구 설치, 책상 배치 등이 이뤄지고 있다"며 "내년 1월 문을 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송도4동 임시청사에는 7명이 배치될 예정이라고 한다. 행정기구 설치 조례·시행규칙 개정 등 분동에 필요한 안건(자치법규 개정)은 이달 중 연수구의회를 통과할 예정이다.연수구가 분동을 추진하는 이유는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양질의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집 근처에 행정복지센터(동사무소·주민센터)가 생기면 서류 발급이나 문화 프로그램 수강 등이 한결 수월해진다. 관(官) 입장에서도 통반장들과 함께 해당 지역을 관리·유지하는 등 행정 업무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특히 송도4동 예정 지역은 송도6·8공구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면서 인구가 많이 늘어날 예정이다. 올해 3천300가구가 넘는 아파트가 준공됐다. 2019~2020년에는 '힐스테이트 레이크 송도' 등 총 1만3천862가구 규모의 아파트단지가 조성될 것으로 연수구는 예상하고 있다.연수구는 분동 준비와 함께 송도4동 청사(행정복지센터) 신축도 추진하고 있다.연수구는 송도 3공구 인천예송초등학교와 송도29호공원 사이에 있는 땅(송도동 104의 2)에 송도4동 청사를 건립할 계획이다.송도4동 청사는 지하 2층, 지상 5층, 연면적 4천562㎡ 규모다. 민원실, 주민자치실, 작은도서관, 생활체육실, 대회의실 등을 갖추게 된다. 예상 사업비는 110억5천200만원이다. 연수구는 내년 3월 설계 공모를 시행하고 그해 12월까지 실시설계를 완료할 계획이다. 이후 건축 관련 절차를 거친 뒤 2020년 4월부터 2021년 11월까지 공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연수구 재무회계과 관계자는 "새 청사 설계비 등 5억6천900만원을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했다"며 "준공 후 이사 및 시범운영 기간을 고려하면, 2022년 1월부터 새 청사에서 업무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8-12-09 목동훈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0)]김영의 박사

영화학당 거쳐 서울 진학… 고교 졸업 무렵 두각이화여자전문학교서 연마하다 조교직도 겸해1930년대 美음대서 공부하며 안익태와 무대올라 국내 복귀 후엔 예술위원 등 다양한 활동 펼쳐다소 쌀쌀한 바람이 불던 초겨울 한낮에 서울 서대문구의 이화여자대학교를 찾았다. 정문을 통과해 우측으로 가다가 오른편 중앙도서관 옆에 있는 음악관 1층 현관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섰다. 곧이어 김영의 기념연주홀(통상적으로 김영의홀로 칭함)을 만날 수 있었다.홀로 들어가는 문 옆 벽에 설치된 동판을 찬찬히 읽었다. 동판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김영의 박사는 1929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하신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음악예술계와 음악교육계의 지도자로써 활약하셨고 특히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에 봉직하시면서 학교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기에 이를 기념하여 이 대연주실을 김영의 기념연주홀 이라 이름한다. 1981.8홀에 들어서니 나열된 객석과 그 너머에 펼쳐진 무대를 볼 수 있었다. 이내 무대 뒤 벽면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이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 즈음이어선지 학생 두 명이 파이프 오르간을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악보를 보고 건반을 누르며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진지했다.우리 음악계의 미래인 학생들의 무한한 발전을 마음속으로 기원하며 돌아섰다. 김영의홀에 가기 전 출입문이 잠겼거나, 조명이 꺼져 있어서 홀의 전모를 보지 못할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불 밝힌 홀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가슴에 담은 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이화여대에 따르면 음악관은 지하 2층, 지상 6층 규모로 1981년에 완공됐다. 이 건물에는 김영의홀로 명명된 500여석의 대연주실, 국악연주실, 음악도서관, 관현악연습실, 시청각실 등 음악교육에 필요한 현대적 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음악대학이 전용하고 있다.인천 출신으로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을 졸업했으며,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서 유학한 우리나라 첫 피아니스트 김영의(1908~1986)의 흔적을 더듬었던 시간이었다.김영의의 대학 시절 이후의 활동들은 대체로 알려져 있으나, 인천에서 삶이나 흔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어린 시절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접한 음악과 스포츠 등이 20세기 중반 우리나라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을 것이다.김영의는 1920년 3월 영화학당 졸업 후 서울 이화학당을 거쳐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1924년 3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고교 졸업 즈음부터 뛰어난 피아노 솜씨를 선보였다고 한다.<영화 백년사>의 '멋쟁이 음악가 김영의 학장' 편에 고교 졸업 시기의 연주자로서 김영의에 대해 묘사된 대목이 있다. "그 당시 천부적 재질을 가진 김영의는 특히 음악에 뛰어난 솜씨로 피아노 건반위에서 손가락들이 번개같이 불꽃 튀기는 연주로 듣는 이들로 하여금 신비경으로 이끄는 무아지경으로 몰아넣어 황홀케 하여 서울 장안의 총인기를 끌기도 하였다."이 같은 음악적 재능을 더욱 연마하기 위해 1925년 3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입학해 음악이론과 피아노를 전공하고 1929년 3월 졸업했다. 그해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음악 강사로 부임해 2년간 있다가 1931년 3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조교로 자리를 옮겼다.언론인 홍종인(1903∼1998)은 '반도 악단의 만평'이라는 글을 통해 여러 음악인들을 하나하나 평가했다. 이 글은 1931년 6월 발간된 잡지 <동광>에 실렸다. "김영의 양 이전(梨專) 음악과를 나온 지 3년 퍽 실력 있다고 한다. 독주보다는 반주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만하면 퍽 능숙한 줄만은 믿으나 스테이지에서 좀 더 감격하여 보이는 듯한 침착미가 적어 보인다. 기량이 좋은 까닭인지." 아마도 홍종인은 충실한 전달자로서의 연주가 아닌 연주자 본인의 감정이 과하게 이입된 연주였음을 지적하는 듯하다. 글 말미 기량 자체는 인정하고 있다.이어서 <동아일보> 1935년 6월 20일자에 '김영의 양 송별 독주회'가 21일 오후 8시 이화여자전문학교 강당에서 열린다는 단신 기사가 게재됐다. 이 연주회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관 강당의 개관 기념 연주회이기도 했다. 그해 지어진 음악관은 당시로선 호화스러운 조명으로 장식된 무대를 갖췄다. 김영의는 강당 개관 기념과 자신의 고별을 겸한 연주회를 펼쳤으며, 청중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연주회 후 도미한 김영의는 1939년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각종 음악회에도 열심히 참관했으며, 연주회도 가졌다. 1937년 뉴욕인터내셔널하우스에서 한인들의 모임이 있었을 때 안익태가 첼로 독주를, 김영의가 피아노 독주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귀국 후 다시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45년 해방 직후 37세의 나이에 대학 음악과장과 예림원장(예술대학장)을 겸직했다. 1944년 경성음악연구원 창설에 참여하고, 1949년 문교부 내 설치된 예술위원회의 음악위원으로 선임 되는 등 연주와 교육 외에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 피난기였던 1951년 국방장관 신성모와 결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해 12월 문교부 요청에 따라 단과대 명칭이 바뀌면서 예림원장에서 예술대학장이 되었다. 1958년 미국 퍼시픽대에서 1년간 연구 후 귀국해 복직했으며, 1973년 정년퇴직했다. 퇴직 후에도 1977년 이화학당 재단이사장으로 있었으며, 1986년 11월 26일 타계했다.인천지역 문화계 원로 중 한 명인 김윤식 시인은 "우리나라 교육계의 초기 지도자로서, 음악계의 주춧돌로서, 그의 공로는 적다고 할 수 없다"면서 "그가 비록 고향 인천에 아무런 족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고 그의 모든 '한국적 업적'이 고스란히 우리 인천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김영의홀 출입구쪽 벽면에 장식된 동판. /이화여대 제공이화여자대학교 음악관 1층에 자리한 김영의홀에서 열린 연주회 모습. /이화여대 제공이화여자대학교 음악관 전경. /이화여대 제공김영의 박사 /이화박물관 제공

2018-12-06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6]하역원과 포맨

선박에 원료·제품 싣거나 내리는 역할 출항에 맞춰 신속하게 처리 정밀성 필요컨테이너·크레인 도입으로 맞은 '위기'내항TOC통합 등 변화 겪으며 활로 찾아최근 찾은 인천항 내항 부두. 한국지엠의 신차들이 부둣가 찬바람을 뚫고 파나마 선적(船籍)의 '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MEDITERRANEAN HIGHWAY)'호로 줄지어 오르고 있었다. 작업자들은 차량 전후 30㎝, 차량 좌우 10㎝의 빽빽한 간격으로 차를 손상 없이 실어야 한다. 그만큼 전문성이 필요하다. 시간당 60~80대 정도를 실을 수 있는데, 배가 출항하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작업 속도도 매우 중요하다. 정확한 수량을 파악하는 일 역시 이들의 몫이다. 배에서 먼저 내릴 차량을 가장 나중에 싣는 등 선적(船積) 순서도 신경 써야 한다. 이 배의 경우 총 15개 층으로 돼 있는데, 선적 순서가 뒤바뀌면 목적지에서 차량을 내리는 시간이 더 걸린다.차량을 직접 운전해 선내에 싣는 '드라이버', 실린 차를 정밀하게 주차하는 '키커', 키커가 정확한 위치에 차를 댈 수 있도록 돕는 '신호수' 등 하역원과 이들을 총괄 지휘·감독하는 '포맨' 간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이들은 배의 크기에 따라 십 수명씩 조를 이뤄 움직인다. 이번 선적 작업엔 80여 명의 인력이 6개 조로 구성돼 투입됐다. "하역원들을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라고 하면, 포맨은 지휘자"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들이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문제없이 작업을 마칠 수 있다는 의미다. 작업 현장에서 만난 포맨 송한섭(60) 감독은 "제품 손상 없이 계획된 물량을 무사히 소화할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지난 40여 년간 하역원과 포맨 등 하역업계에서 일한 그는 "조금만 일하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왔는데,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살다 보니 벌써 40년이 됐다"며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일이지만,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포맨 송한섭 감독을 비롯한 하역원들의 이번 작업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하역원은 부두에 있는 선박에 원료 등 각종 제품을 싣거나 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통칭한다. 항운노조가 하는 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납세는 양곡 같은 물건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양곡은 주로 배로 운송됐는데, 이때 양곡을 배에 싣거나 내리는 일을 했던 '조군(漕軍)'이라는 하역 인부가 오늘날 하역원의 시초격으로 평가된다.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을 제공해 생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지금과 비슷한 측면이 많다.1883년 인천항 개항 후 물동량이 증가하면서 하역원을 포함한 부두노동자들이 늘어났다. 항만설비의 확충으로 하역기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부두노동자들도 하역산업의 전문 노동자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노동력 착취와 한국전쟁의 어려움을 거친 하역업계는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경제적인 상태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인천항의 물동량 증가가 주된 요인이었다. 관련 통계에 따르면 1962년 130만8천828t을 기록했던 인천항의 화물하역실적은 1972년 949만5천105t으로 7배 이상 늘어났다. 이듬해(1973년)엔 1천509만2천830t으로 더욱 늘었다. 경제개발 추진에 따른 생산 규모 대량화와 유통 물량 팽창이 원자재와 생산품의 수출입 확대로 이어졌다. 이후 항만에 모습을 드러낸 '기계'는 하역원들을 위축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게차와 크레인이 대량 도입돼 무거운 화물을 내리는 일에 투입(1966년)됐고, 고철 작업 등을 하는 마그넷(자석)도 사용되기 시작(1968년)했다. 인천항 양곡 전용부두엔 진공 흡입식 사일로(silo)가 설치(1974년)되기도 했다. 수송과 하역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온 '컨테이너'는 1970년대 초반 인천항에 모습을 나타냈다. 대한통운이 1970년 3월부터 인천항에 컨테이너선을 월 2회 정기 취항하기로 하는 등 컨테이너 운송을 본격화했다. 당시 인천항엔 1천여 명의 항만 노무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포함된 노동조합은 진정서를 내고 대량실업 방지 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1980·1990년대 산업화에 힘입어 인천항은 수도권 최대 항만으로 성장했고 하역원을 비롯한 하역업계는 항운노조 상용화 개편(2007년), 내항 TOC(부두운영사) 통합(2018년) 등 변화를 거치며 인천항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인천항 내항에서 만난 경력 25년의 포맨 김종현(60) 감독은 "불철주야 주어진 작업을 성실히 하고 있지만, 컨테이너가 아닌 물동량 규모가 줄어들고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그의 말 속에선 위기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인천항 내항의 지난해 기준 벌크(비컨테이너) 물동량은 2천353만3천t을 기록했다. 10년 전인 2007년 4천250만t에 비해 절반 가깝게 줄어든 것이다. 수년째 내리막이다. 벌크 화물이 진보된 컨테이너로 흡수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이런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평택항, 군산항 등 인접 항만과의 벌크 물동량 유치 경쟁도 심화되고 있다. 내항을 포함한 인천항 전체 벌크 물동량은 최근 몇 년째 1억1천여t 수준에서 정체돼 있다. 지난해 3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돌파하는 등 매년 증가세를 보이는 인천항 컨테이너 물동량과 대비된다.김종현 감독은 "펄프 같은 경우 대부분 인천에서 처리돼 지방으로 갔는데, 지금은 대부분 평택이나 군산항으로 빠졌고, 벌크로 들어오던 납이나 알루미늄괴(塊), 원목 등은 요새 컨테이너로도 많이 들어와 내항 물동량이 줄어드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어 "인천항 하역과 관계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몇천 명은 될 것"이라며 "(관계 기관들은) 인천항의 (비컨테이너) 물동량 확보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송한섭 감독은 "우리 손을 거친 제품들이 북중미든, 동남아든 해외 여러 나라에 대한민국을 알린다는 자부심으로 지금껏 일해왔다"며 "더욱 안전에 신경 쓰고 '하역만큼은 인천항이 최고'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항 내항 부두에서 하역원들이 한국지엠의 신차를 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에 선적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로 줄지어 오르고 있는 한국지엠 신차들.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에 선적되는 차량마다 바코드를 찍어 확인하는 모습.

2018-12-05 이현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