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1]황해남도 해주시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下)

용당포항 조성 이후 1930년대 고속성장누정 '부용당' 위치한 도청 인근에 살아황해도 행정중심이자 최대 '조기' 산지뱃길 30㎞ 연평도, 인천 편입전 해주권평양과 함께 '냉면 본산'으로 꼽히기도김구·안중근 고향… 장길산 주요 무대소설 속 인물·상권 남·북이 얽히고설켜실향민 호성신(81) 할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도청 소재지 해주시(海州市)이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 황주(黃州)와 해주의 이름을 따서 생겨난 황해도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4년 황해북도와 황해남도로 나뉘었고, 도청도 황해북도는 사리원시에, 황해남도는 해주시에 따로 뒀다.하지만 호성신 할아버지를 비롯한 황해도 실향민들은 여전히 고향을 '북도'와 '남도'로 구분하지 않는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태어난 1936년 당시의 해주는 전국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도시 중 하나였다. 해주 남단 바다인 용당포(龍塘浦)에 근대 항만을 조성하는 축항공사가 마무리된 1930년 10월 이후부터, 해주는 재령평야와 연백평야 같은 황해도 곡창지대에서 생산한 쌀이 용당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수탈기지'가 됐기 때문이다.항만 조성에 이어 용당포항을 중심으로 황해도지역 철도망이 해주에 집결했다. 일본은 용당포항 조성 이전까지 황해도 곡창지대의 쌀을 인천항이나 평안도 진남포를 통해 수탈해갔다. 손정목(1928~2016) 전 서울시립대 도시과학대학 교수가 1996년에 펴낸 '일제강점기 도시화과정 연구'를 보면, 해주 인구는 1930년 2만3천820명에서 1935년 3만447명, 1940년 6만2천651명으로 급증했다. 1930년대 인구 증가율로만 따지면 162.6%로 전국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호성신 할아버지가 살던 해주시 선산동도 황해도청이 멀지 않은 도심지였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해주에서 목수였다고 한다."여기저기 건축 공사가 많아서 아버지 목수 일도 호황이었어. 논밭은 시내 외곽으로 가야 볼 수 있었고, 우리 동네는 기와집 촌이었어. 도로가 닦이면서 동네에 오거리가 생기기도 했지. "당시 황해도청은 옛 해주읍성 자리인 부용동에 있었다. 할아버지 옛집이 있던 선산동의 북동쪽이다. 도청 앞 연못에는 1500년(연산군 6년)에 건립된 누정(樓亭)인 '부용당(芙蓉堂)'이 있었다. 앞채는 연못 가운데에 'ㄱ'자형으로 지었고 뒤채는 연못 바깥에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했다. 부용당은 임진왜란 때 선조(재위 1567∼1608)가 의주로 피란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던 1593년 8월 18일부터 9월 22일까지 한달여간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선조가 친필(어필·御筆)로 '부용당'을 써서 현판으로 걸었다는 기록도 '정조실록'에 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연못에 연꽃이 만발할 땐 아주 운치가 좋았고 절경이었다"며 "보통학교(초등학교) 다닐 때 부용당으로 소풍을 가곤 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부용당은 한국전쟁 때 소실돼 돌기둥과 주춧돌만 남았다. 북한은 그 터를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68호로 지정했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해주에 살던 당시에는 용당포 쪽으로 대규모 시멘트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 우베(宇部)시멘트회사가 설립한 '조선시멘트회사'로 할아버지가 태어난 이듬해인 1937년 6월부터 가동했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25일자 신문을 보면, 조선시멘트회사 해주공장은 연간 생산능력이 57만t으로 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다. 현재까지도 해주는 북한의 최대 시멘트 생산기지이고, 제철·제강, 제지, 섬유 등 각종 산업이 발달한 공업도시다. 해주항은 인천세관에서 관할했다.해주의 공업도시화로 항만 수요가 점점 늘어나자 1940년 8월 인천세관 해주지서가 신설됐다. 해주는 조선 때부터 황해도의 행정중심지였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지역이 넓고 백성이 많으며, 관서(關西)의 큰 주(州)'라고 설명한다. 부용당 같은 화려한 누정이 해주 관청 앞에 있었던 것도 지금의 도지사 격인 황해도 관찰사가 해주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또 해주는 한때 국내 최대 조기 산지이기도 했다. 지금은 인천 옹진군에 속한 연평도가 1945년 11월까지 황해도 해주의 섬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해주의 토산물로 가장 먼저 조기를 소개하며 '남쪽 연평평(연평도)에서 나고, 봄과 여름에 여러 곳의 고깃배가 모두 이곳으로 모이어 그물로 잡는데, 관에서 그 세금을 거두어 나라 비용에 쓴다'고 나온다. 조선 초기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연평도 조기잡이는 일제강점기에도 전국 최대 규모의 '파시(波市·해상시장)'로 번성했는데, 남획이 심해지면서 1960년대 말부터 조기의 씨가 말랐고 결국 그 맥이 끊기고 말았다. 황해도지편찬위원회가 1981년 발간한 '황해도지'에는 1940년 해주의 조기 어획고는 2만8천986t으로 전국 생산량의 80%를 차지했다고 나온다. 연평도와 해주까지의 거리는 뱃길로 약 30㎞, 연평도와 인천 간 거리는 뱃길로 122㎞다. 연평도는 남북 분단과 함께 경기도를 거쳐 인천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해주 문화권이었다. 조기파시로 한때 돈이 넘쳐나던 연평도에서 "연평어업조합장 했지 황해도지사 안 한다"는 말이 유행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동아일보 1940년 1월 9일자는 김삼소(金三笑)의 '돈실러가세'를 신춘 민요 당선 기사를 실었다. '가세나 가세나 돈실러 가세나 해주 연평 섬에 돈 실러 가세나 봄이면 조기 한 철 황금물결이 섬바위에 넘실넘실 손짓을 하네 에헤이요 닻 감아라 돛을 달아라.'호성신 할아버지는 해주시장에 조기가 가장 많았고, 조기 못지않게 까나리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자 황해도민회 임원이기도 한 송용순(97) 할머니를 찾았다.할머니는 20대 중반까지 해주 시내에 살다가 1947년 서울로 피란을 왔다고 했다. 송용순 할머니는 "조기철이면 연평에서 올라온 굴비를 사가려고 용당포에 사람이 바글바글했고, 용당포 근처만 가도 굴비냄새가 났다"며 "아버지가 지주였는데, 소작인에게 쌀과 함께 굴비를 봉급으로 줬을 정도로 흔했다"고 회상했다.조기 말고도 먹을 게 넘쳐났다. 해주는 평양과 함께 냉면의 본산으로 꼽힌다. 해주냉면은 메밀에 전분을 섞어 평양냉면보다 면발이 굵고, 소고기가 아닌 돼지고기 육수를 많이 쓰는 게 특징이다. 백령도의 사곶냉면이 바로 '해주식'이라는 게 음식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평양과 해주가 냉면으로 유명한 까닭은, 두 지역 모두 각 도의 중심지로서 '기방(妓房)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고, 냉면은 기방에서 양반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라고 '냉면열전'(2014)이란 책은 분석한다. 양반들이 주로 먹던 냉면은 근대 이후 서민층으로도 확산해 1934년 기준 해주에는 냉면 전문점 67곳이 성업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1569 ~1618)은 우리나라 명물 토산품과 별미음식을 소개한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해주의 별미로 해조류인 '참가사리', '황각', '청각'을 꼽았다. 최영년(崔永年·1859~1935)이 1925년 쓴 '해동죽지(海東竹枝)'에서는 숭어, 잉어, 조기, 도미 등을 구운 뒤 갖가지 채소, 버섯, 당면을 넣어 끓인 전골인 '승가기(勝佳妓)'를 해주의 명물이라고 했다. 해주가 마냥 풍족한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 박만정(朴萬鼎·1648~1717)이 1696년(숙종 12년) 3월부터 두달여간 황해도지역 암행어사로 활동했을 당시를 일기로 쓴 '해서암행일기(海西暗行日記, 2015, 서해문집)'를 보면, 신분을 숨긴 박만정 일행이 해주의 한 마을에서 하룻밤 묵을 곳조차 찾지 못하고 문전박대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와집이 연이어 있어 부촌 같아 보였으나, 흉년이 심해 인심도 야박했다. 박만정은 해주를 포함한 황해도 곳곳에서 기아에 허덕이다 못해 얼굴이 부어오른 백성들의 몰골을 목격한다.해주는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의 고향이다. 김구는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해주읍 서쪽에 80리 떨어진 백운방(白雲坊) 텃골'이라고 고향을 설명했다. 10대 후반의 김구는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해 동학군 선봉대를 이끌기도 했다. 당시 김구는 황해도 동학교도 대표단으로 뽑혀 충청도 보은에 있는 제2대 동학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을 만나기도 했는데, 일행은 이때 해주의 대표적인 토산품인 '해주먹(海州墨)'을 선물했다고 한다. 해주산 송연(松煙·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으로 만든 먹은 전국에서 으뜸으로 쳤다.지난 9월 2일부터 두 달 가까이 호성신 할아버지 취재가 이뤄지는 동안 할아버지의 고향 자랑은 명승지, 토산물, 음식, 산업, 인물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끊이질 않았다. 할아버지는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도 해주 출신인데 깜빡했다"며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던 기자를 붙잡아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기도 했다. 조선의 3대 도둑 중 하나인 장길산(張吉山)의 일대기를 그린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의 한양과 그 주변, 황해도 등지가 주요 무대다. 강화와 교동 또한 소설에서 많이 언급되고, 백령, 대청, 연평 등 서해5도도 아우른다. 소설 초반부터 장길산을 중심으로 강화에서 장사에 눈을 뜬 송상(松商) 박대근, 해주의 신복동 패거리, 용당포의 선상(船商) 임유학, 연평 출신의 뱃사공 우대용을 비롯해 인천과 황해도가 연관된 주요 인물들이 얽히고설킨다. 강화, 개성, 해주 용당포 같은 한강 하구 연안의 해상물류거점을 둘러싼 상권 다툼이 소설 속에서 치열하게 전개된다. 소설 '장길산' 속 배경이 남북으로 갈린 지금은 전혀 딴 세상 이야기다. 백범 김구와 소설 '장길산'의 흔적을 따라 인천과 해주를 오가며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언제쯤 올까. 호성신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통일되긴 다 틀린 것 같다"면서도 "멀지 않은 고향 땅인데 꼭 한번은 다시 밟아보고 싶다"고 소망했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한국전쟁 이전으로 추정되는 해주시 전경. 출처/'황해도지'(1981)축항공사를 끝낸 해주 용당포항. 출처/'황해도지'(1981)한국전쟁 때 소실된 해주 부용당의 옛 모습. 북한은 돌기둥과 주춧돌만 남은 부용당 터를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68호로 지정했다. 부용당 너머로 황해도청 청사 건물도 살짝 보인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7-10-25 박경호

[zoom in 송도]'제2회 희망계단오르기' 28일 송도 G타워서

작년 11월에 첫 행사 400명 참가올해 적십자·경인일보 공동주최참가비는 의료·교육·생계비 기부걸그룹 공연·VR체험등 이벤트도인천 송도국제도시 G타워에서 희망 계단 오르기 대회가 오는 28일 열린다.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는 28일 오전 10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G타워에서 '2017 제2회 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를 개최한다.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는 다가올 겨울에 추위와 허기 등 위기에 놓인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행사다.참가자들이 낸 참가비(일시기부 1만원 또는 정기후원 5천원)는 위기가정 어린이들의 의료·교육·생계비 등으로 사용된다. 작년 11월 열린 1회 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에는 약 400명이 참가했으며, 정기후원에 130여 명 참여하고 일시기부는 약 2천800만 원이 모였다.올해 행사는 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와 경인일보가 공동 주최한다.한국토지주택공사 인천지역본부, 우리은행 연수동지점, 국민은행 인천남지역영업그룹, 한국자산관리공사 인천지역본부 등이 후원 기관으로 참여한다.대회 참가자는 기업인, 개인, 단체 일반 신청자 등 약 500명이다.이들은 이날(28일) G타워 로비에서 33층 전망대까지 계단을 오르게 된다.이색 복장으로 계단을 오르는 이벤트 경기, 건강을 위해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건강 나눔 완주 경기, 개인·단체별 기록 측정 경기 등으로 구분된다.행사 전에는 재능기부 공연과 참가자들의 안전을 위한 간략한 건강검진 및 준비체조가 진행된다. 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응급처치 전문강사, 간호사, 안전요원, 구급차 등을 행사장에 배치한다.행사 사회는 개그맨 김인석이 맡는다. 공연에는 비타민엔젤(걸그룹), 정윤호 매직아티스트(마술 공연), 엠제로(힙합가수) 등이 참여하며 VR 체험, 캐릭터 포토 타임 등 다채로운 체험 행사가 열린다.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는 실생활 계단 오르기 운동을 확산하기 위한 행사이기도 하다.계단 오르기 운동은 짧은 시간에 하체 근육을 단련하는 데 최적이고, 걷기보다 칼로리 소모량이 많다. 보건복지부는 일상생활 속 비만 예방 실천법으로 '계단 이용하기' '걷기' '음료 대신 물 마시기' 등을 독려하고 있다.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 관계자는 "건강한 삶과 나눔을 주제로 한 행사"라며 "인천 시민과 기업의 사회적 나눔 의식을 확산하고, 송도국제도시 랜드마트 건물인 G타워를 홍보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G타워는 2013년 5월 완공된 지하 2층 지상 33층 규모 건물로,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GCF(녹색기후기금) 등 국제기구들이 입주해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지난해 열린 제1회 G타워 계단오르기 대회 모습. /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 제공

2017-10-22 목동훈

[zoom in 송도]송도에 글로벌패션스쿨 '활짝'

한국뉴욕주립대학교(총장·김춘호)는 지난 19일 세계 5대 패션스쿨인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의 한국 개교 축하행사를 성황리에 개최했다.한국뉴욕주립대 FIT는 미국과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교한 것으로, 한국뿐만 아니라 주변 아시아 국가 학생들에게도 FIT를 가까이 만날 기회를 제공하게 됐다는 의미가 있다.이날 행사에는 뉴욕 FIT 총장 조이스 브라운(Dr. Joyce F. Brown)을 비롯해 스토니브룩대학교 총장 사무엘 스탠리(Samuel L. Stanley, Jr. MD), 오명(한국뉴욕주립대 명예총장) 전 부총리, 송영길(전 인천시장) 국회의원, 김진용 인천경제자유구역청장 등 여러 정부기관 및 패션업계 관계자 등 800여 명이 참석했다.뉴욕 FIT 총장 조이스 브라운은 "FIT 뉴욕 외에 세 번째 글로벌캠퍼스를 한국에 오픈하게 된 것이 너무 감격스럽다"며 "여러 아시아권 학생들이 한국뉴욕주립대 FIT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국뉴욕주립대 김춘호 총장은 "FIT 개교로 5개의 스토니브룩 학위 프로그램에서 추가로 2개의 FIT 학위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며 "우수한 패션 인재가 많이 배출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이날 식전 행사로는 한국뉴욕주립대 C동 앞에서 리본 커팅식이 있었다. 본 행사는 가수 소향과 아이돌 그룹 더 킹의 축하 공연, 루마니아 크라이오바 올테니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회, 패션쇼 등으로 다채롭게 꾸며졌다.2012년 개교한 한국뉴욕주립대는 한국정부가 국가사업의 하나로 유치한 학부와 석박사를 모두 갖춘 국내 최초의 미국 대학교다.미국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대학교를 시작으로 이번 가을학기에 패션 명문 스쿨 FIT를 개교했다. 두 학교 모두 홈캠퍼스인 스토니브룩과 FIT의 교수진 그대로 동일한 커리큘럼을 제공한다. 졸업 시 각각 홈캠퍼스인 스토니브룩과 FIT 학위를 받게 된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FIT 개교 축하행사 리본 커팅 세리머니. /한국뉴욕주립대학교 제공

2017-10-22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0]황해남도 해주시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中)

크고 작은 기지 광범위하게 분포… 옷·음식 등 경제 영향력주둔 초기부터 범죄·기지촌 조성 등 심각한 사회적 문제도미군 장교 운전수·배차담당·중장비 하역감독 등 20년 일해월미도·중부서 자리 해상수송부 등 옛 위치 하나 하나 짚어부대 규모·기능 등 체계적 정리 없어… 할아버지 증언 의미황해도 해주 출신 호성신(81) 할아버지는 21살 되던 해인 1957년부터 20년 가까이 인천에 있는 미군부대 여러 곳에서 근로자로 일했다. 월미도 미군부대 장교 운전수로 시작해 미 해군 해상수송부 장교 운전수, 부평미군부대 차량 배차담당, 인천항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을 차례로 맡았다."참 팔자가 좋았던 시절이야. 미군부대에서 장교를 상대하니까 혜택도 많고, 잘 보이려는 사람도 많고. 덕분에 보라색 양복 쫙 빼입고 신포동에서 오토바이 타고 다녔지."인천은 항만을 낀 데다 수도권이라서 해방 직후부터 곳곳에 미군부대가 들어선 '미군기지의 도시'였다. 군사장비와 시설을 운용하는 데 필수인 기름부터 미군 병사들이 먹는 빵까지 대부분의 미군 군수물자는 인천에서부터 전국의 미군기지로 퍼져나갔다. 미군 전용철도도 거미줄처럼 도시에 깔렸었다. 이렇다 보니 호성신 할아버지 같은 미군부대 근로자는 물론 인천 지역사회 전반에 걸쳐 이른바 '미군부대 경제'가 끼친 영향력이 지대했다. "옷, 음식, 약품까지 미군 PX물자가 어마어마하게 밖으로 흘러나왔고, 미군부대 출입증이 비싸게 거래됐어. 미군 기름창고에서 기름 빼돌리는 사람도 많고, 기지촌에 양색시도 많았고…. 솔직히 미군 때문에 먹고 산 사람이 인천에 많아."반면 미군의 한반도 주둔 초기부터 발생한 미군 범죄나 기지촌 조성 등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불거지기도 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인천항 부근과 월미도부터 남구 숭의동, 용현동, 학익동, 문학산 일대까지 크고 작은 미군부대가 광범위하게 분포했다. 부평지역은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애스컴(ASCOM·Army Support Command)'을 비롯한 미군부대가 대거 몰려있어 '애스컴 시티'라 불리며 도시 자체가 군사기지나 마찬가지였다. 현재 인천에는 부평 '캠프마켓(Camp Market)'과 강화도에 극히 소규모 부대만 남았을 뿐이고, 그 미군부대 터는 공원이나 아파트단지 등으로 바뀌었다.미군의 한반도 상륙 출발점은 1871년 강화도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미군의 첫 교전인 신미양요(辛未洋擾)다. 이어 미군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두 번째로 한반도에 상륙했다. 당시 인천항에 몰린 환영 인파에 일본 경찰들이 치안 유지를 내세워 총격을 가해 2명이 숨졌다. 서울신문사가 1979년 펴낸 '주한미군 30년(1945~1978)'에서는 당시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패전국 일본의 경찰이 승전국인 미군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승전국도 패전국도 아닌 한국인에게 발포한 불법 총격이었다. 해방을 맞고서도 일본 경찰에게 총격을 당한 인천시민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맞서 싸울 총도, 정부도 없던 이들은 이틀 후 두 사람의 사망자를 시민장(市民葬)으로 치르는 것으로 무력함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주한미군 규모는 1948년 5월 기준으로 약 3만명에 달했다. 인천항 주변과 일본군 군수기지인 부평 조병창도 미군이 접수했다. 다음은 소설가 이원규가 해방 직전부터 한국전쟁까지의 인천을 다룬 장편소설 '황해'(1992)에서 묘사한 해방 후 인천항 주변 풍경이다. '인천항은 온통 미군 함정들로 가득차 있었다. 반도 중부의 보급항 구실을 하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아구리배라고 부르는 수송선들이 큰 입을 벌려 물자와 병력을 내려놓고, 외항에는 구축함과 순시선들이 떠 있었다. (중략) 남루한 옷을 걸친 아이들은 미군들에게 매달리며 어떻게들 배웠는지, 헤이 지아이 넘버원 기브미 추잉껌, 기브미 쪼코레트, 하며 따라붙었다.'1949년 6월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서 철수한 미군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해 9월 15일 연합군을 이끌고 인천에 세 번째로 상륙했다.연합군의 상륙지점 중 하나인 월미도는 인천상륙작전 이후부터 미군이 '징발'해 미군부대를 구축, 미군이 떠나간 1971년까지 20년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됐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월미도에 살던 주민들은 졸지에 실향민이 되기도 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1957년부터 2년 정도 월미도 미군부대에 근무했다. 월미도 미군부대 땅은 인천시가 국방부로부터 사들여 2007년 월미공원을 조성했다.지난 추석 명절 직전인 9월 29일 호성신 할아버지와 월미공원을 찾았다. 할아버지는 옛 기억을 곱씹으며 옛 미군부대 시설이 있던 자리를 하나하나 짚어냈다. 월미공원 정문이 바로 미군부대 정문이었다고 한다. 현 미추홀 전통문화음식연구원 건물 자리는 장교 숙소였고, 주요 시설은 전통공원이 조성된 자리에 몰려있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공원 내 동물원이 할아버지가 장교 차량 운전수로 근무하며 주로 머물던 수송대(모터풀·Motor pool) 터라고 했다. 각종 기록을 보면, 월미도 수송대의 부대명은 미 제202수송대대다. 할아버지가 몰던 차는 쓰리쿼터(3/4t) 트럭 같은 군용차가 아니라 포드(Ford) 승용차였다. "라이브러리(library·도서관), 피엑스(post exchange·군부대 매점), 짐나시움(gymnasium·체육관)도 갖췄고 없는 게 없었어. 부대 내 한국인 근로자들은 100명쯤 됐던 것 같아."월미도 미군부대에는 미군 병사의 각종 법무를 처리해주는 법무사무소(Legal office)도 있었다고 한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미군 병사와 한국 여성이 리걸 오피스에서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이현호라는 한국사람이 리걸 오피스 사무원으로 일해 영어로 전화받으면서 타이프도 쳐서 유명했는데, 미국으로 이민갔다"고 회상했다. 소설가 오정희는 1979년 발표한 단편 '중국인 거리'에서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월미도 미군부대 인근 인천차이나타운을 그렸다. 소설 속 미군 병사는 호기심으로 미군부대를 훔쳐보던 동네 꼬마들을 향해 칼을 던지며 놀려댔다. 소설 속 아이들이 '양갈보'라고 칭하는 한국인 여성들은 일본인들이 살던 그 가옥에 거처하면서 미군 병사를 상대했다. 소설 '중국인 거리'처럼 미군 병사가 여성을 살해한 사건도 실제로 다수 있었다.호성신 할아버지는 현 인천중부경찰서 자리에 사무실을 둔 미 해군 해상수송부(MSTS·Military Sea Transportation Service)로 자리를 옮겨 10여 년 동안 미 해군 부대장의 차량 운전수로 일했다. 미 해군 해상수송부는 부대장을 포함해 8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인천항에 미 군함이나 군용수송선이 들어오면 행정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는 게 할아버지 설명이다. 미 해군 해상수송부 바로 옆에는 미 헌병대가 있었다고 한다. 미군 범죄수사대(CID)도 인근에 있었다. 근처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맞은편 선구점 거리에는 'US호'라는 간판을 단 미군만 출입할 수 있는 스낵바도 영업했다고도 했다. 중구 수인사거리에 있는 삼익아파트 자리에는 제법 규모가 큰 미군 PX창고가 있었는데, 여기서 '미제 군수품'이 민간으로 많이 빠져나왔다고 한다. '주한미군 30년(1945~1978)'을 보면, 1950년대 말 전국에 120곳이 넘는 미군 PX에서 취급한 물품의 60%는 시중으로 흘러나갔다고 추정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나도 해군 중령 자동차 시트 밑에 물건을 숨겨다가 밖으로 뺐다"며 "화수동에 집을 지을 때는 흑인 병사가 각종 건축자재를 갖다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남구 용현동과 학익동에는 미군 유류저장소(POL)와 이를 관리하던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다. 문학산 정상은 1959년부터 미군이 차지하다 1979년 한국군 공군이 인수했고, 2015년에야 개방됐다. 분단과 인천 미군부대를 소재로 여러 작품을 쓴 인천 출신 이원규(70) 작가는 "부평미군부대 폐품처리장에서 나온 맥주 깡통을 펴서 집 지붕으로 만든 사람도 있고, 양공주도 100명 넘게 봤다. 미군부대에서 경비로 일한 외가 친척이 준 미군 워커는 고등학교 내내 신고 다녔다"며 "미군부대는 인천사람들에게 삶의 일부였다"고 유년시절을 회상했다. 부평 애스컴으로 자리를 옮긴 호성신 할아버지는 운전수로 일하다가 차량 배차담당을 맡았다. 할아버지는 "애스컴 앞은 전부 색시촌과 맥주홀로 쫙 깔려있었다"며 "흑인은 흑인끼리 백인은 백인끼리 따로 놀았다"고 했다. '주한미군 30년(1945~1978)'에서도 신촌이라 불린 부평미군부대 앞에 대해 '서부영화에 나오는 미국 개척도시보다 더욱 미국적이었고, 밤의 여인들의 숫자는 한때 2천명을 훨씬 상회하기도 했다'고 나온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애스컴에서 인천항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으로 승진했다. 해방 이후(1949년 미군 철수~한국전쟁 발발 사이는 제외) 인천항은 미군항만사령부(1958년 애스컴 편입)가 '징발'해 주둔한 미군용부두와 일반부두로 나뉘어 운영됐다. 미군용부두 내에는 미군 공병부대도 있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한다. 미군이 미군용부두를 '징발 해제'해 운영권이 한국 정부로 넘어온 때는 1971년 6월이다. 인천에 미군부대가 정확히 어느 정도 규모로 어디에 위치해 있었고, 그 기능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이제는 미군부대를 기억하는 이들도 흔치 않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단편적이나마 되살려낸 인천 미군부대에서의 경험은 그래서 더욱 귀하게 다가온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황해도 해주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가 1950년대 말 근무했던 월미도 미군부대 내 장교 숙소가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인천항과 월미도 일대에 있었던 미군부대를 포함한 주요 시설을 표기한 지도(작성 연도 미상). 월미도에 검은 사각형으로 표기된 미군부대 건물 배치 현황은 호성신 할아버지 기억과 상당히 일치한다. 할아버지가 장교 운전수로 근무했던 미 해군 해상수송대(MSTS)를 비롯해 미 헌병대, 공병부대도 지도에 표시돼 있다. /부평역사박물관 제공미군부대에 근무하던 시절 받은 문서를 설명하고 있는 호성신 할아버지.

2017-10-18 박경호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9]황해남도 해주시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上)

목수였던 부친, 넉넉한 형편 불구부녀자 희롱 등 심해져 월남 결심개성구호소 거쳐 인천으로 '이주'전쟁 터져 목포에 잠시 머물기도고교땐 짝사랑 따라 서울로 통학졸업 후 미군부대 운전기사 취직영어공부 덕에 정식 군무원 '승진'영진공사로 옮겨 바레인서도 일해대한항공 '인연' 고속버스 기사로이후 30년째 고령에도 택시 몰아황해남도 해주에 살던 호성신(81) 할아버지는 1947년 인천 동구 화수동으로 내려왔다. 한국전쟁 때 잠시 전남 목포로 피란을 떠난 것을 제외하곤 고향을 떠나온 70년 세월을 한동네에 살고 있다. 할아버지는 30년 경력의 현직 개인택시 운전사이다.인천에 80대 이상 고령의 택시운전사는 호성신 할아버지를 포함해 14명뿐이다. 할아버지의 운전 내력을 보자니 첫 근무지였던 인천 미군부대 역사까지 살필 수 있다. 우리나라 중동 진출 현장인 바레인에서도 일했다.호성신 할아버지가 태어난 해주시 선산동 28은 황해도 도청 인근의 도심지였다. 할아버지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집 짓는 목수였는데, 솜씨가 뛰어나 일이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덕분에 집안 형편도 넉넉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한다. 고향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이렇게 4식구가 함께 살았다.하지만 해방 후 소련군이 38도선 이북에 주둔하고 정세가 급변하자, 단란했던 할아버지네에도 위기가 닥쳤다. 할아버지는 소련군 병사가 어머니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했던 기억을 힘겹게 꺼냈다. 초등학생이던 10살 때 일이다."1946년 여름이 지나서부터 소련군이 해주에 엄청나게 들어왔나 봐.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면서 물건도 빼앗고 부녀자들 희롱하고 횡포가 심했어. 소련군 병사가 우리 집에 막 들어와 어머니를 해코지하려고 해서 부엌으로 숨고 그랬는데…. 그 일이 있고 아버지가 이남으로 내려가자고 결심했지. 아버지가 (해방 전에) 일본사람들이랑 같이 근무하며 어울린 것도 월남한 이유 중 하나야."호성신 할아버지 가족은 1947년 봄에 새벽을 틈타 남쪽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는 거울 속에 돈을 숨겼고, 어머니도 배에 전대를 차서 담을 수 있는 만큼 돈이 될 만한 것을 담았다. 그게 할아버지 식구가 가지고 내려온 전 재산이다. 군인이던 친척이 식구들을 체포해 가는 것처럼 꾸며 해주 남쪽 바닷가인 용당포로 데려가 줬다고 한다. 친척이 미리 준비해준 조그만 목선을 얻어탔다. 바지락을 싣는 배였다. 배 밑에 어머니와 남매가 숨었고, 아버지는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뱃사공과 함께 노를 저어 갔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질퍽질퍽한 갯벌에 배가 닿은 뒤 남한 경찰 2명에게 발견됐다. 남한 경찰은 할아버지 식구를 개성에 있는 월남인 수용소인 개성구호소로 보냈다. 1946년 중반 북쪽이 토지개혁 같은 체제정비를 본격화하면서 38도선을 넘어 남한으로 들어온 이북 출신 주민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미군정은 개성, 의정부, 동두천 등에 임시 이재민구호소를 설치해 북쪽 주민들을 며칠간 머물게 하고 전국 각지로 이주시켰다. 1947년 4월 말 기준으로 월남 인구가 45만명을 돌파했다고 동아일보는 1947년 5월 31일자에서 보도했다. 당시 인천에도 5만 명 넘는 북한 출신 주민이 정착했다. 같은 시기 수도 서울로 유입된 북한 주민은 약 11만2천명이었다. 해방 직후 인천에서 태동한 대중일보는 인천에 실향민이 몰리자 개성으로 특파원을 보내 구호소를 취재하기도 했다. 대중일보 1947년 11월 18일자는 실향민들이 대개 옹진에서 배를 타고 청단으로 건너와 기차를 타고 토성을 거쳐 개성에 이른다고 실향민 이동 경로를 파악해 보도했다. 개성구호소는 미군 천막을 치고 내부에는 접이식 침대가 2열로 놓여 있었다. 천막 수는 총 82개인데, 한 천막에 35~40명을 수용했다. 구제품은 거의 '운라(UNRRA·연합국구제부흥기관) 구제품'이었다고 한다. 당시 실향민들은 대부분 침구와 옷가지를 준비해 내려왔고, 현금도 1천원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고 대중일보는 전했다.호성신 할아버지네는 개성구호소에 4일 정도 머물다가 인천 동구 화수동으로 이주해 판잣집에 살았다.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다시 목수 일을 하면서 인천에 정착하기 시작할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송림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다."6·25가 일어나자마자 월미도로 건너가는 길목에 지금 있는 선창산업 공장 쪽에서 화물선 타고 많이들 피란길에 올랐어. 이북 출신이 많았을 거야. 원래는 부산에 가기로 했는데 파도가 너무 심해서 목포에서 멈췄지. 목포역 앞에 있던 커다란 창고가 피란민 수용소였는데, 5개월 정도 지내다가 아버지가 화수동으로 돌아가자고 해서 다시 인천으로 올라왔어. 아버지가 목수 일감 찾으면서 빵 장사도 하고, 담배도 말아서 팔고 하면서 우리 남매를 키웠어."전쟁통에 인천으로 돌아온 호성신 할아버지는 1947년 허섭(許燮·1925~2010)이 설립한 성광중학교를 다녔다. 남구 도화동 선인중학교의 전신인데, 할아버지가 학생일 때는 동구 만석동 현 삼화제분 인천공장 자리에 있었다. 허섭은 성광중학교로 출발해 1953년 재단법인 성광학원을 설립, 인천에서 성광고등학교, 성광고아원도 운영했다. 그러다 갑자기 1950년대 중후반 군 장성인 백인엽(白仁燁·1923~2013)에게 성광학원을 넘겼다. 이때 출범한 게 한때 국내 최대 사학으로 이름을 떨친 선인학원이다. 이 선인학원은 나중에 사학비리가 문제가 돼 진통 끝에 사회환원 조치됐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성광학원 설립자 허섭을 "엄청난 부자였다"고 기억했다. 그런데 성광학원을 백인엽이 인수할 당시에는 사정이 달랐던 듯하다. 사회운동가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2009년 쓴 자서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는 1956년 여름 허섭을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백기완 소장은 '그즈음 그분은 준심(정권)을 쥐고 있던 이승만의 자유당이 못살게 굴어 손수 일군 인천 성광고아원과 성광상업선배울(고등학교)을 빼앗기고선 서울 마포 구석에서 남의 집을 빌려 살고 있는 터라'고 언급하며 어려운 처지에서도 경제적 보탬을 준 허섭에게 감사를 표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 성북동 성북고등학교(현 홍익대 사대부고)에 진학했다. 짝사랑했던 동네 여학생이 용산에 있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간다기에 함께 경인선을 타고 통학하기 위해서였다. 그 여학생과는 단지 짝사랑으로 끝나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곧바로 운전면허를 땄다. '취직할 때 써먹을 데가 있겠지'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1957년 초반 인천시청(현 중구청) 쪽 시내에서 월미도 미군부대 근로자를 모집한다는 팻말을 봤다. 돗자리가 깔린 바닥에 수십 명이 앉아있었다. 호성신 할아버지도 냉큼 돗자리에 앉았는데, 운전면허가 있는 사람은 할아버지뿐이었다. 그렇게 월미도 미군부대 소속 장교 차량 운전기사로 뽑혔다. 당시 미군부대 한국인 근로자는 부대에서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고용했다. 부산 미군기지에서 1954년부터 20년 동안 일한 박원찬 씨가 1978년 쓴 수기 '미군과의 20년'을 보면, 부산에서도 매일 미군부대 정문 앞에 100명에 가까운 사람이 몰려들어 오전 10시마다 나오는 인사담당 직원을 기다렸다고 한다. 미군부대 장교와 한국인 인사담당 직원이 정문 밖으로 나오면 구직자들이 서로 앞줄에 서기 위해 밀고 당기고 치고 하면서 소란도 벌어졌다.호성신 할아버지는 월미도 미군부대에서 장교 운전기사로 2년 정도 일한 뒤 인천항에 파견된 미 해군 군사고문실로 일터를 옮겼다. 지금의 인천중부경찰서 자리에 사무실을 두고 미 해군 대령 1명을 포함해 부대원 8명이 근무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미 해군 군사고문실에서 10년 동안 미 해군 대령의 차량을 몰았다. 이후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부평 '애스컴(ASCOM·Army Support Command)'에서 차량 배차를 담당하다가, 영어시험을 치르고 정식 군무원(Government Service)인 인천항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으로 승진했다. "월미도 미군부대 모터풀(Motor pool·수송대) 드라이버에서 시작해 군용차 디스패처(Dispatcher·운행관리원),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으로 승진하기까지 영어공부를 무진장 열심히 했어. 문법책 달달 외운 끝에 승진시험에 딱 붙었지. 말뿐 아니라 글까지 영어로 쓸 줄 아는 한국인 미군부대 근로자가 흔치 않을걸."인천항에서 주한미군 군수물자 하역작업은 영진공사와 국제실업이 하청을 맡았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인천항 중장비 하역작업 때 미군 소속은 나 하나뿐이라 타임 스케줄도 내가 다 짰다"며 "하청업체들이 내게 잘 보이려고 신포동 기생집을 데려가려고 애도 많이 썼지만, 나는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할아버지는 애스컴이 대폭 축소된 이후인 1970년대 말 영진공사에 입사해 중동 바레인으로 떠났다. 우리나라에 '중동붐'이 한창일 때인데, 바레인 항만에서도 중장비 배차과장으로 일했다. 동아일보 1977년 9월 19일자는 인천을 기반으로 둔 영진공사가 물류산업 분야 최초로 바레인과 항만·공항 하역계약을 독점 체결해 하역요원 800명을 현지로 파송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대한항공은 1976년 중동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서울~바레인 간 정기노선을 취항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중동 진출 최전방에 있던 호성신 할아버지는 바레인 현지에서 대한항공으로 이직해 항공기 기내식 총괄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1년 6개월 만에 귀국해야 했다. 귀국 후 대한항공 임원 소개로 한진고속 소속 고속버스 기사가 됐다. 1987년까지 부산, 대구, 포항, 마산 등지를 사고 없이 달려 내무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내무부장관 또는 교통부장관 표창이 있으면 개인택시 면허를 발급받을 수 있어 할아버지도 혜택을 봤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개인택시 운전대를 잡은 지 올해로 꼭 30년째다. 올 5월 국가로부터 25년 무사고 표창을 받은 할아버지는 "착오가 있어 5년 경력을 인정받지 못해서 그렇지 실제론 30년6개월 경력의 무사고 택시운전사"라고 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때는 수송요원으로 자원봉사를 하면서 주로 외국인 감독을 자신의 택시에 태우고 경기장 이곳저곳을 누볐다. 할아버지의 영어 실력에 외국인 감독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을 정도였다고 한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81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현직 택시운전사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황해남도 해주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가 피란 후 70년 세월을 회상하고 있다.대중일보 개성구호소 특파원 취재 보도-북한 실향민이 몰린 개성구호소를 특파원이 현장취재한 대중일보 1947년 11월 18일자 기사. 한국전쟁 전 개성은 남한이었다.1969년 촬영된 인천내항 미군 전용부두 잔교. 호성신 할아버지는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부평 '애스컴'에서 미국 중장비 하역감독을 맡아 인천내항에서 일했다. 출처/인천항사(2008·인천항만공사)

2017-10-11 박경호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8]함경북도 성진시 출신 김상국 할아버지(下)

성진항 인근 단층집서 농사일 / 정어리 많이 잡혔는데 기름부터 담았던 철통까지 전쟁에 동원친구들과 먹던 '섭죽' 못잊어 / 마천령·망양정 함께 다녔던 그들은 인천서 만났지만 먼저 떠나추석 앞두고 수봉공원 망배단 찾을 예정 "통일이 아니어도 고향 방문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김상국(87) 할아버지는 함경북도 성진시(城津市, 현 김책시)에서 태어나 자랐다. 1·4후퇴 시절인 1950년 12월 피란을 떠났으니, 20년 정도 고향에서 살았다. 부친은 농사일을 했다."여러 농사를 지었지. 그때 당시에는 농토가 어느 정도 있었어. 부유한 것은 아니고 중간쯤 됐던 거 같아. 자작 농사지, 소작 준 것은 없단 말이지. 소작 준 사람들은 '부르주아'라고 해서 해방 이후에 고생 좀 했어."김상국 할아버지 집은 성진항 인근에 있었다. 부친이 나무로 만든 단층집이었다. 방 3개, 부엌 1개, 마루 1개. 그리고 마당에는 조그마한 텃밭과 창고가 있었다. 집에서 성진항까지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성진항을 보면 무역항과 어항이 있는데, 나는 어항 쪽에 살았어. 우리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지만, 그 동네에는 배 타는 사람도 많이 있었지."김상국 할아버지는 고향에서 자주 먹었던 해산물로 명태, 정어리, 임연수어, 고등어, 섭(홍합과 조개) 등을 꼽았다. 할아버지는 "바다와 가까워서 명태, 고등어 등 생선이 밥상에 올라왔다"며 "우리 어렸을 때는 정어리가 무지하게 많이 잡혔다. 정어리로 기름도 짜고, 그냥 조려 먹기도 했다"고 말했다.정어리는 다양한 곳에 쓰였다. 일본 저널리스트 다케쿠니 도모야스가 자료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쓴 '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교토까지'를 보면, 정어리는 주로 유비(油肥)로 가공됐다. 정어리기름에서는 화약과 의약품의 원료인 글리세린이 나왔다. 지방산은 비누·초·도료·마가린의 원료가 됐으며, 찌꺼기는 비료와 사료로 쓰였다.전쟁통에 정어리만큼 수난(?)을 겪은 물고기도 없을 듯하다. 몸에서 짜낸 기름은 물론이고, 그 기름을 담고 있던 철통까지 전쟁에 동원됐다.정어리기름은 화약 원료로 사용되는 등 군수 자재였다. 조선총독부는 1943년 정어리 어획을 '중점 조업 목표'로 정하고 정어리잡이 어선에 중유를 집중적으로 공급했다. 또 날정어리 식용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등 화약 원료를 얻기 위해 정어리기름 생산을 중요시했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정어리기름을 담아 놓는 탱크가 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 때 일본놈들이 그 탱크까지 뜯어갔다"며 "철이 부족하니까 밥그릇 등 닥치는 대로 다 빼앗아 갔다"고 했다.성진에는 큰 규모의 제강소가 있었다. 제강소는 인천의 한국지엠 공장처럼 성진 지역경제의 큰 축이었다."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고주파공장이 성진에 있었어. 왜정 때부터 있었지. 일본놈이 운영했어. 여기서 만든 철을 성진항과 기차를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지. 지금도 가동이 되고 있을 거야."제강소 명칭은 '일본고주파중공업주식회사 성진공장'이며, 지금은 '성진제강연합기업소'라고 한다.1945년 성진중학교 1학년이었던 한국인과 일본인이 41년 만에 만나 고향 이야기를 나눈 책이 있다. '그때 우린 열세 살 소년이었다'(나일성·사가에 다다시 공저)라는 제목의 책이다. 이 책에서 고주파공장에 관한 대화가 나온다. 사가에 다다시는 "고주파공장 때문에 일본 사택들이 많이 세워져 일본인 소학교와 큰 백화점이 성진시내에 생겼다"고 했고, 나일성은 "급격한 인구 증가로 기차역(신성진역)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임원·정직원·공장노동자를 위한 사택만 1천800호에 달했으며, 이들을 위한 구락부·병원·학교·공중목욕탕까지 설치됐다. '신 북한 지리지'(배기찬 지음, 1994년)를 보면 성진제강연합기업소는 북한 전체 제강·제철 생산량의 40%를 차지하고 있다.김상국 할아버지도 성진중학교 졸업생이다. 이 책 저자들이 32년생과 33년생이니, 할아버지가 이들보다 2~3살 많다. 김상국 할아버지의 매형은 고주파공장에서 기중기 기사로 일했었다. 할아버지는 "해방된 후에 소련에서 고주파공장 기계를 많이 가져갔다"며 "해방 후에 일본 기술자들이 다 도망가니까 공장 돌리는 법을 몰라 한참 중단된 적도 있다"고 했다. 또 "소련군을 '로스케' '마우재'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여자를 괴롭히고 물건을 강탈했다"고 했다.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고향 친구들과 함께 먹었던 '섭죽'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성진 바다 밑에서 캔 섭 조개는 커. 친구들이랑 집에서 가져온 쌀을 함께 넣어 죽을 쑤어 먹고 그랬지. 한번은 조개를 잡았는데 조그마한 진주가 들어 있어서 집에 가져간 기억이 있어." 할아버지는 "친구들과 부둣가에서 장기도 뒀다"며 "낮잠을 자고 있는 어르신들 옆에서 일부러 '장이요!' '멍이야!'라고 소리칠 정도로 장난도 심했다"고 했다.함경북도지편집위원회가 2001년 발간한 '함경북도지' 성진시 편에는 섭죽이 나온다. 이 책은 "이것(섭)을 따다가 임연수어 같은 생선을 잡아 된장, 고춧가루, 소주, 마늘, 과일 약간에다 쌀을 씻어 죽을 끓이면 그야말로 별미다.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일품"이라고 섭죽을 소개했다.김상국 할아버지가 친구들과 함께 다녔던 곳은 마천령과 망양정이다. "마천령이 아흔아홉구비야. 높이도 꽤 있지. 가을에는 마천령 단풍이 아주 유명해. 소풍도 거기로 갔어. 망양정이라고 있는데, 거기 올라가면 바다를 쫙 내려다볼 수 있었지."망양정은 500m 높이의 절벽에 있는 정자다. 등대와 측후소가 있었고, 러일전쟁 때는 포대로 이용됐다. 1929년 시멘트로 다시 세워졌다.함경도 출신 여류 시조시인 오신혜(1913~1978)는 '망양정'이라는 시를 남겼다. 망양정(정자)에서 본 풍경을 노래한 시다. '(상략) 근방의 인가들이 눈 아래 깔려있고 / 몇 십길 절벽 밑에 만경창파 아득하니 / 한덩이 구름을 타고 바다 위에 뜬 듯하이. // 기빨을 날리면서 돛단배들 흩어지고 / 파도에 풍류맞어 갈매기떼 춤을 출제 / 우렁찬 평화의 곡에 귀가 절로 기운다. (하략)'성진에서 태어난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1908~?)도 '망양정-어린 꿈이 항해하던 저 수평선'이란 제목의 글을 썼다. 아름드리나무로 만든 정자가 무너져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 들어서고, 정어리기름으로 바다가 오염된 것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의 글이다. 김기림은 이 글에서 "인천이라고 하면 월미도, 목포라고 하면 유달산, 원산이라고 하면 명사십리. 그렇게 각각 배 맞은 풍경이 있으나 가뜩이나 보잘것없는 항구 성진에 망양정조차 없었으면 실로 말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근년에는 정어리 공장이 들어앉아 고기 기름에 바닷가는 아주 더러워져서 보잘것없는 우중에 저수장이 되면서부터 해안 일대를 완전히 콘크리트로 포장을 했다. 인제는 아이들도 갈매기도 더 모여 오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도 로맨티시즘은 추방을 당했다"고 했다. 김기림은 인천항과 인천역의 모습을 담은 연작시 형태의 '길에서-제물포 풍경'을 남기고 인천 문인들과 교우하는 등 인천과도 가까웠다.인천 월미도 역시 일제강점기 각종 건물이 들어서면서 많이도 변했다. 인천 출신의 시인이자 수필가·문학평론가인 김동석(1913~)이 수필 '낙조'에서 그린 월미도 풍경처럼, 이곳에서 바라본 석양은 여전히 아름답다. 하지만 수직의 콘크리트 건물이 하나둘씩 해안가를 차지하고, 기후변화와 산업화로 바다 환경이 나빠진 것은 매한가지일 것이다.김상국 할아버지에게는 고향에서 함께 뛰놀던 친구 '임영록'과 '김현덕'이 있다. 우연일까. 김상국 할아버지를 비롯한 '삼총사' 모두 인천에 정착했다. 김상국 할아버지와 함께 피란 내려온 임영록 할아버지는 부산과 서울을 거쳐 인천에 자리를 잡았고, 김현덕 할아버지는 부산에서 살다가 삼촌이 전무로 있는 인천의 한 회사에 취직했다. 그렇게 모두 인천에 모였건만, 김상국 할아버지는 친구들을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야 했다. "인천에 살면서 종종 만났지. 가끔 대포도 한잔하고 그랬어. 영록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산소까지 함께 다녀왔었는데, 꿈에 그리던 고향도 못 가보고 병에 걸려서 떠났지." 김상국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 흥남부두에서 친구(김영록) 아버지의 배(어선 '성진호')를 얻어 타고 부산으로 피란을 나왔었다.10월 4일은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이다. "명절 때 고향 생각이 가장 많이 나. 이때쯤 되면 누가 집에 오고, 산소에 제사를 지내러 언제 가겠다는 것부터 다 생각이 나지." 할아버지는 "위로 형이랑 누나가 1명씩 있고, 아래로 여동생 1명과 남동생 2명이 있었다"며 "(내가) 세 살 아래 여동생(김월성)을 가장 예뻐했다. 어떻게 잘살고 있는지 보고 싶다"고 했다.일가친척이 고향 성진에 모여 추석 명절을 보내고 망양정에 올라 성진 앞바다의 풍경을 감상하기는 올해도 글렀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추석을 앞두고 인천 남구 수봉공원 망배단에서 고향을 향해 절을 올릴 예정이다.할아버지는 "형과 누이, 동생들이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며 "통일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면 고향 방문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김상국(사진 가운데), 임영록(아래), 김현덕(위) 할아버지가 고향 성진시에서 찍은 사진이다. 김현덕 할아버지가 피란 때 가지고 온 사진을 김상국 할아버지가 복사해 간직하고 있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언제 어디서 찍은 것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옷차림이 고등학교 교복이다"고 했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성진시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김상국 할아버지 제공김상국 할아버지 고향인 함경북도 성진시는 경치가 아름다운 도시다. 성진항은 1899년 군산, 마산과 함께 개항한 곳으로 원산에 버금가는 항구였다. /출처 '가야할 산하'(민족통일중앙협의회, 1987)

2017-09-27 조재현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7]함경북도 성진시 출신 김상국 할아버지(中)

오산비행장 시절 후임병 처조카와 결혼현재 요양병원인 신신예식장서 식 올려당시 포토존 활용 야외정원은 아직 남아전역후 남구청 자리 교대 앞 문방구 열어17년간 숭의2동 10통장도 함께 맡아 일해쓸쓸히 돌아가신 할아버지들 장례도 치러1950년 12월 흥남부두에서 어선을 타고 부산으로 피란 온 김상국(87) 할아버지. 전쟁통에 고향 함경북도 성진시(城津市, 현 김책시)를 떠난 그는 군 제대 후 인천에 정착했다. 처가가 인천에 있어서였다. 1952년 9월 공군에 입대한 김상국 할아버지는 대구, 서울, 진해, 강원도, 오산 등지를 돌며 1972년까지 20년을 군에 있었다. 결혼은 1959년에 했다."오산비행장에 파견 나가 있을 때 지금의 처고모부가 우리 부대 신병으로 들어왔어. 당시 내가 이등상사였으니까 고참이었지. 한양대 기계과를 나온 분인데, 2년 정도 같이 있으면서 나를 잘 봤는지 '결혼해야 하지요?'라고 묻더라고."그 후임병이 인천에 사는 자신의 처조카를 소개해 결혼했다. 장인어른은 인천세무소 직세과장이었다. 결혼식은 인천 중구에 있는 신신예식장에서 올렸다. "토요일에 결혼했어. 그때 토요일에는 세무소가 오전만 근무할 때가 아니요. 그런데 직세과장 딸이 결혼한다고 해서 세무소 전체가 근무를 하지 않았어. 세무소장이 주례를 봤지."당시 신신예식장 인기는 대단했다. 신신예식장 사진부에서 약 33년(1959~1992) 동안 일한 정창근(84) 할아버지는 "사장 이름이 장광순인데, 돈이 많았다. 일본사람 사택을 사서 예식장으로 꾸민 것"이라며 "1년에 1천500쌍 정도는 식을 올렸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또 "내가 1966년 신신예식장에 근무할 때 결혼을 했는데, 자리가 없어서 그 옆에 생긴 크라운예식장에서 결혼을 했다"며 "70년대 중반인가? 건물을 새로 지은 뒤에도 최고로 잘나갔다"고 했다. 예식장 직원의 결혼식조차 다른 곳에서 해야 할 정도로 붐볐다는 얘기다. 신신예식장 측은 밀린 예식을 빨리빨리 진행하기 위한 묘수를 꺼냈다. 건물 밖에 포토존을 설치한 거다. 정창근 할아버지는 "정원에서 가족·친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 신신예식장의 특징인데, 사실은 다음 팀이 몰려오니까 빨리 예식 자리를 빼주기 위해서 정원에서 사진을 찍게 한 것"이라고 했다. 청춘 남녀가 백년가약을 맺던 신신예식장 건물은 지금 노인요양병원이 됐지만, 결혼 기념사진을 찍던 작은 야외 정원은 아직도 남아있다.김상국 할아버지는 그렇게 인천과 인연이 닿았다. 아내도 인천 토박이는 아니다. 황해도 옹진 태생으로, 한국전쟁 때 가족이 인천으로 피란을 왔다. 인천은 함경북도 총각과 황해도 처녀를 맺어주었다. 둘 다 실향민 신세였지만, 아내는 가족이 함께 피란 나온 터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덜했다고 한다."마누라는 고향 생각이 난다고 하지 않았어. 가족이 다 나왔으니까. 나는 지금도 고향 생각이 나. 한 번 가봤으면 좋겠는데…. 집 그거 못 찾겠어? 기억 속에 다 있는데."김상국 할아버지는 1972년 제대 후 처갓집이 있는 인천으로 와서 지금 남구청 자리에 있던 인천교육대학(현 경인교대) 앞에 문방구를 차렸다. 그 많은 장사 가운데 문방구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가만히 보니까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문방구가 가장 안전할 거 같은 거야. 1972년부터 한 12년 동안, 그러니까 1984년까지 했네. 크게 성하라고 해서 '대흥문방구'라고 이름을 정했지."인천교육대학의 전신은 1946년 5월 설립된 개성사범학교(경기도립 3년제)다. 김상국 할아버지와 인천교대는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가 인천에 정착했다는 공통점도 있다.'경인교육대학교 70년사(1946~2016)'에 따르면 1946년 5월 23일 설립된 개성사범학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옮겨졌다. 1951년 9월 부산시 괴정동에서 춘천사범학교와 함께 연합사범학교로 개교했다. 경기·인천지역이 어느 정도 수복되자 1952년 4월 잠시 인천신흥국민학교 교사 일부를 빌려 신입생을 모집한 뒤, 인천숭의국민학교에서 개교했다. 그해 6월 국립 인천사범학교로 교명을 변경했으며, 1953년 4월 인천시로부터 숭의동 땅을 기증받아 교지를 확보했다. 70년사는 "당시 전황으로 개성이 수복되기 어려운 상태였고, 휴전 성립의 가능성이 짙어지고 있었다. 학교의 운영 면에서나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개성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어졌다. 개성보다는 인천에 사범학교를 두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인천 남구청이 발간한 '도시마을생활사'에는 "경주김씨 문중에서 여우실 일대를 학교 부지로 내놓았다. 김경하(1911~1967, 초대 인천시 교육위원)가 개성사범학교를 유치하기 위해 자신의 땅을 희사한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남구청 종합민원실 자리는 여우실 경주김씨 종가가 있던 곳이다. 김경하는 6선 국회의원이자 제11대 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은하(1923~2003)의 형이다. 김은하 전 의원 아들 근영(57, 인천경실련 공동대표) 씨는 "할아버지가 일제 때 학교(현 숭의초등학교) 건립에 기여하신 적이 있다"며 "교대 부지는 큰아버지(김경하) 등 아버지 형제들이 기증한 것"이라고 했다.인천사범학교는 ▲1962년 2년제 인천교육대학 발족 ▲1982년 4년제 대학 승격 ▲1990년 계산동 캠퍼스로 이전 ▲1993년 인천교육대학교로 교명 변경 ▲2003년 경인교육대학교로 개칭 ▲2005년 경기캠퍼스 개교 등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학교 이름을 경인교대로 바꾸고 경기캠퍼스를 설립한 이유가 있다. 지방자치제도가 전면적으로 시행된 이후, '경기교대 설립'은 경기도지사 출마자들의 대표적인 공약이 됐다. 경기도와 도교육청, 인천시와 시교육청, 인천교대가 해결 방안을 찾은 게 교명 변경과 경기캠퍼스 설립이었다.문방구 고객은 교대생이 아닌 1957년 4월 개교한 인천교대 부속국민학교(현 경인교대 부설초등학교)의 학생들이었다."마누라하고 같이 문방구를 봤지. 우리 가게 가까이에 '광문당'이라는 문방구가 먼저 있었어. 문방구는 방학, 주말 때문에 돈벌이가 신통치 않았어. 학생 수도 적었거든."대흥문방구는 지금으로 보면 남구청 건물과 인천중앙교회 사이 골목에 있었다. 지금은 1층에 사진관을 둔 3층짜리 상가주택이 들어서 있다. 경쟁 상대였던 광문당은 남구청 정문 앞에 있었다고 한다.당시에는 부속국민학교를 '부국'이라고 줄여서 불렀는데, '부'자가 부속의 부(附)가 아닌, 부자의 부(富)라고 말할 정도로 부잣집 아이들이 많이 다녔다고 한다."부국 학생들 가정은 생활 수준이 우리와 달랐어. 당시에도 자가용을 타고 오는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교복을 입었는데, 얼굴이 희고 피부도 좋았던 것으로 기억해."문방구에선 이것저것 다 팔았다. 도화지 등 학용품부터 체육복과 실내화, 그리고 아이스크림까지 없는 게 없었다. 손버릇이 나쁜 아이들이 있어서 물건이 없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는 국산 호치키스(스테이플러)가 없어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거 사다 놓았어. 그런데 한참 쓰다 보면 어느 날 없어지는 거야. 탐내는 아이들이 있었던 거지."부국 24회(1983년 2월 졸업) 권혁신(47) 씨는 대흥문방구를 어렴풋이 기억했다. 권씨는 "학교 주변에 광문당 등 문방구가 3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대흥문방구였다"고 했다. 또 "학교는 부모님이 흰색 공인가? 검은색 공을 뽑으면 입학할 수 있는 추첨 방식이었다"며 "다 부잣집 아이들은 아니었지만, 집안이 어느 정도 되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했다.김상국 할아버지는 문방구를 운영하면서 통장 일도 봤다. 문방구는 1984년까지 운영했고, 숭의2동 10통장은 1989년까지 약 17년간 맡았다.숭의동에도 할아버지와 같은 실향민이 많이 살았다. '인천시사(1993년 발간)'를 보면, 1952년 말 인천 인구(25만6천751명)의 51.1%인 13만1천128명이 구호대상자였다. 구호대상자 가운데 6만3천433명(48.4%)이 피란민이었다. 숭의동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1953년 말 숭의동 지역 구호대상자 5천561명 중 2천987명(52.9%)은 피란민이다."지금도 구청 주변에 하꼬방들이 있어. 피란민은 돌봐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집이라고 해봤자 하꼬방이라고 조그마한 곳이지. 그곳에서 쓸쓸히 돌아가신 거야."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돈을 걷어 실향민 어르신의 장례를 치른 적이 3번 정도 있다"며 "좀 살만한 집에 가서 얼마 좀 보태달라고 해서, 그렇게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김상국 할아버지는 서울 코엑스로 일을 다닌 적도 있다. 선광공사(현 선광) 일을 맡아 코엑스 행사장에 전시품을 설치했다."숭의동에 인천항 지게차 운전수들이 많이 살았어. 우리 10통에 사는 운전수 소개로 코엑스 일을 하게 됐지. 선광공사에 취직한 건 아니고, 그냥 밑에서 '일당벌이'를 한 거야."할아버지는 "선광공사에서 코엑스 전시 일을 맡았다가 (수익이) 별로니까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고 기억했다. 선박 하역회사 선광이 한때 전시품 설치 대행사업을 하기도 했다.1968년부터 1998년까지 선광에서 근무하면서 전시 업무도 맡았던 오대영(78) 할아버지는 "(선광은) 76년부터 77년까지 약 2년간 서울 여러 곳에서 전시 업무를 했다"며 "일본에서 전시품이 인천항으로 들어오면 이것을 코엑스로 운반해 조립·설치했고, 전시회가 끝나면 전시품을 분해한 후 상자에 넣어 다시 일본으로 보냈다"고 했다. 또 "(일본에서 전시품을 배로 싣고 오는) 고려해운이 선광에 소개해줬고, 1~2년 정도 선광이 하다가 다른 업체에서 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김상국 할아버지가 인천 남구청 인근 한 건물 앞에서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할아버지가 약 12년(1972~1984) 동안 운영한 '대흥문방구'가 이 건물 자리에 있었다. 당시는 단층 건물이었다고 한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사범학교 당시의 캠퍼스(인천시 숭의동, 1952~1962)인천교육대학 본관(인천시 숭의동, 1975) 출처/경인교육대학교 70년사인천 중구 옛 신신예식장 건물에 있는 야외 정원 모습. 신신예식장은 김상국 할아버지가 1959년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 야외 정원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찍는 게 특징이었다. 지금은 요양병원이 들어서 있어, 환자와 문병객의 휴식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인천 남구청 청소년수련관 앞 화단에 세워진 경인교육대학교 개교 70주년 기념 표지석. '1957년 준공한 이 건물은 좋은 선생님의 초심을 키운 곳이요, (중략) 근대문화유산으로서도 보존가치가 큰 자랑스러운 곳'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2017-09-20 목동훈

[zoom in 송도]'내년 예산안 정책토론회' 인천시, 송도관련 사업은?

6공구에 스마트시티 관로 구축10월부터 워터프런트조성 공사인천1호선 송도 연장 시비 투입달빛축제공원 반려견 놀이터도인천시가 2018년도 예산안 편성을 위해 '경제산업'과 '교통해양' 등 분야별로 주민 참여 예산정책 토론회를 진행했다. 이 토론회는 인천시 각 실·국에서 내년도 예산 편성 방향 및 주요 사업을 설명하면, 전문가들이 토론을 통해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토론회 방청객 등 일반 시민들도 의견을 낼 수 있다. 예산정책 토론회는 인천시의 내년도 주요 사업을 미리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물론, 전문가·주민 의견 수렴 및 예산 배분 과정에서 일부 사업은 내용 또는 추진 시기가 변경될 수 있다. 내년에 인천시가 송도국제도시와 관련해 어떤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지, 예산정책 토론회 자료를 통해 알아봤다.인천경제자유구역 주요 사업은 '경제산업' 분야에 많이 포함됐다.송도 등 인천경제자유구역은 교통, 방범, 방재, 환경, 시설물을 통합 관리·운영하는 스마트시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최근에는 스마트시티 통합운영센터 구축·운영 기술을 베트남 등 해외에 수출하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인천시는 내년 말까지 송도 5·7공구 스마트시티(u-City) 기반시설 구축 사업을 완료하기로 했다. 또 내년에 송도 6공구 스마트시티 관로 구축 사업을 본격화하기로 했다.송도 워터프런트 조성사업도 내년에 공사가 시작될 전망이다. 이 사업은 송도에 길이 16㎞, 너비 40~300m, 면적 5.33㎢ 규모의 물길을 만드는 것이다. 사업비(자체 재원 예상액)는 6천215억원이며, 타당성 조사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인천시는 내년 3월까지 타당성 조사 및 투자 심사를 끝낸 뒤, 기본·실시설계와 공사 발주를 거쳐 10월부터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다.아암로(해안도로) 확장공사는 내년 말 98%의 공정률을 보일 것으로 인천시는 예상하고 있다. 이 사업은 송도 아트센터교~옹암사거리 구간 도로를 기존 6차로에서 8차로로 확장하는 것이다.송도동 191의 1 일원(인천글로벌캠퍼스와 트리플스트리트 인근)에 8만7천33㎡ 규모의 공원(문화공원 2지구)을 조성하는 사업은 내년 4월 완료될 예정이다. 국제화복합단지 1호 근린공원 조성사업(송도동 147 일원 6천㎡)은 내년 3월 착공, 12월 준공을 목표로 추진된다. 문화공원 3·4지구, 국제화복합단지 6~8호 완충녹지, 첨단산업클러스터단지 1·2호 연결녹지 조성사업 등도 내년에 공사가 본격화한다.교통분야 계속사업으로는 '인천도시철도 1호선 송도 연장 건설'(2020년 12월 개통 예정)이 있다. 인천 1호선을 송도랜드마크시티까지 연장하는 이 사업에는 내년에 시비 140억7천300만 원 등 총 351억8천300만원이 투입될 전망이다.인천시 문화관광체육국의 내년도 중점과제 중 하나는 'G-MICE 허브 도시 인천'이다. 이와 관련, 송도컨벤시아 1단계 시설 옆에 연면적 6만4천㎡ 규모의 컨벤션센터를 짓는 2단계 사업은 내년 7월 준공을 앞두고 있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송도컨벤시아 전체 연면적은 11만7천27㎡로 확대돼, 대형 행사 유치가 가능해진다.인천시는 송도컨벤시아 및 마이스산업 활성화를 위해 국제회의 유치, 시민 참여 이벤트 개최, 인천 특화 박람회 육성 등을 더욱 강화할 방침이다.인천시 환경녹지국은 송도 솔찬공원 자연학습장에 '야생동물 구조·관리센터'(내년 3월 개관 예정)를 마련, 운영할 계획이다. 이 센터는 야생동물 구조·치료·복귀 지원과 교육·체험 기능을 결합한 복합형 에코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인천시는 공원 내에 반려견 놀이터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내년 1월부터 12월까지 송도 달빛축제공원(미조성공원)에 반려견 놀이터 5천㎡를 조성하겠다는 구상을 공개하고, 주민 의견을 수렴 중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09-17 목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