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zoom in 송도]IFEZ 글로벌센터 '교육·문화프로그램'

2013년 G타워로 확장이전… 국내 정주 도움문화·역사 강좌·전통문화 체험 등 행사 다양의사소통 불편 해소 '한국어 교실' 최고 인기회의·모임장소 활용… 찾아가는 통역지원도인천경제자유구역(IFEZ) 글로벌센터가 외국인 정주 지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IFEZ 글로벌센터는 송도국제도시 G타워 1층에 있다. 2011년 송도 미추홀타워에 문을 연 글로벌센터는 2013년 G타워로 확장 이전했다. 글로벌센터는 강의실과 휴식 공간 등을 갖추고 있다. 강의실에서는 한국어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회의, 모임, 스터디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올 1월부터 7월 말까지 글로벌센터를 방문한 사람은 4천559명. 직접 방문하거나 전화 또는 이메일을 통해 상담을 받은 사람도 1천369명이나 된다.GCF(녹색기후기금) 등 국제기구 직원과 가족, 송도·청라·영종 등 IFEZ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주로 찾는다. IFEZ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송도 2천499명, 영종 1천201명 등 4천493명(6월 말 기준)이다. 지난 2003년 IFEZ 거주 외국인이 415명에 불과했던 점과 비교하면, 약 10배 증가한 셈이다. 국적별로는 중국이 921명으로 가장 많다. 다음은 미국인(599명), 한국계 중국인(345명), 베트남(264명), 일본(241명), 타이완(179명) 등의 순이다. 인기가 가장 높은 프로그램은 한국어교실이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올 5월29일부터 7월6일까지 IFEZ 거주 외국인 32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2%가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음식점 이용 시 불편사항으로는 '외국어 가능 직원 부족'(45%), '영어 메뉴판 부재 및 오용'(29%), '언어로 인한 예약의 어려움'(26%) 등 언어로 인한 불편함이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통역이 필요할 때는 친구와 지인(25%), 글로벌센터(17%) 등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한국어교실은 한글반,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 생활한국어반, 회화고급반 등 단계별·수준별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어 수준에 따른 맞춤형 수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수강생은 선착순으로 모집하며, 수강료는 없다. 지난달에는 정규반(초급·중급·생활회화) 116명, 특별반 16명, 기초회화반 30명 등 총 162명이 수강했다. 글로벌센터는 찾아가는 외국어(영어)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글로벌센터 통역 자원봉사자들은 인천대입구역 등 인천도시철도 1호선 송도 구간 주요 역사, IFEZ 아파트단지 관리사무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길을 안내하거나 영어로 안내방송을 하고 있다. 안내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도 한다. 이들은 외국인들의 병원·은행 업무 지원, 휴대전화·인터넷 서비스 안내 등 행정 지원 서비스도 돕고 있다. 글로벌센터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행사로는 ▲한국 음식 만들기(분기별 1회) ▲한가위 전통문화 체험(9월) ▲문화강좌(분기별 1회) ▲역사탐방(연 2회) ▲성탄·송년이벤트(12월) ▲인문학 강좌(분기별 1회) 등이 있다.역사탐방, 성탄·송년이벤트 등의 프로그램은 내국인과 외국인이 서로 소통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프로그램·행사 일정은 글로벌센터 게시판, 홈페이지(global.ifez.go.kr), SNS(페이스북 등)를 통해 공지하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사진 인천경제자유구역청·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7-08-27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3]황해도 연백군 출신 김은중 할아버지(上)

강화 송해면 태생 부친따라 연백으로 '이주'1·4후퇴때 강화도 피란… 일 찾아 인천으로인력시장서 미군트럭에 실려가 유격대 배치오키나와로 간뒤 낙하만 70차례 고강도 훈련"사람 죽이는 법 배워 죽어도 모르는 소모품"8240부대는 미군·국군도 아닌 애물단지 전락이중 오키나와 한국인 유격대는 존재도 몰라정전 직전 서울로 전입… 2008년 '참전' 인정한국전쟁을 일본 오키나와에서 치른 한국군은 얼마나 될까. 황해도 연백군 출신의 김은중(83)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 부대에서 목숨을 건 특수 훈련을 받았다. 1958년 창설한 우리나라 육군 특수전사령부보다도 먼저 오키나와에서 공수 낙하훈련을 받았다.1934년 5월 10일 강화군 송해면에서 태어난 김은중 할아버지는 해방을 2년 앞둔 1943년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 해남리로 이주했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일제의 징용을 피해 연백군으로 넘어가 염전에서 일했다.전쟁은 할아버지가 중학교 3학년이던 해 발발했다. 할아버지는 강화도로 다시 내려와 누나 집과 친척 집을 전전하다가 흉년이 심해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연백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1951년 1·4후퇴 때 다시 강화도로 피란했다. 그리고는 또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나왔다. 아버지와 함께였다. 동구 송현동 쪽방촌에 방을 하나 얻어 둘이서 살았다.할아버지는 인천항에서 군수 물자 하역일을 했다. 지금의 인력시장처럼 아침에 인천항에 나가 있으면 미군들이 일자리를 배정해주고 급여로 쌀 한 됫박을 줬다고 한다. 10대 후반이던 그때 김은중 할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미군 트럭에 실려가 특수부대원이 됐다. 아마 1951년이었을 게다. 여느 때처럼 쪽방촌 집에서 나와 배다리, 동인천역을 거쳐 인천항으로 가는 길이었다."열댓 명이 쭉 걸어가는데 미군들이 군용 트럭을 몇 대 세워 놓고 '유(You), 유, 유, 컴 히어(Come here)'라고 하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는데 다른 미군 부대에 일하러 가는 줄 알고 트럭에 올라탔어요. 그런데 트럭이 서울로 가더라고. 아버지에게 소식도 못 전하고 끌려갔죠."노량진을 지나 한강 다리를 건너 용산 부근에 도착했던 듯하다. 미군은 할아버지를 철창에 가두더니 '바리깡'을 가져와 머리를 박박 밀었다. 그리고선 군복과 카빈 소총 한 자루를 주고는 미8군사령부 산하 유격대로 편성했다. 이른바 군번 없는 군인, 미군이 한국인 반공의용청년을 모아 만든 8240부대였다.할아버지는 남양주 덕소로 이동해 몇 개월 훈련을 받다가 1952년 봄 여의도 비행장에서 영문도 모른 채 C-46 수송선을 탔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몰랐다. 몇 시간 뒤 내렸는데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 날씨, 오키나와였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중대 규모의 한국인 병력 100여 명은 산 중의 훈련장에 갇혀 외출도 외박도 없이 근 1년을 훈련만 받았다.할아버지는 기초적인 군사 훈련과 함께 낙하산 훈련, 무술, 인마살상, 폭파 등 그야말로 특수훈련을 받았다. 한국에서 간단한 제식, 사격 훈련과는 차원이 다른 '인간병기'가 되는 훈련이었다. 할아버지의 훈련 얘기는 2003년 개봉한 영화 '실미도'에 나온 특공대 684부대의 훈련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은밀히 북파돼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목적도 같았다. 젓가락이나 쇠꼬챙이로 급소를 찔러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배웠고, 유도, 검도, 태권도 같은 동양 무술도 배웠다. 끼니는 전투식량 '씨-레이션'이었고, 쉴 틈도 없었다. 영국의 군사 전문가 휴 맥매너스(Hugh McManners)가 쓴 '세계 최강의 특수부대'는 한국전에서는 소규모 정예부대가 존재하지 않았다가 정찰과 상륙, 폭파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군인이 필요하게 됐다고 설명한다.김은중 할아버지는 수송기에 타 3천 피트 상공에서 낙하하는 훈련을 70차례 받았다. 낙하 도중에 낙하산을 펼치는 지금의 특전사 고고도 낙하훈련과는 많이 달랐다. 낙하산 고리를 수송선에 걸고 뛰어내리면 낙하산이 자동으로 펼쳐지는 방식이었다. 낙하를 하다가 잘못 착지한 동료가 목이 뒤로 꺾여 목숨을 잃기도 했다. 지금이야 지상으로 착지한 뒤에는 펼쳐진 낙하산을 다시 접는 정비부대가 따로 있지만 당시 오키나와에는 낙하산 정비부대가 없어 펼쳐진 낙하산을 모아 한꺼번에 하와이로 보냈다고 한다.현재 특전사사령부는 예하 특수전교육대 특전장비정비부대에서 낙하산을 포장한다. 강하훈련을 마친 대원들이 낙하산의 먼지를 털고 훼손 등 이상유무를 확인해 반납하면 11단계의 과정을 거쳐 포장병 3인 1조가 돼 낙하산을 다시 접는다. 강하하는 대원들의 목숨과 직결된 작업이다 보니 엄격한 품질 검사를 한다고 한다. 국방부에 따르면 특전장비정비부대는 매년 2만9천여개의 낙하산을 정비한다. 1년에 각 부대에서 이 만큼의 공수 훈련을 한다는 의미다.특전사라고 하면 '검은 베레모'를 떠올리지만 할아버지는 '팔각모'를 썼다고 기억했다. 공수훈련을 하면 주어지는 휘장은 동그란 모양에 푸른색 유엔 표식이 있고, 그 위에 낙하산이 그려져 있다고 했다. 별도의 부대 마크는 없었지만 소매 안쪽에 부착된 유엔군 표식이 신분을 증명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미군 상사는 할아버지를 '쟈니 킴'이라고 불렀다."말 그대로 사람 죽이는 법을 배웠어. 지금 느끼는 것이지만 우린 소모품이었어. 많이들 죽어 나갔지. 죽으면 그냥 땅에다 묻어버리는 거야. 고향 생각이 안날 정도로 정말 쉴 틈도 없이 극한 훈련을 받았어요."낙하훈련 중 목이 꺾여 죽거나 다른 훈련을 하면서 맞아 죽기도 한 8240부대 소속 오키나와 한국인 유격군의 존재는 아직 드러나 있지 않다. 할아버지는 "인천에 8240부대 전우들이 많은데 오키나와에서 같이 훈련했다는 전우들은 아직 한 명도 만나지 못했어요. 나도 소식이 궁금해요. 암암리에 운영된 부대였기 때문에 아마 기록에도 찾기 어려울 거예요…"라고 말했다.우리나라 군인이 오키나와에서 공수훈련을 받았다는 기록은 육군 특수전사령부 연혁에서 처음 등장하는 데 그게 1958년 4월이다. 그해 4월 1일 용산에서 창설된 특전사 제1전투단 창설대원들은 보름 뒤부터 오키나와에서 훈련을 받았다.연합뉴스 국제부 김선한 기자가 쓴 '세계의 특수부대 비밀전사들 X'는 이들은 한국전 실전 경험이 있는 미 육군 제1, 제77 특전단 소속 요원들로부터 훈련을 받았다고 소개한다. 특수전사령부는 1951년 2월 창설된 미8군 소속 제1공수 유격연대, 즉 8240부대를 모태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군사편찬연구소가 쓴 '한국전쟁의 유격전사'에도 나온다.할아버지는 왜 멀리 오키나와까지 가서 특수훈련을 받았을까.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이후 미국령이 되면서 미국의 동북아 군사 전진기지의 역할을 했다. 전후 일본 전문가인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가 쓴 '기지국가의 탄생: 일본이 치른 한국전쟁'을 보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전투기와 수송기들은 오키나와 기지에서 한국으로 출동했다. 오키나와 주둔부대는 대부분 한국 전장으로 이동해 전투에 참가했고, 새로운 보병부대가 오면 오키나와에 도착해 3주간 훈련을 받고 전선으로 파견됐다.미8240부대 산하 백호유격부대(동키3~4연대)에서 미국 고문관으로 전투에 참가한 벤 S. 말콤(미 육군 예비역 대령)이 쓴 '백호부대 유격전사'를 보면 한국전쟁 당시 유격작전과 관련해 근무하고 있는 미군은 장교 22명과 사병 37명이 전부였다. 이들에게는 전문적인 교육을 실시할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고도의 전투능력이 필요한 특수부대 양성은 한국이 아닌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들에게 맡겨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특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오키나와는 1972년 일본에 반환됐지만 지금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2015년 일본 방위성 방위백서를 보면 현재 오키나와에는 미 육군 제1특수부대(공수) 제1대대와 제3해병기동전개부대 사령부 등 6개의 육·해·공군 기지가 있다.김은중 할아버지는 오키나와에서 고된 훈련을 받았지만 실제 작전에 투입되지 않았다고 한다. 평양 순안비행장 침투작전을 준비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존스홉킨스대학 작전연구실이 쓴 '한국전에서의 유엔군 유격전'에 따르면 전쟁 기간 한국에 있는 8240 유격대는 4천445회의 개별 작전을 수행했고, 작전활동의 93.7%가 황해도 서남부 지역에서 실시됐다. 유격대는 휴전 전까지 6만9천명의 적 살상, 5천 정의 무기노획, 2천700대의 차량노획 및 파괴, 3천800t의 식량노획, 80개의 교량 파괴 등 성과를 거뒀다고 보고했지만 실제로 3~10배 정도 과장됐다는 것이 존스홉킨스대 연구실의 설명이다.할아버지는 정전협정이 이뤄지기 직전 오키나와를 떠나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한 부대로 전입했다. 자신에게 쟈니 킴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미군 상사를 따라갔다고 한다. 미 8240부대는 전쟁 이후 미군에도 한국군에도 속하지 않은 애물단지 신세가 됐다. 8240부대는 편성 당시부터 한국인에 대한 신분을 '군인'으로 명확히 하지 않았다.이후 미국과 한국의 협정에 따라 만들어진 8250부대로 편입돼 우리나라 국방부의 통솔을 받게 됐다. 하지만 우리 국방부는 이들은 육군으로 배치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탈영이 일어났다.할아버지는 8250부대로 편입되기 전 특수부대를 떠났다. 한국군 소속으로 복무한 적은 없지만 징집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을 인정받아 2008년 9월 29일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았다.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황해도 연백 출신 실향민 김은중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일본 오키나와 특수부대에서 죽음을 넘나드는 훈련을 받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키나와 특수부대는 한국전쟁 유격사에 기록되지 않은 최초의 증언으로 드러났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김은중 할아버지가 참전용사에게 수여하는 호국영웅기장을 바라보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08-23 김민재

[송도국제도시 브리핑]유타대 아시아캠퍼스, 입학상담 동아시아 콘퍼런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 입학상담 동아시아 콘퍼런스인천글로벌캠퍼스에 있는 유타대학교 아시아캠퍼스는 지난 13~15일 국제 대학입학상담학회 동아시아지역 콘퍼런스를 진행했다.이번 콘퍼런스에는 미국 콜롬비아대, UCLA, 보스턴대, 오하이오대, 요크대 등 미주 및 유럽 지역을 포함해 나고야대, 홍콩대 등 전 세계 21개국의 대입 전문가 143명이 참석했다. 국내에서는 고려대, 연세대, 대원외고, 용산국제고 등의 입학 담당자가 참여했다. 외국 대학 대입 전문가들은 글로벌 최신 입시 트렌드를 논의했으며, 국내 대학 입학 담당자들은 한국 대학 입시의 특수성과 지원 절차를 설명했다.콘퍼런스는 고등학교 과정과 대학교 과정으로 각각 세션을 분류해 원하는 코스에 선택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운영됐다. 고등학교 코스의 경우, 참가자들의 경력 수준 및 요구에 따라 기본 과정과 심화 과정 중 원하는 세션에 참가할 수 있게 했다.특히 중국, 싱가포르, 대만, 태국 등 다양한 동아시아 국가의 입시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심도 있고 집중적인 토론과 발표를 진행했다.한편, 유타대 아시아캠퍼스는 2018학년 봄학기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다. 이번 신입생 모집은 ▲커뮤니케이션학 ▲심리학 ▲영화영상학 ▲도시계획학 등 4개의 학부 과정과 석사 과정인 ▲공중보건학 ▲생명의료정보학 ▲국제법학과를 대상으로 진행된다. 원서 접수는 오는 11월27일 우선 마감, 2018년 1월19일에 최종 마감된다. ■경제청, 송도 11공구 개발·실시계획 변경용역 추진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국제도시 개발계획 및 실시계획 변경 수립용역'을 추진하고 있다.이번 용역은 송도 11공구 첨단산업클러스터 등 기존 개발사업지구에 대한 토지이용계획 재배치가 필요함에 따라 추진되고 있다.송도는 국제업무단지, 지식정보산업단지 등 사업지구별로 개발계획과 실시계획이 수립되고 있다. 중간에 계획이 변경되는 경우도 많아, 송도 전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선 이번 용역이 필요하다.용역 기간은 착수일로부터 36개월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지금의 송도 개발계획이 결정된 지 몇 년 지났다. 그동안 여러 여건 변화가 있었다"며 "특히, 이번 용역은 송도 11공구 첨단산업클러스터와 대학교 용지 등 11공구 기존 토지이용계획을 어떻게 재배치할 것인가가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최근 인천글로벌캠퍼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에서 '국제 대학입학상담학회 동아시아지역 콘퍼런스'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입시 트렌드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했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 제공

2017-08-20 목동훈

[zoom in 송도]'GTX-B 신설'·도시철도 급행화 가속도

'송도 ~ 마석' 수도권 광역철 추진인천 1호선 '급행열차' 도입 결정송도~계양 - 서울 접근성 편해져'국제회의 복합지구' 지정 계획도인천시가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와 연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각 실·국·본부는 '국민이 주인인 정부'와 '더불어 잘사는 경제' 등 5개 국정 목표에서 총 100개의 인천시 연계사업을 발굴했다. '국정과제 연계사업'을 보면, 신규 사업보다는 추진 또는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 많다. 정부의 정책 방향과 함께해 국비 확보와 제도 개선 등 추진 동력을 얻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송도국제도시와 관련된 '국정과제 연계사업'은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봤다.주민들의 관심이 높은 분야는 '교통'이다. 교통 문제는 교육, 녹지, 편의시설, 일자리 등과 함께 주거 지역을 선택할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송도의 경우, 공원과 도로 등 도시 인프라는 잘 갖춰져 있지만, 서울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았다.인천시는 국정과제 '교통·통신비 절감으로 국민 생활비 절감'과 연계해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B노선(인천 송도~경기 마석, 80.08㎞) 건설을 추진한다.GTX 건설은 서울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것으로, 송도 주민 등 시민들의 대중교통 편익이 크게 향상될 것으로 기대되는 사업이다.특히 GTX B노선은 최근 기획재정부 예비타당성 조사 대상에 포함되면서 건설 가능성이 높아졌다.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면, 2019년 기본계획 고시 및 2020년 사업시행자 선정 등을 거쳐 2021년부터 공사가 시작될 것으로 인천시는 내다보고 있다.'국정과제 연계사업'에는 인천도시철도 1호선 급행화 사업도 포함됐다. 이 사업은 송도국제업무지구와 계양구를 잇는 인천 1호선에 급행열차를 도입하는 내용이다.사업비(예상)는 1천952억원이다. 인천시는 '인천 철도망 효율화 방안 연구용역' 결과에 따라 급행열차 도입을 결정했으며, 송도에서 계양까지의 이동시간(현재 54분)이 21분 단축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인천시의 광역버스 확충사업도 계속된다. 송도의 경우, 서울 여의도·잠실을 잇는 노선 2개를 추가로 확보해 버스 9대를 투입하겠다는 목표가 있다.인천시는 국정과제 '국민외교 및 공공외교를 통한 국익 증진'과 관련해 국제기구 클러스터를 송도에 구축할 계획이다.송도를 제네바와 같은 세계적 국제기구 집적도시로 육성하겠다는 것이다.송도는 공항 접근성이 좋고, 송도컨벤시아 등 회의·전시·관광·숙박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송도에 입주해 있는 국내외 대학·기업과 협력도 가능하다.이와 관련, 'GCF(녹색기후기금) 활성화를 통한 녹색환경 금융도시 송도 건설'은 문재인 대통령 지역공약에 반영된 상태다. 인천시는 GCF 연관산업 육성 및 집적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용역을 추진 중이다.인천시는 송도와 영종도 일부를 '국제회의 복합지구'로 지정하겠다는 계획도 이번 '국정과제 연계사업'으로 선정했다.국제회의 복합지구는 개발부담금 및 교통유발부담금 감면, 용적률 완화, 국비 지원 등의 혜택이 있다. 인천시는 내년 7월 지구 지정 공고를 목표로 조례 개정, 용역 실시, 문화체육관광부 승인 신청 등의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인천시 투자유치산업국에서는 송도 11공구 바이오융합 산업기술단지 융합센터 내에 (가칭)'인천바이오공정전문센터'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복합쇼핑몰과 우수 외국인투자기업 유치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수도권정비계획법 개정 등 규제 완화를 계속해서 정부에 건의할 방침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08-20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2]황해도 벽란도 출신 이춘화 할머니(下)

교통·물류 중심지로 신문물 빨리 접해어릴적 기차 타고 개성에 소풍 갈 정도예성강 하류 위치… 민간 무역도 활발고려시대 수도와 송나라간 교류 통로드넓은 곡창지대 배고픔 모르고 자라연백 온천욕으로 피부병 완치 일화도상인들과 10여년전 '개성관광' 다녀와정몽주 피살 선죽교 등 변함없어 놀라이춘화(83) 할머니의 고향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벽란도(碧瀾渡)는 교통·물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서해 바닷길을 따라 들어온 배는 예성강 하류의 벽란도를 거치게 마련이었다.이 벽란도는 개성과 같은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물류·교통의 허브였다.할머니의 유년시절에도 고향 앞바다에는 조기, 새우를 잡는 배가 널렸고, 화물선도 많이 다녔다. 개성과 벽란도는 철도로도 연결됐다.중간에는 토성역(개풍역)이 있었다. 할머니는 교통 여건이 좋은 곳에 산 덕분인지 '국민학교' 시절 기차를 타고 개성까지 소풍을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10살 때는 배를 타고 인천에서 열린 친척의 환갑잔치에 오기도 했다. 월미도 근방이었는데 배를 타고 5시간 정도가 걸린 듯싶다.할머니는 당시 벽란도가 인천에 비해서도 신식 문물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고 했다."일정 때 고향에 전기가 들어왔고, 고향집 근처 방개월에는 금을 빻는 공장도 있었어. 발전이 빨랐던 거지." 금을 가공하던 금점(金店)이 있었다는 게 이채롭다.벽란도는 뛰어난 입지 덕분에 개성이 수도였던 고려 시대에는 중국 송나라와의 교류의 통로 역할을 했다. 벽란도를 굽이도는 강의 이름 '예성(禮成)'도 '교빙(交聘)의 예(禮)가 성립(成立) 한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조선 중기 편찬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개성부'편에는 "고려에서 송나라에 조회를 할 때에, 모두 여기서 배를 띄우기 때문에 예성이라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송나라 휘종(徽宗) 국신사(國信使)로 1123년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徐兢·1091~1153)도 예성항(벽란도)을 통해 개성으로 갔다. 당시 금(金)이 고려와 송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육로가 막혔다. 바닷길도 산둥반도에서 출발하지 못하고 지금의 절강성 연안의 항구에서 떠나 전라남도 근해에 왔다가 다시 예성강까지 북상하는 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서긍은 3개월 동안 고려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해 고려견문록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남겼는데, 이곳에 당시 '예성항'의 풍경도 담았다. 서긍은 예성항에 있는 '벽란정(碧瀾亭)'에서 왕의 조서를 봉안하고, 하루를 묵은 뒤 육로를 따라 왕성(王城)으로 들어갔다. 당시 항구에서 이뤄진 송나라 국신사에 대한 예(禮)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조류를 따라 예성항에 이르자 정사·부사는 신주(神舟)로 옮겨 탔다. 낮 12시쯤(午刻) 정사·부사가 도할관·제할관을 거느리고 채주(采舟)로 조서(詔書)를 봉안했다. 1만 명 되는 고려인들이 병기·갑마(甲馬)·기치·의장물(儀物)을 가지고 해안가에 늘어서 있고 구경꾼이 담장같이 둘러섰다. 채주가 해안에 이르자 도할·제할관이 조서를 채색 가마에 봉안했다. 하절이 앞에서 인도하고 정사·부사는 뒤에서 따라갔으며 상절·중절은 그 다음으로 따라갔다. 벽란정으로 들어가서 조서를 봉안하고 그 일이 끝나자 지위에 따라 나뉘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육로를 따라 왕성으로 들어갔다."고려대학교 이진한 교수가 쓴 '고려시대 무역과 바다'를 보면 고려시대 벽란도에서는 민간 차원의 무역도 활발했다. 송나라 상인 '송상'은 사실상 고려 왕실이 지정하고 관할하는 항구인 예성항에 도착해 개경 등지를 무대로 장사를 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당시 송나라 상인과 관련된 일화가 실렸다. 당시 예성강을 통해 출입하던 송나라 무역상 중에는 '하두망(賀頭網)'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예성강 주변에서 체류하는 동안 절세의 미인을 보고는 반해버렸다. 그 미인의 남편이 바둑을 즐긴다는 사실을 알아낸 하두망은 바둑에서 일부러 지고는 많은 재물을 잃었다. 뜻밖의 횡재에 마음이 동한 남편은 결국 아내까지 걸게 됐고, 하두망이 아내를 차지하게 됐다. 하두망은 배에서 미인을 범하려 했지만, 아내는 절개를 지켰다고 한다.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러서 배가 빙빙 돌며 나가지 않았는데, 점치는 사람의 말이 '절부가 있기 때문'이라 했고, 하두망은 배를 돌려 미인을 내려놓고 가게 됐다 한다.이 얘기는 '예성강곡'이라는 노래로 당시 고려인들에게 널리 불렸다. 남편이 아내를 보내면서 후회하고 한탄하는 노래가 '전편'이고, 아내가 배에서 내리면서 부른 한이 서린 노래가 '후편'이다.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고려 시인 정포(1309~1345)가 지었던 시를 보면 많은 사람이 예성강곡을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같은 청산이 배 창에 들어 가득한데, 가는 비 실같이 돌다리에 뿌리네. 밤 벌써 깊었지만 맑은 후에 잠 못 이루는데, 뱃사람들은 다시 예성강곡 부르네."벽란도 일대에는 예성강을 따라 펼쳐진 드넓은 평야도 있어 곡창지대를 이뤘다. 이춘화 할머니의 가족도 농사를 지었는데, 추수철이면 학교도 못 가고 온종일 일을 하고는 했다. 농번기면 온 가족이 함께해도 일손이 턱없이 부족해 일당을 주고 전라도 등지에서 온 사람들을 부렸다. "고향 주변이 모두가 평야였지. 연백평야 끄트머리였는데 평야가 정말 넓었어. 쌀이 많이 나와서 유년시절에 배고팠던 기억은 없어."할머니는 유년 시절 연백군에 있는 온천에 갔던 기억도 또렷이 간직하고 있다. 연백에는 연안온천과 배천온천이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할머니도 피부병이 도졌는데 연안온천에서 10일간 온천욕을 하고 완치됐다. "어른들 말이 거기가 물이 좋다 그랬어. 옴이 와서 머리도 헐어서 옷을 입지 못할 정도가 됐는데 열흘을 (온천욕을) 하고 왔더니 깨끗이 없어졌어. 그때 약이 있겠어, 민간요법으로 하다가 안 돼 온천에 갔더니 바로 나았던 거지."온천은 지금 대중탕의 모습과 흡사했는데, 탕에는 호랑이 모습의 조형물이 있었던 게 생각난다. 할머니는 어린 나이여서 그런지 물이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었다. 물을 식혀서 씻어야 했다. 탕에 들어갈 때는 가마니를 뒤집어썼다. 이북5도청 황해도에서 지난 1970년 발행한 '황해도지'를 보면 연안온천은 연안읍에서 동쪽으로 15리 떨어진 온정면 금성리에 있었다. 황해선 연안온천역이 있어 교통이 편리했다. '황해도지'는 "부근에는 특히 토탄이 많이 나며 온천은 이러한 토탄지대에서 솟아나는데, '루마지스' '피부병' '부인병' '치질' 등에 모두 특효가 있다고 해 원근(遠近)에서 욕객이 답지한다. 욕탕의 설비가 완전하고 여관 등의 시설도 갖추어 있어 유숙, 휴양에 불편이 없다. 본도의 남부지성에 위치해 전의 고려조의 수도 개성에 가까웠기 때문에 먼 옛날부터, 배천온천과 함께 널리 알려졌다"고 했다.국어학자 일석(一石) 이희승(1896~1989)도 소학교 교사였던 19살 때 배천온천에서 옴 치료를 했다고 회고했다. 이희승의 고향은 경기 개풍(출생은 경기도 시흥)으로, 서울에서 수학하다 낙향(落鄕)한 뒤 사립 소학교 교원으로 취임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서전 '다시 태어나도 이길을'에서 "배천온천은 후에 유명한 온천으로 발전했지만, 당시만 해도 아무 시설이 없는 자연 그대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할머니는 유년시절 개성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다. 할머니가 본 개성의 첫인상은 '하얗고 환하다'는 느낌이었다. 밭과 논도 잘 정리돼 있었다. 이 같은 느낌은 소설가 박완서(1931~2011)가 자전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처음 송도(개성)를 봤을 때 느꼈던 바 그대로다. 박완서는 서울에 있는 국민학교에 가려고 고향 경기도 개풍군에서 걸어 송도까지 갔다. 박완서는 당시 고개 위에서 내려다본 송도의 풍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발 아래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졌다. 말로만 듣던 송도였다. 나는 탄성을 질렀다. 은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길도 집도 왜 그렇게 새하얗게만 보였던지. 나중에 안 것이지만 송도고보, 호수돈고녀를 비롯한 신식의 큰 건물들은 모두 화강암으로 지었고, 토지도 사질(砂質)이어서 길이나 바위가 유난히 흰 게 개성 지방의 특징이었다. 사람이 저렇게도 살 수 있는 거로구나, 나는 벌린 입을 못 다물고 그 인공적인 정연함과 정결함에 오직 황홀한 눈길을 보냈다."이춘화 할머니는 양키시장에서 함께 장사하는 이북 실향민 상인들과 10여 년 전 개성관광을 다녀왔다. 60여 년 만에 개성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두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놀라웠다. 유년 시절에 봤던 선죽교나 박연폭포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그 모습에 다들 놀라워 했다. "선죽교에 갔는데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못 들어가게 막아놨다는 거였어. 어렸을 때는 핏자국이 그대로 있다고 신기하다며 발로 비비고 그랬는데, 개성관광 때는 그렇게는 못하게 해놓은 거지. 우리 같았으면 개발하고 그랬을 텐데 그대로더라고." 할머니와 함께 개성관광을 갔던 양키시장 '평양집' 할머니가 찍은 사진을 보니 선죽교 옆에 세워져 있는 '선죽교 비'의 글자도 또렷했다. 이 비의 글씨는 조선시대 명필로 알려진 석봉 한호가 썼다고 한다. 선죽교는 1392년 정몽주가 훗날 조선 태종이 된 이방원 일파에 피살된 장소다.지난 7월 21일, 할머니는 취재팀과 함께 고향 땅 지척의 모습이라도 보기 위해 강화평화전망대를 찾았다. 할머니는 전망대에 있는 망원경을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흐린 날씨 탓인지 북녘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피란 때 오갔던 산이포(강화군 양사면 철산삼거리 일원)도 둘러봤다. 예전 나루터는 사라지고 해안 경계 철책이 강을 둘러싸고 있었다. 수풀이 무성한 철책가에는 '지뢰매설지역 위험'이라고 쓰인 표지판과 북쪽의 대남방송이 손님을 맞이할 뿐이었다. 할머니는 "정말 많이 변했다"며 "다시 또 북에 갈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아쉬워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지난달 21일 경인일보 취재진과 함께 강화도를 찾은 이춘화 할머니가 피란 때 배를 타고 오갔던 산이포(강화군 양사면 철산삼거리 일원)에서 고향인 벽란도 쪽을 쳐다보고 있다. /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대동여지도에 표시된 개경과 예성항. 출처/고려대학교 이진한 교수가 쓴 '고려시대 무역과 바다'이춘화 할머니와 함께 개성관광을 갔던 양키시장 '평양집' 할머니. 선죽교비에 '善竹橋'라는 글자가 또렷하다. /평양집 할머니 제공양키시장 '평양집' 할머니가 직접 찍은 선죽교의 모습. /평양집 할머니 제공이춘화 할머니가 강화평화전망대에서 고향 벽란도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임순석·조재현기자 sseok@kyeongin.com

2017-08-16 홍현기

[zoom in 송도]송도 센트럴파크 수로 확장· 보행교 설치사업 본격화

국내 최초 해수공원내 아트센터인천 건설센터앞 수로 끊겨 '수상택시 운항' 걸림돌120m구간 폭 30m·반원형 보행교도 조성공사예산 38억 소요… 내년 하반기 마무리송도국제도시 센트럴파크 '아트센터 인천'(콘서트홀) 앞 수로를 확장하고 보행교를 설치하는 사업이 추진된다. ┃위치도 참조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 센트럴파크 수로 확장 및 보행교 등 설치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13일 밝혔다.송도 센트럴파크는 주민과 국내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약 41만㎡ 규모의 국내 최초 해수 공원으로, 송도 국제업무단지 중앙부에 위치해 있다.동북아트레이드타워 앞에서 G타워 인근을 지나 아트센터 부근까지 수로(길이 약 1.8㎞)가 연결된다.문제는 수로가 아트센터 부근에서 단절되는 데다, 너비도 좁아진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수상택시가 아트센터 앞까지 운항하지 못하고 있다.인천경제청은 아트센터 앞 수로 120m 구간의 너비를 30m로 확장할 계획이다.또 단절된 부분을 개선해 수로 전체가 연결되도록 하고, 반원형 형태의 보행교를 설치할 계획이다. 사람의 이동을 위해 수면 높이로 나 있는 길을 없애는 대신 보행교를 설치하겠다는 것이다.인천경제청은 수로를 확장하고 보행교를 설치하면서 수목 식재 등의 방식으로 그 주변을 정비하기로 했다. 야외 전시장을 설치하거나 주민과 관광객이 물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 방안도 구상하고 있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아트센터 수로 인근에 상가가 들어설 예정인데, 지금은 나무가 적고 지장물이 많다"며 "상가와 수로 사이의 공원을 잘 정비하면, 경관과 상권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또 "주민과 관광객이 물에 발이라도 담글 수 있는 (물놀이) 시설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수로 확장 및 보행교 설치 공사는 올 10월쯤 본격화할 전망이다.수로 확장 8억~9억원, 보행교 설치 15억원 등 약 38억원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추산하고 있다. 연내 공사가 시작되면, 내년 하반기 중 사업이 완료될 예정이다.아트센터는 '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에서 건립한 후 인천시에 기부채납하도록 돼 있는 시설물이다. 공사(1단계)는 완료됐으나, 사업 주체 내부의 갈등으로 준공 신청이 늦어지면서 개관까지 지연되고 있다. 개관이 지연되고 있는 문제는 있지만, 우리나라 문화예술 분야의 주요 인프라이자 송도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수로 확장과 보행교 설치는 아트센터로 관광객을 모으기 위한 것"이라며 "많은 돈을 들여 새로운 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아닌, 기존 시스템을 활용하고 개선해 사람이 모이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게 이번 사업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 송도국제도시 센트럴파크 '아트센터 인천'(콘서트홀) 앞 수로를 확장하고 보행교를 설치하는 사업이 추진된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08-13 목동훈

[zoom in 송도]국대 최대 한옥호텔서 '동·서양 맞춤 웨딩'

국내 최대 한옥 호텔 '경원재 앰배서더 인천'이 올해 말까지 실속 웨딩 패키지를 선보인다.패키지는 전통혼례로 치러지는 '클래식 패키지'와 서양식으로 진행되는 '로맨틱 패키지' 두 가지다. 두 패키지 모두 1인당 5만원대의 가격에 식사·음료뿐만 아니라 웨딩 장식과 각종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 실속 있는 웨딩이 가능하다.경원재 앰배서더 인천의 특화 상품으로 자리 잡은 전통 혼례의 경우 '클래식 패키지'로 이용할 수 있다. 패키지에는 식사, 음료, 주류, 대관료, 폐백실 사용료, 각종 웨딩 소모품, 신랑·신부 전통의상, 장식, 삼현육각(전통음악 연주) 등이 포함된다. 가격은 세금을 포함해 1인당 5만8천원부터 시작된다. 전통 혼례는 고즈넉한 한옥에 둘러싸인 호텔 안마당 또는 대연회장인 아리랑홀에서 할 수 있다.일반 서양식 웨딩으로 진행되는 '로맨틱 패키지'의 경우, 1인 가격이 세금을 포함해 5만5천원부터 시작된다. 패키지에는 식사, 음료, 주류, 대관료, 폐백실 사용료, 각종 웨딩 소모품, 기본형 생화 장식, 피아노 3중주가 포함된다.두 패키지 모두 200명 이상 예약 시 이용 가능하다. 식사는 전통한식 세트 또는 뷔페를 이용할 수 있으며, 하루에 최대 2개 팀만 예약받기 때문에 여유롭게 예식을 진행할 수 있다.경원재 앰배서더 인천은 한옥 호텔 최초로 5성 등급을 획득한 국내 최대 한옥 호텔이다.건축 단계부터 국내 전통 명장들이 다수 참여해 한옥 건축의 완성도를 높였으며,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한옥 숙박 명소로 인정받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야외 마당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통혼례.서양식 웨딩을 준비 중인 아리랑홀(대연회장). /경원재 앰배서더 인천 제공

2017-08-13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1]황해도 벽란도 출신 이춘화 할머니(中)

남편 제대금으로 좌판 3개 사 50년째 장사1930년대 조성 정식명칭은 송현 자유시장철거 후 다시 재건 미군 물건 팔면서 '명성'군복 자체가 패션이던 시절 가장 많이 팔려당시 한달 수익이 대기업 부장 월급의 2배군복 염색 안하고 팔면 '불법' 벌금 물기도부대물건 줄어 미제 청바지 등 수입품 대체의류산업 발전 등으로 쇠퇴… 명맥만 유지경인전철 동인천역 4번출구(북광장) 오른편에 '중앙시장 전통혼수거리'가 있다. 한눈에 봐도 지은 지 수십 년은 돼 보이는 건물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품이 거래됐다고 해서 '양키시장'으로 불렸다. 인천 동구가 행정 명칭으로 정한 이름은 '송현 자유시장'이다. 양키시장은 1930년대에 조성됐다가 철거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쳤다. 양키시장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골목을 지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붐볐다고 하는데, 지금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이춘화 할머니는 50년이 넘도록 이곳 양키시장을 지키고 있다. 할머니는 직업 군인 남편을 만나 결혼할 때까지 서울 청량리 '태창방직' 공장에 다녔다. 결혼 뒤에는 남편 근무지를 따라 강원도 춘천 등지에서 살았다. 1966년께 남편은 대위로 제대를 했는데 제대금이 15만원이었다. 당시 15만원이면 한 가족이 살 수 있는 넓은 집을 한 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돈으로 양키시장의 좌판 3개를 샀다. 당시 집안 식구들이 인천 동구에 살아 양키시장과 인연이 닿았다. 양키시장은 주식회사 형태로 돼 있어 회사 지분을 취득하는 방식으로 좌판 계약을 했다. 가게 이름은 '은영사'로 정했다. 인천 동구 화평동에 조그만 전셋집을 얻었다. 옷 장사를 시작한 뒤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올해로 51살이 됐다. 할머니는 둘째 아들의 나이를 이야기하다 양키시장에서 50년이 넘도록 장사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세월이 오래됐다"고 말했다. 요즘은 재고나 팔아 볼까 하는 생각으로 나오지만 손님이 없어 매일같이 허탕이다.양키시장의 역사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합시장으로는 인천에서 가장 오래됐다. 양키시장이 생기기 전인 1890년대에 중구 신포동에는 어물전(생선전)이 있었다. 채소를 취급하는 '푸성귀전'도 있었다. 신태범의 책 '인천 한 세기'는 "일찍이 19세기 말에 이곳(신포시장)에 자리를 잡은 청국인의 푸성귀전이 현재 인천에서 으뜸가는 권위를 지니고 있는 신포시장의 전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양키시장 자리는 바닷물이 들어오던 갯골이었는데, 1925년 매립됐다고 한다. 인천학연구원에서 기획한 '인천전통시장의 성장과 쇠퇴'라는 책에 따르면, 1937년 이 자리에 '송현일용품시장'이 들어섰다가 1940년대 중반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제에 의해 전술적인 이유로 철거되기도 했다. 미국이 1945년 3월 일본 도쿄에 '소이탄(시가지와 밀림을 태우는 목적으로 개발한 포탄)'을 이용한 공격을 했고, 목조건물이 많았던 일본이 큰 타격을 입은 바 있다. 이에 일제는 소이탄 공격으로 인한 화재 확산을 예방하기 위해 인천을 비롯한 한반도 주요 시가지를 중간중간 공터로 만드는 일명 '소개공지'를 조성했다. 인천의 경우 만석동, 송현동 일대에 3곳이 지정됐는데 양키시장 자리가 포함됐다. 해방 후 제물포상인보존회의 주도로 시장 재건이 추진됐고, 노점상들은 송현동 100번지에 사무실을 두고 소성자유시장자치조합을 출범시켰다. 이후 부평 미군기지(캠프마켓) 등에서 시장으로 물건이 흘러들었고, 미군 물건을 팔면서 '없는 것이 없는 시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고일의 '인천석금'(仁川昔今)에도 양키시장과 신포동 일대의 시장 성장사가 잘 설명돼 있다. 전국적으로 이 같은 양키시장이 많았다. 서울 남대문시장, 부산 국제시장이 전국적으로 유명했고, 인천과 대구의 양키시장도 규모가 큰 편에 속했다.인천 양키시장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사가 잘 됐다. 시장 골목골목에 인파가 몰려 제대로 이동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때는 사람이 미어졌어." 할머니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하루 매출이 50만~70만원이었다고 했다. 이 중 10만원 정도가 남았다. 한 달이면 250만원 이상을 벌었다. 대기업 부장 월급의 2배 정도였다. 아들 둘에 딸 하나를 교육시키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아파트도 샀다.할머니가 양키시장에서 가장 많이 판 것은 군복이었다. 1960년대는 국내 옷감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때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은 그 자체가 유행이었다. 할머니가 장사를 시작했을 당시 군복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는데, 80년대까지도 군복을 구하러 시장에 오는 사람이 많았다.우리의 현대 의류 역사를 정리한 책 '현대패션 110년'은 1950년대 우리나라의 패션 경향을 군복으로 설명한다. "군용담요는 겨울옷을 만드는 원단이 되었고, 미군의 털양말은 어린이용 스웨터로 활용되었으며, 카키색의 군복 바지는 몸뻬로 개조되었다. 염색한 군담요 의상과 군 점퍼, 미처 염색이 끝나지 않은 카키색 군복을 줄여서 수선한 바지, 그리고 군화를 신고 거리를 누비는 모습은 익숙한 광경이 되고 있었다. 미군 군수물자에 찍힌 'UN'이나 'U.S.A.'라는 글자는 염색을 해도 지워지지가 않아서 미군 담요에 물감을 들여 코트를 만들어 입으면 'U.S.A'라는 글자가 비쳐 나와 그 옷 주인의 별명이 'U.S.A.'라고 불리는 웃지 못할 서글픈 추억도 있었다."양키시장에서는 군복 이외에 미군 부대에서 나온 각종 물품이 팔렸다. 할머니도 군복 이외에 미군 군화, 반합 등을 팔았다고 했다. 다른 상인들은 통조림, 담배, 과자를 팔고 시장에는 암달러상도 있었다. 할머니는 이들 물품이 인천 부평의 '캠프마켓'뿐만 아니라 서울 용산, 경기도 문산, 동두천 등 수도권에 있는 미군 부대에서도 흘러왔다고 했다.동아일보 1955년 5월16일자는 당시 양키시장의 물품이 어떻게 미군 부대에서 빠져나오는지 4단계로 구분해 소개했다. 미군 육지 수송을 할 때 빼돌리기, PX에서 빼돌리기, 미군 부대 출입하는 개인이 가져오기 등이 있었는데, 대다수는 한국에 수송되는 단계에서 대량으로 빼돌린다고 했다. "흔히 '양키' 물건은 미군인들이나 또는 미군부대에 드나드는 한국인 종업원 등에 의해서 새 나오고 구호품 등에서 시장에 흘러나온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전혀 이 방면의 내막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물론 약간의 양키 물건은 호주머니 속에 감추어 빼내오는 소위 '얌생이'에 의해서 시장으로 나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현재 우리가 하루하루 소비하고 있는 엄청난 수량의 '양키' 물품은 도저히 그러한 미미한 공급으로는 충당할 수 없는 것이다. (중략) 첫째 단계가 미군 수송선에서 물품이 양륙(揚陸)될 때 그 방면의 요로와 사전 연락이 있은 후 교묘한 수단을 써서 감쪽같이 집더미만한 (때로는 반톤급) 짐 덩어리가 괴짝으로 송두리째 옆으로 흘러나온다. 때로는 조고만 발동선이 동원되고 때로는 한번 덤벙 바닷물 속에 가라앉았다가 다시 바깥 세상에 나오게도 된다."당시 군복을 그대로 입을 경우 불법으로 단속의 대상이 됐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야전점퍼나 전투복 상의를 검은색으로 염색해 팔았다. 전투복 하의를 염색한 '스모루바지'도 인기였다.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맞는 사이즈가 '스몰(small)'밖에 없어 스모루바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대패션 110년'은 "시장골목은 염색집으로 넘쳐났고, 드럼통 염색 솥은 수증기를 뿜으며 쉴 새 없이 군용물자를 삶고 있는 모습도 낯설지 않았다. 남학생들은 일부러 모자를 찢어 다시 재봉틀로 누벼 쓰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으며 역시 군복을 염색한 옷을 입었다"고 했다.이춘화 할머니는 염색하지 않은 옷을 팔다가 여러 차례 단속을 당했다. 단속되면 옷을 빼앗기고 벌금을 물어 한 달 치 수익이 고스란히 날아가니 상인들은 항상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미군 헌병이나 경찰이 와서 군복을 뺏어가고 그랬지. 뭐 알려주는 것도 없어. 갑자기 와서 다 뺏어가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일부러 군복을 많이 내놓지 않고 다른 데 숨겨 놓기도 하고 그랬어."방일영문화재단에서 발간한 한국문화예술총서 '우리생활 100년·옷'에도 이 당시 단속 풍경이 그려진다. "관공서에서 군복 군화 등 미국 구호 물자를 일반인에게 배급하였는데, 배급하는 것 외에도 도난품이 많아져 경찰 당국으로선 큰 두통거리였다. (중량) 미군 원조 물자 구제품을 염색하는 전문 염색점이 서울 청계천변에 생기기도 하였다. 군용 기름 드럼통에 검정물을 끓여서 카키색 군복을 물들이는 곳이 즐비하고, 방파제로 쌓아 놓은 돌 위에 염색한 옷을 말리는 광경은 복개하기 전 청계천변의 풍속도였다."할머니는 양키시장에서 군복뿐만 아니라 작업복, 청바지, 체육복 등도 팔았다. 일주일에 2번은 전철을 타고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양키시장까지 옷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날랐다. 할머니와 같은 상인이 많아 역전에서 보따리를 든 사람의 탑승을 막기도 했다. 할머니는 "시간이 지나면서 상인들이 봉고차를 빌려다 장을 보게 됐고, 나중에는 택배로도 물건을 받아보게 됐다"고 했다.양키시장에서는 인천항을 통해 뱃사람들이 가져온 미제 청바지도 팔았다. 일본서 외항선을 타는 사람들이 가져온 가죽점퍼도 있었다. 남대문시장에서 나오는 소위 '짝퉁'도 많았다. 해외 스포츠 브랜드 등이 많았다. 인천학연구원이 낸 '인천전통시장의 성장과 쇠퇴'는 "1970~80년대 부평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물건들이 거의 없어졌고,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는 수입 물건들이 대신 자리를 잡았다. 90년대 양키시장은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유명 브랜드의 모조품들, 소위 말하는 짝퉁을 파는 시장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할머니는 "예전에는 가짜 메이커도 좋다고 학생들이 찾아 입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가짜를 입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국내 의류산업이 발전하고, 생활 수준이 높아질수록 양키시장은 경쟁력을 잃어갔던 거다. 2000년대 초반 단행된 '수입소화물규제'로 중구 항동 제2국제여객터미널 통해 수입상들이 개인적으로 들여오던 물건의 제한량이 40㎏에서 절반으로 줄어든 것도 시장 쇠퇴의 원인으로 꼽힌다.지금은 시장에 있는 90여 개 좌판 중 절반은 비어 있다. 양키시장 상인 가운데 이북 출신이 절반 이상으로 수십 명은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장사를 그만두거나 세상을 떠났다. 양키시장에서 여전히 장사하는 실향민은 할머니를 포함해 3명뿐이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50년 넘게 인천 동구 송현동 양키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이춘화 할머니가 가게에 진열된 물품을 정리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이춘화 할머니의 가게 '은영사'. 할머니는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예뻐서 지었다"고 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7-08-09 홍현기

[zoom in 송도]트리플스트리트에 국내최대 '몬스터VR'

문광부·콘텐츠진흥원 ‘VR체험존’ 첫 결실GPM과 국내개발사 협업 콘텐츠 40종 선봬정글존·익스트림·시네마구역 볼거리 다양관람객들 실제같은 몰입감에 ‘즐거운 비명’인천 송도국제도시 복합쇼핑몰 트리플스트리트 D동 6층에 국내 최대 규모의 도심형 VR(가상현실) 테마파크 '몬스터 VR'이 지난 4일 개장했다. 몬스터 VR은 국내 VR산업의 놀라운 성장을 한눈에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국내 VR업체들이 개발한 25종의 VR콘텐츠와 15종의 어트랙션을 즐길 수 있다.특히 몬스터 VR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미래 먹거리와 문화·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VR 콘텐츠 체험존 구축 지원사업의 첫 결과물이다.공모를 통해 선정된 게임 개발 및 게임 서비스플랫폼 회사인 'GPM'은 (주)비브스튜디오, (주)미디어프론트 등 국내 VR 개발업체들과 협업해 몬스터 VR을 조성했다.GPM 박성준 대표는 "시행착오와 험난한 길이 많았다"며 "많은 파트너사, 문체부와 진흥원의 도움이 없었다면 몬스터 VR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몬스터 VR은 작은 놀이공원을 연상케 한다. 테마파크에 들어가면 열기구와 번지점프, 외다리 건너기, 슈팅, 래프팅 등을 즐길 수 있는 '정글존'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중앙에는 GPM이 개발한 5개의 '큐브'가 있다. 가로와 세로 3.3m, 높이 2.7m 규모의 큐브에서 고글 모양의 헤드셋을 쓰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익스트림' 구역에서는 VR을 통해 카레이싱과 봅슬레이 등을 체험할 수 있다.카레이서가 돼 자동차를 운전하고, 롤러코스터를 타고 중국 만리장성과 캘리포니아 해변까지 시공간을 넘나드는 짜릿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시네마' 구역은 VR 영상 콘텐츠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아프리카 정글을 탐험하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닌자가 돼 칼 솜씨를 뽐낼 수 있다. 세계적인 축구 선수들이 차는 페널티 킥을 막는 골키퍼도 될 수 있다. 단순한 오락게임뿐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체험시켜 줄 교육용 콘텐츠도 있다.이날 오전 11시 개장식이 열렸다. 문체부 김상욱 콘텐츠정책관은 "인천 송도가 첨단도시, 한류 관광도시로 발전하는데 몬스터 VR이 기여할 것"이라고 했고, 인천시 조동암 정무경제부시장은 "바이오와 첨단산업이 어우러진 송도에 몬스터 VR이라는 의미 있는 시설이 들어왔다"고 했다.몬스터 VR은 개장식이 끝난 후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개장 첫날에도 적지 않은 사람이 몬스터 VR을 찾았으며 곳곳에서 즐거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경기도 용인에서 아이들과 함께 온 윤연(45·여)씨는 '정글래프팅'을 탔다. 정글래프팅은 정글을 테마로 협곡, 동굴, 폭포 등 다양한 공간을 연출해 체험의 몰입도와 재미를 극대화한 실감형 기기다.윤연씨는 "예상보다 세밀하다. 실제와 가깝고 리얼리티가 있다"며 "우리 업체 기술이 이렇게 발전했는지 몰랐다. 잘 만들었다"고 말했다.몬스터 VR 운영 시간은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10시까지다. 자유이용권 가격은 청소년·성인 기준으로 평일(월∼목) 2만8천원, 주말(금∼일, 공휴일) 3만8천원이다. 소인(8~13세) 자유이용권은 청소년·성인보다 9천 원 싸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7-08-06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한국조지메이슨대, 소외계층 청소년 '영어캠프' 개최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위치한 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는 지난 2~4일 경기도 광명시 소외계층 청소년 20명을 대상으로 여름 영어캠프를 운영했다. 한국조지메이슨대와 광명시는 지난해 6월 글로벌 교육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한 바 있다. 지난 2일부터 사흘간 진행한 여름 영어캠프에서 한국조지메이슨대 학생들은 광명시 학생들의 멘토로서 영어 자기소개, 영어 일기 쓰기, 해외 문화 체험하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의 진행을 도왔다.스티븐 리 한국조지메이슨대 총장은 "이번 첫 여름 영어캠프를 계기로 지속해서 지역 내 소외계층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추진할 계획"이라며 "여름 영어캠프에 참여한 광명시 청소년들이 글로벌 시대에 맞는 경쟁력 있는 인재로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했다.한국조지메이슨대는 미국 버지니아 주립대학인 조지메이슨대학교의 글로벌 한국 캠퍼스로, 본교와 동일한 커리큘럼과 학위를 제공한다. 현재 한국조지메이슨대는 경영학, 회계학, 재무금융학, 경제학, 국제학, 분쟁분석 및 해결학 등 6개 학사 과정을 제공하고 있으며, 내년에 '시스템공학' 석사 학위 과정을 개설할 예정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08-06 목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