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0]황해남도 해주시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中)

크고 작은 기지 광범위하게 분포… 옷·음식 등 경제 영향력주둔 초기부터 범죄·기지촌 조성 등 심각한 사회적 문제도미군 장교 운전수·배차담당·중장비 하역감독 등 20년 일해월미도·중부서 자리 해상수송부 등 옛 위치 하나 하나 짚어부대 규모·기능 등 체계적 정리 없어… 할아버지 증언 의미황해도 해주 출신 호성신(81) 할아버지는 21살 되던 해인 1957년부터 20년 가까이 인천에 있는 미군부대 여러 곳에서 근로자로 일했다. 월미도 미군부대 장교 운전수로 시작해 미 해군 해상수송부 장교 운전수, 부평미군부대 차량 배차담당, 인천항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을 차례로 맡았다."참 팔자가 좋았던 시절이야. 미군부대에서 장교를 상대하니까 혜택도 많고, 잘 보이려는 사람도 많고. 덕분에 보라색 양복 쫙 빼입고 신포동에서 오토바이 타고 다녔지."인천은 항만을 낀 데다 수도권이라서 해방 직후부터 곳곳에 미군부대가 들어선 '미군기지의 도시'였다. 군사장비와 시설을 운용하는 데 필수인 기름부터 미군 병사들이 먹는 빵까지 대부분의 미군 군수물자는 인천에서부터 전국의 미군기지로 퍼져나갔다. 미군 전용철도도 거미줄처럼 도시에 깔렸었다. 이렇다 보니 호성신 할아버지 같은 미군부대 근로자는 물론 인천 지역사회 전반에 걸쳐 이른바 '미군부대 경제'가 끼친 영향력이 지대했다. "옷, 음식, 약품까지 미군 PX물자가 어마어마하게 밖으로 흘러나왔고, 미군부대 출입증이 비싸게 거래됐어. 미군 기름창고에서 기름 빼돌리는 사람도 많고, 기지촌에 양색시도 많았고…. 솔직히 미군 때문에 먹고 산 사람이 인천에 많아."반면 미군의 한반도 주둔 초기부터 발생한 미군 범죄나 기지촌 조성 등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불거지기도 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인천항 부근과 월미도부터 남구 숭의동, 용현동, 학익동, 문학산 일대까지 크고 작은 미군부대가 광범위하게 분포했다. 부평지역은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애스컴(ASCOM·Army Support Command)'을 비롯한 미군부대가 대거 몰려있어 '애스컴 시티'라 불리며 도시 자체가 군사기지나 마찬가지였다. 현재 인천에는 부평 '캠프마켓(Camp Market)'과 강화도에 극히 소규모 부대만 남았을 뿐이고, 그 미군부대 터는 공원이나 아파트단지 등으로 바뀌었다.미군의 한반도 상륙 출발점은 1871년 강화도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미군의 첫 교전인 신미양요(辛未洋擾)다. 이어 미군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두 번째로 한반도에 상륙했다. 당시 인천항에 몰린 환영 인파에 일본 경찰들이 치안 유지를 내세워 총격을 가해 2명이 숨졌다. 서울신문사가 1979년 펴낸 '주한미군 30년(1945~1978)'에서는 당시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패전국 일본의 경찰이 승전국인 미군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승전국도 패전국도 아닌 한국인에게 발포한 불법 총격이었다. 해방을 맞고서도 일본 경찰에게 총격을 당한 인천시민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맞서 싸울 총도, 정부도 없던 이들은 이틀 후 두 사람의 사망자를 시민장(市民葬)으로 치르는 것으로 무력함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주한미군 규모는 1948년 5월 기준으로 약 3만명에 달했다. 인천항 주변과 일본군 군수기지인 부평 조병창도 미군이 접수했다. 다음은 소설가 이원규가 해방 직전부터 한국전쟁까지의 인천을 다룬 장편소설 '황해'(1992)에서 묘사한 해방 후 인천항 주변 풍경이다. '인천항은 온통 미군 함정들로 가득차 있었다. 반도 중부의 보급항 구실을 하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아구리배라고 부르는 수송선들이 큰 입을 벌려 물자와 병력을 내려놓고, 외항에는 구축함과 순시선들이 떠 있었다. (중략) 남루한 옷을 걸친 아이들은 미군들에게 매달리며 어떻게들 배웠는지, 헤이 지아이 넘버원 기브미 추잉껌, 기브미 쪼코레트, 하며 따라붙었다.'1949년 6월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서 철수한 미군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해 9월 15일 연합군을 이끌고 인천에 세 번째로 상륙했다.연합군의 상륙지점 중 하나인 월미도는 인천상륙작전 이후부터 미군이 '징발'해 미군부대를 구축, 미군이 떠나간 1971년까지 20년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됐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월미도에 살던 주민들은 졸지에 실향민이 되기도 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1957년부터 2년 정도 월미도 미군부대에 근무했다. 월미도 미군부대 땅은 인천시가 국방부로부터 사들여 2007년 월미공원을 조성했다.지난 추석 명절 직전인 9월 29일 호성신 할아버지와 월미공원을 찾았다. 할아버지는 옛 기억을 곱씹으며 옛 미군부대 시설이 있던 자리를 하나하나 짚어냈다. 월미공원 정문이 바로 미군부대 정문이었다고 한다. 현 미추홀 전통문화음식연구원 건물 자리는 장교 숙소였고, 주요 시설은 전통공원이 조성된 자리에 몰려있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공원 내 동물원이 할아버지가 장교 차량 운전수로 근무하며 주로 머물던 수송대(모터풀·Motor pool) 터라고 했다. 각종 기록을 보면, 월미도 수송대의 부대명은 미 제202수송대대다. 할아버지가 몰던 차는 쓰리쿼터(3/4t) 트럭 같은 군용차가 아니라 포드(Ford) 승용차였다. "라이브러리(library·도서관), 피엑스(post exchange·군부대 매점), 짐나시움(gymnasium·체육관)도 갖췄고 없는 게 없었어. 부대 내 한국인 근로자들은 100명쯤 됐던 것 같아."월미도 미군부대에는 미군 병사의 각종 법무를 처리해주는 법무사무소(Legal office)도 있었다고 한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미군 병사와 한국 여성이 리걸 오피스에서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이현호라는 한국사람이 리걸 오피스 사무원으로 일해 영어로 전화받으면서 타이프도 쳐서 유명했는데, 미국으로 이민갔다"고 회상했다. 소설가 오정희는 1979년 발표한 단편 '중국인 거리'에서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월미도 미군부대 인근 인천차이나타운을 그렸다. 소설 속 미군 병사는 호기심으로 미군부대를 훔쳐보던 동네 꼬마들을 향해 칼을 던지며 놀려댔다. 소설 속 아이들이 '양갈보'라고 칭하는 한국인 여성들은 일본인들이 살던 그 가옥에 거처하면서 미군 병사를 상대했다. 소설 '중국인 거리'처럼 미군 병사가 여성을 살해한 사건도 실제로 다수 있었다.호성신 할아버지는 현 인천중부경찰서 자리에 사무실을 둔 미 해군 해상수송부(MSTS·Military Sea Transportation Service)로 자리를 옮겨 10여 년 동안 미 해군 부대장의 차량 운전수로 일했다. 미 해군 해상수송부는 부대장을 포함해 8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인천항에 미 군함이나 군용수송선이 들어오면 행정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는 게 할아버지 설명이다. 미 해군 해상수송부 바로 옆에는 미 헌병대가 있었다고 한다. 미군 범죄수사대(CID)도 인근에 있었다. 근처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맞은편 선구점 거리에는 'US호'라는 간판을 단 미군만 출입할 수 있는 스낵바도 영업했다고도 했다. 중구 수인사거리에 있는 삼익아파트 자리에는 제법 규모가 큰 미군 PX창고가 있었는데, 여기서 '미제 군수품'이 민간으로 많이 빠져나왔다고 한다. '주한미군 30년(1945~1978)'을 보면, 1950년대 말 전국에 120곳이 넘는 미군 PX에서 취급한 물품의 60%는 시중으로 흘러나갔다고 추정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나도 해군 중령 자동차 시트 밑에 물건을 숨겨다가 밖으로 뺐다"며 "화수동에 집을 지을 때는 흑인 병사가 각종 건축자재를 갖다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남구 용현동과 학익동에는 미군 유류저장소(POL)와 이를 관리하던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다. 문학산 정상은 1959년부터 미군이 차지하다 1979년 한국군 공군이 인수했고, 2015년에야 개방됐다. 분단과 인천 미군부대를 소재로 여러 작품을 쓴 인천 출신 이원규(70) 작가는 "부평미군부대 폐품처리장에서 나온 맥주 깡통을 펴서 집 지붕으로 만든 사람도 있고, 양공주도 100명 넘게 봤다. 미군부대에서 경비로 일한 외가 친척이 준 미군 워커는 고등학교 내내 신고 다녔다"며 "미군부대는 인천사람들에게 삶의 일부였다"고 유년시절을 회상했다. 부평 애스컴으로 자리를 옮긴 호성신 할아버지는 운전수로 일하다가 차량 배차담당을 맡았다. 할아버지는 "애스컴 앞은 전부 색시촌과 맥주홀로 쫙 깔려있었다"며 "흑인은 흑인끼리 백인은 백인끼리 따로 놀았다"고 했다. '주한미군 30년(1945~1978)'에서도 신촌이라 불린 부평미군부대 앞에 대해 '서부영화에 나오는 미국 개척도시보다 더욱 미국적이었고, 밤의 여인들의 숫자는 한때 2천명을 훨씬 상회하기도 했다'고 나온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애스컴에서 인천항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으로 승진했다. 해방 이후(1949년 미군 철수~한국전쟁 발발 사이는 제외) 인천항은 미군항만사령부(1958년 애스컴 편입)가 '징발'해 주둔한 미군용부두와 일반부두로 나뉘어 운영됐다. 미군용부두 내에는 미군 공병부대도 있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한다. 미군이 미군용부두를 '징발 해제'해 운영권이 한국 정부로 넘어온 때는 1971년 6월이다. 인천에 미군부대가 정확히 어느 정도 규모로 어디에 위치해 있었고, 그 기능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이제는 미군부대를 기억하는 이들도 흔치 않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단편적이나마 되살려낸 인천 미군부대에서의 경험은 그래서 더욱 귀하게 다가온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황해도 해주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가 1950년대 말 근무했던 월미도 미군부대 내 장교 숙소가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인천항과 월미도 일대에 있었던 미군부대를 포함한 주요 시설을 표기한 지도(작성 연도 미상). 월미도에 검은 사각형으로 표기된 미군부대 건물 배치 현황은 호성신 할아버지 기억과 상당히 일치한다. 할아버지가 장교 운전수로 근무했던 미 해군 해상수송대(MSTS)를 비롯해 미 헌병대, 공병부대도 지도에 표시돼 있다. /부평역사박물관 제공미군부대에 근무하던 시절 받은 문서를 설명하고 있는 호성신 할아버지.

2017-10-18 박경호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9]황해남도 해주시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上)

목수였던 부친, 넉넉한 형편 불구부녀자 희롱 등 심해져 월남 결심개성구호소 거쳐 인천으로 '이주'전쟁 터져 목포에 잠시 머물기도고교땐 짝사랑 따라 서울로 통학졸업 후 미군부대 운전기사 취직영어공부 덕에 정식 군무원 '승진'영진공사로 옮겨 바레인서도 일해대한항공 '인연' 고속버스 기사로이후 30년째 고령에도 택시 몰아황해남도 해주에 살던 호성신(81) 할아버지는 1947년 인천 동구 화수동으로 내려왔다. 한국전쟁 때 잠시 전남 목포로 피란을 떠난 것을 제외하곤 고향을 떠나온 70년 세월을 한동네에 살고 있다. 할아버지는 30년 경력의 현직 개인택시 운전사이다.인천에 80대 이상 고령의 택시운전사는 호성신 할아버지를 포함해 14명뿐이다. 할아버지의 운전 내력을 보자니 첫 근무지였던 인천 미군부대 역사까지 살필 수 있다. 우리나라 중동 진출 현장인 바레인에서도 일했다.호성신 할아버지가 태어난 해주시 선산동 28은 황해도 도청 인근의 도심지였다. 할아버지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집 짓는 목수였는데, 솜씨가 뛰어나 일이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덕분에 집안 형편도 넉넉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한다. 고향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이렇게 4식구가 함께 살았다.하지만 해방 후 소련군이 38도선 이북에 주둔하고 정세가 급변하자, 단란했던 할아버지네에도 위기가 닥쳤다. 할아버지는 소련군 병사가 어머니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했던 기억을 힘겹게 꺼냈다. 초등학생이던 10살 때 일이다."1946년 여름이 지나서부터 소련군이 해주에 엄청나게 들어왔나 봐.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면서 물건도 빼앗고 부녀자들 희롱하고 횡포가 심했어. 소련군 병사가 우리 집에 막 들어와 어머니를 해코지하려고 해서 부엌으로 숨고 그랬는데…. 그 일이 있고 아버지가 이남으로 내려가자고 결심했지. 아버지가 (해방 전에) 일본사람들이랑 같이 근무하며 어울린 것도 월남한 이유 중 하나야."호성신 할아버지 가족은 1947년 봄에 새벽을 틈타 남쪽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는 거울 속에 돈을 숨겼고, 어머니도 배에 전대를 차서 담을 수 있는 만큼 돈이 될 만한 것을 담았다. 그게 할아버지 식구가 가지고 내려온 전 재산이다. 군인이던 친척이 식구들을 체포해 가는 것처럼 꾸며 해주 남쪽 바닷가인 용당포로 데려가 줬다고 한다. 친척이 미리 준비해준 조그만 목선을 얻어탔다. 바지락을 싣는 배였다. 배 밑에 어머니와 남매가 숨었고, 아버지는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뱃사공과 함께 노를 저어 갔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질퍽질퍽한 갯벌에 배가 닿은 뒤 남한 경찰 2명에게 발견됐다. 남한 경찰은 할아버지 식구를 개성에 있는 월남인 수용소인 개성구호소로 보냈다. 1946년 중반 북쪽이 토지개혁 같은 체제정비를 본격화하면서 38도선을 넘어 남한으로 들어온 이북 출신 주민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미군정은 개성, 의정부, 동두천 등에 임시 이재민구호소를 설치해 북쪽 주민들을 며칠간 머물게 하고 전국 각지로 이주시켰다. 1947년 4월 말 기준으로 월남 인구가 45만명을 돌파했다고 동아일보는 1947년 5월 31일자에서 보도했다. 당시 인천에도 5만 명 넘는 북한 출신 주민이 정착했다. 같은 시기 수도 서울로 유입된 북한 주민은 약 11만2천명이었다. 해방 직후 인천에서 태동한 대중일보는 인천에 실향민이 몰리자 개성으로 특파원을 보내 구호소를 취재하기도 했다. 대중일보 1947년 11월 18일자는 실향민들이 대개 옹진에서 배를 타고 청단으로 건너와 기차를 타고 토성을 거쳐 개성에 이른다고 실향민 이동 경로를 파악해 보도했다. 개성구호소는 미군 천막을 치고 내부에는 접이식 침대가 2열로 놓여 있었다. 천막 수는 총 82개인데, 한 천막에 35~40명을 수용했다. 구제품은 거의 '운라(UNRRA·연합국구제부흥기관) 구제품'이었다고 한다. 당시 실향민들은 대부분 침구와 옷가지를 준비해 내려왔고, 현금도 1천원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고 대중일보는 전했다.호성신 할아버지네는 개성구호소에 4일 정도 머물다가 인천 동구 화수동으로 이주해 판잣집에 살았다.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다시 목수 일을 하면서 인천에 정착하기 시작할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송림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다."6·25가 일어나자마자 월미도로 건너가는 길목에 지금 있는 선창산업 공장 쪽에서 화물선 타고 많이들 피란길에 올랐어. 이북 출신이 많았을 거야. 원래는 부산에 가기로 했는데 파도가 너무 심해서 목포에서 멈췄지. 목포역 앞에 있던 커다란 창고가 피란민 수용소였는데, 5개월 정도 지내다가 아버지가 화수동으로 돌아가자고 해서 다시 인천으로 올라왔어. 아버지가 목수 일감 찾으면서 빵 장사도 하고, 담배도 말아서 팔고 하면서 우리 남매를 키웠어."전쟁통에 인천으로 돌아온 호성신 할아버지는 1947년 허섭(許燮·1925~2010)이 설립한 성광중학교를 다녔다. 남구 도화동 선인중학교의 전신인데, 할아버지가 학생일 때는 동구 만석동 현 삼화제분 인천공장 자리에 있었다. 허섭은 성광중학교로 출발해 1953년 재단법인 성광학원을 설립, 인천에서 성광고등학교, 성광고아원도 운영했다. 그러다 갑자기 1950년대 중후반 군 장성인 백인엽(白仁燁·1923~2013)에게 성광학원을 넘겼다. 이때 출범한 게 한때 국내 최대 사학으로 이름을 떨친 선인학원이다. 이 선인학원은 나중에 사학비리가 문제가 돼 진통 끝에 사회환원 조치됐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성광학원 설립자 허섭을 "엄청난 부자였다"고 기억했다. 그런데 성광학원을 백인엽이 인수할 당시에는 사정이 달랐던 듯하다. 사회운동가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2009년 쓴 자서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는 1956년 여름 허섭을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백기완 소장은 '그즈음 그분은 준심(정권)을 쥐고 있던 이승만의 자유당이 못살게 굴어 손수 일군 인천 성광고아원과 성광상업선배울(고등학교)을 빼앗기고선 서울 마포 구석에서 남의 집을 빌려 살고 있는 터라'고 언급하며 어려운 처지에서도 경제적 보탬을 준 허섭에게 감사를 표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 성북동 성북고등학교(현 홍익대 사대부고)에 진학했다. 짝사랑했던 동네 여학생이 용산에 있는 신광여자고등학교로 간다기에 함께 경인선을 타고 통학하기 위해서였다. 그 여학생과는 단지 짝사랑으로 끝나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곧바로 운전면허를 땄다. '취직할 때 써먹을 데가 있겠지'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1957년 초반 인천시청(현 중구청) 쪽 시내에서 월미도 미군부대 근로자를 모집한다는 팻말을 봤다. 돗자리가 깔린 바닥에 수십 명이 앉아있었다. 호성신 할아버지도 냉큼 돗자리에 앉았는데, 운전면허가 있는 사람은 할아버지뿐이었다. 그렇게 월미도 미군부대 소속 장교 차량 운전기사로 뽑혔다. 당시 미군부대 한국인 근로자는 부대에서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고용했다. 부산 미군기지에서 1954년부터 20년 동안 일한 박원찬 씨가 1978년 쓴 수기 '미군과의 20년'을 보면, 부산에서도 매일 미군부대 정문 앞에 100명에 가까운 사람이 몰려들어 오전 10시마다 나오는 인사담당 직원을 기다렸다고 한다. 미군부대 장교와 한국인 인사담당 직원이 정문 밖으로 나오면 구직자들이 서로 앞줄에 서기 위해 밀고 당기고 치고 하면서 소란도 벌어졌다.호성신 할아버지는 월미도 미군부대에서 장교 운전기사로 2년 정도 일한 뒤 인천항에 파견된 미 해군 군사고문실로 일터를 옮겼다. 지금의 인천중부경찰서 자리에 사무실을 두고 미 해군 대령 1명을 포함해 부대원 8명이 근무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미 해군 군사고문실에서 10년 동안 미 해군 대령의 차량을 몰았다. 이후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부평 '애스컴(ASCOM·Army Support Command)'에서 차량 배차를 담당하다가, 영어시험을 치르고 정식 군무원(Government Service)인 인천항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으로 승진했다. "월미도 미군부대 모터풀(Motor pool·수송대) 드라이버에서 시작해 군용차 디스패처(Dispatcher·운행관리원),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으로 승진하기까지 영어공부를 무진장 열심히 했어. 문법책 달달 외운 끝에 승진시험에 딱 붙었지. 말뿐 아니라 글까지 영어로 쓸 줄 아는 한국인 미군부대 근로자가 흔치 않을걸."인천항에서 주한미군 군수물자 하역작업은 영진공사와 국제실업이 하청을 맡았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인천항 중장비 하역작업 때 미군 소속은 나 하나뿐이라 타임 스케줄도 내가 다 짰다"며 "하청업체들이 내게 잘 보이려고 신포동 기생집을 데려가려고 애도 많이 썼지만, 나는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할아버지는 애스컴이 대폭 축소된 이후인 1970년대 말 영진공사에 입사해 중동 바레인으로 떠났다. 우리나라에 '중동붐'이 한창일 때인데, 바레인 항만에서도 중장비 배차과장으로 일했다. 동아일보 1977년 9월 19일자는 인천을 기반으로 둔 영진공사가 물류산업 분야 최초로 바레인과 항만·공항 하역계약을 독점 체결해 하역요원 800명을 현지로 파송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대한항공은 1976년 중동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서울~바레인 간 정기노선을 취항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중동 진출 최전방에 있던 호성신 할아버지는 바레인 현지에서 대한항공으로 이직해 항공기 기내식 총괄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1년 6개월 만에 귀국해야 했다. 귀국 후 대한항공 임원 소개로 한진고속 소속 고속버스 기사가 됐다. 1987년까지 부산, 대구, 포항, 마산 등지를 사고 없이 달려 내무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내무부장관 또는 교통부장관 표창이 있으면 개인택시 면허를 발급받을 수 있어 할아버지도 혜택을 봤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개인택시 운전대를 잡은 지 올해로 꼭 30년째다. 올 5월 국가로부터 25년 무사고 표창을 받은 할아버지는 "착오가 있어 5년 경력을 인정받지 못해서 그렇지 실제론 30년6개월 경력의 무사고 택시운전사"라고 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때는 수송요원으로 자원봉사를 하면서 주로 외국인 감독을 자신의 택시에 태우고 경기장 이곳저곳을 누볐다. 할아버지의 영어 실력에 외국인 감독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을 정도였다고 한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81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현직 택시운전사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황해남도 해주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가 피란 후 70년 세월을 회상하고 있다.대중일보 개성구호소 특파원 취재 보도-북한 실향민이 몰린 개성구호소를 특파원이 현장취재한 대중일보 1947년 11월 18일자 기사. 한국전쟁 전 개성은 남한이었다.1969년 촬영된 인천내항 미군 전용부두 잔교. 호성신 할아버지는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부평 '애스컴'에서 미국 중장비 하역감독을 맡아 인천내항에서 일했다. 출처/인천항사(2008·인천항만공사)

2017-10-11 박경호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8]함경북도 성진시 출신 김상국 할아버지(下)

성진항 인근 단층집서 농사일 / 정어리 많이 잡혔는데 기름부터 담았던 철통까지 전쟁에 동원친구들과 먹던 '섭죽' 못잊어 / 마천령·망양정 함께 다녔던 그들은 인천서 만났지만 먼저 떠나추석 앞두고 수봉공원 망배단 찾을 예정 "통일이 아니어도 고향 방문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김상국(87) 할아버지는 함경북도 성진시(城津市, 현 김책시)에서 태어나 자랐다. 1·4후퇴 시절인 1950년 12월 피란을 떠났으니, 20년 정도 고향에서 살았다. 부친은 농사일을 했다."여러 농사를 지었지. 그때 당시에는 농토가 어느 정도 있었어. 부유한 것은 아니고 중간쯤 됐던 거 같아. 자작 농사지, 소작 준 것은 없단 말이지. 소작 준 사람들은 '부르주아'라고 해서 해방 이후에 고생 좀 했어."김상국 할아버지 집은 성진항 인근에 있었다. 부친이 나무로 만든 단층집이었다. 방 3개, 부엌 1개, 마루 1개. 그리고 마당에는 조그마한 텃밭과 창고가 있었다. 집에서 성진항까지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성진항을 보면 무역항과 어항이 있는데, 나는 어항 쪽에 살았어. 우리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지만, 그 동네에는 배 타는 사람도 많이 있었지."김상국 할아버지는 고향에서 자주 먹었던 해산물로 명태, 정어리, 임연수어, 고등어, 섭(홍합과 조개) 등을 꼽았다. 할아버지는 "바다와 가까워서 명태, 고등어 등 생선이 밥상에 올라왔다"며 "우리 어렸을 때는 정어리가 무지하게 많이 잡혔다. 정어리로 기름도 짜고, 그냥 조려 먹기도 했다"고 말했다.정어리는 다양한 곳에 쓰였다. 일본 저널리스트 다케쿠니 도모야스가 자료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쓴 '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교토까지'를 보면, 정어리는 주로 유비(油肥)로 가공됐다. 정어리기름에서는 화약과 의약품의 원료인 글리세린이 나왔다. 지방산은 비누·초·도료·마가린의 원료가 됐으며, 찌꺼기는 비료와 사료로 쓰였다.전쟁통에 정어리만큼 수난(?)을 겪은 물고기도 없을 듯하다. 몸에서 짜낸 기름은 물론이고, 그 기름을 담고 있던 철통까지 전쟁에 동원됐다.정어리기름은 화약 원료로 사용되는 등 군수 자재였다. 조선총독부는 1943년 정어리 어획을 '중점 조업 목표'로 정하고 정어리잡이 어선에 중유를 집중적으로 공급했다. 또 날정어리 식용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등 화약 원료를 얻기 위해 정어리기름 생산을 중요시했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정어리기름을 담아 놓는 탱크가 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 때 일본놈들이 그 탱크까지 뜯어갔다"며 "철이 부족하니까 밥그릇 등 닥치는 대로 다 빼앗아 갔다"고 했다.성진에는 큰 규모의 제강소가 있었다. 제강소는 인천의 한국지엠 공장처럼 성진 지역경제의 큰 축이었다."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고주파공장이 성진에 있었어. 왜정 때부터 있었지. 일본놈이 운영했어. 여기서 만든 철을 성진항과 기차를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지. 지금도 가동이 되고 있을 거야."제강소 명칭은 '일본고주파중공업주식회사 성진공장'이며, 지금은 '성진제강연합기업소'라고 한다.1945년 성진중학교 1학년이었던 한국인과 일본인이 41년 만에 만나 고향 이야기를 나눈 책이 있다. '그때 우린 열세 살 소년이었다'(나일성·사가에 다다시 공저)라는 제목의 책이다. 이 책에서 고주파공장에 관한 대화가 나온다. 사가에 다다시는 "고주파공장 때문에 일본 사택들이 많이 세워져 일본인 소학교와 큰 백화점이 성진시내에 생겼다"고 했고, 나일성은 "급격한 인구 증가로 기차역(신성진역)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임원·정직원·공장노동자를 위한 사택만 1천800호에 달했으며, 이들을 위한 구락부·병원·학교·공중목욕탕까지 설치됐다. '신 북한 지리지'(배기찬 지음, 1994년)를 보면 성진제강연합기업소는 북한 전체 제강·제철 생산량의 40%를 차지하고 있다.김상국 할아버지도 성진중학교 졸업생이다. 이 책 저자들이 32년생과 33년생이니, 할아버지가 이들보다 2~3살 많다. 김상국 할아버지의 매형은 고주파공장에서 기중기 기사로 일했었다. 할아버지는 "해방된 후에 소련에서 고주파공장 기계를 많이 가져갔다"며 "해방 후에 일본 기술자들이 다 도망가니까 공장 돌리는 법을 몰라 한참 중단된 적도 있다"고 했다. 또 "소련군을 '로스케' '마우재'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여자를 괴롭히고 물건을 강탈했다"고 했다.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고향 친구들과 함께 먹었던 '섭죽'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성진 바다 밑에서 캔 섭 조개는 커. 친구들이랑 집에서 가져온 쌀을 함께 넣어 죽을 쑤어 먹고 그랬지. 한번은 조개를 잡았는데 조그마한 진주가 들어 있어서 집에 가져간 기억이 있어." 할아버지는 "친구들과 부둣가에서 장기도 뒀다"며 "낮잠을 자고 있는 어르신들 옆에서 일부러 '장이요!' '멍이야!'라고 소리칠 정도로 장난도 심했다"고 했다.함경북도지편집위원회가 2001년 발간한 '함경북도지' 성진시 편에는 섭죽이 나온다. 이 책은 "이것(섭)을 따다가 임연수어 같은 생선을 잡아 된장, 고춧가루, 소주, 마늘, 과일 약간에다 쌀을 씻어 죽을 끓이면 그야말로 별미다.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일품"이라고 섭죽을 소개했다.김상국 할아버지가 친구들과 함께 다녔던 곳은 마천령과 망양정이다. "마천령이 아흔아홉구비야. 높이도 꽤 있지. 가을에는 마천령 단풍이 아주 유명해. 소풍도 거기로 갔어. 망양정이라고 있는데, 거기 올라가면 바다를 쫙 내려다볼 수 있었지."망양정은 500m 높이의 절벽에 있는 정자다. 등대와 측후소가 있었고, 러일전쟁 때는 포대로 이용됐다. 1929년 시멘트로 다시 세워졌다.함경도 출신 여류 시조시인 오신혜(1913~1978)는 '망양정'이라는 시를 남겼다. 망양정(정자)에서 본 풍경을 노래한 시다. '(상략) 근방의 인가들이 눈 아래 깔려있고 / 몇 십길 절벽 밑에 만경창파 아득하니 / 한덩이 구름을 타고 바다 위에 뜬 듯하이. // 기빨을 날리면서 돛단배들 흩어지고 / 파도에 풍류맞어 갈매기떼 춤을 출제 / 우렁찬 평화의 곡에 귀가 절로 기운다. (하략)'성진에서 태어난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1908~?)도 '망양정-어린 꿈이 항해하던 저 수평선'이란 제목의 글을 썼다. 아름드리나무로 만든 정자가 무너져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 들어서고, 정어리기름으로 바다가 오염된 것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의 글이다. 김기림은 이 글에서 "인천이라고 하면 월미도, 목포라고 하면 유달산, 원산이라고 하면 명사십리. 그렇게 각각 배 맞은 풍경이 있으나 가뜩이나 보잘것없는 항구 성진에 망양정조차 없었으면 실로 말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근년에는 정어리 공장이 들어앉아 고기 기름에 바닷가는 아주 더러워져서 보잘것없는 우중에 저수장이 되면서부터 해안 일대를 완전히 콘크리트로 포장을 했다. 인제는 아이들도 갈매기도 더 모여 오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도 로맨티시즘은 추방을 당했다"고 했다. 김기림은 인천항과 인천역의 모습을 담은 연작시 형태의 '길에서-제물포 풍경'을 남기고 인천 문인들과 교우하는 등 인천과도 가까웠다.인천 월미도 역시 일제강점기 각종 건물이 들어서면서 많이도 변했다. 인천 출신의 시인이자 수필가·문학평론가인 김동석(1913~)이 수필 '낙조'에서 그린 월미도 풍경처럼, 이곳에서 바라본 석양은 여전히 아름답다. 하지만 수직의 콘크리트 건물이 하나둘씩 해안가를 차지하고, 기후변화와 산업화로 바다 환경이 나빠진 것은 매한가지일 것이다.김상국 할아버지에게는 고향에서 함께 뛰놀던 친구 '임영록'과 '김현덕'이 있다. 우연일까. 김상국 할아버지를 비롯한 '삼총사' 모두 인천에 정착했다. 김상국 할아버지와 함께 피란 내려온 임영록 할아버지는 부산과 서울을 거쳐 인천에 자리를 잡았고, 김현덕 할아버지는 부산에서 살다가 삼촌이 전무로 있는 인천의 한 회사에 취직했다. 그렇게 모두 인천에 모였건만, 김상국 할아버지는 친구들을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야 했다. "인천에 살면서 종종 만났지. 가끔 대포도 한잔하고 그랬어. 영록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산소까지 함께 다녀왔었는데, 꿈에 그리던 고향도 못 가보고 병에 걸려서 떠났지." 김상국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 흥남부두에서 친구(김영록) 아버지의 배(어선 '성진호')를 얻어 타고 부산으로 피란을 나왔었다.10월 4일은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이다. "명절 때 고향 생각이 가장 많이 나. 이때쯤 되면 누가 집에 오고, 산소에 제사를 지내러 언제 가겠다는 것부터 다 생각이 나지." 할아버지는 "위로 형이랑 누나가 1명씩 있고, 아래로 여동생 1명과 남동생 2명이 있었다"며 "(내가) 세 살 아래 여동생(김월성)을 가장 예뻐했다. 어떻게 잘살고 있는지 보고 싶다"고 했다.일가친척이 고향 성진에 모여 추석 명절을 보내고 망양정에 올라 성진 앞바다의 풍경을 감상하기는 올해도 글렀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추석을 앞두고 인천 남구 수봉공원 망배단에서 고향을 향해 절을 올릴 예정이다.할아버지는 "형과 누이, 동생들이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며 "통일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면 고향 방문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김상국(사진 가운데), 임영록(아래), 김현덕(위) 할아버지가 고향 성진시에서 찍은 사진이다. 김현덕 할아버지가 피란 때 가지고 온 사진을 김상국 할아버지가 복사해 간직하고 있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언제 어디서 찍은 것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옷차림이 고등학교 교복이다"고 했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성진시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김상국 할아버지 제공김상국 할아버지 고향인 함경북도 성진시는 경치가 아름다운 도시다. 성진항은 1899년 군산, 마산과 함께 개항한 곳으로 원산에 버금가는 항구였다. /출처 '가야할 산하'(민족통일중앙협의회, 1987)

2017-09-27 조재현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7]함경북도 성진시 출신 김상국 할아버지(中)

오산비행장 시절 후임병 처조카와 결혼현재 요양병원인 신신예식장서 식 올려당시 포토존 활용 야외정원은 아직 남아전역후 남구청 자리 교대 앞 문방구 열어17년간 숭의2동 10통장도 함께 맡아 일해쓸쓸히 돌아가신 할아버지들 장례도 치러1950년 12월 흥남부두에서 어선을 타고 부산으로 피란 온 김상국(87) 할아버지. 전쟁통에 고향 함경북도 성진시(城津市, 현 김책시)를 떠난 그는 군 제대 후 인천에 정착했다. 처가가 인천에 있어서였다. 1952년 9월 공군에 입대한 김상국 할아버지는 대구, 서울, 진해, 강원도, 오산 등지를 돌며 1972년까지 20년을 군에 있었다. 결혼은 1959년에 했다."오산비행장에 파견 나가 있을 때 지금의 처고모부가 우리 부대 신병으로 들어왔어. 당시 내가 이등상사였으니까 고참이었지. 한양대 기계과를 나온 분인데, 2년 정도 같이 있으면서 나를 잘 봤는지 '결혼해야 하지요?'라고 묻더라고."그 후임병이 인천에 사는 자신의 처조카를 소개해 결혼했다. 장인어른은 인천세무소 직세과장이었다. 결혼식은 인천 중구에 있는 신신예식장에서 올렸다. "토요일에 결혼했어. 그때 토요일에는 세무소가 오전만 근무할 때가 아니요. 그런데 직세과장 딸이 결혼한다고 해서 세무소 전체가 근무를 하지 않았어. 세무소장이 주례를 봤지."당시 신신예식장 인기는 대단했다. 신신예식장 사진부에서 약 33년(1959~1992) 동안 일한 정창근(84) 할아버지는 "사장 이름이 장광순인데, 돈이 많았다. 일본사람 사택을 사서 예식장으로 꾸민 것"이라며 "1년에 1천500쌍 정도는 식을 올렸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또 "내가 1966년 신신예식장에 근무할 때 결혼을 했는데, 자리가 없어서 그 옆에 생긴 크라운예식장에서 결혼을 했다"며 "70년대 중반인가? 건물을 새로 지은 뒤에도 최고로 잘나갔다"고 했다. 예식장 직원의 결혼식조차 다른 곳에서 해야 할 정도로 붐볐다는 얘기다. 신신예식장 측은 밀린 예식을 빨리빨리 진행하기 위한 묘수를 꺼냈다. 건물 밖에 포토존을 설치한 거다. 정창근 할아버지는 "정원에서 가족·친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 신신예식장의 특징인데, 사실은 다음 팀이 몰려오니까 빨리 예식 자리를 빼주기 위해서 정원에서 사진을 찍게 한 것"이라고 했다. 청춘 남녀가 백년가약을 맺던 신신예식장 건물은 지금 노인요양병원이 됐지만, 결혼 기념사진을 찍던 작은 야외 정원은 아직도 남아있다.김상국 할아버지는 그렇게 인천과 인연이 닿았다. 아내도 인천 토박이는 아니다. 황해도 옹진 태생으로, 한국전쟁 때 가족이 인천으로 피란을 왔다. 인천은 함경북도 총각과 황해도 처녀를 맺어주었다. 둘 다 실향민 신세였지만, 아내는 가족이 함께 피란 나온 터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덜했다고 한다."마누라는 고향 생각이 난다고 하지 않았어. 가족이 다 나왔으니까. 나는 지금도 고향 생각이 나. 한 번 가봤으면 좋겠는데…. 집 그거 못 찾겠어? 기억 속에 다 있는데."김상국 할아버지는 1972년 제대 후 처갓집이 있는 인천으로 와서 지금 남구청 자리에 있던 인천교육대학(현 경인교대) 앞에 문방구를 차렸다. 그 많은 장사 가운데 문방구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가만히 보니까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문방구가 가장 안전할 거 같은 거야. 1972년부터 한 12년 동안, 그러니까 1984년까지 했네. 크게 성하라고 해서 '대흥문방구'라고 이름을 정했지."인천교육대학의 전신은 1946년 5월 설립된 개성사범학교(경기도립 3년제)다. 김상국 할아버지와 인천교대는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가 인천에 정착했다는 공통점도 있다.'경인교육대학교 70년사(1946~2016)'에 따르면 1946년 5월 23일 설립된 개성사범학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옮겨졌다. 1951년 9월 부산시 괴정동에서 춘천사범학교와 함께 연합사범학교로 개교했다. 경기·인천지역이 어느 정도 수복되자 1952년 4월 잠시 인천신흥국민학교 교사 일부를 빌려 신입생을 모집한 뒤, 인천숭의국민학교에서 개교했다. 그해 6월 국립 인천사범학교로 교명을 변경했으며, 1953년 4월 인천시로부터 숭의동 땅을 기증받아 교지를 확보했다. 70년사는 "당시 전황으로 개성이 수복되기 어려운 상태였고, 휴전 성립의 가능성이 짙어지고 있었다. 학교의 운영 면에서나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개성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어졌다. 개성보다는 인천에 사범학교를 두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인천 남구청이 발간한 '도시마을생활사'에는 "경주김씨 문중에서 여우실 일대를 학교 부지로 내놓았다. 김경하(1911~1967, 초대 인천시 교육위원)가 개성사범학교를 유치하기 위해 자신의 땅을 희사한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남구청 종합민원실 자리는 여우실 경주김씨 종가가 있던 곳이다. 김경하는 6선 국회의원이자 제11대 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은하(1923~2003)의 형이다. 김은하 전 의원 아들 근영(57, 인천경실련 공동대표) 씨는 "할아버지가 일제 때 학교(현 숭의초등학교) 건립에 기여하신 적이 있다"며 "교대 부지는 큰아버지(김경하) 등 아버지 형제들이 기증한 것"이라고 했다.인천사범학교는 ▲1962년 2년제 인천교육대학 발족 ▲1982년 4년제 대학 승격 ▲1990년 계산동 캠퍼스로 이전 ▲1993년 인천교육대학교로 교명 변경 ▲2003년 경인교육대학교로 개칭 ▲2005년 경기캠퍼스 개교 등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학교 이름을 경인교대로 바꾸고 경기캠퍼스를 설립한 이유가 있다. 지방자치제도가 전면적으로 시행된 이후, '경기교대 설립'은 경기도지사 출마자들의 대표적인 공약이 됐다. 경기도와 도교육청, 인천시와 시교육청, 인천교대가 해결 방안을 찾은 게 교명 변경과 경기캠퍼스 설립이었다.문방구 고객은 교대생이 아닌 1957년 4월 개교한 인천교대 부속국민학교(현 경인교대 부설초등학교)의 학생들이었다."마누라하고 같이 문방구를 봤지. 우리 가게 가까이에 '광문당'이라는 문방구가 먼저 있었어. 문방구는 방학, 주말 때문에 돈벌이가 신통치 않았어. 학생 수도 적었거든."대흥문방구는 지금으로 보면 남구청 건물과 인천중앙교회 사이 골목에 있었다. 지금은 1층에 사진관을 둔 3층짜리 상가주택이 들어서 있다. 경쟁 상대였던 광문당은 남구청 정문 앞에 있었다고 한다.당시에는 부속국민학교를 '부국'이라고 줄여서 불렀는데, '부'자가 부속의 부(附)가 아닌, 부자의 부(富)라고 말할 정도로 부잣집 아이들이 많이 다녔다고 한다."부국 학생들 가정은 생활 수준이 우리와 달랐어. 당시에도 자가용을 타고 오는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교복을 입었는데, 얼굴이 희고 피부도 좋았던 것으로 기억해."문방구에선 이것저것 다 팔았다. 도화지 등 학용품부터 체육복과 실내화, 그리고 아이스크림까지 없는 게 없었다. 손버릇이 나쁜 아이들이 있어서 물건이 없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는 국산 호치키스(스테이플러)가 없어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거 사다 놓았어. 그런데 한참 쓰다 보면 어느 날 없어지는 거야. 탐내는 아이들이 있었던 거지."부국 24회(1983년 2월 졸업) 권혁신(47) 씨는 대흥문방구를 어렴풋이 기억했다. 권씨는 "학교 주변에 광문당 등 문방구가 3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대흥문방구였다"고 했다. 또 "학교는 부모님이 흰색 공인가? 검은색 공을 뽑으면 입학할 수 있는 추첨 방식이었다"며 "다 부잣집 아이들은 아니었지만, 집안이 어느 정도 되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했다.김상국 할아버지는 문방구를 운영하면서 통장 일도 봤다. 문방구는 1984년까지 운영했고, 숭의2동 10통장은 1989년까지 약 17년간 맡았다.숭의동에도 할아버지와 같은 실향민이 많이 살았다. '인천시사(1993년 발간)'를 보면, 1952년 말 인천 인구(25만6천751명)의 51.1%인 13만1천128명이 구호대상자였다. 구호대상자 가운데 6만3천433명(48.4%)이 피란민이었다. 숭의동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1953년 말 숭의동 지역 구호대상자 5천561명 중 2천987명(52.9%)은 피란민이다."지금도 구청 주변에 하꼬방들이 있어. 피란민은 돌봐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집이라고 해봤자 하꼬방이라고 조그마한 곳이지. 그곳에서 쓸쓸히 돌아가신 거야."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돈을 걷어 실향민 어르신의 장례를 치른 적이 3번 정도 있다"며 "좀 살만한 집에 가서 얼마 좀 보태달라고 해서, 그렇게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김상국 할아버지는 서울 코엑스로 일을 다닌 적도 있다. 선광공사(현 선광) 일을 맡아 코엑스 행사장에 전시품을 설치했다."숭의동에 인천항 지게차 운전수들이 많이 살았어. 우리 10통에 사는 운전수 소개로 코엑스 일을 하게 됐지. 선광공사에 취직한 건 아니고, 그냥 밑에서 '일당벌이'를 한 거야."할아버지는 "선광공사에서 코엑스 전시 일을 맡았다가 (수익이) 별로니까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고 기억했다. 선박 하역회사 선광이 한때 전시품 설치 대행사업을 하기도 했다.1968년부터 1998년까지 선광에서 근무하면서 전시 업무도 맡았던 오대영(78) 할아버지는 "(선광은) 76년부터 77년까지 약 2년간 서울 여러 곳에서 전시 업무를 했다"며 "일본에서 전시품이 인천항으로 들어오면 이것을 코엑스로 운반해 조립·설치했고, 전시회가 끝나면 전시품을 분해한 후 상자에 넣어 다시 일본으로 보냈다"고 했다. 또 "(일본에서 전시품을 배로 싣고 오는) 고려해운이 선광에 소개해줬고, 1~2년 정도 선광이 하다가 다른 업체에서 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김상국 할아버지가 인천 남구청 인근 한 건물 앞에서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할아버지가 약 12년(1972~1984) 동안 운영한 '대흥문방구'가 이 건물 자리에 있었다. 당시는 단층 건물이었다고 한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사범학교 당시의 캠퍼스(인천시 숭의동, 1952~1962)인천교육대학 본관(인천시 숭의동, 1975) 출처/경인교육대학교 70년사인천 중구 옛 신신예식장 건물에 있는 야외 정원 모습. 신신예식장은 김상국 할아버지가 1959년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 야외 정원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찍는 게 특징이었다. 지금은 요양병원이 들어서 있어, 환자와 문병객의 휴식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인천 남구청 청소년수련관 앞 화단에 세워진 경인교육대학교 개교 70주년 기념 표지석. '1957년 준공한 이 건물은 좋은 선생님의 초심을 키운 곳이요, (중략) 근대문화유산으로서도 보존가치가 큰 자랑스러운 곳'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2017-09-20 목동훈

[zoom in 송도]'내년 예산안 정책토론회' 인천시, 송도관련 사업은?

6공구에 스마트시티 관로 구축10월부터 워터프런트조성 공사인천1호선 송도 연장 시비 투입달빛축제공원 반려견 놀이터도인천시가 2018년도 예산안 편성을 위해 '경제산업'과 '교통해양' 등 분야별로 주민 참여 예산정책 토론회를 진행했다. 이 토론회는 인천시 각 실·국에서 내년도 예산 편성 방향 및 주요 사업을 설명하면, 전문가들이 토론을 통해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토론회 방청객 등 일반 시민들도 의견을 낼 수 있다. 예산정책 토론회는 인천시의 내년도 주요 사업을 미리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물론, 전문가·주민 의견 수렴 및 예산 배분 과정에서 일부 사업은 내용 또는 추진 시기가 변경될 수 있다. 내년에 인천시가 송도국제도시와 관련해 어떤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지, 예산정책 토론회 자료를 통해 알아봤다.인천경제자유구역 주요 사업은 '경제산업' 분야에 많이 포함됐다.송도 등 인천경제자유구역은 교통, 방범, 방재, 환경, 시설물을 통합 관리·운영하는 스마트시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최근에는 스마트시티 통합운영센터 구축·운영 기술을 베트남 등 해외에 수출하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인천시는 내년 말까지 송도 5·7공구 스마트시티(u-City) 기반시설 구축 사업을 완료하기로 했다. 또 내년에 송도 6공구 스마트시티 관로 구축 사업을 본격화하기로 했다.송도 워터프런트 조성사업도 내년에 공사가 시작될 전망이다. 이 사업은 송도에 길이 16㎞, 너비 40~300m, 면적 5.33㎢ 규모의 물길을 만드는 것이다. 사업비(자체 재원 예상액)는 6천215억원이며, 타당성 조사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인천시는 내년 3월까지 타당성 조사 및 투자 심사를 끝낸 뒤, 기본·실시설계와 공사 발주를 거쳐 10월부터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다.아암로(해안도로) 확장공사는 내년 말 98%의 공정률을 보일 것으로 인천시는 예상하고 있다. 이 사업은 송도 아트센터교~옹암사거리 구간 도로를 기존 6차로에서 8차로로 확장하는 것이다.송도동 191의 1 일원(인천글로벌캠퍼스와 트리플스트리트 인근)에 8만7천33㎡ 규모의 공원(문화공원 2지구)을 조성하는 사업은 내년 4월 완료될 예정이다. 국제화복합단지 1호 근린공원 조성사업(송도동 147 일원 6천㎡)은 내년 3월 착공, 12월 준공을 목표로 추진된다. 문화공원 3·4지구, 국제화복합단지 6~8호 완충녹지, 첨단산업클러스터단지 1·2호 연결녹지 조성사업 등도 내년에 공사가 본격화한다.교통분야 계속사업으로는 '인천도시철도 1호선 송도 연장 건설'(2020년 12월 개통 예정)이 있다. 인천 1호선을 송도랜드마크시티까지 연장하는 이 사업에는 내년에 시비 140억7천300만 원 등 총 351억8천300만원이 투입될 전망이다.인천시 문화관광체육국의 내년도 중점과제 중 하나는 'G-MICE 허브 도시 인천'이다. 이와 관련, 송도컨벤시아 1단계 시설 옆에 연면적 6만4천㎡ 규모의 컨벤션센터를 짓는 2단계 사업은 내년 7월 준공을 앞두고 있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송도컨벤시아 전체 연면적은 11만7천27㎡로 확대돼, 대형 행사 유치가 가능해진다.인천시는 송도컨벤시아 및 마이스산업 활성화를 위해 국제회의 유치, 시민 참여 이벤트 개최, 인천 특화 박람회 육성 등을 더욱 강화할 방침이다.인천시 환경녹지국은 송도 솔찬공원 자연학습장에 '야생동물 구조·관리센터'(내년 3월 개관 예정)를 마련, 운영할 계획이다. 이 센터는 야생동물 구조·치료·복귀 지원과 교육·체험 기능을 결합한 복합형 에코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인천시는 공원 내에 반려견 놀이터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내년 1월부터 12월까지 송도 달빛축제공원(미조성공원)에 반려견 놀이터 5천㎡를 조성하겠다는 구상을 공개하고, 주민 의견을 수렴 중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09-17 목동훈

[zoom in 송도]가상현실 테마파크 '몬스터 VR'… 40일만에 유료입장객 3만 '돌파'

지난달 4일 인천 송도 트리플스트리트에 개장한 도심형 가상현실 체험 테마파크 '몬스터 VR'이 한 달여 만에 유료 입장객 3만 명을 돌파했다. '몬스터 VR'을 운영하는 (주)GPM(대표·박성준)은 "지난 14일을 기점으로 개장 40일 만에 3만 명의 유료 입장객을 돌파했다"고 밝혔다.트리플스트리트 D동에 들어선 '몬스터 VR'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콘텐츠진흥원, 인천시 등 정부기관 및 지자체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문을 열었다. 이 같은 관심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VR산업의 대중화를 통해 청년들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GPM이 지난 40일간 입장객을 분석한 결과, 가족 단위가 많았다고 한다. '몬스터 VR'이 새로운 개념의 가족 놀이 공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확인한 셈이다. 평일 입장객은 400명 안팎인데, 주말에는 1천200~1천500명에 달했다. 전체 입장객 중에서 성인이 65%, 어린이가 35%를 차지했다. 성인들은 주로 VR과 어드벤처 놀이 공간에 익숙한 20·30대의 입장객들이 주류를 이뤘다.정글존, 어드벤처존, 시네마존, 큐브존으로 나뉘어 있는 40여 종의 어트랙션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존은 큐브존이다. '몬스터 VR'은 GPM에서 만든 VR 서비스 플랫폼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정육각형 모양의 큐브 안에 들어가서 고글 모양의 헤드셋을 쓰고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큐브존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인기를 끌었다. 큐브존에서 구현할 수 있는 게임 중에는 좀비 게임과 고소공포 게임, 과일 자르기 게임, 전략 게임, 바닷속 체험 등이 인기를 끌었다. 정글존에서는 래프팅과 번지점프가 어린이 입장객들에게 인기가 높았으며, 시네마VR은 성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어드벤처존에서는 롤러코스터 등이 젊은 층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GPM이 개발한 플랫폼을 통해 많은 콘텐츠가 들어있는 몬스터 큐브에서 게임을 즐기고있다. 인천 송도에 있는 '몬스터 VR'이 지난 14일 개장 40일 만에 유료 입장객 3만 명을 돌파했다. /GPM 제공

2017-09-17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유타대 아시아캠퍼스, 고교 2곳과 '인재육성 MOU'

■유타대 아시아캠퍼스, 고교 2곳과 '인재육성 MOU'인천 송도에 위치한 유타대학교 아시아캠퍼스(대표·크리스 아일랜드)가 고등학교와 연이어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며 우수 고교 인재 육성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는 지난 7일 인천 중구에 있는 인천국제고등학교를 방문해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유타대 아시아캠퍼스는 재학생들과 함께하는 영어 캠프, 대학생 멘토링 프로그램 등 인천국제고 학생들이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진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교수들이 직접 진행하는 특강 등을 준비해 학생들의 관심 분야를 넓히고, 다양한 진로 체험을 위한 활동 기회도 제공할 예정이다.유타대 아시아캠퍼스는 지난 8일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에서 업무 협약(MOU)을 진행했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는 이번 협약에 따라 영화영상 분야로 진로를 정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전문 교육 기회를 지원하게 된다. 내달 10일에는 미국 선댄스영화제의 창립자이자 유타대 교수로 재직 중인 스털링 반 웨그넌(Sterling Van Wagenen) 교수 등이 서울공연예술고를 방문해 특별 워크숍을 진행할 예정이다.■'인천국제기계展', 27일부터 사흘간 송도컨벤시아서인천 유일의 기계산업 전시회 '2017 인천국제기계전(Incheon International Machinery Expo 2017)'이 오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송도컨벤시아에서 진행된다. 인천관광공사, 경기인천기계공업협동조합, 전시전문기획사 이상네트웍스가 공동 주최하고 인천시 등이 후원하는 행사다. 인천은 남동·주안·부평 등 대규모 국가산업단지와 많은 기계 관련 기업들이 있지만, 기계 관련 전문전시회가 개최된 적은 없다. 이번 전시회는 국가산업단지 스마트화, 기계 관련 중소기업의 마케팅 및 판로 개척 지원 등 인천 기계산업 육성을 위해 기획됐다. 인천관광공사와 인천코트라지원단, 중소기업진흥공단, 인천지방중소벤처기업청은 공동으로 독일, 태국, 인도, 중국 등 약 7개국 30개 기업의 해외 바이어를 직접 초청해 27~28일 양일간 '일대일 매칭 수출상담회'를 진행한다. 자세한 사항은 사무국(02-3397-0075)으로 문의하면 된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유타대학교 아시아캠퍼스는 지난 7일 인천국제고등학교와 업무협약을 체결, 진로 교육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 제공

2017-09-17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6]함경북도 성진시 출신 김상국 할아버지(上)

인민군 소집앞둔 아들 떡 해주려던 모친온가족 집밖에 있을때 미군 포격에 숨져본인은 밭의 소 쫓으려 나왔다가 화 면해슬퍼할 겨를도 없이 국군부대 경비 맡아중국군 개입에 전세 역전 군인따라 후퇴北에서 온 사람들로 넘쳐났던 '흥남철수'민간인 신분이라 친구네 배 타고 부산行영도 피란민촌서 막노동하다 미군부대로김상국(87) 할아버지 고향은 함경북도 남단에 위치한 성진(城津)시다. 지금은 김책(金策)시라고 부른다. 김책(1903~1951)은 공산주의 운동가·정치가로 김일성을 북한 정권의 최고지도자로 만드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때 전선사령관이었던 김책이 숨지자 그의 고향을 '김책'으로 개칭했다.한국전쟁 당시 김상국 할아버지는 20살이었다. 성진 시내에서 부모님과 여섯 남매가 함께 살았다."함경북도, 성진시, 성남동, 47번지, 3호. 바닷가 쪽이지." 할아버지는 기억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고향 집 주소를 또박또박 한마디씩 끊어가며 말했다. 고향을 떠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기억은 생생했다. 어린아이가 아닌 청년 시절에 홀로 피란을 떠난 터라, 그만큼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클 수밖에 없다."친할아버지가 우리 집에서 한 20리 떨어진 촌에 사셨어. 전쟁이 나서 온 가족이 할아버지 집으로 피란을 갔는데, 미군이 폭격을 할 때 집에 포탄이 떨어진 거야.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김상국 할아버지가 인민군 소집장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어머니는 아들을 군에 보내기 전에 떡이라도 해주겠다며 부엌에 계셨다. 형과 누나, 동생들은 밖에서 놀고 있었다. 김상국 할아버지의 조부와 부친은 밭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방안에서 밖을 내다보니까 소가 밭의 곡식을 먹는 것이 보여. 그래서 소를 쫓아내려고 나가봤지. 소를 밭에서 떼어놓고 방으로 돌아오는데 집에 포탄이 떨어진 거야."미군의 폭격으로 입대를 앞둔 아들에게 떡이라도 먹이고 싶었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집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가족의 마음도 무너져내렸다. 아버지와 외삼촌이 잔해 속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겨우 찾아냈다. 전쟁 중이라서 아버지와 친척 몇 명이 간단하게 장례를 치른 뒤 시신을 밭에 묻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어머니를 보내야 했다."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울지도 못했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런지 눈물이 안 나오더라고. 장례? 올 사람도 없고. 돌아가신 그 이튿날 바로 밭에 묻었어….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거지. 그래서 나는 죄 많은 놈이야."소 덕분에 살아남게 된 김상국 할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성진을 점령한 육군 수도사단에서 경비를 서게 됐다. "국군이 성진까지 들어온 거야. 그래서 인민군 소집은 면했지. 우리 매형이 치안대에서 뭐를 맡았는데, 수도사단 부대 앞에서 경비를 서라고 하더라고."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은 38선 북쪽으로 진격했다. 군사 전문가 남도현이 쓴 '끝나지 않은 전쟁 6·25'에 따르면 유엔군은 10월1일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을 선두로 세워 38선을 돌파했다. 유엔군 지휘부는 전력을 둘로 나눠 북진했다. 서부전선은 낙동강에서 북진해 온 미 제8군이 제1군단과 제9군단, 국군 제2군단을 지휘하도록 했다. 함경도 동부전선은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에 지휘를 맡겼다. 국군 수도사단은 10월17일 함흥·흥남을 탈환한 데 이어 28일 성진을 확보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김상국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10월 중하순 돌아가신 것으로 보인다."총 쏘는 방법도 배우지 못했어. 그냥 총을 메고 군부대 정문 앞에 서 있는 거야. 우리는 잘 모르니까 부대 안에서 군인들이 '들여보내'라고 하면 들여보내고 했지."경비 서는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중국군 개입으로 전세가 급변했다. 김학준은 저서 '한국전쟁'에서 "10월25일 한국군과 중국군 사이의 첫 교전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었다"며 "맥아더 사령관은 11월5일 중국군의 참전을 보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고 했다.김상국 할아버지는 국군과 함께 LST(상륙함)를 타고 흥남부두로 왔다. 당시에는 흥남부두로 이동하는 이유를 몰랐다. 흥남부두에 도착해 군인과 피란민이 모이는 것을 본 후에야 '후퇴'라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는 '피란'이었다. 경비를 섰을 뿐이지 군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흥남부두는 군인과 피란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고 했다.당시 흥남부두 광경은 프랑스 종군기자 4명의 기록을 묶은 '한국전쟁통신'에 잘 나온다. '해 질 무렵에 나는 황폐한 흥남을 보러 갔다. 눈발이 희끗희끗 내리고 있었고, 군대가 자신들을 포기할까 두려워하는 주민들의 절망감은 이 도시 못지않게 처량했다.' 'LST 한 정이 부두에 나타나 육지와 배를 오가며 군중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보초들의 인솔을 받으며 폭력을 쓰지 않고는 도저히 막기 어려울 정도로 군중이 밀려들기 시작하면서 도선마다 만원이었다. 과적한 도선은 곧장 바닷속으로 가라앉기도 했다.'흥남철수 때 약 1만4천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 저술가이자 한국전쟁 종군기자였던 미국인 빌 길버트는 이 배 선원의 기억과 당시 자료를 토대로 '기적의 배'를 출간했다.'흥남으로 가는 피란민들은 폭격과 기총사격을 당했다. 비행기들이 미국기였는지 소련기였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기총사격에 희생당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뛰었기 때문에 부모들은 거의 자식들과 헤어졌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 상급선원 로버트 러니는 이 책에서 "피란민들은 마치 화물처럼 실렸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공포를 봤다. 우리가 그들에게 '빨리, 빨리'라고 외쳤을 때 그들은 순수히 따랐다. 우리가 아는 몇 안 되는 한국말 중 하나였다"고 회상했다. 한국전쟁에 동원된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인천상륙작전 때 미 육군 제7사단 제32전투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으며, 10만t의 제트 연료를 일본 도쿄에서 흥남 부근 공항으로 운반하러 왔다가 흥남철수작전에 참여하게 됐다.김상국 할아버지는 흥남부두에서 미 군함이나 상선이 아닌 친구(임영록) 아버지의 배 '성진호'를 타고 부산으로 왔다."임영록이랑 경비를 함께 섰었어. 이 친구 아버지가 어선 선장인데, 우연히 흥남부두에서 만난 거야. 친구 아버지 배를 타고 결국 부산까지 간 거지."군인 10만5천명, 피란민 10만여명 등 약 20만명을 흥남에서 거제도로 옮긴 흥남철수작전은 12월24일 완료됐다. 김상국 할아버지가 40여 명과 함께 탄 '성진호'는 12월19일께 흥남부두를 떠났다."엔진이 달린 배라서 3~4일 정도 걸려서 부산 영도다리 밑에 내렸지. 영도극장(1946년 건립된 항구극장의 착각으로 보임. 영도극장은 1958년에 생겼음)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서 하룻밤을 잤는데,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노래를 부르더라고." 해방 후 처음 듣는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다. 이북에 북한 정권이 들어서면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거나 불러본 적이 없다고 한다.부산 영도에 도착해서야 혼자라는 것을 알았다. "진짜 처음에는 막막했어. 부산에 와서 혼자가 되니까 그제야 가족 생각이 나더라고. 그전에는 당장 내가 살아야 하니까 생각이 덜했지."김상국 할아버지는 부산 영도 피란민촌에 방 하나를 얻고 부두에서 드럼통 굴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미군의 군수물자를 나르는 노동으로 겨우 끼니를 이어간 것이다. 할아버지는 "드럼통 미는 사람은 대부분 피란민이었다"며 "피란민이 가장 힘든 드럼통을 옮기고, 부산 토박이들은 다른 것을 날랐다"고 했다.영도구청이 발간한 '보물섬 영도이야기 스토리텔링 100선'에 따르면 1·4후퇴 당시 주로 함경도 출신의 피란민들이 영도에 많이 정착했다. 이들은 미군 군사·원조물자 포장 자재인 '보루박스'(골판지)와 음료수 깡통을 펴서 하꼬방을 만들었다. 영도다리 아래에는 피란민들이 모여 사는 '교하촌'(橋下村)이 생기기도 했다. 작품 '흰소' '가족' 등으로 유명한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의 화가 이중섭(1916~1956)도 1951년 12월부터 1953년 3월까지 영도 등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했다.영도 출신 가수 현인(1919~2002)은 부산에 정착한 함경도 피란민들의 아픔을 노래했다. '굳세어라 금순아'다. 이 노래에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전쟁통에 피란민들은 "헤어지면 부산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1934년 준공된 영도다리(옛 부산대교, 현 영도대교)는 국내 최초 연륙교로 유명했다. 실제 이곳에서 이산가족을 찾은 사람도 많다. 하지만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다 차디찬 바닷속으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피란민도 적지 않았다.김상국 할아버지는 부두에서 막노동하다 미군 부대 식당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부두에서 100원을 벌었다면, 우두머리에게 30원 떼어 주고 70원으로 밥값과 방값을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어. 그래서 아는 사람 소개로 미군 부대에 들어갔지." 할아버지는 "처음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설거지와 심부름을 했다"며 "식당에 취직하니까 끼니 걱정은 없어져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했다.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함경북도 성진시 출신 김상국 할아버지가 인천시 남구 함경북도도민회 사무실에서 한국전쟁 흥남철수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김상국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흥남부두에서 어선을 타고 부산으로 피란을 왔다.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19일께 흥남부두를 떠난 것으로 기억한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고 회상했다. 사진은 흥남부두철수작전 당시 모습으로,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제공김상국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흥남부두에서 어선을 타고 부산으로 피란을 왔다.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19일께 흥남부두를 떠난 것으로 기억한다. 김상국 할아버지는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고 회상했다. 사진은 흥남부두철수작전 당시 모습으로,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제공김상국 할아버지를 실은 배는 부산 영도다리 밑에 도착했다. 영도다리는 1934년 준공된 도개식(跳開式) 교량이다.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헤어지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피란민의 애환과 고향·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서려 있는 곳이다. /부산 영도구 제공

2017-09-13 목동훈

[zoom in 송도]알고 보면 더 재밌는 송도국제마라톤대회

센트럴파크서 출발해 다시 돌아오는 코스트라이볼·G타워 지나 동북아무역센터로공원·해수로·건물들… 이국적 색채 물씬바닷가 끼고 들어선 연구시설·대학멀리 인천대교·바이오산업교 '장관'경사·굴곡없는 코스 신기록 기대감'2017 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가 오는 24일 오전 9시 송도국제도시에서 열린다. 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는 송도국제도시 '빌딩 숲'을 달리며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는 행사로 국내외 엘리트 선수, 전국 마라톤 동호회 회원, 일반 참가자 등이 함께하는 대회다. 엘리트와 마스터즈(풀, 하프, 10㎞, 5㎞) 각 코스는 기록 수립에 적합하게 설계됐다. 코스를 달리다 보면 송도국제도시의 발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 코스 주변에 어떤 건축물과 시설이 있는지 소개한다. 송도국제도시를 알고 마라톤을 즐기자는 취지에서다. 인천시와 인천관광공사에서 만든 인천관광 안내 자료 '인천관광 100+!' 등을 참고했다.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 출발점과 도착점은 송도 센트럴파크 부근이다. 오전 9시 출발이다. 참가자들은 옷을 갈아입거나 가벼운 운동으로 몸을 풀어야 하기 때문에 1시간 정도 일찍 행사장에 오는 것이 좋다. 센트럴파크는 송도의 허파와 같은 녹지 공간이다. 3.6㎞ 해수로를 따라 수상택시가 공원을 가로지르며, 공원 주변에는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마라톤대회가 끝난 뒤 센트럴파크에서 가족 또는 직장 동료들과 여유를 즐겨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센트럴파크 주변에는 인천 개항과 근대화의 시작이 된 인천을 모티브로 한 '해돋이공원', 한국 전통식 정원 형태를 보여주는 '미추홀공원'도 있다.송도 센트럴파크 호텔 옆에서 출발해 뛰다 보면 오른쪽에 특이한 모양의 건축물이 보인다. '트라이볼'과 'G타워'다. 트라이볼은 도자기 모양의 독특한 외형으로, 아래가 좁고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구조다. 독특한 외형 때문에 CF와 화보 촬영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G타워는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GCF(녹색기후기금) 등이 입주해 있는 건물이다. 전망대에 올라가면 센트럴파크 등 송도국제업무지구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사장교 '인천대교'를 한눈에 볼 수 있다.G타워를 지나면 오른쪽에 갈대숲이 펼쳐진다. 10㎞ 코스 참가자들은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행사장으로 유명한 '달빛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나온다.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을 한 번이라도 관람한 참가자라면 색다른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0㎞ 코스 참가자들은 달빛공원을 나와 풀·하프·5㎞ 코스에 합류해 동북아무역센터를 향해 뛰게 된다. 동북아무역센터는 지하 3층, 지상 68층, 높이 305m, 연면적 19만5천220㎡ 규모다. 2006년 8월 착공해 2014년 6월 완공된 송도의 핵심 랜드마크다. 대우인터내셔널, 포스코A&C, 호텔 등 많은 기업이 입주해 있다. 넓은 공원과 해수로를 배경으로 우뚝 솟은 모습이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코스는 송도컨벤시아 인근 사거리에서 '투모로우시티'를 향하게 된다. 2008년 10월 개관한 송도컨벤시아는 매년 수십 건의 전시회와 수백 건의 컨벤션·이벤트를 개최하고 있다. 대형 행사를 유치하기 위해 2단계 건립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투모로우시티는 지하 2층, 지상 6층짜리 복합시설물이다. 2009년 7월 완공됐지만, 소송 때문에 2011년부터 운영이 중단됐다. 인천경제청은 투모로우시티 활성화 방안을 마련,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 홍보·체험장' '복합환승센터' '주민 문화·휴식 공간'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투모로우시티 다음에 기다리는 시설은 '아트센터 인천'이다. 인공호수 옆에 건립된 '아트센터 인천'은 클래식 전용 콘서트홀을 갖추고 있다. 건립 공사는 완료됐으나, NSIC(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 주주사 간 갈등 문제로 개관이 지연되고 있다.코스가 송도국제업무지구를 빠져나오면 해안도로가 펼쳐진다. 해안도로 왼쪽에는 2015년 프레지던츠컵이 열린 잭 니클라우스 골프클럽, 인기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촬영지였던 인천대 송도캠퍼스가 있다. 오른쪽은 바닷가다. 인천 신항과 송도 LNG기지,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인천대교 일부를 조망할 수 있다.풀 코스는 바이오산업교(송도4교)를 통해 남동국가산업단지 안까지 들어간다. 안말사거리에서 송도국제도시로 되돌아오는 코스로, 다리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 송도에서 남동국가산업단지를 향해 달리면서 보면 바이오산업교가 마치 '흰색 탑'처럼 보인다.풀 코스 참가자들은 송도로 되돌아와 도착점을 향해 달리면서 연세대 캠퍼스, 인천글로벌캠퍼스, 삼성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 등 송도에 입주해 있는 교육기관·바이오기업을 만나게 된다.인천글로벌캠퍼스 조성사업은 세계 유수의 글로벌 명문대학을 유치해, 인천을 '동북아 교육 허브'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뉴욕주립대, 한국조지메이슨대, 유타 아시아 캠퍼스, 벨기에 겐트대 등이 입주해 있다. 송도에는 셀트리온, 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바이오에피스 등 바이오기업이 입주해 있다. 이들은 세계 시장 점유율을 높여나가면서 송도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인천시와 인천경제청은 송도에 세계 최고의 글로벌 바이오클러스터를 조성·육성하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 코스는 기록 경신에 적합하다고 한다. 인천송도마라톤조직위원회 관계자는 "도심 속 코스이기 때문에 땅이 평평하고 굴곡이 거의 없다"며 "안전하고, 기록 경신에 매우 유리하게 설계돼 있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09-10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5]황해도 연백군 출신 김은중 할아버지(下)

전매국 염전 목수였던 아버지물 끌어올리던 수차도 만들어창고부터 제염도구까지 '뚝딱'생활력 좋은 모친은 약방 운영약사자격 없어 제조 아닌 판매1948년 연안중학교로 진학…당시 영어담당 박상준 교사 등학교 출신 유격대서 많이 활약이삭만 주워 먹고도 살았던 곳인심 넉넉한 고향 가끔 그리워황해도 연백 출신 김은중(83) 할아버지는 염전에서 제염 도구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이었다. 지금도 고향 생각을 하면 넓은 소금밭과 평야, 항상 넉넉했던 마을의 인심이 떠오른다. 김은중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조선총독부 전매국 소속 염전 목수로 일했다. 목수는 집안 대대로 내려 오던 가업이라고 했다. 전매국은 일제강점기 소금과 담배, 인삼류의 전매 사무를 담당한 곳이다. 일제는 생산성이 낮은 우리 전통방식인 자염(煮鹽) 대신 천일염(天日鹽)을 통해 소금 생산성을 높이려고 했다. 소금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관영으로 염전을 운영했고 소금의 유통까지 담당했다.우리나라 천일염은 1907년 주안염전이 처음이었고 이후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연백에는 1939년 염전 조성공사가 시작됐다. 할아버지가 건너간 1943년 연백염전의 규모는 1천250정보(町步)였다.염전에 무슨 목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당시 천일염전에서는 목수가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소금생산에 필요한 각종 시설과 도구를 만들려면 목수가 꼭 필요했다.할아버지는 부친이 수차를 만들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이 발로 밟아서 움직이는 수차를 아버지가 만들었어요. 손재주가 좋아서 뭐든 뚝딱뚝딱 잘 만드셨던 것으로 기억해요."수차는 염전에 물을 대는 기구다. 1차 증발 과정을 거친 함수가 저장된 '해주'에서 소금결정지로 물을 끌어올릴 때 쓴다. 물레방아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수차를 '무자위'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물을 자아 올린다고 해 이름 붙였다고 한다. 박호석이 쓴 '한국의 농기구'를 보면 조선 중종 때 최세진이 지은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물자새', 조선 헌종 때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에서는 '자애'라고도 했다. 일반적인 형태의 무자위는 지름이 180㎝ 되는 나무 바퀴에 판자로 된 날개 19장을 바퀴 주위에 경사지게 배치했다. 무자위의 아랫부분을 물에 잠기게 설치하고 한 사람이 올라서서 비스듬히 세운 기둥을 잡고 날개를 밟아 내리면, 사람의 무게에 의해 바퀴가 돌고, 바퀴의 날개는 물을 쳐서 밀어 올린다. 올려진 물은 판자로 만든 물길(홈통)을 따라 흘러나온다. 무자위가 끌어올릴 수 있는 물은 1시간에 50~60t정도였다고 한다. 무자위가 있기 전에는 2명이 1조가 돼 두레박으로 물을 끌어 올렸는데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농사짓는 시인'으로 유명한 박형진은 그의 책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의 연장 부리던 이야기'에서 두레박과 무자위를 함께 소개하면서 "소 같은 사람도 맞두레질을 한 날은 저녁 밥숟갈 놓자마자 통나무 쓰러지듯 쓰러져서 잘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인천 출신 시인 유종인이 쓴 '염전, 소금이 일어나는 물거울'에도 수차 얘기가 나온다. 그는 수차를 '염전의 두레박'으로 요즘의 펌프 구실을 했다고 소개한다. 수차를 밟는 염부의 모습은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 도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제아무리 두레박질보다 쉽다 한들 뙤약볕 아래 허벅지가 터질듯한 고통을 겪으며 수차를 돌리는 염부도 고생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모습은 시인 김중석이 '수차'라는 시에서 형상화 했다."아무리 내딛고 올려 밟아도 제자리이지만//평생 그 걸음으로//수차를 밟는 염부//등을 뚫고 소금이 맺힐 때까지//염전은 자기 살을 태운다//아픈 시늉도 없이//수차 또한 삐걱이며 돌고 또 돌고 돌아//전라(全裸)인 바닷물이 여름 내내 땡볕에 피말려 소금을 만들어내는//아, 쓰라림의 환희//번쩍이는 건 발밑에 있다//놀라워라, 있다//죽을 때까지 그 걸음으로 내딛는 염부와//고통의 제자리거름 밑에서 아픈//시늉도 없이 돌고 도는 수차 밑에//땡볕이."무자위는 1980년대까지 사용됐다고 한다. 지금이야 전력이나 엔진을 사용한 양수기를 통해 물을 끌어올려 수차를 보기 어렵지만, 인천의 소래생태공원에 있는 염전에서는 여전히 전통식 수차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기계를 사용하면서 전력에 의한 감전사고가 종종 발생하거나 기름이 새기도 했다. 이리 되면 그 소금의 질은 보나 마나다. 인간이 손발을 써 정성을 다하는 데에는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함이 담기게 마련이다.염전에서 목수가 만들어야 하는 제염 도구는 소금 결정지에서 천일염을 모으는 채염 장비가 있다. 이중 고무래는 목재로 된 넉가래에 타이어를 덧대 만든 도구다. 결정지 바닥에 밀착시켜 종으로 횡으로 움직이다 보면 소금이 봉우리처럼 우뚝 솟아오른다. 큰 것을 대파, 작은 것을 소파라고 했다.소금을 운반하는 도구를 만드는 것도 목수의 몫이었다. 장대 양옆에 바구니가 달린 운반도구 강고(목도)는 외발수레로 발전했고, 지금은 레일카를 이용해 손쉽게 운반한다고 한다. 소금창고를 만드는 큰 작업부터 손 도구를 만드는 자질구레한 일까지 염전에는 목수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김은중 할아버지의 부친은 전쟁 때는 인천 숭의동의 영국군 부대에서 목수로 일했고 인천에 정착한 뒤에도 신포시장에서 목수 일을 계속했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하고 다재다능했다. 처음에는 소달구지에 이동식 방앗간을 달아 이집저집 끌고 다니며 쌀을 빻아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지인과 함께 집 한 켠에서 약방을 운영했다. 정식 약사가 아니라서 약을 제조하지는 않았지만, '제중약방(製衆藥房)'이란 간판을 내걸고 약을 팔았다. 집이 오일장이 열리는 장터 근처여서 장사도 그럭저럭 잘됐다.2006년에 나온 '경기도약사회 50년사'를 보면 한약방이 중심이었던 우리나라 약업계에 서양 의약품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개항기부터다. 일본인들은 서울, 인천, 부산 등 대도시에 약방을 세우고 약업계를 장악했다. 초기에는 비누, 치약으로 시작했지만 약품과 화학물질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지금의 약사라고 할 수 있는 약제사가 처음 등장한 때는 일본인 유미스리(弓削龍藏)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병원인 부산 제생의원에 근무하기 위해 들어온 1885년이다. 그는 일본 약제사면허증 2호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 1910년까지 50여 명의 일본인 약제사가 활동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약국을 개설한 사람은 일본에서 약제사 자격증을 따 1910년 서울 종로3가에 인수당 약국을 세운 유세환이다. 조선약학교 1회 졸업생인 이정재가 1913년 종로 낙원동에 삼우당약국을 세웠고, 그 뒤로 약국이 줄줄이 늘었다.할아버지네 '제중약방'은 약사 자격이 없어 소분과 제조를 하지는 못하고 '매약(賣藥)'만을 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약종상 자격시험이 존재했지만,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자격을 얻어 약방을 운영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그때도 소화제는 활명수가 있었고, 머리 아플 때는 아스피린, 만병통치약은 다이아찡이었어요. 피란 때 어머니가 약을 많이 챙겨왔는데, 돈이 궁하면 약을 조금씩 팔아다가 살림에 보태서 썼어요."지금도 '부채표'로 유명한 동화제약의 활명수는 1897년 9월 서울에 세워진 동화약방이 만든 소화제다. '동의보감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궁중비방에 서양의학을 접목해 만든 약으로 '목숨을 살리는 물(活命水)'이라는 뜻이다. '한국기업 성장 100년사'를 보면 "계피 4그램, 정향 3그램, 감복숭아씨 6그램을 침출기에 넣고 적포도주 150그램을 가해 잘 혼합한 다음 3일간 침출시킨 뒤, 이 침출액에 다시 박하니 0.15그램, 장뇌 0.03그램을 넣고 백설탕 40그램과 증류수 70그램을 가한 후 잘 혼합해 용해한 후에 여과시켜 60밀리리터 작은 병에 담는다"고 활명수 제조법이 나온다. 활명수의 인기가 높아지자 당시 유명하다는 약방들이 유사 제품을 만들기도 했다. 동화약방은 모조품을 방지하기 위해 1910년 '부채표'를 국내 최초의 상표로 등록했다. 이밖에 해방 직후 미군이 상비약으로 가지고 들어온 '다이아찡'은 폐렴, 임질, 이질, 설사에 잘 드는 약이었는데 변변한 약이 없는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다. 서양 약을 처음 접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항생제에 대한 내성이 없던 때라 뭐든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 한다.할아버지는 해성면 해남리에 있는 해남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연안읍에 있는 연안중학교로 진학했다. 해주로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연백 내에서 학교를 다니라는 부모님의 강권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연안중학교는 해방 이후 부족한 교육시설을 늘리는 방침에 따라 1946년 5월 개교한 신설학교였다. 전쟁 후 학생들과 함께 반공유격대를 꾸려 북한에 대항했다가 미 8240부대에 편입된 강화 교동 울팩부대를 지휘한 박상준 여단장이 바로 연안중학교 영어교사 출신이다. 박상준 여단장은 휴전 이후 비정규군이었던 8240부대원들을 흡수한 육군 8250부대 제2연대장으로 정식 발령을 받았고 1955년 소령으로 예편했다."내가 전쟁 때 있었던 8240부대에 연안중학교 영어를 가르쳤던 박상준 선생님도 있었어요. 나는 그분이 선생님이니까 아는데 그분은 학생이었던 나를 기억하지는 못하겠죠. 그래도 연안중학교 출신들이 전쟁 때 유격대로 많이 활약했어요."김은중 할아버지는 태어난 곳은 강화이지만 연백을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이북5도민회 강화군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연백은 먹을 게 풍족해서 동네에 거지가 없다고 할 정도였어요. 추수 후에 남은 이삭만 주워 먹고도 살 수 있었으니 말이죠. 그때는 찹쌀떡을 만들어도 팔뚝 만하게 만들어 먹고 부족함이 없었죠. 가끔 고향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연백 출신 실향민 김은중 할아버지가 연백 염전에서 목수일을 했던 아버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09-06 김민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