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7]인천항 운영기관(상)-인천항만공사

개항 이래 국가가 주도해온 항만 개발·운영1990년대 후반 국제경쟁 위해 도입논의 불구정부 예산 탓·투포트 정치적 논리 밀려 방치시민들, 서명 운동등 펼쳐 2005년 출범 이뤄인천항을 관리하는 기관은 어디일까? 인천항이 개항한 1883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항만시설을 구축하는 업무는 관세 사무행정을 맡았던 인천해관(세관의 중국식 이름, 1907년 세관으로 개정)이 담당했다. 해방 이후에는 미 군정청 교통국 인천부가 업무를 맡았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 교통부 인천해사국이 인천항 업무를 수행한 이후에는 기관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인천항의 개발과 관리·운영 업무는 모두 정부에 의해 이뤄졌다.인천항 관리권은 2005년 7월 기업에 이관됐다. 1997년 부두운영사 제도 도입으로 민간 하역사들이 정부로부터 부두 시설을 임차해 운영한 적은 있지만, 인천항 전체 운영 권한이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업에 넘어간 건 개항 이후 처음이다. '인천항만공사'가 그 주인공이다.항만공사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등 관(官)이 주도하던 항만 개발과 운영을 담당한다. 정부는 급변하는 국제물류환경과 갈수록 치열해지는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중심 항만(Hub-Port)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1999년 3월 국무회의를 통해 항만공사제도를 도입하기로 하고, 재정자립도가 높았던 인천항과 부산항을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인천항의 경우 기존의 정부 관리 체제로는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북중국 항만들과의 경쟁이 버거울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하지만 정부 내에서도 항만공사 설립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해양수산부는 항만공사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선 4천억원의 정부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고 추산하고, 정부가 일정부분 예산을 보조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반면, 기획예산처(현 기획재정부)는 항만공사에 예산 지원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도 물류비 상승 등을 이유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인천시민들은 인천항 발전을 위해선 항만공사제도를 조기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시민들은 부산항과 여수·광양항을 중심으로 하는 '투 포트 정책' 등 정치적 논리에 밀리면서 20여 년 동안 답보 상태에 빠져 수도권 지역 물동량의 15%밖에 처리하지 못하는 인천항의 현실을 지적했다. 시민들은 항만공사 조기 설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 등 범시민적인 운동을 펼치며 항만공사 설립을 요구했다. 인천경제정의실천연합은 2001년 7월 논평을 통해 "국가 발전을 위해선 낙후된 인천항의 개발이 시급하다. 그러기 위해선 인천항이 자율권을 갖고 발전할 수 있도록 항만공사제도를 하루빨리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우여곡절 끝에 2003년 4월 항만공사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인천항만공사 설립이 확정됐다. 인천시와 정부 관계자들로 구성된 '인천항만공사설립위원회'는 2005년 7월 인천항만공사 출범에 합의했다. 인천시 공무원 출신으로 '인천항만공사 설립추진기획단'에서 근무했던 인천항만공사 신용주 홍보팀장은 "인천항만공사 설립에 필요한 기초 자료를 수집하느라 설립추진기획단 10명은 휴일도 없이 일했다"며 "그래도 당시에는 새로운 조직이 만들어진다는 설렘으로 힘든 줄 몰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수익 필요한 '기업' 형태… 마케팅 적극 펼쳐물동량 크게늘어 작년 '컨 300만 TEU' 돌파신항등 인프라 예산 투자 '선순환 구조' 갖춰인천항만공사 설립은 물동량 증가와 인프라 확충 등 인천항 발전의 계기가 됐다.인천항 물동량은 빠르게 늘어났다. 1974년 인천 내항 4부두에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만들어진 이후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1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달성하는 데 3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그런데 2013년 200만TEU를 돌파하며 물동량 증가 속도가 빨라졌고, 지난해에는 부산항에 이어 국내 두 번째로 300만TEU를 넘어섰다. 2005년 인천항만공사 출범 당시 114만9천TEU였던 물동량이 지난해 304만TEU로 2.6배 증가한 것이다. 출범 당시 29개였던 정기 컨테이너 항로도 49개까지 늘었다. 여수·광양항에 이어 국내 3위였던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규모는 지난 2015년을 기점으로 여수·광양항을 완전히 따돌렸다. 해수부에서 근무하다 인천항만공사로 자리를 옮긴 김영국 여객터미널사업팀장은 "해수부에서 인천항을 관리하던 당시에는 안정적인 운영에 방점을 뒀다.인천항만공사는 공기업이라도 수익을 발생시켜야 하는 기업이기 때문에 물동량 창출을 위해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벌였다"며 "전 세계 컨테이너 물동량이 늘어난 부분도 있지만, 증가속도를 고려하면 마케팅 효과가 크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물동량이 늘면서 인천항의 인프라를 갖추는 공사 속도도 빨라졌다. 2012년 벌크 물동량을 처리하는 북항이 문을 열었고, 2016년에는 송도국제도시에 신항이 개장했다. 항만 활성화에 필수적인 시설이 들어서는 배후단지 면적도 2005년 47만8천㎡에서 152만6천㎡로 3배 넘게 확장됐다. 조주선 인천항만공사 항만시설팀장은 "해수부에 속해 있을 때보다 예산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프라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며 "시설 투자를 바탕으로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는 선순환 구조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2005년 7월 인천항만공사 창립 기념식에 참석한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는 "인천은 항공과 해운이 결합한 강점이 있는 곳이다. 이제 역사적인 인천항만공사의 출범으로 인천항이 동북아의 물류 중심 항만으로 발전할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인천항만공사와 함께 인천항은 성장하고 있다. 내년 4월에는 송도 9공구에 국내 최대 규모의 크루즈 전용 터미널이 문을 열 예정이며, 2020년에는 신국제여객터미널도 개장한다. 2025년에는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500만TEU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김영국 여객터미널사업팀장은 "인천항만공사가 설립된 이후 신규 물동량을 창출하면서 인천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며 "인천시민들과 함께 인천항이 계속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아이클릭아트2005년 7월 인천항만공사 청사에서 진행된 현판식 모습.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만공사가 입주해 있는 정석빌딩과 현판.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위치한 인천 신항 전경. 인천항은 신항 개장 이후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300만TEU를 돌파했다.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 조감도.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만공사 캐릭터. /인천항만공사 제공

2018-12-12 김주엽

[zoom in 송도]'인구 5만 돌파' 송도2동, 2·4동으로 나뉜다

내년 3·6~9공구 일대 '송도4동' 분동아라플라자에 임시청사 조성공사중6·8공구 아파트입주땐 주민 더 늘듯인천 연수구 송도2동이 내년 1월 '송도2동'과 '송도4동'으로 나누어진다. 송도1~3동에 이어 송도4동이 신설되는 것이다.9일 연수구에 따르면 송도국제도시는 현재 송도1동, 송도2동, 송도3동으로 돼 있다. 공구별로 보면, 송도 1·3공구(국제업무단지 등)와 6·8공구(송도랜드마크시티 등), 9공구(신국제여객터미널과 아암물류단지)가 송도2동에 해당한다. 이 중 송도 3공구와 6~9공구 일대가 내년 1월 신설되는 송도 4동에 포함될 예정이다.올 11월 말 기준 송도2동 인구는 5만4천823명으로, 송도1동(3만4천391명)과 송도3동(4만3천661명)보다 많다. 거주 외국인까지 합하면, 송도2동 인구는 5만 5천 명이 넘는다. 송도2동은 면적이 3㎢ 이상인 데다, 3개월 동안 5만명 이상의 인구수를 유지했기 때문에 분동(分洞) 대상이 된다. 송도2동 인구는 올해 1월 5만명을 돌파한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 표·그래픽 참조연수구는 '송도2동 분동 준비단'(직원 3명)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송도아라플라자(컨벤시아대로230번길 42) 일부 공간을 송도4동 임시청사로 정해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임시청사는 동장실, 민원실, 회의실 등으로 구성된다. 연수구 총무과 관계자는 "내부 리모델링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다. 현재 냉난방 기구 설치, 책상 배치 등이 이뤄지고 있다"며 "내년 1월 문을 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송도4동 임시청사에는 7명이 배치될 예정이라고 한다. 행정기구 설치 조례·시행규칙 개정 등 분동에 필요한 안건(자치법규 개정)은 이달 중 연수구의회를 통과할 예정이다.연수구가 분동을 추진하는 이유는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양질의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집 근처에 행정복지센터(동사무소·주민센터)가 생기면 서류 발급이나 문화 프로그램 수강 등이 한결 수월해진다. 관(官) 입장에서도 통반장들과 함께 해당 지역을 관리·유지하는 등 행정 업무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특히 송도4동 예정 지역은 송도6·8공구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면서 인구가 많이 늘어날 예정이다. 올해 3천300가구가 넘는 아파트가 준공됐다. 2019~2020년에는 '힐스테이트 레이크 송도' 등 총 1만3천862가구 규모의 아파트단지가 조성될 것으로 연수구는 예상하고 있다.연수구는 분동 준비와 함께 송도4동 청사(행정복지센터) 신축도 추진하고 있다.연수구는 송도 3공구 인천예송초등학교와 송도29호공원 사이에 있는 땅(송도동 104의 2)에 송도4동 청사를 건립할 계획이다.송도4동 청사는 지하 2층, 지상 5층, 연면적 4천562㎡ 규모다. 민원실, 주민자치실, 작은도서관, 생활체육실, 대회의실 등을 갖추게 된다. 예상 사업비는 110억5천200만원이다. 연수구는 내년 3월 설계 공모를 시행하고 그해 12월까지 실시설계를 완료할 계획이다. 이후 건축 관련 절차를 거친 뒤 2020년 4월부터 2021년 11월까지 공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연수구 재무회계과 관계자는 "새 청사 설계비 등 5억6천900만원을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했다"며 "준공 후 이사 및 시범운영 기간을 고려하면, 2022년 1월부터 새 청사에서 업무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8-12-09 목동훈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0)]김영의 박사

영화학당 거쳐 서울 진학… 고교 졸업 무렵 두각이화여자전문학교서 연마하다 조교직도 겸해1930년대 美음대서 공부하며 안익태와 무대올라 국내 복귀 후엔 예술위원 등 다양한 활동 펼쳐다소 쌀쌀한 바람이 불던 초겨울 한낮에 서울 서대문구의 이화여자대학교를 찾았다. 정문을 통과해 우측으로 가다가 오른편 중앙도서관 옆에 있는 음악관 1층 현관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섰다. 곧이어 김영의 기념연주홀(통상적으로 김영의홀로 칭함)을 만날 수 있었다.홀로 들어가는 문 옆 벽에 설치된 동판을 찬찬히 읽었다. 동판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김영의 박사는 1929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하신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음악예술계와 음악교육계의 지도자로써 활약하셨고 특히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에 봉직하시면서 학교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기에 이를 기념하여 이 대연주실을 김영의 기념연주홀 이라 이름한다. 1981.8홀에 들어서니 나열된 객석과 그 너머에 펼쳐진 무대를 볼 수 있었다. 이내 무대 뒤 벽면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이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 즈음이어선지 학생 두 명이 파이프 오르간을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악보를 보고 건반을 누르며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진지했다.우리 음악계의 미래인 학생들의 무한한 발전을 마음속으로 기원하며 돌아섰다. 김영의홀에 가기 전 출입문이 잠겼거나, 조명이 꺼져 있어서 홀의 전모를 보지 못할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불 밝힌 홀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가슴에 담은 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이화여대에 따르면 음악관은 지하 2층, 지상 6층 규모로 1981년에 완공됐다. 이 건물에는 김영의홀로 명명된 500여석의 대연주실, 국악연주실, 음악도서관, 관현악연습실, 시청각실 등 음악교육에 필요한 현대적 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음악대학이 전용하고 있다.인천 출신으로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을 졸업했으며,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서 유학한 우리나라 첫 피아니스트 김영의(1908~1986)의 흔적을 더듬었던 시간이었다.김영의의 대학 시절 이후의 활동들은 대체로 알려져 있으나, 인천에서 삶이나 흔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어린 시절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접한 음악과 스포츠 등이 20세기 중반 우리나라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을 것이다.김영의는 1920년 3월 영화학당 졸업 후 서울 이화학당을 거쳐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1924년 3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고교 졸업 즈음부터 뛰어난 피아노 솜씨를 선보였다고 한다.<영화 백년사>의 '멋쟁이 음악가 김영의 학장' 편에 고교 졸업 시기의 연주자로서 김영의에 대해 묘사된 대목이 있다. "그 당시 천부적 재질을 가진 김영의는 특히 음악에 뛰어난 솜씨로 피아노 건반위에서 손가락들이 번개같이 불꽃 튀기는 연주로 듣는 이들로 하여금 신비경으로 이끄는 무아지경으로 몰아넣어 황홀케 하여 서울 장안의 총인기를 끌기도 하였다."이 같은 음악적 재능을 더욱 연마하기 위해 1925년 3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입학해 음악이론과 피아노를 전공하고 1929년 3월 졸업했다. 그해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음악 강사로 부임해 2년간 있다가 1931년 3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조교로 자리를 옮겼다.언론인 홍종인(1903∼1998)은 '반도 악단의 만평'이라는 글을 통해 여러 음악인들을 하나하나 평가했다. 이 글은 1931년 6월 발간된 잡지 <동광>에 실렸다. "김영의 양 이전(梨專) 음악과를 나온 지 3년 퍽 실력 있다고 한다. 독주보다는 반주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만하면 퍽 능숙한 줄만은 믿으나 스테이지에서 좀 더 감격하여 보이는 듯한 침착미가 적어 보인다. 기량이 좋은 까닭인지." 아마도 홍종인은 충실한 전달자로서의 연주가 아닌 연주자 본인의 감정이 과하게 이입된 연주였음을 지적하는 듯하다. 글 말미 기량 자체는 인정하고 있다.이어서 <동아일보> 1935년 6월 20일자에 '김영의 양 송별 독주회'가 21일 오후 8시 이화여자전문학교 강당에서 열린다는 단신 기사가 게재됐다. 이 연주회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관 강당의 개관 기념 연주회이기도 했다. 그해 지어진 음악관은 당시로선 호화스러운 조명으로 장식된 무대를 갖췄다. 김영의는 강당 개관 기념과 자신의 고별을 겸한 연주회를 펼쳤으며, 청중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연주회 후 도미한 김영의는 1939년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각종 음악회에도 열심히 참관했으며, 연주회도 가졌다. 1937년 뉴욕인터내셔널하우스에서 한인들의 모임이 있었을 때 안익태가 첼로 독주를, 김영의가 피아노 독주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귀국 후 다시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45년 해방 직후 37세의 나이에 대학 음악과장과 예림원장(예술대학장)을 겸직했다. 1944년 경성음악연구원 창설에 참여하고, 1949년 문교부 내 설치된 예술위원회의 음악위원으로 선임 되는 등 연주와 교육 외에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 피난기였던 1951년 국방장관 신성모와 결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해 12월 문교부 요청에 따라 단과대 명칭이 바뀌면서 예림원장에서 예술대학장이 되었다. 1958년 미국 퍼시픽대에서 1년간 연구 후 귀국해 복직했으며, 1973년 정년퇴직했다. 퇴직 후에도 1977년 이화학당 재단이사장으로 있었으며, 1986년 11월 26일 타계했다.인천지역 문화계 원로 중 한 명인 김윤식 시인은 "우리나라 교육계의 초기 지도자로서, 음악계의 주춧돌로서, 그의 공로는 적다고 할 수 없다"면서 "그가 비록 고향 인천에 아무런 족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고 그의 모든 '한국적 업적'이 고스란히 우리 인천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김영의홀 출입구쪽 벽면에 장식된 동판. /이화여대 제공이화여자대학교 음악관 1층에 자리한 김영의홀에서 열린 연주회 모습. /이화여대 제공이화여자대학교 음악관 전경. /이화여대 제공김영의 박사 /이화박물관 제공

2018-12-06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6]하역원과 포맨

선박에 원료·제품 싣거나 내리는 역할 출항에 맞춰 신속하게 처리 정밀성 필요컨테이너·크레인 도입으로 맞은 '위기'내항TOC통합 등 변화 겪으며 활로 찾아최근 찾은 인천항 내항 부두. 한국지엠의 신차들이 부둣가 찬바람을 뚫고 파나마 선적(船籍)의 '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MEDITERRANEAN HIGHWAY)'호로 줄지어 오르고 있었다. 작업자들은 차량 전후 30㎝, 차량 좌우 10㎝의 빽빽한 간격으로 차를 손상 없이 실어야 한다. 그만큼 전문성이 필요하다. 시간당 60~80대 정도를 실을 수 있는데, 배가 출항하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작업 속도도 매우 중요하다. 정확한 수량을 파악하는 일 역시 이들의 몫이다. 배에서 먼저 내릴 차량을 가장 나중에 싣는 등 선적(船積) 순서도 신경 써야 한다. 이 배의 경우 총 15개 층으로 돼 있는데, 선적 순서가 뒤바뀌면 목적지에서 차량을 내리는 시간이 더 걸린다.차량을 직접 운전해 선내에 싣는 '드라이버', 실린 차를 정밀하게 주차하는 '키커', 키커가 정확한 위치에 차를 댈 수 있도록 돕는 '신호수' 등 하역원과 이들을 총괄 지휘·감독하는 '포맨' 간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이들은 배의 크기에 따라 십 수명씩 조를 이뤄 움직인다. 이번 선적 작업엔 80여 명의 인력이 6개 조로 구성돼 투입됐다. "하역원들을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라고 하면, 포맨은 지휘자"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들이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문제없이 작업을 마칠 수 있다는 의미다. 작업 현장에서 만난 포맨 송한섭(60) 감독은 "제품 손상 없이 계획된 물량을 무사히 소화할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지난 40여 년간 하역원과 포맨 등 하역업계에서 일한 그는 "조금만 일하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왔는데,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살다 보니 벌써 40년이 됐다"며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일이지만,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포맨 송한섭 감독을 비롯한 하역원들의 이번 작업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하역원은 부두에 있는 선박에 원료 등 각종 제품을 싣거나 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통칭한다. 항운노조가 하는 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납세는 양곡 같은 물건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양곡은 주로 배로 운송됐는데, 이때 양곡을 배에 싣거나 내리는 일을 했던 '조군(漕軍)'이라는 하역 인부가 오늘날 하역원의 시초격으로 평가된다.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을 제공해 생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지금과 비슷한 측면이 많다.1883년 인천항 개항 후 물동량이 증가하면서 하역원을 포함한 부두노동자들이 늘어났다. 항만설비의 확충으로 하역기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부두노동자들도 하역산업의 전문 노동자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노동력 착취와 한국전쟁의 어려움을 거친 하역업계는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경제적인 상태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인천항의 물동량 증가가 주된 요인이었다. 관련 통계에 따르면 1962년 130만8천828t을 기록했던 인천항의 화물하역실적은 1972년 949만5천105t으로 7배 이상 늘어났다. 이듬해(1973년)엔 1천509만2천830t으로 더욱 늘었다. 경제개발 추진에 따른 생산 규모 대량화와 유통 물량 팽창이 원자재와 생산품의 수출입 확대로 이어졌다. 이후 항만에 모습을 드러낸 '기계'는 하역원들을 위축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게차와 크레인이 대량 도입돼 무거운 화물을 내리는 일에 투입(1966년)됐고, 고철 작업 등을 하는 마그넷(자석)도 사용되기 시작(1968년)했다. 인천항 양곡 전용부두엔 진공 흡입식 사일로(silo)가 설치(1974년)되기도 했다. 수송과 하역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온 '컨테이너'는 1970년대 초반 인천항에 모습을 나타냈다. 대한통운이 1970년 3월부터 인천항에 컨테이너선을 월 2회 정기 취항하기로 하는 등 컨테이너 운송을 본격화했다. 당시 인천항엔 1천여 명의 항만 노무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포함된 노동조합은 진정서를 내고 대량실업 방지 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1980·1990년대 산업화에 힘입어 인천항은 수도권 최대 항만으로 성장했고 하역원을 비롯한 하역업계는 항운노조 상용화 개편(2007년), 내항 TOC(부두운영사) 통합(2018년) 등 변화를 거치며 인천항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인천항 내항에서 만난 경력 25년의 포맨 김종현(60) 감독은 "불철주야 주어진 작업을 성실히 하고 있지만, 컨테이너가 아닌 물동량 규모가 줄어들고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그의 말 속에선 위기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인천항 내항의 지난해 기준 벌크(비컨테이너) 물동량은 2천353만3천t을 기록했다. 10년 전인 2007년 4천250만t에 비해 절반 가깝게 줄어든 것이다. 수년째 내리막이다. 벌크 화물이 진보된 컨테이너로 흡수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이런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평택항, 군산항 등 인접 항만과의 벌크 물동량 유치 경쟁도 심화되고 있다. 내항을 포함한 인천항 전체 벌크 물동량은 최근 몇 년째 1억1천여t 수준에서 정체돼 있다. 지난해 3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돌파하는 등 매년 증가세를 보이는 인천항 컨테이너 물동량과 대비된다.김종현 감독은 "펄프 같은 경우 대부분 인천에서 처리돼 지방으로 갔는데, 지금은 대부분 평택이나 군산항으로 빠졌고, 벌크로 들어오던 납이나 알루미늄괴(塊), 원목 등은 요새 컨테이너로도 많이 들어와 내항 물동량이 줄어드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어 "인천항 하역과 관계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몇천 명은 될 것"이라며 "(관계 기관들은) 인천항의 (비컨테이너) 물동량 확보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송한섭 감독은 "우리 손을 거친 제품들이 북중미든, 동남아든 해외 여러 나라에 대한민국을 알린다는 자부심으로 지금껏 일해왔다"며 "더욱 안전에 신경 쓰고 '하역만큼은 인천항이 최고'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항 내항 부두에서 하역원들이 한국지엠의 신차를 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에 선적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로 줄지어 오르고 있는 한국지엠 신차들.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에 선적되는 차량마다 바코드를 찍어 확인하는 모습.

2018-12-05 이현준

[zoom in 송도]송도 민간 임대·위탁시설 현황

경제청 소송 승소 신규 운영자 선정 축구장 점검후 내년 2월 '재가동'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송도국제도시 축구학교 등 민간사업자에 임대·위탁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시설들에 대해 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다.송도 내 대표적인 민간사업자 임대 및 위탁 운영 시설은 축구학교(옛 첼시FC 축구학교), 송도국제캠핑장(옛 호빗랜드), 골프연습장(송도블루오션 골프클럽)이다. 축구학교와 캠핑장은 새 운영자를 선정하기 위한 절차가 진행되고 있으며, 골프연습장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애물단지로 전락했던 이들 시설의 정상화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옛 호빗랜드' 정비·감정평가 완료제한경쟁방식 새 사업자 모집키로■ 축구학교 정상화 막바지 단계축구학교는 송도 4공구 인천도시철도 1호선 '지식정보단지역' 인근(인천타워대로25번길 31)에 있다. 인조단지 축구장(1만772㎡), 관리사무소(141㎡), 조명탑 4개로 이뤄졌다.축구학교는 특수목적법인 (주)엔에스씨가 2013년 인천경제청과의 협약에 따라 조성했다. 이 법인이 축구학교를 조성해 인천경제청에 기부채납하고 3년간 첼시FC의 축구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법인은 운영난을 겪으면서 인천경제청에 내야 할 사용료 약 3억 원을 체납했다. 축구장과 관리사무소를 만든 업체에 공사 대금을 주지 못하는 상황까지 됐고, 결국 2016년 7월 운영이 중단됐다. 인천경제청이 새 운영자 선정에 나서려고 했는데, 공사 대금을 받지 못한 업체가 유치점유권을 행사했다. 인천경제청은 지난해 3월 이 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올해 3월 승소했다.인천경제청은 최근 공개입찰 방식으로 새 운영자를 선정했다. 아직 정식 계약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 운영자는 내년 2월부터 축구학교를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내년 2월까지 축구장 내 첼시FC 마크 제거, 조명탑 보수 등 기존 시설을 정비하는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존 시설 정비 공사는 인천경제청이 진행한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새 운영자의 축구학교 사용 기간은 5년"이라면서 "업체 대표가 축구계에 있었으며 지금도 다른 곳에서 축구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자금재조달등 지급보증 문제 해결블루오션골프클럽 '영업 순항중'■ 캠핑장 새 운영자 검증 강화키로송도국제캠핑장은 송도24호 근린공원에 있다. 인천경제청이 2014년 39억원을 들여 조성한 뒤 민간사업자에 운영을 맡겼다. 운영 기간은 그해 8월부터 2017년 8월까지 3년간이며, 연 사용료는 4억2천만원이었다. 하지만 민간사업자가 경영난을 이유로 사용료를 제때 내지 못하자, 인천경제청은 민간 위탁 계약을 해지했다.민간사업자는 2016년 9월 민간 위탁 취소 처분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인천경제청은 지난해 7월 소송에서 이겼다.인천경제청은 송도국제캠핑장 운영자를 선정하기 위해 시설 정비와 감정평가를 완료한 상태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민간사업자를 선정하겠다는 게 인천경제청 계획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운영자가 계약 기간 중간에 운영을 중단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신용 상태와 제안서 내용을 평가하는 제한경쟁 방식으로 새 운영자를 선정할 방침"이라고 했다.■ 골프연습장은 정상 운영 중송도24호 공원에 있는 '블루오션골프클럽'은 운영자가 올해 4월 인천경제청의 지급보증 문제를 해결하면서 정상화됐다.인천경제청은 2012년 12월 송도24호 공원 민자 골프연습장 사업시행자를 선정하고, 이듬해 7월 실시협약을 체결했다. 민간사업자가 골프연습장을 건립해 인천경제청에 기부채납하는 대신 일정 기간 운영권을 갖는 내용의 협약이었다. 민간사업자는 137억 원을 투자해 4만4천555㎡ 부지에 120타석 규모의 골프연습장을 건립하고 2014년 10월 영업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인천경제청이 95억원의 지급보증을 섰다. 골프연습장은 경영난으로 정상 영업이 어려워지면서 2015년 12월 운영자가 한 차례 변경됐다. 인천경제청이 민간사업에 지급보증을 서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고, 새 운영자는 부동산을 담보로 한 리파이낸싱(자금 재조달), 부동산 매각 등을 통해 올해 4월 인천경제청의 지급보증 문제를 해소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최근 새 운영자를 선정한 송도 축구학교 축구장. 정비 공사가 이뤄지기 전 모습이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8-12-02 목동훈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9)]교가(校歌)

국내 첫 서구식 교육기관, 1892년 영화학당순수 민간학교 첫 설립은 1903년 제녕학교각각 영화초교·창영초교로 현재까지 명맥대학수학능력시험이 이달 중순 전국 고사장에서 일제히 치러졌다. 해마다 그렇듯 이른 시간부터 수험장 마다 배치된 각 학교 후배들은 열띤 응원전을 펼치며 선배들의 '수능 대박'을 기원했다. 후배들은 수험생들을 위해 저마다 각종 구호와 힘찬 노래들로 응원전을 준비했다.(11월 15일 인터넷 보도) 이른 아침 시간에 모인 후배들이 목청껏 부르는 각 학교의 교가(校歌)들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마치 '학교의 모든 기를 모아서 응원을 보내니 힘을 내서 시험 잘 치르고, 학교의 이름도 널리 알려달라'는 바람이 담긴 듯한 모습이었다. 이렇듯 학교의 정신을 반영한 교가는 학생들로 하여금 애교심과 단결심을 갖게 한다. 또한, 학교의 교육관도 담고 있다. 교가는 학교의 의례나 체육대회, 축제 등 각종 행사에서 부르는 노래이다. 때문에, 졸업 후 성인이 되어서도 학교를 떠올리며 교가를 읖조리게 된다. 이처럼 학창 시절 부르는 횟수가 많은 교가는 학생들의 음악적, 심성적 측면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수업 외 학교생활에서 부르는 교가의 교육적 영향력이 결코 무시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1. 황해바다 푸른물결 소리 들으며 우뜩솟은 문학산봉 바라 보라 보면서 배움의 길 닦고 닦는 대한의 딸들 이룩하세 주의 뜻을 우리의 땅에2. 샛별보다 슬기로운 우리 눈동자 뿌리깊은 백향나무 기상을 삼고 한데뭉쳐 진리찻는 영화 학도야 삼천리에 새벽종을 등불이 되세3. 푸른 마음 높은 뜻을 길벗을 삼아 빛내리라 영화학당 힘을 합하여 거룩하다 주의 이름 길이 받들어 우리겨레 이강산에 빛을 삼으리영화학당 교가 (1913년), <영화 백년사(1892~1992)> 발췌개항지 인천은 신교육 발상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 교육 기관인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이 1892년에 문을 열었다.(11월 16일자 9면 보도) 인천 관학의 효시인 관립인천외국어학교(현 인천고등학교)는 고종의 칙령에 따라 1895년 개교했다. '간추린 인천사'(인천학연구소 刊)에 따르면 인천외국어학교 초기 수업 연한은 3년 과정의 영어과와 일어과가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영어과를 폐지하고 1909년 학교명마저 관립인천일어학교로 개정했다. 해방 후인 1949년 인천공립상업학교에 이어 1951년 인천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송도고 교가, 초기의 음악적 원형태 유지1906년 개성서 윤치호가 설립 첫 가사 써'천년고도' 등 표현 인천 이전前 작사 추정인천에서 종교 계통이거나 관학이 아닌 순수한 민간 학교로서 처음 문을 연 곳은 제녕학교였다. 1903년 6월 인천의 유지 서상빈이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제녕학교를 설립했다. 러일 전쟁 후 침몰한 바랴크호의 인양을 맡아 거금을 쥔 김정곤이 도움을 줬다. 인천시가 펴낸 인천역사문화총서 74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장면'에 제녕학교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나와 있다. 서상빈은 우리나라 최초의 상인단체이자 상공회의소의 전신인 인천신상협회를 설립해 실질적인 사장 역할을 했다. 이처럼 제녕학교 설립에는 인천신상협회와 지역 유지들이 힘을 모았다. 제녕학교는 학생 수가 120명에 달할 정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1906년 이후 학교 운영 경비를 전부 제공했던 인항전운회사 재정이 넉넉하지 못해 교비를 마련하기 어려운 지경에 봉착했으며,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 통합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인천공립보통학교가 현재 명칭인 '창영'을 갖게 된 건 1936년 인천창영공립보통학교로 바뀌면서다. 창영초교 구 교사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6호로 지정돼 있다. 학교들은 교표와 함께 교목, 교화, 교가 등 저마다의 상징을 갖는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지역 학교들 중 개교 당시나 초기 교가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학교는 찾기 힘든 가운데, 송도고등학교의 경우 음악적 측면에서만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906년 개성에서 설립된 송도고 교가의 첫 가사는 학교 설립자인 윤치호(1865~1945)가 썼다. '애국가'의 작사가로 언급되는 그는 교회 '찬미가'도 다수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도학원 90년사'(송도중·고등학교동창회 刊) 등에 따르면, 교가의 곡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군가로 사용됐던 노래다. 1857년 작곡된 이 곡은 코넬대학교와 에모리대학교, 밴더빌트대학교 등 미국 다수의 학교에서 교가로 사용되고 있다. 에모리대학교에서 유학한 윤치호가 미국 교가 문화를 우리에 접목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스코틀랜드 민요인 '밀밭에서'와 '올드랭사인'에 각각 가사를 붙인 '경부철도가'와 '애국가' 등 서양음악 선율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일명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가 유행할 때였다. 현재 송도고 교가 가사의 원형은 이상춘이 쓴 것으로, 1절 가사에서 개성을 나타내는 문구 '산수 좋고 역사 깊은/천년고도에'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송도고가 인천으로 이전(1952년)하기 전에 쓴 것으로 보인다.해방·한국전쟁후 교가제정 관행 현재까지대부분 일률적 구성… 특색있는 작품 기대영화초등학교의 경우 1913년 3월 교가가 제정됐다. '영화 백년사(1892~1992)'(이성삼 박사 집필·영화학원 刊)에 3절로 이뤄진 당시 교사 가사 전문이 기록돼 있다. 하지만, 작곡자와 작사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교가 가사에는 '황해바다'와 '문학산봉' 등 공간적 배경이 나오며, '주의 뜻', '주의 이름' 등의 노랫말을 통해 신앙에 입각한 근면함과 성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불리는 영화초등학교 교가는 1953년(이은상 작사·김용환 작곡)에 만들어졌다.이 밖에 역사를 지닌 지역 학교들의 현재 교가는 작사·작곡가의 이름 등을 유추해볼 때 해방 후부터 1950~1960년대 만들어진 곡들로 판단된다. 이전 곡들은 한자 용어가 많고, 전래 과정의 서양음악을 활용하다 보니 구조가 단순해서 이에 맞춰 가사가 짧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제시대와 해방 후 시기에 우리 학제가 바뀌면서 교명이 변경된 경우도 있고, 교육 내용도 수정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교가 대부분은 서양의 7음 음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남녀 학교 구분 없이 박자(4분의4박자)도 행진곡풍으로 일률적이다. 해방 후와 한국전쟁 후에 이뤄진 교가 제정 관행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으로는 학교의 이미지와 특성을 반영한 개성 넘친 다양한 교가가 나타나길 기대해 본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제녕학교 설립을 주도한 인천신상협회의 장정(章程). /인천시 제공주민들의 성금으로 1907년 세워진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가 지금의 창영초등학교이다. 인천 지역 교육사에 이정표를 세운 곳이며, 한국 근대사를 대표 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경인일보DB

2018-11-29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5]줄잡이와 라싱

수천~10만t넘는 선박 부두에 설치된 'ㄱ'자 모양 비트와 연결하는 '줄잡이'과거엔 항만 공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50~100m 접안 위치 옮기기도라싱 작업자들, 컨테이너·화물 등 선적 하면서 철제기구·로프 이용해 고정파손 예방·평형 유지 '출항전 필수 업무'… 급하더라도 가장 꼼꼼하게 진행대한민국을 흔히 '통상 국가'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지리적 환경을 가지고 있고, 지하자원이 부족하다. 이런 점 때문에 교역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 바로 '통상 국가'다. 통상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 항만과 선박이다. 우리나라 교역의 98%가 바다를 통해 이뤄진다.항운노조는 바다를 통한 교역에 있어 한 축을 담당한다. 선박이 항만에 접·이안하는 것을 돕고, 짐을 내리고 싣는 모든 과정에서 역할을 한다.지난 20일 오전 11시 인천항 내항. 인천과 중국 칭다오를 오가는 카페리선 골든브릿지5호가 입항을 위해 안벽 가까이 다가오자 등에 'Line Handling'이라고 쓰인 옷을 입은 항운노조원들이 배를 맞을 준비를 했다. '줄잡이' 또는 '강취방'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선박이 부두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선박에서 제공하는 줄을 부두에 설치된 'ㄱ'자 모양 구조물인 '비트'에 고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보통 한 척의 배는 앞뒤로 각각 4~6줄을 연결한다. 적게는 수천 t에서 10만t 이상의 무게인 선박을 고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줄의 너비는 10㎝ 이상으로 두껍다.작업은 선박에서 육지 부분으로 내린 줄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줄은 비트에 연결하는 굵은 줄, 이와 연결된 '오소리 줄'이라고 불리는 얇은 줄로 구성된다. 선박에서 줄을 육지로 던지면 줄잡이들이 얇은 줄을 잡으면서 작업이 시작된다. 이때 비트에 묶어야 하는 줄은 바다에 빠져 있다. 줄잡이들은 먼저 얇은 줄을 끌어당긴 뒤, 비트에 연결하는 굵은 줄이 나타나면 비트에 연결한다. 줄 자체가 무거운 데다 바닷물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두 명이 힘을 합쳐 줄을 끌어당긴다. 줄을 비트에 건 뒤에는 선박에서 장비를 활용해 줄을 잡아당긴다. 느슨했던 줄은 팽팽해진다. 이러한 작업을 배 앞 뒤에서 각각 4차례 진행한 뒤에야 접안 작업이 마무리된다.줄잡이 업무는 카페리선뿐만 아니라 작은 어선부터 유조선이나 크루즈 등 대형 선박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다만 선박의 규모에 따라서 줄의 두께와 비트에 연결하는 줄의 개수 등이 달라질 뿐이다.인천항에서 20여 년간 줄잡이 업무를 한 이성환(59) 소장도 이날 작업을 했다. 이 소장은 "밖에서 보기에는 쉬워 보일 수 있지만, 위험하고 힘들기도 한 작업"이라며 "선박에 타고 있는 선원들과 호흡이 맞지 않으면 줄의 무게 때문에 다치는 일도 발생한다"고 말했다.인천 신항과 남항이 조성되기 이전에는 인천항에 들어오는 선박 대부분이 인천항 내항으로 입항했다. 입항하려는 선박은 많았지만, 부두 공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선박을 접안하기 위해서 효율적으로 공간을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줄잡이들이 선박을 옮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접안돼 있는 선박의 위치를 50~100m 옮기는 데 줄을 이용한 것이다. 고정돼 있던 줄을 해체한 다음 이 줄을 길게 늘어뜨린 뒤 이동하고자 하는 곳에 있는 비트에 고정한다. 그런 후 선박에서 줄을 잡아당기는 방식으로 배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이 소장은 "과거에는 워낙 내항으로 들어오려는 배가 많았기 때문에 배 위치를 조정해서 더 많은 선박을 접안했다"며 "하지만 신항과 남항 등 항만이 잇따라 조성되면서 지금은 그러한 작업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이어 "다른 작업들은 많이 기계화가 이뤄졌지만, 줄잡이 작업은 앞으로도 기계로 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우리 업무가 단순해 보이지만, 선박들이 안전하게 접안해야 선원과 승객이 안전하게 승·하선할 수 있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다.항운노조가 맡은 작업 중 또 다른 하나는 라싱(lashing)이다. '고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적된 화물을 고정하지 않으면, 배가 운항하는 과정에서 화물이 움직이게 된다. 이는 화물이 파손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선박의 평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때문에 선박 출항 준비에 있어서 필수 작업 중 하나가 바로 라싱이다.지난 26일 오전 10시 인천컨테이너터미널에 있는 'BOX ENDURANCE'호에선 컨테이너 선적 작업과 함께 이를 고정하는 라싱이 이뤄지고 있었다. 컨테이너 라싱은 철제 기구를 이용해 컨테이너와 선박을 'X'자 모양으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날 선박에 실린 컨테이너는 361TEU이며, 모든 컨테이너에 대해 라싱 작업이 진행됐다.라싱 작업을 진행한 조성덕(56) 씨는 "컨테이너 선박은 정시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작업 시간이 빠듯한 경우가 많다"며 "밤낮, 날씨를 가리지 않고 (라싱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힘든 부분이 있다"고 했다. 이어 "라싱은 선박 안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측면이기 때문에 급하더라도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게 작업을 진행한다"고 강조했다.이날 라싱 작업에 투입된 항운노조원은 30명. 컨테이너 선적과 라싱 작업이 함께 이뤄지면서 평소보다 긴 2시간가량 소요됐다. 일반적으로는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컨테이너를 'X'자 모양으로 라싱하는 것처럼 화물에 따라 작업 방식이 다르다. 자동차의 경우 4개 바퀴를 이용해 줄(벨트 형태)로 선박과 자동차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고정한다.화물 선적에 이어 라싱 작업이 완료되면, 줄잡이가 선박과 부두를 연결하는 줄을 풀어 준다. 이날 컨테이너 선적과 라싱을 마친 'BOX ENDURANCE'호도 줄잡이들이 비트에 연결된 줄을 풀자 출항했다.인천항 등 전국 항만에서 기계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천 신항과 같은 컨테이너 항만은 자동화·기계화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5월 문을 연 중국 칭다오항은 '자동화'된 항만이라는 점을 앞세우고 있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하던 컨테이너 고정 작업을 로봇이 대신하고 있다.조성덕 씨는 "이 일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다. 처음에만 해도 수작업이 많았지만, 점차 기계로 대신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앞으로 인천항도 자동화 항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그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선박 안전을 위한 일이고, 현재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줄잡이는 선박을 부두에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지난 20일 오전 인천항 내항에서 인천항운노조원들이 카페리선 골든브릿지5호와 부두를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지난 26일 인천컨테이너터미널에 접안한 'BOX ENDURANCE'에 선적된 컨테이너를 선박과 연결하는 '라싱' 작업을 하고 있는 인천항운노조원들. 라싱 작업은 화물의 파손을 막고 선박의 운항 안전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며, 컨테이너 선 뿐 아니라 다른 화물을 실은 선박도 라싱작업이 이뤄져야 출항할 수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8-11-28 정운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8)]인천공회당

인천 송도국제도시 센트럴파크 인근의 인천도시역사관이 1년 전 내부 리모델링 후 현재의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인천도시역사관은 2009년 인천세계도시축전 당시 '인천도시계획관'으로 개관했으며, 얼마 후 관명을 변경해 '컴팩스마트시티'로 운영되다가 2014년 인천시립박물관에 인수됐다. 2017년 12월 인천의 도시 역사와 발전과정을 담는 공간으로 거듭난다는 의미에서 현재의 이름을 달고 시민을 맞이하고 있다. 인천시티투어 버스의 출발지에 면해 있는 인천도시역사관은 전체적인 전시 구성을 크게 1층 근대 도시관, 2층 현대 도시관, 3층 도시 생활관으로 설정했다.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1945년 광복까지 인천의 도시 성격과 공간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볼 수 있는 1층 전시관 한 쪽에선 20세기 초반의 인천 중심가를 만날 수 있다. 전시관에선 모형으로 제작된 당시 건물들 볼 수 있는데, 3개월 여에 걸쳐 붉은 벽돌 모형을 세심하게 구현했다는 '인천공회당(仁川公會堂)'이 단연 눈길을 끌었다. 모형 앞에 설치된 안내문에 '인천공회당'에 대한 설명이 이같이 되어 있다. 1914년 부제(府制) 실시와 함께 각국의 조계가 폐지됨에 따라 인천에 살고 있던 인천일본거류민단은 해체수순을 밟게 되었다. 현재 중구청 인근에 있던 거류민단 사무소는 공회당으로 용도를 바꾸었고, 일본인들을 위한 문화시설, 집회장소로 이용되었다. 1923년 인천공회당은 홍예문 부근에 신축된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이전했다. 이 건물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남쪽 중앙의 현관에는 인천공회당이라는 간판을 걸었고 홍예문 길에 면한 건물 좌측으로 또 다른 문을 내어 인천상공회의소의 입구로 사용하였다. 그 후 인천공회당에서 개항 50주년 기념 축하회, 인천주류품평회, 인천시민대회 등이 개최되었다. 광복 후 한국전쟁으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고, 1957년 그 자리에 시민관이 들어섰다. 건물 개보수 후 지금은 인성여고에서 다목적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23년, 홍예문 부근 2층 붉은벽돌 건물 신축 6·25때 일부 소실, 現 인성여고 다목적관 사용 영화상영·무도회 등 요즘 '문화예술회관' 역할 현재 홍예문에서 인천항 쪽으로 100m 정도 내려오면 왼편에 인성여고 다목적관을 볼 수 있는데 그 자리(인천 중구 송학동3가)가 인천공회당이 있던 곳이었다. 1899년 경인선 철도가 개통하면서 제물포역(현 인천역)과 축현역(현 동인천역)이 개설됐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인천에서 조계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본격적으로 영역을 넓혀 간다. 그 창구가 1908년 건립된 아치형 터널인 홍예문이었다. 홍예문은 조계지에서 축현역과 만석동으로 오가는 가장 짧은 통로가 됐다. 홍예문의 처음 이름은 혈문(穴門)이었다. 때문에 그 길을 '혈문통'이라고 불렀다. 유동 인구가 많았던 혈문통에 인천공회당과 상공회의소 신축 건물이 자리했음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당시 건물 남측에는 인천경찰서가 있었다. 인천공회당 신축 전 개항장 조계지 의회격인 신동공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붉은 벽돌로 이뤄진 2층 규모의 인천공회당이 신축 이전한 것이다. 인천공회당에선 영화상영과 연주회, 무도회를 비롯해 어린이날 행사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문화 이벤트들이 열렸다. 요즘으로 따지면 문화예술회관 혹은 시민회관의 역할을 한 셈이다. 1926년 6월 18일자 동아일보에선 인천 영화학교가 인천공회당에서 운동장 확장비용을 보충하기 위해 교육 강연과 음악회를 열기로 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같은 신문 1927년 4월 7일자와 1933년 11월 21일자에는 각각 인천고려체육회 주최 음악무도회 개최와 현제명 독주 및 4중창단 연주 소식을 게재했다. 또한, 각종 근대음악사 자료에는 홍난파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운 박종성이 인천공회당과 내리교회 등에서 여러 차례 연주회를 개최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일본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만주에서 성악을 전공한 원종철이 1940년 인천공회당에서 독창회를 갖고 1년 후에는 독주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인천공회당이 보다 각별한 장소로 기억되는 이유는 해방 후인 1947년에 열린 인천관현악단 창단 연주회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케스트라인 고려교향악단(서울시립교향악단의 모체)의 1945년 창립 이전 우리나라에는 소규모 관현악과 관악 협주 활동이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인천관현악단은 고려교향악단과 불과 2년 터울을 두고 창단한 것이다. 서양음악의 관문 역할을 한 인천의 선진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해방후 1947년 인천관현악단 창단연주회 열어 1974년까지 시민관… '아트센터 인천' 이어져 인천관현악단은 김기룡 단장과 박수득 악장을 중심으로 현악과 관악, 타악 주자 23명으로 구성된 인천 최초의 오케스트라였다. 한국전쟁 발발로 오랜 기간 활동이 이어지진 못했지만, 1966년 창단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태로서의 의미를 띤다. 한국전쟁은 인천공회당도 역사 속의 장소로 바꿔놨다. 휴전 이후 1957년 그 자리에 1천여석 규모의 '인천시민관'이 들어선 것이다. 시민관에선 콘서트를 비롯해 연극, 쇼, 영화 상영, 웅변대회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렸다. 시민관이 개관한 지 10여년이 지나면서, 시설 노후화가 진행됐다. 때문에 1974년 주안에 문을 여는 '인천시민회관'에 본연의 임무를 넘기고 학교 시설로 바뀌게 된다. 시민회관은 문화예술회관과 올해 개관한 아트센터 인천으로 이어진다. 인천도시역사관에서 만난 배성수 관장은 "관련 사료의 부재로 인해 인천공회당의 내부 공간이 어떻게 나뉘었는지 알 수 없어서 아쉽다"면서 "자료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2층 창문이 1층 창문에 비해 현격히 큰 걸로 봤을 때, 1층이 사무 공간이고 2층이 강당 형태의 공간이 아니었을까 유추해 볼 따름"이라고 말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인천공회당 모습(1923년). /인천 화도진도서관 제공인천공회당에서 열린 공연을 다룬 옛 동아일보 기사. / 인천 합창의 궤적 전 도록 발췌인천도시역사관에 전시된 인천공회당 모형.인천공회당에서 열린 공연을 다룬 옛 동아일보 기사. / 인천 합창의 궤적 전 도록 발췌

2018-11-22 김영준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4]인천항운노조

개항기 인천항으로 몰려든 부두 노동자들별다른 장비는 커녕 일자리 불안정 시달려항운노조 시초 '모군청' 조합해 취업 주선인천항운노동조합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동조합'에 그치지 않는다. 130여 년 인천항의 역사를 함께한 주역이자, 지금의 인천항을 있게 한 역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변한 장비 하나 없던 시절 부두 노동자들은 맨몸으로 항을 드나드는 짐을 날랐다. 일제강점기엔 항일 운동에 참여했고, 산업화 시대에는 인천지역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2000년 이후에는 기계화, 상용화(항만 인력 공급 체제 개편), 내항 통합 등의 고비를 극복하며 인천항 격동의 시기마다 온몸으로 맞섰다.우리나라에 부두 노동자가 처음 나타난 건 '개항기'다. 농촌에서 땅 한 평 없어 빌어먹기도 어려웠던 사람들이 '인천 드림'을 위해 제물포로 몰려들면서다. 이들은 처음에 어민, 소농민 등 일시적인 노동에 종사했다. 항만 물동량이 많아지면서 상시적 노동이 필요하게 되자 이들은 부두 노동자가 됐다. 처음에는 화주가 직접 고용하는 방식이었다. 부두 노동자 특성상 일정하지 않은 작업 시간과 작업량으로 안정적인 노동 공급이 어려워지자 한국인 하역원은 중구 내동에 '모군청(募軍廳)'이라는 하역조합을 꾸려 노동자의 취업을 주선했다. 이 하역조합이 항운노조의 시초다. 조합은 개항 이후부터 2007년까지 정부의 관리하에 독점적 노무공급체제를 인정받으며 성장했다.인천 부두 노동자의 노동쟁의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부터 본격화했다. 일제의 침탈이 심해지면서 부두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일본의 군수 물자와 수탈 물자를 하역했다. 강경애(1907~1943) 소설 '인간문제'를 보면 당시 인천항 부두 노동자들의 육체노동은 '고통'에 가까웠다."짐이 와르르하고 부두에 쏟아졌다. 짐에서 떨어지는 먼지며 바람결에 불어오는 먼지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몸부림치는 바람에 가라앉지를 못하고 공중에 뿌옇게 떠돌았다. 사람을 달달 볶아 죽이고야 말려는 듯한 지독한 볕은 신철의 피부를 벗기는 듯했다."일제 수탈시기 파업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산업화 접어들면서 고용대책 등 관철시켜내항 TOC 통합·경쟁 심화로 줄어든 입지정부·정치권 접촉하며 시설투자 활로모색시대흐름 맞춰 성장 "인천항의 주인" 자부부두 노동자들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1926년부터 1936년까지 수차례에 거쳐 파업을 벌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쟁의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들은 민족적 차별에 대항하고 일제의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부두 노동자들은 광복 이후 미 군정, 한국전쟁, 4·19혁명 등의 역사적 혼란기에서도 하역 작업을 계속하며 노동조합을 정비해 나갔다. 1945년 10월 부두노동자들이 '인천자유노동조합'을 창설했을 당시 조합에 가입한 노동자는 6천여 명에 달했다. 운송 사업을 중심으로 한 '인천부두노동조합'이 따로 설립되기도 했다. 이들 노조는 분열과 통합을 되풀이하며 세를 키워 나가다가 항만과 운수 분야 노동자들을 통합한 인천항운노조를 1981년 8월 설립했다. 1998년 경인항운노조로 명칭을 바꿨다가 2004년 인천항운노조로 다시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항운노조는 '기계'와의 투쟁을 시작했다. 1966년 인천항에 지게차와 크레인이 대량 도입되면서 중량화물 하역 작업이 기계화됐다. 1968년에는 마그넷(자석) 사용으로 고철, 철제류 작업도 기계화됐다. 항만 하역의 기계화는 노동조합의 존속을 위협했다.1978년 부두 노동자로 처음 조합에 들어온 이해우(69) 인천항운노조 위원장은 "당시 맨몸으로 일할 때는 어떤 물건이든 어깨에 지고 메는 게 전부였다. 석탄도 실제로 삽으로 떠서 포대에 담았다. 만석부두에 가면 속옷만 입고 막걸리와 원당(설탕)을 먹으며 일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는데 모두 부두 노동자들이었다"고 했다. 이어 "모든 게 기계화가 되면서 몸은 편해졌지만, 이후에는 실직의 두려움에 직면해야 했다"고 했다. 노조는 '근로자에 대한 대책 없는 기계화'를 반대하고 나섰다.대표적인 사건은 1974년 사료 도매업체 대한싸이로주식회사가 인천항에 양곡 전용부두와 진공 흡입식 하역기 2기를 완공한 것이었다. 1995년 인천항운노조가 발간한 '인천항변천사'를 보면, 당시 인천항의 양곡 하역량은 20~30%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합원들의 대량 실직은 불 보듯 뻔했다. 인천지부는 '대한싸이로에서 필요한 노무직은 조합원으로 둘 것', '작업 단계에서 감축한 분야는 보상할 것' 등의 대책을 강력하게 요구해 모두 관철했다.오광민 인천항운노조 쟁의부장은 "기계화로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기계로 인해 손상되는 노동의 대가를 노조의 강력한 요구로 보상받아 실제로 잘리거나 임금이 감소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며 "그럼에도 컨테이너 도입 등 기계화의 큰 흐름을 이길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노조는 1988년 인항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앞장섰다. 당시 노조 간부들이 "부두 노동자의 못 배운 한(恨)을 풀어보자"며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전국 항운노조 중 학교를 설립한 곳은 인천이 처음이다.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노조위원장이 인항학원 재단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다. 조합원 자녀들에 대한 복리 후생도 아끼지 않았다. 일찍이 고등학생과 대학생 자녀의 학비를 지원했다. 1978년부터 최근까지 1만여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2007년에는 '항운노조 상용화 개편'이라는 큰 고비를 맞는다. 상용화 개편이란 기존 조합 소속 일용직 인력을 하역 회사별로 상시 고용하도록 항만 인력 공급 체제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노조 채용 비리 재발 방지, 항만 환경 개선 등을 위해 정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상용화 개편을 추진해왔다. 지난 100여 년간 부두 노동자를 공급해왔던 항운노조의 독점 고용권이 모두 깨지는 순간이었다.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하역 노동자 1천700여 명 중 48%가 희망퇴직을 신청해 노조가 철회 기간을 두기도 했다. 정부가 희망퇴직 시 생계지원금을 최대 1억7천만원까지 줬기 때문이다. 2천800여 명에 달했던 전체 조합원 수는 1천 명 초반대로 추락했다. 노조는 "인천항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한발 양보해 합의를 이뤘다.최근 인천항을 두고 노조에서는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내항 TOC(부두운영사) 통합으로 부두 노동자 수가 대폭 줄어들게 될 처지인 데다, 물동량 유지·확대를 위해 평택항 및 부산항과도 경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이에 항운노조는 '항만 배후단지 조성을 위한 정부 지원', '부두 임대료 인하 촉구' 등 인천항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정부와 기업 관계자, 국회의원 등을 만나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이해우 위원장은 "인천항이 수도권이기 때문에 다른 항보다 비용이 비쌀 수밖에 없다. 인천항만공사는 시설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항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그는 "인천항운노조는 인천항의 주인"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이어 "격동의 인천항 역사와 궤를 함께하며 인천항운노조는 다른 지역 노조보다 더 빨리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변화하며 성장했다"면서 "앞으로도 조합원들이 주인 의식을 갖고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노조의 목표"라고 했다.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항운노조는 지역 내 조합원들의 후생복지시설 마련을 위해 정부에 복지회관 건립을 건의, 2006년 '근로자의집'을 개관했다. 신협, 체력단련실, 인천항운노조 사무실, 휴게실 등의 시설을 갖췄다.1903년 제물포항 건어물 하역장에서 건어물을 나르고 있는 부두노동자들. /인천항운노조 제공1930년대 인천항에서 부두노동자들이 미곡 수출품을 나르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1933년 가마니를 수송하던 우마차. /인천항운노조 제공1960년대 인천항에 하역된 밀가루 포대를 소형차에 싣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1970년대 부두 내 적재한 화물을 나르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

2018-11-21 윤설아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7)]선교와 음악(下)

여성대상 선교 위해 제물포 찾은 마거릿벵겔126년전 국내 첫 서구식 학교 '영화학당' 세워탄압 당하던 우리 음악 대신 찬송가 등 교육이를 시작으로 애국가·계몽가요까지 가르쳐졸업생 김영의, 국내 최고 피아니스트로 성장개항 이후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면서 초기에는 이 두 곳이 음악 활동의 중심지였다. 인천 역시 교회와 학교가 음악 활동의 중심지였는데, 다른 도시와 차이점이 있다면 외국 군함의 입항과 함께 항구에서 울려 퍼지는 군악대의 연주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우선 '교회'는 서양음악의 보급 및 활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선교사'는 서양음악 전달자 및 음악교사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찬송가의 반주 악기인 '풍금'은 서양의 평균율이라는 음감각과 화음감이라는 음감을 심어주었고, 교회에서 찬송가를 익힌 신자들은 후에 서양음악 애호가와 청중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인천근현대문화예술사연구>(인천문화재단 刊)에 수록된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서양음악의 수용과 인천' 중에서1892년 당시 24세였던 미북감리교회 여선교사 마거릿 벵겔(Magaret J. Bengel)은 제물포(인천) 여성 선교를 위해 담당 선교사로 파견됐다. 제1대 전도부인(한국 개신교 초기의 유급 여성 사역자)으로 황해도 곡산 출신의 미망인 백헬렌도 파견돼 벵겔과 함께 본격적인 여성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두 차례 서양의 침략을 겪은 인천 사람들은 미국에서 온 전도사들이 전파하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백헬렌은 가정에서 필요한 물건을 싸게 팔면서 여인들의 인심을 얻는 방식으로 전도를 시작했다.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여성 대부분은 글자를 몰랐다. 이에 벵겔은 전도부인 강세실리아에게 한글과 찬미가를 가르치도록 했다. 벵겔은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온 아이들이 어깨너머로 배운 한글을 엄마보다 더 빨리 깨우치고, 찬미가도 잘 부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로 인해, 아이들만을 위한 교육 선교를 구상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인 인천 영화학당이 126년 전 문을 열었다.영화학당의 개교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위한 근대식 교육기관의 출발을 의미하며, 최초로 음악 교육을 실시한 곳이라는 의미도 지닌다.미션스쿨인 배재학당(1885년)과 이화학당, 경신학교(1886년) 설립에 이어 6년 후 인천 영화학당이 개교한 것이다.<영화 백년사(1892~1992)>(이성삼 박사 집필·영화학원 刊)에 따르면, 1890년 한국에 온 벵겔은 이화학당의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여사의 총애를 받아 1891년부터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성악과 오르간을 가르쳤는데, 주로 성악을 가르쳤다고 한다.이처럼 음악적 소양이 풍부했던 벵겔이 1892년 영화학당 설립 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음악 교육을 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영화 백년사>에는 아펜젤러가 쓴 '대한그리스도인회보' 1900년 7월 18일자를 인용해 그해 6월 23일 개최된 영화학당 방학식 모습을 묘사한 구절이 있다. 이 글은 당시 방학식이 폐회 찬미를 부르면서 마무리 되었음을 알려준다."(전략) … 이와 같이 모든 학도들은 이 말을 기억하여 두 달 동안 쉬일 때에도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고 미귀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오직 지극히 보배로운 진주를 사랑하며 잘 지니고 있기를 구주님의 이름으로 바라노라 하시고 폐회 찬미를 부르고 방학식을 마쳤다."우리 교회사와 근대 음악사 관련 자료에도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는 '창가'라는 이름으로 찬송가 교육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풍금 반주로 찬송가를 가르쳤는데, 이를 시작으로 점차 나라를 사랑하자는 내용의 '애국가'를 비롯해 자주독립의 정신과 자유민권 사상을 고취시키는 '계몽가요', 학업에 열중하고 실력을 배양해 나라를 구하자는 내용의 '교육창가' 등을 가르쳤다.1910년 8월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우리 생활 속 자유를 완전히 박탈했다.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앗아간 것이다.1917년 3대 헤스(M. I. Hess) 교장은 부설 영화유치원을 설립했다. 1914년 이화유치원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유치원이었다.<영화 백년사>에 실린 유치원 보육과목과정을 보면 1년 차 어린이들은 16시수로, 2년 차는 18시수(이상 1주일 단위)로 짜여졌다. 이 중 창가는 1·2년 차 각각 3시수로, 여타 과목에 비해 가장 많은 시수를 배정 받았다.당시 영화유치원에서 창가 과목을 통해 어떤 교육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의 식민지 통치자들은 의도적으로 우리 음악을 탄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찬송가와 함께 일제가 허용한 서구 음악을 교육했을 것으로 추측된다.영화유치원과 영화학당이 서울 지역 선교사들이 지은 학교들과 활발하게 교류한 부분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앞서 언급했듯이 벵겔은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치다가 인천에 와서 영화학당을 설립했다. 이후에도 서울의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경신학교 등과 활발한 소통을 했고, 영화학당 출신들이 이곳으로 많이 진학했다.인천 출신으로, 우리나라 첫 미국 줄리어드 음대에서 유학한 피아니스트 김영의(1908~1986)는 영화학당 출신이다. 김영의는 영화학당 졸업 후 서울 이화학당,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했다.어린시절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접한 음악과 스포츠 등이 20세기 중반 우리나라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을 것이다.화창한 오후에 인천 동구 창영동의 영화초등학교를 찾았다. 언제나처럼 1910년 3월에 준공한 영화초교 본관동(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9호)에 눈길이 갔다.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는 이 건물은 학생들의 예배와 체육 활동을 위한 강당으로 사용됐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930년대 말 건물 출입구 돌출 부분을 증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건물 내부 구조는 'ㅁ자' 형 평면 형태로 설계됐다. 요즘 대부분 학교가 획일적인 일자형 구조로 지어진 점을 감안하면 신선한 시도였다.하상교 영화초교 교장은 "우리나라 교회와 교육 등 중요한 의미를 갖는 옛 본관 건물을 박물관 형태로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며 "순례객들도 많이 찾는 만큼, 인천시와 협의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영화학당 설립 당시 교직원들(왼쪽부터 강세실리아, 마거릿 벵겔, 백헬렌). /인천영화초등학교 제공·경인일보DB1911년에 세워진 영화초등학교 본관의 옛 모습. /인천영화초등학교 제공·경인일보DB1930년대 말 건물 출입구 돌출 부분을 증축한 본관 건물 . /인천영화초등학교 제공·경인일보DB

2018-11-15 김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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