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지만 포기하긴 너무 젊었다… '황소' 잡은 힘센여자 연성중 1학년때 코치 권유로 유도 시작인천체고 입학후 두각… '제주컵' 정상"희망 크게 안보여" 졸업후 운동 그만둬사촌오빠 '금강황제' 임태혁 "한번 해봐"진로 고민하던중 씨름으로 종목 전환2021년 추석 무궁화 장사 '황소 트로피'지난해 다시 정상… "천하장사가 목표"라이벌 이다현 선수와 '쌍다대전' 유명"롤모델은 임수정, 제겐 영웅 같은 분"여자씨름 활성화 소망 "유소년부 없어"아직 20대 나이 "인천은 친구가 있는 곳"지난해 7월26일 충북 제천체육관에서 열린 '2023 위더스배 제천의병장사 씨름대회' 여자부 무궁화급(80㎏ 이하) 장사결정전은 '쌍다대전'으로 치러졌다. 괴산군청 소속 김다영은 '우승 후보'인 거제시청 이다현과 대결을 펼쳤다. 김다영은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이다현을 되치기로 제압하고 황소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021년 추석장사 씨름대회 무궁화급에서 꽃가마에 오른 뒤 두 번째 장사 타이틀이었다. 남들보다 훨씬 늦은 나이에 씨름에 입문한 김다영은 각고의 노력 끝에 전성기를 맞았다. 아임프롬인천 스물네 번째 초대 손님 김다영을 지난 2일 괴산군청 인근 체력단련장에서 만났다.여자 씨름선수 김다영은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렸을 때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가 운동선수를 하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소녀였다. 인천연성중학교 1학년 때 엄마를 따라 찾아간 체육관에서 유도를 처음 배웠다. 운동선수로서 김다영의 재능을 알아본 연성중 유도코치의 권유로 학교 유도부에 입부했다. 김다영은 "코치님이 먹을 것(빠삐코)을 주면서 권유해서 넘어갔다"며 "그때까지만 해도 운동선수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김다영이 입부하자마자 유도부 1년 일정 중 가장 소화하기 힘든 여름 전지훈련이 시작됐다. 동기들이 "왜 지금 유도를 시작했느냐"고 말할 정도로 1주일간의 전지훈련은 고됐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게 유도선수 김다영의 진로가 시작됐다. 성과가 바로 나오지는 않았다. "여러 시합에 나가긴 했지만 중학교 때는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고 했다.인천체육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김다영은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인천체고는 인천을 대표하는 공립체육고등학교다. 1976년 개교 당시에는 인천 미추홀구(당시 남구) 선인학원 내 인천체육고등학교였다가 1994년 공립화됐다. 2012년 현재 위치인 청라국제도시로 이전했다. 육상, 수영, 다이빙, 복싱, 레슬링, 유도, 사격, 태권도, 양궁, 역도 등 다양한 분야 선수들을 육성하고 있다. 인천체고 유도부는 교내에서도 다른 종목과 비교해 규모도 크고 전국대회에서도 지속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둬 '유도 명문'으로 불린다.중학교 시절 1승도 따내지 못한 김다영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인 2015년 11월 제주 한라체육관에서 열린 '제15회 제주컵 유도대회' 여고부 70kg급에서 정상에 올랐다. "국가대표가 돼 태릉선수촌에서 운동하는 꿈"을 이루게 될 생각에 부풀었다. 하지만 김다영에게 '엘리트 유도선수'의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유도를 특별하게 잘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미래에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도 크지 않아" 인천체고를 졸업한 뒤 유도복을 벗었다.유도를 그만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 가족들이 여자 씨름을 권유했다. '금강황제'로 불리는 씨름선수 임태혁(수원시청)이 김다영의 사촌 오빠다. 그는 "사촌 오빠가 씨름선수였기 때문에 너도 씨름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엄마가 권유했다"며 "당시엔 유도는 하긴 했지만 '여자가 무슨 씨름이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처음엔 거절했다"고 했다.가족들이 여러 차례 권유하면서 '씨름'을 시작하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과 함께 충남 공주에서 생활하고 있었을 때다. 공주신관초등학교 씨름부 코치 도움을 받아 씨름을 익혔다.씨름은 모두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스포츠이자 민속놀이다. 원시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조선시대까지 가장 활성화된 스포츠로 전해진다. 현대에 들어서도 씨름은 민족 고유의 스포츠로 각광을 받았다. 이만기와 강호동 등 정상급 씨름선수는 전 국민의 스타였다. 1990년대 이후 인기가 시들해졌으나, 여전히 명절 때에는 씨름대회가 TV로 생중계된다. 이는 모두 남자 씨름에 해당된다.여자 씨름이 본격화한 것은 2010년대부터다. 대한씨름협회에 따르면 국내 첫 여자 씨름단은 2011년에 창단한 구례군청 여자 씨름단이다. 이후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여자 씨름단을 창단하면서 여자 씨름이 활성화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현재는 김다영이 소속된 괴산군청을 포함해 모두 7개의 씨름단이 운영되고 있다. 김다영이 씨름선수로 활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시기와 맞물린 영향도 있다.그는 씨름을 하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못다 이룬 꿈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의 롤모델은 여자 씨름 천하장사 임수정(영동군청)이다.김다영은 "씨름을 시작할 때 정상의 자리에 오랫동안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아마 유도를 하면서 이루지 못한 걸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임수정 선수가 제 롤모델"이라며 "처음 씨름을 시작하면서 임수정 선수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저에게는 영웅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씨름선수가 되면서 가졌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고된 훈련을 견뎌야 했다. 씨름 연습도 유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유도선수로 활동할 때 가장 많이 했던 것은 체력 훈련이었는데, 씨름도 체력을 높이기 위한 훈련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그는 "체력 훈련과 샅바잡기 등 기본기 연습을 가장 많이 한다"고 설명했다.오전과 오후 2시간씩, 야간에 1시간30분 매일 연습한다는 그는 씨름을 시작한 5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정상급 선수로 올라섰다. 2021년 무궁화급 장사에 올랐고, 지난해에도 장사 자리를 꿰차면서 정상급 선수가 됐다. 그는 같은 급의 이다현 선수를 라이벌로 생각한다. 이다현도 무궁화급 장사 자리에 오른 경험이 있다.그는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던 이다현 선수를 이기고 장사에 올랐을 때가 가장 기억이 남는다"며 "앞으로도 계속 승부를 겨루면 좋겠고, 또 이기고 싶은 선수"라고 말했다.그는 운동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운동하기에 좋은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에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지만, 타고난 신체 조건 덕을 입고 있다고 했다. 김다영은 다른 선수들보다 하체 힘과 탄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김다영은 "씨름은 노력과 재능 모두가 필요한 종목이라고 생각한다"며 "저는 꾸준히 노력하고 있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느낄 때가 있다"고 했다.여자 씨름 경기 시간은 1분이다. 그는 선수 간 승부는 경기가 시작하기 전 모래판에 올라올 때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김다영은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기싸움이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있다"며 "저는 상대 선수의 행동 등을 신경쓰지 않는다. 제가 준비했던 것을 해나가는 것이 저만의 기싸움 방식"이라고 했다.씨름 경기 시간은 1분이지만 승부는 찰나에 갈린다. 김다영은 "승자가 되거나 패자가 되는 건 1초도 되지 않은 시간에 이뤄진다"며 "이러한 점이 재미있고, 씨름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무궁화급 장사에 두 차례 오른 김다영은 전 체급을 아울러 최고의 자리인 천하장사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여자 씨름이 더욱 활성화되기 바라는 마음도 크다.여자 씨름단은 팀당 10명 안팎의 선수가 활동하고 있다. 세 개 체급이 있기 때문에 체급별로는 한 팀당 3~4명에 불과하다. 7개 팀이 모두 모여도 3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선수층이 얇다는 점은 종목이 활성화되는 데 제약으로 작용한다. 그는 "선수가 더 많아지고, 더 박진감 있는 경기를 펼치게 된다면 여자 씨름에 대한 관심도 많아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김다영이 소속된 괴산군청 씨름단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특히 여자 씨름은 초·중·고 씨름부가 한 곳도 없다. 이 때문에 괴산군청 씨름단 막내는 고등학생이다. 김다영은 "씨름은 우리나라 고유 종목인데, 여자 씨름은 유소년 씨름부가 없어 안타깝다"고 했다. 우리나라엔 용인대·중원대·영남대 등 3개 대학에서 여자 씨름부를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그는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고,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도 아직 인천에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인천을 찾기도 한다. 그에게 인천은 '태어나고 자란 곳'이자 '운동선수로서 첫발을 뗀 곳'이다.20대 중반인 그에게 인천은 '친구들과 만나서 노는 곳'이라는 기억이 강했다. 김다영은 "인천에 종종 가게 되는데, 대부분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했다. 특히 인천체고 다닐 때 친했던 친구들과도 자주 만나는데 대부분 선수로 활동하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김다영은 "인천은 제 어린 시절을 모두 보냈던 추억이 많은 고향"이라며 "지금 인천에 살지는 않지만, 새롭게 만나는 사람이 '인천사람'이라고 하면 친해지고 싶다. 인천에 대한 자부심이 큰 인천사람"이라고 자신을 알리기도 했다.인천 출신 20대 청년 김다영의 꿈은 여자씨름 천하장사를 거쳐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애견카페'를 운영하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김다영 씨름선수.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김다영 선수의 초등학교 시절. 그는 이때만 해도 운동선수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김다영 제공인천연성중학교.중학교 때 유도를 시작한 김다영은 인천체육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김다영 제공김다영 씨름선수.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김다영은 지난해 열린 제천의병장사씨름대회에서 라이벌 이다현을 꺾고 무궁화급 장사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김다영 제공
'무궁화 정상급' 괴산군청 김다영 대한씨름협회 소속 여자 씨름단 6곳에 48명의 선수가 등록돼 있다. 2011년 9월 구례군청반달곰씨름단을 시작으로 거제시청(2017년), 안산시청(2018년), 화성시청(2018년)에 이어 영동군청과 괴산군청이 2021년 1월부터 여자씨름단을 운영한다. 괴산군청 소속 김다영(24·사진) 선수는 늦깎이 씨름선수로 2019년 화성시청씨름단에 입단하면서 데뷔했다. 본래 유도 국가대표를 꿈꾸던 그는 성인이 된 후 씨름으로 전향했고, 무궁화급에서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했다.아임프롬인천 스물네 번째 손님 김다영은 인천 출생이다. 인천연성중 1학년 때 유도를 시작했고, 인천체고 유도부에서 활동했다. 씨름 선수가 된 그의 목표는 전 체급 통합 장사인 '천하장사'가 되는 것이다. 유도 국가대표의 꿈을 씨름에서 천하장사로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김다영의 또 다른 바람은 '여자 씨름 활성화'다. 여자 씨름은 중고교 운동부가 없어 선수층이 얇다. 명절 때마다 TV 중계가 이뤄지는 남자 씨름과 비교하면 여자 씨름에 대한 관심은 낮다. 김다영은 "그래도 대회 때는 50명 정도 관람객이 오는 편인데, 앞으로는 더 많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김다영은 괴산에 살고 있다. 고향 친구를 만나러 종종 인천을 찾는다. 인천으로 향하는 길은 항상 즐겁다. 모래판에서는 어떤 선수에게도 쉬이 밀리지 않는 장사이지만, 친구들은 만나면 서로 진로 고민을 나누는 평범한 20대 청년이기도 하다. 인천체고에서 만난 친구들 중 현재까지 선수로 활동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고 한다.김다영의 바람은 현재 내딛고 있는 모래판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또 그 모래판을 더욱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서른이 되기 전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지도자로서 제자를 육성하는 미래도 꿈꾸고 있다. → 관련기사 (늦었지만 포기하긴 너무 젊었다… '황소' 잡은 힘센여자) /정운기자 jw33@kyeongin.com
2월 취임… '혁신 드라이브' 건다 두바이·홍콩 뛰어넘는 '2040프로젝트' 찾아가는 IR·타깃기업 투자 유치 집중'면적 큰' 강화남단 하반기 추가지정 신청'아이코어시티'사업 고도제한 해결 협의연동형 개발 높은 주거단지 비율은 '단점'전략산업 '초점' 조직 강화… 새 융합모델한상네트워크 관계 강화 'FDI 6억달러' 목표송도 5동 편의시설 부족 빠른 시일내 해결지난 2월 취임한 윤원석 인천경제자유구역청장이 투자유치와 각종 개발 프로젝트 등 경제자유구역 전반에 걸친 업무 혁신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집무실에서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울 정도로 시간을 쪼개가며 업무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윤 청장은 전략산업 중심 투자유치와 업무혁신을 통해 성과를 극대화한다는 방침이다. 아파트를 짓고 그 이익으로 기반 인프라를 채우는 개발연동 중심의 기존 인천경제자유구역 발전 전략을 과감히 탈피, 기업·시민이 모두 체감할 수 있는 인천경제자유구역만의 투자유치 환경과 정주 여건을 만든다는 게 그의 목표다. 민간기업 출신으로 처음 인천경제청장에 임명된 그는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고객중심', '성과중심', '사람중심'의 3대 경영방침으로 경제자유구역 전반에 걸친 혁신 작업에 드라이브를 걸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윤원석 청장과의 일문일답.-취임 한 달이 넘었는데 소회는."지난 2월 20일 취임 이후 주요 업무보고, 중앙부처·주요 사업현장·유관기관 방문 등을 통해 적극 소통하며 현안사업 파악에 집중했다. 내부적으로는 인천경제자유구역의 미래 도약을 견인할 '인천경제자유구역 비전·전략 2040프로젝트' 수립에 총력을 쏟을 계획이다. 외부적으로는 앞으로 인천경제자유구역을 두바이와 홍콩을 넘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글로벌 도시를 목표로 찾아가는 투자 IR과 타깃 기업의 투자 유치에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인천경제자유구역 현안 가운데 가장 시급한 과제는."민선8기 핵심사업인 '뉴홍콩시티'와 '제물포르네상스'의 성공과 인천경제자유구역의 지속가능한 성장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선 경제자유구역 확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투자 수요는 증가하고 있지만 공급할 용지는 부족한 실정이다. 현재 인천항 내항 등의 경제자유구역 추가 지정을 위한 용역이 진행되고 있고, 그 중 가장 면적이 큰 강화남단은 올해 하반기 중 정부에 추가 지정 신청을 할 계획이다. 확대되는 경제자유구역이 첨단산업, 미래모빌리티, 문화관광, 그린바이오, 자유도시라는 콘셉트로 인천의 성장 동력이 될 수 있게 하겠다.이와 함께 송도·영종·청라에서 진행 중인 대형 프로젝트들이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겠다. 송도 6·8공구를 개발하는 '아이코어시티' 사업은 현재 관계 부처와 고도제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총력을 쏟고 있고, 동시에 국제공모 추진 방안을 민간 사업자와 협의하고 있다."-경제자유구역 확대 필요성은."인천경제자유구역의 개발률이 90%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인천이 세계 도시로 도약하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선 경제자유구역 확대가 절실하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GDP가 우리나라의 2배에 달하며 실리콘밸리(IT), LA(문화콘텐츠), 샌디에이고(바이오) 등 곳곳에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클러스터가 조성돼 있다. 인천경제자유구역도 규모의 경제 측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부지를 추가로 확보해야 미래 전략산업 클러스터 조성 등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본다. 강화 남단, 인천항 내항 등에 대한 경제자유구역 신규 지정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를 위해 역량을 집중하겠다."-그간 개발연동형으로 진행돼 폐해가 많았던 인천경제자유구역의 새로운 발전 전략은."그간 아파트 등 주거시설 조성을 통해 얻은 이익으로 공익 인프라를 연계 개발하는 연동개발을 통해 인천경제자유구역이 성장했다. 반면 연동형 개발사업으로 경제자유구역 내 주거단지 비율이 너무 높다는 지적이 계속돼 왔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이 지정된 지 20년이 지난 만큼 이제는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라는 경제자유구역의 핵심 기능을 제대로 살리고 명실상부한 글로벌 도시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로벌 앵커기업과 밸류체인을 연계한 핵심 전략산업 유치에 집중하는 것은 물론 투자유치를 위한 역량과 조직을 강화, 연동형 개발과 투자유치를 융합하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 계획이다."-올해 목표로 삼은 FDI(외국인직접투자) 6억 달러 달성 전략은 무엇인가."FDI의 경우 지난해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국내외 투자유치 환경이 위축된 상황에서도 전년 대비 10.7% 증가한 4억3천200만 달러를 달성했다. 올해에는 타깃 첨단 글로벌 기업 유치 강화와 탈중국 공급사슬망 전환기업 유치, 글로벌 투자 IR확대 전략 등 신규 사업을 통해 FDI 6억달러 달성에 총력을 쏟겠다. 코트라, 월드옥타 등 한상네트워크와의 관계 강화를 통해 투자유치 역량도 확대할 계획이다."-인천경제청 내부 조직 경쟁력 강화 방안은."8대 청장으로 취임하면서 3대 경영방침으로 고객, 성과, 사람 중심을 내세웠으며 이는 모두 조직 경쟁력과 연관돼 있다. 특히 고갱중심 경영은 경제자유구역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외국인 투자기업과 인천시민을 최우선에 두고 일하겠다는 의미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내부 고객인 공직자들이 중요하며 이는 조직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다수 공직자들의 이탈 원인으로 낮은 급여를 꼽지만 오히려 경직된 조직문화나 성과와 보상이 연계되지 않는 시스템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협업하고 열심히 일하면 대우받을 수 있는 성과와 보상이 연계된 시스템을 구축해 이를 통해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겠다."-지난해 논란이 됐던 송도국제도시 R2부지 개발 해법은."R2부지 프로젝트는 민간사업자의 제안을 받아 K-POP 문화도시 조성과 관련한 개발 사업을 하려다 백지화된 것으로 알고 있다. R2부지는 인천도시공사 소유로 개발방향, 도입시설 등 앞으로의 방향 설정을 위해 인천도시공사와 TF(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실무협의를 진행할 계획이다. 관계 기관과 주민들의 다양한 의견도 수렴하겠다. 우선 R2부지가 위치해 있는 송도 5동 주민들이 겪고 있는 편의시설(학원, 병원, 마트 등) 부족 문제를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겠다."-최근 카지노 사업이 무산된 골든테라시티(옛 미단시티) 정상화를 위한 방안은."골든테라시티 민간 사업자인 RFKR(중국 푸리그룹 한국법인)과 후속 대책을 협의할 예정이다. 인천경제청을 중심으로 인천시, 인천도시공사와 TF를 구성해 복합리조트 재추진 또는 대체 프로젝트 개발, 앵커 프로젝트 유치 등 앞으로 다각적인 정상화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윤원석 인천경제청장은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략산업 유치 등 경제자유구역 혁신에 총력을 쏟겠다고 밝혔다. /인천경제청 제공
[아임 프롬 인천·(23)] 용현동 유튜버 '궁돌이 홍쌤' 홍현도입니다 용마루서 어린시절… "언덕 집 많았다"경복궁 모습에 매료… '다음 카페' 활동매달 모임… 성인 회원들앞에서 해설도문화재학과 졸업후 건축 전공 석·박사인천시립박물관서 영단주택·사택 조사"다른 지역과 차별성 있는 중요 건축물"서울역사박물관 옮겨 '정동 모형' 고증옛날 사람들 생활 알고싶어 한복 입어홍현도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유튜브 채널 '궁돌이 홍쌤'을 운영하는 크리에이터이기도 하다. 흔치 않은 건축 전공 학예사다.인천 미추홀구 용현동에서 경인전철을 타고 서울 종로구 일대 고궁을 답사하러 다니던 소년 홍현도는 궁궐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따낸 어엿한 전문가로 성장했다. 그의 관심사는 한국 전통 건축의 정점인 궁궐에서 서민·노동자가 살던 인천의 근대 건축으로 확장한다. 이러한 면에서 '나는 인천 출신입니다'라는 주제의 기획 시리즈 스물세 번째 초대 손님으로 '용현동 궁돌이' 홍현도 학예사는 안성맞춤이다. 이번 인터뷰는 지난달 26일 오후 인천 중구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인근 송학동3가 4번지에 있는 1950년대 근대 건축물이면서, 지난해 인천 엽서 문방구로 새롭게 문을 연 '디어프롬'에서 진행했다.홍현도 학예사는 1984년 인천 옛 남구, 지금의 미추홀구 옛시민회관사거리 인근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옹진군 자월면 자월도 출신이고, 어머니는 서울 출생으로 고등학생 무렵 인천 동구 만석동으로 터전을 옮겼다고 한다. 홍 학예사가 3살 때 고인이 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할머니는 연안부두에서 꽃게 도매업을 하고, 용현동 용일시장에서 꽃게를 직접 팔면서 살림을 꾸렸다. 홍현도 학예사 아버지는 아들이 3살 때 대우중공업 경남 창원 사업장에 직장을 얻었다. 가족 모두 창원에 살다가 홍 학예사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인천으로 돌아왔다."창원에 살던 시절 아버지는 인천이 참 좋은 동네였다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아버지는 다시 인천으로, 용현동으로 돌아와 대우자동차 세일즈를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용일초등학교 인근에 살다 용현4동, 그리고 용현2동 용마루라 불린 동네에서 중학교 때부터 쭉 살았습니다."홍현도 학예사 가족의 터전 용현동은 원래 바다를 맞댄 마을이었다. 용현동·학익동 일대 바닷가는 일제강점기 매립돼 염전과 거대한 공장지대로 변했다. 공장 주변으론 임직원 사택과 관영주택 단지가 조성됐다.한국전쟁 시기 조성된 용현동 미군 유류보급소(POL)는 대한석유공사 저유소, SK저유소, SK물류센터였다가 2016년 대단지 아파트가 건설됐다. 대한전선 부지는 대우전자, 대우일렉트로닉스 공장이었다가 도시개발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용현2동과 용현5동 일대 염전지대는 1970년대 후반 LH(한국토지주택공사)의 전신 토지금고가 매입해 처음으로 택지개발사업을 벌였다. 토지금고에서 주택·상업용지를 조성해 지금도 이 일대는 '토지금고'라는 지명이 더 익숙하다."용마루는 일제강점기 때 매립하기 전 해안 경계선이었기 때문에 높은 언덕에 집들이 많았습니다. 아주 오래된 이발소. 그러니까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 쪽에 쪽구들이 있어 그 위에 이불이 있고, 만화책도 놓여 있고, 연탄 난로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은 1970년대에 있었을 법한 구식 이발소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2000년대 초반)까지 이런 이발소에서 스포츠 머리를 깎았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믿질 않아요."홍현도 학예사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동인천역으로 가 경인전철을 타고 서울 경복궁과 주변 고궁을 오갔다. 경복궁에서 열린 중국 국보 전시 소식을 신문에서 접하고 무작정 갔는데, 아름다운 경복궁의 모습에 매료됐다고 한다. 그가 궁궐을 파고든 건 이때부터다.인하대사범대학부속중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에 한국 전통 문화와 관련된 책이 많아 점심시간만 되면 도서관으로 달려가는 게 일과였다. 그러나 궁궐과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소년은 인문계 고등학교가 아닌 인천의 대표적 특성화고교인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중학교 2학년 때 'IMF 사태'(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고 집안 사정이 나빠졌어요. 당시 성적이 아주 우수하지 않은 학생 중에선 인문계 고교에 진학할 수 있음에도 일찍 취업하겠다는 생각에 특성화고를 선택한 친구가 꽤 있었습니다. 저도 그중 하나였어요."인천기계공고 전자기계과 학생이 됐지만, 궁궐 답사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인터넷 시대'가 본격화한 2000년대 초반부터 '프리챌' '다음 카페' '세이클럽' 같은 지금은 추억이 된 온라인 커뮤니티가 활발하게 운영됐다. 홍현도 학예사는 현재까지도 운영되고 있는 다음 카페 '궁궐산책'이란 커뮤니티에 가입해 활동했다. 매달 한 번씩은 주말에 경복궁 등지에서 '정모'(정기 모임)를 했다. 성인 회원들 앞에서 해설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궁궐 공부가 깊어졌다. 고궁을 좋아하는 공고생, 요즘이었다면 '덕후'라 불렸겠다.집안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홍현도 학예사는 다시 대학 진학을 꿈꿀 수 있었다.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관련 분야를 공부했다. 천년 고도 경주에서 대학 생활을 하니 답사는 일상이었다. 다시 고향 인천으로 돌아온 건 대학 3학년 2학기 무렵 인천시립박물관 기간제 연구원으로 뽑히면서다. "1년 반 정도 학교를 더 다녀야 했는데, 다행히 주 4일 근무라서 꼬박 하루는 경주에서 수업을 들었습니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처음에는 전시 보조 업무를 했어요. 중간에 궁궐을 깊이 공부하고 싶어서 경기대학교 건축설계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어요. 시립박물관 유물부에서 일하게 되면서 인천의 근대 건축물 조사를 보조하게 됐고, 그때 인천 개항장 밖의 근대 건축물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게 됐습니다."그렇게 실력을 갈고닦은 홍현도 학예사는 2014년 인천시립박물관의 근현대 주거문화 학술 조사를 맡아 조사보고 제26집 '관영주택과 사택'을 냈다. 인천부(지금의 인천시청)는 중구 도원동과 미추홀구 용현동 등지에 집을 직접 지어 분양했는데, 이를 '부영주택'이라 한다. 시영아파트와 비슷하다고 이해하면 쉽다.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주택 공급을 위해 오늘날 LH 격인 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해 1943년 인천 곳곳에 영단주택을 건설했다. 부평역 등지엔 관사를 건설했다. 홍현도 학예사가 조사를 통해 확인한 인천 지역 관영주택과 사택은 27곳으로 총 612동이 건설됐다. 조사 당시만 해도 상당수 건축물이 남아 있었다."그동안 인천 근대 건축은 개항장 위주였는데, 1947년 항공사진을 보니 그전에 없던 노동자 주택이 엄청나게 늘어난 게 보였습니다. 중구·동구를 넘어 미추홀구, 부평구까지 다양한 지역에 사택이 건설됐다는 것을 확인했어요."홍현도 학예사가 관영주택과 사택을 조사한 지 딱 10년이 됐다. 홍 학예사가 인천을 떠난 사이 많은 건축물들이 개발 등으로 인해 철거됐다. 그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공업도시로 성장한 인천의 역사와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 관영주택과 사택이라면서, 가치 있는 건축물들이 점차 사라지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애경사(2017년 철거), 아베식당(2019년 철거), 제국제마주식회사 사택(2023년 철거), 조사보고집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인천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조선기계제작소에 동원된 근로보국대 합숙소(2016년 철거) 등 정말 많은 근대 건축물이 철거됐습니다. 서울, 부산, 군산 등에도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지만, 인천의 사택이야말로 인천만의 특징을 보여주는 다른 지역과 차별성이 있는 건축물입니다."2015년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사로 자리를 옮겼다. 지방자치단체에서 건축을 전공한 학예사를 뽑는 경우가 많지 않아 홍현도 학예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고궁은 문화재청 소관이지만, 궁궐과 가까이에서 근무하게 돼 꿈을 이룬 것만 같았다고 한다.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사로 임용된 첫해 덕수궁과 옛 정동 지역의 모형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정동은 대한제국기 고종이 경운궁(덕수궁)을 건설하고, 주변에 각국 공사관을 설치한 지역입니다. 핵심은 경운궁이란 궁궐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설렜습니다. 건물 하나하나 자료를 찾고 도면도 찾고, 크기가 1㎝밖에 안 되는 창호의 구성이나 벽의 구성을 제가 그려서 모형 제작 업체에 넘겼습니다. 초가집의 초가, 기와집의 기와도 꼼꼼히 고증했고요."홍현도 학예사는 '궁돌이 홍쌤'이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면서 궁궐을 거닐며 소개하는 영상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최근엔 전통 한복을 차려입고 갓까지 쓰고 외출할 때가 많다. 홍 학예사는 옛날 사람들이 생활할 때 어떻게 생활했는지 더 알고 싶어서 전통 한복을 입는다고 했다. 가족은 어떤 반응이냐고 물었더니 홍 학예사는 "어머니는 한복을 입을 땐 꼭 웃고 다니라고 했어요. 안 웃으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인다고요"라고 웃으며 답했다.홍 학예사는 올해 초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공인 '궁궐 박사'가 됐다. 박사 논문 주제는 '조선 후반기 경복궁의 관리와 운영 연구'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에 타 소실된 이후부터 흥선대원군 주도로 고종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까지, 즉 경복궁이 없던 시기 경복궁(터)에 대한 연구다."임진왜란 후 경복궁이 소실되면서 그 자리가 황폐화됐다고 생각하지만, 그곳에서 왕실 행사를 여는 등 경복궁 자리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경복궁은 없었지만, 쭉 관리돼 왔고 그 역할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건축이 없는 시기를 다룬 건축학과 박사 학위 논문인 셈이죠."박사 학위를 받은 홍현도 학예사는 인천 지역 건축물을 더 연구하고 싶다고 했다. 기존 홍 학예사가 한 작업은 조사이지 본격적인 연구는 아니었다고도 했다. 인천은 근현대 건축의 숨은 보물창고다. "인천에서 조사한 건축물이 엄청 많이 남아 있다가 지금 점점 사라지고 있는 상황인데, 그때마다 저에게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제가 인천을 떠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질문에 쉽게 답변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고향 인천을 생각하면 언제나 아쉽고 그립습니다. 앞으로 인천에 대해 더 공부하고 연구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홍현도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용현동 영단주택.고등학교 2학년 시절 경복궁에서 홍현도 학예사가 다음 카페 '궁궐 산책' 회원들에게 경복궁에 대한 해설을 하고 있다. /홍현도 제공홍현도 학예사가 주도해 제작한 서울역사박물관의 1900년대 경운궁(덕수궁)과 정동 지역 모형. /서울역사박물관 제공기사 전문 온라인
궁궐 유튜버… 고향 역사 관심도 조선시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옥빛 전통 한복에 갓까지 눌러쓰고, 소형 카메라를 든 채로 서울 경복궁 안팎을 거니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그 사람은 홍현도(40·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일 가능성이 크다. 소형 카메라는 '유튜버'라는 그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홍 학예사가 전통 한복을 입고 다니는 목적은 '재미'가 아닌 '체험'이다. 그는 "역사·문화를 다루는 직업상 옛 사람들이 실제로 옷을 어떻게 입고 다녔는지가 궁금했다"며 "(조상들이 한복을 입고 다녔을 당시) 불편함은 무엇이고, 편리하게 입으려면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를 직접 느끼기 위해 한복을 맞췄다"고 말했다.1984년 인천 미추홀구 용현동에서 태어난 홍현도 학예사는 소년 시절부터 서울의 궁궐을 열심히 다녔고, 궁궐을 연구하는 게 꿈이었다. 스스로 '궁돌이'라는 별칭을 붙일 정도로 궁궐에 대한 애착이 크다. 궁궐은 그가 학예사의 길을 걷게 한 이유다. 궁궐 등 전통 건축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인천 근대 건축물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인천시립박물관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2014년에는 인천이 공업도시로 변모하던 일제강점기 말 곳곳에 지어진 '관영주택과 사택'을 조사해 보고서를 완성하기도 했다. 자신의 가족이 모여 살던 용현동에도 일제강점기부터 산업화 시대까지 많은 공장과 노동자들이 거주한 관영주택·사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때서야 깊이 알게 됐다고 한다.궁궐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그를 인천 밖으로 뻗어 나가게 했지만, 고향의 가치 있는 역사유산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그대로다. 홍 학예사는 "국내에선 옛 공업단지의 흔적이 남아 있고 현대까지 산업도시로 이어지는 지역은 인천밖에 없다"며 "인천을 떠나 있지만 앞으로 근대 건축 등 인천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선조들은 수백년 궁궐터 지켰건만… 사라지는 근대건축물 안타까워")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홍현도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유튜브 채널 '궁돌이 홍쌤'을 운영하는 크리에이터이기도 하다. 흔치 않은 건축 전공 학예사다. 그는 '성덕'이다. '성공한 덕후(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신조어로, 한 분야에서 전문가 이상으로 열정과 흥미를 가진 사람을 지칭)'를 요즘 식으로 줄인 말인데,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직업으로 삼아 성과를 이뤄 나가고 있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의 표현이다. 인천 미추홀구 용현동에서 경인전철을 타고 서울 종로구 일대 고궁을 답사하러 다니던 소년 홍현도는 궁궐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따낸 어엿한 전문가로 성장했다. 그의 관심사는 한국 전통 건축의 정점인 궁궐에서 서민·노동자가 살던 인천의 근대 건축으로 확장한다. 이러한 면에서 '나는 인천 출신입니다'라는 주제의 기획 시리즈 스물세 번째 초대 손님으로 '용현동 궁돌이' 홍현도 학예사는 안성맞춤이다. 이번 인터뷰는 지난달 26일 오후 인천 중구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인근 송학동3가 4번지에 있는 1950년대 근대 건축물이면서, 지난해 인천 엽서 문방구로 새롭게 문을 연 '디어프롬'에서 진행했다. 홍현도 학예사는 1984년 인천 옛 남구, 지금의 미추홀구 옛시민회관사거리 인근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모님은 용현동 수봉공원 인근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옹진군 자월면 자월도 출신이고, 어머니는 서울 출생으로 고등학생 무렵 인천 동구 만석동으로 터전을 옮겼다고 한다. 홍 학예사가 3살 때 고인이 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할머니는 연안부두에서 꽃게 도매업을 하고, 용현동 용일시장에서 꽃게를 직접 팔면서 살림을 꾸렸다. 그렇게 일군 한집안은 할머니의 용현동 큰집 주변으로 분가해 가까이 살았다. 홍현도 학예사 아버지는 아들이 3살 때 대우중공업 경남 창원 사업장에 직장을 얻었다. 가족 모두 창원에 살다가 홍 학예사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인천으로 돌아왔다. “창원에 살던 시절 아버지가 약주를 드시면 항상 할머니부터 시작해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등 가족과 친지들한테 돌아가면서 전화했어요. 아버지는 인천이 참 좋은 동네였다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아버지는 다시 인천으로, 용현동으로 돌아와 대우자동차 세일즈를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용일초등학교 인근에 살다 용현4동, 그리고 용현2동 용마루라 불린 동네에서 중학교 때부터 쭉 살았습니다. 지금은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사라진 동네죠. 저는 결혼하면서 집을 나왔고, 부모님은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진행되면서 이사갔어요." 홍현도 학예사 가족의 터전 용현동은 원래 바다를 맞댄 마을이었다. 2016년 미추홀구가 펴낸 '도시마을생활사' 용현동·학익동편을 보면, 1937년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인천시가지계획'에 이어 경기도가 '경인메트로폴리탄시티' 건설을 구호로 내걸고 경성과 인천을 잇는 공업지대 건설을 추진했다. 용현동·학익동 일대 바닷가는 이 시기 매립돼 염전과 거대한 공장지대로 변했다. 일선염공주식회사, 조선요업주식회사, 조선중화학연구소, 경성화학공업주식회사, 히타치제작소 인천공장, 제국제마주식회사 등 공장들이 용현동·학익동 일대에 속속 들어섰다. 공장 주변으론 임직원 사택과 관영주택 단지가 조성됐다.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용현동·학익동 공장 부지는 해방 이후에도 한국 기업들이나 미군 등이 활용했다. 추가로 해안을 매립해 공장을 설립한 기업도 있었다. 현재는 바닷가 흔적은 물론 과거 공장 부지였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상전벽해가 됐다. 한국전쟁 시기 조성된 용현동 미군 유류보급소(POL)는 대한석유공사 저유소, SK저유소, SK물류센터였다가 2016년 대단지 아파트가 건설됐다. 대한전선 부지는 대우전자, 대우일렉트로닉스 공장이었다가 도시개발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용현2동과 용현5동 일대 염전지대는 1970년대 후반 LH(한국토지주택공사)의 전신 토지금고가 매입해 처음으로 택지개발사업을 벌였다. 토지금고에서 주택·상업용지를 조성해 지금도 이 일대는 '토지금고'라는 지명이 더 익숙하다. “용마루는 일제강점기 때 매립하기 전 해안 경계선이었기 때문에 높은 언덕에 집들이 많았습니다.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추진된 2010년대까지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동네였어요. 아주 오래된 이발소. 그러니까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 켠에 쪽구들이 있어 그 위에 이불이 있고, 만화책도 놓여 있고, 연탄 난로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은 1970년대에 있었을 법한 구식 이발소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2000년대 초반)까지 이런 이발소에서 스포츠 머리를 깎았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믿질 않아요. 좁은 골목이 이어지고 옛날 슈퍼마켓이 있었던 동네였습니다." 홍현도 학예사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동인천역으로 가 경인전철을 타고 서울 경복궁과 주변 고궁을 오갔다. 경복궁에서 열린 중국 국보 전시 소식을 신문에서 접하고 무작정 갔는데, 아름다운 경복궁의 모습에 매료됐다고 한다. 그가 궁궐을 파고든 건 이때부터다. 인하대사범대학부속중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에 한국 전통 문화와 관련된 책이 많아 점심시간만 되면 도서관으로 달려가는 게 일과였다. 그러나 궁궐과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소년은 인문계 고등학교가 아닌 인천의 대표적 특성화고교인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중학교 2학년 때 'IMF 사태'(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고 집안 사정이 나빠졌어요. 당시 성적이 아주 우수하지 않은 학생 중에선 인문계 고교에 진학할 수 있음에도 일찍 취업하겠다는 생각에 특성화고를 선택한 친구가 꽤 있었습니다. 저도 그중 하나였어요. 인천기계공고에서 가장 유명한 과가 자동차과랑 반도체와 관련된 전자기계과였는데, 저는 전자기계과로 진학했습니다." 전자기계과 학생이 됐지만, 궁궐 답사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인터넷 시대'가 본격화한 2000년대 초반부터 '프리챌' '다음 카페' '세이클럽' 같은 지금은 추억이 된 온라인 커뮤니티가 활발하게 운영됐다. 홍현도 학예사는 현재까지도 운영되고 있는 다음 카페 '궁궐산책'이란 커뮤니티에 가입해 활동했다. 매달 한 번씩은 주말에 경복궁 등지에서 '정모'(정기 모임)를 했다. 성인 회원들 앞에서 해설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궁궐 공부가 깊어졌다. 고등학생 때 이미 안 가본 궁궐이 없었다. 인천기계공고 친구를 궁궐 답사에 데려가기도 했는데, 다들 두 번 이상 동행하진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친구 상당수는 삼성, SK 같은 반도체 관련 기업에 취업했다고 한다. 고궁을 좋아하는 공고생, 요즘이었다면 '덕후'라 불렸겠다. 집안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홍현도 학예사는 다시 대학 진학을 꿈꿀 수 있었다.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관련 분야를 공부했다. 멀리 인천에서 온 기계공고 출신으로, 문화재·고궁에 대해 이미 해박한 신입생 홍현도가 특이해 보인 건 학생들은 물론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천년 고도 경주에서 대학 생활을 하니 답사는 일상이었다. 동아리 활동도 고적답사연구회였고, 회장도 맡았다. 다시 고향 인천으로 돌아온 건 대학 3학년 2학기 무렵 인천시립박물관 기간제 연구원으로 뽑히면서다. “1년 반 정도 학교를 더 다녀야 했는데, 다행히 주 4일 근무라서 꼬박 하루는 경주에서 수업을 들었습니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처음에는 전시 보조 업무를 했어요. 제가 참여한 첫 전시는 2009년 '베쓰볼 인천-인천야구 백년사' 특별전이었습니다. 스포츠 쪽은 잘 몰라서 책으로라도 열심히 공부해 전시 준비를 도왔습니다. 중간에 궁궐을 깊이 공부하고 싶어서 경기대학교 건축설계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어요. 시립박물관 유물부에서 일하게 되면서 인천의 근대 건축물 조사를 보조하게 됐고, 그때 인천 개항장 밖의 근대 건축물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게 됐습니다. 대학원에선 1년 동안 근대 건축을 전공하는 교수님 연구실에 있었고, 연구실에서 사대문 안 역사 도시 프로젝트에 참여해 현장 조사 방법론을 익혔습니다." 그렇게 실력을 갈고닦은 홍현도 학예사는 2014년 인천시립박물관의 근현대 주거문화 학술 조사를 맡아 조사보고 제26집 '관영주택과 사택'을 냈다. 인천 근대 건축 분야에서 좀처럼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관공서가 짓고 운영한 관영주택, 대규모 공장이 노동자 거주 목적으로 지은 사택에 대한 조사다. 1930년대 말 일본의 본격적 대륙 침략으로 인천은 대규모 군수공업단지로 성장한다. 대표적인 군수공장인 부평 일본육군조병창(현 캠프 마켓) 외에도 대규모 공장들이 군수품 생산으로 전환하며 규모를 키웠다. 공장 주변에 기숙사와 사택을 지었으나, 인천 지역 주택난은 심화했다. 인천부(지금의 인천시청)는 중구 도원동과 미추홀구 용현동 등지에 집을 직접 지어 분양했는데, 이를 '부영주택'이라 한다. 시영아파트와 비슷하다고 이해하면 쉽다.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주택 공급을 위해 오늘날 LH 격인 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해 1943년 인천 곳곳에 영단주택을 건설했다. 부평역 등지엔 관사를 건설했다. 홍현도 학예사가 살던 용마루 지역에도 36동의 부영주택이 지어졌다. 최근까지도 상당수 남아 있었으나, 용마루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모두 철거됐다. 홍현도 학예사가 조사를 통해 확인한 인천 지역 관영주택과 사택은 27곳으로 총 612동이 건설됐다. 조사 당시만 해도 상당수 건축물이 남아 있었다. “미추홀구 일대 부영주택과 영단주택, 학익동 제국제마주식회사 사택, 부평 미쓰비시 줄사택, 동구 화수동 조선기계제작소 사택 등 사실상 처음으로 인천의 관영주택과 사택을 조명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동안 인천 근대 건축은 개항장 위주였는데, 1947년 항공사진을 보니 그전에 없던 노동자 주택이 엄청나게 늘어난 게 보였습니다. 중구·동구를 넘어 미추홀구, 부평구까지 다양한 지역에 사택이 건설됐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홍현도 학예사가 관영주택과 사택을 조사한 지 딱 10년이 됐다. 홍 학예사가 인천을 떠난 사이 많은 건축물들이 개발 등으로 인해 철거됐다. 그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공업도시로 성장한 인천의 역사와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 관영주택과 사택이라면서, 가치 있는 건축물들이 점차 사라지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애경사(2017년 철거), 아베식당(2019년 철거), 제국제마주식회사 사택(2023년 철거), 조사보고집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인천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조선기계제작소에 동원된 근로보국대 합숙소(2016년 철거) 등 정말 많은 근대 건축물이 철거됐습니다. 인천은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공업도시로 나아가면서 노동자들이 이런 주택들에서 계속 거주하고 활동했어요. 인천의 중요한 성장 동력이 공장이었는데, 관영주택과 사택들은 공장들과 연계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공장은 그 땅에 새로운 공장이 생기거나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변화했습니다. 그 주변의 오래된 사택들은 과거 공장이 있었다는 흔적을 보여주는 곳이었죠. 서울, 부산, 군산 등에도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지만, 인천의 사택이야말로 인천만의 특징을 보여주는 다른 지역과 차별성이 있는 건축물입니다." 2015년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사로 자리를 옮겼다. 지방자치단체에서 건축을 전공한 학예사를 뽑는 경우가 많지 않아 홍현도 학예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고궁은 문화재청 소관이지만, 궁궐과 가까이에서 근무하게 돼 꿈을 이룬 것만 같았다고 한다.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사로 임용된 첫해 덕수궁과 옛 정동 지역의 모형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3층 상설전시실에 전시돼 있는데, 전시실 중앙을 꽉 채우는 가로 3m, 세로 4m 크기로 덕수궁과 정동 지역을 생생히 재현했다. “궁돌이가 맡은 첫 프로젝트가 덕수궁과 정동 지역 모형이라니 운이 좋았죠. 정동은 대한제국기 고종이 경운궁(덕수궁)을 건설하고, 주변에 각국 공사관을 설치한 지역입니다. 1900년대를 기준으로 주변 지역의 모형을 만들었는데, 핵심은 경운궁이란 궁궐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설렜습니다. 건물 하나하나 자료를 찾고 도면도 찾고, 크기가 1㎝밖에 안 되는 창호의 구성이나 벽의 구성을 제가 그려서 모형 제작 업체에 넘겼습니다. 초가집의 초가, 기와집의 기와도 꼼꼼히 고증했고요." 홍현도 학예사는 '궁돌이 홍쌤'이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면서 궁궐을 거닐며 소개하는 영상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학예사라는 직업을 주제로 한 영상도 올리는데, 궁궐을 다룬 영상보다 조회수가 더 높다고 한다. 학예사를 지망하는 사람이 많이 찾는 것 같다고 했다. 최근엔 전통 한복을 차려입고 갓까지 쓰고 외출할 때가 많다. 당연히 눈에 띈다. 전통 한복을 입고 궁궐을 돌아다니면 외국인이나 학생들이 같이 사진 찍자고 요청하기도 한다. 홍 학예사는 옛날 사람들이 생활할 때 어떻게 생활했는지 더 알고 싶어서 전통 한복을 입는다고 했다. 최근에는 한복을 입고 관악산을 올랐다. 옛 사진처럼 조금 더 간편하게 입고 다리를 수월하게 움직이기 위해 앞섬을 풀어헤쳐 뒤로 묶고 등산했다. 전통 한복을 입어보니 주머니가 없어 불편하고 용변을 볼 때도 불편하다고 했다. 가족은 어떤 반응이냐고 물었더니 홍 학예사는 “어머니는 한복을 입을 땐 꼭 웃고 다니라고 했어요. 안 웃으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인다고요"라고 웃으며 답했다. 홍 학예사는 올해 초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공인 '궁궐 박사'가 됐다. 박사 논문 주제는 '조선 후반기 경복궁의 관리와 운영 연구'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에 타 소실된 이후부터 흥선대원군 주도로 고종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까지, 즉 경복궁이 없던 시기 경복궁(터)에 대한 연구다. “임진왜란 후 경복궁이 소실되면서 그 자리가 황폐화 됐다고 생각하지만, 그곳에서 왕실 행사를 여는 등 경복궁 자리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경복궁은 없었지만, 쭉 관리돼 왔고 그 역할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건축이 없는 시기를 다룬 건축학과 박사 학위 논문인 셈이죠. 좌우 대칭의 미학을 품은 경복궁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궁궐이기도 합니다. 참, 봄이 오면 경복궁 교태전 뒤 꽃동산인 '아미산 화계'는 이미 유명하고, 경복궁 자경전 뒤로 가면 앵두나무가 있는데 앵두꽃이 피니 보기 좋습니다. 봄맞이 경복궁 나들이할 때 참고하세요." 박사 학위를 받은 홍현도 학예사는 인천 지역 건축물을 더 연구하고 싶다고 했다. 기존 홍 학예사가 한 작업은 조사이지 본격적인 연구는 아니었다고도 했다. 인천은 근현대 건축의 숨은 보물창고다. 이날 인터뷰를 진행한 '디어프롬' 또한 리모델링 과정에서 '지붕 밑 드럼통 물탱크'가 발견됐다. 상수도 설비가 낙후했던 과거엔 수압이 낮아 수돗물을 끌어오는 일이 쉽지 않았는데, 보통 건물 높은 곳에 물탱크를 만들어 낙차를 이용해 수압을 높였다. 한국전쟁 직후 물자가 부족한 시절 석유 드럼통을 지붕 밑에 설치해 물탱크로 쓴 건축기법은 과거엔 많았으나, 지금은 거의 찾을 수 없다. 또 하나의 '건축사적 발견'이다. 이 건물 또한 지붕 밑 드럼통 물탱크를 설치한 다른 낡은 주택들처럼 철거돼 영영 사라질 수도 있었으나, 개항장 카페 '팟알' 백영임 대표가 발견하고 매입해 인천 엽서 문방구로 보존·변신했다. “인천에서 조사한 건축물이 엄청 많이 남아 있다가 지금 점점 사라지고 있는 상황인데, 그때마다 저에게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그 건물은 언제부터 있었느냐, 어떤 건물이냐 등의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제가 인천을 떠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질문에 쉽게 답변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고향 인천을 생각하면 언제나 아쉽고 그립습니다. 앞으로 인천에 대해 더 공부하고 연구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약력 1984년 인천 미추홀구 출생 1997년 인천용일초등학교 졸업 2000년 인하대사범대학부속중학교 졸업 2003년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전자기계과 졸업 2010년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졸업 2013년 경기대학교 건축설계학과 석사 졸업 2009~2014년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연구원 2024년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 박사 졸업 2015~현재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주요 참여 연구 2012년 서울 사대문안 역사도시 기본계획 /서울시 2012년 인천 근현대도시유적 /인천시립박물관 2014년 관영주택과 사택 /인천시립박물관 2015년 도시마을생활사 – 숭의동·도화동 /인천시 미추홀구 2016년 미쓰비시를 품은 여백, 사택마을 부평삼릉 /부평역사박물관 2017년 도시마을생활사 – 주안동 /인천시 미추홀구 2019년 도시마을생활사 – 관교동·문학동 /인천시 미추홀구 2021년 부평 미쓰비시 줄사택 및 2호 사택 /인천시 부평구 2021년 캠프마켓 1780·1947호 건축물 기록화 보고서 /인천시 2021년 부평사 - 부평의 산업과 사회 /부평사편찬위원회 2022년 미추홀구사4 – 전통과 문화유산 /인천시 미추홀구 2022년 경복궁 후원 기초조사 연구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2022년 장충단 관련 자료를 통한 장충단 부지와 건물 특성 분석 /건축역사연구 2023년 '경복궁도' 제작 시기와 배경 연구 /건축역사연구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정부, 내달부터 본격적 심사 인력 수급·공항 접근성 등 우수삼바·셀트리온 등 100여개 입주수원·고양·성남·시흥 4곳도 도전정부가 바이오 분야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선정을 위한 본격적인 평가 절차를 내달부터 시작한다.인천시를 비롯한 전국 10여 개 자치단체가 특화단지 공모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수도권 자치단체 간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24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바이오 분야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입지를 올해 상반기 안에 선정해 발표한다. 특화단지 선정을 위한 민·관 평가위원회는 각 자치단체가 제출한 서류 평가와 함께 내달부터 프레젠테이션 심사를 벌일 것으로 알려졌다.바이오 업계에선 인력 수급과 인천국제공항과의 접근성 등 관련 산업의 특성을 고려할 때 수도권 내 자치단체 가운데 특화단지가 선정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우선 가장 유력한 특화단지 입지로 인천이 거론되고 있다.인천 송도바이오클러스터에는 동물세포 배양·정제분야의 바이오 국가첨단전략기술을 보유한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셀트리온 등 100여개 국내외 기업과 연구소가 입주해 있다. 이미 바이오산업 생태계가 갖춰져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단일 도시 기준 세계 최대인 116만ℓ의 바이오의약품 생산능력을 보유해 미국 매사추세츠 일대(65만ℓ), 캘리포니아 일원(51만ℓ), 싱가포르(32만ℓ) 등지를 크게 앞서고 있다.이와 함께 송도 연세대 국제캠퍼스에 설치된 바이오공정인력양성센터(K-NIBRT)를 통해 연간 2천명의 바이오 전문 산업인력을 배출하게 되며, 바이오 분야 스타트업 육성 기관인 K-바이오 랩허브도 구축된다.인천시와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 바이오클러스터를 뒷받침하는 신규 바이오 단지로 영종국제도시와 남동국가산업단지를 제안했다.인천시는 송도-남동산단-영종을 잇는 '바이오 트라이앵글'로 K-바이오를 한단계 끌어 올린다는 전략이다.수원과 고양, 성남, 시흥 등 경기도 내 4개 자치단체도 특화단지 공모에 도전장을 냈다.수원시는 관내 218개 바이오 기업과 연구소가 밀집한 광교테크노밸리를 중심으로 성균관대, 아주대, 아주대병원 등과 협력해 '오가노이드파크(Organoid Park)'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고양시는 국립암센터와 6개 대형병원, 풍부한 의료인력, 편리한 교통망 등을 강점으로, 기금과 펀드 1천258억원을 조성해 일산테크노밸리에 바이오 정밀의료 특화단지를 구상하고 있다.성남시의 경우 차바이오텍, 디메드, 분당서울대병원, 분당차병원 등과 협약을 맺고 판교 제1·2테크노밸리, 성남하이테크밸리, 정자동 주택전시관 부지를 특화단지로 활용할 방침이다.시흥시는 서울대 시흥캠퍼스와 서울대병원이 개원 예정인 배곧지구를 포함해 월곶, 정왕지역을 '바이오트리플렉스(BiO Triplex)'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산업부는 접수된 공모 서류를 바탕으로 인프라·인력 등 성장 기반 확보 가능성, 첨단전략산업 및 지역산업 동반 성장 가능성 등을 종합 평가해 올해 상반기 최종 도시를 선정, 발표할 예정이다.국가특화단지로 지정되면 각종 기반시설 구축을 위한 정부의 예산 지원은 물론 각종 인허가 신속 처리와 기술·인력 등의 분야에서 패키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산업부 관계자는 "올해 상반기 내 특화단지를 선정해 발표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에 따른 평가 절차를 이행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
[아임 프롬 인천·(22)] 돛단배 타고 인천으로 피란왔던 박영복입니다 평안남도 진남포시 억량기리 출생남포제련소 유명 "인천과 닮은 도시"1·4후퇴때 떠나, 전후 부평서초 입학중학시절 선생님 영향 역사학도 꿈꿔사학 전공… 서클 통해 고고학 접해대학원땐 '경주 고적발굴' 조사 참여국민적 관심… 박정희 대통령 방문역사·고고학자·문화재 행정가 일생"인천, 옛 것속 현재 그리는 것도 중요"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평안남도 진남포시 억량기리 114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박영복 박물관장의 기억 속 진남포는 평화롭고 고요한 바닷가 마을이었다.박 전 관장의 기억 속에는 어린 시절 고향 진남포에 대한 비교적 소상히 남아 있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한 이층집에 살았다. 아버님이 2척의 배를 부렸다. 2층에서는 배가 보였다."2층에 올라서면 멀리 바다가, 배가 들어오는 게 보였죠. 아버님하고 2층에서 이제 우리 배가 나갔다 들어올 때 만선 깃발이 보이면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으셨죠."진남포 하면 남포제련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특히 거대한 굴뚝이 '랜드마크'와도 같았다. 박영복 관장은 "특히 그 굴뚝이 얼마나 컸는지 어른 30여명이 팔로 손을 잡아야 굴뚝을 에워쌀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박영복 관장은 "인천과 남포가 닮은 꼴 도시였다"고 기억했다.배로 서울에 가려면 인천 한강 하구를 거쳐야 했듯이 평양에 가려면 진남포 대동강을 거쳐야 이르렀다. 수도 서울과 평양으로 향하는 관문항 역할을 했던 것이다. 두 항만은 모두 서해에 있는데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 갑문을 운영한다는 공통점도 있다.남북관계가 경색되기 전 인천에서 남포를 잇는 뱃길이 열린 적이 있다. 1998년부터 2011년까지 인천항과 남포항을 화물선이 오갔다. 특히 2002년부터 2011년까지 국양해운이라는 이름의 선사가 화물선 '트레이드포춘'을 본격 운영했다. 이 뱃길은 남북 교류의 상징과도 같았다. 당시 인천항에서 남포로 가는 배에 섬유·화학·전자·전기제품 등이 선적됐다. 이 배는 북에서 농수산물·광물자원·바닷모래 등을 싣고 인천항으로 돌아왔다. 민간단체의 대북 지원 물품도 이 트레이드포춘호에 실려 북으로 향했다. 국양해운은 적자를 기록하다 2006년 첫 흑자를 냈고 2007년에는 이 항로에 추가 선박을 투입했다. 한국 정부가 2010년 벌어진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남북 교역을 중단하는 5·24 조치를 발표한 이후 이 항로의 물동량이 급격히 줄었다. 트레이드포춘호는 2011년 10월 운항을 멈췄고 2012년 폐선됐다.박영복 관장은 1·4후퇴와 함께 고향을 떠나야 했다. 유년기 박 관장의 기억에는 작은 돛단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떠나던 피란길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믐달이 뜬 깜깜한 밤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두 다 함께 손을 꼭 붙잡고 가야 했어요. 실수로 놓치기라도 하면 다시는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어촌 마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작은 어선에 박 관장 가족과 또 다른 팀이 배에 올라탔다. 배 길이가 10m 조금 못 됐던 것으로 박 관장은 기억했다. 보름 정도만 지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배에 몸을 실은 지 며칠이 지났을까. 빨리 배에서 내리고 싶어졌을 때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꼭 사람들이 전등을 켜두고 있는 것 같았다. 박 관장은 "아마 월미도 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렇게 인천에 도착했는데, 바로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해가 뜬 뒤에야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어머니를 '누님'이라고 부르며 의남매처럼 지내던 이북 지인이 인천 월미도에서 박 관장 가족을 맞아주었다고 했다. 인천에서 경찰로 일하던 이였는데, 북에서 피란민을 태운 배를 하나하나 일일이 확인해 도착하자마자 박 관장 일행을 부두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그 지인은 이북에서 경찰 생활을 하던 이였는데, 남으로 내려가 다시 경찰로 일하던 이였다고 한다.인천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부산으로 피란을 가야 했다. 박 관장은 미군 상륙함(LST)을 타고 부산까지 이동했다고 기억했는데, 그 배가 "마치 운동장 같았다"고 했다. LST에는 아무나 탈 수 없었다고 한다. 박씨 가족은 경찰 가족으로 신분을 위조해 탑승할 수 있었다.부산 피란 생활을 접고 박 관장 가족은 다시 고향에 가려고 인천에 올라왔다. 하지만 전쟁은 교착상태였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부산으로 향하던 피란길 LST에서 만났던 부평경찰서 경찰 가족과 친분을 쌓았는데, 그 가족이 쓰지 않는 '적산가옥'에서 박 관장 가족은 머물렀다.박 관장은 부평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님은 부평 미군부대 주변 '양공주' 집에 드나들며 구해 온 초콜릿 등 '양키물건'을 좌판에서 팔아 어린 자식들을 돌보며 생계를 꾸렸다.또래보다 2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한 박 관장은 운동에 두각을 나타냈다. 1957년 경기도육상연맹이 주최한 제1회 인천 초등학생 체육대회에서 '주폭도'(멀리뛰기) 종목에서 3m95㎝를 뛰어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공부에도 소질이 있던 박 관장은 인천중학교에 입학한다. 인천중학교는 공부도 유명했지만, 체육 활동도 적극적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원칙이 있었다. 모든 교과 수업이 끝나고 나야 운동부의 연습이 있었다. 처음에 농구부로 잠시 활동하다, 이어 축구부에서 활동했다. 국가대표 농구선수로 활동하고 연세대학교와 인천대우제우스 감독을 역임한 최종규 감독이 박 관장의 동창이다.그가 역사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인천중학교 재학 시절 만난 선생님들의 영향이 컸다.'인민복'을 입거나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중국 역사를 이야기하는 길영희 교장 선생님이 어린 중학생의 눈에도 그렇게 멋져 보였다."그냥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언제나 아주 자신감 있게 아주 '파워풀'하게 말씀하셨어요. 늘 가슴 속에 울림을 주는 얘기를 하셨죠. 특히 중국 고사를 아우르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교장 선생님과 중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역사 과목 선생님들의 모습도 매력적이었다. 2학년 시절 담임 이근필 선생님은 퇴계 이황의 16대 종손이었다. 삼국지연의를 중국 원서로 읽으시던 유기화 선생님 등도 기억에 남는다.그는 고려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선배가 학과 '서클'인 인류고고학회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예 알겠습니다' 하고는 서클에 가입하게 된다. 동양사나 중국사를 배우고 싶어 진학한 사학과였는데 서클 활동을 계기로 고고학을 접하게 된다.염불 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많았다. 1964년 창원 성산 패총 현장이 그가 따라 나선 첫 발굴 현장이었다. 발굴이 뭔지도 모르면서 멀리 부산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얘기를 듣고는 무작정 따라나섰다.박 관장은 대학원 공부를 하며 임시직 연구원 신분으로 경주 고적발굴 조사단에 참여해 천마총 발굴 후 정리 작업과 황남대총, 안압지 등 발굴에 참가한다.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은 우리나라 고고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조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국내 발굴 조사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은 계기로 평가받는다. 이 경험으로 인해 박 관장은 신라 고분 연구를 전공하게 됐고, 마지막 공직 생활도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경주 전역에 무수히 많은 무덤이 있는데 일제 때 조사·정리된 것이 155개다. 그 무덤에는 각각 번호가 붙어 있었다. 1호부터 155호까지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이 고분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왕릉을 발굴해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워뒀고 발굴을 지시했다. 이 고분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이 '98호 무덤' 지금의 황남대총이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발굴 경험이 전무했다. 그래서 발굴 경험을 쌓기 위해 그 가운데 가장 작은, 번호도 가장 나중인 '155호 무덤'을 시범적으로 발굴하기로 했다. 1973년부터 발굴을 시작했다.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금관이 발견됐고 유명한 '천마도'도 이때 발굴됐다. 그래서 155호 무덤에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덤 주인은 밝혀내지 못했다.박 관장은 천마총이 '대박'을 터뜨린 후 정리 작업을 하던 시기부터 경주 고적발굴 조사단에 참여했다. 황남대총 발굴도 시작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만 5만8천여 점에 이르렀다. 금관, 금동관, 둥근 고리 큰 칼 등 사치품이 엄청났다. 당시 경주 발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대단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발굴현장을 찾기도 했다. 박 관장은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1976년 시행된 제1회 4급 을류 학예연구직 공개채용에 합격하며 '학예연구사 시보'로 정식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 박 관장은 이후 독일 초청으로 쾰른 동아시아박물관에서 보존과학에 대한 기법을 배우는 행운을 얻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해외 전문기관의 초청을 받아 교육받게 된 것이다.그는 "당시 독일 친구들이 한국에서 발굴 전문가가 왔다고 환대해 줬다"면서 "그곳에서 유럽의 박물관을 자주 돌아다니면서 발굴·복원 기술을 배우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이후 국립공주박물관장과 초대 국립청주박물관장 등을 거치고, 국립중앙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에서 주요 보직을 맡았다. 1999년 출범한 문화재청에서 초대 문화유산국장으로 일하고,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취임 후 4년 동안 경주박물관을 이끌고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역사학도이면서 고고학자로, 또 문화재 행정가로 살아온 인생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삶을 살았다. 그가 인천에 건네는 조언은 이렇다."인천이 항구도시로서 이미지를 복원하려 굉장히 애를 쓰는 것을 많이 봅니다. 너무 옛날 것만 고집하지 말고, 옛것 속에 현재를 그리는 것도 중요해요. 너무 옛것만 이야기하면 굳은살이 생겨요. 새로운 걸 끌어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옛것에서 미래를 끌어내지 못하고 전통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가라앉아요. 거기서 싹을 틔워서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합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옛 인천중학교.1957년 가족과 함께 촬영한 사진 왼쪽 위가 박영복 전 관장이고, 오른쪽이 어머님이다. /박영복 전 관장 제공고교 재학시절 박영복 전 관장. /박영복 전 관장 제공기사 전문 온라인
훌륭한 선생님·좋은 친구 만나 박영복(79·사진)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문화재 행정가다. 대학 시절 몸담은 '고고학 서클'과 경주 참성단, 황남대총, 안압지 등 경주 고적발굴 조사단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문화재 행정가의 길을 걸어온 인물이다.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 등이 그가 거친 일터이자 현장이다.박 관장은 1945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1·4 후퇴 당시 피란길에 오른뒤 고향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대로 인천에 눌러앉아 인천을 고향으로 여기고 살아온 인천사람이다.전쟁이 끝나지 않은 어수선한 시기 또래보다 조금 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1958년 부평서초교와 1961년에 인천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초등학교 중학교, 인천에서 보낸 성장기가 지금 내 자신의 대부분을 완성했다"며 "훌륭한 선생님과 좋은 친구들을 그때 만났다"고 말했다.그는 평생 문화재 행정가로 일을 했지만 오직 옛것만을 고집하지 않는 균형감각의 소유자다. 그는 "너무 옛날 것만 고집하지 말고, 옛것 속에 현재를 그리는 것도 중요하다"며 "문화재라는 옛것을 지키는 일을 해왔지만 현재도 중요하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하고 맞춰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시 인천에 대해서는 "인천이 항구도시 이미지를 복원하려 애쓰는 모습을 많이 본다"면서 "옛것만 이야기하면 굳은살이 생긴다. 옛것에서 미래를 끌어내지 못하면 가라앉고 만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고고학 새 역사 증인 "작은 고분 시범 발굴한 것이 천마총")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평안남도 진남포시 억량기리 114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박영복 박물관장의 기억 속 진남포는 평화롭고 고요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박 전 관장의 기억 속에는 어린 시절 고향 진남포에 대한 비교적 소상히 남아 있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한 이층집에 살았다. 아버님이 2척의 배를 부렸다. 2층에서는 배가 보였다. “2층에 올라서면 멀리 바다가, 배가 들어오는 게 보였죠. 아버님하고 2층에서 이제 우리 배가 나갔다 들어올 때 만선 깃발이 보이면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으셨죠." 진남포 하면 남포제련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특히 거대한 굴뚝이 '랜드마크'와도 같았다. 박영복 관장은 “특히 그 굴뚝이 얼마나 컸는지 어른 30여명이 팔로 손을 잡아야 굴뚝을 에워쌀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고지식한 아이였다. 부모님이 출타하시면서 “집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 말하면 꼼짝없이 문간방에 앉아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아이였다. 박 관장은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진남포에서 소련군을 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어느 날 소련군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행진하는데 이상한 게 뭐냐 하면 손을 앞뒤로 흔들지 않고 좌우로 흔들어요. 좌우로 흔드는 겁니다. 어린아이 눈에는 그게 이상하니까 팔짓을 따라서 해보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박영복 관장은 “인천과 남포가 닮은 꼴 도시였다"고 기억했다. 배로 서울에 가려면 인천 한강 하구를 거쳐야 했듯이 평양에 가려면 진남포 대동강을 거쳐야 이르렀다. 수도 서울과 평양으로 향하는 관문항 역할을 했던 것이다. 두 항만은 모두 서해에 있는데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 갑문을 운영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기 전 인천에서 남포를 잇는 뱃길이 열린 적이 있다. 1998년부터 2011년까지 인천항과 남포항을 화물선이 오갔다. 특히 2002년부터 2011년까지 국양해운이라는 이름의 선사가 화물선 '트레이드포춘'을 본격 운영했다. 이 뱃길은 남북 교류의 상징과도 같았다. 당시 인천항에서 남포로 가는 배에 섬유·화학·전자·전기제품 등이 선적됐다. 이 배는 북에서 농수산물·광물자원·바닷모래 등을 싣고 인천항으로 돌아왔다. 민간단체의 대북 지원 물품도 이 트레이드포춘호에 실려 북으로 향했다. 국양해운은 적자를 기록하다 2006년 첫 흑자를 냈고 2007년에는 이 항로에 추가 선박을 투입했다. 한국 정부가 2010년 벌어진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남북 교역을 중단하는 5·24 조치를 발표한 이후 이 항로의 물동량이 급격히 줄었다. 트레이드포춘 호는 2011년 10월 운항을 멈췄고 2012년 폐선됐다. 서로 닮은 두 항만은 분단 이전에도 교류가 활발했다고 전해진다. 인천항은 남포항에서 중국 또는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중국·일본에서 수입하는 화물이 모이는 환적항 또는 허브(HUB)항만 역할을 했다. 일본 언론인 가세 와사부로(加瀨和三郞)가 1908년 편찬한 '인천개항 25년사'를 보면, 인천항과 남포항의 관계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국내 무역 중 당시 인천과 관계가 가장 깊은 곳은 진남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진남포에서 수입하는 것은 대개 인천항이 중개하였던 것으로 보아 당시 인천항이 진남포의 중개소 위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진남포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곡류와 일본 혹은 청국에서 수입하는 각종 화물은 모두 인천항을 거쳤다" 박영복 관장은 1·4후퇴와 함께 고향을 떠나야 했다. 유년기 박 관장의 기억에는 작은 돛단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떠나던 피란길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믐달이 뜬 깜깜한 밤이었다. 어머님과 이모 박 관장 누님과 동생 모두 다섯이 손을 잡고 부두로 이동했다. 바닷가에 이르니 여기저기서 “누구, 어디에 있느냐"며 찾는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두 다 함께 손을 꼭 붙잡고 가야 했어요. 실수로 놓치기라도 하면 다시는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어촌에서 마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작은 어선에 박 관장 가족과 또 다른 팀이 배에 올라탔다. 배 길이가 10m 조금 못 됐던 것으로 박 관장은 기억했다. 보름 정도만 지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집에 있는 그릇, 재봉틀 등 값이 나가는 모든 걸 마당을 파고 독에 넣어뒀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 여동생인 이모가 남아 집을 지키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출발하는 날이 되니까 이모도 무서웠는지 결국 집을 비워두고 함께 따라나섰다. 추운 겨울 힘든 기억 보다는 피란 배에 마련된 간이 화장실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박 관장은 말했다. “발을 올려두는 발판만 나란히 있었던 것 같아요. 바닥을 보면 바다가 보이고 손잡이도 제대로 없었 거든요." 배에 몸을 실은 지 며칠이 지났을까. 빨리 배에서 내리고 싶어졌을 때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꼭 사람들이 전등을 켜두고 있는 것 같았다. 박 관장 “아마 월미도 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렇게 인천에 도착했는데, 바로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해가 뜬 뒤에야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 어머니를 '누님'이라고 부르며 의남매처럼 지내던 이북 지인이 인천 월미도에서 박 관장 가족을 맞아주었다고 했다. 인천에서 경찰로 일하던 이였는데, 북에서 피란민을 태운 배를 하나하나 일일이 확인해 도착하자마자 박 관장 일행을 부두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그 지인은 이북에서 경찰 생활을 하던 이였는데, 남으로 내려가 다시 경찰로 일하던 이였다고 한다. 인천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부산으로 피란을 가야 했다. 박 관장은 미군 상륙함(LST)을 타고 부산까지 이동했다고 기억했는데, 그 배가 “마치 운동장 같았다"고 했다. LST에는 아무나 탈 수 없었다고 한다. 박씨 가족은 경찰 가족으로 신분을 위조해 탑승할 수 있었다. 1950년 10월 25일 중국이 한국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 이남 지역까지 퇴각했다. 북한군이 다시 수도 서울을 점령한 1951년 1월4일 날짜를 따 '1·4후퇴'라고 한다. 인천시민의 경우 1·4후퇴 전인 12월 30일까지 상당수가 피란을 떠난 것으로 '인천시사편찬 50주년 기념 인천광역시사'(2023년 발간)에 기록돼 있다. 당시 지중세(池中世) 인천시장은 시 직원들에게 “사태가 급박하니 시 직원은 집단 피난하기로 했다. 희망자는 이에 참가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시 직원 절반갸량이 참가해 중요 서류를 휴대하고 부산으로 피란했고 일반 시민도 다시 피란길에 올랐다. 미8군사령관은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교두보에서 철수하며 경인지역에 설치된 보급소가 위태롭게 되자 제3군수지원사령관에게 인천항을 1·4일 후퇴 당일 정오에 폐쇄토록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했다. 2월 10일 미 제25사단 기갑부대가 인천으로 진출해 시가지를 정찰했다. 북한군은 이미 주둔지를 포기하고 철수한 뒤였다. 인천이 재수복되자 피란 갔던 시민들이 속속 귀환했다. 가옥과 재산이 모두 파괴됐고, 생필품마저 모자랐다. 당시 인천시청은 부산 사무소를 두고 군산·목포·제주에 지소를 두어 피란시 인천시민 편의를 도모하고 있었다. 2월 11일 인천항 복구작업이 시작됐고 교육기관들도 이때부터 점차 정상화 수순을 밟았다. 박 관장 기억에 인천항에서 출발해 한 3일쯤 지난 뒤 부산에 도착했다. 첫날은 부산의 한 극장에서 머물렀다. 빵하고 먹을 걸 줬다. 다음 날부터는 어느 '국민학교'에서 생활했다. 며칠 뒤 다시 피란민 수용소가 생겼다. 부산에 있는 조선방직 건너편 큰 뜰에 생겼다. 거기서 한동안 먹고 살았다. 경찰 가족이라는 위조된 신분 증명이 있어 배급을 받을 수 있었다. 박 관장은 당시 부산 동네 꼬마 아이들하고 돌멩이를 던지며 싸우는 '석전'을 벌였다고 기억했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피란 온 우리를 보면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고기' 그렇게 놀리더라고요. 그렇게 돌 던지고 싸우며 놀았지요." 얼마나 지났을까. 부산 피란 생활을 접고 박 관장 가족은 다시 고향에 가려고 인천에 올라왔다. 하지만 전쟁은 교착상태였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부산으로 향하던 피란길 LST에서 만났던 부평경찰서 경찰 가족과 친분을 쌓았는데, 그 가족이 쓰지 않는 '적산가옥'에서 박 관장 가족은 머물렀다. 박 관장은 부평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님은 부평 미군부대 주변 '양공주' 집에 드나들며 구해 온 초콜릿 등 '양키물건'을 좌판에서 팔아 어린 자식들을 돌보며 생계를 꾸렸다. 좌판을 펼쳐 놓으면 미군 헌병이 단속을 나왔다. 집으로 도망오는 어머님을 따라 헌병이 집까지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박 관장은 “그럴 때면 어머니는 좌판을 이불로 덮고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내며 아픈 척을 하며 헌병을 따돌렸다"면서 “어머님이 억척스러웠다"고 했다. 또래보다 2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한 박 관장은 운동에 두각을 나타냈다. 1957년 경기도육상연맹이 주최한 제1회 인천 초등학생 체육대회에서 '주폭도'(멀리뛰기) 종목에서 3m95㎝를 뛰어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공부에도 소질이 있던 박 관장은 인천중학교에 입학한다. 부평서초등학교 졸업생 200여명 가운데 인천중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인천중학교는 공부도 유명했지만, 체육 활동도 적극적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원칙이 있었다. 운동부 학생들도 수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모든 교과 수업이 끝나고 나야 운동부의 연습이 있었다. 처음에 농구부로 잠시 활동하다, 이어 축구부에서 활동했다. 국가대표 농구선수로 활동하고 연세대학교와 인천대우제우스 감독을 역임한 최종규 감독이 박 관장의 동창이다. 개교 기념일마다 학교에서는 마라톤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전교생이 학교에서 출발해 인천교도소 반환점을 돌아 학교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마지막 홍예문 언덕길이 가장 힘든 구간이었지만 성취감을 주었다. 석 달에 한차례 소풍을 떠나는 '원적'도 너무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걸어서 송도유원지를 다녀오곤 했는데, 걷는 동안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며 사귀던 시간이 그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가 역사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인천중학교 재학 시절 만난 선생님들의 영향이 컸다. '인민복'을 입거나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중국 역사를 이야기하는 길영희 교장 선생님이 어린 중학생의 눈에도 그렇게 멋져 보였다. “그냥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언제나 아주 자신감 있게 아주 '파워풀'하게 말씀하셨어요. 늘 가슴 속에 울림을 주는 얘기를 하셨죠. 특히 중국 고사를 아우르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교장 선생님과 중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역사 과목 선생님들의 모습도 매력적이었다. 2학년 시절 담임 이근필 선생님은 퇴계 이황의 16대 종손이었다. 삼국지연의를 중국 원서로 읽으시던 유기화 선생님 등도 기억에 남는다. 박 관장은 친척 어른 권유로 서울중앙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서울로 학교를 진학한 덕에 “중학교 동창이 1천명, 고등학교 동창도 1천명"이라고 했다. 장단점이 있다고 했다. 동창이 많다는 것이 장점이라면 단점은 깊이 사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윤성 전 국회부의장, 정홍식 전 정보통신부 차관 등이 중학교 동창이고, 김병일 기획예산처 장관과 최혁 주제네바대표부 대사 등은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는 고려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선배가 학과 '써클'인 인류고고학회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예 알겠습니다' 하고는 써클에 가입하게 된다. 동양사나 중국사를 배우고 싶어 진학한 사학과였는데 써클 활동을 계기로 고고학을 접하게 된다. 염불 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많았다. 1964년 창원 성산 패총 현장이 그가 따라 나선 첫 발굴 현장이었다. 발굴이 뭔지도 모르면서 멀리 부산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얘기를 듣고는 무작정 따라나섰다. 매일 선배님들이 찾아와 사주는 공짜 술도 너무 즐거웠다. '지표조사'라는 활동도 자주 나갔다. 봄·가을로 농민들이 밭을 갈고 난 후 버리는 돌을 모아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 돌 속에 돌도끼, 돌칼 등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큰 비로 둑이 무너지는 곳에서 토기 파편 등도 선배들과 함께 주우러 다녔다. 유물에 눈이 밝아지면서 4학년 때 이제 학회 회장도 맡았다. 박 관장은 1971년 군대를 제대하고 인천중학교 은사였던 심재갑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선거 캠프에서 뛰기도 한다. 당시 심재갑 선생님은 38세 나이로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일당 후보로 출마했다. 친구들과 정책실장, 홍보실장 등을 맡아 무보수로 뛰었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선거가 끝나고 함께 선거를 뛰었던 친구는 한 사립대 대학교 총장 비서실에 취직했다. 그 친구 덕에 대학원에 입학해 다시 고고학 석사 과정 공부를 이어간다. 박 관장은 대학원 공부를 하며 임시직 연구원 신분으로 경주 고적발굴 조사단에 참여해 천마총 발굴 후 정리 작업과 황남대총, 안압지 등 발굴에 참가한다.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은 우리나라 고고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조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국내 발굴 조사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은 계기로 평가받는다. 이 경험으로 인해 박 관장은 신라 고분 연구를 전공하게 됐고, 마지막 공직 생활도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경주 전역에 무수히 많은 무덤이 있는데 일제 때 조사·정리된 것이 겨진 것이 155개다. 그 무덤에는 각각 번호가 붙어 있었다. 1호부터 155호까지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이 고분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왕릉을 발굴해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워뒀고 발굴을 지시했다. 이 고분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이 '98호 무덤' 지금의 황남대총이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발굴 경험이 전무했다. 그래서 발굴 경험을 쌓기 위해 그 가운데 가장 작은, 번호도 가장 나중인 '155호 무덤'을 시범적으로 발굴하기로 했다. 1973년부터 발굴을 시작했다.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금관이 발견됐고 유명한 '천마도'도 이때 발굴됐다. 그래서 155호 무덤에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덤 주인은 밝혀내지 못했다. 박 관장은 천마총이 '대박'을 터뜨린 후 정리 작업을 하던 시기부터 경주 고적발굴 조사단에 참여했다. 황남대총 발굴도 시작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만 5만8천여 점에 이르렀다. 금관, 금동관, 둥근 고리 큰 칼 등 사치품이 엄청났다. 당시 경주 발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대단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발굴현장을 찾기도 했다. 취재 경쟁도 치열했다. 무덤에서 어떤 유물이 발견됐다는 사실을 알리면 특종으로 여겨졌다. 특히 금관이 발견되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기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박 관장은 “기자들을 피하려고 일부러 2kW 대형 조명 4대나 설치해두고 밤에 발굴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면서 “취재 경쟁이 너무 심하다 보니 경주지역 전화 교환원을 통해 본사와 전화 통화를 하는 다른 기자의 취재 내용을 몰래 파악하려 한 기자가 있을 정도로 치열했다"고 말했다. 이 모든 발굴 과정은 국립영화제작팀이 상주하면서 기록했다. 박 관장은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1976년 시행된 제1회 4급 을류 학예연구직 공개채용에 합격하며 '학예연구사 시보'로 정식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 박 관장은 이후 독일 초청으로 쾰른 동아시아박물관에서 보존과학에 대한 기법을 배우는 행운을 얻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해외 전문기관의 초청을 받아 교육받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 독일 친구들이 한국에서 발굴 전문가가 왔다고 환대해 줬다"면서 “그곳에서 유럽의 박물관을 자주 돌아다니면서 발굴·복원 기술을 배우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이후 국립공주박물관장과 초대 국립청주박물관장 등을 거치고, 국립중앙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에서 주요 보직을 맡았다. 1999년 출범한 문화재청에서 초대 문화유산국장으로 일하고,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취임 후 4년 동안 경주박물관을 이끌고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 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역사학도이면서 고고학자로, 또 문화재 행정가로 살아온 인생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삶을 살았다. 그가 인천에 건네는 조언은 이렇다. “보통 전문가들은 고집이 센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저는 무슨 일이든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많이 듣는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문화재'라는 옛것을 지키는 일을 해왔지만 현재도 중요합니다. 살아가고 있는 '우리'하고 맞춰가야 해요. 너무 옛날 것만 고집하려 하고, 보존하려 하면 현재가 견딜 수 없어요. 저는 그렇게 국가 시책을 국민 마음에 가닿도록 하는 것이 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천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해요. 인천이 항구도시로서 이미지를 복원하려 굉장히 애를 쓰는 것을 많이 봅니다. 너무 옛날 것만 고집하지 말고, 옛 것 속에 현재를 그리는 것도 중요해요. 너무 옛 것만 이야기하면 굳은 살이 생겨요. 새로운 걸 끌어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옛것에서 미래를 끌어내지 못하고 전통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가라앉아요. 거기서 싹을 틔워서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합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