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2]함경남도 단천시 출신 전진성 할아버지(上)

마지막 배 '매러디스 빅토리호' 타고 거제로문재인 대통령 부모님도 같은 배 타고 피란몇십리 걸어 도착 "하룻밤 묵었다면 잡혔어""기중기 달린 어망에 담겨 승선" 증언 눈길장승포 초교·어망창고에 머물다 자원 입대대구 육군본부 행정병때 송해와 함께 근무부대행사 때마다 남다른 입담 자랑해 기억제대 후 부평서 결혼 60년 세월 떠나지 않아함경남도 단천 출신인 전진성(88)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 당시 흥남부두를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매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를 타고 거제도로 피란을 나왔다. 빅토리호는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인명(1만4천여명)을 구한 기록으로 2004년 기네스북에 올랐다. 한국전쟁 종군기자였던 미국인 빌 길버트가 쓴 '기적의 배'를 보면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한국전쟁 중 부산, 일본 등을 오가며 군수물자를 실어나르는 역할을 했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날에는 인천항에 들어와 탄약, 탱크 등을 해군 상륙함정(LST)에 실어줬다. 흥남철수 당시에는 부산에 제트기 연료를 운반한 뒤 작전에 투입됐다.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흥남철수 때 이 배를 탔고, 경남 거제에 온 지 2년 만인 1953년 1월 문 대통령을 낳았다. 문 대통령은 지난 6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장진호 용사와 흥남철수 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군사전문가들은 흥남철수작전을 현대 전쟁사 최대 규모의 철수 작전인 덩케르크 철수 작전(Operation Dynamo)과 비교한다. 덩케르크 작전으로 33만8천명의 영국, 프랑스 병사를 잉글랜드로 철수시켰는데, 흥남철수작전으로는 유엔군 10만 명뿐만 아니라 전진성 할아버지와 같은 민간인 10만 명도 구출됐다. 두 작전은 모두 흥행 영화의 소재로 다뤄졌다는 공통점도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덩케르크'는 국내에서만 27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흥행에 성공했고, 흥남철수작전은 역대 2위 누적 관객(1천420만명)을 기록한 영화 국제시장에 나온다.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황덕호 명예회장은 '흥남철수작전 역사서 아! 흥남철수' 축사에서 "덩케르크에서는 피란민 철수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완전무장을 하고 상당한 기동성을 갖춘 정예대군이 오히려 민간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철수하기에 바빴던 철수작전이다. 반면 흥남철수작전은 군 병력뿐만 아니라 노인과 아녀자들을 포함한 10만여 민간인이 군과 거의 동수로 함께 철수한 인도주의적 작전이었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전진성 할아버지는 고향인 단천에서부터 무릎 높이까지 오는 눈길을 뚫고 쉼 없이 걸어 흥남철수작전의 행렬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함경도 피란민들은 흥남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흥남부두로 몰렸다. 할아버지는 "중간에 하룻밤을 묵기라도 했으면 중공군에 잡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할아버지는 1950년 12월 5일 새벽 동네에 주둔하던 국군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친척 3명과 함께 보따리를 싸 들고 단천항구로 갔다. 할아버지는 단천항에 출발하는 배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함경철도를 따라 남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화물열차를 탈 수 있었고, 북위 40도선에 있는 '퇴조'라는 지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흥남항까지 밤새 20리 길을 걸었다.당시 흥남부두에는 이미 10만 명이 넘는 많은 피란민이 몰려있었다. 당초 미군은 흥남항을 통해 군 병력만 철수시킬 계획이었는데, 나중에 민간인까지 함께 상륙함정과 화물선 등에 실어 피란을 시키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이런 흥남철수 작전이 '현봉학 박사'라는 사람 덕분에 가능했다고 했다. 현봉학 박사는 당시 미군을 설득해 민간인들을 구출한 흥남철수의 숨은 주역으로 꼽힌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정리한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과 흥남 대탈출'에서 미 10군단 알몬드 소장 등을 설득해 민간인을 배에 태울 수 있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당시 흥남항구에 있으면서 미군 병력 철수를 위해 직접 군수물자를 실었다가 민간인을 태우기 위해 다시 각종 물자를 내리는 일을 했다.당시 가공식품 깡통 등 각종 군수물자를 항구에 내려놓은 뒤 중공군이나 인민군이 가져가지 못하도록 모두 불살랐다고 했다. 접안시설도 이용할 수 없도록 모두 부숴버렸다.김훈의 장편소설 '공터에서'에도 이 같은 흥남철수 과정이 묘사돼 있다. "미군은 흥남항에서 해상으로 철수할 작정이었다. 미군의 철수 계획은 중공군의 졸병도 알았고 피난민들도 알았다. 미군은 피난민들의 승선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거듭 말했지만 피난민들은 흥남항으로 몰렸다. 북청에서 흥남에 이르는 해안 도로에 피난민들이 가득 차서 흘러갔다. …(중략)… 미군이 수송선에 피난민을 태우기로 했다는 소문은 발표도 없이 퍼져 나갔다. 수송선들이 모래 위로 선수를 들이밀고 철문을 열었다. … 손을 잡아라. 허리띠를 붙들어 …(중략)… 마지막 폭격기들이 항모로 돌아왔다. 항구 안에 남아 있던 구축함이 16인치 포로 흥남부두를 부수고 접안 시설을 부수었다. 함포가 부두를 부술 때 민간인들도 부두에 모여 있었다. 불길과 연기에 휩싸여서 부두도 산맥도 보이지 않았는데, 연기 속으로 포탄은 계속 날아갔다."당시 매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르는 피란민의 모습을 형상화한 '흥남철수작전기념비'가 경남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있다.피란민들이 배의 외벽을 따라 내려온 줄을 타고 경쟁하듯 올라가는 모습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자신은 기중기에 달린 어망에 담겨 배에 끌어올려졌다고 했다. 피란민들이 어망에 실려 올려졌다는 얘기는 흥남철수 작전에 대한 각종 기록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증언이다."나는 기중기에 달린 어망에 탄 것 같아. 25~30명 정도가 어망에 타서 어떤 사람은 거꾸로, 어떤 사람은 가로로 처박혀서 어망에 실렸던 것 같아. 아니 그렇게 했던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아."1950년 12월 23일 흥남부두를 떠난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다음 날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정박할 곳이 없다는 이유로 당국의 하선 허가를 받지 못했고, 성탄절인 12월 25일 거제도의 작은 포구 장승포에 도착했다. 할아버지는 거제도에 도착한 뒤 장승포항 주변의 국민학교에서 잠시 추위를 피했다. 이때 머문 학교의 이름은 '장승포초등학교'로 1921년 개교한 뒤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교사(校史)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학생 수는 약 650명이다. 이 학교 정원욱 교무부장은 지난 10월 31일 전화통화에서 "거제도로 피란을 왔을 당시 장승포항 주변에 국민학교는 장승포초등학교가 유일했다"며 "피란민들이 우리 학교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를 지낸 김찬수 씨가 쓴 '내가 겪은 6.25'를 보면 당시 거제도에는 수만 명이 몰리면서 대규모 피란민 촌이 만들어졌다. "밤에 보니 주변 언덕과 높은 곳에 불빛이 휘황찬란하여, 개발하기 얼마 전의 서울 돈암동 산꼭대기의 판자촌 야경같이 높은 빌딩이 가득 들어서서 불을 켜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할아버지는 이후 어망창고에서 열흘 정도 있다가 연초면에 있는 학교에서 방위군 신청을 받아 자원입대를 했다. 전문학교(북청농업전문학교 잠업과)까지 나온 할아버지가 글씨를 잘 쓰자 감찰부에서 조서를 받는 일을 시켰다. 할아버지는 방위군이 해산된 뒤에는 '창설 멤버'로 제주도 육군훈련소에 입소하게 된다. "제주도 모술포에 훈련소가 있었는데, 우리가 직접 돌을 메다 날라서 훈련소 벽을 쌓고 사실상 우리가 만들었지. 당시 훈련소장이 백인엽 장군이었어. 변변한 총도 없을 정도로 열악했지. 총 대신에 대나무 죽창을 들고 훈련을 받았으니까. 한 달 정도를 그렇게 훈련을 받았던 것 같아."할아버지의 증언은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에 나와 있는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에 대한 설명과 일치했다. 서귀포문화대전은 육군 제1훈련소에 대해 "당시 백인엽 준장을 소장으로 1951년 3월 21일 창설되어 1956년 1월 해체되기까지 5년간 50만여명의 신병을 배출해 냈다. 신병들은 대체로 1개월 정도 훈련받고 전장에 투입됐다"고 설명했다.할아버지는 훈련소를 거쳐 부산에 있는 보충대대에서 통신학교로 배치를 받았고, 훈련을 거쳐 대구 육군본부에 있는 통신감실로 발령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인사행정과 소속으로 일종의 행정병 역할을 했다. 할아버지는 이때 전국노래자랑의 국민MC가 된 송해를 만났다. 송해는 무선통신사였는데, 이때도 남다른 입담을 자랑했다. 부대 안에서 열린 웅변대회나 연극대회 무대에 송해가 올라 농담을 시작하면 폭소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송해가 했던 대표적 농담으로 "옆구리를 찔러 창자를 꺼내서 빨랫줄을 만든다"고 했던 것을 기억했다. 지금 듣기에는 농담치고는 다소 '살벌'한데, 이때는 배꼽을 잡을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 있었다고 한다.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단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오민석 교수가 쓴 '송해 평전'에도 송해가 통신학교 무선부를 거쳐 대구 육군본부 통신병으로 배치됐다고 돼 있다. 송해는 군 생활 중 3군 종합 콩쿠르 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했다.군예대(軍藝隊)가 자신의 부대에 위문공연을 올 때마다 송해가 무대에 올랐을 뿐 아니라, 임시 휴가증을 끊어 군예대의 위문 공연장에도 자주 불려 나갔다고 한다. 전진성 할아버지의 기억과 거의 일치한다. 다만 오민석 교수는 송해가 제대 후 함께 군 생활을 한 장세균이라는 사람을 따라 '부천 싸전거리'에 와서 두부장사를 했다고 했는데, 전진성 할아버지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장세균이라는 사람이 현재 인천 부평구 부개동에 있는 우체국 송신소에 있었고, 송해도 이곳에서 함께 일하다가 유랑극단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누구의 말이 맞든 간에 송해는 군 생활을 할 때부터 '남다른' 입담을 자랑했던 것만은 분명하다.할아버지는 대구 육군본부에서 강원도 원주에 있던 1통신단으로 전입됐다가 1954년 5월 제대를 한 뒤 부평으로 왔다. 군 생활을 할 때부터 만나던 아내가 부평에 있는 연합병원(현재 세림병원)에서 일하고 있어 부평에서 1955년 7월 결혼을 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 세림병원은 1940년 부평역 앞에서 부평의원으로 문을 열었고, 1963년 5월에 병원이 증축되면서 부평연합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1983년 현재 세림병원 부지(청천동 302)에 새로 건물을 지어 병원을 이전했다. 할아버지도 연합병원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60년이 넘도록 부평에서 살고 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전진성 할아버지가 인천 부평구에 있는 자택에서 피란 당시의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사진은 폭파되고 있는 흥남시가지.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제공사진은 매러디스 빅토리호에 승선하고 있는 피란민들.지난 2005년 경남 거제도에 있는 흥남철수작전기념비를 찾은 전진성 할아버지. /전진성 할아버지 제공

2017-11-01 홍현기

[zoom in 송도]위기가정 어린이돕기·이웃사랑 나눔 '소중한 한걸음'

전망대까지 기록측정·완주 구분기업인·단체·시민 500명 '레이스'LH인천본부 행사후원·봉사활동참가자들 선물상자만들기 체험도위기가정 어린이를 돕기 위한 '2017 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가 지난 28일 오전 인천 송도국제도시 G타워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와 경인일보가 주최한 이번 대회는 기업인, 개인, 단체 일반 신청자 등 약 500명이 참가했다. LH 인천지역본부, 우리은행 연수동지점, 국민은행 인천지역영업그룹, 한국자산관리공사 인천지역본부, 삼성바이오로직스, 남구 시설관리공단, 한국전력공사 인천지역본부 등이 도움을 줬다.G타워 1층 로비에 마련된 행사장에는 메인 무대와 함께 ▲심폐소생술 교육장 ▲미혼모 지원을 위한 자립형 이동식 카페 '토리양카페' ▲위기 어린이 돕기 선물상자 만들기 등의 부스가 설치됐다.LH 인천지역본부는 이번 행사에 후원금을 내고 봉사활동도 벌였다. 나눔봉사단원 등 25명의 직원이 행사에 참여해 '토리양카페' 운영 지원과 선물상자 만들기에 참여했다.전 레슬링 국가대표 심권호 LH 인천지역본부 경영지원부 부장도 참석했다. 심 부장은 "LH 인천본부는 자라나는 어린이에 관심을 갖고 여러 사회공헌활동을 하고 있다"며 "오늘 행사도 위기 상황에 있는 어린이를 돕는 취지라서 후원하게 됐다"고 말했다. LH 인천지역본부는 인천남동경찰서와 협력해 초등학교 통학로를 순찰하고 교통안전캠페인을 벌이는 'LH 안전마을지킴이' 활동도 하고 있다. LH 신입사원도 많이 참여했다. 같은 부서 김효영 차장은 "올해 입사한 젊은 직원들이 봉사활동에 많이 왔다"며 "이웃사랑과 사회공헌을 몸소 실천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국민은행 인천지역영업그룹에서도 약 60명(가족 포함)이 참여했다. 국민은행 주안역지점 주안북출장소에 근무하는 김동수 차장은 피에로 복장을 하고 풍선아트를 선보였다. 김 차장은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이 좋아 14년째 풍선아트로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은행 인천지역영업그룹 정기영 대표는 "지역사회의 좋은 행사에 기여할 수 있게 돼 기쁘다"며 "가정형편이 어려운 어린이를 돕고, 계단 오르기로 건강도 챙길 수 있는 매우 유익한 행사 같다"고 했다. 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는 위기가정 어린이를 돕기 위한 행사로, 참가비(일시기부 1만 원 또는 정기후원 5천 원)는 위기가정 어린이의 의료·교육·생계비 등으로 쓰인다.공식 행사는 오전 10시에 시작됐다. 개회식에는 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 황규철 회장과 배준영 부회장,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김진용 청장 등이 참석했다. 황규철 회장은 개회사에서 "위기에 놓인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행사"라며 "뜻깊고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가길 바란다"고 했다. 김진용 청장은 "저도 G타워 31층 사무실까지 매일 계단으로 걸어 다닌다"며 "계단오르기 대회가 건강 체크와 증진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대회는 1층에서 계단으로 33층 전망대까지 걸어 올라가는 방식으로, 크게 '기록 측정 경기'와 '완주 경기'로 구분돼 진행됐다. 완주 경기에 참가한 배현지(신송중1)양은 "가끔 아파트 계단을 걸어 다니는데, 오랜만에 걸어서 힘들다"면서도 "완주를 해서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기록 측정 경기 1등은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안주업(41)씨가 차지했다.참가자들은 경기가 끝난 뒤 1층 행사장에서 '위기 어린이 돕기 선물상자 만들기'(학용품 선물세트 포장)를 체험했다.G타워 계단오르기 대회에는 많은 자원봉사자가 참여해 행사 운영 등에 큰 도움을 줬다. 김규분(71·여)씨는 "자원봉사활동을 한 지 10년이 넘었다"며 "위기 어린이 등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조금만 참아"-지난 28일 오전 인천 송도국제도시 G 타워에서 열린 위기가정 어린이를 돕기 위한 '2017 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32층의 계단을 오르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몸풀기 체조-희망 계단오르기 대회 참가자들이 사전 몸풀기 체조를 하고 있다.나눔봉사단'파이팅'-LH 인천지역본부 나눔봉사단원 25명이 행사에 참여해 '토리양카페' 운영 지원과 선물상자 만들기에 참여했다.

2017-10-29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송도 지식기반서비스용지 입주기업 공모방식 매각

■송도 지식기반서비스용지 입주기업 공모방식 매각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 바이오단지 내 지식기반서비스용지(송도동 13의 27 2만2천546.3㎡)를 입주기업 공모 방식으로 매각한다. 인천대와 셀트리온 사이에 위치한 땅이다. 인천경제청은 바이오 업종을 영위하는 연구개발 역량 및 개발 재원 조달 능력을 갖춘 우량 기업·기관·학교법인을 유치해 첨단바이오클러스터의 성공적 조성을 유도할 계획이다. 유치 대상 업종을 영위하는 기업(연구소 포함), 기관, 대학 등이 단독으로 신청하거나 컨소시엄을 구성해 응모할 수 있다. 인천경제청은 내달 22~24일 사업계획서를 접수한 뒤, 12월 중 입주 대상 기업을 선정해 토지매매계약을 체결할 계획이다. 자세한 내용은 인천경제청 홈페이지 공고란을 참고하면 된다.■한국조지메이슨大, 내달3일 '미국세금 특별콘퍼런스'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는 내달 3일 인천글로벌캠퍼스 지원센터 소극장에서 한미택스연구포럼과 함께 '제3회 미국 세금에 관한 특별 콘퍼런스'를 연다.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미국 세금에 관한 특별 콘퍼런스'는 한국 기업의 미국 진출을 돕고, 국제세금제도에 관심 있는 각계 전문가와 대학생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고자 마련됐다. 한미 양국의 세금 전문가들로 구성된 발표자와 패널들이 참석해 미국해외금융자산 및 금융계좌신고제도, 미국 진출 기업에 적용되는 기업 설립 절차와 세금제도 등을 설명할 예정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10-29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1]황해남도 해주시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下)

용당포항 조성 이후 1930년대 고속성장누정 '부용당' 위치한 도청 인근에 살아황해도 행정중심이자 최대 '조기' 산지뱃길 30㎞ 연평도, 인천 편입전 해주권평양과 함께 '냉면 본산'으로 꼽히기도김구·안중근 고향… 장길산 주요 무대소설 속 인물·상권 남·북이 얽히고설켜실향민 호성신(81) 할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도청 소재지 해주시(海州市)이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 황주(黃州)와 해주의 이름을 따서 생겨난 황해도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4년 황해북도와 황해남도로 나뉘었고, 도청도 황해북도는 사리원시에, 황해남도는 해주시에 따로 뒀다.하지만 호성신 할아버지를 비롯한 황해도 실향민들은 여전히 고향을 '북도'와 '남도'로 구분하지 않는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태어난 1936년 당시의 해주는 전국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도시 중 하나였다. 해주 남단 바다인 용당포(龍塘浦)에 근대 항만을 조성하는 축항공사가 마무리된 1930년 10월 이후부터, 해주는 재령평야와 연백평야 같은 황해도 곡창지대에서 생산한 쌀이 용당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수탈기지'가 됐기 때문이다.항만 조성에 이어 용당포항을 중심으로 황해도지역 철도망이 해주에 집결했다. 일본은 용당포항 조성 이전까지 황해도 곡창지대의 쌀을 인천항이나 평안도 진남포를 통해 수탈해갔다. 손정목(1928~2016) 전 서울시립대 도시과학대학 교수가 1996년에 펴낸 '일제강점기 도시화과정 연구'를 보면, 해주 인구는 1930년 2만3천820명에서 1935년 3만447명, 1940년 6만2천651명으로 급증했다. 1930년대 인구 증가율로만 따지면 162.6%로 전국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호성신 할아버지가 살던 해주시 선산동도 황해도청이 멀지 않은 도심지였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해주에서 목수였다고 한다."여기저기 건축 공사가 많아서 아버지 목수 일도 호황이었어. 논밭은 시내 외곽으로 가야 볼 수 있었고, 우리 동네는 기와집 촌이었어. 도로가 닦이면서 동네에 오거리가 생기기도 했지. "당시 황해도청은 옛 해주읍성 자리인 부용동에 있었다. 할아버지 옛집이 있던 선산동의 북동쪽이다. 도청 앞 연못에는 1500년(연산군 6년)에 건립된 누정(樓亭)인 '부용당(芙蓉堂)'이 있었다. 앞채는 연못 가운데에 'ㄱ'자형으로 지었고 뒤채는 연못 바깥에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했다. 부용당은 임진왜란 때 선조(재위 1567∼1608)가 의주로 피란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던 1593년 8월 18일부터 9월 22일까지 한달여간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선조가 친필(어필·御筆)로 '부용당'을 써서 현판으로 걸었다는 기록도 '정조실록'에 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연못에 연꽃이 만발할 땐 아주 운치가 좋았고 절경이었다"며 "보통학교(초등학교) 다닐 때 부용당으로 소풍을 가곤 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부용당은 한국전쟁 때 소실돼 돌기둥과 주춧돌만 남았다. 북한은 그 터를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68호로 지정했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해주에 살던 당시에는 용당포 쪽으로 대규모 시멘트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 우베(宇部)시멘트회사가 설립한 '조선시멘트회사'로 할아버지가 태어난 이듬해인 1937년 6월부터 가동했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25일자 신문을 보면, 조선시멘트회사 해주공장은 연간 생산능력이 57만t으로 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다. 현재까지도 해주는 북한의 최대 시멘트 생산기지이고, 제철·제강, 제지, 섬유 등 각종 산업이 발달한 공업도시다. 해주항은 인천세관에서 관할했다.해주의 공업도시화로 항만 수요가 점점 늘어나자 1940년 8월 인천세관 해주지서가 신설됐다. 해주는 조선 때부터 황해도의 행정중심지였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지역이 넓고 백성이 많으며, 관서(關西)의 큰 주(州)'라고 설명한다. 부용당 같은 화려한 누정이 해주 관청 앞에 있었던 것도 지금의 도지사 격인 황해도 관찰사가 해주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또 해주는 한때 국내 최대 조기 산지이기도 했다. 지금은 인천 옹진군에 속한 연평도가 1945년 11월까지 황해도 해주의 섬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해주의 토산물로 가장 먼저 조기를 소개하며 '남쪽 연평평(연평도)에서 나고, 봄과 여름에 여러 곳의 고깃배가 모두 이곳으로 모이어 그물로 잡는데, 관에서 그 세금을 거두어 나라 비용에 쓴다'고 나온다. 조선 초기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연평도 조기잡이는 일제강점기에도 전국 최대 규모의 '파시(波市·해상시장)'로 번성했는데, 남획이 심해지면서 1960년대 말부터 조기의 씨가 말랐고 결국 그 맥이 끊기고 말았다. 황해도지편찬위원회가 1981년 발간한 '황해도지'에는 1940년 해주의 조기 어획고는 2만8천986t으로 전국 생산량의 80%를 차지했다고 나온다. 연평도와 해주까지의 거리는 뱃길로 약 30㎞, 연평도와 인천 간 거리는 뱃길로 122㎞다. 연평도는 남북 분단과 함께 경기도를 거쳐 인천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해주 문화권이었다. 조기파시로 한때 돈이 넘쳐나던 연평도에서 "연평어업조합장 했지 황해도지사 안 한다"는 말이 유행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동아일보 1940년 1월 9일자는 김삼소(金三笑)의 '돈실러가세'를 신춘 민요 당선 기사를 실었다. '가세나 가세나 돈실러 가세나 해주 연평 섬에 돈 실러 가세나 봄이면 조기 한 철 황금물결이 섬바위에 넘실넘실 손짓을 하네 에헤이요 닻 감아라 돛을 달아라.'호성신 할아버지는 해주시장에 조기가 가장 많았고, 조기 못지않게 까나리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자 황해도민회 임원이기도 한 송용순(97) 할머니를 찾았다.할머니는 20대 중반까지 해주 시내에 살다가 1947년 서울로 피란을 왔다고 했다. 송용순 할머니는 "조기철이면 연평에서 올라온 굴비를 사가려고 용당포에 사람이 바글바글했고, 용당포 근처만 가도 굴비냄새가 났다"며 "아버지가 지주였는데, 소작인에게 쌀과 함께 굴비를 봉급으로 줬을 정도로 흔했다"고 회상했다.조기 말고도 먹을 게 넘쳐났다. 해주는 평양과 함께 냉면의 본산으로 꼽힌다. 해주냉면은 메밀에 전분을 섞어 평양냉면보다 면발이 굵고, 소고기가 아닌 돼지고기 육수를 많이 쓰는 게 특징이다. 백령도의 사곶냉면이 바로 '해주식'이라는 게 음식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평양과 해주가 냉면으로 유명한 까닭은, 두 지역 모두 각 도의 중심지로서 '기방(妓房)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고, 냉면은 기방에서 양반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라고 '냉면열전'(2014)이란 책은 분석한다. 양반들이 주로 먹던 냉면은 근대 이후 서민층으로도 확산해 1934년 기준 해주에는 냉면 전문점 67곳이 성업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1569 ~1618)은 우리나라 명물 토산품과 별미음식을 소개한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해주의 별미로 해조류인 '참가사리', '황각', '청각'을 꼽았다. 최영년(崔永年·1859~1935)이 1925년 쓴 '해동죽지(海東竹枝)'에서는 숭어, 잉어, 조기, 도미 등을 구운 뒤 갖가지 채소, 버섯, 당면을 넣어 끓인 전골인 '승가기(勝佳妓)'를 해주의 명물이라고 했다. 해주가 마냥 풍족한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 박만정(朴萬鼎·1648~1717)이 1696년(숙종 12년) 3월부터 두달여간 황해도지역 암행어사로 활동했을 당시를 일기로 쓴 '해서암행일기(海西暗行日記, 2015, 서해문집)'를 보면, 신분을 숨긴 박만정 일행이 해주의 한 마을에서 하룻밤 묵을 곳조차 찾지 못하고 문전박대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와집이 연이어 있어 부촌 같아 보였으나, 흉년이 심해 인심도 야박했다. 박만정은 해주를 포함한 황해도 곳곳에서 기아에 허덕이다 못해 얼굴이 부어오른 백성들의 몰골을 목격한다.해주는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의 고향이다. 김구는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해주읍 서쪽에 80리 떨어진 백운방(白雲坊) 텃골'이라고 고향을 설명했다. 10대 후반의 김구는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해 동학군 선봉대를 이끌기도 했다. 당시 김구는 황해도 동학교도 대표단으로 뽑혀 충청도 보은에 있는 제2대 동학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을 만나기도 했는데, 일행은 이때 해주의 대표적인 토산품인 '해주먹(海州墨)'을 선물했다고 한다. 해주산 송연(松煙·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으로 만든 먹은 전국에서 으뜸으로 쳤다.지난 9월 2일부터 두 달 가까이 호성신 할아버지 취재가 이뤄지는 동안 할아버지의 고향 자랑은 명승지, 토산물, 음식, 산업, 인물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끊이질 않았다. 할아버지는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도 해주 출신인데 깜빡했다"며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던 기자를 붙잡아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기도 했다. 조선의 3대 도둑 중 하나인 장길산(張吉山)의 일대기를 그린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의 한양과 그 주변, 황해도 등지가 주요 무대다. 강화와 교동 또한 소설에서 많이 언급되고, 백령, 대청, 연평 등 서해5도도 아우른다. 소설 초반부터 장길산을 중심으로 강화에서 장사에 눈을 뜬 송상(松商) 박대근, 해주의 신복동 패거리, 용당포의 선상(船商) 임유학, 연평 출신의 뱃사공 우대용을 비롯해 인천과 황해도가 연관된 주요 인물들이 얽히고설킨다. 강화, 개성, 해주 용당포 같은 한강 하구 연안의 해상물류거점을 둘러싼 상권 다툼이 소설 속에서 치열하게 전개된다. 소설 '장길산' 속 배경이 남북으로 갈린 지금은 전혀 딴 세상 이야기다. 백범 김구와 소설 '장길산'의 흔적을 따라 인천과 해주를 오가며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언제쯤 올까. 호성신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통일되긴 다 틀린 것 같다"면서도 "멀지 않은 고향 땅인데 꼭 한번은 다시 밟아보고 싶다"고 소망했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한국전쟁 이전으로 추정되는 해주시 전경. 출처/'황해도지'(1981)축항공사를 끝낸 해주 용당포항. 출처/'황해도지'(1981)한국전쟁 때 소실된 해주 부용당의 옛 모습. 북한은 돌기둥과 주춧돌만 남은 부용당 터를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68호로 지정했다. 부용당 너머로 황해도청 청사 건물도 살짝 보인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7-10-25 박경호

[zoom in 송도]'제2회 희망계단오르기' 28일 송도 G타워서

작년 11월에 첫 행사 400명 참가올해 적십자·경인일보 공동주최참가비는 의료·교육·생계비 기부걸그룹 공연·VR체험등 이벤트도인천 송도국제도시 G타워에서 희망 계단 오르기 대회가 오는 28일 열린다.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는 28일 오전 10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G타워에서 '2017 제2회 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를 개최한다.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는 다가올 겨울에 추위와 허기 등 위기에 놓인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행사다.참가자들이 낸 참가비(일시기부 1만원 또는 정기후원 5천원)는 위기가정 어린이들의 의료·교육·생계비 등으로 사용된다. 작년 11월 열린 1회 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에는 약 400명이 참가했으며, 정기후원에 130여 명 참여하고 일시기부는 약 2천800만 원이 모였다.올해 행사는 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와 경인일보가 공동 주최한다.한국토지주택공사 인천지역본부, 우리은행 연수동지점, 국민은행 인천남지역영업그룹, 한국자산관리공사 인천지역본부 등이 후원 기관으로 참여한다.대회 참가자는 기업인, 개인, 단체 일반 신청자 등 약 500명이다.이들은 이날(28일) G타워 로비에서 33층 전망대까지 계단을 오르게 된다.이색 복장으로 계단을 오르는 이벤트 경기, 건강을 위해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건강 나눔 완주 경기, 개인·단체별 기록 측정 경기 등으로 구분된다.행사 전에는 재능기부 공연과 참가자들의 안전을 위한 간략한 건강검진 및 준비체조가 진행된다. 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응급처치 전문강사, 간호사, 안전요원, 구급차 등을 행사장에 배치한다.행사 사회는 개그맨 김인석이 맡는다. 공연에는 비타민엔젤(걸그룹), 정윤호 매직아티스트(마술 공연), 엠제로(힙합가수) 등이 참여하며 VR 체험, 캐릭터 포토 타임 등 다채로운 체험 행사가 열린다.G타워 희망 계단오르기 대회는 실생활 계단 오르기 운동을 확산하기 위한 행사이기도 하다.계단 오르기 운동은 짧은 시간에 하체 근육을 단련하는 데 최적이고, 걷기보다 칼로리 소모량이 많다. 보건복지부는 일상생활 속 비만 예방 실천법으로 '계단 이용하기' '걷기' '음료 대신 물 마시기' 등을 독려하고 있다.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 관계자는 "건강한 삶과 나눔을 주제로 한 행사"라며 "인천 시민과 기업의 사회적 나눔 의식을 확산하고, 송도국제도시 랜드마트 건물인 G타워를 홍보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G타워는 2013년 5월 완공된 지하 2층 지상 33층 규모 건물로,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GCF(녹색기후기금) 등 국제기구들이 입주해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지난해 열린 제1회 G타워 계단오르기 대회 모습. /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 제공

2017-10-22 목동훈

[zoom in 송도]송도에 글로벌패션스쿨 '활짝'

한국뉴욕주립대학교(총장·김춘호)는 지난 19일 세계 5대 패션스쿨인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의 한국 개교 축하행사를 성황리에 개최했다.한국뉴욕주립대 FIT는 미국과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교한 것으로, 한국뿐만 아니라 주변 아시아 국가 학생들에게도 FIT를 가까이 만날 기회를 제공하게 됐다는 의미가 있다.이날 행사에는 뉴욕 FIT 총장 조이스 브라운(Dr. Joyce F. Brown)을 비롯해 스토니브룩대학교 총장 사무엘 스탠리(Samuel L. Stanley, Jr. MD), 오명(한국뉴욕주립대 명예총장) 전 부총리, 송영길(전 인천시장) 국회의원, 김진용 인천경제자유구역청장 등 여러 정부기관 및 패션업계 관계자 등 800여 명이 참석했다.뉴욕 FIT 총장 조이스 브라운은 "FIT 뉴욕 외에 세 번째 글로벌캠퍼스를 한국에 오픈하게 된 것이 너무 감격스럽다"며 "여러 아시아권 학생들이 한국뉴욕주립대 FIT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국뉴욕주립대 김춘호 총장은 "FIT 개교로 5개의 스토니브룩 학위 프로그램에서 추가로 2개의 FIT 학위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며 "우수한 패션 인재가 많이 배출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이날 식전 행사로는 한국뉴욕주립대 C동 앞에서 리본 커팅식이 있었다. 본 행사는 가수 소향과 아이돌 그룹 더 킹의 축하 공연, 루마니아 크라이오바 올테니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회, 패션쇼 등으로 다채롭게 꾸며졌다.2012년 개교한 한국뉴욕주립대는 한국정부가 국가사업의 하나로 유치한 학부와 석박사를 모두 갖춘 국내 최초의 미국 대학교다.미국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대학교를 시작으로 이번 가을학기에 패션 명문 스쿨 FIT를 개교했다. 두 학교 모두 홈캠퍼스인 스토니브룩과 FIT의 교수진 그대로 동일한 커리큘럼을 제공한다. 졸업 시 각각 홈캠퍼스인 스토니브룩과 FIT 학위를 받게 된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FIT 개교 축하행사 리본 커팅 세리머니. /한국뉴욕주립대학교 제공

2017-10-22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40]황해남도 해주시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中)

크고 작은 기지 광범위하게 분포… 옷·음식 등 경제 영향력주둔 초기부터 범죄·기지촌 조성 등 심각한 사회적 문제도미군 장교 운전수·배차담당·중장비 하역감독 등 20년 일해월미도·중부서 자리 해상수송부 등 옛 위치 하나 하나 짚어부대 규모·기능 등 체계적 정리 없어… 할아버지 증언 의미황해도 해주 출신 호성신(81) 할아버지는 21살 되던 해인 1957년부터 20년 가까이 인천에 있는 미군부대 여러 곳에서 근로자로 일했다. 월미도 미군부대 장교 운전수로 시작해 미 해군 해상수송부 장교 운전수, 부평미군부대 차량 배차담당, 인천항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을 차례로 맡았다."참 팔자가 좋았던 시절이야. 미군부대에서 장교를 상대하니까 혜택도 많고, 잘 보이려는 사람도 많고. 덕분에 보라색 양복 쫙 빼입고 신포동에서 오토바이 타고 다녔지."인천은 항만을 낀 데다 수도권이라서 해방 직후부터 곳곳에 미군부대가 들어선 '미군기지의 도시'였다. 군사장비와 시설을 운용하는 데 필수인 기름부터 미군 병사들이 먹는 빵까지 대부분의 미군 군수물자는 인천에서부터 전국의 미군기지로 퍼져나갔다. 미군 전용철도도 거미줄처럼 도시에 깔렸었다. 이렇다 보니 호성신 할아버지 같은 미군부대 근로자는 물론 인천 지역사회 전반에 걸쳐 이른바 '미군부대 경제'가 끼친 영향력이 지대했다. "옷, 음식, 약품까지 미군 PX물자가 어마어마하게 밖으로 흘러나왔고, 미군부대 출입증이 비싸게 거래됐어. 미군 기름창고에서 기름 빼돌리는 사람도 많고, 기지촌에 양색시도 많았고…. 솔직히 미군 때문에 먹고 산 사람이 인천에 많아."반면 미군의 한반도 주둔 초기부터 발생한 미군 범죄나 기지촌 조성 등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불거지기도 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인천항 부근과 월미도부터 남구 숭의동, 용현동, 학익동, 문학산 일대까지 크고 작은 미군부대가 광범위하게 분포했다. 부평지역은 주한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인 '애스컴(ASCOM·Army Support Command)'을 비롯한 미군부대가 대거 몰려있어 '애스컴 시티'라 불리며 도시 자체가 군사기지나 마찬가지였다. 현재 인천에는 부평 '캠프마켓(Camp Market)'과 강화도에 극히 소규모 부대만 남았을 뿐이고, 그 미군부대 터는 공원이나 아파트단지 등으로 바뀌었다.미군의 한반도 상륙 출발점은 1871년 강화도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미군의 첫 교전인 신미양요(辛未洋擾)다. 이어 미군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두 번째로 한반도에 상륙했다. 당시 인천항에 몰린 환영 인파에 일본 경찰들이 치안 유지를 내세워 총격을 가해 2명이 숨졌다. 서울신문사가 1979년 펴낸 '주한미군 30년(1945~1978)'에서는 당시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패전국 일본의 경찰이 승전국인 미군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승전국도 패전국도 아닌 한국인에게 발포한 불법 총격이었다. 해방을 맞고서도 일본 경찰에게 총격을 당한 인천시민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맞서 싸울 총도, 정부도 없던 이들은 이틀 후 두 사람의 사망자를 시민장(市民葬)으로 치르는 것으로 무력함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주한미군 규모는 1948년 5월 기준으로 약 3만명에 달했다. 인천항 주변과 일본군 군수기지인 부평 조병창도 미군이 접수했다. 다음은 소설가 이원규가 해방 직전부터 한국전쟁까지의 인천을 다룬 장편소설 '황해'(1992)에서 묘사한 해방 후 인천항 주변 풍경이다. '인천항은 온통 미군 함정들로 가득차 있었다. 반도 중부의 보급항 구실을 하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아구리배라고 부르는 수송선들이 큰 입을 벌려 물자와 병력을 내려놓고, 외항에는 구축함과 순시선들이 떠 있었다. (중략) 남루한 옷을 걸친 아이들은 미군들에게 매달리며 어떻게들 배웠는지, 헤이 지아이 넘버원 기브미 추잉껌, 기브미 쪼코레트, 하며 따라붙었다.'1949년 6월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서 철수한 미군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해 9월 15일 연합군을 이끌고 인천에 세 번째로 상륙했다.연합군의 상륙지점 중 하나인 월미도는 인천상륙작전 이후부터 미군이 '징발'해 미군부대를 구축, 미군이 떠나간 1971년까지 20년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됐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월미도에 살던 주민들은 졸지에 실향민이 되기도 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1957년부터 2년 정도 월미도 미군부대에 근무했다. 월미도 미군부대 땅은 인천시가 국방부로부터 사들여 2007년 월미공원을 조성했다.지난 추석 명절 직전인 9월 29일 호성신 할아버지와 월미공원을 찾았다. 할아버지는 옛 기억을 곱씹으며 옛 미군부대 시설이 있던 자리를 하나하나 짚어냈다. 월미공원 정문이 바로 미군부대 정문이었다고 한다. 현 미추홀 전통문화음식연구원 건물 자리는 장교 숙소였고, 주요 시설은 전통공원이 조성된 자리에 몰려있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공원 내 동물원이 할아버지가 장교 차량 운전수로 근무하며 주로 머물던 수송대(모터풀·Motor pool) 터라고 했다. 각종 기록을 보면, 월미도 수송대의 부대명은 미 제202수송대대다. 할아버지가 몰던 차는 쓰리쿼터(3/4t) 트럭 같은 군용차가 아니라 포드(Ford) 승용차였다. "라이브러리(library·도서관), 피엑스(post exchange·군부대 매점), 짐나시움(gymnasium·체육관)도 갖췄고 없는 게 없었어. 부대 내 한국인 근로자들은 100명쯤 됐던 것 같아."월미도 미군부대에는 미군 병사의 각종 법무를 처리해주는 법무사무소(Legal office)도 있었다고 한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미군 병사와 한국 여성이 리걸 오피스에서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이현호라는 한국사람이 리걸 오피스 사무원으로 일해 영어로 전화받으면서 타이프도 쳐서 유명했는데, 미국으로 이민갔다"고 회상했다. 소설가 오정희는 1979년 발표한 단편 '중국인 거리'에서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월미도 미군부대 인근 인천차이나타운을 그렸다. 소설 속 미군 병사는 호기심으로 미군부대를 훔쳐보던 동네 꼬마들을 향해 칼을 던지며 놀려댔다. 소설 속 아이들이 '양갈보'라고 칭하는 한국인 여성들은 일본인들이 살던 그 가옥에 거처하면서 미군 병사를 상대했다. 소설 '중국인 거리'처럼 미군 병사가 여성을 살해한 사건도 실제로 다수 있었다.호성신 할아버지는 현 인천중부경찰서 자리에 사무실을 둔 미 해군 해상수송부(MSTS·Military Sea Transportation Service)로 자리를 옮겨 10여 년 동안 미 해군 부대장의 차량 운전수로 일했다. 미 해군 해상수송부는 부대장을 포함해 8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인천항에 미 군함이나 군용수송선이 들어오면 행정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는 게 할아버지 설명이다. 미 해군 해상수송부 바로 옆에는 미 헌병대가 있었다고 한다. 미군 범죄수사대(CID)도 인근에 있었다. 근처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맞은편 선구점 거리에는 'US호'라는 간판을 단 미군만 출입할 수 있는 스낵바도 영업했다고도 했다. 중구 수인사거리에 있는 삼익아파트 자리에는 제법 규모가 큰 미군 PX창고가 있었는데, 여기서 '미제 군수품'이 민간으로 많이 빠져나왔다고 한다. '주한미군 30년(1945~1978)'을 보면, 1950년대 말 전국에 120곳이 넘는 미군 PX에서 취급한 물품의 60%는 시중으로 흘러나갔다고 추정했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나도 해군 중령 자동차 시트 밑에 물건을 숨겨다가 밖으로 뺐다"며 "화수동에 집을 지을 때는 흑인 병사가 각종 건축자재를 갖다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남구 용현동과 학익동에는 미군 유류저장소(POL)와 이를 관리하던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다. 문학산 정상은 1959년부터 미군이 차지하다 1979년 한국군 공군이 인수했고, 2015년에야 개방됐다. 분단과 인천 미군부대를 소재로 여러 작품을 쓴 인천 출신 이원규(70) 작가는 "부평미군부대 폐품처리장에서 나온 맥주 깡통을 펴서 집 지붕으로 만든 사람도 있고, 양공주도 100명 넘게 봤다. 미군부대에서 경비로 일한 외가 친척이 준 미군 워커는 고등학교 내내 신고 다녔다"며 "미군부대는 인천사람들에게 삶의 일부였다"고 유년시절을 회상했다. 부평 애스컴으로 자리를 옮긴 호성신 할아버지는 운전수로 일하다가 차량 배차담당을 맡았다. 할아버지는 "애스컴 앞은 전부 색시촌과 맥주홀로 쫙 깔려있었다"며 "흑인은 흑인끼리 백인은 백인끼리 따로 놀았다"고 했다. '주한미군 30년(1945~1978)'에서도 신촌이라 불린 부평미군부대 앞에 대해 '서부영화에 나오는 미국 개척도시보다 더욱 미국적이었고, 밤의 여인들의 숫자는 한때 2천명을 훨씬 상회하기도 했다'고 나온다. 호성신 할아버지는 애스컴에서 인천항 미군 중장비 하역감독으로 승진했다. 해방 이후(1949년 미군 철수~한국전쟁 발발 사이는 제외) 인천항은 미군항만사령부(1958년 애스컴 편입)가 '징발'해 주둔한 미군용부두와 일반부두로 나뉘어 운영됐다. 미군용부두 내에는 미군 공병부대도 있었다고 할아버지는 기억한다. 미군이 미군용부두를 '징발 해제'해 운영권이 한국 정부로 넘어온 때는 1971년 6월이다. 인천에 미군부대가 정확히 어느 정도 규모로 어디에 위치해 있었고, 그 기능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이제는 미군부대를 기억하는 이들도 흔치 않다. 호성신 할아버지가 단편적이나마 되살려낸 인천 미군부대에서의 경험은 그래서 더욱 귀하게 다가온다.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황해도 해주 출신 호성신 할아버지가 1950년대 말 근무했던 월미도 미군부대 내 장교 숙소가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인천항과 월미도 일대에 있었던 미군부대를 포함한 주요 시설을 표기한 지도(작성 연도 미상). 월미도에 검은 사각형으로 표기된 미군부대 건물 배치 현황은 호성신 할아버지 기억과 상당히 일치한다. 할아버지가 장교 운전수로 근무했던 미 해군 해상수송대(MSTS)를 비롯해 미 헌병대, 공병부대도 지도에 표시돼 있다. /부평역사박물관 제공미군부대에 근무하던 시절 받은 문서를 설명하고 있는 호성신 할아버지.

2017-10-18 박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