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1]황해도 벽란도 출신 이춘화 할머니(中)

남편 제대금으로 좌판 3개 사 50년째 장사1930년대 조성 정식명칭은 송현 자유시장철거 후 다시 재건 미군 물건 팔면서 '명성'군복 자체가 패션이던 시절 가장 많이 팔려당시 한달 수익이 대기업 부장 월급의 2배군복 염색 안하고 팔면 '불법' 벌금 물기도부대물건 줄어 미제 청바지 등 수입품 대체의류산업 발전 등으로 쇠퇴… 명맥만 유지경인전철 동인천역 4번출구(북광장) 오른편에 '중앙시장 전통혼수거리'가 있다. 한눈에 봐도 지은 지 수십 년은 돼 보이는 건물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품이 거래됐다고 해서 '양키시장'으로 불렸다. 인천 동구가 행정 명칭으로 정한 이름은 '송현 자유시장'이다. 양키시장은 1930년대에 조성됐다가 철거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쳤다. 양키시장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골목을 지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붐볐다고 하는데, 지금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이춘화 할머니는 50년이 넘도록 이곳 양키시장을 지키고 있다. 할머니는 직업 군인 남편을 만나 결혼할 때까지 서울 청량리 '태창방직' 공장에 다녔다. 결혼 뒤에는 남편 근무지를 따라 강원도 춘천 등지에서 살았다. 1966년께 남편은 대위로 제대를 했는데 제대금이 15만원이었다. 당시 15만원이면 한 가족이 살 수 있는 넓은 집을 한 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돈으로 양키시장의 좌판 3개를 샀다. 당시 집안 식구들이 인천 동구에 살아 양키시장과 인연이 닿았다. 양키시장은 주식회사 형태로 돼 있어 회사 지분을 취득하는 방식으로 좌판 계약을 했다. 가게 이름은 '은영사'로 정했다. 인천 동구 화평동에 조그만 전셋집을 얻었다. 옷 장사를 시작한 뒤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올해로 51살이 됐다. 할머니는 둘째 아들의 나이를 이야기하다 양키시장에서 50년이 넘도록 장사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세월이 오래됐다"고 말했다. 요즘은 재고나 팔아 볼까 하는 생각으로 나오지만 손님이 없어 매일같이 허탕이다.양키시장의 역사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합시장으로는 인천에서 가장 오래됐다. 양키시장이 생기기 전인 1890년대에 중구 신포동에는 어물전(생선전)이 있었다. 채소를 취급하는 '푸성귀전'도 있었다. 신태범의 책 '인천 한 세기'는 "일찍이 19세기 말에 이곳(신포시장)에 자리를 잡은 청국인의 푸성귀전이 현재 인천에서 으뜸가는 권위를 지니고 있는 신포시장의 전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양키시장 자리는 바닷물이 들어오던 갯골이었는데, 1925년 매립됐다고 한다. 인천학연구원에서 기획한 '인천전통시장의 성장과 쇠퇴'라는 책에 따르면, 1937년 이 자리에 '송현일용품시장'이 들어섰다가 1940년대 중반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제에 의해 전술적인 이유로 철거되기도 했다. 미국이 1945년 3월 일본 도쿄에 '소이탄(시가지와 밀림을 태우는 목적으로 개발한 포탄)'을 이용한 공격을 했고, 목조건물이 많았던 일본이 큰 타격을 입은 바 있다. 이에 일제는 소이탄 공격으로 인한 화재 확산을 예방하기 위해 인천을 비롯한 한반도 주요 시가지를 중간중간 공터로 만드는 일명 '소개공지'를 조성했다. 인천의 경우 만석동, 송현동 일대에 3곳이 지정됐는데 양키시장 자리가 포함됐다. 해방 후 제물포상인보존회의 주도로 시장 재건이 추진됐고, 노점상들은 송현동 100번지에 사무실을 두고 소성자유시장자치조합을 출범시켰다. 이후 부평 미군기지(캠프마켓) 등에서 시장으로 물건이 흘러들었고, 미군 물건을 팔면서 '없는 것이 없는 시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고일의 '인천석금'(仁川昔今)에도 양키시장과 신포동 일대의 시장 성장사가 잘 설명돼 있다. 전국적으로 이 같은 양키시장이 많았다. 서울 남대문시장, 부산 국제시장이 전국적으로 유명했고, 인천과 대구의 양키시장도 규모가 큰 편에 속했다.인천 양키시장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사가 잘 됐다. 시장 골목골목에 인파가 몰려 제대로 이동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때는 사람이 미어졌어." 할머니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하루 매출이 50만~70만원이었다고 했다. 이 중 10만원 정도가 남았다. 한 달이면 250만원 이상을 벌었다. 대기업 부장 월급의 2배 정도였다. 아들 둘에 딸 하나를 교육시키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아파트도 샀다.할머니가 양키시장에서 가장 많이 판 것은 군복이었다. 1960년대는 국내 옷감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때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은 그 자체가 유행이었다. 할머니가 장사를 시작했을 당시 군복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는데, 80년대까지도 군복을 구하러 시장에 오는 사람이 많았다.우리의 현대 의류 역사를 정리한 책 '현대패션 110년'은 1950년대 우리나라의 패션 경향을 군복으로 설명한다. "군용담요는 겨울옷을 만드는 원단이 되었고, 미군의 털양말은 어린이용 스웨터로 활용되었으며, 카키색의 군복 바지는 몸뻬로 개조되었다. 염색한 군담요 의상과 군 점퍼, 미처 염색이 끝나지 않은 카키색 군복을 줄여서 수선한 바지, 그리고 군화를 신고 거리를 누비는 모습은 익숙한 광경이 되고 있었다. 미군 군수물자에 찍힌 'UN'이나 'U.S.A.'라는 글자는 염색을 해도 지워지지가 않아서 미군 담요에 물감을 들여 코트를 만들어 입으면 'U.S.A'라는 글자가 비쳐 나와 그 옷 주인의 별명이 'U.S.A.'라고 불리는 웃지 못할 서글픈 추억도 있었다."양키시장에서는 군복 이외에 미군 부대에서 나온 각종 물품이 팔렸다. 할머니도 군복 이외에 미군 군화, 반합 등을 팔았다고 했다. 다른 상인들은 통조림, 담배, 과자를 팔고 시장에는 암달러상도 있었다. 할머니는 이들 물품이 인천 부평의 '캠프마켓'뿐만 아니라 서울 용산, 경기도 문산, 동두천 등 수도권에 있는 미군 부대에서도 흘러왔다고 했다.동아일보 1955년 5월16일자는 당시 양키시장의 물품이 어떻게 미군 부대에서 빠져나오는지 4단계로 구분해 소개했다. 미군 육지 수송을 할 때 빼돌리기, PX에서 빼돌리기, 미군 부대 출입하는 개인이 가져오기 등이 있었는데, 대다수는 한국에 수송되는 단계에서 대량으로 빼돌린다고 했다. "흔히 '양키' 물건은 미군인들이나 또는 미군부대에 드나드는 한국인 종업원 등에 의해서 새 나오고 구호품 등에서 시장에 흘러나온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전혀 이 방면의 내막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물론 약간의 양키 물건은 호주머니 속에 감추어 빼내오는 소위 '얌생이'에 의해서 시장으로 나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현재 우리가 하루하루 소비하고 있는 엄청난 수량의 '양키' 물품은 도저히 그러한 미미한 공급으로는 충당할 수 없는 것이다. (중략) 첫째 단계가 미군 수송선에서 물품이 양륙(揚陸)될 때 그 방면의 요로와 사전 연락이 있은 후 교묘한 수단을 써서 감쪽같이 집더미만한 (때로는 반톤급) 짐 덩어리가 괴짝으로 송두리째 옆으로 흘러나온다. 때로는 조고만 발동선이 동원되고 때로는 한번 덤벙 바닷물 속에 가라앉았다가 다시 바깥 세상에 나오게도 된다."당시 군복을 그대로 입을 경우 불법으로 단속의 대상이 됐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야전점퍼나 전투복 상의를 검은색으로 염색해 팔았다. 전투복 하의를 염색한 '스모루바지'도 인기였다.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맞는 사이즈가 '스몰(small)'밖에 없어 스모루바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대패션 110년'은 "시장골목은 염색집으로 넘쳐났고, 드럼통 염색 솥은 수증기를 뿜으며 쉴 새 없이 군용물자를 삶고 있는 모습도 낯설지 않았다. 남학생들은 일부러 모자를 찢어 다시 재봉틀로 누벼 쓰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으며 역시 군복을 염색한 옷을 입었다"고 했다.이춘화 할머니는 염색하지 않은 옷을 팔다가 여러 차례 단속을 당했다. 단속되면 옷을 빼앗기고 벌금을 물어 한 달 치 수익이 고스란히 날아가니 상인들은 항상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미군 헌병이나 경찰이 와서 군복을 뺏어가고 그랬지. 뭐 알려주는 것도 없어. 갑자기 와서 다 뺏어가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일부러 군복을 많이 내놓지 않고 다른 데 숨겨 놓기도 하고 그랬어."방일영문화재단에서 발간한 한국문화예술총서 '우리생활 100년·옷'에도 이 당시 단속 풍경이 그려진다. "관공서에서 군복 군화 등 미국 구호 물자를 일반인에게 배급하였는데, 배급하는 것 외에도 도난품이 많아져 경찰 당국으로선 큰 두통거리였다. (중량) 미군 원조 물자 구제품을 염색하는 전문 염색점이 서울 청계천변에 생기기도 하였다. 군용 기름 드럼통에 검정물을 끓여서 카키색 군복을 물들이는 곳이 즐비하고, 방파제로 쌓아 놓은 돌 위에 염색한 옷을 말리는 광경은 복개하기 전 청계천변의 풍속도였다."할머니는 양키시장에서 군복뿐만 아니라 작업복, 청바지, 체육복 등도 팔았다. 일주일에 2번은 전철을 타고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양키시장까지 옷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날랐다. 할머니와 같은 상인이 많아 역전에서 보따리를 든 사람의 탑승을 막기도 했다. 할머니는 "시간이 지나면서 상인들이 봉고차를 빌려다 장을 보게 됐고, 나중에는 택배로도 물건을 받아보게 됐다"고 했다.양키시장에서는 인천항을 통해 뱃사람들이 가져온 미제 청바지도 팔았다. 일본서 외항선을 타는 사람들이 가져온 가죽점퍼도 있었다. 남대문시장에서 나오는 소위 '짝퉁'도 많았다. 해외 스포츠 브랜드 등이 많았다. 인천학연구원이 낸 '인천전통시장의 성장과 쇠퇴'는 "1970~80년대 부평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물건들이 거의 없어졌고,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는 수입 물건들이 대신 자리를 잡았다. 90년대 양키시장은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유명 브랜드의 모조품들, 소위 말하는 짝퉁을 파는 시장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할머니는 "예전에는 가짜 메이커도 좋다고 학생들이 찾아 입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가짜를 입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국내 의류산업이 발전하고, 생활 수준이 높아질수록 양키시장은 경쟁력을 잃어갔던 거다. 2000년대 초반 단행된 '수입소화물규제'로 중구 항동 제2국제여객터미널 통해 수입상들이 개인적으로 들여오던 물건의 제한량이 40㎏에서 절반으로 줄어든 것도 시장 쇠퇴의 원인으로 꼽힌다.지금은 시장에 있는 90여 개 좌판 중 절반은 비어 있다. 양키시장 상인 가운데 이북 출신이 절반 이상으로 수십 명은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장사를 그만두거나 세상을 떠났다. 양키시장에서 여전히 장사하는 실향민은 할머니를 포함해 3명뿐이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50년 넘게 인천 동구 송현동 양키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이춘화 할머니가 가게에 진열된 물품을 정리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이춘화 할머니의 가게 '은영사'. 할머니는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예뻐서 지었다"고 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7-08-09 홍현기

[zoom in 송도]트리플스트리트에 국내최대 '몬스터VR'

문광부·콘텐츠진흥원 ‘VR체험존’ 첫 결실GPM과 국내개발사 협업 콘텐츠 40종 선봬정글존·익스트림·시네마구역 볼거리 다양관람객들 실제같은 몰입감에 ‘즐거운 비명’인천 송도국제도시 복합쇼핑몰 트리플스트리트 D동 6층에 국내 최대 규모의 도심형 VR(가상현실) 테마파크 '몬스터 VR'이 지난 4일 개장했다. 몬스터 VR은 국내 VR산업의 놀라운 성장을 한눈에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국내 VR업체들이 개발한 25종의 VR콘텐츠와 15종의 어트랙션을 즐길 수 있다.특히 몬스터 VR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미래 먹거리와 문화·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VR 콘텐츠 체험존 구축 지원사업의 첫 결과물이다.공모를 통해 선정된 게임 개발 및 게임 서비스플랫폼 회사인 'GPM'은 (주)비브스튜디오, (주)미디어프론트 등 국내 VR 개발업체들과 협업해 몬스터 VR을 조성했다.GPM 박성준 대표는 "시행착오와 험난한 길이 많았다"며 "많은 파트너사, 문체부와 진흥원의 도움이 없었다면 몬스터 VR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몬스터 VR은 작은 놀이공원을 연상케 한다. 테마파크에 들어가면 열기구와 번지점프, 외다리 건너기, 슈팅, 래프팅 등을 즐길 수 있는 '정글존'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중앙에는 GPM이 개발한 5개의 '큐브'가 있다. 가로와 세로 3.3m, 높이 2.7m 규모의 큐브에서 고글 모양의 헤드셋을 쓰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익스트림' 구역에서는 VR을 통해 카레이싱과 봅슬레이 등을 체험할 수 있다.카레이서가 돼 자동차를 운전하고, 롤러코스터를 타고 중국 만리장성과 캘리포니아 해변까지 시공간을 넘나드는 짜릿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시네마' 구역은 VR 영상 콘텐츠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아프리카 정글을 탐험하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닌자가 돼 칼 솜씨를 뽐낼 수 있다. 세계적인 축구 선수들이 차는 페널티 킥을 막는 골키퍼도 될 수 있다. 단순한 오락게임뿐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체험시켜 줄 교육용 콘텐츠도 있다.이날 오전 11시 개장식이 열렸다. 문체부 김상욱 콘텐츠정책관은 "인천 송도가 첨단도시, 한류 관광도시로 발전하는데 몬스터 VR이 기여할 것"이라고 했고, 인천시 조동암 정무경제부시장은 "바이오와 첨단산업이 어우러진 송도에 몬스터 VR이라는 의미 있는 시설이 들어왔다"고 했다.몬스터 VR은 개장식이 끝난 후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개장 첫날에도 적지 않은 사람이 몬스터 VR을 찾았으며 곳곳에서 즐거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경기도 용인에서 아이들과 함께 온 윤연(45·여)씨는 '정글래프팅'을 탔다. 정글래프팅은 정글을 테마로 협곡, 동굴, 폭포 등 다양한 공간을 연출해 체험의 몰입도와 재미를 극대화한 실감형 기기다.윤연씨는 "예상보다 세밀하다. 실제와 가깝고 리얼리티가 있다"며 "우리 업체 기술이 이렇게 발전했는지 몰랐다. 잘 만들었다"고 말했다.몬스터 VR 운영 시간은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10시까지다. 자유이용권 가격은 청소년·성인 기준으로 평일(월∼목) 2만8천원, 주말(금∼일, 공휴일) 3만8천원이다. 소인(8~13세) 자유이용권은 청소년·성인보다 9천 원 싸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7-08-06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한국조지메이슨대, 소외계층 청소년 '영어캠프' 개최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위치한 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는 지난 2~4일 경기도 광명시 소외계층 청소년 20명을 대상으로 여름 영어캠프를 운영했다. 한국조지메이슨대와 광명시는 지난해 6월 글로벌 교육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한 바 있다. 지난 2일부터 사흘간 진행한 여름 영어캠프에서 한국조지메이슨대 학생들은 광명시 학생들의 멘토로서 영어 자기소개, 영어 일기 쓰기, 해외 문화 체험하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의 진행을 도왔다.스티븐 리 한국조지메이슨대 총장은 "이번 첫 여름 영어캠프를 계기로 지속해서 지역 내 소외계층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추진할 계획"이라며 "여름 영어캠프에 참여한 광명시 청소년들이 글로벌 시대에 맞는 경쟁력 있는 인재로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했다.한국조지메이슨대는 미국 버지니아 주립대학인 조지메이슨대학교의 글로벌 한국 캠퍼스로, 본교와 동일한 커리큘럼과 학위를 제공한다. 현재 한국조지메이슨대는 경영학, 회계학, 재무금융학, 경제학, 국제학, 분쟁분석 및 해결학 등 6개 학사 과정을 제공하고 있으며, 내년에 '시스템공학' 석사 학위 과정을 개설할 예정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08-06 목동훈

[송도국제도시 브리핑]인천글로벌캠퍼스, 여름방학 청소년프로그램 '풍성'

인천글로벌캠퍼스운영재단이 지난 겨울방학에 이어 여름방학에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인천글로벌캠퍼스운영재단이 주최하고 인천경제자유구역청 등이 후원한 '2017 청소년 글로벌 리더스 포럼'이 이달 1~6일 5박6일 일정으로 인천글로벌캠퍼스에서 열렸다. 이 포럼은 글로벌 리더를 꿈꾸는 전국의 중등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제적 어젠다에 대해 심층 토론을 벌이는 행사다. 참여 학생들은 전시와 발표로 결과물을 도출하고, 이에 필요한 프레젠테이션 및 스피치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모든 과정은 영어로 진행됐다.지난 4~5일에는 '대한민국 청소년 동아리 전시대전'도 열렸다. 이 행사는 전국의 중등학교 동아리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홍보하고 교류하는 '청소년 축제'다. 지식중심교육에서 소통중심교육으로, 개인 역량 중심에서 리더십과 소통 역량이 강조되는 시대를 사는 대한민국 청소년들을 위한 행사다. 소통 능력과 리더십을 갖춘 글로벌 인재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인천글로벌캠퍼스운영재단 관계자는 "지난 겨울방학 캠프 참가자 가운데 올가을 인천글로벌캠퍼스 입주 대학에 입학 신청을 마친 학생들이 있다"며 "동아리 전시회는 전국에서 많은 학생이 오기 때문에 청소년을 1천 명 이상 모을 수 있는 홍보 효과가 상당히 높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2017 청소년 글로벌 리더스 포럼'이 지난 1일부터 5박6일 일정으로 인천글로벌캠퍼스에서 열렸다. 포럼에 참여한 전국의 중등학생들은 국제적 어젠다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인천글로벌캠퍼스운영재단 제공

2017-08-06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0]황해도 벽란도 출신 이춘화 할머니(上)

1950년 겨울, 일곱식구 인천 화수동 거쳐 안산行겨우 숨은 방공호가 전쟁 중심부 이때 모친 잃어다시 인천으로 갔다가 먹고 살 걱정에 고향 복귀인민군 괴롭힘 너무 심해 강화도로 마지막 피란10대때 '인천노동사 큰 의미' 심도직물 공장 취직이후 대구·서울 등 섬유산업 중심에서 경력쌓아고려시대 국제 무역항으로 유명한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벽란도' 출신 이춘화(83)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무려 4번이나 피란살이를 했다. 그 뒤 10대 여공생활을 거친 할머니는 인천 동구 일명 '양키시장'에서 50년이 넘도록 옷 장사를 하고 있다. 4번의 피란과 10대 중반에 시작한 직물공장 여공생활, '양키시장'에서의 좌판 장사까지, 이춘화 할머니의 일생을 돌이켜 보면 그야말로 '원더우먼'의 삶 그 자체다.이춘화 할머니가 처음 피란을 나온 것은 1950년 겨울이었다. 벽란도 옆 '고미포'에서 돛단배를 타고 인천 화수동으로 왔다. 부모와 오빠 둘, 여동생 둘, 일곱 식구가 쌀이며 짐을 배에다 싣고 나왔다. 인천에서 오빠들은 학도병으로 지원 입대했다. 인천에서 머문 시간은 며칠 되지 않는다. 중공군이 인천까지 밀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또다시 경기도 안산까지 두 번째 피란을 떠났다. 국가기록원의 '6·25전쟁 제 3단계'를 보면 유엔군은 1951년 1·4후퇴로 평택-삼척 선까지 철수했다. 할머니는 안산 '무찌리'라는 동네에 있는 민가 뒤 방공호에 숨어 있었는데, 피란지가 전쟁의 중심부였다고 기억했다. 방공호에 있으면 온종일 미군 비행기 쌕쌕이가 오가고 포탄이 떨어졌다. "피란을 간다고 한 건데 거꾸로 전쟁 속으로 들어간 거야, 아침에 (방공호에서) 나오면 포탄이 말이야 마당으로 한가득이야." 이때 할머니의 어머니가 그만 포탄에 맞아 돌아가시고 말았다.할머니는 당시 안산에서 중공군이 쏟아져 내려오는 장면도 목격했다. "중공군은 겨울이라 위장을 하려고 그런지 하얀색 이불을 뒤집어쓰고 왔어. 사람 수가 많아 보이려고 했는지 꽹과리를 치고 난리인데 어찌나 시끄러운지 몰라."할머니가 피신한 마을에는 인민군들도 내려왔는데, 주민들에게 큰 해코지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마을 주민과 한 인민군 장교가 잘 지냈다. 마을 주민들은 인민군에 밥을 해주고 사이 좋게 지냈다고 한다. 고마움을 느껴서인지 이 인민군 장교가 할머니 가족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해줬다. 안산에서 전투가 계속되니 차라리 다시 인천으로 피하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였다. 자신들은 수색(서울시 은평구 수색동 일원)을 거쳐 서울로 갈 것이라며 자신과 방향을 달리해 인천으로 가면 무사할 것이라고 했다. "교회를 다니는 인민군이었는데 그 사람 이야기가, 인천으로 가는데 산 쪽으로 가지 말고 밭이나 논두렁 가운데로만 가라고 했어. 길 양 끝에는 폭탄을 묻었다는 거야. 근데 진짜로 3일인가 있었는데 산에다 엄청나게 퍼붓더라고. 그 인민군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피란했지."할머니 가족은 인천에 있다가 먹고살 길이 막막해 도로 고향에 들어갔다. 이북이 오히려 안전하다는 정보를 들었다고 했다. 화수동에서 배를 타고 강화도 초지로 갔다가, 벽란도와 가까운 산이포까지 걸어간 뒤 그곳에서 배를 타고 벽란도 고향으로 갔다. 세 번째 피란이었다. 할머니는 "이북에 가니까 다 말짱했다"고 했다. 고향에 간 할머니 가족은 예전처럼 농사를 지었다. 농사는 1951년 1~2월부터 6월까지 계속됐다. 그러다 인민군들이 너무 괴롭혀 어쩔 수 없이 네 번째로 다시 강화도로 피란을 나왔다는 것이 할머니의 얘기다. 인민군은 할머니 가족이 '이남 사람'이라며 분산 배치했다. 할머니는 동생과 함께 해주 근방까지 걸어가야 했다. 인민군은 벽란리 근처 '방개월'에 있는 학교 운동장에 주민들을 모아 놓고 둘씩 나눠 갈 곳을 말했다.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소총 개머리판으로 찍어 내리고는 했다. 할머니는 여동생 한 명과 한 조를 이뤘다. "왜정 때보다 더 많이 뺏어갔어. 거기다 계속해 강제로 교육을 받게 하고, 가족까지 나눠서 가라고 해서 도저히 못 있겠더라고." 할머니가 강화도로 다시 피란을 나올 때는 강화도에 있던 사람들이 도움을 줬다. 밀선을 탔는데 강화도에서 안전한지를 신호로 알려줬다. "강화도에서 횃불을 두 번 들면 '적군이 있다'는 얘기였고, 세 번을 들면 '아무도 없다'는 식이었지. 강화도 신호랑 물때랑 맞춰서 그렇게 강화도로 다시 갔어. 전쟁 속을 들어갔다가 전쟁 속으로 다시 나왔어. 전쟁 마당 마당 다 돌아댕겼네."4번째 피란 이후 이춘화 할머니는 강화도의 심도직물 공장에 다녔다. 할머니 나이 16~17살 때였다.지난 7월 21일, 할머니와 함께 강화도 용흥궁 공원에 있는 심도직물 터를 찾았다. 할머니가 심도직물 터에 발을 디딘 것은 66~67년 만의 일이다. 할머니는 '첫 직장' 심도직물 터 곳곳을 둘러보면서 잊고 지냈던 기억을 더듬었다. "심도직물이 어떻게 됐을까 그렇게나 궁금하더라고. 그런데 이렇게 공원으로 바뀌었네. 그려."할머니는 가족과 함께 선원면에 살았는데, 매일 왕복 20리(약 8㎞) 길을 걸어 다녔다. 지금은 심도직물 터에 굴뚝만 남아 있는데, 그 옆의 비석에는 '이곳은 1947년부터 2005년까지 국내 굴지의 직물회사로 명성이 높았던 심도직물(주)이 자리잡았던 곳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 있다.할머니는 일할 당시(1953년 추정) 심도직물의 공장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고 기억했다. 1960년대를 지나면서 할머니가 일했을 때보다 크게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1959년에 나온 '경기사전(京畿事典)'을 보면 심도직물공업사의 소재지는 강화면 궁청리 394이고, 종업원수는 230명으로 돼 있다.강화군청이 심도직물 터에 설치한 표지판에는 '60~70년대에 직원이 1천200명 정도였고 거쳐 간 사람들 수만 해도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고 돼 있다. 강화문화원에서 1976년 발행한 '강화사'는 심도직물, '심도(沁都) 견직 공업 주식회사'를 이렇게 설명한다. "전 국회의원인 김재소가 출자 경영하는 업체로 현재 역직기 210대의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1천200여 명의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는데 생산되는 견직물은 국내는 물론 외국으로 수출되고 있다."심도직물은 인천 노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에서 펴낸 '인천민주화운동사 연표'를 보면 1967년 5월 14일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조합(전국섬유노동조합 직할분회)이 결성된 이후 천주교 인천교구와 함께 해고 노동자의 복직투쟁 등이 전개됐다. 천주교 인천교구 한상욱 노동사목위원회 부위원장은 "심도직물 사건은 한국 천주교가 사회참여를 시작한 출발점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로마교황청과 연계해 한국의 노동 문제를 국제 문제로 확대하기도 했다"고 말했다.심도직물 공장은 설립 초기였는데도 최신 기술이 도입돼 기계로 '뉴똥(비단의 일종)'을 짰다고 할머니는 기억했다. '우리 옷감이야기 103(교문사)'이라는 책을 보면 1950~60년대 인조 뉴똥 생산이 이뤄지면서 의복용으로 많이 사용됐다. '현대패션 110년'이란 책 역시 "1950년대 옷감은 한복감으로 고급에 속했던 실크, 즉 뉴똥이 인기가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할머니는 당시 뉴똥을 짜는 기계의 실이 끊어지거나 하면 그것을 처리하는 일을 했다. "공장에는 이북출신이 많았고, 강화 본토박이도 있었어. 직원은 한 20명 정도 됐어. 당시 대부분 손으로 옷감을 짰는데, 기계가 짜는 것은 처음 봐서 신기했어. 뉴똥을 짜면 돌돌 말아서 서울 종로 4가에 가져다줬다고 해. 거기서 한복하고 이불껍데기하고 만들고 그랬던 것 같아."심도직물 터를 찾은 할머니는 완전히 10대의 추억에 젖어들었다. 할머니는 심도직물 외에도 여러 직물 공장이 강화도에 있었다고 기억했다. 당시 강화도는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중심지였다. 1916년 이미 강화도에는 강화직물조합이 설치되고 공동작업장까지 건설됐다. 강화도에는 심도직물 외에도 큰 섬유회사가 많았는데, 1975년 기준으로 회사는 15곳이었고, 전체 종업원수는 1천308명, 기계는 864대에 달했다고 '강화사'는 기록하고 있다.강화도는 섬유산업 중심지 자리를 놓고 대구 등과 경쟁을 해야 했다. 할머니도 심도직물에서 1년 정도 일하다 다른 여공들과 함께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 침산동에 있는 '경방방직'이라는 업체였다. 이곳도 기계로 뉴똥을 짰는데 강화도 심도직물에 비해 규모가 훨씬 더 컸다고 했다. 비슷한 시기 대구에서는 삼성 이병철 회장이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인 '호암자전'을 보면 1954년 9월 대구에 제일모직이 설립됐고, 1956년에는 염색 가공공장이 준공했다. 할머니는 대구에서 1년 정도 일하다가 다시 서울 청량리에 있는 한국 최초 나일론 공장 '태창방직'에서 2~3년 일했다.한국전쟁 직후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한 축을 형성했던 섬유산업의 중심에 이춘화 할머니가 있었다.글/홍현기기자 hh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최근 경인일보 취재진과 함께 강화도 용흥궁 공원에 있는 심도직물 터를 찾은 이춘화 할머니가 심도직물 굴뚝을 배경으로 이곳에서 일했던 10대 때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인천 강화도 용흥궁 공원에 있는 심도직물 굴뚝. 강화군은 지난 2005~2008년 심도직물 터에 공원을 조성했고, 30미터에 달했던 굴뚝의 끝부분을 따로 남겨 심도직물을 기념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2017-08-02 홍현기

[zoom in 송도]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 반영

인천 환황해권 경제교통중심도시로연구소·연관산업·기업 송도 집적화글로벌그린경제콤플렉스 용역 추진인천시 "중앙부처 관심·지원 필수"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최근 국가 비전·목표, 100대 국정과제, 지역공약 이행 방안 등을 담은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이 계획에서 '인천을 환황해권 경제교통의 중심도시로 육성하겠다'면서 8개 공약을 반영했다. 이 중 송도국제도시와 직접적 연관이 있는 공약은 '인천 송도를 녹색환경금융도시로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녹색환경금융도시 조성사업이 어떻게 추진될지 알아봤다.인천 송도에 녹색환경금융도시를 만들겠다는 공약의 중심에는 GCF(Green Climate Fund·녹색기후기금)가 있다. GCF는 개발도상국의 온실가스 감축 등 기후변화 대응을 지원하고자 설립된 유엔 산하 기구다. 한국은 2012년 독일, 스위스 등과 경쟁을 벌여 GCF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고, 이듬해 인천 송도에 입주한 GCF는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올 4월 기준으로 43개 사업에 총 73억3천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인천시는 GCF를 활용해 녹색환경금융도시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를 이행하기 위해 'GCF 활성화를 통한 녹색환경금융도시 송도 건설' 계획을 지난 대선 때 각 정당과 후보에게 제안했다. 정당 및 후보 공약으로 채택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 계획을 공약으로 채택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녹색환경금융도시 조성에 힘이 실리게 됐다.중앙정부가 녹색환경금융도시 조성을 어떤 방식으로 견인·지원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앞으로 녹색환경금융도시 조성사업의 추진 주체와 방향 및 사업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진행될 예정이다.그렇다면, 인천시가 구상하고 있는 녹색환경금융도시는 어떤 모습일까. 인천시 계획은 GCF 연관산업을 송도에 집적화하는 것이 뼈대다. 기후변화 관련 국제기구, GCF 인증기구, 연구소, 교육기관, 기업 등을 송도로 유치해 시너지 효과를 만들겠다는 것이다.집적화를 통해 인천 송도를 인적·정보·기술 교류 등 기후변화 관련 활동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게 인천시 목표다. 이 같은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선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통령 공약에 반영됐으니, 일단 정부의 정책적 의지는 확인됐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행 방안으로, 앞으로 ▲기후변화 관련 기구·기업 유치 시 인센티브 확대 ▲에너지 신산업 분야 등 선도산업 전략적 육성 ▲기후금융 관련 인재 양성 기반 구축 ▲(가칭)기후금융투자은행 설립 ▲GCF 관련 복합공간 조성에 국비 지원 등이 필요하다.인천시는 '인천녹색기후 클러스터 기본계획'(2015년 4월)을 수립해 16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올 5월 기후환경연구센터를 설립했으며, 2015년부터 매년 국제기후금융·산업 콘퍼런스를 열고 있다. 클러스터 기본계획에는 글로벌그린경제 콤플렉스 조성, 핵심 기업·기구 유치, 송도생태산업단지 구축 등도 포함돼 있다.인천시 관계자는 "클러스터 계획에 반영한 과제들을 해당 중앙부처에 건의해 나갈 계획"이라며 "지자체가 산업과 경제를 움직이는 데는 한계가 있어, 중앙부처의 관심과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또 "정부가 유치한 GCF가 송도에 있다"며 "정부와 인천시는 GCF 연관산업을 어떻게 유치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 계속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인천시와 산업통상자원부는 글로벌그린경제 콤플렉스 조성을 위한 연구용역을 추진할 예정이다. 인천시가 5천만원, 산업부가 3천만원을 각각 부담하기로 했다.두 기관은 과업 내용을 논의한 뒤 8월 말에서 9월 초 용역을 시작할 계획이다. 용역에서는 GCF·기후변화 관련 기관과 기업을 송도에 집적화하는 방안, GCF 프로젝트에 국내 기술(기업)을 연결해 육성하는 방안 등이 연구될 것으로 보인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2017-07-30 목동훈

[zoom in 송도]'송도發' 철도혁명… GTX B노선 주목

국정기획자문위원회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 지역공약 수도권 상생 부문에는 'GTX B노선 건설 추진'이 포함됐다.B노선은 인천 송도국제도시에서 출발하는 GTX 노선으로, 서울 청량리를 거쳐 경기도 남양주 마석까지 연결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이 사업은 2025년까지 총 5조9천83억원이 드는 것으로 추산됐다.송도발(發) GTX 노선은 당초 청량리까지 기획됐으나, 이 노선은 사업성이 부족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때문에 노선 조정, 경제성 검토 등을 진행해 '송도~청량리~마석' 노선 건설 방안을 마련, 검토하게 됐다.문재인 정부가 지난 25일 발표한 '새 정부 경제정책방향'에도 송도 관련 정책이 담겼다. 정부는 경제자유구역에 입주한 국내기업을 외국인투자기업 수준으로 지원하기로 했다.또 외국인투자 금지·제한 업종을 전면 재점검해 원칙적으로 개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제약·바이오산업과 관련해선 핵심 기술 개발, 인력 양성, 사업화 및 해외 진출 지원 등을 통해 산업 성장 생태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이에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관계자는 "수정법(수도권정비계획법)에 막혀 있는 근본적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며 "송도 등 인천경제자유구역을 수도권 규제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도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2017-07-30 목동훈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9]평안북도 영변군 출신 명창식 할아버지(下)

구룡강 기슭 용강리 약산동대 유명김소월 외에 많은 문인들도 매료돼"강화도 고려산도 여기는 못따라가"고구려때 쌓은 성곽 철옹성의 고장3대가 살던 소림면 농사짓기 좋은 곳당시 냉면은 손님 접대용 귀한 음식잔칫집에 빠지지 않던 온반도 '자랑'핵시설 들어서 풍경 많이 변했을 듯# 이야기 하나실향민 명창식(98) 할아버지가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용강리(龍江里)를 떠난 지 어느덧 70년이 지났다. 긴 세월에 많은 기억이 씻겨 내려가기도 했지만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게 있다. 고향의 '멋과 맛'이다.영변 용강리는 관서지방을 흐르는 청천강 지류인 구룡강이 흐르는 동네라서 붙은 지명이다. 구룡강 기슭에는 김소월(金素月·1902∼1934)의 시 '진달래꽃'(1922)으로 유명한 약산동대(藥山東臺)가 있다. 약산동대는 제일봉(해발 488m), 동대, 학벼루와 거북바위 같은 기암괴석이 있는 곳을 통칭한다. "우리 집에서 구룡강을 건너면 약산이야. 여기저기 돌로 된 봉우리가 우뚝 솟은 돌산인데, 어릴 적엔 동네 친구들과 술래잡기하면서 놀았어. 조금 커서는 나무하러 다녔어. 봄에 제일봉 꼭대기에 오르면 분홍빛 진달래꽃이 산 전체를 수놓았더라니까. 오죽하면 소월이가 약산 진달래를 노래했겠나."평북 구성 출신의 김소월뿐 아니라 여러 문인이 깎아진 절벽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약산동대에 핀 진달래꽃에 매료됐다. 시인이자 수필가 노자영(盧子泳· 1898~1940)은 기행문 '약산동대'에서 '붉고 붉고, 타고 타고, 만지홍(滿地紅) 만지적(滿地赤)의 동대로 가는 길이 모두 다 정열이요, 모두 불덩이가 아닌가'라고 극찬했다.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金億·1896~?)이 약산동대를 여행한 이후 제자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관한 생각을 적은 글이 명사들의 기행문을 모은 '반도산하'(1944)에 실렸다.'진달래는 약산동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외다. 반도의 산하에는 어디든지 있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약산동대 진달래라 하면서 다른 곳 진달래는 다 내어버리고 약산동대의 그것만을 노래하며 귀엽다 하니 이것은 약산이 아름다운지라, 진달래까지 또한 우리의 사랑을 받는 것이외다.'흔하디흔한 진달래이지만, 어딜 가도 고향에서 핀 꽃만큼 아름답지 않은 게 실향민의 마음이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진달래로 유명한 강화도 고려산엘 가 봤는데 약산동대보다 못하다"고 했다. 영변은 약산동대를 낀 '철옹성(鐵甕城)'의 고장이기도 하다. 철옹성은 영변읍을 중심으로 주변 산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사방을 두른 둘레 14㎞, 높이 6~7m짜리 성곽이다. 고구려 때 처음 성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성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계속 개축됐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약산의 험한 것은 동방의 으뜸이라'는 고기(古記)를 전하며 국방의 요충지로 꼽았다. 명창식 할아버지가 영변에 살 때 만해도 영변읍은 성곽도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철옹성 안이 읍내였고, 장도 성 안에 섰어. 약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꼭 쇠로 만든 옹기 모양이었지. 산을 넘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야. 우리 동네서 40리(약 16㎞) 떨어졌는데, 길이 어찌나 험한지 새벽에 장 보러 읍내 나가면 한밤중에나 돌아왔어."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해 평양에 머물던 선조(재위 1567∼1608)는 형세가 급박해지자 1592년 6월 다시 피란길에 올라 영변에 닿았다. '선조실록'의 임진년(1592년) 6월 13일 기사에 '상이 안주에서부터 비를 무릅쓰고 영변부로 들어가니, 성안의 아전과 백성들은 모두 산골짜기로 피하여 들어가고 관인 5~6명만 있을 뿐이었다'는 대목을 보면, 임금의 철옹성 입성 장면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 장면은 효종(재위 1649∼1659) 때 새로 고친 '선조 수정(修正)실록'에서는 삭제됐다. 선조는 당시 세자이던 광해군에게 조정을 나누는 분조(分朝)를 명해 영변을 지키게 하고, 명나라가 코앞인 북쪽 의주로 향했다. 임진왜란 중에는 한성, 성주, 충주에 보관했던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불에 타고, 전주에 소장했던 실록만 남은 상황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실록은 영변에 보관했다가 강화도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강화도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게 됐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서울, 강화도, 영변, 봉화, 평창 등 5개 사고에서 나눠 관리했다. 조선 왕실 역사의 명맥을 잇는 데에 일조한 강화도의 정족산 사고는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했다.# 이야기 둘명창식 할아버지는 'ㄷ'자 기와집에서 3대가 살았는데, 머슴을 둬야 할 정도로 집이 컸다. 8살 때 동네에서 유일하게 소학교에 입학했고 혼자서 10리(3.9㎞)를 걸어 통학했다고 한다. 명창식 할아버지가 가정을 꾸리면서 'ㄷ'자 집에서 아래채를 증축해 'ㅁ'자 기와집이 됐다. 할아버지는 부인, 자녀와 함께 추가로 지은 아래채에서 지냈다고 한다. 구룡강 건너인 영변읍(철옹성)과는 달리, 할아버지 동네인 소림면은 땅이 넓고 비옥해 농사짓기 좋은 여건이었다. 당시 집마다 누에를 기르는 양잠 농사도 많이 했다고 하는데, 적어도 조선 때부터 영변 주민들의 주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454년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영변의 토산물을 오곡, 뽕나무, 삼(麻), 닥나무, 왕골, 배, 밤, 꿀, 옻, 석이(石耳), 오미자, 잣, 지초 등으로 적었다. 1530년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실(絲), 삼, 오미자, 인삼, 벌꿀, 잣, 사향(麝香), 자초(紫草) 등을 영변 토산물로 꼽았다. 실을 뽑아낼 누에의 먹이인 뽕나무는 양잠의 필수 작물이다. 명창식 할아버지의 고향 기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평안도 음식이다. 그중에서도 아주 어릴 적부터 먹었던 냉면 맛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지금은 '국민음식'이 된 냉면의 본산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평안도다. 조선 후기 홍석모(洪錫謨·1781∼1850)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냉면을 '무김치나 배추김치에 메밀국수를 말고, 여기에 돼지고기를 섞은 것'이라고 전하며 '냉면은 관서지방의 냉면이 최고다'라고 평가했다. 명창식 할아버지가 10대 시절이던 1920~30년대만 해도 냉면은 손님 대접할 때나 내놓는 귀한 음식이었다. 메밀면을 뽑는 국수틀을 가진 집도 마을에서 한두 집밖에 없었다고 한다. "영변에서는 손님한테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하면 무조건 냉면 먹으러 가자는 뜻일 정도로 고급 음식이었어. 하얀 동치미 국물에다가 메밀면을 말아먹기도 했어. 고기를 푹 고아서 육수를 낸 다음 식혀서 면을 말고 고기를 얹어 먹는 게 제일 고급이지. 소나 돼지가 귀해서 산에서 꿩을 잡아다가 육수를 내기도 했어."냉면을 만들기 위해 고기를 준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메밀면을 뽑는 작업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메밀가루는 점성이 별로 없어 잘 뭉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생몰년 미상)이 국수를 뽑는 과정을 그린 풍속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일꾼 한 명이 거꾸로 사다리에 올라 받침대에 등을 대고 온몸의 무게를 실어 국수틀을 누르며 면을 밀어내고 있다. 이게 바로 평양식 메밀국수 제조법이라고 한다. 평북 정주 출신인 시인 백석(白石·1912~1996)은 영변을 여행하면서 얼마나 진한 메밀 냄새를 맡았던지 그때의 경험을 쓴 시 '북신-서행시초2'에서 '거리에서는 모밀내가 났다'고 읊었다. 백석은 1941년 '국수'라는 제목의 평안도 냉면을 소재로 다룬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백석 '국수' 중에서)명창식 할아버지는 고향 잔칫집에서 빠지지 않던 온반을 먹어보고 싶다고도 했다. 지금은 생소한 평안도 음식인 온반은 푹 삶은 닭고기 육수에 각종 고명을 얹어 밥을 말아먹는 국밥의 일종이다. 이북식 잔치음식이라고 한다. 영변군 영변읍과 용강리가 속한 소림면 일대는 북한이 1960년대 초반 원자로를 들여와 원자력연구소를 조성했다. 이후 북한에서 핵물질을 생산하는 시설은 대부분 영변에 들어섰다. 고향 땅의 모습이 크게 변했을 거라는 게 명창식 할아버지의 걱정이다. "이젠 고향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가물가물해. 영변에 핵시설이 들어서면서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는 얘기도 들었고. 그런데 어린 시절 귀한 별미로 먹던 냉면 맛이랑 온반 맛은 잊히질 않아. 마지막으로 진짜 고향 음식을 한번 먹어보고 싶어."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평북 영변 출신 명창식 할아버지는 고향을 떠난 지 7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약산동대에 핀 진달래꽃과 고향에서 먹은 냉면 맛이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비롯해 수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된 약산동대. 특히 봄철 산을 분홍빛으로 뒤덮는 진달래 군락으로 유명하다. 아쉽게도 진달래가 만발한 사진은 남한에서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19세기 초 제작된 전국 군현지도집인 '광여도(廣輿圖)'에 수록된 영변 철옹성 일대 지도. 성 왼쪽 아래 소림면(少林面)이 명창식 할아버지의 고향이다. 출처/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조선 말기 풍속화가인 기산 김준근이 그린 메밀국수 면발을 뽑는 장면. 한글로 '국수 누르는 모양'이라 제목을 붙인 이 그림은 평양식 국수 제조 방식이다. 출처/민속원 발간 '기산(箕山), 한국의 옛그림 풍경과 민속'

2017-07-26 박경호

[zoom in 송도]인천경제청 '투모로우시티 활성화' 연구용역 마무리

'u시티 비전센터' 4차산업 홍보관'u 복합환승센터' 주민공간 활용상가동, 앵커기업 유치 휴게시설연간 약 21억원대 수익발생 기대내년 개장 목표 리모델링 공사도인천 송도국제도시 국제업무지구에 있는 복합시설물 '투모로우시티'(Tomorrow City)의 운영 방안이 확정됐다. 연내 소유권 이전 절차와 리모델링이 이뤄지면, 내년부터 운영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한국산업관계연구원에 의뢰한 '투모로우시티 개편 및 활성화 방안 연구' 용역이 최근 완료됐다고 23일 밝혔다. ┃표 참조투모로우시티는 송도국제업무지구 E6-1블록에 있는 지하 2층, 지상 6층, 연면적 4만8천㎡짜리 복합시설물이다. 이 건물은 2008년 3월 건립 공사가 시작돼 이듬해 7월 완공됐지만, 공사비 정산 관련 소송으로 2011년부터 운영이 중단됐다. 수년간 방치돼 있는 셈이다. 인천경제청은 지난해 소송이 종결됨에 따라 투모로우시티 개편 및 활성화 방안 수립 용역에 착수했다. 투모로우시티는 ▲u-City 비전센터 ▲u-복합환승센터 ▲상가동 ▲광장 등으로 구성된다. 연구 용역 결과를 보면, 'u-City 비전센터'는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시설을 홍보하고 체험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4차 산업혁명 홍보관, VR(가상현실) 체험관, 드론 홍보관 등을 조성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을 유치해 연구개발·기술혁신 전시관, 4차 산업 기술 전시관을 운영하는 방안도 검토됐다.'u-복합환승센터'는 대중교통 환승과 주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된다. 인천경제청은 송도역 복합환승센터(2021년 개장 예정) 건립사업을 고려해 환승센터 기능을 축소하기로 했다. 1층만 환승센터 기능을 유지하고 나머지 2·3층은 주민을 위한 공간으로 쓰겠다는 구상이다. 인천경제청은 2층에 레스토랑 등 어린이·가족시설을, 3층에는 의료관광·뷰티·드론 관련 아카데미 시설을 유치할 계획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인천공항과 지방 도시를 오가는 버스들이 투모로우시티를 경유하게 할 것"이라며 "투모로우시티 내부와 주변에 상업시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공항 환승객들이 관광을 즐기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u-City 비전센터'와 'u-복합환승센터' 1층에는 인천관광을 홍보·안내하는 공간도 조성된다.'상가동'은 임대 수익을 창출하는 공간이다. 인천경제청은 지상 1~2층에 광역상권을 대상으로 하는 앵커기업을 유치하고, 지하 1층에는 판매시설과 휴게시설을 입점시킬 계획이다.'광장'은 워터 스퀘어, 아이스 스퀘어, 테라스 카페 등 이용자에게 휴식(아늑함)이나 경험(즐거움) 또는 편의(편안함)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투모로우시티 수익성 지수는 1.27로 나왔다. 기준치 1을 넘었다는 것은 사업성이 있다는 뜻이다. 이번 연구 용역에서도 연간 약 21억 원의 수익이 발생하는 것으로 예상됐다. 투모로우시티는 인천도시철도 1호선 '인천대입구역'과 연결돼 대중교통 접근성이 좋은 데다, 인천공항도 가깝다. 입지 조건은 뛰어나기 때문에, 경쟁력 있는 시설을 유치하는 게 수익 창출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인천경제청은 인천시 공유재산심의위원회 심의, 인천시의회 의결 등의 절차를 거쳐 인천도시공사로부터 투모로우시티 소유권을 받을 방침이다. 이후 2018년 개장을 목표로 리모델링(개·보수) 공사와 시설 유치 활동을 추진할 계획이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우리가 투모로우시티를 직접 운영할지, 다른 기관에 운영을 맡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최근 활성화 방안 수립 연구 용역이 완료된 송도 '투모로우시티'(Tomorrow City) 전경. 4차 산업혁명 등 첨단 기술을 전시·체험하는 공간과 환승센터로 활용된다. 환승센터 기능이 당초보다 축소되는 대신 주민들을 위한 공간이 늘어날 예정이다. /경인일보 DB

2017-07-23 목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