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내달부터 본격적 심사 인력 수급·공항 접근성 등 우수삼바·셀트리온 등 100여개 입주수원·고양·성남·시흥 4곳도 도전정부가 바이오 분야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선정을 위한 본격적인 평가 절차를 내달부터 시작한다.인천시를 비롯한 전국 10여 개 자치단체가 특화단지 공모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수도권 자치단체 간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24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바이오 분야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입지를 올해 상반기 안에 선정해 발표한다. 특화단지 선정을 위한 민·관 평가위원회는 각 자치단체가 제출한 서류 평가와 함께 내달부터 프레젠테이션 심사를 벌일 것으로 알려졌다.바이오 업계에선 인력 수급과 인천국제공항과의 접근성 등 관련 산업의 특성을 고려할 때 수도권 내 자치단체 가운데 특화단지가 선정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우선 가장 유력한 특화단지 입지로 인천이 거론되고 있다.인천 송도바이오클러스터에는 동물세포 배양·정제분야의 바이오 국가첨단전략기술을 보유한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셀트리온 등 100여개 국내외 기업과 연구소가 입주해 있다. 이미 바이오산업 생태계가 갖춰져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단일 도시 기준 세계 최대인 116만ℓ의 바이오의약품 생산능력을 보유해 미국 매사추세츠 일대(65만ℓ), 캘리포니아 일원(51만ℓ), 싱가포르(32만ℓ) 등지를 크게 앞서고 있다.이와 함께 송도 연세대 국제캠퍼스에 설치된 바이오공정인력양성센터(K-NIBRT)를 통해 연간 2천명의 바이오 전문 산업인력을 배출하게 되며, 바이오 분야 스타트업 육성 기관인 K-바이오 랩허브도 구축된다.인천시와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 바이오클러스터를 뒷받침하는 신규 바이오 단지로 영종국제도시와 남동국가산업단지를 제안했다.인천시는 송도-남동산단-영종을 잇는 '바이오 트라이앵글'로 K-바이오를 한단계 끌어 올린다는 전략이다.수원과 고양, 성남, 시흥 등 경기도 내 4개 자치단체도 특화단지 공모에 도전장을 냈다.수원시는 관내 218개 바이오 기업과 연구소가 밀집한 광교테크노밸리를 중심으로 성균관대, 아주대, 아주대병원 등과 협력해 '오가노이드파크(Organoid Park)'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고양시는 국립암센터와 6개 대형병원, 풍부한 의료인력, 편리한 교통망 등을 강점으로, 기금과 펀드 1천258억원을 조성해 일산테크노밸리에 바이오 정밀의료 특화단지를 구상하고 있다.성남시의 경우 차바이오텍, 디메드, 분당서울대병원, 분당차병원 등과 협약을 맺고 판교 제1·2테크노밸리, 성남하이테크밸리, 정자동 주택전시관 부지를 특화단지로 활용할 방침이다.시흥시는 서울대 시흥캠퍼스와 서울대병원이 개원 예정인 배곧지구를 포함해 월곶, 정왕지역을 '바이오트리플렉스(BiO Triplex)'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산업부는 접수된 공모 서류를 바탕으로 인프라·인력 등 성장 기반 확보 가능성, 첨단전략산업 및 지역산업 동반 성장 가능성 등을 종합 평가해 올해 상반기 최종 도시를 선정, 발표할 예정이다.국가특화단지로 지정되면 각종 기반시설 구축을 위한 정부의 예산 지원은 물론 각종 인허가 신속 처리와 기술·인력 등의 분야에서 패키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산업부 관계자는 "올해 상반기 내 특화단지를 선정해 발표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에 따른 평가 절차를 이행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
[아임 프롬 인천·(22)] 돛단배 타고 인천으로 피란왔던 박영복입니다 평안남도 진남포시 억량기리 출생남포제련소 유명 "인천과 닮은 도시"1·4후퇴때 떠나, 전후 부평서초 입학중학시절 선생님 영향 역사학도 꿈꿔사학 전공… 서클 통해 고고학 접해대학원땐 '경주 고적발굴' 조사 참여국민적 관심… 박정희 대통령 방문역사·고고학자·문화재 행정가 일생"인천, 옛 것속 현재 그리는 것도 중요"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평안남도 진남포시 억량기리 114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박영복 박물관장의 기억 속 진남포는 평화롭고 고요한 바닷가 마을이었다.박 전 관장의 기억 속에는 어린 시절 고향 진남포에 대한 비교적 소상히 남아 있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한 이층집에 살았다. 아버님이 2척의 배를 부렸다. 2층에서는 배가 보였다."2층에 올라서면 멀리 바다가, 배가 들어오는 게 보였죠. 아버님하고 2층에서 이제 우리 배가 나갔다 들어올 때 만선 깃발이 보이면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으셨죠."진남포 하면 남포제련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특히 거대한 굴뚝이 '랜드마크'와도 같았다. 박영복 관장은 "특히 그 굴뚝이 얼마나 컸는지 어른 30여명이 팔로 손을 잡아야 굴뚝을 에워쌀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박영복 관장은 "인천과 남포가 닮은 꼴 도시였다"고 기억했다.배로 서울에 가려면 인천 한강 하구를 거쳐야 했듯이 평양에 가려면 진남포 대동강을 거쳐야 이르렀다. 수도 서울과 평양으로 향하는 관문항 역할을 했던 것이다. 두 항만은 모두 서해에 있는데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 갑문을 운영한다는 공통점도 있다.남북관계가 경색되기 전 인천에서 남포를 잇는 뱃길이 열린 적이 있다. 1998년부터 2011년까지 인천항과 남포항을 화물선이 오갔다. 특히 2002년부터 2011년까지 국양해운이라는 이름의 선사가 화물선 '트레이드포춘'을 본격 운영했다. 이 뱃길은 남북 교류의 상징과도 같았다. 당시 인천항에서 남포로 가는 배에 섬유·화학·전자·전기제품 등이 선적됐다. 이 배는 북에서 농수산물·광물자원·바닷모래 등을 싣고 인천항으로 돌아왔다. 민간단체의 대북 지원 물품도 이 트레이드포춘호에 실려 북으로 향했다. 국양해운은 적자를 기록하다 2006년 첫 흑자를 냈고 2007년에는 이 항로에 추가 선박을 투입했다. 한국 정부가 2010년 벌어진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남북 교역을 중단하는 5·24 조치를 발표한 이후 이 항로의 물동량이 급격히 줄었다. 트레이드포춘호는 2011년 10월 운항을 멈췄고 2012년 폐선됐다.박영복 관장은 1·4후퇴와 함께 고향을 떠나야 했다. 유년기 박 관장의 기억에는 작은 돛단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떠나던 피란길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믐달이 뜬 깜깜한 밤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두 다 함께 손을 꼭 붙잡고 가야 했어요. 실수로 놓치기라도 하면 다시는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어촌 마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작은 어선에 박 관장 가족과 또 다른 팀이 배에 올라탔다. 배 길이가 10m 조금 못 됐던 것으로 박 관장은 기억했다. 보름 정도만 지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배에 몸을 실은 지 며칠이 지났을까. 빨리 배에서 내리고 싶어졌을 때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꼭 사람들이 전등을 켜두고 있는 것 같았다. 박 관장은 "아마 월미도 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렇게 인천에 도착했는데, 바로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해가 뜬 뒤에야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어머니를 '누님'이라고 부르며 의남매처럼 지내던 이북 지인이 인천 월미도에서 박 관장 가족을 맞아주었다고 했다. 인천에서 경찰로 일하던 이였는데, 북에서 피란민을 태운 배를 하나하나 일일이 확인해 도착하자마자 박 관장 일행을 부두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그 지인은 이북에서 경찰 생활을 하던 이였는데, 남으로 내려가 다시 경찰로 일하던 이였다고 한다.인천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부산으로 피란을 가야 했다. 박 관장은 미군 상륙함(LST)을 타고 부산까지 이동했다고 기억했는데, 그 배가 "마치 운동장 같았다"고 했다. LST에는 아무나 탈 수 없었다고 한다. 박씨 가족은 경찰 가족으로 신분을 위조해 탑승할 수 있었다.부산 피란 생활을 접고 박 관장 가족은 다시 고향에 가려고 인천에 올라왔다. 하지만 전쟁은 교착상태였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부산으로 향하던 피란길 LST에서 만났던 부평경찰서 경찰 가족과 친분을 쌓았는데, 그 가족이 쓰지 않는 '적산가옥'에서 박 관장 가족은 머물렀다.박 관장은 부평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님은 부평 미군부대 주변 '양공주' 집에 드나들며 구해 온 초콜릿 등 '양키물건'을 좌판에서 팔아 어린 자식들을 돌보며 생계를 꾸렸다.또래보다 2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한 박 관장은 운동에 두각을 나타냈다. 1957년 경기도육상연맹이 주최한 제1회 인천 초등학생 체육대회에서 '주폭도'(멀리뛰기) 종목에서 3m95㎝를 뛰어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공부에도 소질이 있던 박 관장은 인천중학교에 입학한다. 인천중학교는 공부도 유명했지만, 체육 활동도 적극적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원칙이 있었다. 모든 교과 수업이 끝나고 나야 운동부의 연습이 있었다. 처음에 농구부로 잠시 활동하다, 이어 축구부에서 활동했다. 국가대표 농구선수로 활동하고 연세대학교와 인천대우제우스 감독을 역임한 최종규 감독이 박 관장의 동창이다.그가 역사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인천중학교 재학 시절 만난 선생님들의 영향이 컸다.'인민복'을 입거나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중국 역사를 이야기하는 길영희 교장 선생님이 어린 중학생의 눈에도 그렇게 멋져 보였다."그냥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언제나 아주 자신감 있게 아주 '파워풀'하게 말씀하셨어요. 늘 가슴 속에 울림을 주는 얘기를 하셨죠. 특히 중국 고사를 아우르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교장 선생님과 중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역사 과목 선생님들의 모습도 매력적이었다. 2학년 시절 담임 이근필 선생님은 퇴계 이황의 16대 종손이었다. 삼국지연의를 중국 원서로 읽으시던 유기화 선생님 등도 기억에 남는다.그는 고려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선배가 학과 '서클'인 인류고고학회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예 알겠습니다' 하고는 서클에 가입하게 된다. 동양사나 중국사를 배우고 싶어 진학한 사학과였는데 서클 활동을 계기로 고고학을 접하게 된다.염불 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많았다. 1964년 창원 성산 패총 현장이 그가 따라 나선 첫 발굴 현장이었다. 발굴이 뭔지도 모르면서 멀리 부산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얘기를 듣고는 무작정 따라나섰다.박 관장은 대학원 공부를 하며 임시직 연구원 신분으로 경주 고적발굴 조사단에 참여해 천마총 발굴 후 정리 작업과 황남대총, 안압지 등 발굴에 참가한다.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은 우리나라 고고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조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국내 발굴 조사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은 계기로 평가받는다. 이 경험으로 인해 박 관장은 신라 고분 연구를 전공하게 됐고, 마지막 공직 생활도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경주 전역에 무수히 많은 무덤이 있는데 일제 때 조사·정리된 것이 155개다. 그 무덤에는 각각 번호가 붙어 있었다. 1호부터 155호까지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이 고분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왕릉을 발굴해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워뒀고 발굴을 지시했다. 이 고분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이 '98호 무덤' 지금의 황남대총이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발굴 경험이 전무했다. 그래서 발굴 경험을 쌓기 위해 그 가운데 가장 작은, 번호도 가장 나중인 '155호 무덤'을 시범적으로 발굴하기로 했다. 1973년부터 발굴을 시작했다.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금관이 발견됐고 유명한 '천마도'도 이때 발굴됐다. 그래서 155호 무덤에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덤 주인은 밝혀내지 못했다.박 관장은 천마총이 '대박'을 터뜨린 후 정리 작업을 하던 시기부터 경주 고적발굴 조사단에 참여했다. 황남대총 발굴도 시작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만 5만8천여 점에 이르렀다. 금관, 금동관, 둥근 고리 큰 칼 등 사치품이 엄청났다. 당시 경주 발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대단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발굴현장을 찾기도 했다. 박 관장은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1976년 시행된 제1회 4급 을류 학예연구직 공개채용에 합격하며 '학예연구사 시보'로 정식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 박 관장은 이후 독일 초청으로 쾰른 동아시아박물관에서 보존과학에 대한 기법을 배우는 행운을 얻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해외 전문기관의 초청을 받아 교육받게 된 것이다.그는 "당시 독일 친구들이 한국에서 발굴 전문가가 왔다고 환대해 줬다"면서 "그곳에서 유럽의 박물관을 자주 돌아다니면서 발굴·복원 기술을 배우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이후 국립공주박물관장과 초대 국립청주박물관장 등을 거치고, 국립중앙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에서 주요 보직을 맡았다. 1999년 출범한 문화재청에서 초대 문화유산국장으로 일하고,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취임 후 4년 동안 경주박물관을 이끌고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역사학도이면서 고고학자로, 또 문화재 행정가로 살아온 인생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삶을 살았다. 그가 인천에 건네는 조언은 이렇다."인천이 항구도시로서 이미지를 복원하려 굉장히 애를 쓰는 것을 많이 봅니다. 너무 옛날 것만 고집하지 말고, 옛것 속에 현재를 그리는 것도 중요해요. 너무 옛것만 이야기하면 굳은살이 생겨요. 새로운 걸 끌어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옛것에서 미래를 끌어내지 못하고 전통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가라앉아요. 거기서 싹을 틔워서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합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옛 인천중학교.1957년 가족과 함께 촬영한 사진 왼쪽 위가 박영복 전 관장이고, 오른쪽이 어머님이다. /박영복 전 관장 제공고교 재학시절 박영복 전 관장. /박영복 전 관장 제공기사 전문 온라인
훌륭한 선생님·좋은 친구 만나 박영복(79·사진)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문화재 행정가다. 대학 시절 몸담은 '고고학 서클'과 경주 참성단, 황남대총, 안압지 등 경주 고적발굴 조사단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문화재 행정가의 길을 걸어온 인물이다.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 등이 그가 거친 일터이자 현장이다.박 관장은 1945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1·4 후퇴 당시 피란길에 오른뒤 고향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대로 인천에 눌러앉아 인천을 고향으로 여기고 살아온 인천사람이다.전쟁이 끝나지 않은 어수선한 시기 또래보다 조금 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1958년 부평서초교와 1961년에 인천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초등학교 중학교, 인천에서 보낸 성장기가 지금 내 자신의 대부분을 완성했다"며 "훌륭한 선생님과 좋은 친구들을 그때 만났다"고 말했다.그는 평생 문화재 행정가로 일을 했지만 오직 옛것만을 고집하지 않는 균형감각의 소유자다. 그는 "너무 옛날 것만 고집하지 말고, 옛것 속에 현재를 그리는 것도 중요하다"며 "문화재라는 옛것을 지키는 일을 해왔지만 현재도 중요하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하고 맞춰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시 인천에 대해서는 "인천이 항구도시 이미지를 복원하려 애쓰는 모습을 많이 본다"면서 "옛것만 이야기하면 굳은살이 생긴다. 옛것에서 미래를 끌어내지 못하면 가라앉고 만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고고학 새 역사 증인 "작은 고분 시범 발굴한 것이 천마총")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평안남도 진남포시 억량기리 114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박영복 박물관장의 기억 속 진남포는 평화롭고 고요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박 전 관장의 기억 속에는 어린 시절 고향 진남포에 대한 비교적 소상히 남아 있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한 이층집에 살았다. 아버님이 2척의 배를 부렸다. 2층에서는 배가 보였다. “2층에 올라서면 멀리 바다가, 배가 들어오는 게 보였죠. 아버님하고 2층에서 이제 우리 배가 나갔다 들어올 때 만선 깃발이 보이면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으셨죠." 진남포 하면 남포제련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특히 거대한 굴뚝이 '랜드마크'와도 같았다. 박영복 관장은 “특히 그 굴뚝이 얼마나 컸는지 어른 30여명이 팔로 손을 잡아야 굴뚝을 에워쌀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고지식한 아이였다. 부모님이 출타하시면서 “집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 말하면 꼼짝없이 문간방에 앉아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아이였다. 박 관장은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진남포에서 소련군을 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어느 날 소련군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행진하는데 이상한 게 뭐냐 하면 손을 앞뒤로 흔들지 않고 좌우로 흔들어요. 좌우로 흔드는 겁니다. 어린아이 눈에는 그게 이상하니까 팔짓을 따라서 해보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박영복 관장은 “인천과 남포가 닮은 꼴 도시였다"고 기억했다. 배로 서울에 가려면 인천 한강 하구를 거쳐야 했듯이 평양에 가려면 진남포 대동강을 거쳐야 이르렀다. 수도 서울과 평양으로 향하는 관문항 역할을 했던 것이다. 두 항만은 모두 서해에 있는데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 갑문을 운영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기 전 인천에서 남포를 잇는 뱃길이 열린 적이 있다. 1998년부터 2011년까지 인천항과 남포항을 화물선이 오갔다. 특히 2002년부터 2011년까지 국양해운이라는 이름의 선사가 화물선 '트레이드포춘'을 본격 운영했다. 이 뱃길은 남북 교류의 상징과도 같았다. 당시 인천항에서 남포로 가는 배에 섬유·화학·전자·전기제품 등이 선적됐다. 이 배는 북에서 농수산물·광물자원·바닷모래 등을 싣고 인천항으로 돌아왔다. 민간단체의 대북 지원 물품도 이 트레이드포춘호에 실려 북으로 향했다. 국양해운은 적자를 기록하다 2006년 첫 흑자를 냈고 2007년에는 이 항로에 추가 선박을 투입했다. 한국 정부가 2010년 벌어진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남북 교역을 중단하는 5·24 조치를 발표한 이후 이 항로의 물동량이 급격히 줄었다. 트레이드포춘 호는 2011년 10월 운항을 멈췄고 2012년 폐선됐다. 서로 닮은 두 항만은 분단 이전에도 교류가 활발했다고 전해진다. 인천항은 남포항에서 중국 또는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중국·일본에서 수입하는 화물이 모이는 환적항 또는 허브(HUB)항만 역할을 했다. 일본 언론인 가세 와사부로(加瀨和三郞)가 1908년 편찬한 '인천개항 25년사'를 보면, 인천항과 남포항의 관계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국내 무역 중 당시 인천과 관계가 가장 깊은 곳은 진남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진남포에서 수입하는 것은 대개 인천항이 중개하였던 것으로 보아 당시 인천항이 진남포의 중개소 위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진남포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곡류와 일본 혹은 청국에서 수입하는 각종 화물은 모두 인천항을 거쳤다" 박영복 관장은 1·4후퇴와 함께 고향을 떠나야 했다. 유년기 박 관장의 기억에는 작은 돛단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떠나던 피란길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믐달이 뜬 깜깜한 밤이었다. 어머님과 이모 박 관장 누님과 동생 모두 다섯이 손을 잡고 부두로 이동했다. 바닷가에 이르니 여기저기서 “누구, 어디에 있느냐"며 찾는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두 다 함께 손을 꼭 붙잡고 가야 했어요. 실수로 놓치기라도 하면 다시는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어촌에서 마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작은 어선에 박 관장 가족과 또 다른 팀이 배에 올라탔다. 배 길이가 10m 조금 못 됐던 것으로 박 관장은 기억했다. 보름 정도만 지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집에 있는 그릇, 재봉틀 등 값이 나가는 모든 걸 마당을 파고 독에 넣어뒀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 여동생인 이모가 남아 집을 지키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출발하는 날이 되니까 이모도 무서웠는지 결국 집을 비워두고 함께 따라나섰다. 추운 겨울 힘든 기억 보다는 피란 배에 마련된 간이 화장실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박 관장은 말했다. “발을 올려두는 발판만 나란히 있었던 것 같아요. 바닥을 보면 바다가 보이고 손잡이도 제대로 없었 거든요." 배에 몸을 실은 지 며칠이 지났을까. 빨리 배에서 내리고 싶어졌을 때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꼭 사람들이 전등을 켜두고 있는 것 같았다. 박 관장 “아마 월미도 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렇게 인천에 도착했는데, 바로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해가 뜬 뒤에야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 어머니를 '누님'이라고 부르며 의남매처럼 지내던 이북 지인이 인천 월미도에서 박 관장 가족을 맞아주었다고 했다. 인천에서 경찰로 일하던 이였는데, 북에서 피란민을 태운 배를 하나하나 일일이 확인해 도착하자마자 박 관장 일행을 부두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그 지인은 이북에서 경찰 생활을 하던 이였는데, 남으로 내려가 다시 경찰로 일하던 이였다고 한다. 인천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부산으로 피란을 가야 했다. 박 관장은 미군 상륙함(LST)을 타고 부산까지 이동했다고 기억했는데, 그 배가 “마치 운동장 같았다"고 했다. LST에는 아무나 탈 수 없었다고 한다. 박씨 가족은 경찰 가족으로 신분을 위조해 탑승할 수 있었다. 1950년 10월 25일 중국이 한국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 이남 지역까지 퇴각했다. 북한군이 다시 수도 서울을 점령한 1951년 1월4일 날짜를 따 '1·4후퇴'라고 한다. 인천시민의 경우 1·4후퇴 전인 12월 30일까지 상당수가 피란을 떠난 것으로 '인천시사편찬 50주년 기념 인천광역시사'(2023년 발간)에 기록돼 있다. 당시 지중세(池中世) 인천시장은 시 직원들에게 “사태가 급박하니 시 직원은 집단 피난하기로 했다. 희망자는 이에 참가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시 직원 절반갸량이 참가해 중요 서류를 휴대하고 부산으로 피란했고 일반 시민도 다시 피란길에 올랐다. 미8군사령관은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교두보에서 철수하며 경인지역에 설치된 보급소가 위태롭게 되자 제3군수지원사령관에게 인천항을 1·4일 후퇴 당일 정오에 폐쇄토록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했다. 2월 10일 미 제25사단 기갑부대가 인천으로 진출해 시가지를 정찰했다. 북한군은 이미 주둔지를 포기하고 철수한 뒤였다. 인천이 재수복되자 피란 갔던 시민들이 속속 귀환했다. 가옥과 재산이 모두 파괴됐고, 생필품마저 모자랐다. 당시 인천시청은 부산 사무소를 두고 군산·목포·제주에 지소를 두어 피란시 인천시민 편의를 도모하고 있었다. 2월 11일 인천항 복구작업이 시작됐고 교육기관들도 이때부터 점차 정상화 수순을 밟았다. 박 관장 기억에 인천항에서 출발해 한 3일쯤 지난 뒤 부산에 도착했다. 첫날은 부산의 한 극장에서 머물렀다. 빵하고 먹을 걸 줬다. 다음 날부터는 어느 '국민학교'에서 생활했다. 며칠 뒤 다시 피란민 수용소가 생겼다. 부산에 있는 조선방직 건너편 큰 뜰에 생겼다. 거기서 한동안 먹고 살았다. 경찰 가족이라는 위조된 신분 증명이 있어 배급을 받을 수 있었다. 박 관장은 당시 부산 동네 꼬마 아이들하고 돌멩이를 던지며 싸우는 '석전'을 벌였다고 기억했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피란 온 우리를 보면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고기' 그렇게 놀리더라고요. 그렇게 돌 던지고 싸우며 놀았지요." 얼마나 지났을까. 부산 피란 생활을 접고 박 관장 가족은 다시 고향에 가려고 인천에 올라왔다. 하지만 전쟁은 교착상태였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부산으로 향하던 피란길 LST에서 만났던 부평경찰서 경찰 가족과 친분을 쌓았는데, 그 가족이 쓰지 않는 '적산가옥'에서 박 관장 가족은 머물렀다. 박 관장은 부평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님은 부평 미군부대 주변 '양공주' 집에 드나들며 구해 온 초콜릿 등 '양키물건'을 좌판에서 팔아 어린 자식들을 돌보며 생계를 꾸렸다. 좌판을 펼쳐 놓으면 미군 헌병이 단속을 나왔다. 집으로 도망오는 어머님을 따라 헌병이 집까지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박 관장은 “그럴 때면 어머니는 좌판을 이불로 덮고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내며 아픈 척을 하며 헌병을 따돌렸다"면서 “어머님이 억척스러웠다"고 했다. 또래보다 2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한 박 관장은 운동에 두각을 나타냈다. 1957년 경기도육상연맹이 주최한 제1회 인천 초등학생 체육대회에서 '주폭도'(멀리뛰기) 종목에서 3m95㎝를 뛰어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공부에도 소질이 있던 박 관장은 인천중학교에 입학한다. 부평서초등학교 졸업생 200여명 가운데 인천중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인천중학교는 공부도 유명했지만, 체육 활동도 적극적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원칙이 있었다. 운동부 학생들도 수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모든 교과 수업이 끝나고 나야 운동부의 연습이 있었다. 처음에 농구부로 잠시 활동하다, 이어 축구부에서 활동했다. 국가대표 농구선수로 활동하고 연세대학교와 인천대우제우스 감독을 역임한 최종규 감독이 박 관장의 동창이다. 개교 기념일마다 학교에서는 마라톤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전교생이 학교에서 출발해 인천교도소 반환점을 돌아 학교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마지막 홍예문 언덕길이 가장 힘든 구간이었지만 성취감을 주었다. 석 달에 한차례 소풍을 떠나는 '원적'도 너무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걸어서 송도유원지를 다녀오곤 했는데, 걷는 동안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며 사귀던 시간이 그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가 역사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인천중학교 재학 시절 만난 선생님들의 영향이 컸다. '인민복'을 입거나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중국 역사를 이야기하는 길영희 교장 선생님이 어린 중학생의 눈에도 그렇게 멋져 보였다. “그냥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언제나 아주 자신감 있게 아주 '파워풀'하게 말씀하셨어요. 늘 가슴 속에 울림을 주는 얘기를 하셨죠. 특히 중국 고사를 아우르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교장 선생님과 중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역사 과목 선생님들의 모습도 매력적이었다. 2학년 시절 담임 이근필 선생님은 퇴계 이황의 16대 종손이었다. 삼국지연의를 중국 원서로 읽으시던 유기화 선생님 등도 기억에 남는다. 박 관장은 친척 어른 권유로 서울중앙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서울로 학교를 진학한 덕에 “중학교 동창이 1천명, 고등학교 동창도 1천명"이라고 했다. 장단점이 있다고 했다. 동창이 많다는 것이 장점이라면 단점은 깊이 사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윤성 전 국회부의장, 정홍식 전 정보통신부 차관 등이 중학교 동창이고, 김병일 기획예산처 장관과 최혁 주제네바대표부 대사 등은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는 고려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선배가 학과 '써클'인 인류고고학회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예 알겠습니다' 하고는 써클에 가입하게 된다. 동양사나 중국사를 배우고 싶어 진학한 사학과였는데 써클 활동을 계기로 고고학을 접하게 된다. 염불 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많았다. 1964년 창원 성산 패총 현장이 그가 따라 나선 첫 발굴 현장이었다. 발굴이 뭔지도 모르면서 멀리 부산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얘기를 듣고는 무작정 따라나섰다. 매일 선배님들이 찾아와 사주는 공짜 술도 너무 즐거웠다. '지표조사'라는 활동도 자주 나갔다. 봄·가을로 농민들이 밭을 갈고 난 후 버리는 돌을 모아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 돌 속에 돌도끼, 돌칼 등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큰 비로 둑이 무너지는 곳에서 토기 파편 등도 선배들과 함께 주우러 다녔다. 유물에 눈이 밝아지면서 4학년 때 이제 학회 회장도 맡았다. 박 관장은 1971년 군대를 제대하고 인천중학교 은사였던 심재갑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선거 캠프에서 뛰기도 한다. 당시 심재갑 선생님은 38세 나이로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일당 후보로 출마했다. 친구들과 정책실장, 홍보실장 등을 맡아 무보수로 뛰었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선거가 끝나고 함께 선거를 뛰었던 친구는 한 사립대 대학교 총장 비서실에 취직했다. 그 친구 덕에 대학원에 입학해 다시 고고학 석사 과정 공부를 이어간다. 박 관장은 대학원 공부를 하며 임시직 연구원 신분으로 경주 고적발굴 조사단에 참여해 천마총 발굴 후 정리 작업과 황남대총, 안압지 등 발굴에 참가한다.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은 우리나라 고고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조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국내 발굴 조사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은 계기로 평가받는다. 이 경험으로 인해 박 관장은 신라 고분 연구를 전공하게 됐고, 마지막 공직 생활도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경주 전역에 무수히 많은 무덤이 있는데 일제 때 조사·정리된 것이 겨진 것이 155개다. 그 무덤에는 각각 번호가 붙어 있었다. 1호부터 155호까지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이 고분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왕릉을 발굴해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워뒀고 발굴을 지시했다. 이 고분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이 '98호 무덤' 지금의 황남대총이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발굴 경험이 전무했다. 그래서 발굴 경험을 쌓기 위해 그 가운데 가장 작은, 번호도 가장 나중인 '155호 무덤'을 시범적으로 발굴하기로 했다. 1973년부터 발굴을 시작했다.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금관이 발견됐고 유명한 '천마도'도 이때 발굴됐다. 그래서 155호 무덤에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덤 주인은 밝혀내지 못했다. 박 관장은 천마총이 '대박'을 터뜨린 후 정리 작업을 하던 시기부터 경주 고적발굴 조사단에 참여했다. 황남대총 발굴도 시작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만 5만8천여 점에 이르렀다. 금관, 금동관, 둥근 고리 큰 칼 등 사치품이 엄청났다. 당시 경주 발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대단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발굴현장을 찾기도 했다. 취재 경쟁도 치열했다. 무덤에서 어떤 유물이 발견됐다는 사실을 알리면 특종으로 여겨졌다. 특히 금관이 발견되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기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박 관장은 “기자들을 피하려고 일부러 2kW 대형 조명 4대나 설치해두고 밤에 발굴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면서 “취재 경쟁이 너무 심하다 보니 경주지역 전화 교환원을 통해 본사와 전화 통화를 하는 다른 기자의 취재 내용을 몰래 파악하려 한 기자가 있을 정도로 치열했다"고 말했다. 이 모든 발굴 과정은 국립영화제작팀이 상주하면서 기록했다. 박 관장은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1976년 시행된 제1회 4급 을류 학예연구직 공개채용에 합격하며 '학예연구사 시보'로 정식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 박 관장은 이후 독일 초청으로 쾰른 동아시아박물관에서 보존과학에 대한 기법을 배우는 행운을 얻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해외 전문기관의 초청을 받아 교육받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 독일 친구들이 한국에서 발굴 전문가가 왔다고 환대해 줬다"면서 “그곳에서 유럽의 박물관을 자주 돌아다니면서 발굴·복원 기술을 배우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이후 국립공주박물관장과 초대 국립청주박물관장 등을 거치고, 국립중앙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에서 주요 보직을 맡았다. 1999년 출범한 문화재청에서 초대 문화유산국장으로 일하고,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취임 후 4년 동안 경주박물관을 이끌고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 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역사학도이면서 고고학자로, 또 문화재 행정가로 살아온 인생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삶을 살았다. 그가 인천에 건네는 조언은 이렇다. “보통 전문가들은 고집이 센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저는 무슨 일이든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많이 듣는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문화재'라는 옛것을 지키는 일을 해왔지만 현재도 중요합니다. 살아가고 있는 '우리'하고 맞춰가야 해요. 너무 옛날 것만 고집하려 하고, 보존하려 하면 현재가 견딜 수 없어요. 저는 그렇게 국가 시책을 국민 마음에 가닿도록 하는 것이 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천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해요. 인천이 항구도시로서 이미지를 복원하려 굉장히 애를 쓰는 것을 많이 봅니다. 너무 옛날 것만 고집하지 말고, 옛 것 속에 현재를 그리는 것도 중요해요. 너무 옛 것만 이야기하면 굳은 살이 생겨요. 새로운 걸 끌어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옛것에서 미래를 끌어내지 못하고 전통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가라앉아요. 거기서 싹을 틔워서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합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뉴저지 매립지 등 부동산 개발회사10억달러 규모 투자의향서 제출2015년 당시 '강화 메디시티' 무산미국의 부동산 개발회사인 '파나핀토 글로벌 파트너스(이하 파나핀토)'가 강화도 남단 개발 프로젝트(뉴홍콩시티)를 포함해 매립이 진행 중인 송도 11공구, 영종국제도시 제3유보지 등 인천경제자유구역 주요 개발사업 지구에 대한 투자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파나핀토는 지난 2015년에도 강화 남단 개발사업을 추진했다가 무산되는 등 인천 지역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있다.10일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파나핀토는 지난달 유럽을 방문 중이던 유정복 인천시장에게 10억 달러(1조3천억원) 규모의 투자 의향서를 제출했다. 인천경제자유구역 내 도시개발 사업에 투자하겠다며 상호 협력을 요청했다. 파나핀토는 미국 뉴저지주 저지시티의 매립지에서 각종 개발사업을 진행하는 업체로 2009년 설립됐다.관련 업계에서는 파나핀토가 강화 남단 개발사업을 다시 추진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지만, 송도와 영종도 등 경제자유구역 내 주요 사업지구의 개발사업 시행자로 참여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파나핀토가 강화 남단뿐 아니라 경제자유구역 내 여러 사업 지구에 대한 투자 검토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파나핀토 측이 보다 구체적인 투자계획을 제시하면 협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파나핀토는 지난 2015년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한 뒤 '강화 메디시티 사업'을 제안했다. 자본금 550만 달러(73억원)를 입금했으나 영종~강화 교량 건설이 정부 주도로 진행되면서 사업이 백지화됐다.당시 인천시와 파나핀토는 강화도 화도면과 길상면 등 900만㎡에 의료연구·관광단지를 조성하고 영종도와 강화를 연결하는 다리도 건설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교량건설이 국가재정 사업으로 전환되면서 프로젝트 자체가 중단됐다.유정복 시장은 취임 이후 강화 남단을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해 그린바이오 특화도시로 조성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뉴홍콩시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으며 현재 관련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이와 함께 송도 11공구와 영종도 제3유보지 등도 파나핀토의 투자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송도 11공구(6.92㎢)는 인천시가 송도에 조성하는 마지막 매립지로 총 3단계로 나눠 매립을 추진 중이다. 이 중 11-1공구는 지난 2016년 가장 먼저 매립이 끝나 기반시설공사가 이뤄지고 있으며, 11-2공구 매립은 지난해 말 마무리됐다. 송도 11-3공구 매립은 2027년께 끝날 예정이다.인천대교 인근에 있는 제3유보지(253만2천㎡)는 LH 소유로, 마땅한 투자를 찾지 못해 10년 넘게 방치돼 있다.2022년에는 인천국제공항공사가 물류단지 조성을 위해 LH와 토지 매매 협의를 진행했지만 가격 협상에 실패했다. 현재는 인천시의 바이오특화단지 부지로 검토되고 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미국의 부동산 개발회사인 '파나핀토 글로벌 파트너스'가 강화도 남단 개발 프로젝트(뉴홍콩시티)를 포함해 매립이 진행 중인 송도 11공구, 영종국제도시 제3유보지 등 인천경제자유구역 주요 개발사업 지구에 대한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사진은 강화 남단 일대. /경인일보DB
[아임 프롬 인천·(21)] 운동·공부 모두 잡고 싶은 Z세대 박다윤입니다 계양구 태생… 초교 4년때 육상 시작승부욕 강해… 부모님 설득 운동 계속중1때 400m 두각… 첫 전국대회 1등인천체고 진학… 국가대표 상비군에학업 병행 노력끝에 서울대 수시 합격"스포츠 미디어 분야서 일하는 것 꿈"日 강점기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공부하는 선수' 원조… 야구단 유명한때 동양 최대 자랑한 '선인체육관'2013년 해체… 인천체고, 청라 이전'공부하는 스프린터'란 수식어가 싫지만은 않다고 했다. 이제껏 없던 유형의 운동선수, 이제껏 없던 유형의 서울대생. 방향이 전혀 달랐던 두 갈래 길을 하나로 이어 온 박다윤의 노력과 성취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수식어가 이것밖엔 떠오르지 않는다.2022년 4월 대구에서 열린 제51회 종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대학부 200m 경기에 서울대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박다윤이 가장 먼저 결승 테이프를 끊자, '깜짝 금메달'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박다윤의 실력보다는 '서울대생 최초 우승'이란 타이틀에 방점을 찍은 놀라움의 표현이었다.한 달 후 전북 익산에서 열린 제77회 전국대학육상선수권대회 200m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그해 10월 울산에서 열린 제103회 전국체육대회에서도 400m 1위, 200m 2위를 기록하며 더는 '깜짝'이란 표현이 맞지 않음을 박다윤은 입증했다. 대학 2학년인 지난해 10월 전남 목포에서 열린 제104회 전국체육대회 400m 1위, 200m 2위를 차지하며 이 종목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설마 대학 3학년이 돼서도 운동선수 생활을 이어가겠느냐란 시선에 박다윤은 "올해 목표는 우승뿐 아니라 개인 기록을 경신하는 것"이라고 의지를 다진다."저도, 부모님도 대학교에 입학하면 대학 생활에 더 집중하고 운동은 취미 정도로 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교에서 첫 대회에 출전했는데 좋은 성적이 나오니까 저도, 부모님도 계속 운동을 해보자는 쪽으로 기울었어요. 제가 가장 빛날 때는 육상을 할 때인데, 잘하는 걸 굳이 포기하기가 너무 아까웠죠."박다윤은 전문 지도자의 지도 없이 운영해 동호회에 가까운 서울대 육상부에서 부원들과 매주 2차례 훈련하고, 수업 외 시간을 쪼개 혼자 운동한다. 중요한 대회를 앞두곤 서울체육고등학교에서, 주말이나 방학엔 모교인 인천체육고등학교에서 연습하고 있다. 전문 지도자의 지도나 체계적 훈련 시스템 없이도 어떻게 육상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에 박다윤은 "(연습)하는 만큼 성적이 나오더라"고 단순 명쾌하게 설명했다.그는 2003년 인천 계양구 태생 'Z세대'다. 2000년대 중반 개발이 한창인 계양구 동양택지 쪽으로 이사했다. 동네에 살던 친구보다 새로 이사 온 친구가 더 많았다. 인천당산초등학교 4학년 때 육상부가 생기면서 운동을 시작했다.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니 어떤 걸 집중해서 시켜야 할지 부모님의 고민이 컸을 것도 같다."학교 수업 전 훈련을 했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는 게 너무 힘들어서 6학년 때 전국소년체육대회를 끝으로 육상부를 그만뒀어요. 어쩔 수 없이 선발돼 나가야 하는 전국대회가 딱 하나 있었는데, 한두 달 운동을 쉬고 뛰니 너무 못 뛴거죠. 저보다 못 뛰던 아이들이 제 앞에 있는 게 싫었어요. 저 아이들을 이기겠다는 생각에 제가 부모님을 설득해서 계속 운동을 하게 됐어요."특유의 승부욕이 발동하면서 운동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집 근처 중학교에는 육상부가 없어 자동차로 40분가량 걸리는 가좌여자중학교에 입학해 육상부에 입단했다.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겠다고 공부에 집중하길 바랐던 부모님을 설득했다.공부하는 운동선수의 원조 격인 일제강점기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가 떠오른다.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명문학교로 통학하던 학생들이 1915년 무렵 결성한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는 문예부와 함께 1920년 인천 첫 야구단 '한용단'(漢勇團)을 꾸려 활발하게 활동했다. 국회의장까지 지낸 인천의 거물 정치인 곽상훈(1896~1980)이 단장을 맡아 서울 배재학당, 중앙고보 등에 다니는 16~17세 학생들로 단원을 구성했다.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인 웃터골경기장(인천공설운동장)에서 지금으로 따지면 실업팀들과 자웅을 겨뤘다. 한용단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의 공부하는 운동선수는 다른 의미로 사회에 반향을 일으킨다. 많은 학교 운동부 선수가 박다윤의 길을 꿈꾸기 시작했다."예전엔 운동선수는 무식하다는 인식이 많았잖아요. 요즘엔 공부도 운동도 둘 다 잘하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해진 것 같아요. 운동선수의 삶도 다양한 길을 찾아볼 수 있는 여건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후배 운동선수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어요."박다윤은 중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시작한 400m 종목에서 처음으로 전국대회 1위를 했다. 초등부 경기 종목에는 400m가 없었다. 박다윤은 출발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근지구력은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간이 부족해서 수학학원 정도만 다녔고, 나머지 과목은 아버지가 과외 선생님이 돼 줬다고 한다.박다윤이 입학한 인천체육고등학교는 1975년 11월 선인학원이 인천 미추홀구 도화동에 설립했다. 1962년 '국민체육진흥법' 제정으로 정부의 체육 진흥 정책이 본격화했다. 당시 국내 최대 사학재단이던 선인학원은 1973년 국내 최초의 체육전문학교인 인천체육전문학교(1981년 인천전문대학으로 통합)를 동양 최대 규모 체육관인 선인체육관과 함께 도화동 '선인왕국' 내에 건립했다.선인학원은 정부 체육 육성 정책에 발맞춰 인천체육전문학교에 육상부, 농구부, 배구부, 야구부, 탁구부, 레슬링부, 럭비부, 축구부, 정구부, 유도부, 태권도부, 검도부, 사격부, 역도부, 발레부, 펜싱부, 핸드볼부, 수영부, 사이클부 등 운동부를 뒀다. 1976년 말 한국체육대학교가 설립되기 전까지 그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인천체고는 1976년 12개 학급 규모로 제1회 신입생을 받았다.'맘모스 체육관'으로도 불린 선인체육관은 높이 65m짜리 건물 2개와 대형 돔 구조물이 언덕 위에 솟아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마징가 제트'라는 별칭도 있었다. 1만9천㎡ 땅에 건립된 8천500㎡ 규모 체육관은 어떤 종목의 국제경기를 치를 수 있을 만큼의 시설을 갖췄고 그만큼 거대했다. 두 개의 건물 중 한쪽은 인천체육전문학교가, 다른 한쪽은 인천체고가 사용했다.비리 문제가 심각했던 선인학원이 시립화한 1994년 2월 인천체고 설립자도 인천시교육감으로 변경됐다. 인천체고는 2012년 8월 청라국제도시로 학교 건물과 각종 훈련 시설을 신축해 이전했다. 비나 눈이 와도 박다윤이 마음껏 훈련할 수 있었던 전천후 육상 트랙도 이때 만들었다. 선인체육관은 인천체고가 이전한 다음해 8월 도화도시개발사업 추진을 위해 발파 해체됐다. 그 자리엔 현재 대형 주상복합이 들어섰다.현재 인천체고는 육상, 체조, 수영, 세팍타크로, 핀수영, 사격, 역도, 유도, 태권도, 복싱, 자전거, 레슬링, 조정, 근대5종, 양궁, 펜싱 등 종목을 특기로 둔 학생 270여 명이 재학 중이다. 박다윤은 인천체고에 수석으로 입학했다."중학교 3학년 시절 가장 기록이 좋았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걸 느꼈어요. 운동을 포기할까 생각도 했던 시기였죠. 부모님, 선생님, 선배들의 격려를 받으면서 평소 하던 대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묵묵히 운동을 하다 보니 극복이 되더라고요. 1학년 때 마지막 경기가 전국체육대회였는데, 결국 400m에서 동메달을 따고 슬럼프에서 완전히 벗어났어요."고등학교 2·3학년 때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선발되며 승승장구했다. 학업 성적도 학교 전체에서 최상위권이었다. 수업시간에도 눈에 불을 켰고, 특히 노트 필기를 엄청 열심히 했다고 했다. 필기 내용을 열심히 읽는 게 공부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고3 수험생 박다윤은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대회에 문제집과 책을 싸서 들고 다녔다.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지만, 승부욕으로 버텼다.인천체고에서 추억도 많다. 기숙사에서 선생님 몰래 배달 음식을 시켜먹는 방법이 있었다고 한다. 태권도 띠와 유도 띠를 엮어 빨래통에 묶고, 길게 늘어뜨려 1층으로 내리면 배달 기사가 빨래통에 음식을 넣어 줬다. 박다윤은 "새벽 두세 시에 몰래 먹으면 정말 맛있었다"며 "선생님들도 눈치를 채면서도 가끔 눈감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애초 서울대가 목표였던 건 아니다. 체육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하거나 실업팀에 입단할 기회는 박다윤에게 얼마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제10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400m 1위, 1천600m 계주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육상 유망주였다. 체육특기자 대입 전형이 없는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일반 수시전형으로 도전하고 합격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솔직히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교이니 갈 수만 있다면 누구나 가고 싶잖아요. 내신도 좋았고 충분히 도전할 수 있는 전형이라고 생각해서 도전했어요. 서울대 이름을 달고 전국대회에서 1등을 해보고 싶다는 목표를 세우기도 했어요. 하지만 평생 육상선수를 할 순 없기 때문에 좋은 대학에 진학해서 좋은 직업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올해에도 전국대회 금메달이 목표인 박다윤은 올해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갈 생각이다. 다만 기회가 닿는다면 대학 재학 중이라도 실업팀에 입단해 1~2년 정도 선수생활을 더 유지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계획조차 또 달라질 수 있는, 아직은 이른 나이의 성장 중인 선수이자 대학생이다. 요즘 박다윤이 꾸는 꿈은 스포츠 미디어 분야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인천에서 나고 자랐지만, 운동하느라 공부하느라 바쁘고 평범하게 지내서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했네요. 쭉 살아온 고향이라 그런지 너무 익숙하고 편안해요. 제겐 그런 동네예요."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서울대 육상부 박다윤 선수가 지난 21일 오후 모교인 인천체육고등학교 육상 트랙에서 달리기 직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4.2.21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체고에서 훈련하고 있는 박다윤 선수. /박다윤 선수 제공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를 중심으로 꾸린 인천 첫 야구단 '한용단'이 활약했던 1920년대 웃터골운동장 전경(현 제물포고 자리). /경인일보DB선인체육관인천체고 재학시절인 2021년 제102회 전국체육대회 여고부 1천600m 계주에서 우승한 박다윤(왼쪽에서 두 번째)과 인천 선수들. /박다윤 선수 제공기사 전문 온라인
박다윤, 전국체전 육상 400m 金… 엘리트 체육 속 새 유형 주목 서울대학교 재학생으로 전국대회 육상경기에서 첫 금메달을 목에 건 육상선수 박다윤(21·사진)은 그동안 '아임 프롬 인천'에서 만난 21명 가운데 최연소이면서 유일한 20대다.'서울대생'이란 타이틀로 유명해졌으나, 그 타이틀이 육상 선수로서 박다윤의 기량을 제대로 빛나게 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육상 선수 박다윤이 일반 전형으로 서울대에 입학하는 과정, 전문 지도자의 지도 없이도 선수 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달리는 이유에 더 주목해야 한다. 그의 선택은 결승선이 아니라 출발선이다.인천 계양구 출신 박다윤은 인천체육고등학교 재학 중 국가대표 상비군에 선발됐다.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 잘하는 선수로 유명했다. 엘리트 체육인 육성 시스템이 굳어진 한국에서 새로운 유형의 운동선수가 출현한 것이다.박다윤은 지난해 제104회 전국체육대회 여자대학부 400m 1위, 200m 2위를 차지했다. 한두 해 정도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 그만둘 것이란 세간의 시선과 달리 올해에도 대회에 출전해 금메달과 개인 기록 경신을 노린다. 박다윤 특유의 승부욕이 그를 트랙 위로 부르고 있다. 박다윤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많은 어린 운동선수들이 그를 롤모델로 여기고 있다. 그렇게 '성적 지상주의'에 작은 균열을 내고 있다.박다윤은 "후배 운동선수들에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으라고 조언하고 싶다"며 "운동선수도 다양한 삶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서울대 육상부 첫 金 주인공… "달릴때 가장 빛나는 나, 포기 못하죠")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공부하는 스프린터'란 수식어가 싫지만은 않다고 했다. 이제껏 없던 유형의 운동선수, 이제껏 없던 유형의 서울대생. 방향이 전혀 달랐던 두 갈래의 길을 하나로 이어 온 박다윤의 노력과 성취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수식어가 이것밖엔 떠오르지 않는다. 2022년 4월 대구에서 열린 제51회 종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대학부 200m 경기에 서울대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박다윤이 가장 먼저 결승 테이프를 끊자, '깜짝 금메달'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박다윤의 실력보단 '서울대생 최초 우승'이란 타이틀에 방점을 찍은 놀라움의 표현이었다. 한 달 후 전북 익산에서 열린 제77회 전국대학육상선수권대회 200m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그해 10월 울산에서 열린 제103회 전국체육대회에서도 400m 1위, 200m 2위를 기록하며 더는 '깜짝'이란 표현이 맞지 않음을 박다윤은 입증했다. 서울대 소속이든 아니든 박다윤은 항상 우승 전력감인 선수다. 대학 2학년인 지난해 10월 전남 목포에서 열린 제104회 전국체육대회 400m 1위, 200m 2위를 차지하며 이 종목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설마 대학 3학년이 돼서도 운동선수 생활을 이어가겠느냐란 시선에 박다윤은 “올해 목표는 우승뿐 아니라 개인 기록을 경신하는 것"이라고 의지를 다진다. “저도, 부모님도 대학교에 입학하면 대학 생활에 더 집중하고 운동은 취미 정도로 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교에서 첫 대회에 출전했는데 좋은 성적이 나오니까 저도, 부모님도 계속 운동을 해보자는 쪽으로 기울었어요. 제가 가장 빛날 때는 육상을 할 때인데, 잘하는 걸 굳이 포기하기가 너무 아까웠죠." 과거의 엘리트 체육인 육성 방향이 꼭 정답은 아닐 수 있다. 박다윤은 전문 지도자의 지도 없이 운영해 동호회에 가까운 서울대 육상부에서 부원들과 매주 2차례 훈련하고, 수업 외 시간을 쪼개 혼자 운동한다. 중요한 대회를 앞두곤 서울체육고등학교에서, 주말이나 방학엔 모교인 인천체육고등학교에서 연습하고 있다. 때때로 고교 은사와 대학 조교수·교수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전문 지도자의 지도나 체계적 훈련 시스템 없이도 어떻게 육상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에 박다윤은 “(연습)하는 만큼 성적이 나오더라"고 단순 명쾌하게 설명했다. 2003년 인천 계양구 태생 'Z세대'다. 2000년대 중반 개발이 한창인 계양구 동양택지 쪽으로 이사했다. 동네에 살던 친구보다 새로 이사 온 친구가 더 많았다. 인천당산초등학교 4학년 때 육상부가 생기면서 운동을 시작했다. “체육 선생님이 학교 체육대회 때 좀 뛴다는 아이들 45명 정도 모아서 육상부를 만들었어요. 인천시 대회에 출전했는데, 성적이 괜찮아서 이듬해 코치 선생님이 부임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육상부 활동을 했어요. 인천시 대표로 전국소년체육대회나 문화체육관광부장관기 체육대회, 교보생명컵 꿈나무체육대회에서 100m, 200m를 주로 뛰었고요. 초등학교 땐 인천에서 제일 잘 뛰었지만, 전국 대회에선 메달을 따진 못했어요. 최고 성적은 4등이었죠."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기도 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니 어떤 걸 집중해서 시켜야 할지 부모님의 고민이 컸을 것도 같다. 박다윤의 아버지는 기자다. 박다윤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무척 좋아했다. 작가를 꿈꿨을 정도다. “학교 수업 전 훈련을 했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는 게 너무 힘들어서 6학년 때 전국소년체육대회를 끝으로 육상부를 그만뒀어요. 어쩔 수 없이 선발돼 나가야 하는 전국대회가 딱 하나 있었는데, 한두 달 운동을 쉬고 뛰니 너무 못 뛴거죠. 저보다 못 뛰던 아이들이 제 앞에 있는 게 싫었어요. 저 아이들을 이기겠다는 생각에 제가 부모님을 설득해서 계속 운동을 하게 됐어요." 특유의 승부욕이 발동하면서 운동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집 근처 중학교에는 육상부가 없어 자동차로 40분가량 걸리는 가좌여자중학교에 입학해 육상부에 입단했다.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겠다고 공부에 집중하길 바랐던 부모님을 설득했다. 학교 코치 선생님이 매일 새벽 자신의 차량으로 박다윤을 통학시킬 정도로 유망한 육상선수였다. 공부하는 운동선수의 원조 격인 일제강점기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가 떠오른다.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명문 학교로 통학하던 학생들이 1915년 무렵 결성한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는 문예부와 함께 1920년 인천 첫 야구단 '한용단'(漢勇團)을 꾸려 활발하게 활동했다. 국회의장까지 지낸 인천의 거물 정치인 곽상훈(1896~1980)이 단장을 맡아 서울 배제학당, 중앙고보 등에 다니는 16~17세 학생들로 단원을 구성했다.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인 웃터골경기장(인천공설운동장)에서 지금으로 따지면 실업팀들과 자웅을 겨뤘다. 한용단이 일본인 팀과 맞붙은 경기는 인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일 정도로 그 열기가 뜨거웠다고 한다. 인천의 수재들이 운동까지 잘하면서 민족의식을 드높여야 했던 시대였다. 신태범(1912~2001) 박사는 향토사 기록 '인천 한 세기'에서 한용단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한용단이 유명했던 것은 야구를 잘한다고만 해서가 아니었다. 그간 쌓이고 쌓였던 일본인에 대한 원한과 울분을 한때나마 야구 경기를 통해 발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공연하게 일본인과 맞붙어 싸울 수 있고, 마음 놓고 이것을 응원할 수 있는 기회란 이것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한용단이 나온다는 소문만 돌면 철시를 하다시피 온 시내를 비워 놓고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열병에 들 뜬 것처럼 웃터골로 모여들었다." 한용단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의 공부하는 운동선수는 다른 의미로 사회에 반향을 일으킨다. 많은 학교 운동부 선수가 박다윤의 길을 꿈꾸기 시작했다. “예전엔 운동선수는 무식하다는 인식이 많았잖아요. 요즘엔 공부도 운동도 둘 다 잘하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해진 것 같아요. 운동선수는 다른 직업에 비해 '생명'이 짧기도 하고, 부상을 당하면 더 짧아져요. 운동선수의 삶도 다양한 길을 찾아볼 수 있는 여건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후배 운동선수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선택지를 넓힐 수 있는 방법입니다. 공부하는 선수는 운동선수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좋은 타이틀인 것 같아요." 박다윤은 중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시작한 400m 종목에서 처음으로 전국대회 1위를 했다. 이 때부터 200m와 400m를 주종목으로 굳혔다. 초등부 경기 종목에는 400m가 없었다. 박다윤은 출발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근지구력은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400m 종목에서 빛을 발할 것이란 얘기를 들어왔던 터다. 시간이 부족해서 수학학원 정도만 다녔고, 나머지 과목은 아버지가 과외 선생님이 돼 줬다고 한다. 박다윤이 입학한 인천체육고등학교는 1975년 11월 선인학원이 인천 미추홀구 도화동에 설립했다. 1962년 '국민체육진흥법' 제정으로 정부의 체육 진흥 정책이 본격화했다. 당시 국내 최대 사학재단이던 선인학원은 1973년 국내 최초의 체육전문학교인 인천체육전문학교(1981년 인천전문대학으로 통합)를 동양 최대 규모 체육관인 선인체육관과 함께 도화동 '선인왕국' 내에 건립했다. 선인학원은 정부 체육 육성 정책에 발맞춰 인천체육전문학교에 육상부, 농구부, 배구부, 야구부, 탁구부, 레슬링부, 럭비부, 축구부, 정구부, 유도부, 태권도부, 검도부, 사격부, 역도부, 발레부, 펜싱부, 핸드볼부, 수영부, 사이클부 등 운동부를 뒀다. 1976년 말 한국체육대학교가 설립되기 전까지 그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인천체고는 1976년 12개 학급 규모로 제1회 신입생을 받았다. '맘모스 체육관'으로도 불린 선인체육관은 높이 65m짜리 건물 2개와 대형 돔 구조물이 언덕 위에 솟아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마징가 제트'라는 별칭도 있었다. 1만9천㎡ 땅에 건립된 8천500㎡ 규모 체육관은 어떤 종목의 국제경기를 치를 수 있을 만큼의 시설을 갖췄고, 그만큼 거대했다. 두 개의 건물 중 한쪽은 인천체육전문학교가, 다른 한쪽은 인천체고가 사용했다. 1970~1980년대 홍수환, 장정구, 유명우 등 프로복싱 스타들의 세계 챔피언 타이틀 매치가 열린 장소로도 유명했다. 비리 문제가 심각했던 선인학원이 시립화한 1994년 2월 인천체고 설립자도 인천시교육감으로 변경됐다. 인천체고는 2012년 8월 청라국제도시로 학교 건물과 각종 훈련 시설을 신축해 이전했다. 비나 눈이 와도 박다윤이 마음껏 훈련할 수 있었던 전천후 육상 트랙도 이때 만들었다. 선인체육관은 인천체고가 이전한 다음해 8월 도화도시개발사업 추진을 위해 발파 해체됐다. 그 자리엔 현재 대형 주상복합이 들어섰다. 현재 인천체고는 육상, 체조, 수영, 세팍타크로, 핀수영, 사격, 역도, 유도, 태권도, 복싱, 자전거, 레슬링, 조정, 근대5종, 양궁, 펜싱 등 종목을 특기로 둔 학생 270여 명이 재학 중이다. 박다윤은 인천체고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인천체고는 모든 학생이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박다윤은 낯선 기숙사 생활과 엄격한 규율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고등학교 1학년 때 잠시 슬럼프를 겪었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시절 가장 기록이 좋았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걸 느꼈어요. 운동을 포기할까 생각도 했던 시기였죠. 슬럼프가 오래 가진 않았어요. 부모님, 선생님, 선배들의 격려를 받으면서 평소 하던 대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묵묵히 운동을 하다 보니 극복이 되더라고요. 1학년 때 마지막 경기가 전국체육대회였는데, 결국 400m에서 동메달을 따고 슬럼프에서 완전히 벗어났어요." 고등학교 2, 3학년 때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선발되며 승승장구했다. 학업 성적도 학교 전체에서 최상위권이었다. 체고 학생들은 오전과 오후 수업·훈련을 마치면 저녁 시간은 여유가 있어 친구들과 어울리곤 했다는데, 박다윤은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했다. 수업시간에도 눈에 불을 켰고, 특히 노트 필기를 엄청 열심히 했다고 했다. 필기 내용을 열심히 읽는 게 공부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고3 수험생 박다윤은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대회에 문제집과 책을 싸서 들고 다녔다.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지만, 승부욕으로 버텼다. 인천체고에서 추억도 많다. 기숙사에서 선생님 몰래 배달 음식을 시켜먹는 방법이 있었다고 한다. 태권도 띠와 유도 띠를 엮어 빨래통에 묶고, 길게 늘어뜨려 1층으로 내리면 배달 기사가 빨래통에 음식을 넣어 줬다. 박다윤은 “새벽 두세 시에 몰래 먹으면 정말 맛있었다"며 “선생님들도 눈치를 채면서도 가끔 눈감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애초 서울대가 목표였던 건 아니다. 체육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하거나 실업팀에 입단할 기회는 박다윤에게 얼마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제10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400m 1위, 1천600m 계주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육상 유망주였다. 체육특기자 대입 전형이 없는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일반 수시전형으로 도전하고 합격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솔직히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교이니 갈 수만 있다면 누구나 가고 싶잖아요. 내신도 좋았고 충분히 도전할 수 있는 전형이라고 생각해서 도전했어요. 일반 전형이었지만, 대회 입상 실적이나 국가대표 상비군 경력이 '스펙'이라면 '스펙'이 될 수 있었던 것 같고요. 서울대 이름을 달고 전국대회에서 1등을 해보고 싶다는 목표를 세우기도 했어요. 하지만 평생 육상선수를 할 순 없기 때문에 좋은 대학에 진학해서 좋은 직업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 올해에도 전국대회 금메달이 목표인 박다윤은 올해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갈 생각이다. 다만 기회가 닿는다면 대학 재학 중이라도 실업팀에 입단해 1~2년 정도 선수 생활을 더 유지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계획조차 또 달라질 수 있는, 아직은 이른 나이의 성장 중인 선수이자 대학생이다. 요즘 박다윤이 꾸는 꿈은 스포츠 미디어 분야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인천에서 나고 자랐지만, 운동하느라 공부하느라 바쁘고 평범하게 지내서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했네요. 쭉 살아온 고향이라 그런지 너무 익숙하고 편안해요. 제겐 그런 동네예요." ■ 약력 2003년 인천 출생 2016년 인천당산초 졸업 2019년 인천가좌여중 졸업 2022년 인천체고 졸업 2022년 서울대 체육교육과 입학 ■ 주요 대회 성적 2018년 제47회 전국소년체육대회 400m 2위 2019년 제100회 전국체육대회 400m 3위 2021년 제102회 전국체육대회 400m 1위, 1천600m 계주 1위 2022년 제51회 전국종별육상경기선수권대회 200m 1위 2022년 제103회 전국체육대회 400m 1위, 200m 2위 2023년 제104회 전국체육대회 400m 1위, 200m 2위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영종 연결 제3연륙교 내년말 개통120㎞ 규모 300리 자전거길 추진워터프런트 1-2단계 사업비 2252억송도 11-3공구 매립 2027년 완공인천경제자유구역의 교통 편의성 개선과 친수공간 확보 등을 위한 주요 인프라 구축 사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25일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인천 육지(청라국제도시)와 영종도를 연결하는 3번째 교량인 제3연륙교가 내년 말 개통된다. 올해 교량의 핵심 공정인 주탑 설치가 완료될 예정으로 연말까지 공정률 78%를 목표로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제3연륙교는 인천 중구 중산동(시점)과 서구 청라동(종점)을 연결하는 총연장 4.68㎞, 폭30m(6차로)의 사장교로 2021년 착공했다. 제3연륙교가 개통되면 현재 인천대교, 영종대교와 함께 인천경제자유구역 교통 편의성을 크게 높일 수 있는 주요 인프라가 될 것으로 인천경제청은 기대하고 있다.제3연륙교에는 세계 최고 높이인 180m의 해상 전망대를 비롯해 자전거길, 보도 등도 설치돼 인천 앞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관광명소로도 활용된다.인천경제청은 제3연륙교 개통에 맞춰 서구~중구~옹진군 등을 연결하는 총연장 120㎞ 규모의 자전거길 조성 사업(300리 자전거 이음길)을 추진하고 있다.300리 자전거길은 제3연륙교를 거쳐 영종도와 무의도, 신도, 시도, 모도까지 원스톱으로 일주할 수 있도록 설계돼 인천 앞바다를 즐길 수 있는 관광 자원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이와 함께 송도국제도시 6공구 유수지와 북측 수로 21.2㎞를 'ㅁ'자 형태로 연결하는 워터프런트 사업도 순항하고 있다.인천경제청은 워터프런트 사업의 1-2단계 구간을 지난 22일 착공했다.워터프런트 1-2단계 구간은 총사업비 2천252억원을 투입해 전체 길이 9.53㎞, 최대 폭 500m 규모의 연결수로 등을 건설하는 사업이다.2027년 준공 예정이며 지난해 말 DL이앤씨 등 3개사가 시공사로 선정됐다.인천경제청은 1-2단계 구간 공사가 완료되면 수문 설치 등으로 치수 안전성이 확보되고 해수 순환 시스템도 구축돼 수질 개선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워터프런트 1-1단계 구간은 2022년 7월 준공돼 보도교 2개와 공원 4개, 자전거 도로 등이 조성돼 있다.이와 함께 인천경제청은 송도국제도시의 마지막 남은 해안 구역인 11공구 매립공사·기반시설공사, 공공하수처리시설 증설공사 등에도 속도를 낸다는 방침이다.송도 11공구(6.92㎢)는 인천시가 송도에 조성하는 마지막 매립지로 총 3단계로 나눠 매립을 추진 중이다. 이 중 11-1공구는 지난 2016년 가장 먼저 매립이 끝나 기반 시설 공사가 이뤄지고 있으며, 11-2공구 매립은 지난해 말 마무리됐다. 송도 11-3공구 매립은 2027년께 끝날 예정이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건설경기 등이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경제자유구역 주민들의 정주 여건을 개선할 수 있는 주요 인프라 구축 사업을 차질없이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인천경제청은 윤원석 청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워터프런트 사업의 1-2단계 구간 착공식을 지난 22일 개최했다. /인천경제청 제공인천 육지(청라국제도시)와 영종도를 연결하는 3번째 교량인 제3연륙교가 내년 말 개통된다. 사진은 올해 말 시공이 완료되는 주탑건설 현장. /인천경제청 제공
[아임 프롬 인천·(20)] 청운의 꿈 안고 나홀로 인천 유학 왔던 김재균입니다 당진서 공부 위해 초교 마치고 이주선인중·고 거쳐 인하대 산업공학 전공졸업후 카이스트로 옮겨 석사 과정40년간 울산대 교수로 연구·후학 양성울산항만公 사장 맡으며 인천 방문"자유공원~배다리 이어진 길 좋아해""자동차·바이오 등 성장… 전망 밝아""인천에서 보낸 시간은 제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김재균 울산항만공사 사장은 1956년 충청남도 당진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인천으로 유학을 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1960년대 인천은 당진과 비교하면 '큰 도시'였다. 당시 당진을 포함해 충청남도 지역에서 중·고등학교 때 인천으로 유학을 가는 학생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인천은 다른 지역보다 충남 향우회 활동이 활발하다.김 사장은 중학교 1학년 때 혼자 인천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부모님은 당진에 계셨다.그는 선인중·선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인하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0년 안팎을 인천에서 살았다. 10대 대부분을 인천에서 산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카이스트에서 공부하고, 울산대학교에서 교수로 40년 일했다. 2021년부터는 울산항을 운영·관리하는 울산항만공사 사장을 맡고 있다.그는 "제 인생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인천에서 생활했다"며 "인천에서의 삶이 지금의 내 모습을 있게 했다"고 말했다.그가 인천에서 유학했을 때는 10대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공부를 하기 위해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사했다. 부모님 영향도 있었겠지만, 스스로도 원한 일이었다. 김 사장은 "어렸을 때 특별한 목표가 있지는 않았다"며 "단지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더 큰 곳에서 지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이 있었다"고 회상했다.1960년대는 도로 상태가 지금처럼 좋지 않았다. 충남에서 인천으로 이동할 때 배를 타는 게 육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빠르고 편리했다. 그가 살았던 곳은 농촌이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합덕까지 2시간을 걸어야 했다. 합덕에서 실례원역까지 버스를 탄 뒤, 영등포역에 가는 장항선 기차를 탔다. 영등포에서 경인철도를 타고 인천으로 와야 했다. 김 사장은 "육로로 이동하면 당진에서 인천까지 하루 종일 걸렸다"며 "배를 타고 이동하면 육로보다 더 빨리 올 수 있었지만 물때가 맞아야 하기 때문에 배편이 많지 않았다"고 했다.인천으로 온 그는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김 사장은 "환경이 공부를 하게끔 만드는 것 같다"며 "인천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보니 학교와 집만 오가는 생활을 했다. 공부 외에는 할 게 마땅치 않았다"고 했다.그는 선인중·선인고를 졸업한 뒤 인하대학교 산업공학과에 진학했다. 인하대 공과대에 입학한 것은 그의 선택이었다. 김 사장은 "어렸을 때부터 숫자와 계산하는 것을 좋아했고, 공대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고 말했다.인하대 공대는 당시에도 전국 공대 가운데 손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인하대는 다른 학과보다 특히 공대가 유명했다. 이는 인하대 탄생 과정에서도 드러난다.인하대는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과 같은 교육기관을 목표로 설립됐다. 처음 설립된 1954년엔 '인하공과대학'이라는 이름이었다. 이후 1968년 한진그룹이 학교법인 인하학원을 인수했고, 1971년 종합대학교가 되면서 현재의 '인하대학교'라는 명칭으로 변경됐다.김 사장이 인하대에 입학한 1975년은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지 5년째 되는 해다. 김 사장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인하대 공대는 좋은 학교로 인정해줬다"며 "당시 수도권에서는 한양대 공대와 인하대 공대가 전국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그는 인하대를 졸업한 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석사과정을 밟았다. 당시 카이스트는 학부생은 선발하지 않고 대학원생만 뽑았다. 김 사장이 입학했을 때 인천지역 학생은 자신이 유일했다고 한다. 대부분 서울대 출신이었고, 연세대와 고려대 졸업생들도 있었다. 그는 산업공학을 전공했다. 주로 현실문제를 수리적 모형을 통해 해결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교통계획, 통신망 설계 등에 대해서도 연구했다.김 사장은 카이스트를 졸업한 뒤 울산대학교 교원이 됐는데,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우연하게 이뤄졌다. 그가 대학원 1학년 때 영화 '서울의 봄' 배경이 된 12·12 사태가 발생했다. 김 사장은 카이스트 졸업 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지역개발연구소에서 일하기로 결정됐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이 연구소를 폐쇄시켰다고 한다. 김 사장은 "지역개발연구소 폐쇄로 취업할 곳이 없어진 셈이 됐다"며 "당시 정부 정책 영향으로 대학 일자리가 늘어 울산대학교에 자리가 생겼다"고 했다.그는 1981년 울산대학교에 임용된 뒤, 2021년까지 40년을 꼬박 일했다.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전공분야 연구에도 힘을 쏟았다. 그는 울산에 다양한 산업체가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고 했다. 김 사장은 "울산엔 자동차기업, 조선소 등 다양한 산업군이 활동하고 있다"며 "현대중공업과 연구할 기회가 있었고, 산업현장의 문제를 연구·실증하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진행했다"고 했다.울산대 교수로 있으면서 다양한 대외활동을 했다. 낙동강유역환경청 녹색기업 심사위원으로 10여년 활동했다. 울산대 재난안전교육센터장을 맡으면서 산업안전보건공단과도 협업했다. 이 과정에서 울산항과 연이 닿았다. 울산항을 운영·관리하는 울산항만공사 항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항만위원회는 울산항만공사 이사회 격이다. 그는 "물류도 크게 보면 산업공학의 한 분야가 될 수 있지만, 항만위원회 활동 전까진 항만물류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지진 못했다"며 "항만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항만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고 말했다.울산항은 전체 물동량 기준으로 국내 3위에 해당한다. 부산항과 인천항은 컨테이너 물동량 기준으로 1위와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울산은 컨테이너 물동량보다 원유 등 에너지 화물을 중점적으로 처리하는 항만이다. 액체화물 기준으로는 세계 3위에 해당하는 에너지 항만이다. 이 때문에 울산항을 '오일 허브(OIL HUB)'라고 부르기도 한다.김 사장이 울산항만공사 사장을 맡으면서 인천항을 둘러볼 기회도 생겼다. 그가 인천에서 중등학교와 대학을 다닐 때는 지금 인천항의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났다. 김 사장은 "인천항만공사와 울산항만공사 등 전국 4개 항만공사가 정기적으로 모이는 자리가 있어, 지난해 인천항만공사를 찾았다"며 "예전에 내가 경험했던 인천, 인천항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제가 어렸을 때에는 인천항 갑문이 생기기 전이기도 하고, 상당히 정겨운 느낌이 컸다. 자유공원, 차이나타운, 신포동, 배다리까지 이어지는 길을 좋아했다"며 "울산에 있으면서 몇 년에 한번씩 인천에 가면 '예전의 그 인천이 맞나' 싶을 정도로 변화가 크다"고 했다. 특히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인천 신항은 과거 인천항(내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라고 했다.김 사장은 인천의 전망이 밝다고 했다. 자동차뿐 아니라 바이오 등 신산업까지 성장하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꼽았다. 인천항은 꾸준히 물동량이 늘고 있고, 크루즈 등 해양관광분야에서도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그는 인생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시기에 생활했던 공간이라는 점에서 인천에 대한 애착이 크다. 김 사장은 "인생에 대한 목표나 가치관 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인천에 있었다"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꼽으면 '인천에서 지낸 10년'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김 사장은 인천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하면서 본적도 인천 미추홀구로 옮겼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김재균 울산항만공사 사장.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하대학교 2호관.김재균 사장이 지난해 8월 취임 2주년 기념으로 노사 소통공감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김재균 사장이 지난해 3월 진행된 울산신항 사업소 개소식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울산항만공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