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독립운동과 인천·(17)]백범일지 톺아보기·(上)

부친이 조달 탈옥과정 도구로 써전국 최고 기술 기록부족 아쉬워백범 김구(1876~1949)는 인천에서 두 번의 감옥살이를 했다. 김구는 을미사변 직후인 1896년 국모시해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본인을 처단한 이른바 '치하포 사건'으로 첫 번째 옥살이를 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는 1898년 인천감리서 감옥에서 탈출했다. 김구가 '백범일지'에 생생히 기록한 탈옥과정에서 스치듯 언급한 무기 겸 탈출도구가 있는데, 바로 '삼릉창'(三稜槍)이다. 수많은 사람이 '백범일지'를 읽으면서도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삼릉창. 옛 인천의 대장간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라 할 수 있다.인천 감옥에서 탈출하기로 마음먹은 김구는 부친에게 대장장이를 통해 한 자 길이(약 30㎝)의 삼릉창 하나를 만들어 몰래 넣어달라고 했다. 김구의 아버지는 삼릉창을 옷 속에 넣어 전달했다. 인천의 대장간에서 제작했을 게 틀림없다. 김구는 이 쇠창으로 벽돌을 들추고 땅을 파서 감옥 밖으로 빠져 나왔다. 인천에서 서울로 탈출하는 내내 삼릉창을 품에 지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을 것이다. 이 삼릉창 하나에 목숨을 맡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김구의 아버지는 삼릉창을 인천의 어느 대장간에 맡겼을까. 인천은 근대문물이 한국에 전파되는 최일선이었다.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인천 개항장의 대장간에서는 다국적 물품의 주문 제작도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인천의 대장간 기술력이 전국 최고 수준이었을 테지만, 현재 그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양준호 인천대 교수가 '1936년 판 인천상공인명록'을 근거로 2009년 펴낸 '식민지 시기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를 보면, 당시 인천에는 대장간 9곳이 있었다. 일본인 소유가 5곳이고 조선인 소유가 4곳이었는데, 조선인이 운영하던 대장간의 영업세액이 가장 높았다. 그만큼 조선인과 일본인 간 경쟁이 치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태범(1912~2001) 박사가 1983년 쓴 '인천 한 세기'에 따르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애관극장 아래 있던 최씨대장간은 도끼, 칼, 호미, 낫 등을 만드는 솜씨가 남달랐다고 한다.인천에서 만든 삼릉창이 어떠한 형태인지 알 수 있는 단서는 희박하다. 조선 후기 군사교범인 '융원필비(戎垣必備)'에 그림으로 소개됐지만, 중국 병법서를 그대로 베낀 중국식 창이다. 그 삼릉창을 백범도 알고, 대장장이도 알았다. '백범일지'에서 삼릉창의 쓰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색다르다. 인천에서 만들어져 백범을 탈출시킨 그 삼릉창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성도 커진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19-06-19 박경호

[독립운동과 인천·(17)]백범일지 톺아보기·(上)

1896년 '국모 원수갚기' 목적 일본인 살해 체포돼 인천감리서로 이송·심문조선 관리·일본인 꾸짖으며 '유명세' 미결수 신분으로 '기약없는 감옥생활'강화도 재력가 김주경 구명운동 펼쳤으나 부패한 조정 손못써 '탈옥' 권유1898년 간수 눈 피해 쇠창으로 땅 파 빠져나와 용동·만수동등 거쳐 서울로일지에 첫 번째 옥살이관련 자세히 남겨… 기록 복원·콘텐츠화 작업 지적"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 할 수 있다."해방을 맞아 귀국한 그 이듬해 삼남지방 순시에 나선 71세의 백범 김구(1876~1949)는 가장 먼저 찾은 인천에 대해 '백범일지'에 이렇게 썼다. 김구는 인천에서 두 번이나 감옥살이를 하면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자로 새롭게 탄생했다. 그를 진정한 의미의 '백범 김구'로 만든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임에 틀림없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인천 감옥살이와 탈옥과정, 그를 도운 인천 인물들을 소상히 기록했다. 몇 년 전부터 백범 탈출로 등 '백범일지' 속 인천 기록을 복원하는 노력이 일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여전히 '디테일'은 부족하다. '백범일지'를 더 꼼꼼히 살피고 역사적 사실관계를 밝혀내는 작업이 더욱 활발하게 진행돼야 비로소 김구가 인천의 '콘텐츠'로 탄탄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김구는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한 이른바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에서 첫 번째 옥살이를 했다. 당시 그는 '김창수'라는 이름을 쓰는 21세 청년이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쓰치다를 일본군 중위라고 썼다. 대한매일신보사가 1999년 발행한 '백범김구전집' 3권에 실린 치하포 사건 관련 당시 일본 측 보고서를 보면, 쓰치다의 신분을 '평민(상인)'이라고 언급했다. 이와 관련 '백범김구전집' 3권 해제를 쓴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일본 측이 상인(양민)이 강도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의도에서 쓰치다의 신분을 소상히 공표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구는 사건 현장에서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목적으로 왜인을 죽이노라"는 글을 쓰고, 마지막 줄에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고 적었다.김구는 사건이 벌어진 지 세 달이 지난 6월 말 체포돼 해주부에서 심문을 받은 뒤 인천감리서로 이송됐다. 인천감리서는 1883년 개항 이후 설치돼 개항장과 외국인 관련 행정·사법·국제관계 업무를 맡았다. 애초 해주부에서 사건을 처리할 계획이었으나, 일본영사관이 외국인의 생명과 관계된 중대사건이라는 이유로 인천감리서에서 김구를 심문하도록 조선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해 인천으로 옮기게 됐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현재 인천 중구 내동에 표지판 하나만 달랑 세워진 채 그 터만 남은 인천감리서의 모습을 남겼다. 다음은 '백범일지' 속 인천감리서와 감옥이다.'감옥은 내리(內里)에 있었는데, 내리 마루에 감리서가 있고, 왼편에는 경무청이 있고, 오른편에 순검청이 있었다. 감옥은 순검청 앞에 있고, 그 앞에는 노상을 통제하는 2층 문루가 있었다. 감옥 주위에는 담장을 높이 쌓아올렸고 담 안에는 평옥(平屋) 몇 칸이 있는데, 그 방들을 반으로 나누어서 한편에는 미결수와 강도·절도·살인 등 죄인을 수용하고, 나머지 반쪽에는 민사소송범과 경범위반 등 이른바 잡범을 수용하고 있었다.'김구는 불결한 감옥 안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얼마나 아팠는지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1896년 8월 31일 인천항재판소에서 첫 심문이 열렸다.일본정부 관계자도 배석해 심문을 지켜봤는데, 이 자리에서 김구가 조선인 관리와 일본인을 크게 꾸짖었다는 소식이 인천항에 퍼졌다. 2차, 3차 심문이 이어지면서 김구는 '전국구 스타'가 됐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1859~1939) 여사는 객주 박영문의 집에서 식모살이하며 아들 옥바라지를 하고 있었는데, 김구를 도와주겠다는 인천사람들이 점차 늘었다. 일본이 줄기차게 요구한 김구의 사형 판결이 연기됐다. 민심이 그를 단순한 살인범으로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도 섣불리 판결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특히 강화도의 재력가 김주경(김경득)이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김구에 대한 구명운동을 펼쳤다. '백범일지'를 보면, 김주경은 "김창수를 살려내야 할 터인데, 지금 정부대관들은 모두 눈에 구리녹이 슬어서 돈밖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불가불 금력을 사용치 아니하면 쉽게 방면치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주경은 고위 관료들을 만나 김구를 방면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소송을 제기하는 등 7~8개월 동안 가진 돈을 몽땅 썼지만, 결국 김구를 빼내지는 못했다. 조선 말기 부패한 조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당시 조정이 얼마나 썩었는지는 황현(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도 드러난다. '매천야록'에는 영동현에 사는 이용직이 100만냥을 상납하고 경상감사로 임명됐는데, 부임하자마자 포졸을 풀어 지역 부호들을 잡아들이고 뇌물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매관매직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대였다는 게 '매천야록' 곳곳에서 확인된다.김구는 미결수 신분으로 감옥생활을 하면서 1년 넘게 독서에 열중했다. 이 기간 감리서 직원의 권유로 '세계역사·지지(世界歷史·地誌)', '태서신사(泰西新史)'등 중국에서 발간된 서적을 읽으며 새로운 문물을 접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해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사상을 다듬어 갔다. 또 동료 수감자들을 가르치거나 소송을 위한 소장을 써주기도 했는데, 독립신문은 1898년 2월 15일자에 인천항 감옥 죄수 중 20세 김창수가 죄인들을 공부시키니 "옥이 아니요 인천 감리서 학교라고들 한다"고 보도했다.하지만 기약 없는 옥살이가 이어졌고, 자신을 도와주던 김주경마저 전 재산을 써도 방법이 없자 탈옥을 권유하는 시를 보냈다. 김구는 아버지가 소송 문서를 전부 강화도로 갖고 가서 명망 높은 양명학자인 이건창(1852~1898)에게 방책을 묻기도 했지만, 이건창은 탄식만 했다고 '백범일지'에 적었다.김구는 탈옥을 결심하고 계획을 세운다. 1898년 3월 김구는 아버지에게 대장장이를 통해 한 자(30㎝) 길이의 '삼릉창'(三稜槍) 하나를 만들어 새 옷 속에 싸 들여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그가 무슨 일을 꾸미는 줄 짐작하고 즉시 삼릉형(三稜形)으로 만든 쇠창 하나를 넣어줬다. 이 삼릉창은 무기이면서 벽돌을 들추고 땅속을 파는 중요한 도구였다. 김구가 삼릉창을 제작해 달라고 특정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도 생소한 무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삼릉창의 형태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1813년 훈련도감이 편찬한 군사교범인 '융원필비(戎垣必備)'에 삼릉창의 모습이 실려있긴 한데, 중국의 병법서 '무비지(武備志)'에 소개된 중국식 창을 그대로 옮긴 것일 뿐 실제 제작된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김구의 탈옥 도구로 쓰인 삼릉창을 고증하는 작업은 곧 한국 무기의 역사를 보완하는 셈이므로 꼭 필요하다.김구는 탈옥 당일 밤 당번인 간수를 불러 돈 150냥을 주고 죄수한테 한 턱을 낼 것이니 쌀, 고기, 술을 사 오라고 부탁했다. 또 간수에게 50전어치 아편을 사서 실컷 먹으라고 뇌물을 찔러 주기도 했다.그 간수는 아편쟁이였다고 한다. 죄수들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노래를 불렀고, 간수는 자기 방에서 아편을 피우고 정신이 흐릿해 까무러져 있었다. 교역통로였던 인천항에서는 중국에서 건너온 아편 또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 김탁환과 영화감독 이원태는 인천 개항장이 아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거라는 상상에서 출발한 소설 '아편전쟁'(2016)을 썼다. 당시 시대적 상황과 인천항의 국제적인 입지를 고려하면 충분히 해봄직 한 문학적 상상이다. '백범일지' 속 아편쟁이 간수를 통해 당시 인천항에 아편이 만연했다는 것이 입증된다. 소설 '아편전쟁'에서는 인천 청국조계에 아편굴인 '천락원(天樂園)'이 등장하는데, 아편을 단속해야 하는 감리서 순검까지 들락날락한다. 손님이 나날이 늘자 '지락원(地樂園)'이라는 아편굴이 하나 더 생긴다.김구는 혼란한 틈을 타 마루 속에 깔아놓은 벽돌을 창끝으로 들추고 땅속을 파서 감옥 밖으로 나왔다. 조덕근, 양봉근, 김백석 등 장기수 4명과 함께 탈옥했다. 감옥 담장을 넘어 "누구든지 내 갈 길을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결단을 내버릴 마음으로 쇠창을 손에 들고 정문인 삼문(三門)으로 바로 나갔다"고 김구는 당시를 회상했다. 옥에서 빠져나온 김구는 '용동 마루터기', '천주교당의 뾰죽집이 보이는 언덕', '화개동 마루터기' 등을 거쳐 서울로 탈출했다. 김구의 탈출 경로를 연구한 몇몇 학자는 김구가 감리서에서 나와 용동 마루터기, 화개동(현 신흥동) 마루터기를 지나 문학동, 만수동, 부평 등지를 거쳐 서울 양화진 나루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구는 인천에서 시흥 가는 대로변에 서 있는 방석솔(가지가 옆으로 넓게 퍼져 자라는 소나무) 밑에 몸을 숨겨 한나절을 보냈다. 김구가 몸을 숨기다가 지나갔을 것으로 생각되는 길목에는 인천대공원이 있고,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에는 김구와 곽낙원 동상이 서 있다. '백범일지' 속 김구의 첫 번째 옥살이만으로도 재조명해야 할 인천 이야기가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1946년 11월 강화도 김주경의 집을 찾은 김구. 김주경은 김구가 인천감리서에서 옥살이할 때 구명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김구는 해방 후 귀국하자마자 김주경, 윤봉길, 이봉창의 유가족부터 수소문했다. 출처/'백범김구전집' 11권김구가 1896년 7월부터 1898년 3월 탈옥할 때까지 투옥됐던 인천감리서 전경. 현 인천 중구 자유공원 쪽에서 내려다 본 사진으로 추정된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제공조선 후기 훈련도감이 편찬한 군사교범 '융원필비'에 나온 삼릉창. 인천의 대장간에서 제작했을 가능성이 큰 김구의 중요한 탈옥도구였으나, 아직 그 실체가 드러나진 않았다. 출처/'조선의 무기와 갑옷'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이 작년 입수한 김구의 '백범일지' 친필 서명본.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6-19 박경호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대회 대상'-인터뷰]이지산양(인천 길상초 5년)

'따스한 햇볕 받고 있는 저 대나무숲/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중략)…파란 대문 우리 할머니댁/안에 누구 있으려나?/살구꽃 닮은 우리 할머니/포근한 미소 지으며/손주 기다리고 있겠지'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에서 대상(인천시교육감상)을 받은 이지산(인천 길상초 5년·사진)양은 김포시 통진에 사는 할머니를 생각하며 '봄꽃 닮은 할머니'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이양의 시를 읽으면 마당에 백구 가족이 있고, 진달래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할머니 댁 풍경이 마치 그림처럼 펼쳐진다.강화에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 있는 이 양은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일기 쓰는 것을 좋아한다.이양은 "마당에 앉아 있으면 잘 안 써지던 일기가 술술 잘 써진다"며 "야외에서 글을 써 상을 받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는 매년 인천대공원에서 치러진다.이양은 커서 동물을 돌보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직업을 갖고 싶단다. 이양은 "평소 글쓰기를 좋아했는데, 기대하지 않은 상을 받아 너무 좋다"며 "앞으로 글쓰기가 더 재미있어질 것 같다"고 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6-13 김성호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대회 대상'-인터뷰]김태윤군(인천단봉초 3년)

제17회 푸른 인천 글쓰기 대회에서 김태윤(인천단봉초 3년·사진)군은 '벚꽃 같은 나의 선생님'이라는 제목의 산문으로 대상(인천시장상)을 받았다.김군은 2학년 담임 선생님의 고마움을 글로 표현했다. 김군은 선생님의 꼬불꼬불한 머리카락과 향기롭고 달콤한 목소리가 벚꽃과 닮았다며 벚꽃을 보면 선생님이 생각난다고 썼다. 선생님은 책 읽기를 좋아하고, 일기를 재미있게 쓰는 김군의 장점을 반 친구들 앞에서 자랑해주셨다고 한다. 소극적인 성격인 김군은 자신감이 생겼고, 멋진 사람이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김군은 "평소 글쓰기 공부는 따로 하지 않는데, 일기를 매일 쓰고, 책이 좋아 많이 읽었던 것이 상을 받게 된 이유 같다"고 말했다.김군은 "나중에 커서 아픈 사람을 도와주는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면서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질 생각은 없지만, 가끔은 아픈 사람이나 힘든 사람을 위해 좋은 글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좋은 글'이 뭐냐는 질문에는 "글을 읽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고 행복하게 하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다"며 "좋은 글을 많이 읽고 싶다"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06-13 김성호

[독립운동과 인천·(16)]덕적도 독립운동 이끈 이동응·차경창 목사

이동응 목사 서울 성경학원 재학중 3·1운동 참여 독립선언문 버선 속에 숨겨 귀향임용우 선생 도와 만세외쳐… 기독교계 '日기업 술·담배 절제운동'·학교 설립 활동덕적도 출신 차경창, 교사 재직중 만세운동 '옥고' 목사 전향 日 비판설교 감시당해성직자 신분 '한계' 전면에 나서지 못한채 독립사상 전파… 단편적인 자료만 남아인천 옹진군 덕적도 3·1 운동은 기독교 신자들이 주축이 돼 이끌었다. 이동응(李東應, 1881~1967) 목사와 차경창(車敬昌, 1901~?) 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덕적도는 기독교가 이른 시기부터 자리 잡은 지역 중 하나여서 섬 주민 중 기독교 신자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이들이 중심이 돼 독립운동이 펼쳐졌다.개항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육로보다 더 편리한 해상교통을 선호했다. 이 시기 인천의 섬들은 황해도와 경기도는 물론 충청도 등 한반도 서부권으로 나아가는 뱃길의 길목이었다. 다른 지역으로 가던 선교사들도 인천 앞바다 섬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고, 강화도 등 인천 지역 섬에는 기독교가 급속도로 퍼졌다.향토사학자 김광현이 쓴 '덕적도사'에 따르면 덕적도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온 해는 1901년이다. '덕적도사'에서는 10년도 안 된 기간에 기독교가 매우 빠른 속도로 전파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홍석창이 지은 '제물포지방 교회사 자료집 1885~1930'에서는 당시 덕적도 기독교 상황에 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덕적 구역은 남양에서 떨어져 있는 세 섬들로 구성돼 있는데, 몇 년 동안 덕적도가 그 섬들의 중심으로서 그 구역의 목사와 사업의 시작을 주도했다. 이 섬들 중 두 곳에 각각 세 개의 모임들이 있다. 한 해 동안 두 개의 교회가 건축됐다."전문가들은 덕적도에 기독교가 빠른 속도로 유입될 수 있었던 이유로 교회와 학교가 함께 설립된 것을 꼽는다. 인천섬연구총서 '덕적도' 집필에 참여한 인하대 프론티어학부대학 최인숙 강사는 "덕적도 지역은 예로부터 교육열이 유난히 높았다. 이곳 주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교세 확장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마을에 교회를 세울 때마다 학교를 설립해 근대교육을 받게 만들고,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국내외 유학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 줬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많았다"고 설명했다.이 시기 덕적도에 있던 명덕학교와 명신학교, 합일학교는 덕적도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토대가 됐다. 이 학교 출신들은 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 선생을 도와 덕적도 3·1 운동을 주도했다. 3·1 운동 이후에도 인천과 전국 곳곳에서 독립 사상을 전파했다.합일학교에서 공부했던 이동응 목사는 덕적도 3·1 운동에 불씨를 지핀 인물이다. 향토사학자 이훈익의 저서 '인천지방향토사지'에 나온 기록을 살펴보면 이동응 목사는 1919년 서울 성경학원에 재학 중이었다. 서울에서 열린 3·1 운동에 참여한 그는 고향인 덕적도로 내려오면서 독립선언문 한 장을 버선 속에 숨겼다. 이동응은 그의 조카이자 임용우(1884~1919) 선생의 제자인 이재관(1897~1989)에게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전하고, 밤을 새워 가며 선언문 100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때 마침 경기도 김포에서 만세운동을 했던 임용우 선생도 덕적도로 돌아왔고, 이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불렀다.당시 임용우 선생과 이재관 등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5명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지만, 이동응 목사에 대한 재판 기록은 없다. 이 때문에 그가 실제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인천지방향토사지' 등 여러 출판물에서 이동응 목사가 덕적도 3·1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기술한 점을 고려하면 그가 덕적도에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가져온 것은 사실로 추정된다.3·1 운동 이후 이동응 목사는 본격적인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1921년부터 7년 동안 장봉도 옹암감리교회 담임 목사로 근무한 그는 절제운동을 벌였다.절제운동은 조선물산장려운동의 하나로 추진됐다. 일본 기업이 대부분 이익을 가져가는 술이나 담배를 줄이자는 게 절제운동의 목표다.조선총독부는 1916년 주세령을 시행했다. 주세령은 각 가정에서 이뤄지던 자가주조를 금지하고, 주조업을 기업화·대형화시켜 안정적인 세액을 확보하고자 추진된 정책이다. 주세령이 시행된 이후 1920년 조선총독부의 전체 세입 중 7%가 주류에 의한 세금일 정도였다.기독교계에서는 절제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1928년 1월 '기독신보'는 사설을 통해 '동포여, 죠션(조선) 안에서 술 담배로 소비되는 돈이 총합 10억1천989만3천824원(당시 330㎡ 기와집 1만여채 값)입니다. 동포여, 우리의 당면한 대 문제를 해결함이 오직 금쥬 단연함에 잇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절제운동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장봉도 옹암감리교회 92년사'에 따르면 이동응 목사는 찬송 형태의 '금주가'를 만들어 어린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고 한다. 아이들을 시작으로 어른들의 금주 활동도 추진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금주·단연 청년회도 조직했는데, 기독교계에서는 이러한 활동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1925년 '기독신보'는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에서 금년(1925년) 1월에 이동응, 이용의 씨의 발기로 금주 단연 청년회를 조직하고 사무를 진행했는 바 불신자 청년의 금주단연은 더욱 가상한 일이라고 칭송이 높더라'고 이동응 목사의 활동을 소개했다.강화 석모도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던 이동응 목사는 학교 시설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1 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당시 지식인들은 민중계몽운동에 힘쓰기 시작했다. 이들은 농촌지역에 학교를 설립해 주민들의 교육을 위해 노력했다. 이동응 목사가 목회활동을 하던 강화도 석모도에는 1908년 세워진 부흥여학교(초기 이름 합일여학교)가 있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1920년 이동응 목사는 수천원의 기금을 모금해 10여 칸 되는 기와집 교사를 신축했다고 한다. '강화 기독교 100년사'에서는 부흥여학교 교사가 새로 만들어지면서 학생 전원이 30명에서 70명으로 늘었다고 설명했다. 같은 해 이동응 목사는 석모 지역 유지 김창진, '강도지'를 펴낸 박헌용과 함께 석모도에 있는 옛날식 서당을 하나로 통합해 '육영의숙'을 세웠다. 이곳의 학생은 100여명에 달했다.덕적도 출신 중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는 이동응 목사뿐만이 아니다. 임용우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차경창 목사도 독립운동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차경창 목사는 임용우 선생이 교사로 있던 명덕학교를 다녔으며, 합일학교 교사로 일하던 중 임용우 선생과 함께 3·1 운동을 벌였다.그의 재판 기록에는 "덕적면 진리 명덕학교 운동회에서 임용우, 이재관과 모의해 학생 수십명과 함께 만세를 부르는 등 치안을 방해했다"고 적혀 있다. 이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8개월간 옥고를 치른 차경창 목사는 그곳에서 목회자로 전향했다.차경창 목사는 인천 영흥도와 강원도 영월, 충청북도 제천, 강원도 원주 등지를 돌며 목회활동을 했다. 그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일제를 비판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내용이 담긴 설교를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차경창 목사는 항상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다. 차경창 목사의 큰아들인 차현회(91) 목사는 12일 경인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설교할 때, 항상 일본 경찰은 예배당 시계 밑에서 감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총독부가 이래서는 안 되고, 우리 국민들도 나라를 위해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며 "이러한 이유로 어린 시절 아버지는 항상 원주경찰서 유치장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회상했다. 이어 "항상 경찰서를 들락거렸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설교를 했다"며 "젊은 시절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컸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6·25 전쟁 당시 서울 수표교교회에서 재직하던 차경창 목사는 납북돼 행방불명됐다. 그와 서대문형무소에서 생활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던 남조선노동당 서울시 임시인민위원장 이승엽(1906~1953)이 그를 데려갔다는 게 차경창 목사 가족들의 설명이다.차현회 목사는 "이승엽 위원장이 발판이 필요했을 테고, 당시 유명한 교회 목사였던 아버지를 포섭했던 것 같다"며 "아버지는 고심 끝에 이승엽 위원장 비서를 따라갔는데,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말했다.이동응 목사와 차경창 목사는 고향인 덕적도의 독립운동 불씨를 당겼다. 이들은 섬이나 농촌 지역 주민에게 민족 의식을 심어주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연구는 아직 단편적인 자료밖에는 남아있는 게 없는 실정이다.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는 "목회자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전면에 나서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여러 지역을 돌며 독립 사상을 전파했다"며 "덕적도와 인천의 독립운동 역사의 일부분을 차지한 이들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차경창 목사 존영이 전시된 한국기독교순교자 기념관. /한국기독교순교자 기념관 제공이동응 목사. /영종중앙교회 제공백아도에서 바로본 덕적도와 주변 섬의 모습. 인천에서 배로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덕적도는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해변과 소나무숲, 바다낚시 등으로 유명하다. /경인일보DB차경창 목사. /차경창 목사 가족 제공차경창 목사 판결문.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2019-06-12 김주엽

[zoom in 송도]인천관광공사 연구용역 '물 축제' 개발 제안

센트럴파크內 인공 수로 '행사 최적지'축제 기간 국제보트전 등 산업·교역전관광객 유치 명소화·새 산업창출 효과경제청 "전문가·여론 수렴 예산 확보"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인천을 상징하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제를 만들고자 연구용역을 했다. '세계 대표 축제 발굴 및 개발' 사업이다. 인천관광공사가 지난해 2월부터 12월까지 11개월간 연구용역을 진행했다. 용역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지난해 4월이다. 인천관광공사는 국내외 유명 축제의 특징을 분석하고 전문가 의견을 수렴했다. 잠재 방문객 조사(2회), 중간 보고회(2회), 국내 전문가 자문회의(3회), 해외 전문가 초청 간담회(2회) 등을 거쳐 결과물을 완성했다.인천경제청이 '세계 대표 축제' 발굴·개발에 나선 것은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관광객 유치로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것이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의 도시 인프라는 어느 정도 구축됐기 때문에 '국제도시'라는 명칭에 걸맞은 소프트웨어 개발이 필요하다는 게 인천경제청의 판단이다. 세계 대표 축제를 만들어 도시 이미지를 탈바꿈시키고 도시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는 것이다.인천에서는 매년 부평풍물대축제, 인천소래포구축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등 다양한 축제가 열리고 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의 경우, 송도에 집중되던 문화 행사가 청라와 영종으로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축제로 내세울 만한 행사는 없다. 영국 에든버러, 브라질 리우 카니발, 독일 옥토버페스트, 일본 삿포로 눈 축제, 스페인 토마토 축제 등은 세계인들이 손꼽는 세계 최대 문화 행사들이다. 축제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천문학적이다.인천관광공사가 이번 연구용역에서 제시한 인천의 세계 대표 축제는 '송도 워터 카니발(Songdo Water Carnival)'이다. 인천관광공사는 인천이 '해양도시'라는 점에 주목했다. 인천은 바다와 섬, 갯벌, 항구를 가지고 있다. 송도 센트럴공원과 6공구에는 수로·호수가 있으며, 송도의 기존 수로·호수를 연결해 'ㅁ'자형 물길을 내는 워터프런트 조성사업도 진행 중이다. 인천연구원의 '인천도시가치 발굴 시민 설문'(2016년) 자료를 보면, 응답자의 약 63%는 항구·공항·바다·섬·갯벌을 인천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꼽았다.'송도 워터 카니발' 장소는 센트럴파크 인공수로 일대다. 센트럴파크는 인천시민 등 송도 방문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며, 인공수로 주변으로 G타워·트라이볼·송도컨벤시아·아트센터 등 주요 인프라가 집중돼 있다. 미국 샌안토니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이탈리아 베니스 등은 강이나 운하를 활용해 보트 퍼레이드 등 물(Water)의 축제를 열고 있다. 국내에서는 보트를 활용한 축제 프로그램이 아직 없다. 특히 송도는 인공수로 주변에 고층 빌딩이 밀집해 있어 행사 장소로서 차별성이 있다. 인천관광공사는 G타워, 트라이볼, 인천도시역사관 외벽에 특수 효과를 연출해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축제 기간 송도컨벤시아에서 '국제 보트 박람회' 등 해양 관련 산업·교역전을 개최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인천관광공사는 송도 워터 카니발을 ▲열린 항구(해외 문화 체험 공간) ▲테마 보트 (해상)퍼레이드 ▲선상 파티 ▲인천시민 (육상)퍼레이드 ▲수상 불빛 쇼 ▲산업·교역전 등으로 구성했다.'열린 항구' 프로그램은 인천 등 해외 유명 항구 도시를 테마로 다양한 문화가 섞이는 퓨전형 콘텐츠다. 인천관광공사는 중국 톈진, 일본 요코하마 등 인천과 연관이 있는 국가의 항구 11개를 선정해 각국의 문화를 체험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테마 보트 퍼레이드'는 각 보트 상단부에 국가별 랜드마크 장식물을 설치하고, 하단부에서는 공연을 벌이는 방식이다. '인천시민 퍼레이드'는 시민들이 직접 만든 테마 차량이 센트럴파크 주변 도로를 천천히 운행하면서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수상 불빛 쇼'는 레이저 쇼, 워터 쇼, 크레인(Crane) 쇼, 아트 쇼 등으로 세분된다.인천관광공사는 용역 보고서에서 "(축제를 통해) 송도 센트럴파크와 주변 인프라 자원을 국내외에 홍보할 수 있다"며 "방문객 유치로 지역 명소화 및 긍정적 시너지 유발이 기대된다"고 했다. 또 "연관 산업 발굴·유치로 새로운 산업군을 창출하는 효과가 있다"고 전망했다. '송도 워터 카니발' 개최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이는 인천관광공사가 연구용역에서 제안한 것으로,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인천경제청은 '송도 워터 카니발'에 대한 전문가와 시민 의견을 수렴해 나갈 계획이다. 또한, 축제 개최를 위해선 전담 조직(추진·조직위원회) 구성과 예산 확보 및 마케팅 활동이 필요하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의견 수렴을 이어 나가면서 내년도 예산에서 사업비를 확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천관광공사는 단기(1~3년), 중기(4~6년), 장기(7년~) 등 단계별로 축제 규모를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축제 예산은 단기 55억원 등 55억~100억원(협찬 등 수입 포함)으로 추산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관광공사가 '송도 워터 카니발' 장소로 제안한 송도 센트럴파크 전경.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송도 워터 카니발' 행사장 구성 이미지. /'세계 대표 축제 발굴 및 개발' 용역보고서에서 발췌/아이클릭아트

2019-06-09 목동훈

[독립운동과 인천·(15)]덕적도와 임용우

김포서 태어나 신학문 공부 교직생활하다 1912년 27살에 인천 도서지역 명덕학교 부임가정학습·마을 궂은일 '앞장' 어린 나이에 존경받아… 천도교 통해 서울 3·1운동 참여돌아와 제자들과 '만세운동' 준비 4월 9일 학교 운동회로 사람들 불러모아 "독립" 외쳐日경찰 혹독한 고문 35살에 사망 광복후 주민들 추모비 세워… '섬'탓 활동 아는이 적어1919년 3월, 인천 지역 또한 한반도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 함성으로 가득했다. 인천 중구, 동구와 계양구 황어장터, 강화도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대규모 만세 시위가 일어나며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민중들의 목소리가 커졌다.지금까지 인천시나 각 지자체 주도로 진행된 3·1운동 기념행사는 인천 동구 창영초등학교나 계양구 황어장터에서 열리고는 했다. 그런데 올해 처음으로 옹진군은 3·1운동 기념식을 덕적도에서 열었다. 1919년 덕적도에서 울렸던 만세 함성이 100년을 지나서야 빛을 보게 된 것이다.덕적도에 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린 사람은 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 선생(1884~1919)이다. 그가 덕적도에 머물던 시간은 8년에 불과했지만, 그의 제자들은 덕적도와 강화도 등 인천 지역 섬을 돌며 독립이 왜 필요한지를 주민들에게 전파했다.하지만 그의 독립운동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섬이라는 제한된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소규모로 이뤄진 데다, 접근이 쉬운 인천 시내 독립운동과 비교해 관련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그의 행적에 대해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국가보훈처 공훈록에 따르면 임용우 선생은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하던 그는 김포 통진에 있는 창신학교에서 4년여 동안 신학문을 공부했다고 한다. 졸업 후 모교에서 3년여 동안 교직 생활을 했던 임용우 선생은 1912년 27살 나이로 덕적도 명덕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1910년대 당시 덕적도 주민들의 경제 상황은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서해 민어 파시의 중심지이기는 했으나, 어업권을 일본에 계속 빼앗기고 있었다. 어업을 주업으로 삼았던 덕적도 주민들에게는 큰 피해였다.일제는 우리나라에 식민어촌을 건설하고 일본의 어부들이 이주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를 위해 일제는 1907년 '한국수산지'를 발간해 일본 어민을 돕는 지침서로 사용했다. 1908년에는 어업법, 1911년에는 조선어업령을 시행하면서 모든 어민이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면허를 받도록 했다. 일제는 당시 어업면허의 종류를 세분화 했다.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신식 어업은 일본 어민에게만 허가하는 등 우리 어민을 차별했다. '한국수산지'에 따르면 당시 덕적도 주변 해역에서 주로 잡히던 어종은 민어였다. 민어 조업에도 일본은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1923년 9월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 그해 덕적도 인근에서 출어한 어선 528척 중 일본 어선은 90척에 달했다고 한다.경제적으로 어려운 덕적도 주민들이었지만, 교육에 대한 열정은 매우 컸다. 향토사학자 김광현이 1985년에 출판한 '덕적도사'에서는 1910년대 초기 덕적도에는 명덕학교, 명신학교, 합일학교 등 3개의 사립학교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광현은 "(덕적도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부녀자까지라도 한글 정도는 해독할 수 있게 됐고, 시대의 변천과 교육의 흐름에 따라 신학문에 유의한 인사들이 규합해 학교를 잇따라 설립했다"고 적었다.명덕학교에 부임한 임용우 선생은 밤이면 각 가정에 방문해 학생들의 가정학습을 지도했고, 학교에서는 학생들과 짚신을 만들어 팔아 학교 경영에 보탬을 줬다고 한다. 마을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도왔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덕적도가 고향인 송은호(86) 옹은 지난 5월 31일 경인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나는 나이가 어려 임용우 선생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삼촌이나 아버지가 평소에도 임용우 선생의 말을 인용해 나를 가르쳤다"며 "돌아가신 지 한참 지났을 시점이었으나, 마을 사람에게는 스승으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그가 명덕학교 교사로 일한 지 7년이 흐른 1919년 2월 임용우 선생은 천도교 측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서울에서 대규모 만세 운동을 진행할 예정이니 서울로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서울로 가서 3·1운동에 참여한 그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고향인 김포에 내려왔다.이곳에서 3·1운동을 계속했다. 그는 3월 29일 수백명의 주민들과 함께 김포 월곶면 사무소와 공립보통학교를 돌면서 만세를 불렀다. 당시 독립운동 재판기록을 살펴보면 임용우 선생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한 조남윤, 최우석, 정인교, 윤종근, 민창식 등은 현장에서 붙잡혔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덕적도로 숨어드는 데 성공했다.임용우 선생은 섬에 들어오자마자 명덕학교 제자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을 가져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내륙 지방의 '장날'과 같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날을 잡기 어려워 날짜를 정하지 못했다. 임용우 선생은 학교 운동회를 개최해 주민들을 불러 모으자고 제안했고, 4월 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9일 덕적도 주민들은 진리 해변에 모였다. 주민들은 우선 일제의 눈을 피하려고 줄다리기와 달리기, 씨름 등 체육 행사를 진행했다. 체육 행사가 마무리된 뒤, 임용우 선생은 독립 선언을 외쳤고 그를 따라 많은 주민도 독립 만세를 불렀다. 덕적도 출신으로 해방 후 감리교 통합운동을 주도했던 김광우 목사는 그의 자서전 '나의 목회 반세기'에서 "해변에서 운동회를 하던 중 동네 사람과 학생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일본사람들은 꼼짝 못하고 있었다. 우리의 태도에 겁을 먹은 것이다"고 당시를 회상했다.조선총독부가 3·1운동 동향을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는 이날 독립운동에 대해 '학생 50여명, 학부형 30여명이 모여 종이로 태극기 10장을 만들어 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적었다. 하지만 당시 덕적도 명덕학교와 합일학교, 명신학교의 학생과 주민의 수를 고려하면 100~300여명이 만세 운동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진리 해변에서 만세운동이 끝난 뒤에도 주민들은 국사봉 등 마을 뒷산과 주요 거리에서 봉화를 피우고 만세를 불렀다. 이날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이인응은 자신이 운영하는 덕적도에 딸린 작은 섬 울도 사숙(私塾)에 돌아가 학생 2명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조선총독부가 작성한 문서를 살펴보면 임용우 선생은 만세 운동을 벌인 뒤, 4~5일 이내에 붙잡힌 것으로 추정된다. 임용우 선생의 제자였던 이정옥은 생전에 "덕적도 헌병 주재소에서 일본 경찰과 조선인 헌병보조원은 선생님(임용우)이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했다"고 진술했다. 임용우 선생은 인천경찰서로 옮겨진 뒤에도 가혹한 구타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전해진다.1919년 5월 9일 임용우 선생은 그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던 제자들과 1심 판결을 받았다. 주동자였던 그는 1년 6개월의 형을 받았고, 나머지 제자들에게는 6개월~1년 형이 선고됐다. 제자들은 곧바로 항고했으나, 임용우 선생은 이마저도 할 수 없었다. 심문 도중 들것에 실려 나갈 정도로 건강이 나빠진 그는 선고 이튿날 3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서대문형무소에서 눈을 감았다."순종황제 붕어하시고 3·1 운동이 궐기할 시에 본명 사립 명덕학교 선생 임용우씨가 주최로 합일학교 교사 이재관씨 차경창과 비밀 연락해 기미년 3월 10일(음력으로 추정)에 대 운동회를 개최하고 면민 전반이 대회합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며칠 후에 주최자 3인은 일본 경찰관에게 납치돼 임 선생은 가혹한 고문에 절명케 돼 출옥 치사하니 아-슬프다. (중략) 한국은 해방이 돼 왜적은 그림자를 감추게 되니 애국의인이며, 애국열사의 선혈은 헛됨이 아니었다. 1948년 해방 직후 3월 1일에 임 선생의 영세불망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3·1절에 추도식을 행하니 몸은 지하에 돌아갔으나 영은 천추에 살아있는 것이다."우리나라가 독립한 이후 3년이 되던 1948년 덕적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덕적중고등학교 앞에 세운 비석에 임용우 선생을 추모하는 글이 남아 있다. 송은호 옹은 "비석이 세워질 때, 마을 어르신들이 '참 훌륭하신 분이 먼저 가셨다. 이제라도 위로를 할 수 있게 돼 다행이다'고 말씀하시며 눈물을 훔치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임용우 선생은 덕적도 사람들에게 영원한 스승으로 남아 있다. 그는 육지와 떨어진 작은 섬에서 독립운동에 불씨를 당겼다. 덕적도 주민들은 조국이 해방된 직후부터 그를 추모해 왔지만, 대부분 인천 시민들은 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3·1운동 100년을 맞는 올해부터라도 외딴 섬에서 임용우 선생이 펼친 독립운동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옹진군 제공,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1948년 3월1일 덕적도 주민들이 세운 임용우 선생 추모 기념비. /옹진군 제공지난 3월 1일 인천 옹진군 덕적도에서 3·1운동이 펼쳐진 지 100년만에 기념식이 열렸다. 장정민 옹진군수가 이날 기념식에서 '기미년독립선언 기념비' 앞에서 헌화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1997년에 세워졌다. /옹진군 제공덕적도 국수봉 전경. /옹진군 제공임용우 선생 판결문. /옹진군 제공

2019-06-05 김주엽

[인천의 얼굴·(13)]삼창주철공업 이상만 공무부장

車·기차 부품등 제작 35년 넘은 '최고참''경쟁력'불구 열악한 환경탓 기피 아쉬워뿌리산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무의 뿌리처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면서 제조업의 근간을 이루는 분야를 말합니다. 쇳물을 다루는 주물(鑄物)이 여기에 속합니다. 위험하고, 힘이 드는 일입니다. 이상만(64)씨는 35년 넘게 주물회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금방 떠납니다. 힘이 드는 것도 그렇지만 주물의 특성상 작업 환경이 열악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인천 서구 경서동의 삼창주철공업. 1987년에 주물공장들이 이곳에 몰려들었습니다. 주물공단이라고 합니다. 서울 구로에 있던 회사도 이때 옮겨 왔습니다. 1984년에 입사한 이상만씨는 이 회사 최고참입니다.인천은 뿌리산업의 집합처이기도 합니다. 주물 같은 뿌리산업이 꼭 필요한 존재인데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 따집니다. 자꾸 밀어내려고 합니다. 공장이 집값을 떨어뜨린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자리이기도 한데 사람들은 왜 몰아내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인천은 현재도 역시나 노동자의 도시입니다. 이상만씨가 그것을 증언합니다. 강원도에서 태어났는데 울산 현대중공업에서도 일했고, 영광의 원자력발전소에서도 일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안 다닌 곳이 없습니다. 서울 구로의 삼창주철과 연이 닿았습니다. 회사가 인천으로 이사하면서 이 땅에 뿌리를 내린 것이지요.젊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업종이지만 주물 같은 뿌리산업의 경쟁력은 아직은 괜찮습니다. 우리가 11개를 만들어 1개의 불량을 내고 10개를 납품한다면, 중국은 100개를 만들어야 10개를 납품하는 정도입니다. 불량률이 엄청나지요. 아직 기술력 차이가 큽니다. 하지만 배우려는 젊은이가 없는데 미래가 있겠습니까. 회사에 90명 정도 일하는데 외국인 노동자가 10여 명이나 됩니다. 앞으로는 이들 외국인들이 우리의 뿌리를 이룬다는 얘깁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있을 수 있습니까. 기본을 외면하는 사회, 걱정입니다. 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의 얼굴'을 찾습니다. (032)861-3200이메일 : say@kyeongin.com

2019-06-04 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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