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자는 해마다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올해도 마감 당일까지 1천여 편의 응모작이 접수되었다. 한편 한편이 응모자들의 땀과 고뇌의 산물일 것이다.예심 없이 심사위원 두 사람에게 응모작품이 전달된 것이 12월 중순쯤이었다. 충분한 검토의 시간을 보내고 12월 20일, 심사위원 두 사람은 경인일보 사장실 옆 접견실에서 만나 당선후보자들의 작품을 놓고 협의를 계속했다.두 사람이 테이블에 올려놓는 응모작마다 담당 기자가 일일이 인터넷 검색을 해나갔다. 순수 신인이어야 한다는 응모 요강에 맞는 사람인지를 확인했다.모든 인쇄매체에 소개된 경력이 있는 응모자는 신인으로 보지 않았다. 많은 응모자가 이 조항에 걸려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의 꿈을 접어야 했다.올해의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작들의 가장 큰 특징은 거대담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예컨대 팬데믹이라던가 이태원 사태 같은 국가 사회적인 재앙 문제를 짚어가는 담론이 사라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다.심사위원 두 사람은 '세계, 고양이'를 두고 장시간 논의를 계속했다. 그리고 응모작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라는데 합의했다.당선작은 차가운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지만 상승의 이미지로 시를 밀어 올린다는데 동의하고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읽을수록 만만치 않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당선자 김현주는 감각적인 문장과 세련된 은유로 시의 품격을 높이며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첫 연의 도발적인 문장이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라는 문장이 마치 불온하게 타들어가기 시작하는 도화선 같다.'달빛 한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 되'어 터벅터벅 걸어가는 북극의 밤은 그녀의 의식의 세계다.그런가하면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영원히 끝나지 않은 밤을 지난다'와 같은 유려한 문장이 시의 격조를 한층 높이고 있다.당선작은 투명한 얼음 같은 차가운 이미지로 빛난다. '동그랗게 떠 있는 그곳을 향해/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가는 시인의 그곳은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면서도 솟아오르는 대지일 것이다.그녀의 시세계가 대지를 다 품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한국 시단의 별로 찬란하기를 빈다.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흩어지는 만년설 사이로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파란 눈동자작게 너울거리는 심장소리가 빼꼼히 나를 올려다본다휘둥그랑 투명한 수염을 휘날리며다정히 나의 세계에 뛰어들었던 고양이는지금 어디쯤 있을까강렬한 축문처럼 나를 감싸던 고양이가 사라진 지금나는 달빛 한 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되었다언제쯤 돼야 이 지긋지긋한 것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무쇠 신을 끌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고 긴 북극의 밤에는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고 고양이도 없다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을 지난다쇄빙선도 깨지 못한 얼음에 갇혀일각고래와 청새치 바다거북이 가라앉은 심해 한가운데를혼자 일렁이는 밤천리라도 따라가고 만리라도 따라간다는낯익은 이별가에 목이 메인다동그랗게 떠있는 그곳을 향해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 간다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며 솟아오르는나, 또는 고양이라는 세계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이 지면에서 수정 언니의 이름을 부르게 되어 기쁘다. 우리 둘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는 언니를 기억하며 <숨비들다>를 쓰고 고쳤다.수정 언니를 생각하면 여전히 슬프다. 그런 가운데 잘 살아야 한다고, 잘 살아보자고 힘을 내곤 한다.말하는 재미보다 쓰는 즐거움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고백하건대 행복한 일만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괴롭히고 가까운 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하지만 새 소설을 구상하거나 이야기 짓는 작업의 희열이 그 괴로움보다 컸다.조금은 세상과 거리를 둔 채 또 다른 세계를 꾸려갈 때 비로소 나와 내가 발 디딘 곳이 맞붙었다.하성란 선생님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선생님과 함께 소설을 쓰는 동안 읽는 사람의 눈을, 쓰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에 대해 배웠다. 내내 믿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만큼 더 나아간 글로 보답하고 싶다.소설가로서의 나이를 세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그 나이가 드는 걸 반가워하며 꾸준히 쓰겠습니다. 이런저런 작가가 되자고 다짐 나눴던 은영, 응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은 시은 언니, 같은 글을 읽고 또 읽어준 은아. 고집 센 자식한테 늘 져주신 엄마 아빠. 혼자 써야 하지만 한편 혼자 써낼 수 없는 것이 소설이란 걸 이제는 압니다.빈틈 많은 아내의 꿈을 한결같이 지지해온 김희상에게 고맙습니다. 다행입니다.마지막으로 연아야, 네가 있어서 엄마는 계속 할 수 있었어. 다독가 연아도 손에서 놓지 않는 그런 작품을 쓸게.고은경
복잡하고 치열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불현듯 시간이 멈출 때가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그 수많은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불빛으로 가득 찬 제주의 도심을 지나 숲길을 달리다 보면 문득 세상의 이면처럼 반듯하게 펼쳐진 들판이 나타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한밤의 들판에는 세찬 바람을 따라 풀들이 눕는 소리와, 낮게 울려 퍼지는 말들의 수군거림, 아득히 들려오는 습한 천둥소리만 가득합니다. 방패처럼 나를 감싸던 시야와 소리가 멀어지고 하루 종일 흘러넘치던 것들이 온전히 사라지는 그 시간, 거대하고 희미한 은하수의 흔적 사이로 먼 곳의 별들이 아주 조금씩 움직입니다.밤눈에 덮인 겨울 산사의 오솔길에는 작은 돌부처들이 줄지어 앉아 있습니다. 소복하게 눈 쌓인 동그란 어깨와 무릎 사이로, 빨간 산딸기 열매가 덩굴손을 꽉 쥐고 슬쩍 올라앉아 있기도 합니다. 끝없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오래된 삼나무 냄새와 낡은 전각을 감싸고 있는 지붕, 숲을 머금은 채 묵직하게 머무는 이끼의 흔적, 그 사이 어딘가에서 세상은 길의 끝자락을 쥐고 고요히 멈춰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수많은 것들을 떠올립니다. 침묵으로 가라앉은 시간을 따라 총총히 흩어진 것들,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을 외롭고 고요한 그들 사이에 여전히 내가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소중한 기회를 만들어주신 경인일보와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시의 문을 열고 기꺼이 그 길로 이끌어 주신 최금진 선생님께 가장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시와 함께 모든 것의 경계를 넘어 꾸준히 걸어가겠습니다. 더불어 함께 하는 시와몽상 문우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변함없는 자리에서 기다려주며 지지하고 응원해 준 중재씨와 우리 고양이들, 가슴 깊이 사랑합니다.김현주
→ 11면서 계속([2023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고은경 '숨비들다' ①)바다는 다 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쪽에서 어떤 일들이 너울대는지, 휘이이 소리가 언제 터져 나오는지, 이명 같은 소리는 어느 물줄기서부터 들려오는지도. 요 바당으로 튀었다 저 바당으로 튀는 내 생각들을 한 방울로 수렴한다면 무엇이 남을지, 얼마나 짤지, 그것마저 알지도 몰랐다.비자림 앞에 도착했을 땐 구름이 한결 짙어져 있었다. 은수 선배가 입구 안내판 앞에서 서성이다 손을 번쩍 들었다.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그가 입은 체크무늬 셔츠에도 구김살이라곤 없었다."방학하니까 좋지? 얼굴이 폈네.""그런가? 선배 얼굴이 더 좋아 보여."여름의 숲은 깊고 어두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들이 우짖었다. 작지만 날카로운 소리들이 머리 위를 가로지르면 꼭 나무들이 비명 치는 것 같아 서늘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휘이. 미지근한 바람이 목덜미를 감았다. 선배가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들었다. 이렇게 하면 향기가 난다던데.껍질을 벗기려 했으나 그의 손은 빗나가기만 했다. 휴대폰에 달아놓은 펜던트로 내가 대신 긁어주었다. 한 꺼풀 벗긴 나뭇가지를 코 밑에 갖다 대자 귤 냄새가 올라왔다. 진짜네. 선배가 야단스럽게 킁킁댔다. 앞서 걷던 사람들이 흐린 날 숲길이 좋다고 한마디씩 했다.정수리에 차가운 뭔가가 떨어졌다. 빗방울인가. 머리를 젖혔더니 나무와 나무, 또 다른 나무가 닿아 만들어진 초록의 타래가 보였다. 물속에서 너풀대는 수초들도 저런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비자나무 잎들이 밀리고 쓸리며 파도 소리를 냈다."나 장터 갔다 왔어. 세화오일장터.""정말? 나도 세화 들렀다 왔는데."우리는 둘 다 눈을 크게 떴다."아침 일찍 일어났거든. 학회 때 했던 얘기가 생각나서 가봤는데 장 안 서는 날이더라. 간판 아래 해녀 조형물만 보고 왔어.""상상이 안 가지? 거기에 그 많은 해녀들이 모였다는 게.""한 번 발도장 찍은 걸로 얼마나 선명하게 복원할 수 있겠어. 그래도 의미심장하더라. 뜻이 뭉쳤던 곳엔 그 기운이 계속 남는 것 같아. 사람은 떠나지만 뜻은 머물러 있는 거지. 어떻게 행진하고 구호를 외쳤는지 고스란히 느끼진 못해도 그분들과 같은 자리에 서봤다는 사실 자체가 난 좋았어."선배의 얼굴에 뿌듯한 표정이 어렸다. 그 얼굴을 받친 반듯한 셔츠 칼라가 눈에 들어왔다. 빨아서 탁탁 터는 것만으로는 저런 각이 안 나올 텐데. 너무 단정한 나머지 못 본 척 넘어갈 수가 없었다."옷 다려서 입어?"기어이 선배를 장터 밖 현실로 불러내고 말았다. 그가 자신의 셔츠를 한번 내려다보곤 씩 웃었다. 펄에서 게를 잡아 기분 좋은 아이 같았다."여동생이 다려줘. 주말에 일주일 치를 다려놔.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런다."비 몇 방울이 더 떨어졌다. 선배가 갖고 있던 우산을 폈다. 그의 동생이 왜 옷을 다려주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힘들까 봐 그럴 수 있었다. 오빠를 끔찍이 생각해서 그러는지도 몰랐다. 선배의 흰 운동화 앞코에 흙탕물이 튀었다. 얼룩이 졌어도 비 내리는 숲길을 걷기엔 여전히 말쑥해 보였다.어느새 연리목 앞이었다. 사랑 나무, 부부 나무라고도 불리는 그 나무와 맞닥뜨리자 선배가 낮은 탄성을 질렀다. 두 나무가 한 나무가 되느라 맞닿은 부분이 갈라지고 비틀려 있었다. 그렇긴 해도 숲에 있는 나무들의 수령이 대부분 500년을 넘어 어떤 나무든 연리목처럼 보이는데 선배에겐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나무끼리 붙은 흔적을 찾듯 한참 들여다보던 그가 입을 뗐다."큰 줄기가 맞닿으면 연리목이고 나뭇가지가 붙으면 연리지라더라. 뿌리가 만난 경우는 연리근이고. 저렇게 두 나무가 연결되려면 최소한 10년은 걸린대. 그냥 되는 것도 아니고 서로를 강하게 압박하느라 무지 고통스럽다는 거야. 껍질은 깨지지, 맨살은 맞부딪혀 갈라지지. 그런 다음에야 둘이 섞여서 함께 살아갈 공간이 생긴다는데. 인간관계도 그렇잖아. 시간을 들이고 아픔도 주고받고 해야…."공부를 해온 것 같았다. 교사는 이분이 됐어야 해. 그렇게 생각하는데 선배가 나를 흘끔 봤다. 한 우산 아래여서 숨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슨 말인가 더 하려는 듯했다."그런 건 낭(나무)이니까 허주 사람이 어떵허젠(어떻게 해)?"선배가 멈칫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굵어진 빗발이 우산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너… 화났어?"그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화는 무슨. 나무는 나무고, 사람은 사람이니까. 그냥 그렇다고요."숲을 돌고 나오니 옷이 꽤 젖어 있었다. 주차장에서 우산이 뒤집혀 푹 젖었다. 택시로 왔다는 선배를 엄마 차에 태웠다. 어쩐지 기운 빠진 모습이었다. 내가 교직원 생활은 어떠냐고 묻자 할 만하다고 했다. 대기업 다니는 동기들도 부러워한다고 덧붙일 때야 비로소 홍조가 비꼈다. 그가 다금바리를 먹으러 가자고, 아니면 갈치라도 먹자고 거듭 권해왔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아 힘들다고 답했다. 그저 둘러대는 말이 아니었다. 이명처럼 들리는 휘이 소리 때문에 옆 사람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중문관광단지의 호텔 앞에 그를 내려주었다. 또 보자며 웃는 얼굴이 만날 때보다 그늘져 있었다.해안도로로 들어서자 비를 품는 바다가 펼쳐졌다. 엄마는 뭘 하고 있을까. 빗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잘 리는 없고, 해녀의 집에 가서 해산물을 손질하거나 음식 조리를 거들 것 같았다. 라디오 뉴스를 틀었다. 와이퍼가 왔다 갔다 하는 사이로 잿빛 바다가 일렁였다.이제 물질 그만두고 서울 가서 살자는 말에 엄마는 꿈쩍하지 않았었다. 아직도 느 어멍을 경(그렇게) 모르커냐. 물에 안 들어가면 어멍이 잘 살 것 같으냐. 엄마가 물질한 시간만큼 나도 애들을 가르칠 거라고,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엄마랑 쭉 살 거라고 하자 코웃음을 쳤다. 바당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육지 사람들이 못 보는 곱닥헌 것들을 보지만 전복 욕심에 죽을 수도 있고 상어에 물릴 수도 있어. 는(너는) 이제 시작이잖아. 몸 가볍게 허영 걸어야지.동부 해안을 따라 올라가는데 성산일출봉이 자태를 드러냈다. 마치 테왁을 붙잡고 떠 있는 해녀의 등허리 같았다. 물살에 몸을 맡기는 모든 것은 머리를 낮추기 마련이었다. 물때와 바람에 순응하고 힘을 빼야만 했다. 더 좋은 물건들이 있다 해서 타고난 숨길을 거슬러선 안 됐다. 휘이 소리가 긴 꼬챙이처럼 양쪽 귀를 뚫고 지나갔다. 바다 위에 엎드린 일출봉이 쉼 없이 몰아치는 파도를 받아내고 있었다.가라앉은 언니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제야 내 판단이 착오였음을 깨달았다두 나무가 연결되려면 최소한 10년은 걸린대… 무지 고통스럽다는 거야나를 괴롭혀온 것은 그 소리가 아니란 생각이 꾸역꾸역 차올랐다 언니는 엄마처럼 상군이 되고 싶어했다. 노력하면 될 거라고, 엄마와 같은 바당밭에서 일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욕심내다 뒈진다는 삼촌들의 엄포보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본다는 언니의 포부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오늘 어멍 바당으로 가. 언니가 그렇게 말할 때도 놀라지 않았다. 그녀다운 계획이었다. 언니의 숨이 길어지는 만큼 언니의 망사리와 이야기보따리는 한결 풍성해지리라.언니가 내 귀에 대고 비밀이라 못박았다. 엄마는 물론 어떤 삼촌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며 힘주었다. 어른들이 알면 물질을 아예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아버지 이야기와 달리 진짜 비밀이었다. 고무옷을 챙겨 입는 모습이 듬직해 보였다. 반드시 비밀을 지켜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내가 언니를 밀어줄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었다.가라앉은 언니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제야 내 판단이 착오였음을 깨달았다. 지키지 말아야 할 약속은 지키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무모한 잠수부에겐 입 무거운 동생보다 서슴없이 고자질하는 동생이 있었어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후회가 사무쳤다. 비밀이란 말이 소름 끼치게 싫어졌다. 그딴 건 깨라고, 누설하라고, 동네방네 떠들라고 있는 건데 왜 입을 다물었을까. 바다를 따라 깊숙이 내려가면 총천연색으로 어룽지던 빛깔들이 사라져 검고 칙칙한 색들만 남는다고 상군 삼촌들이 말했었다. 그러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나타나는데 그 절벽 아래엔 바다 괴물의 뱃속 같은 심연이 도사린다고 무서운 옛이야기 들려주듯 으름장을 놓았었다. 보지도 못한 그 세계를 확인시켜준 사람은 바로 언니였다.다시 이명이 일었다. 머리 꼭대기가 찡 울리더니 반으로 짜개지는 듯한 통증이 왔다. 세화의 파도가 높았다. 풍랑이 거센 잿빛 바다에 자비라곤 없어 보였다. 번개가 하늘을 가르고 물결을 추어올렸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바다에 뭔가 떠 있었다. 검고 둥근 형체가 사람 머리 같았다. 단지 머리인지 고무옷을 뒤집어 쓴 건지 분간이 안 됐다.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도로 밑으로 내려갔다. 젖은 돌길이 가팔랐다. 울퉁불퉁하다 못해 모지락스러웠다.검은 물체는 물살에 실려 잠겼다 뜨길 반복하고 있었다. 거기 누구 이수광? 소리를 질렀지만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해경과 어촌계장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주머니를 뒤지다 발이 미끄러졌다. 검은 돌들이 팔뚝과 무릎을 강타했다. 넘어진 쪽은 나인데 가격을 당한 듯 아팠다. 왼쪽 새끼발톱이 뒤집혀 피가 배어나왔다. 붉은색을 보자 정신이 났다. 재차 본 바다 위엔 바람과 파도뿐이었다. 이런 날씨에 누가 저길 들어간단 말인가.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지랄 맞은 두통도 가신 뒤였다. 차로 돌아가니 실종된 아이 엄마를 찾지 못했다는 뉴스가 반복되고 있었다. 와이퍼의 동작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다른 쪽에서 빠졌으나 조류를 타고 여기까지 흘러왔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헛것을 본 거라면. 휴대폰을 든 채 잠시 망설였다. 냉정하게 생각할 때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릇된 판단으로 애먼 사람들을 고생시킬 수 없었다. 빗물이 머리칼을 타고 줄지어 떨어졌다. 덥고 습한 와중에도 알알한 한기가 어깨를 스쳤다. 집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거리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야트막한 지붕을 줄로 묶고 그 지붕까지 돌담으로 에워싼 우리집을. 흔한 모양새여도 쉽게 지나쳐 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나고 자라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산 집이었다. 내겐 언니와 복작이다 언니를 먼저 보낸 나루터였다. 엄마에겐 옹이가 박힌 채 흠집을 늘려온 통나무배와 다를 바 없었다. 이게 몬딱(다) 잠수병 때문이야 하고 중얼거렸다. 물질도 하지 않는 내가 이명에 두통에 흐린 시야까지 달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며 돌담길 옆에 차를 세웠다.엄마 방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마당의 물웅덩이를 비췄다. 문을 열자 텔레비전 앞에서 죽을 떠먹는 엄마가 보였다. 아침에 남은 뭉게죽이었다. 오랜 기간 수압에 노출돼온 엄마는 귀가 많이 어두웠다. 내가 바로 옆에 앉아 어깨에 손을 얹을 때까지 아무런 기척도 듣지 못했다."나 와수당."엄마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앉았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막 헤어나온 듯했다. 숟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나를 노려보듯 쳐다봤다. 죽그릇 속에 조각난 문어 다리들이 떠다녔다. 방 안 가득 물비린내가 진동했다. 엄마가 입을 앙다물며 내 등짝을 힘껏 쳤다."지지빠이(계집애)야, 어딜 쏘다니다 지금 기어 들어왐시니. 꼬라지는 또 이게 무싱거고. 세상에, 피네."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데다 팔뚝과 다리에 긁힌 자국들이 선명했다. 한차례 넘어진 탓에 흙모래 알갱이가 몸 여기저기 들러붙어 있었다. 뒤집힌 발톱에서 흐른 피로 장판 위엔 붉은 무늬가 생겼다. 엄마가 내 팔을 잡고 흔들어댔다."느 무신 일 이서시냐?""일? 비 좀 맞고, 넘어지고 그랬지.""그 소나이랑 무신 일 치른 건 아니고?""치르긴 뭘 치러? 비자림 간다고 말했잖아.""숲엘 무사(왜) 간, 영헌(이런) 날. 사람도 얼마 어서실 텐디. 일부러 느 불러낸 거 아녀?""무슨 소리야. 거기만 한 바퀴 돌고 헤어졌다니까. 저녁까지 먹자는데 됐다 그랬다고.""근데 무사 영(이렇게) 늦엄신고? 뉴스에서 사람 실종됐다고 떠드는디 걱정을 안 햄시니. 여기도 마냥 안전한 데가 아니잖여. 정신 똑바로 차려야 허여.""그거 아직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잖아. 그리고 내 나이가 몇인데, 서른도 넘은 자식을 이런 식으로 걱정해?""안 하면. 꼴은 영 되영(돼서) 뭘 잘했다고. 오늘 본 그 소나인 못쓰컨게. 지지빠이를 이 꼴로 돌려보내는 놈은 더 볼 거 어신게.""노망났어? 별일 없었다니까. 차 타고 오다가….""그만 고라(그만 얘기해)! 애들 가르치는 게 몸 파는 지지빠이 같이…."엄마가 말을 멈췄다. 일그러진 얼굴이 떠난 아방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아방과 붙어 살 누군가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한마디 언질 없이 바다보다 깊은 곳으로 가버린 딸을 좇는 듯도 했다. 그렇지만 얼마나 후회하려고 저런 말을 하나. 잠자코 문어 다리를 쏘아봤다. 온통 젖은 딸에게 수건은커녕 막말이나 퍼붓는 엄마였다. 무엇을 돌려줘야 할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명이 울렸다. 모든 것이 지겹게 느껴졌다. 나를 괴롭혀온 것은 그 소리가 아니란 생각이 꾸역꾸역 차올랐다."나 감수다. 강(가서) 안 오쿠다. 엄마 혼자 삽서. 나보다 죽은 언니가 중요하지? 그래서 독하게 물질허는 거꽈? 잘 알아지쿠다(알겠어). 그렇게 언니 끌어안고 삽서. 난 못 말려. 이제 안 말리쿠다."붉은 자국을 밟으며 방을 나왔다. 엄마 얼굴은 보지 않았다. 작은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덜렁거리는 발톱을 잡아뗐다. 대충 소독한 뒤 연고를 발랐다. 빠진 자리에 한 번은 새 발톱이 날 것이다. 문을 닫고 제습기를 틀었다. 습도를 알려주는 표시부에 형광빛 숫자가 떴다. 엄마가 언니를 보낸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다시 물에 들어간 이유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요를 펴고 드러누웠다. 휴대폰이 웅웅거렸으나 내버려두었다. 엄마 방의 텔레비전 소리가 배에 실린 듯 건너왔다. 이대로 자도 될까 싶은데 혼곤히 잠이 왔다. 사람 머리처럼 검은 물체가 파도를 따라 넘실댔다. 끝도 없이 짠물을 먹으며, 그러면서도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나는 그것을 뒤따랐다.눈을 떴을 때 집 안엔 나 혼자였다. 아침을 지나 거의 점심 무렵이었다. 선배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괜한 소릴 한 것 같다는 메시지도 함께였다.연리목 앞에서 청산유수로 말하던 그가 떠올랐다. 숲 해설가 해도 되겠다고, 다음엔 오일장에 가보자고 답을 보냈다. 제습기에서 꽉 찬 물통을 뺀 뒤 방문을 열었다. 비 갠 하늘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돌담 너머의 바다가 말갛고 눈부셔서 어제 일이 아득할 지경이었다.샌들에 묻은 피는 빗물에 씻겨 있었다. 축축한 신발을 꿰어 신고 바닷가로 향했다. 오늘 바당은 어제 바당이 아니지. 지금 저 바당은 그때 그 바당과 다르지. 이것은 언니에게 건넨 말이었다. 내가 나한테 당부하는 말이기도 했다. 봐, 이젠 섬 한쪽에서 큰 군함이 왔다 갔다 해. 바다 건너 온 사람들이 뱃일이며 양식장 일에 뛰어들기도 하고. 어디까지 품을까, 바다는. 품는 것 같다가도 사정없이 뱉어내거나 삼키는 게 일인데.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어. 떼선 안 될 것 같아. 변화무쌍하게 요동치는 저곳을 지켜보고 또 지켜보는 게 한몫이야.바닷물에 발을 담근 아이와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발 장난만으로도 즐거운지 나올 기미가 안 보였다. 멀찍이 떨어져 있어 꼭 파도와 이야기하는 사람들 같았다. 잡히지 않는 사연들이 포말을 이루며 퍼져 나갔다. 모두 아는 일이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건 흔쾌히 거뒀다 미련 없이 밀어 보내는 파도였다. 그 대화를 알아들은 사람처럼 한동안 붙박인 채 서 있었다. 수평선 근처에서 물결이 설렌 듯했다. 지금은 고요하지만 언제 태풍이 몰려와도 이상할 것 없었다.집 앞에 다다르자 뭔가를 터는 소리가 들렸다. 담 안쪽으로 깔린 평상에 상이 놓여 있었다. 보리밥 한 그릇에 엄마가 키운 푸성귀와 된장, 미역국과 계란찜으로 단출히 차린 밥상이었다. 미역을 널듯 빨래를 널어 나가는 엄마도 보였다. 뭐라고 말 붙여야 하나. 젖은 옷이 걸릴 때마다 출렁이는 줄을 곁눈질하며 잠시 고민했다. 엄마의 걸걸한 말소리가 먼저 들려왔다."난 아까 먹었져. 혼져(빨리) 먹어라."어제 벗어놓은 옷이 빨랫줄에 걸려 있었다. 엄마의 속옷과 내 속옷, 엄마의 고쟁이와 내 추리닝이 두서없이 나부꼈다."어멍 태안 가기로 했져. 느 현오 삼촌 알아지커냐(알지)? 그 양반네 누구 초상이 나서 재기재기(급히) 내려와야 한단다. 대신 가게 됐져."엄마의 검정 티셔츠와 검정 고쟁이를 붙여놓으면 위아래가 이어진 고무옷과 구별이 안 될 터였다. 다른 때 같으면 내 방학 어떡하냐고 한소릴 했겠지만 지금은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며칠 머물당 가든지, 올라가고 싶으면 재기재기 올라가고."거침없이 다부진 뒷모습이었다. 촘촘히 걸려 있는 빨래들에 눈길을 주자니 어제 나를 닦아세우던 엄마가 얼마나 엉성했는지 믿기 어려웠다. 국 한 수저를 뜨는데 부엌 찬장 어딘가에 있을 차롱이 아른거렸다. 그걸 찾아 도시락을 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보리밥을 담아야지. 밭에서 상추, 고추도 따고. 된장과 젓갈은 새지 않게 꽁꽁 싸야지. 엄마는 뭘 이런 걸 쌌냐고 하면서도 한 끼 값을 아끼기 위해 챙겨 갈 것이다.먼바다의 어디쯤 내 시선이 가닿는 데서 뭔가 올록볼록 솟아오르려 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엄마가 물질하러 간 사이 할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수업 틈새에라도 배치할 섬의 자취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귀에 익은 숨비소리가 들리면 언니도 궁금한가 보네 하고 이야기해줄 작정이었다.실종된 여성이 바닷가에서 발견됐다는 뉴스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어느 바다인지 듣지 못한 것은 진행자가 그 부분을 너무 높거나 낮게 말한 까닭이었다. 엄마가 딸아이를 안고 바다로 향했으리란 추정이 이어질 때 우리 둘 다 손을 멈췄다. 오늘의 바다는 청초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얻거나 잃어놓고도 파르라니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끝>
소라들이 알을 낳는 동안에도 엄마는 쉬지 않았다. 6월에서 8월은 소라 산란기이자 해녀들의 금채기였다. 한쪽의 숨이 트이기 위해 다른 한쪽은 숨을 돌려야 했다. 숨 돌릴 시간이 주어지면 엄마는 밭일에 매달렸다. 다시 물질하러 다닐 때 먹기 좋을 소라젓과 마늘지도 담갔다. 때로는 서해 쪽으로 해삼 채취에 나섰다. 어떻게든 물질을 이어가야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기에 부득부득 자리를 얻고자 했지만 실력 좋은 상군 삼촌들에게 밀릴 때가 많았다.소싯적엔 상군 중의 상군이었다는 엄마가 수심 10미터의 중군 영역으로 밀려난 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눈썰미 좋고 손이 빨라 상군 못지 않은 수입을 올리곤 했으나 깊은 바다에 부려온 기억들을 떨쳐내진 못하는 듯했다.엄마는 방학을 맞아 내려온 나보다 바다를 더 무시로 건너다 보았다. 돌담 너머로 눈길을 던지며 바람이 자다는 둥 물때가 됐다는 둥 불쑥 말을 꺼내곤 했다. 엄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움직이는 바다가 보였다. 들뜨는 듯 부푸는 듯 잔물결이 굼실거렸다. 어서 올라가 네 할 일 하라고 채근하는 누구처럼 한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들통의 물이 끓어올라 문어를 집어넣었다. 넘칠 듯 부르르 거품이 일었다. 뚜껑이 들썩거리는 통에 꼭지를 잡고 있어야 했다. 엄마의 기운을 북돋울 뭉게죽은 방학 때마다 내가 한 번씩 준비하는 보양식이었다. 불그레해진 문어를 찔러보는데 문기척이 났다. 택배 기사가 물건을 두고 간 모양이었다. 이 큰 게 뭐냐고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털며 부엌 밖으로 나가자 엄마 허리까지 오는 상자가 보였다."이게 무싱거냐? 느가 산 거가?""내가 주문했어. 제습기라고, 습기 빨아들여서 건조하게 해주는 기계야. 서울에선 많이들 써. 여기도 너무 습하니까 한 대쯤 둬야 해.""느 모르커냐? 어멍은 물에 들어강 이실 적이 반이여. 쓸데어신 짓을 해신게. 축축한 거는 무신 축축한 거. 사방이 물이고 습긴데 이걸 어떵허코. 물렁(무르면) 안 되는 거?"용돈을 건네면 바닥에 패대기치는 엄마라서 필요해 보이는 물건을 고른 건데 역시나 순순히 받으려 하지 않았다. 무르긴 왜 무르냐고, 보송보송해져서 좋다고, 물통 차는 거 보면 깜짝 놀랄 거라고 되받아쳤다. 엄마는 엄마대로 이런 덩치 없이 잘 살아왔건만 좁은 집에 꼭 들여야 하냐며 성화였다. 학교 선생 봉급 가졍(가지고) 쓸데어신 걸. 부엌으로 돌아서는데 엄마의 눅진한 말이 뒤통수에 따라붙었다. 오늘 오후 …경 제주시에 여행 온 …살 …씨 모녀가 실종됐습니다. 텔레비전 뉴스 한 도막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달군 냄비에 문어를 넣자 촤아아 비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뜨거운 기름이 튀었다. 수도꼭지 찬물에 팔뚝을 들이밀었다. 휘이, 휘이이. 물소리 사이로 숨비소리가 섞여들었다. 물 밖으로 올라온 언니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이명처럼 귓가에 맴돈 지 오래였다. 고향 집에 머물 때면 더 자주 들렸다. 이젠 언니가 말 걸어오는 것 같아 아무 때고 들려도 거리낌 없을 정도였다.냄비 속이 복작복작했다. 다시 주걱을 잡고 문어를 뒤적거렸다. 언니도 먹고 싶은가 보네 하고 되뇌었다. 어렸을 때 내가 빨판을 흘기며 질색하면 이 맛있는 걸 못 먹는다고 핀잔주던 언니였다. 물속에서 흡착력 강한 뭉게 다리에 콧구멍이 막힐 뻔했으면서도 케이크 같다고, 아니 훨씬 맛나다고 칭송을 했다.찬은 엄마가 담근 마늘지였다. 죽 한 숟갈을 뜨자 바닷물을 뜬 듯 비린내가 끼쳤다. 아무래도 문어를 잘못 삶은 탓이었다. 엄마는 별말 없이 후루룩 소리를 내며 숟갈질을 계속했다. 언니의 숨비소리와 엄마의 죽 먹는 소리가 번갈아 여울졌다."먹고 나갔다 올게. 대학 선배가 일이 있어서 왔는데 비자림 가보고 싶다네. 구경 좀 시켜주려고.""소나이(남자)야?"엄마가 마늘을 써걱 씹었다."응, 남자 선배. 학교 다닐 때부터 친했어. 제주도는 세 번짼데 아직도 비자림을 못 가봤대.""고향이 어디랜햄시니?""서울인가, 수원인가.""도시 사람달믄게(도시 사람인가 보네). 경허믄(그럼) 됐져."엄마는 섬사람은 안 된다고 누누이 말하곤 했다. 딸이 지난한 섬 생활에서 벗어나길 바란 까닭도 있지만 외항선을 탄 남편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 엄마 못잖게 물을 밝혔던 아버지는 엄마가 잡은 해산물을 운반하거나 중국 어선이 못 들어오게 감시하는 일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한 번 나가면 두어 달 있어야 집에 들르더니 내가 태어난 뒤에는 아예 발길을 끊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언니의 이야기 속에나 존재하던 사람이었다.아버지한테서 풍기던 짠내, 아버지가 손에 쥐여 주던 일제 카라멜, 아버지가 들려주던 바람의 고마움과 매서움을 언니는 지나가듯 풀어놓았다. 엄마의 억센 욕보다 그런 이야기가 와닿던 시절이었다. 아방은 무능하고 쩨쩨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우리는 비밀 아닌 비밀을 바닷바람 사이로 날려 보냈다.혼자 아이들을 키운 엄마 곁을 지킨 건 무엇이었을까. 언니마저 잃고 나서야 오롯이 깨우쳐졌다. 아버지 없이 일궈온 엄마의 바당밭에 대해서. 엄마는 살기 위해 숨을 참았다. 죽자고 하는 일인지 살자고 하는 일인지 헷갈릴 때 더 힘껏 자맥질을 했다. 누구는 서방과 싸우고 물속에서 운다는데, 서방 머리 같은 전복에 빗창을 찔러 넣느라 여념이 없었다. 물질을 마친 뒤 천 근 같은 해산물 망사리를 끌고 돌길을 걸을 때에야 죽어 나자빠질 것 같았다. 망사리 들어주는 서방을 둔 동료들이 부러워서, 그 부러움이 기막히고 수치스러워서 눈물이 났다. 딸들만은 못 하게 하리라 다짐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물질을 배우겠다고 나선 언니를 막을 순 없었다. 내가 갯바위에 걸터앉아 엄마를 기다릴 때 언니는 고무옷도 없이 엄마 뒤를 따랐다. 공부보다 그 일이 좋다고 했다. 기특하게 여긴 해녀 삼촌들이 고무옷과 테왁을 선물하자 언니는 웃었고 엄마는 한숨을 내쉬었다.고개를 돌리면 움직이는 바다가 보였다… 들뜨는 듯 부푸는 듯 잔물결이 굼실휘이, 휘이이, 물소리 사이로 숨비소리가 섞여들었다무엇이 언니를 욕심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영영 모를 일 엄마와 언니가 물에 들어가면 나도 숨을 멈추었다. 할 수 있을 때까지 참아볼 작정이었다. 내 얼굴이 벌게지는 동안 바다는 별의별 빛깔의 자태로 갯가를 보아 넘겼다. 검다가도 푸른, 잿빛이다 은빛이 되는, 누렇다가도 금실처럼 너울거리는 바다가 이물스러웠다.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숨을 토하면 둘은 아직도 물속이었다. 붉은 깃발이 꽂힌 엄마의 테왁과 큼직한 꽃이 수놓인 언니의 테왁이 물결에 넘놀았다.엄마가 올라온 지 한참이 지나도록 언니가 감감하던 날이었다. 바다는 잔잔하고 바람은 온화하기만 했다. 숨 참기도 하지 않고 콧노래를 흥얼대는데 오늘 참 맨도롱하다(따스하다) 싶었다. 네 언니 못 봤냐고 엄마가 고함칠 때까지 그러고 앉아 있었다. 무엇이 언니를 욕심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영영 모를 일이었다. 엄마가 중군으로 밀려난 까닭만이 확연했다. 더 이상 할 수 있을까 싶은 순간에도 엄마는 기어이 물질에 나섰다. 단단해지고 또 단단해지는 엄마를 지켜보는 게 꺼림칙했다. 껌으로 귀를 막고 허리엔 납덩이를 찬 어멍을 바다가 끝 모를 곳으로 데려갈 것 같았다.죽 좀 더 자시란 말에 엄마는 손사래를 쳤다. 문어가 바다의 인삼 격인 전복을 먹는 놈이니 오죽 맛이 좋냐 하면서도 물질 전후 소식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많이 넘기지 않았다.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양쪽 어깨를 번갈아 두들겼다. 물에 못 들어가서 안 아픈 데가 없다고 했다. 안마해 주려 손을 올리자 이내 간지럽다고 뿌리쳤다."나신디는(나한테는) 바당이 최고여."입에 배어 굳은 말을 하며 엄마가 일어섰다."아멩(암만) 잘 아는 사람이라도 조심허여. 경헌(그런) 사람일수록 더 조심해야 허는 법이여."엄마에겐 부모도, 서방도 해주지 못한 걸 내주는 바다보다 간이나 보고 내빼기나 하는 사람들이 훨씬 께름칙한 존재였다.엄마의 낡은 아반떼를 몰고 나섰다. 세화에 들를 생각이었다. 제주 바다는 넓고 사람마다 꼽는 해수욕장도 제각각이지만 내겐 세화리 바다가 각별했다. 울적하면 그려보는 곳, 실은 울고 앉아 있기 싫을 때 더 찾게 되는 곳이었다. 비자림과 멀지 않아 들렀다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조금 늦더라도 눈도장을 찍고 싶었다. 실종 사건 이후 어수선해진 탓에 인사가 늦고 말았다. 라디오를 틀자 어김없이 그 뉴스가 흘러나왔다. 종적을 감췄던 여자아이가 해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귀를 곤두세우는데 은수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분위기 뒤숭숭하지? 인터넷에 아이 찾았다는 기사 떴더라.""엄마는 아직 못 찾았나 봐. 아이랑 같이 바닷가로 갔다던데…."어디냐고 물어보니 선배는 우리가 이미 아는 곳이라며 곧 비자림으로 건너갈 거라고 했다."저녁에 다금바리 먹으러 갈까? 진짜 제주산 쓰는 집으로."특산물이긴 하지만 워낙 고가여서 먹어본 적이 없었다. 취직 턱을 내겠다는데 말문이 막혔다. 모교 교직원 채용에 합격한 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구는 모습이 순진하면서도 속없어 보였다. 학술 심포지엄 때문에 왔다면서 관광할 시간이 나는지도 의문이었다. 갈치 맛있는 집을 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차창을 조금 열었다. 휘이이, 휘이. 숨비소리 같은 바람 소리가 창틈을 넘나들었다. 밖으로 보이는 해면의 한 지점이 칼치 등처럼 번뜩였다. 소라 잡지 맙서예, 바당에 저축허게마씸. 어촌계에서 내건 플래카드가 방호벽 위에 나부꼈다. 꼭 화난 사람들처럼 '육짓것'이라고 내뱉는 삼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선배와 나는 역사교육과에서도 같은 학회였다. 술 마시며 난상토론할 일이 잦았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상생 같은 거시적인 화두부터 국사교과서의 표지 같은 지엽적인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티 없는 얼굴에 부드러운 말씨를 갖춘 선배는 보통 남자들이 지닌 괄괄한 면모를 보이지 않았다. 여성항일운동에 대해 말할 때도 누구보다 섬세한 입장이었다. 최초이고, 최대였어. 1차 시위 때 삼백 명, 2차 시위 때 천여 명이 호미 들고 빗창 세워 막아서니까 일본인 제주도사가 줄행랑을 쳤대. 그러고 나서 잡혀간 사람들은 몸이 비틀리는 고문을 당해야 했지만. 시위 전에 모여 섰던 해녀들의 뒷모습 사진을 봤었어. 등에 아이가 업혀 있고 양식 보따리가 걸려 있는데, 그건 어떤 투사의 앞모습보다 결기가 넘쳤어. 섬에서 초중고를 나온 내가 제주 해녀들의 투쟁을 알게 된 건 은수 선배 덕분이었다.그가 일러준 자료들이 있었지만 바로 찾아보지 않았다. 과제 때문이든 학회 때문이든 향토사를 접할 때면 늘 마음이 불편했다. 해녀들의 항일운동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여성운동이어서만이 아니었다. 섬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 이곳 사람들은 허가 없이 육지로 드나들 수 없었고 육지 사람과 혼인할 수도 없었다. 지금은 엄마가 육지 사람, 도시 사람을 만나라고 성화를 부릴 정도가 됐으나 그렇게 되기까지의 세월은 현무암 몰골이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채 꺼멓게 굳어버린 난항의 궤적. 공부가 곧 그것을 헤집고 흉터마저 들추는 행위 같았다. 항파두리의 삼별초부터 이재수의 난을 거쳐 48년 4월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되짚고 있으면 직접 겪어오지 않았음에도 돌아가고 돌아가 검은 돌에 꼬라박히는 기분이 들었다.2005년 제주는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됐다. 나는 유의미하면서도 손쉬운 선포라고 느꼈다. '평화의 섬'은 너무 점잖은 말이었다. 바다를 두려워할 줄 모르고 이국적인 풍경인 양 바라보기나 하는 사람들의 시선과도 닮아 있었다. 평화는 무슨 무슨 연구를 하고 센터를 세우고 포럼을 연다고 해서 사람들의 내면에 차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다친 곳이 돌에 눌리다시피 하며 장아찌처럼 절여지고 곰삭혀진 기억들이 있는데 바다가 가로막는 것인지, 바람이 발목 잡는 것인지 짱돌들은 걷히지 않고 있었다. 내가 역사를 가르치는 것도 돌 치우는 데 얼마나 보탬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상식적인 사회를 위해, 균형 잡힌 안목을 길러내기 위해 적당히 알맞춤하게 안내하는 일로 여겨질 뿐이었다.잘해야 하는데. 언니 만날 때 나 이만큼 살았어 할 정도로는 해봐야 하는데. 엄마는 내가 완전히 떠나길 바랐다. 담임이 권유한 대로 서울 소재 대학에 가라고, 서울에서 직장 잡고 나긋나긋한 서울 사람과 결혼해 살라고 했다. 여긴 들락날락 안 해도 되컨게. 명절이고 자시고 비행기 탕(타고) 오멍(오느라) 돈지랄 할 거 없다. 나 역시 기왕 가는 거 촌사람 태를 벗어던지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올 필요 없다는 말은 좀 서운했다. 여기 안 오면 어딜 가. 요즘 저가 항공도 많은데 뭘. 엄마는 테왁 천에 난 구멍을 기우느라 심드렁할 따름이었다. 하루아침에 서울 사람 되커냐. 허기사 이 어멍 똘(딸)인디 무신건들 못 하겠냐만 여기서 놀멍 지낸 세월만큼 거기서 사는 데 집중해야 하지 안으커냐. 이제 느 수발들기도 힘들고. 남은 인생 물질이나 허멍 살고 싶어.세화 바다는 엄마의 태도만큼이나 무심하게 움직였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 비구름과 맞닿은 수평선조차 스산했다. 가까운 세화오일장터의 휑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1931년 그곳에 해녀들이 운집했던 걸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해 장이 서던 날 해녀들은 사력을 다했었다. 근수 속이지 말라고, 조합비 매기지 말라고, 일본인 도사가 조합장까지 해먹지 말라고, 일본인 상인은 빠지라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 대응한다면 죽고 말 거라고 외쳤었다. 어릴 적 언니와 내가 엄마를 쫓아 구경 다니던 그 장터에서였다.뭘 모르던 우리였다. 매일이 아니라 5일에 한 번이어서, 그나마도 엄마가 나서야 따라갈 수 있어서 설레기만 한 나들이였다. 장터에 이르자마자 몽생이(망아지)들처럼 뛰어다녔다. 청과전 앞에서 제일 빨간 사과 고르기 시합을 했다. 리어카에 쌓인 가요 테이프를 살피며 아는 가수 이름을 찾아내기도 했다. 의류전에 걸린 옷들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났지만 어쩌다 원피스 한 장이라도 건질 때면 냄새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은 건 돌아가기 전에 하는 외식이었다. 메뉴는 항상 멸치국수와 오징어튀김이었다. 이름 있는 날만 고기국수와 돔베고기를 시켰다. 식당의 어느 자리에 앉아도 옥빛 바다가 마주 보였다. 엄마는 먹을 때 말이 없었다. 언니와 나도 비슷했다. 오직 국수 빨아올리는 소리와 튀김 씹는 소리만이 우리의 탁자를 들두드렸다. 너무 곱닥헌(예쁜) 바당을 보면 뛰어들고 싶어. 언니가 먹는 와중에 했던 몇 마디 중 한 구절이었다. 그 말 사이사이로 국수 가락이 떨어져 내렸다. 오징어튀김이 한 개 남으면 뒤늦게 시끄러워졌다. 나는 작고 어린 내가 더 먹어야 한다고 고집부렸다. 언니는 언니대로 물질 배우느라 지친 자신이 임자라고 우겼다. 그제야 엄마가 혀를 차면서 반 갈라 먹어 치우라고 목청을 높였다. 느네 둘 다 안 먹젠 허믄 어멍이 먹으켜! → 12면에 계속([2023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고은경 '숨비들다' ②)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인천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바다를 끼고 있어 짐을 실은 선박들이 수시로 드나든다.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오가는 사람은 한 해 수천만명에 이른다. 인천 곳곳에는 외국에서 온 이주민들이 정착해 마을을 이뤘다. 바다를 메워 만든 산업단지에서는 수만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인천이 가진 다양한 모습 때문에 인천을 설명하는 이름도 많다. '해양도시' '관문도시' '국제도시' 등이다. 인천의 다양한 모습과 여러 이름을 관통하는 하나의 사건은 '개항'이다.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인 1883년에 이뤄진 개항은 현재 인천이란 도시의 틀을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개항'을 '외국과 통상을 할 수 있게 항구를 개방해 외국 선박의 출입을 허가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1883년 인천항 개항은 의미가 달랐다. 타국과의 교류를 최소화하는 '쇄국'에서 벗어나면서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서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작은 어촌마을이었던 제물포(인천항)는 무역선이 오가는 항만으로 바뀌었다. 수도인 서울과 가까워 군사적 요충지로서 의미가 컸던 인천은 세계 각국이 교류하는 '작은 지구촌'으로 변모했다. 인천항 개항의 배경은 1876년에 이뤄진 강화도 조약이다.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는 강화 해협을 침범했고 양국 간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 일본은 책임과 배상을 요구했고, 결국 인천·부산·원산을 개항하기로 하는 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을 근거로 1883년 1월1일 인천항이 개항했다. 부산(1876년)과 원산(1880년)은 인천보다 개항이 먼저 이뤄졌다. 그럼에도 인천항 개항이 가진 파급력은 이들 도시보다 컸다.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서양 문화·문물은 서울을 거쳐 전국으로 퍼졌다. 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교수는 "개항은 전통적인 생활 방식에서 현대의 방식으로 넘어가는 기점이었다"며 "부산항과 원산항이 먼저 개항했지만, 그 영향이 확산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인천은 한반도의 중심에 있었고 서울과 가깝다는 점에서 한반도 근대화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또 "인천항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길인 '경인로'를 통해 서양의 문물·문화가 빠르게 확산했다"며 "이 길은 근대 문물의 탯줄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 연표 참조외국인들이 인천 개항장으로 몰려들었다. 조계(租界)는 개항장에 외국인이 자유롭게 거주하며 치외 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이다. 인천에도 일본인, 청(중국)인, 영국인, 미국인, 독일인을 위한 각국 조계가 설치됐다. 현재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에는 일본 조계지와 청국 조계지의 경계가 됐던 계단이 있다.부산·원산보다 늦게 열렸지만 '파급력' 서양 문물 '경인로' 통해 확산치외법권 '각국 조계' 설치에 최초 등대·공원·호텔·정미소 등 생겨나"한때 개항장 주인은 외국인으로 인식" 전쟁 지원 역할 강요당하기도작은 어촌마을 '제물포' 무역항 탈바꿈 다양한 문화 융합 새롭게 변모 인천항 개항은 빠르게 인천의 모습을 바꿔놓았다. 인천에 국내 '최초'가 많은 것도 이 영향이다. 등대(팔미도 등대), 근대식 공원(자유공원), 호텔(대불호텔), 축구, 야구, 정미소, 기상대 등은 인천이 가지고 있는 최초의 기록들이다. 인천 개항장으로 일본인, 중국인, 서양인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은 조선 상권 장악에 나섰다. 일본은 은행을 설립해 적극적으로 상권 확대를 꾀했다.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 일본 제18은행 인천지점 건물은 아직도 남아 박물관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일본우선주식회사는 조선에서 항만 관련 사업을 진행하고자 1885년 인천지점을 설립해 인천의 항운업을 독점하다시피 했다.외국인들의 적극적인 공세에 조선인들도 나름의 자구책을 마련했다. 조선은 개항장을 관리하기 위한 특별 행정기관인 '인천항 감리서'를 설치했다. 일본 상인에 대응하기 위해 객주들은 '신상회사'를 만들었다. 근대 교육기관인 인천항공립소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가 세워지기도 했다.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은 "인천은 개항으로 인해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가 됐다"며 "조선에서 상권을 확장하고자 하는 외국 세력과 조선 상인들이 경쟁하는 각축장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20~30년 전만 해도 개항장의 주인을 외국인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며 "조선인들도 근대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 알려지고 있다"고 했다.우리나라는 개항 이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다. 개항은 근대 문물이 유입돼 근대화를 이루는 역할을 했으나, 세계 열강들의 수탈을 허용한 사건이기도 했다. 김창수 인하대학교 초빙교수는 "인천 개항을 근대화·서구화 측면에서 보는 경향이 강했다"며 "인천항 개항은 강압에 의해 이뤄졌고 개항 이후 식민지가 됐다는 점에서 '식민지'와 '근대화'라는 두 가지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다. 이를 함께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개항 이후 조선은 일본이 일으킨 청일전쟁(1894년), 러일전쟁(1904년) 등 세계 각국의 전쟁에 휘말렸다"며 "전쟁터가 되기도 하고, 군수 보급 등 전쟁 지원을 강요당했다"고 덧붙였다. 개항으로 인해 인천이 '국제도시'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양한 문화가 모이고 융합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인천항 개항은 도시 발전과 확장으로 이어졌다. 조그마한 어촌이었던 제물포는 1883년 개항을 계기로 무역항으로 탈바꿈했다. 인천항은 1918년 갑문을 갖춘 내항(제1갑거)을 완성했고, 1974년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갑문을 설치하는 등 시설을 확대해 나갔다. 2015년에는 바다를 메워 만든 송도국제도시에 인천 신항이 개항했다. 한중카페리는 한중 수교(1992년) 이전인 1990년부터 인천과 중국 도시들을 오가며 교류의 첨병 역할을 했다.2001년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하면서 인천의 국제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연수구 함박마을 등 인천 곳곳에 자리 잡은 외국인 집단 거주 지역은 인천이 가진 다양성과 국제성을 보여준다.김창수 교수는 "개항기 때 인천이 가졌던 다양성은 한국전쟁 직후 크게 위축됐으나, 1990년대부터 회복했다"며 "과거에는 바다를 통한 교류였다면, 지금은 더 입체적으로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특히 인천공항은 인천이 가진 국제성과 세계 도시적 성격을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인천항. 이 시기 인천항은 미곡 수탈의 수단으로 활용됐다. 인천항에서 미곡 운반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인천항운노조 제공1883년 인천항 개항이 이뤄지면서 치외 법권 지역인 조계지가 설정됐다. 계단을 경계로 오른쪽은 1883년 설정된 일본 조계, 왼쪽은 1884년 마련된 청국 조계다. 계단을 경계로 우측은 일본식 건물들이, 좌측은 중국식 건물들이 보인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1883년 인천항 개항은 인천이 '국제도시' 면모를 갖추는 계기가 됐다. 인천은 신항과 인천국제공항 등 교류를 위한 인프라가 지속해 확대됐고 국제도시적 성격도 강화됐다. 인천 신항과 인천국제공항이 국제도시를 구성하는 하드웨어라면, 인천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이주민들은 국제도시의 소프트웨어에 비유할 수 있다. 2015년 문을 연 인천 신항은 국내 2위 컨테이너 항만이다. 인천항은 1883년 개항 이후 확장을 거듭했고, 현재 인천 신항은 국내 대표 항만으로 성장했다. '국내 2위 컨 항만' 인천신항SNCT 야드 2만8천TEU 산적상·하차 '원격' 대부분 자동화크레인 시간당 컨 30개씩 처리 지난해 12월20일 찾은 인천 신항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 부산에서 온 컨테이너선 'M/V SAWASDEE BALTIC'호가 안벽에 붙어 있었고, 높이가 50m에 이르는 안벽 하역크레인 두 대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컨테이너를 싣고 내렸다.베트남 호찌민에서 부산항을 거쳐 인천 신항에 도착한 이 선박의 길이는 172m. 수입·수출 컨테이너 1천372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대분)를 운송할 수 있는 규모다. 배에 실려온 컨테이너 속 수입품들은 목재와 가죽 제품 등이 주를 이뤘다. 수출 컨테이너에는 가전제품 등이 실렸다. SNCT는 연간 약 100만TEU의 화물을 처리한다. 터미널 야드에는 2만8천TEU에 이르는 컨테이너가 층층이 줄지어 쌓여 있었다. 선박에 실릴 예정이거나, 터미널 밖으로 나가기 직전 대기하는 컨테이너들이다. 인천 신항에서 이처럼 많은 화물을 처리할 수 있는 데에는 자동화 시스템이 큰 역할을 한다.인천 신항에서는 40개의 야드 크레인이 운영되고 있다. 이 장비는 바닥에 설치된 레일을 따라 움직이며 반출될 컨테이너를 집어 올린 뒤, 야드 트랙터에 내려놓는다. 이 작업은 대부분 자동으로 이뤄지며, 야드 트랙터와 컨테이너를 연결하는 과정만 통제실에서 직원들이 원격으로 조종한다. 통제실 직원들이 책상 앞 모니터로 야드 트랙터의 앞, 뒤, 옆을 확인한 후 조이스틱으로 컨테이너 위치를 정교하게 조정해 트랙터에 싣는다.인천항 개항 당시 하역 작업은 부두 노동자들이 등짐을 지고 직접 옮기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현재는 자동화 시스템과 원격 조종을 통한 방식으로 변화한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완전자동화 시스템으로 하역 작업이 진화할 전망이다. SNCT 최진혁 운영팀장은 "하역 작업 중 상하차 작업 일부만 원격 조종으로 이뤄지고, 대부분 자동화 시스템으로 진행된다. 앞으로 자동화 작업이 늘어날 것"이라고 설명했다.항만에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됐지만 사람의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업도 있다. 안벽 하역크레인을 조종해 컨테이너를 배에 싣고 내리는 작업이다. 지상에서 하역크레인 조종실까지 높이는 약 49m. 하역크레인 조종실 바닥은 유리로 돼 있다. 하역크레인 기사는 조종실에서 지상에 있는 신호수와 수신호를 주고받으며 작업을 진행한다. 아찔한 높이의 조종실에서 인천항 바닥을 내려다보며 컨테이너를 배에 싣고 내리는 것이다. 하역크레인 하나가 시간당 처리하는 컨테이너는 30개가 넘는다. 전재필 하역크레인 선임기사는 "남항의 컨테이너 부두와 이곳 신항에서 20여 년 동안 크레인을 운전했다"며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컨테이너가 흔들리는 것까지 계산해야 한다"고 말했다.인천국제공항 교류 확대 가속다양한 국적 함박마을에 모여"일자리 많아 이젠 모국 같아"미얀마·아프간인 인천에 둥지 인천은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끊임없이 문을 열고 교류를 강화했다. 2001년 문을 연 인천국제공항은 인천이 관문이자 교류의 장으로서 역할을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인천을 구성하는 철도 등 교통 인프라, 산업, 인구 구성 등 대부분이 개항과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특히 많은 이주민을 포용하는 '다양성'은 개항도시이자 국제도시로서의 인천을 잘 드러내는 모습이다. 개항기에 일본인·중국인·서양인들이 인천으로 몰려든 것처럼 현재에도 끊임없이 외국에서 이민자들이 인천을 찾고 있다.인천 연수구 함박마을은 대표적인 이주민 정착지다. 이곳에는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 다양한 국적의 이주민들이 모여 생활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국적, 인종, 종교를 보여주듯 할랄음식점, 아시아 식료품점 등 이국적인 음식과 상품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즐비하다.함박마을에서 만난 이리나씨는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 남편을 만나 딸을 낳았고, 일자리를 찾기 위해 2001년에 한국에 왔다"며 "함박마을에선 다양한 국적·인종의 이웃들과 어울려 살 수 있고, 일자리도 많아 좋다"고 말했다. 그는 "태어난 곳보다 20여 년 동안 살아온 한국이 이젠 모국처럼 느껴진다"고 웃으며 말했다. 시민단체 '너머인천고려인문화원' 김우현 사업팀장은 "산업단지의 풍부한 일자리를 찾아 남동산업단지와 가까운 이곳에 고려인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게 됐다"며 "타국에서 온 이주민들이 모여 지역이 활성화된 셈"이라고 설명했다.인천에 거주하는 외국 국적 동포와 등록외국인은 지난해 6월 말 기준 10만1천547명에 달한다. 인천 지역 국가산업단지(남동·주안·부평) 주변엔 동남아시아 등에서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온 이들이 모여 산다. 미얀마 불교사원이 있는 인천 부평구에는 미얀마에서 온 이주민들이 대거 정착해 살고 있다. 부평은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는 국내 거주 미얀마인들의 거점 역할을 했다.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일부도 인천에 터를 잡았다.김창수 인하대학교 초빙교수는 "차이나타운과 함박마을, 미얀마 거리는 다른 도시에는 없는 아주 독특한 모습이며, 인천이 가진 개항도시 정체성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며 "이 다양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가 중요하다. 그들의 문화를 보전하면서도 다른 주민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지난해 12월 20일 오전 10시께 찾은 인천 연수구 송도동의 인천 신항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에서 안벽 하역 크레인으로 컨테이너를 배에 싣는 작업이 한창이다. /김용국기자yong@kyeongin.com하역크레인 운전석에서 전재필(47) 선임기사가 크레인을 조종하며 컨테이너를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김용국기자yong@kyeongin.com인천 연수구 함박마을 거리에는 외국어로 쓰인 간판이 많다. 이곳에서는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 다양한 국적의 이주민들이 모여 생활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22년은 다사다난했다. 중앙과 지방 권력이 대부분 바뀌었고 경제는 바람 잘 날 없이 요동쳤다. 사회 곳곳에서도 사건·사고가 이어졌다. 국내뿐 아니라 국외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내내 혼란스러웠다.격동의 시기, 변화에 대한 기대만큼 불안과 한숨도 컸던 2022년을 뒤로 하고 2023년이 밝았다. 내내 불던 폭풍이 잦아들고 평온과 안정 속 새로운 희망을 염원하는 목소리가 분야와 공간을 막론하고 높아지고 있다.경인일보는 새해 각 분야 전망과 함께 더 나은 경기도·인천시를 위한 과제 등을 두루 제시한다.→ 편집자 주■ 개혁 말하는 정치권, 개혁은 정치부터지난 2022년은 선거의 해였다. 5년에 한 번 치르는 대선과 4년마다 열리는 지방선거가 불과 세 달 여의 격차를 두고 진행됐다. 선거를 통해 대통령은 물론 수많은 지방권력이 탄생했다. 저마다 다짐한 약속은 많았지만, 아직 민심을 채우기에는 역부족이다. 정치권은 항상 개혁을 외친다. 검찰개혁, 언론개혁, 노동개혁 등 사회 다양한 분야에 개혁을 요구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개혁은 미루거나 게으름을 핀다.2023년은 정치개혁을 하기에 좋은 해다. 큰 선거가 없어 정치권이 각자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공론의 장을 열 수 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한 해 넘어 2024년 치러질 총선을 겨냥해 이미 개혁을 요구하는 활동을 시작한 상태다. 시민사회 연대체인 '정치개혁공동행동'의 경우 지난해 정치개혁 활동 재개를 선언했다. 이들은 20대 국회가 온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아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후퇴한 선거법 개정안을 처리한 데 더해 거대 양당이 비례 의석을 더 받아내고자 '위성정당'을 창당하면서 개혁 취지가 한층 더 퇴색됐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21대 총선에선 거대 양당 체제가 공고해지고 정당 득표율과 의석률간 불비례성이 더 악화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치권에 공직선거법 개정, 선거제도 비례성 개선, 정당설립요건 완화, 결선투표제 도입, 지방의회 선거제도 개혁 논의 등이 담긴 '10대 정치개혁 과제'를 제안했다.20대 국회, 거대 양당 '위성정당'… 개혁취지 퇴색돼경실련 '100%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개혁 과제로공천과정 투명화·수도에 중앙당 두는 정당법 개정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도 비슷한 시기, 2024년 제22대 총선까지 이뤄내야 할 5대 정치개혁 과제를 발표한 바 있다. 경실련이 선정한 개혁 과제는 100%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득표율에 비례한 국고보조금 배분, 공천기준 강화 및 심사과정 공개, 국회의원 불로소득 금지, 지역정당 설립요건 완화 등이다.세부적으로는 현행 준연동형 선거제도 대신 100%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거대 양당에 유리한 구조로 지급되고 있는 국고보조금을 득표율 및 정당 의석수에 비례하게 배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공천 배제 기준을 당규에 명시하는 등 공천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임대업 등 국회의원이 임기 중 불로소득을 취득하는 것을 원천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이밖에 수도에 중앙당을 두도록 하는 정당법을 개정해 지방정치를 활성화하고 지역이 정당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개혁이 필요하다고도 짚었다.이중 시민사회단체가 공통적으로 개혁을 요구한 과제중 하나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난 2019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선거법 개정안의 핵심으로, 국회 전체 의석을 300석(지역구 253석, 비례대표 47석)으로 고정하되 비례대표 의석수를 지역구 의석수와 정당 득표율에 연동하는 준연동형(50%)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수정당에 대한 사표(死票) 심리로 거대 양당의 몸집만을 키운다는 비판을 받는다. 반면 대안으로 제시된 연동형 비례대표제 총 의석수는 정당득표율로 정해지고, 지역구에서 몇 명이 당선됐느냐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수를 조정하는 방식이다. 거대정당에만 표가 몰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개혁 요구에 대한 수용 여부는 결국 국회가 한다. 개혁안을 국회 정개특위 등에서 얼마만큼 반영하고 논의할 지가 관건이다.■ 자치분권, 이제 말이 아닌 실천 할 때 획일적인 행정으로는 수요자인 국민을 만족시킬 수 없다. 지역에 따른 특성을 이해하는 맞춤형 정책과 행정이 있어야만 국민의 삶의 질이 더욱 높아질 수 있다. 지방자치, 자치분권이 필요한 이유다.지난해 전부개정지방자치법 시행으로 광역·기초의회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인사권 독립이라는 쾌거를 이뤄냈으나 지역민들이 체감하는 자치분권은 아직 갈 길이 멀다.행정안전부는 자치분권 로드맵을 통해 '연방제에 버금가는 강력한 지방분권'을 목표라고 명시했지만, 여전히 지방을 통제하려 할 뿐 권한을 이양하는 데는 소극적이다. 구체적인 최근의 예가 특례시 인사와 관련한 예다. 수원·고양·용인 등 특례시가 부구청장 수준의 직제를 신설하거나 추진 중이지만, 아무런 결재 권한이 없는 것. 행안부도 "고려해보겠다"는 답만 할 뿐 구체적 해결방안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작년 지방자치법 개정에도 '자치분권' 시민체감 부족행안부·기재부, 권한 이양 소극적·예산 통제권 막강획일적 기준 '수도권 역차별'… 지방정부 다양화 필요 지방정부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기획재정부가 경제정책과 재무 기능을 동시에 행사하는 권력을 쥔 것도 문제다.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 등 각 분야 사업 예산을 통제하며 각 지자체에 교부금을 소위 '내려주는' 체계여서 지방정부 입장에서 목 빠지게 기다리기만 할 뿐이다. 정부의 획일화된 통제에 따른 부작용은 지역에선 현실이다. 수도권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된 경기 가평·연천군과 인천 강화·옹진군은 특별 지원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단지 '수도권'이라는 이유만이다. 이들 지역도 인구가 줄고 재정이 어려워 특별지원이 필요한데 중앙정부의 획일적 기준으로 역차별을 받고 있다.미국처럼 주 정부 중심으로 다양화된 지방정부 형태 변화도 필요하다. 지난해 말 경기연구원이 발간한 '다양한 지방정부 형태, 자치분권 도약의 첫걸음' 보고서를 보면 현재 우리나라 지방정부는 사회·경제적 여건, 인구 규모, 재정 상황 등에 관계 없이 기관대립형이라는 하나의 정부형태(구조)로 운영되고 있다. 이 같은 천편일률적인 정부형태는 지방정부를 통제 및 관리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행정편의주의에 따른 것이라고 연구원은 설명했다. 이 때문에 지방자치가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고 효과적인 정부 운영을 하기 위해서는 획일적인 정부 구조를 깨고 다양한 지방정부 형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지방정부는 지역민과 가장 가까이 있고, 지역민의 일상생활을 공유한다. 문화·주택·상하수도·복지·교육·쓰레기 문제 등 지역민의 실생활이 곧 지방자치이자, 자치분권이다. /김태성기자 mrkim@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클립아트코리아
2022년은 다사다난했다. 중앙과 지방 권력이 대부분 바뀌었고 경제는 바람 잘 날 없이 요동쳤다. 사회 곳곳에서도 사건·사고가 이어졌다. 국내뿐 아니라 국외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내내 혼란스러웠다.격동의 시기, 변화에 대한 기대만큼 불안과 한숨도 컸던 2022년을 뒤로 하고 2023년이 밝았다. 내내 불던 폭풍이 잦아들고 평온과 안정 속 새로운 희망을 염원하는 목소리가 분야와 공간을 막론하고 높아지고 있다.경인일보는 새해 각 분야 전망과 함께 더 나은 경기도·인천시를 위한 과제 등을 두루 제시한다.→ 편집자 주■ 상반기 흐림, 하반기 맑음?2022년 경제는 그야말로 예측불허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코로나19 엔데믹 등에 따른 국제 정세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 각종 원자재 가격 등이 상승하면서 전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물가가 치솟았고, 이는 금리 인상으로 이어졌다. 원/달러 환율마저 급등해 이른바 3高(고물가·고금리·고환율) 시대가 도래했다.지난해 가파르게 이뤄졌던 금리 인상은 새해에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물가 상승세가 상반기까진 둔화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지난달 20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물가 상승률이 '상고하저'의 흐름을 나타내면서, 물가 목표 2%를 웃도는 높은 수준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당분간 물가에 중점을 둔 통화 정책 운영을 이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경제 상황에 대해서도 상반기엔 많이 어려울 것이라는 게 정부와 한국은행 전망이다. 기획재정부는 지난달 21일 '2023년 경제정책방향'에서 새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1.6%로 예상했다. IMF 외환위기가 있었던 1998년 당시 성장률이 1%로 제시됐었는데, 그 정도로 상황을 나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 역시 새해 경제 성장률을 1.7%로 전망했다. 이창용 총재는 지난달 20일 "상반기엔 경기가 많이 어려울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경기 침체로 가느냐, 아니냐는 경계선에 있다"고 했다. 러시아 전쟁·엔데믹 국면에 국제적 물가급등·금리상승올해도 금리인상 계속, 물가도 상반기내내 둔화 힘들듯한은, GDP 성장률 1.7% 전망… 경기본부 "올 상저하고"4인 가구 '월 4천원' 전기요금 올라… 지하철도 '4월 인상' 지역경제 전망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은행 경기본부 역시 지역경제가 상반기엔 어렵고 하반기엔 개선되는 '상저하고' 흐름으로 관측했다. 특히 경기도는 서비스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전국 경제와 달리, 전체 지역경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편인데 이 중 주요 품목인 반도체 경기 전망이 좋지 않은 게 악재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다만 희망은 있다. 반도체 경기 회복에 따라 지역경제는 물론, 국가 경제 상황 역시 올 하반기엔 개선될 것이라는 게 한국은행 전망이다. 물가 오름세가 둔화되고 하반기 들어선 점차 내려갈 것으로 보이는 만큼, 금리 역시 그에 따라 움직일 가능성이 제기된다.관건 중 하나는 공공요금 인상이다. 지난해 전기·가스 요금 모두 상승 요인이 컸고, 이 때문에 요금 인상이 단행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역부족이었다는 게 산업통상자원부·한국전력공사 판단이다. 이에 새해부터 전기 요금은 kwh당 13.1원 오른다. 4인 가구 기준 월 4천원가량이 증가하는 수준이다. 이번 전기 요금 인상은 1981년 2차 오일쇼크 이후 역대 최대 폭 인상이다. 가스 요금은 1분기엔 동결이지만 2분기엔 인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인천시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서울 지하철 요금도 4월 인상을 예정하고 있다.■ 금리 상황 따라 좌우될 지역 부동산 시장지난해 금리 인상의 여파가 가장 크게 미쳤던 분야 중 하나가 부동산이다. 2021년 두자릿수대로 상승한 경기·인천 집값은 금리 인상에 따른 수요 위축에 1년 만에 수직하강했다. 이자 부담이 커지자 이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집주인들이 하나둘 주택을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지만, 막대한 이자 부담 속 집을 선뜻 구매하려는 이를 찾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웠다. 정부가 수도권 규제지역 대부분을 해제하는 등 규제 완화를 통한 거래 활성화를 노렸지만 역부족이었다.금리 변동이 1년 만에 부동산 시장을 180도 달라지게 한 만큼, 올해 역시 금리 움직임이 수도권 부동산 시장을 흔드는 핵심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고금리 기조가 유지될 가능성이 큰 상반기엔 매매·전세 시장 모두 지난해와 같은 상황이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인 이유다. 공정주택포럼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서진형 경인여대 교수는 "세계 경제 위기, 고금리, 국내 경제의 불확실성, 집값 고점에 대한 부담감, 주택 공급 증가 요인들로 인해 당분간 매수 심리가 위축되면서 거래 절벽 사태가 이어질 것이다. 부동산 시장은 우하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내다봤다.이런 상황 속 '옥석 가리기'가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경기도 분양 시장에서의 양극화가 심해질 것이라는 얘기다. 서 교수는 "입지 여건이 양호한 지역이나 저렴한 분양 아파트는 열기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소규모 아파트나 입지 여건이 좋지 않은 곳은 미분양이 발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다만 물가 오름세가 둔화되면 하반기에 금리가 내려갈 가능성이 있는데, 이 경우 지난해 뚝 끊기다시피 했던 부동산 거래도 다소 살아날 것으로 전망된다. 주택 공급이 계속 예정된 점도 한몫을 한다. 올해 하반기엔 3천432가구의 수원센트럴아이파크자이, 4천774가구의 성남 산성역 자이푸르지오 등 대단지 아파트 입주가 계획돼있다.김효선 NH농협은행 부동산 수석위원은 "수도권 대부분 지역 집값이 5% 후반대로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금리 인상이나 주택 고점 인식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새해에도 상반기엔 이런 기조가 지속될 것으로 보이지만 금리 인상 속도가 조절될 것으로 전망되고 금리 인상 상단에 대한 리스크가 해제될 것으로 예상돼 지난해보단 거래가 될 수 있다고 예상된다"고 말했다수도권 규제지역 해제… 부동산 시장 활성화 역부족고금리 기조 상반기 "매수 심리 위축, 거래절벽 계속"물가 오름 둔화·금리인상 속도 조절땐 '회복' 가능성하남·광명·과천 '분양가 상한제' 대상지역 제외 기대 정부 차원의 각종 부동산 규제 완화가 하반기 시장 상황 개선과 맞물려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올해 경제 상황을 좋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 정부는 규제 완화와 감세로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방침 속 부동산 규제 완화책을 대거 발표했다. 지난달 21일 발표한 '2023년 경제정책방향'엔 다주택자 취득세 완화, 주택담보대출비율(LTV) 상한 30%로 하향 등이 담겼다. 아직 조정대상지역으로 묶여있는 과천, 성남 분당·수정구, 하남, 광명을 추가로 규제지역에서 해제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분양가 상한제 대상 지역인 하남, 광명, 과천 3곳이 대상에서 빠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 기준금리 상한에 대한 불확실성이 큰 상황으로, 규제 완화 조치가 이뤄지더라도 바로 시장에 반영되긴 어려운 상황"이라면서도 "규제 완화를 통해 시장 거래 환경을 바꾸면 향후 경기 상황이 바뀔 때 주택 공급, 정비 사업 등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가능해진다"고 밝혔다.전문가들은 실수요자에 여력에 맞는 주택 구매를 조언했다. 서 교수는 "집을 '이용 중심의 거주 공간'으로 인식하는 게 필요하다. 자금 여력이 부족한 수요자라면 자금을 준비할 시간이 있는 신규 아파트 분양 시장을, 여유가 있는 수요자라면 경·공매를 활용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만 하다"고 말했다. 이 연구위원은 "가격 조정이 눈에 보이지만 여력에 맞춰 타이밍을 봐야 한다"고 제언했다. /강기정·서승택·윤혜경기자 kanggj@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클립아트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