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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22]일제조병창

<인천이야기_22:다다구미와 일제 조병창>

여관과 낡은 한옥 등으로 밀집된 부평구 부평 1동 341 일대는 일제의 침략과 맞닿아 있는 곳이다. 일제가 「세계침략의 야욕」을 뻗치던 와중에 한국인들을 전쟁을 치르기 위한 각종 공사에 강제동원하면서 형성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40대 이후 부평 토박이들은 아직도 동아아파트 입구에서 북인천우체국 큰 길 까지를 속칭 『다다구미』로 부른다. 「다다구미」는 일제가 대동아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만든 조병창에서 출발한다. 일제는 1940년대 들어 중국침략을 위해 부평일대에 조병창을 건설한 뒤 각종 무기는 물론 잠수함 까지 만들어 최전방에 공급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조병창은 지금의 동아·대림·욱일 아파트를 비롯 산곡 3_4동의 미군부대, 현대·우성·동남·삼일 아파트, 화랑농장 일대에 폭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일제는 1940년 4월 1일 부천군 부내면을 제2차 부역확장으로 인천부에 편입시키고 부평조병창 확장공사에 들어갔다. 이 공사의 하청업자는 모두 일본인. 관또구미(關東組), 다다구미(多田組), 다마보구미(玉操組), 시미스구미(淸水組), 하사마구미(間組)등 5개 업체가 맡아 일을 했다. 조선총독부는 국민총동원령을 공포, 전국에서 젊은 일꾼들을 모아 「근로보국대」란 이름으로 공사에 투입했다. 근로보국대는 일제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 갖가지 국내 공사에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한 일종의 징용이었다. 일제는 근로보국대를 군대식으로 조직화해 각 군 단위로 이끌었다.

다다구미는 그 때 현장 사무실을 현 파레스호텔 뒷편에 마련하고 공사를 벌였다. 이 곳 주민들은 당시 지금의 부평역 앞 대한통운에서 북인천 우체국을 거쳐 상업은행 부평지점 까지를 「앞산」이라 불렀다. 높이 1백여m의 야산이었는 데, 다다구미는 이 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어 조병창을 확장하는 공사를 맡았다고 한다.

주민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그 무렵 다다구미의 상황은 이렇다. 다다구미촌엔 전국 각지에서 몰려 든 토목·건축 기술자들이 일했고, 8가구가 한꺼번에 기숙할 수 있는 건물이 60여채나 있었다. 공사규모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1가구를 평균 4명으로 기준하면 다다구미촌에 1천9백여명의 기술자와 그 가족이 살고 있었던 셈. 다다구미촌 건물은 지붕을 『루핑』이라 불리던 시커먼 기름종이로 덮어 씌울 정도로 열악했다. 아울러 이 곳에서 일하던 한국인들은 겨우 입에 풀칠할 만큼의 양식을 받으며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등 매우 비참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다다구미 등 조병창 하청회사들도 속속 철수했다. 하지만 조병창에서 일하다 마땅히 갈 곳이 없던 인부들은 그대로 판자촌에 눌러 앉아 살았다. 해방 이후 이곳은 날품팔이로 연명하는 노동자들이 모여 생활하면서 「좌익활동」의 본거지로 지목되기도 했다. 선대가 부평향교 전교를 지냈고 부평에서 줄곧 살았다는 權태옥씨는 『다다구미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일부는 오늘날 부평도심을 형성하게 됐다』며 『지금은 당시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60년대 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다다구미를 마치 부평의 중심지역처럼 여겼다』고 말했다.

다다구미촌은 「6·25」가 터진 후 인천상륙작전 때 집중적인 폭격으로 거의 다 파괴됐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 흩어졌던 주민들은 하나 둘씩 다시 이 곳으로 모여 들었다. 그리고 난리통에 갈 곳이 없게 된 서민들은 전처럼 판자집을 짓고 「달동네」를 이뤄갔다. 주민들은 그 때 다닥다닥 판자집을 잇대어 지으며 살고 있는 모습을 빗대어 이 일대를 또 다른 의미의 「다다구미」로 부르기도 했다.

한국전쟁과 함께 이 곳에 미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주민들은 「호황」을 맞게 된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각종 원조물자들이 넘쳐나 많은 주민들이 재산을 축적하는 계기를 맞은 것. 소문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 든 것도 그 즈음이다. 부평일대엔 당시 속칭 「양키물건」들이 아주 흔했고, 많은 이들은 이를 통해 장사를 하며 생활을 꾸려 갔다.

다다구미는 이처럼 오랫동안 서민들의 보금자리 구실을 톡톡히 했으나 「홍등가」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먹고 살길이 막막하던 수백명의 여성들이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간 것이다. 다다구미 홍등가에 있던 여성들은 주로 한국인 노동자들을 상대했다. 그래서 미군들을 상대하던 「관또구미」 지역 여성들과 분류돼 「싸구려」란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홍등가가 점점 더 영역을 넓혀가면서 한 때는 굴포천을 따라 대규모 집단촌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朴正熙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정화사업」이란 명목아래 이들 여성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60년대 말 쯤 「홍등가」는 거의 사라지게 됐다. 그 무렵 일부 뜻있는 주민들은 다다구미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