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전시수도(戰時首都)' 강화 성곽방어시설 첫 발견

고려 강화중성에서 방어시설인 목책 치(雉)와 외황(外隍)
(재)한백문화재연구원 소속 연구원들이 성곽 방어시설 유적을 발굴하는 모습. /문화재청 제공

가운데 성곽의 '치' '외황' 유적 발굴
대몽항쟁때 스스로 허물어 무력화
'고려사절요' 기록 고고학적 확인돼

고려시대 대몽항쟁 전시(戰時)수도였던 강화도에서 이 시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 방어시설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 등 3중으로 성곽을 세웠는데 성(城) 터가 아닌 성벽 방어시설이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강화도 옥림리 주택 신축부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 강화도 중성 방어시설인 목책 치(雉·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방어시설)와 외황(外隍·성벽 밖에 둘러판 물 없는 도랑) 유적을 발견했다고 6일 밝혔다. → 일지 참조




고려 정부는 몽골 침입 1년 뒤인 1232년 강화로 천도했으며 1270년까지 머물렀다.

왕실은 방어를 위해 궁궐 바깥에 내성, 중성, 외성을 쌓았다. 강화도 향토유적 제2호인 중성은 흙을 다져 올린 8.1㎞ 길이의 토성으로, 조사 지역은 강화 중성에서 북쪽으로 25m 거리에 있으며 서해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배를 조망하기에 좋은 능선(강화읍 옥림리 옥창돈대 부근)에 위치해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이 성곽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외황과 치를 둘러싸고 있던 목책 구덩이, 초소 흔적 등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목책 구덩이는 모두 9개가 발견됐고 능선을 따라 한 줄을 이루고 있다.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발굴을 진행한 (재)한백문화재연구원은 이 구덩이는 성벽 방어시설인 치를 둘러싸고 있던 목책용 구덩이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외황은 풍화암반층을 L자형으로 판 뒤 바깥쪽을 돌과 흙을 다져 올린 유적과 U자형으로 파내고 흙을 바깥에 쌓아 올린 유적 두 개가 차례로 드러났다.

외황은 너비 260∼350㎝·높이 150∼220㎝이며, 바깥쪽 외황은 너비 390∼410㎝·높이 90∼100㎝로 파악됐다.

특히 목책 구덩이에서는 나무 기둥을 뽑아내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기둥 자리를 파내고 돌과 흙으로 다시 메운 흔적이 확인됐다.

외황 또한 인위적으로 돌과 흙으로 메워진 것으로 조사됐다. 고려가 성곽 방어시설을 스스로 허물어 무력화시켰다는 '고려사절요'의 기록이 이번 발굴 과정에서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재)한백문화재연구원은 '고려사절요' '고종 46년 6월' 기사에는 몽골이 고려와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강화 협정을 맺으면서 강화도성을 허물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는데 이번 발굴 조사에서 역사적 기록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강화도에서 성곽 방어 시설이 처음 발견된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진다"며 "앞으로 고려 도성의 보존·정비를 위한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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