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스토리

[이슈&스토리]슬로라이프와 만난 '즐기는 걷기 문화'

두 발의 행복… '늴리리 '만보(萬步)'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하루 1만 보'에서 출발한 건강을 위한 걷기
최근 운동 수단 넘어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
동료와 산책·좁은 골목길 탐방등 걷기예찬
'걷는 사람, 하정우' 베스트셀러 15위 관심
道, 2020년 산티아고 길 같은 순례길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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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지킬 가장 간편한 수단쯤으로 치부되던 '걷기'가 슬로라이프(slow life) 문화와 결합돼 새로운 '걷기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걷기'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운동이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조사에 따르면 운동을 하는 사람 중 3명 중 1명(35.6%)은 '걷기'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등산(16.7%)보다 2배나 많은 수치다.

이 조사에서 보듯 '걷기'는 생활체육의 한 분야로 주목받아왔다. 2천 년 대 들어 체지방을 줄여준다는 '파워워킹', 아름다운 몸매 굴곡을 만든다는 '마사이워킹', 두 개의 폴 스틱을 이용해 스키를 타듯 걷는 '노르딕워킹'이 차례로 열풍을 탔다.

건강을 위한 '걷기' 열풍의 정점은 '하루 1만 보 걷기'였다. 하루 1만 보를 걸으면 건강 전반이 향상된다는 '1만 보 건강론'은 1960년대 일본에서 출발했다.

지난해 영국 BBC는 '1만보 건강론'이 마케팅의 산물이라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1962년 도쿄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이벤트에 걸음 수를 측정하는 만보계 개발이 합쳐져 시너지를 낸 것이라는 분석이다.

BBC는 "만보 걷기가 성공을 거둔 것은 마케팅의 승리다. 건강 지식과 운동법이 훨씬 진보한 지금도 이 방법이 최선인지는 의문"이라고 평가했다.

건강만을 목적으로 한 걷기는 더 이상 매력적인 운동 수단이 아니다. 최근에는 스스로를 아끼는 삶의 방식으로서의 걷기, 동료와 함께하는 걷기, 좁은 골목길을 탐방하는 산책으로서의 걷기가 떠오르고 있다.

새로운 걷기 열풍을 선도하는 것은 방송·서점가다. 유명 배우인 하정우씨가 지난해 11월 출간한 '걷는 사람, 하정우'는 그의 유명세뿐 아니라 책의 내용으로도 서점가의 주목을 받고 있다.

3일 기준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5위에 안착한 이 책의 표지에는 하정우씨의 걷기에 대해 "그에게 걷기란, 두 발로 하는 간절한 기도. 나만의 호흡과 보폭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 아무리 힘들어도 끝내 나를 일으켜 계속해보는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 중 한 명인 그는 '걷기'를 통해 '구도자'(求道者)의 아우라를 얻었다.


그는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걷는 사람, 하정우, p32)이라고 걷기를 정의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길 끝에서 느낀 거대한 허무가 아니라 길 위의 나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그때 내가 왜 하루하루 더 즐겁게 걷지 못했을까. 다시 오지 않을 그 소중한 시간에 나는 왜 사람들과 더 웃고 떠들고 농담하며 신나게 즐기지 못했을까. 어차피 끝에 가서는 결국 아무것도 없을텐데"(같은 책, p25)라며 길 위의 깨달음을 전하기도 한다.

배우라는 그의 직업은 '걷기'에 휘광을 부여하는 요소다.

그는 책에서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다고, 이 길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스스로 세운 목표를 부정하며 '포기할 만하니까 포기하는 것'이라고 합리화 하고 싶었던 거다. 이것은 꼭 걷기에 관한 얘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불확실한 미래를 두고 꿈을 등대 삼아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의 배경이 '걷기'와 결합해 새로운 의미를 자아낸다.

지난달 방송을 시작한 예능 프로그램 '두발라이프'도 하정우씨의 책과 같은 맥락을 품고 있다.

주요 출연자인 배우 황보라씨는 '왕뚜껑 소녀'로 큰 인기를 얻은 뒤 10년 이상 오랜 무명기를 겪었다. 하루 2만보 이상을 매일 걷는 그의 걷기 모임 주요 멤버는 무명배우들이다.

황보라씨는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 매일 걷는 것을 통해 스케줄 없는 일상을 극복한다고 설명한다. 무명배우인 그들에게 걷기는 불분명한 삶을 견디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한 셈이다.

하정우씨와 황보라씨는 모두 같은 걷기 모임 '걷기 학교'의 멤버다. 이들은 혼자 걷기보다 함께 걸어야 하며, 쉬는 시간을 반드시 지켜 체계적으로 걸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첫째, 오래 걷다보면 물집은 생기기 마련이다. 둘째, 50분을 걷고 꼭 10분을 쉬어야 한다. 쉬어야 오래 걷는다. 셋째, 사람마다 보폭에 따라 걸음 수가 다르니 동료의 걸음 수와 비교하지는 말라. 걷기 학교의 조언이다.

이 같은 걷기 문화의 변화는 '빠르게 빠르게'만을 강조해 온 현대 문명의 반작용으로 탄생한 '슬로라이프' 문화와 맥이 닿아 있다. 차량으로 이동하지 않고 걸어서 이동할 때, 우리는 골목골목을 누빌 기회를 얻는다.

낙후된 수원 행궁 주변이 '행궁길'로 탈바꿈하고 평택 소사벌 택지개발 지구에 카페를 중심으로 '소사벌 거리'가 조성되는 것도 '걷기'의 부활과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은 이제 걷기에서 운동 효과와 여유를 넘어 자신만의 철학을 얻길 원한다. 매년 600만명의 관광객이 자기 몸집 만한 배낭을 메고 800㎞에 달하는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찾는 이유가 그것이다. 경기도에도 오는 2020년 산티아고 길과 같은 순례길이 조성된다.

강원도 고성군의 '수묵화를 그리는 송정마을'을 출발해 강원도 인제의 '자연을 품은 서화리', 강원도 화천 '산소길 쉼터', 철원 '푸른숲 쉼터'를 거쳐 경기도로 이어지는 '통일을 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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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포로 남북이 서로를 겨눴던 비무장지대에 조성되는 이 길은 파주·고양·김포의 '바람길 쉼터', '율곡 거점센터', '나룻길 쉼터'를 지나 강화도 '강화도령 쉼터'에서 끝이 난다.

오랜 기간 적막에 싸여있던 비무장지대 순례길에 스스로를 아끼고, 삶의 의미를 찾는 구도자들이 가득할 그 날을 상상해 본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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