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광장

[수요광장]오월과 한국문학

동·서양 서정시 역사에서 오월은
자연미 정점·내면적 충일의 상징
'1980 광주' 폭력 문단 저항의 시작
경제 호황에 '대중문화 개화' 공존
올 40周… 민주주의 혁혁한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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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19세기 독일의 유명한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놀랍도록 아름다운 오월에'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오월에/모든 꽃봉오리가 피어날 때/나의 마음속에서도/사랑의 꽃이 피어났어라//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월에/모든 새들이 노래할 때/나의 불타는 마음을/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했어라'라는 내용의 서정시로서, 오월의 청신한 분위기와 사랑의 절절함을 잘 결합한 가편이다.

20세기 한국 서정시의 명편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하염없이 지는 모란꽃을 보면서 "찬란한 슬픔의 봄"을 다시 기다리는 심미적 자세를 노래함으로써, 오월의 순수무구한 이미지와 시인의 내면적 슬픔을 잘 결속한 결실이다. 이처럼 동서양의 서정시 역사에서 오월은 '봄의 여왕'으로서 자연미(美)의 정점과 내면적 충일함을 동시에 상징하는 맞춤한 계절적 소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1980년 '오월 광주'의 충격을 접하고부터 한국문학에서 '오월' 상징은 크게 변모하게 된다. 어쩌면 1980년대 이후 한국 현대사는 정치적으로는 물론이고 문화적으로도 광주민주화운동에 의해 규정을 받지 않은 곳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오월 광주'를 애써 폄훼하려고 했던 이들조차 역설적으로 그 흐름에 긴박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유신의 몰락과 더불어 형성된 새로운 열망들을 하나하나 좌절시키며 등장한 신군부 세력은 '오월 광주'를 폭력으로 진압하면서 80년대 내내 억압의 통치를 이어갔다.

이때 시인들은 권력과의 날카로운 대결과 그로 인한 내면적 저항의 언어를 세상으로 흘려보내게 되었다. "오월 어느 날이었다/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김남주, '학살 2')에 나타난 시인의 격앙처럼, 우리 시는 불가피하게 이러한 시대적 역학 안에 유폐되었고, 윤리적 자아와 시적 자아 사이의 간극을 스스로 파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캠퍼스 안에서 은밀하게 소통되던 것이든, 훗날 대중적으로 성공한 '모래시계'나 '박하사탕' 같은 영상물에서 확인한 것이든, 이러한 야만의 시대가 남긴 끔찍하고 잔혹한 폭력성은 오래도록 사람들 뇌리에 혈흔처럼 남았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간 많은 이들의 내면에는 가장 어둑한 충격과 가장 빛나는 저항의 역사가 동시에 아로새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가 80년대를 기억할 때 그 시대가 탈(脫)정치적 대중문화가 가장 활발하게 은성한 시대이며, 세계경제의 활력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극점을 이룬 물질적 풍요시대였다는 점을 간과하기는 어렵다. 후진적 정치와 호황의 경제라는 기묘한 불균형 속에서 제 물을 만난 것이 바로 문화의 대중화(popularization) 흐름이었는데, 이현세의 장편만화 '외인구단'이 대중들의 이목을 붙들었고, 김홍신의 장편소설 '인간시장'과 서정윤의 시집 '홀로서기' 등이 문학의 밀리언셀러 시대를 열기도 하였다. 그만큼 1980년대는 절대권력의 폭력성과 그것을 후광으로 하는 대중문화의 화려한 개화가 공존하는 시대였다.

올해 우리는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는다.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보듯, 장훈의 영화 '택시 운전사'에서 보듯, 이제 우리 문학과 예술은 '오월 광주'를 가장 아프고 또 가장 빛나는 사회적, 윤리적 사건이라고 형상화하고 있다. 특별히 '소년이 온다'는 5·18 당시 숨죽이며 고통받았던 인물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치유의 소설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광주사태'라는 어처구니 없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고, 객관적으로 밝혀진 것들까지 이념적 폄훼를 가하는 이들이 지금도 있지만,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로운 사회적 시스템이나 더 이상 절대권력이 들어설 수 없는 민주주의 장치 마련에 '오월 광주'가 끼친 기여는 자못 혁혁하다 할 것이다. 그렇게 "놀랍도록 아름다운" 오월은 위대한 역사적 분수령이 되어, 이제 누군가를 더 밝은 빛이 비치는 쪽으로 인도해 가는 역사적 힘으로 남았다. 그 숱한 죽음과 아픔과 헌신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지금 다시 힘겨운 민주주의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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