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6)]국경과 공항 (下)

새부모를 찾아… 이땅의 자식을 위해… 그리움 안고 떠나간 그때 그사람들

박경호 기자

발행일 2020-06-04 제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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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국제공항은 '국제화 시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기존 김포공항은 1958년 국제공항으로 지정돼 조금씩 증축해 나가며 확장했지만, 서울올림픽과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급증하는 항공수요를 감당하기엔 너무 비좁았다. 

 

인천공항은 애초 수도권의 늘어나는 항공수요를 처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1989년 구상됐다.

 

하지만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국가와 국가 간 사람·물자 이동이 활발해지자 '허브'(Hub)라는 개념을 도입하기로 계획이 급선회했다.

허브공항은 주변 소규모 공항들로부터 중소형 항공기로 여객과 화물을 집결시키고, 다시 대형 항공기로 갈아타 전 세계로 뻗어 나가게 하는 개념이다.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대만, 홍콩 등을 포괄하는 동북아시아는 인구·생산수단·무역·자본 등이 연계된 거대한 경제권역으로 묶이면서 물류가 중심이 되는 허브공항을 필요로 했다. 

 

특히 한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항공운송이 필수인 반도체 등 고부가가치산업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국경은 인천공항 개항 이후 개방성을 앞세웠다. 

 

국제화 시대 속에서 치열해진 세계 경제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천공항을 무기 삼아 국경을 더욱 활짝 열어야 했다.

# 입양아·파독 노동자들


1958년부터 10년간 아동 6677명 해외로
인천 복지시설 양육 미군 혼혈도 상당수
1962년 광부 8천·간호사 1만여명 서독行


국경의 의미는 각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전쟁 이후 해외 출국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가장 먼저 공항을 통해 국경을 넘은 한국인은 다름 아닌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었다. 

 

1955년 미국인 해리 홀트(Harry Holt·1905~1964) 부부가 전쟁고아 등 아동 12명을 입양한 것을 시작으로, 1958년부터 10년 동안 한국 아동 6천677명이 미국, 스웨덴 등 해외로 입양됐다. 입양된 아동 중에는 주한미군 장병과 한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도 상당수 포함됐다. 

 

미국은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의 혼혈아 문제를 해결하려고 1956년 특별이민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입양 형식으로 혼혈아동들을 미국으로 받아들였다.

연중기획
1956년 4월 혼혈아동 12명이 입양을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타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60년대부터 인천 덕적도, 동구와 부평구 등지에서 아동복지시설을 운영하면서 혼혈아동을 포함한 고아들을 보살피고 해외 입양을 주선한 서재송(91) 할아버지가 2018년 펴낸 구술록 '옆에서 함께한 90년 서재송'(정리 윤진현)을 보면, 혼혈아동의 출국이 얼마나 까다로웠는지 알 수 있다. 서재송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어보자.

"정식으로 결혼해서 태어난 아이들은 미국시민권을 받아요. 그러니 따지고 보면 아버지가 미국으로 가면서 데리고 가야 하는 건데 버리고 가니까 얘들은 그때부터 불법체류자가 되는 거예요. (중략) 불법체류자가 되어서 미국으로 보내려면 벌금을 내야 해요. 그런데 애들보고 내라고 할 수 없잖아요."

# 미국 이민·중동 건설 붐

1960~70년대 매년 2만명씩 미국 정착
'나성에 가면' '김포가도' 시대상 노래
1980년대 하루 1천명 사막 공사장으로


혼혈아동 다음 순서는 파독 노동자들이었다. 

 

법무부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이 2015년 펴낸 '대한민국 출입국심사 60년사'를 보면, 1962년 광부 8천여명과 간호사 1만여명이 김포공항을 통해 서독으로 이주했다. 

 

3년 계약의 기술연수생으로 파견됐는데, 계약기간이 끝난 이후에도 서독에 정착한 한국인이 많았다. 

 

애초 서독은 일본에서 단기노동자들을 받아들였는데, 1960년대 일본의 경제성장으로 일본인들의 인건비가 비싸지자 한국 사람들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광부와 간호사들을 파독한 지 2년이 지나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국빈 방문했다.

1960~1970년대 미국이 이민정책을 확대하면서 매년 우리 국민 2만여명이 미국으로 떠났다. 

 

이 시기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1972년), 남진의 '김포가도'(1974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년), 권성희의 '나성(LA)에 가면'(1978년) 등 해외이주를 주제로 한 대중가요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서독 파견광부 결단식(1963)
1963년 열린 서독 파견 광부 결단식. /국가기록원 제공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방 이후 끊긴 한국과 일본 간 국경이 다시 열렸다. 

 

한일 양국은 1967년 5월 항공협정을 체결해 항공편을 띄우기 시작했고, 일본인 관광객과 재일교포 입국자가 크게 늘었다. 일본인이 국내 외국인 관광시장의 주류로 떠오르자 일본어 교습 열풍이 불었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중동 건설 붐'이 일었다. 40년 동안 공항만 출입하면서 취재한 이황 한국일보 기자가 2012년 쓴 '공항 르포르타주'를 보면, 1980년대에는 하루에 1천명 가까운 사람이 중동으로 출국했다. 

 

검게 그을린 얼굴로 중동에서 돌아온 노동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목에 카메라를 걸고, 일제 카세트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이후 공항은 여행뿐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해외를 드나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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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서독행 비행기에 오르고 있는 파독 간호사들. /국가기록원 제공

# 엄격했던 조선시대 국경

인삼 유출 통제… 금지품 적발 사형도
300여명 '연행단' 외교·무역 공식통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국경을 넘는 대부분의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서'다. 조선시대에는 함부로 국경을 넘었다가는 목을 베어 매다는 효시(梟示)형을 당하기도 했다.

 

나라가 허가한 공식적인 월경(越境)은 고위 관료를 포함한 외교사절을 중국 황실에 파견하는 사행(使行)이었다. 이때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무역을 통해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상인들이 사행단에 참여하려고 몰려들었다.


청나라의 수도 연경(燕京·베이징)으로 가는 사행을 연행(燕行)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은 삼전도의 치욕이 있던 1637년부터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까지 1년에 2번꼴로 총 500여 차례나 연행단을 파견했다. 보통 300명 내외 규모 연행단을 꾸렸다. 외교도 외교지만 한중무역의 공식 통로로 활용됐다.

1780년(정조 4년) 건륭제의 칠순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사행에 따라나선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이 남긴 청나라 견문록 '열하일기'(熱河日記·이가원 역)는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국경을 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방금 사람과 말이 사열하는데, 사람은 성명·거주·연령 또는 수염이나 흉터 같은 것이 있나 없나, 키가 작은가 큰가를 적고, 말은 그 털빛을 적는다. (중략) 구종들은 웃옷을 풀어헤치기도 하고 바짓가랑이도 내리 훑어보며 비장이나 역관은 행장을 끌러 본다."

박지원이 동참한 사행단은 관료, 비장, 역관 등 관원이 30명이었다. 나라에서는 사행단의 관원들에게 최상품 인삼을 몇 근씩 지급했는데, 이를 '팔포'(八包)라 불렀다.

 

중국에서 인삼을 팔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일종의 '보너스' 성격이다. '열하일기'에서는 인삼 대신 은을 받았다고 썼다. 

 

이 팔포의 권리, 즉 무역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송도(개성)나 평양의 상인들이 사들여 사행길에 동참했다. 사행단이 국경을 넘기 전 깃대 3개를 세워 문으로 삼고, 금지 물품을 검사했다. 

 

첫 번째 문에서 걸리면 곤장을 맞고, 두 번째 문에서 적발되면 귀양을 보냈다. 마지막 문에서 금지 물품이 적발되면 목을 벨만큼 통관절차가 까다로웠다.

 

일련의 과정이 꼭 인천국제공항에서 펼쳐지는 출입국심사 절차처럼 까다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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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명나라에 파견된 한음 이덕형(1561~1613) 일행의 사행길을 담은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조선이 국경을 엄격하게 통제한 것은 가장 중요한 무역상품인 인삼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삼은 공식적으로 팔포 무역을 통해서만 중국 등 다른 나라로 유통됐다.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에서는 의적 장길산의 후원자인 개성상인 박대근이 상단을 이끌고 따라나선 사행길에서 청나라 상인에게 인삼 가격을 흥정하면서 무역을 하는 장면이 무척 자세히 묘사된다. 

 

'열하일기'를 비롯한 각종 사료와 문헌을 치열하게 취재한 흔적이 박대근의 인삼무역 장면에서 묻어난다. 조선인이 압록강을 건너 인삼을 캐는 문제는 조선과 중국 간 국경분쟁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2020년 6월 현재는 코로나19가 인천공항을 빼면 이야기할 수 없는 '국제 무역 시대'에 손상을 입히고 있고, 미국과 중국 간 갈등도 격화하고 있다. 

 

조선시대처럼 폐쇄적이고 제한적으로 국경이 운영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허무맹랑한 얘기만도 아닌 불확실성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선 국경의 의미가 변화한 과정을 되짚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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