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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이상하고 아름다운 그랜마호텔

입력 2022-08-04 19:11
지면 아이콘 지면 2022-08-05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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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소설가
연남동 작은 카페에는 선생님 두 분이 먼저 와 있었다. 시인 한 분, 소설가 한 분.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이 나왔고 나는 포크보다 생맥주잔을 먼저 들었다. 더워도 너무 더운 날이었다. 땀을 식힌 다음에야 나는 가방에서 책 두 권을 꺼냈다. 두 분께 드릴 선물이었다. "요즘 출판사들은 진짜 책 너무 예쁘게 만드는 것 같아. 정말 공들였네." 책을 쓰다듬으며 소설가 선생님이 한 말에 시인 선생님이 투정처럼 말했다. "몰라. 미안해. 난 안 보여. 눈이 너무 나빠졌어." 이젠 책보다 노안 이야기가 더 재밌다. 다초점 안경은 어디가 잘하는지 묻고, 큰 글씨 책은 자존심 상해 못 사겠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생전 안 보던 전자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나도 이제는 태블릿으로 전자책을 본다. 종이 넘기는 재미 없이 무슨 책을 읽느냐 생각했던 나인데도 글씨를 마음껏 키워볼 수 있는 전자책이 요즘은 종이책보다 편하다. 그래서 전자책을 처음 읽던 시기, 나는 걸핏하면 손가락에 침을 묻혀 태블릿을 넘기곤 했다.

소설가 선생님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비닐봉지엔 오이와 고추, 감자가 들어있었다. "강릉에서 보내온 거야. 가져가서 먹어." 나는 고맙다고 냉큼 받았다. 만날 때마다 선생님은 뭐든 한아름씩 안겨준다. "선생님! 우리 10년쯤 더 나이 들면 매일매일 친구들 불러다 밥도 먹고 술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그렇게 설렁설렁 같이 늙어요. 소설이랑 시 얘기나 하면서 그렇게요." 내 말에 선생님이 대답했다. "어? 나 벌써 그렇게 사는데? 만두 백개씩 빚고 김장 80킬로씩 해. 친구들 먹이는 재미로 살거든. 서령도 우리 집 놀러와!"

친구·선후배들 하루 멀다하고 초대
제라늄·금잔화 핀 마당서 소맥 말고
3층짜리 건물 사 식당에선 낭독회…


나는 예쁜 할머니가 되고 싶다. 잘 웃고 잘 노는 수다쟁이 할머니가 되고 싶다. 친구들과 선배들, 글 쓰는 후배들을 하루가 멀다고 집에 초대해 제라늄과 금잔화 잔뜩 핀 마당에 상 펴고 앉아 소맥을 마는, 웃기고 이상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 집에 손님들이 하도 많이 와서 "아, 진짜! 또 술판이야? 지겹지도 않아?" 딸아이가 소리치면 만원짜리 몇 장 쥐여주며 "시끄럽고, 넌 나가서 놀아" 그러면 되니까. 사실 그런 소설을 쓰다 말았다. 나이 든 작가 할머니들이 3층짜리 건물을 하나 산 다음, 1층은 주차장과 작은 식당으로 쓰고 2층의 절반은 거실, 나머지 절반과 3층까지 작은 방들을 만들어 함께 사는 이야기. 식당에선 일주일에 한 번씩 낭독회를 여는데 동네 주민들이 오며 가며 들르고, 꼬마들이 자주 오면 동화도 읽어주는 그런 곳. 동네 사람들이 행여 실버타운이라 부를까 봐, 그건 또 자존심이 상해서 기어이 호텔이라고 조그만 간판도 달아둔 곳. 물론 진짜 호텔인 줄 알고 손님이 들어오면 "할머니 손님 아니면 안 받아요!"라며 돌려보내지만.

그 미완성 된 소설 종종 꺼내보며
요즘 자꾸 웃기는 할머니 되고 싶다


완성하지 못했다. 소설가 할머니들이 소설 속에서 하도 수다를 떨어대 귀가 다 멍멍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그랜마호텔'이라는 제목을 붙여둔 그 미완성 소설을 나는 종종 꺼내본다. 호호할머니가 되면 꼭 이렇게 살아야지, 마음을 다잡으면서 말이다.

아직 제라늄과 금잔화 핀 마당집은 없지만, 그랜마호텔도 못 지었지만, 며칠 전 소설가 후배가 집에 놀러왔다. 나는 만두를 빚을 줄도 모르고 김장도 할 줄 몰라서 배달 앱을 켜 삼겹살을 주문했다. 나 여기 놀러왔는데. 멀고 먼 어느 세상엘 먼지로 떠돌다 지구가 마음에 들어 한 번 놀러 가볼까? 하며 왔는데. 지구의 삶은 생각보다 빡세고 피곤하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할머니들을 초대해 낭독회나 하며 살아야지. 아니면 소맥이나 말든가. 자꾸만 빨리 할머니가 되고 싶은 날들이다.



/김서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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