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하류 무역삼각지대를 가다·1] 中의 바닷길 개척

19C열강에 동해 잃은 中
항로 회복 ‘7전8기’ 도전

김종화·황준성 기자

발행일 2015-10-07 제7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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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의 바닷길 개척

1860년 淸 러에 연해주 빼앗겨
소련-日 충돌 장고봉 전투계기
국경선 현재 상태까지 이어져

1990년 평촨~동해 노선 탐사
경제성 낮아 ‘차항출해’ 추진
자루비노항 이용 합의 성공
부산·日니가타항 연결 노려


#동해 진출의 발목을 잡게 된 장고봉 사건

지금은 두만강 하구가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되어 있지만 중국 역사학계에 의하면 19세기 이전에는 연해주 일대가 중국 영토 또는 활동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의 동해 진출이 막힌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다.

중국은 제2아편전쟁으로 어려움을 겪던 1858년 청나라가 러시아와 불평등 조약인 이훈조약을 맺으며 헤이룽장(黑龍江) 이북의 60만㎢를 러시아에 내줬다. 또 우수리강 동쪽에서 동해연안에 이르는 연해주 지역도 러시아와 공동관리권역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860년 청나라는 러시아와 베이징조약을 맺게 됨으로써 공동관리구역이었던 연해주 40만㎢ 에 대해서도 러시아에 빼앗기게 된다. 이로써 중국은 동해로 진출하는 길목을 잃게 된다.

중국은 26년이 지난 뒤 동해로 나아갈 수 있는 길목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청나라 관리였던 우다청이 1886년 훈춘동계약을 러시아와 체결하면서 중국의 영토가 10리 더 동쪽으로 뻗어 나가게 됐다. 동해 출해권에 관한 조항은 조약의 본문이 아닌 부건에 명기됐다.

우다청은 두만강 하구가 러시아의 관할이긴 하지만 중국 선박이 러시아의 방해를 받지 않고 통항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동의를 받아낸다. 1910년에는 훈춘시 두만강변에 항구를 개설해 어항과 무역항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8년 소련과 일본 간의 두만강변 영토 분쟁인 장고봉(張鼓峰) 사건이 발생하며 중국의 동해 진출은 사실상 막히게 된다.

장고봉은 해발 155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두만강 하구에 위치한 하산과 포시에트만의 해군기지, 한국과 만주를 잇는 국경철도와 두만강 너머 한반도까지 살필 수 있는 군사 요충지다.

대륙 진출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일본은 1938년 7월31일 장고봉을 공격 3시간만에 고지 점령에 성공했지만 이후 소련이 탱크 250대를 동원해 반격에 나서며 되찾았다.

13일간 벌어진 전투로 양국 군인 2만여명이 참전해 5천500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일본이 세운 괴뢰정부였던 만주국과 소련의 국경선을 장고봉을 가르는 능선으로 정하는 협정을 맺었다.

#동해 진출 꿈을 이루기 위한 중국의 노력

장고봉 사건 이후 중국의 동해 진출은 막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지난 후에도 두만강 하구가 북한과 러시아의 국경으로 획정됨에 따라 중국 선박은 동해로 진출할 수 없게 됐다.

그렇다고 장고봉 사건 이후 중국의 동해 진출이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니다.

1990년 5월 중국 정부는 당시 소련과 북한의 동의하에 평촨에서 과학탐사선을 띄워 두만강을 따라 동해로 나아가는 시운항을 했다. 탐사선 출항의 목적은 두만강 이용이 가능하게 될 경우에 대비해 두만강 하류 일대에 대한 조사였다.

조사결과 1910년 훈춘항이 개설되어 한참 이용되던 당시와 달리 두만강 하류는 수심이 얕고 불과 9m 높이에 불과한 조러친선대교로 인해 사실상 대형선박의 통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만강을 이용할 수 있는 선박은 50~300t급에 불과해 경제적인 효과는 미미하다는 결과를 내리게 된다.

동해로의 직접 진출을 꿈꾸던 중국은 전략을 바꿔 북한이나 러시아의 항구를 이용해 동해로 진출하는 차항출해(借港出海)를 추진한다.

중국은 꾸준히 노력한 결과 러시아로부터 자루비노항 이용 합의를 이끌어내 훈춘-자루비노의 육로 연결에 성공한다.

중국은 자루비노항 외에도 북한의 나진항을 이용하기 위해 북한 정부와의 접촉도 끊임 없이 하고 있다.

중국이 나진항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나진항은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의 접안이 가능하고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이라는 입지 조건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훈춘에서 나진항까지 육로로 연결되면 훈춘~나진~부산, 또는 훈춘~나진~니가타항까지 물류 이동이 가능하게 돼 대륙과 환동해권 대규모 무역항과의 연결이 가능하게 된다는 점도 중국이 지속적으로 나진항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결국 중국은 2009년 북한으로부터 나진항 1호 부도 사용권을 따냈고 1년 뒤인 2010년에는 4~6호 부두를 개발해 50년간 사용하는데 합의한다. 1호 부두는 중국이 사용권을 따낸지 1년만인 연간 100만t의 하역능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하기도 한다.

북한과 중국의 나진항 개발이 원활히 추진되는 듯했지만 중국과의 협력을 추진해 오던 장성택 세력의 몰락 이후 나진항에 대한 개발 속도도 더뎌지고 있다.

→ 71면에 계속

/김종화·황준성기자 jhkim@kyeongin.com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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