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귀환, 사할린의 한인들·4] 한국을 모르는 후손

경인일보 창간 70 특별기획
까만머리 한인 3·4세 “난 러시아인”

강기정 기자

발행일 2015-10-15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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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조사진
일본의 강제 징용 등으로 사할린에 이주한 한인들의 핏줄은 수십년 간 러시아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왔다. 사진은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시 한인회에서 운영하는 ‘세종한글학교’, 무용 수업 중인 사할린 에트노스 아동예술학교의 4세대 한인 아이들, 사할린 한인문화센터 앞에 세워진 위령탑, 교육부가 관할하는 사할린 한국교육원에서 한글을 배우는 한인·러시아인 학생들. /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대다수가 아픈 역사 알지못해
막연한 ‘조상의 나라’ 로 인식
한국 알릴 수 있는 교육 필요


“여러분은 한국 사람인가요, 러시아 사람인가요?”

질문을 던지자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몇 분 후 통역사가 전해준 아이들의 답변은 반으로 갈렸다. “부모님이 모두 한인이라 나도 한국 사람”이라는 아이가 반,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니 러시아 사람”이라는 아이가 반이었다. 지난달 17일 러시아 사할린 에트노스 아동예술학교에서 만난 ‘사할린 한인 4세’ 아이들의 얘기다.

일곱살에서 아홉살 사이인 7명의 아이들은 또래 한국 아이들처럼 까만 머리칼에 살구색 피부를 가졌다. 대일항쟁기 당시 사할린에 온 한인들의 아들, 손자가 낳은 한국의 핏줄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엄마, 아빠, 하나 둘 셋 등 10여개의 단어 외에는 한국어를 알지 못했다. 한국 이름을 갖고 있는 아이는 3명 뿐이었다.

아이들에게 한국은 그리운 ‘고국’이 아니었다. 한국이 고향이라고 답한 아이도 “한국 핏줄이긴 하지만 러시아가 고향이 아니라고 하긴 어렵다”고 덧붙였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한국은 신나는 놀이공원이 있고 바다와 산이 멋진 나라일 뿐이었다.

먼 옛날 한국에 살던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왜 사할린에 오게 됐는지, 사할린에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는 잘 모른다고 했다. 이 학교 교사인 율리야 신(40·여)씨는 “수업시간에 한국말이나 문화를 조금씩 가르치긴 하지만 대부분의 한인 아이들은 한국말이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할린으로 이주했거나 그곳에서 태어난 한인을 ‘1세대’로 간주하면, 현재 사할린에는 1세대의 증손자 격인 4세대까지 살고 있다. 이들 세대 간 한국에 대한 이해와 생각은 대체로 뚜렷하게 갈렸다.

사할린에서 만난 1세대와 그 자녀 세대인 2세대는 대부분 한국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지만, 2세대의 자녀·손자 세대인 3·4세대는 거의 한국말을 하지 못했다. 수십년 간 고국과 단절된 채 러시아의 일원으로 살아온 한인들이 사할린에서 한국말과 문화,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는 세대별 한국에 대한 인식 차이에도 한 몫을 했다는 분석이다. 1·2세대에게 한국은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고국’이었지만, 3·4세대에겐 다소 막연한 ‘조상의 나라, KOREA’였다.

사할린 한인 사회에서는 시간이 지나 2세대마저 세상을 떠나면, 이후 세대의 한인들이 사할린의 아픈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한국과 단절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

강영복(71) 사할린 경제정보법률대학 총장은 “3세대부터는 스스로 러시아 국민이라고 여기는데, 2세대까지 사라지면 3세대부터는 한국과 단절될 가능성이 있다”며 “쉽지 않은 문제지만 3세대 이후 세대가 한인임을 인식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려면 사할린 한인 사회의 노력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사할린 한인들이 한국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장을 마련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즈노사할린스크/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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