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광복 70년을 말하다·8] 우제찬 前 경인일보 사장

스스로 공기(公器)라 생각하고 사회 보탬이 될때, 비로소 기자

민정주 기자

발행일 2015-12-01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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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찬 4
우제찬 前 경인일보·경기방송 사장이 경인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기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해야 하고 그래야 언론이 발전할 수 있다”며 지난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1969년 신문사 첫 발 유신 검열·통폐합등 오롯이 겪어
관보형태 ‘계도지’ 시절 관 비판못해 언론 스스로의 암흑기
땅투기 실태기사 외압 심했지만 ‘경인일보’ 알려
외환위기때 사장 취임 ‘情’으로 뭉쳐 위기 극복
공개채용등 인재 키워내는게 ‘경영의 핵심’


처음 본 북한사람들 모습에 충격을 받았죠.
김정일 위원장 빼고는 전부 로봇 같았어요.
시키는 것만 하는거죠. 그래서는 발전할 수 없어요.
자기가 찾아서 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언론이 건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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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드라마에 기자가 등장하는 일이 많아졌다. 화면 속의 기자들은 수습기자를 막 대하거나 특종을 맹종한다. 이런 모습은 차라리 애교스럽다. 더러운 유착과 권력화의 한 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매체에 등장하는 기자의 이런 면모를 대중은 ‘어떻게 기자가 저럴수가!’ 라는 놀라움 없이 받아들인다.

험하고 부패한 기자의 이미지가 대중성을 획득한 것이다. 실제로도 기레기라는 말이 대명사처럼 쓰이고, 기사가 조롱거리로 회자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때에, 경인지역 언론계 원로와 만났다. 경인일보와 경기방송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한 우제찬(74) 전 사장이다.

그와 나눈 이야기는 언론계 안팎의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듯 싶다. 한 분야에서 40년 세월을 바친 우직함 때문에 그렇고, 퇴직한 뒤로도 굳건하게 지니고 있는 기자 정신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그는 오래되어도 변함없이 중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의 현역시절 별명은 ‘우보태’였다. 기자라면 사회에 보탬이 돼야 한다고 늘 이야기하고, 실천하는 그에게 주위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스스로도 그 별명을, 기자라는 직함만큼이나 아꼈다. 1969년 신문사에 입사했다. 당시 사명은 연합신문이었다.

본사는 인천에 있었고, 주재기자를 다 합쳐도 50명 정도였다고 그는 기억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 중 언론인으로 퇴직한 이는 손으로 꼽아볼 것도 없이 드물다. 기자가 교수도 되고 정치도 하고 사업가로 방향을 트는 경우는 지금도 부지기수다. 언론인으로 42년, 그의 인생 굴곡은 경인지역 언론 역사의 궤적과 일치했다.

그 세대의 어른들이 다 그렇게 살았듯 우 전사장 역시 한동안 가난했고, 사회의 혼란에 휩쓸렸다.

“첫 월급이 얼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어쨌든 가계를 꾸릴만한 액수는 아니었어요. 동네 가게마다 외상이 하도 많아서 월급날에는 다니던 길을 놔두고 멀리 돌아서 집으로 갔어요. 월급날에도 외상값을 못 갚아서 집까지 가는 길에 있던 구멍가게와 세탁소와 연탄가게 앞을 지나갈 수 없었던거죠. 아내가 옷가게를 해서 생활을 유지했어요. 한 달 생활이 가능할 만큼의 월급을 받은 것은 80년대부터였죠.”

언론인의 과거를 논하는데 유신시절이 빠질 수 없다.

“검열도 검열이지만 언론사 구조조정을 정부가 나서서 하던 시절이었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지역 언론이 전두환 정권의 1도1사 언론통폐합으로 경인일보 하나만 남은 줄 알고 있지만 유신시절에 통합돼 70년대부터 경기인천지역의 유일한 매체로 역할을 하고 있었어요.”

언론계를 포함한 사회 전반의 암흑기였다. 그러나 그는 정작 언론의 암흑기는 따로 있었다고 말했다.

“시·군에서 신문 구입 비용으로 예산을 편성하던 때가 있었어요.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죠. 이장이나 새마을회장을 통해 관보형태로 신문을 마을에 배포했어요. 계도지라고 불리기도 했죠. 이러면 관 비판기사를 쓰기 어렵죠. 독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관을 위해서 기사를 쓰는 구조가 돼 버린 겁니다. 스스로 클 수 있는 기회를 그 때 많이 져버린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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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로서 그의 화양연화는 편집국장을 하던 때다. 대기업의 경기도내 토지 투기 실태를 파헤치는 기획기사를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18회 만에 중단됐다. 기사를 내리면서 편집국장 직에서도 물러났다.

“외압이 심했어요. 당시 사장도 이제 제발 그만하라고 사정했고, 취재 대상이 된 기업들의 임원들이 회사로 찾아오고, 어떤 기업은 경인일보 주식을 모두 살테니 우리 회사 이름을 빼달라는 딜을 제안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다들 열심히 했어요. 토지대장에 파묻혀 지냈고, 땅 보러 다니고. 이 기사로 경인일보 이름이 많이 알려졌고, 구독신청이 하루에 50~60건씩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는 수습기자로 입사한 지 30여 년이 지난 97년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그러나 회사의 곳간은 텅 비어있었다.

“IMF여파로 당시 월급 줄 돈은 커녕 신문 인쇄할 종이도 못 샀어요. 사장이 되면서 강조했던 것이 情으로 뭉친 신문사가 되자는 것이었어요. 회사 안팎의 부패를 줄이고 어려운 시절을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그때는 다들 내 회사 내 일터라는 생각을 하면서 일했던 것 같아요.”

경영자로 10년 세월을 보낸 우 전 사장은 나름대로의 조직을 보는 눈을 가졌다.

“어느 조직이든 조직에는 없어도 좋을 인사가 5% 있고,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20%, 자기 몫을 겨우하는 사람이 30%, 꼭 필요한 인재는 5~10% 정도 있어요. 꼭 필요한 인재가 10%가 넘으면 잘 되는 기업이에요. 이들의 키워내는 게 경영의 핵심이어야 하죠. 특히 신문사는요. 요즘은 능력은 다 가지고 있어요. 이걸 조직에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인거죠.”

우 전 사장은 인재를 키우는 일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경인일보가 제일 잘한 일은 81년 공채를 시작한 거예요. 7~8명 뽑으면 3년 안에 1~2명 남고 모두 서울, 중앙지로 떠났어요. 일좀 할 만하게 키우면 빼가는 거예요. 하도 인재 유출이 심해서 나중에는 입사시험성적 1등부터 5등까지는 떨어뜨리고 6등부터 뽑았어요. 어차피 나갈 사람들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신생언론이 많이 등장하던 시절 언론계에 기자 수혈하는 역할을 한 셈이죠. IMF직전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됐어요. 다른 언론사분들을 만나면 경인일보 기자들은 뭐 하나 버릴 게 없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어요. 기자사관학교라는 소리도 들었죠. 경인일보로서는 좀 손해를 보긴 했어도 언론 전체를 보면 보탬이 되는 일이죠.”

그는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다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 이유 역시 사람이다.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죠. 나는 내 꿈을 이루었어요. 기자로 살고, 편집국장도 하고 사장도 하고. 이건 모두 좋은 후배가 있어서 가능했어요. 그들 때문에 저는 지금도 보람을 느낍니다. 가장 중요한 건 후배를, 인재를 키우는 것이에요.”

그래서 요즘 언론계를 보는 그의 마음은 더 씁쓸하다.

“내가 편집국에서 지내던 시절에는 데스크와 기자들이 싸우는 걸 자주 봤어요. 언쟁의 이유는 십중팔구 기사였죠. 서로 기자의 자존심을 걸고 논쟁을 했어요. 쌍욕도 오고 가고 종종 하극상도 벌어지고 했지만 좋은 신문 만든다는 마음이었으니 잘잘못을 가릴 것도 없었죠. 그런데 요즘은 개인에 집착하는 것 같아 보여요. 스스로 공기라는 생각을 가지고 보탬이 되려하기 보다는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거죠. 물론 이게 나쁜 건 아니에요. 시키는 것만 해서는 개인의 발전도 이루기 어렵죠.”

그는 2001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가 좋을 때 언론인 초청 행사가 있어서 북한에 갔어요. 처음 본 북한사람들 모습에 충격을 받았죠. 김정일 위원장 빼고는 전부 로봇 같았어요. 시키는 것만 하는거죠. 그래서는 발전할 수 없어요. 자기가 찾아서 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언론이 건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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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제찬 前사장 약력

▲ 경기도 화성 출생
▲ 1969년 연합신문 입사
▲ 1997년 경인일보 사장 취임
▲ 2007년 경기방송 사장
▲ 사회복지 공동모금회 경기지회장(2003~2007)
▲ 대한결핵협회 경기도지부장(2008년)

/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 사진 =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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