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신춘문예

[2016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폭발/김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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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거인이 오고 있다
큰 소리를 내는 그의 의중은 알수없다
기다리며 거울 위에 자화상을 그렸다

 

매번 왜곡되는 거울회화
像을 고정하는 기계장치를 달때
거인의 발소리가 달려왔다

그의 귀에 저 멀리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거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출 수 없는 흥분이 그의 몸 전체를 휘감았다. 그는 신이 나서 좁은 방 안을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거인이 왔다! 이번에야말로 분명 거인이다! 쿵쿵대는 이 소리가 거인의 발소리가 아닐 리가 없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또한 처음보다 훨씬 더 규칙적이었다. 거인이 일정한 속도로 한 걸음씩 도시를 가로질러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거인이 내리는 결론이 무엇이든 그는 거인의 선택과 처분에 모든 것을 내맡길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었다. 소리의 크기로 보아 거인의 거대한 발바닥이 자신의 집 창문을 캄캄하게 가릴 때까지 채 몇 분이 남지 않았음을 느낀 그는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일정한 예의와 격식을 갖추고 반갑게 거인을 맞이할 목적도 있었지만, 주체할 바 없이 끝내주는 기분을 자신이든 주변이든 무엇이든 바꿔놓음으로써 완전히 새롭게 만끽하고 싶은 이유가 더 컸다.



“쾅!”

“이런! 다 왔다! 거의 다 왔어!”

놀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거인이 발걸음을 내딛자, 그저 가만히 기다리다가는 정말 숨이 터져 죽을 지경이 되어 그는 거인처럼 성큼성큼 온 방안을 빠르게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두 팔을 있는 대로 크게 흔들며 발로는 방바닥을 있는 힘껏 굴러가면서 십 수 걸음을 걷고 나자 두 발 뒤꿈치가 금세 아파왔다. 거인의 걸음은 그만 걷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주저앉아서 연신 뒤꿈치를 손으로 문질러 대면서, 그래도 웃음만은 결코 멈출 수 없어 그는 고통의 신음 중간중간에 환희의 깨웃음을 간헐적으로 섞어 넣었다. 그러나 여유를 너무 부렸다. 이 정도 시간이면 이제 거인의 다음 발걸음은 내 차례다. 고통이 다 가시지 않은 발로 그는 절뚝거리며 빠르게 창문으로 걸어가서 커튼에 바싹 귀를 댔다. 아니, 귀가 문제가 아니다. 거인이 내디딜 다음 발이 내 집의 창문이라면 귀가 아니라 눈으로 캄캄해질 내 창을 바라보아야 한다. 거대한 신체로 인해 밤과 같이 어두워질 창 너머로 다가오는 거인을 내 눈으로 똑똑히 맞이해야 한다. 그는 커튼이 쳐진 창문 앞에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버티고 서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몇 초 뒤 자신에게 거인이 내릴 결론을 기다렸다. 그는 두 눈을 최대한 부릅떴다. 바로 지금일 것이다! 빛을 가리고 거인이 막아선 내 방은 바로 지금 어둠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지금이다! 지금 거인은 바로 내 방 창문 앞에 있어야만 한다!

커튼을 뚫고 들어온 빛 때문에 부릅뜬 두 눈에서 계속 눈물이 흘러 그는 더 이상 눈을 깜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내 눈을 벌린 채로 창문 앞에 서 있는 짓은 그만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주저앉아서 연신 충혈된 두 눈을 손으로 문질러 대면서, 그래도 혹시 덩치 큰 누군가 서 있는 것은 아닌지 문질러 대는 중간중간에 그는 곁눈질을 간헐적으로 창쪽에 해댔다. 그러나 밖은 여전히 밝았다. 고통이 잦아들자 그는 옷을 도로 갈아입고 벽에 기대앉아 거인의 발걸음 소리에 대해 생각했다. 이번에도 거인이 아니라면 대체 그 큰 소리는 어디로부터 매번 들려오는 것일까. 규칙적으로 그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가 거인 말고 또 다른 무엇이 있을까. 결과로 짐작해볼 수 있는 마땅한 원인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창문이 깨졌다면, 누군가가 던진 돌 아니면 날아가다가 갈피를 못 잡고 들이받은 새의 대가리가 원인이다. 돌이 공으로 대체되거나 새의 대가리가 새의 옆구리로 대체될 수는 있겠지만 그래봤자 창문을 깬 것이 어쨌든 창문을 향해서 날아온 어떤 것 때문이라는 원인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일 분여 가까이 깜박이지 않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그 눈으로 쏟아져 들어온 빛 때문이다. 빛이 바늘이나 손가락으로 대체될 수는 있겠지만 그래봤자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이 어쨌든 눈을 향해 들어온 어떤 것 때문이라는 원인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다. 동일한 이유로, 규칙적이고 큰 소리는 의심할 바 없이 거인이 낸 것이며, 특히 이 경우는 거인을 대체할 만한 다른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심할 여지도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는 있는데 창문 앞에서 빛을 막아서는 존재는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소리는 절대로 그냥 나지 않는다. 소리는 반드시 소리 내는 것이 있어야 나는 법이다. 작은 소리는 작은 것에서, 큰 소리는 큰 것에서 난다. 작은 것은 작은 소리를, 큰 것은 큰 소리를 낸다. 이 분명한 관계를 어그러뜨리는 예외적인 경우는 사람이 만든 것 중 일부밖에 없다. 예컨대 총이나 폭탄이 그렇다. 그것들의 크기는 그것들이 내는 소리의 크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주 작다. 하지만 사실 이 경우도 그것들을 그렇게 만든 과학의 힘이 크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창밖의 그 소리를 총이나 폭탄이 낸 것이라고 생각할 근거는 희박하다. 총이 내는 소리는 일단 창밖의 소리에 비해 현실적으로 너무 작다. 그러면 폭탄이 남는데, 폭탄은 전쟁이 터지지 않는 이상 터질 일이 없다. 게다가 걸을 수 있는 존재가 내는 발소리만큼 규칙적으로 터질 가능성도 거의 없다. 전쟁이 났다면 불규칙적으로 여기저기서 크기가 다른 폭발음이 들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므로 전쟁은 나지 않았고 따라서 폭탄도 터지지 않았다. 인간이 제작한 이 예외적 결과물들을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큰 소리는 큰 것에서, 작은 소리는 작은 것에서 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인간이 제작하지 않았고 큰 소리를 규칙적으로 내는 존재는 거인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자명하게 도출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만 있고 거인은 없다. 거인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멀리 있는 것일까. 그래서 소리는 방에까지 들릴 만큼 크지만, 그리고 조금씩 이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는 하지만,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막아설 만큼 가까이 있지는 않은 것일까. 결코 나를 향해 걸어오지는 않으면서, 부단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큰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거인의 의중은 과연 무엇일까.

기다리는 일이 생활이 되면서 그는 한 가지 놀라운 정신의 능력을 획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어떤 일에도 절대 조바심을 내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조바심을 내지 않으면 조바심을 낼 단 하나의 자유를 박탈당하지만 그 이외의 모든 국면에서 단 1그램도 박탈당하지 않은 정신과 행위의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 거인이 걷기 시작하면 박탈당했던 단 하나의 자유, 오직 이 조바심을 낼 자유만이, 박탈당해 있었으므로 더욱 마음껏 해방과 흥분을 만끽하며 정신의 모든 영역을 지배해버리는 만큼, 거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거나 일단 들리면 거인이 한시라도 빨리 와주기를 기다리는 일이 오직 생활이 된 그는 결국 조바심을 내지 않음으로써, 대개 조바심을 내는 바람에 그르치게 되는 모든 일을 그르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와 마땅하고 당당하게 조바심을 내도 좋을 일에 조바심을 낼 자유를 모두 누릴 수 있게 된 셈이다. 이 놀라운 능력을 획득한 소수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동일한 일과 시간의 반복으로부터 지금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매번 새로운 사건의 출현과 불규칙적이고 비정기적인 시간의 도래는 인간의 정신에 조바심을 불어넣는 법이다. 그것은 인간을 매사에 들뜨게 만들어서 하는 일마다 기어코 그르치는 쪽으로 결론을 내고 싶어 안달이 난 악마의 숨결이다. 이쪽 저쪽으로 방정맞게 옮겨 앉으며 양쪽 귓구멍으로 쉴 새 없이 숨을 불어넣는 악마를 제풀에 지치게 하는 것은, 무엇을 하든 오직 심드렁하고 무심하게 똑같은 시간을 반복적으로 소비하는 것뿐이다. 반복이 자유를 주며 이 자유는 곧 조바심을 내지 않는 자유, 조바심을 내지 않음으로써 획득되는 자유다. 거인은 그에게 바로 이 자유를 줬다. 발걸음 소리라는 결론과 ‘따라서’ 분명히 있음이라는 원인 사이에 ‘그러나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유예가 가로놓이면서 기다림의 일상이 시작되었으며, 기다림의 일상은 ‘그래도 언젠가는’ 이라는 기대를 끌어들임으로써 매번 반복되어갔다. 반복되는 일상의 규격 안에서 그는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되는 안도와 진실로 조바심을 내지 않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조바심으로부터의 자유는 인간을 어떤 일에 쉽게 실망하거나 애석해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만큼, 그 역시 이번에도 창문을 캄캄하게 가리지 않은 거인에 대하여 일말의 아쉬운 감정 없이 도로 옷을 갈아입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에게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기다림의 일상적 시간을 무엇으로든 메우는 편이 자신이 거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거인을 더 잘 기다릴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데 있었다. 얼마 전까지 그는 오로지 순수하게 거인을 기다리는 행위로만 일상을 반복해왔다. 짧지 않은 세월이었으나 전혀 지루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골몰할 다른 일을 찾아 안달을 낼 필요도 전혀 찾지 못했다. 그러나 본디 모든 위대한 발견이란 무심한 시간의 지속으로부터 우연한 계기로 촉발되는 법이다. 그에게 우연한 발견은 바로 회화의 작업, 특별히 자화상을 그리는 작업이었다. 기다리는 내내 맞은편 옷장에 붙은 전신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아차린 그는 무심코 자화상을 그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발견해냈는데, 이 발견이 곧바로 기다리는 시간을 메우는 새로운 노동 행위로 채택된 것은 아니었다. 수성 펜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그대로 따라 그리면 세계의 어떤 자화상보다도 더 정확한 자신의 얼굴을 몇 번이고 다시 그려낼 수 있다는 발견은, 말 그대로 회화의 편의성을 증대시키는 우연한 발견일 뿐이었다. 놀라운 일은 실제 회화의 작업 직후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그대로 따라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울 속의 그가 거울 속의 그를 따라 그가 그어나가고 있는 선을 자꾸만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있는 그의 솜씨가 부족해서 그의 그림과 거울 속의 그가 일치하지 않는 수준이라면 조금도 놀라울 일이 아니다. 놀라움의 이유는 거울 속의 그를 그리려고 그가 최초의 선을 긋기 시작하자마자 거울 속의 그가 의도적으로 그의 펜을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데 있었다. 확실히 거울 속의 그의 움직임은 의도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번번이, 매번 다른 속도로, 게다가 다분히 신경질적으로 자신을 추적하는 그의 펜을 회피하고 있음을 그가 분명하게 알아차릴 정도로 거울 속의 움직임이 크기 때문이었다. 회피하는 얼굴을 추적하는 펜은 당연히 얼굴의 조화와 비례를 무너뜨렸으며 그 결과로 자화상은 언제나 그의 얼굴과는 전혀 다르게 그려졌는데, 딴에는 그것이 큐비즘의 특징적인 일면을 드러낸 것처럼 보이기도 해 한편으로 그는 얼굴을 한참 벗어나 있는 자신의 자화상에 꽤나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동일한 그림을 단 한 편도 생산해내지 않는 진정한 예술 행위의 발견, 이 불일치의 경험이 기다리는 시간을 회화의 작업으로 메우게 한 계기였으며 회화의 시간은 기다리는 시간 속에서 그로 하여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했다.

한 편의 그림을 막 끝낸 그는 늘 그랬듯이 거울을 향해 흡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웃음의 순간, 이 웃음이 결코 진실로 만족스러운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다. 거울 속의 그는 억지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억지스러운 웃음이 맹렬한 소유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도 소유하지 못했다는 강렬한 불만으로부터 유발된 것이라는 사실 역시 그는 바로 알았다. 하루에도 수백 편씩, 그 오랜 시간 자화상을 그려왔으나 자신은 언제나 최후의 한 편만을, 그것도 거울 위에서만 감상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게다가 거울 위에 그려지는 자화상은 거울 이외의 다른 사물처럼 손에 쥐거나 옮길 수 없으므로 결국 자신이 그린 그림들 중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그림은 단 한 점도 없다는 것. 나의 예술과 노동의 행위로 생산된 결과물에 대한 소유권을 다름 아닌 내가 조금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더 이상 억지스러운 웃음조차 웃을 수 없게 했다. 거인의 발걸음 소리와 같은 괴성을 거울을 향해 무려 백여 차례나 질러댄 다음에야 그는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혔다. 수천, 수만 번이나 지워 없애버린 지금까지의 그림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문제는 앞으로 그리는 나의 모든 그림을 소유할 방법을 강구해내는 것인데, 답은 하나뿐이다. 일반적으로 그림은 종이나 직물 위에 그려지는 만큼 나의 자화상도 종이나 직물 위에 그리면 된다. 하지만 나의 특유한 발견은 거울에 자화상을 그리는 것이니, 일단 거울에 자화상을 먼저 그린 다음 뒤가 얼핏 비치는 종이를 거울에 대고 거울에 그린 자화상을 그대로 따라 그리면 그리는 족족 나의 그림을 소유할 수가 있다. 이제부터는 거울 속의 그를 따라 그릴 때 이전보다 좀 더 진하게 선을 그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 종이 위에 거울 속의 그를 따라 그린 그림을 따라 그리기 용이해진다. 소유가 가능해진만큼 이제부터 그는 보다 진지하게 회화의 작업을 수행해 나가기로 했다. 작품을 사물의 형태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과 사물화된 그 작품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는 오직 예술가에게만 고유하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한 능력과 권리를 동시에 가지게 된 지금 나는 응당 모자람 없는 예술가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분명 앞으로 그것에 부합하는 예술가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도무지 끝을 알 수 없이 깊고 넓어서 어떤 책임과 사명도 모조리 끌어안고도 족히 남을 예술가의 정신은 무엇보다 진지해야 한다. 거울 위의 회화라는 미술사의 한 장을 차지할 회화 기법의 발견자요 개척자에게 요구되는 진지함의 강도는 유래 없이 강력할 것이다.

강도 높은 진지함을 요구받는 예술가의 정신이 그에 합당한 보다 차원 높은 예술을 창작하고 생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소유의 권리를 가진 예술가의 그 의무란 현재의 극복과 고양을 통해서만 이행될 수 있다. 요컨대 예술가는, 그는, 지금보다 더한 회화의 기법을 고안해내야 하고 지금보다 더한 회화를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더 진지해진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그가 선택한 진지함의 방법은 거울에 그려내는 그림의 왜곡의 정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화가의 의지와 의식을 통해 감각적인 세계의 상을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그리는 방식은 이미 전통의 영역에 속해 있다. 거울에 비친 상을 왜곡된 상태로 거울 위에 그린 다음 그것을 베껴내는 방식은 그러므로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방법론적인 혁신을 시도하는, 지극한 예술 생산의 기법이다. 여기에 왜곡의 정도를 더욱 높이겠다는 것, 그것이 예술가로서 그가 택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는 가만히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의 그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저러다가도, 그가 거울 속의 그를 그리기 시작하면 그는 그의 펜이 그리고자 하는 궤적을 지속적으로 배반하며 거울 위에 그려낸 그의 얼굴을 그와 전혀 다른 얼굴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이 왜곡을 보다 강렬한 왜곡으로 만드는 회화의 기법, 왜곡에 왜곡을 더해서 왜곡을 더 왜곡시키는 그 ‘더’의 기법, 그것이 무엇일까? 그는 생각했다. 왜곡에 왜곡을 더함으로써 왜곡을 더 왜곡시키려면, 그렇다, ‘더’하면 된다! 왜곡을 ‘더’ 왜곡시키려면 더하면 될 것이 아니겠는가! 더 할 것은 더하면 될 일이지 다른 무엇이 그보다 더 제격이란 말인가! 예술의 소유에다 그에 걸맞은 진지함까지 더해버린 자신에 대한 감탄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그를 전율시켰다. 그런데,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더할 것인가? 무엇이 왜곡의 정도를 현재보다 더 해줄 수 있을까? 그는 빠르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고민할 것도 없이 단박에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 다른 어떤 사물을 더한 것보다 항상 더 더해져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그의 시선이 콱 박혀 있는 지점에 놓여 있는 바로 저것이 거기에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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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기계라 해도 어떤 복잡성 자체만을 정지된 채 대변하는 사물이 아니라, 태엽을 감았다 놓으면 움직이는 인형과 그 바로 옆에 있는, 상자의 뚜껑을 열면 음악이 나오면서 발레리나가 빙글빙글 도는 모형, 둘이었다. 움직이는 것들을 더하는 것보다 더 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는 단언했다.

움직이는 기계 둘을 나의 얼굴 옆에 더해 놓은 다음 그것들을 작동시켜 움직이게 한다. 그러면 거울 속의 두 기계도 따라 움직인다. 내 얼굴을 먼저 그려 일정한 왜곡의 큐비즘적 성과를 거둔 다음, 거울 속의 움직이는 기계 둘을 거울에 따라 그린다. 거울의 기계가 실제의 기계를 거울의 내가 나를 배반하듯이 배반한다면 그것대로, 하지 않는다면 또 그것대로 나는 왜곡에 왜곡을 더하는 예술적 진지함을 성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기계의 움직임을 거울에 그리는 것 자체가 정지된 사물의 정지성을 그리는 것보다 더 사물의 왜곡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거울 속에서 움직이는 기계의 움직임을 펜으로 추적하는 동안 그 움직임이 실제의 움직임을 배반한다 해도 그것이 움직이고 있는 한 결과는 동일하다. 어느 경우든 그것은 거울 회화의 일종의 동역학, 내가 발견하고 성취한 거울 회화의 큐비즘적 동역학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엄청난 예술적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체없이 그는 작업에 착수했다.

거울의 그림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기계 둘을 더함으로써 심각한 수준의 왜곡이 발생했으며, 그럼으로써 그림은 더욱 심오하고 진지한 예술의 경지를 표현해내고 있었다. 3차원 공간에서 움직이고 있는 기계를 2차원 평면으로 옮기는 작업이 만만하지는 않았으나, 만만한 일은 애초에 예술가에게 할당된 몫이 아니므로 그는 몇 번의 수정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인내의 성과물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니, 아직 손에 넣은 것은 아니다. 예술가의 마지막 작업, 예술 작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야 할 단계가 남아 있다. 그는 거울에 종이를 대고 거울의 그림을 베끼기 시작했다. 작품에 대한 소유가 처음이라 그런지 베껴내는 선이 많아질수록 그의 마음 속에 묘하고 벅찬 감격이 조금씩 들어찼다. 다 베낀 그림을 멀찍이 놓고 처음 바라보는 순간, 감격은 결국 포화상태를 넘어 눈물과 함께 밖으로 넘쳐흘렀다.

“진정 내 것이다! 처음 가진 진정한 내 것이다! 너 이외의 모든 처음은 모두 처음이 아니다! 오직 너만 진정한 나의 처음이다!”

자신이 창조해낸 진정한 예술 작품 앞에서 그는 포효했다. 수만 번의 거울 그림 끝에 탄생한 최후의 결실이자 앞으로 탄생할 수만 점의 그림을 예비하는 최초의 성과였다.

“제목을 붙여야 한다!”

그래야만 소유가 완전히 마무리된다! 눈물 너머에서 그의 첫 작품이 강력하게 그것을 요구하며 어른거렸다. 어떤 제목을 붙여야 할까? 나의 처음에 어울리는 마땅한 이름이 무엇일까? 제목은 작품의 내용이나 성격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한편으로 작품을 곧장 지시하는 손쉬운 것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화가의 그림이란, 예술가의 예술작품이란 모름지기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항상 조금 더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덜 가지고 있거나 똑같이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감상할 이유가 없다. 그것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알아채버린 작품은 감상이 끝난 즉시 폐기되고 만다. 예술 작품에는 도무지 모를 것이 있어야 하며 모를 것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모를 것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제목이 내용을 곧장 지시하지 않게 하는 것, 제목과 내용의 거리를 최대한 멀게 하는 것은 모를 것을 영원히 모를 것으로 남게 하는 훌륭한 하나의 방법이다. 제목과 작품 사이에는 수수께끼의 다리가 놓여 있어야 한다. 그림에 따라 다리를 놓는 방법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먼저, 그림이 어떤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때는 그 사실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 제목을 붙인다. 예컨대 거울에 비친 내 방의 부분을 그림으로 옮긴다고 할 때, 거울 속에서 왜곡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그림에는 ‘1064-시간의 변형’ 등의 제목을 붙여야 다리가 놓인다. 반대로 그림이 어떤 대상을 비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때는 그 대상을 직접 언급하는 제목을 붙인다. 예컨대 거울에 비친 내 방의 부분을 그림으로 옮길 때, 거울 속에서 왜곡이 일어난다면, 그 그림에는 ‘방의 구석’과 같은 제목을 붙이면 다리가 놓인다. 이 경우에 그 대상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 제목을 붙여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감상자들에게 일정한 힌트를 줘야만 도무지 모를 것이 오히려 더 잘 도무지 모를 것으로 남기 때문에 대상을 직접 언급하는 제목을 붙이는 것이 더 낫다. 모를 것은 알 듯하지만 도무지 모를 때 더 모를 것이 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나는 후자의 방법을 따라 내 첫 작품의 제목을 붙이면 된다. 따라서 그는 ‘발레리나와 인형이 있는 자화상’으로 어렵지 않게 자신의 첫 소유물에 제목을 붙일 수 있었다.

예술이 예술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현재에 대한 불만족에 있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매 작품마다 정진하고 또 정진하는 것뿐이다. 비록 거울의 내가 매번 새로운 왜곡을 실현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진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똑같은 대상을 여러 다른 버전으로 반복해서 그려내는 것도 물론 정진의 훌륭한 실천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매번 다른 대상을 그림으로써 예술 세계를 넓히고 예술 활동의 새로운 전기를 모색하는 것이 언제나 정진의 궁극적인 방향과 실천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거울의 그림을 베끼더라도 결코 거울에만 의존해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기로 한다. 상이한 그림의 지속적인 산출, 매번 과거를 배반하는 변형의 생산. 이것이 이제부터 진정한 예술가의 길로 들어선 나의 유일한 목표이자 목적이 될 것이다. 그는 무섭게 그림에 몰두해 들어갔다. 좌절과 고뇌와 도약의 시간을 경과한 뒤 마침내 자기 예술의 특정한 사상과 방향성을 획득한 예술가의 역량은, 그것을 작품에 표현하기 위한 구차한 방법들을 일일이 고민하지 않아도 예외 없이 분명하게 그것이 그렇게 창조되고 나타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결과로 예술가를 끌고 간다. 그의 예술 행위는 이제 거침이 없었다. 무엇을 그릴 것인지, 어떻게 그릴 것인지 하는 고민들, 상이함과 변형의 생산과 관련된 일련의 방법적 모색과 같은 것들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행위는 그야말로 기계처럼 자동적이었다. 일말의 머뭇거림 없이 그는 단박에 원근 기법을 그림 속에 집어넣었다. 누군가 그의 멱살을 끌어당긴 것과 같이 불쑥 거울 바로 앞에까지 얼굴을 들이밀더니 뒤에 배치된 기계들과 자신의 얼굴 사이에 거리를 두고 입체감을 형상화했다. 다음 그림에서는 반대로 뒤로 쭉 빠진 다음 기계들을 거울에 밀착시킨 상태로 원근을 조성했다. 이때는 물론 긴 막대기에 펜을 붙여 그림을 그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기는 했으나 원근 속에서 두 그림이 표현해내는 차이의 성과를 고려할 때, 아무것도 아니었다. 동일한 대상들을 번갈아 전경과 배경에 배치함으로써, 그렇게 그려진 두 그림을 나란히 전시함으로써 그림은 전혀 다른 두 리듬의 상호 간섭을 생산하는 것이다. 자동으로, 그냥 그렇게, 그는 그것을 해냈다. 일말의 머뭇거림 없이 그는 단박에 기계들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분해해서 순수 기계 장치만을 자신의 옆에 배치했다. 기계 자체, 태엽 장치 자체의 순수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야겠다는 의지와 요구가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했을 때의 효과와 차이가 어떠하리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은 행위였으나 그림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와 전혀 다른 예술성을 여실히 표현하고 있었다. 왜곡된 자화상 옆에서 순수한 기계성을 강변하고 있는 사물들은 그림 속의 인물을 그 기계적 의미로서 끝없이 간섭한다. 그 간섭은 도무지 모를 의미로 남음으로써 그림의 낯선 지평과 깊이를 일거에 획득한다. 자동으로, 그냥 그렇게, 그는 그것을 해냈다. 자동화된 예술가로서 그는 거기에 또한 원근 기법을 조합했고, 소실점을 향해 자신과 두 기계를 거울 속에 앞으로 나란히 배치했으며, 자신의 옆 얼굴과 두 기계를 사선으로 배치함으로써 구도의 파괴를 시도하는 데에까지 거칠 것 없이 쇄도해 갔다. 모든 것이 가능했으며, 모든 것이 현실화되었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예술이었고, 예술은 그가 한 모든 것이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난 어느 순간, 자동화된 예술가로서 그는 수백 점의 그림을 소유한 자가 되었다.

정진은 그러나, 끝을 모르는 법이다. 불만족스러운 현실은 예술가에게 그 동안 해왔던 모든 것에 대한 번복을 종용한다. 거울에의 의존을 줄이고자 했던 그 때 이미 그에게 끝없는 정진과 진정한 번복의 맹아가 자리 잡고 있었을지 모른다. 지금 그는, 거울에 대한 강렬한 부정과, 성취와 성과를 오로지 자신의 것으로만 취하고자 하는 열망 속에 도사리는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느닷없이 제기된 질문 앞에서 그의 정신은 곤두서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거울에 비친 나와 사물만을 그려야 하는가? 왜 거울이 보여주는 상을 베끼기만 해야 하는가? 이 정도의 예술적 능력을 가진 자가 더 이상 거울에 의존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이 질문들은 자신에게 결국에는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을 질문들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거울 그림의 발견을 가능케 한 재능과 지금까지 중단 없이 발전해 온 예술적 능력의 결말에 순전히 개인의 역량만으로 생산될 예술품에 대한 예술가의 탐욕이 배정되는 것은 그 자체로 일종의 예정된 서사다. 결말에서 다시 완전히 새로운 도입을 감행하는 것, 그럼으로써 결코 끝나지 않을 서사를 새로 시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가의 숙명이요 사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내가 발견한 거울 그림을 과감하게 부정해야 한다. 가장 위대한 성과를 폐기 처분함으로써 그것이 가장 위대하다고 믿었던 그 믿음을 보란 듯이 추월해버려야 한다. 위대함을 초월하는 더 강한 위대함을 새로운 예술로서 과시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노력은 나로 하여금 부정과 번복의 위대한 성공을 직감하게 한다. 한껏 고양된 나의 예술적 능력은 한시라도 빨리 거울을 버릴 것을 나에게 재촉하고 있다. 나는 너를 더 이상 베낄 이유가 없다.

“이 순간부터 나는 오직 나만의 그림을 그릴 것이다. 너는 더 이상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위대한 예술가요 화가다. 위대한 화가는 결코 거울 위에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거울을 노려보며 그는 천천히 두 기계 장치를 작동시켰다. 기계가 움직이자 거울 속의 그가 움직이는 두 기계 가운데에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을 마주 노려보며 그는 펜을 움켜쥐고 종이를 자신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를 노려보고 있는 거울 속의 그를 그리기 위해 그가 최초의 선을 종이에 그으려는데, 그 때였다.

“쾅!”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초식동물처럼 그의 목이 오른쪽 창문으로 홱 돌아갔다. 폭발음이었다. 잠깐의 시간 뒤 소리는 또 들려왔다.

“쾅!”

그가 벌떡 일어났다.

“거인이 왔다! 이번에야말로 분명 거인이다! 쿵쿵대는 이 소리가 거인의 발소리가 아닐 리가 없다!”

“쾅!”

“쾅!”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또한 처음보다 더 규칙적이었다. 거인이 일정한 속도로 한 걸음씩 도시를 가로질러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거인이 내리는 결론이 무엇이든 그는 거인의 선택과 처분에 모든 것을 내맡길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었다. 소리의 크기로 보아 거인의 거대한 발바닥이 자신의 집 창문을 캄캄하게 가릴 때까지 채 몇 분이 남지 않았음을 느낀 그는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일정한 예의와 격식을 갖추고 반갑게 거인을 맞이할 목적도 있었지만, 주체할 바 없이 끝내주는 기분을 자신이든 주변이든 무엇이든 바꿔놓음으로써 완전히 새롭게 만끽하고 싶은 이유가 더 컸다.

“쾅!”

“이런! 다 왔다! 거의 다 왔어!”

놀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거인이 발걸음을 내딛자, 그저 가만히 기다리다가는 정말 숨이 터져 죽을 지경이 되어 그는 거인처럼 성큼성큼 온 방안을 빠르게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두 팔을 있는 대로 크게 흔들며 발로는 방바닥을 있는 힘껏 굴러가면서 십 수 걸음을 걷고 나자 두 발 뒤꿈치가 금세 아파왔다. 거인의 걸음은 그만 걷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주저앉아서 연신 뒤꿈치를 손으로 문질러 대면서, 그래도 웃음만은 결코 멈출 수 없어 그는 고통의 신음 중간중간에 환희의 깨웃음을 간헐적으로 섞어 넣었다. 그러나 여유를 너무 부렸다. 이 정도 시간이면 이제 거인의 다음 발걸음은 내 차례다. 고통이 다 가시지 않은 발로 그는 절뚝거리며 빠르게 창문으로 걸어가서 커튼에 바싹 귀를 댔다. 아니, 귀가 문제가 아니다. 거인이 내디딜 다음 발이 내 집의 창문이라면 귀가 아니라 눈으로 캄캄해질 내 창을 바라보아야 한다. 거대한 신체로 인해 밤과 같이 어두워질 창 너머로 다가오는 거인을 내 눈으로 똑똑히 맞이해야 한다. 그는 커튼이 쳐진 창문 앞에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버티고 서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몇 초 뒤 자신에게 거인이 내릴 결론을 기다렸다. 그는 두 눈을 최대한 부릅떴다. 바로 지금일 것이다! 빛을 가리고 거인이 막아선 내 방은 바로 지금 어둠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지금이다! 지금 거인은 바로 내 방 창문 앞에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재빨리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그의 몸 전체를 관통했다. 이것은 아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득달같이 거울 앞으로 달려간 그는 펜과 종이를 품에 부둥켜안고서 창문을 향해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지금은 안 돼!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안 돼! 왜 지금이야 왜! 나는 더 이상 거인이 내릴 결론이나 처분 따위 필요 없어! 나는 내 그림을 그려야 해! 완전한 내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쾅!”

창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겁에 질린 쥐새끼처럼 고개를 숙인 채 방 구석 여기저기를 잽싸게 쏘다녔다. 거인의 발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눈 하나와 팔 하나 이외의 모든 신체를 거인에게 내줄 수 있다! 그래, 거인의 발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 거인은 자신의 신체만큼 보폭도 크니 거인의 첫 발을 피할 수만 있다면 다음 발은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지체 없이 일어나서 창문의 커튼을 홱 젖혔다. 수십만 발의 화살처럼 빠르고 육중한 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거인을, 거인의 걸음을 보아야만 거인의 발을 피할 수 있다! 창문 앞에 서서 그는 빛으로 가려진 시야가 확보될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눈앞에 거인은 없었다. 그는 성큼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창 밖에 펼쳐진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았지만, 어디에도 거인은 없었다. 분명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고 직전에는 창문이 떨리기까지 했는데, 거인은 없었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기 시작하고, 펜과 종이를 움켜쥔 두 손의 힘이 풀리는 듯하던 그 때, 그러나,

“쾅!”

하고 폭발음이 다시 터졌다.

“도대체 이게 뭐야! 거인은 어디에도 없단 말이야!”

“쾅!”

폭발은 이제 그의 방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쾅!”

게다가 밖에서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쾅!”

이제 폭발의 보폭은 그물처럼 촘촘하고 좁아졌다.

“쾅!”

소리와 소리의 간격 속에 숨으려던 그의 시도는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

“쾅!”

폭발은 마치 쥐새끼같은 그의 걸음을 좇고 있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쾅!”

순간 그는 결코 폭발의 처분을 피하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그는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서 두 기계 사이에 서 있는 그가 그를 마주보았다. 움켜쥐고 있던 펜과 종이를 그는 놓아버렸다. 거울 속의 그도 그렇게 했다.

“쾅!”

결국 마지막 폭발은 그 안에서 일어났다. 그는 터져 버렸다. 터져 버리는 그를 거울 속의 그가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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