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그] 김 찬 '김찬병원' 대표 원장

'통증의학 개척자' 30여년, 아무도 가지않은 길을 걷다

윤인수·황성규 기자

발행일 2016-01-20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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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병원 인터뷰
국내 통증 의학계의 일인자로 불리는 '통증 명의' 김찬(67) 김찬병원 대표원장이 환하게 웃고 있다.

◈국내 '통증명의' 원동력은?
과거 마취분야 다른진료 보조취급 '답답'
'통증 = 병의 기본신호' 확신 일본 유학길
한국에 클리닉 개설 목표 혹독한 수련거쳐

◈앞으로 '도전정신'은 계속 되나?
통증의학과 신설 후학 양성 '현실 벽' 실감
수원에 첫 '전문병원' 센터 저변확대 노력
은퇴후 기부문화 동참 유기견센터 만들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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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김찬병원' 김찬 대표원장은 의료인으로서 취할 수 있는 명예와 명성을 모두 가진 의료인이다. 대상포진과 다한증 신경치료술의 시조이자 3차신경통(안면통증) 알코올차단시술 5천례는 독보적이며 공영방송(EBS)이 통증명의라 인증했다.

그런데 의대에 통증의학과는 없다. 최근엔 웬만한 외과분야 병의원 대부분이 통증클리닉을 운영하고 있지만 통증의학 전공의는 없다.

다만 김 원장이 통증의학 분야에서 시장을 개척하면서 통증클리닉이 범람했을 뿐. 그래서 그가 '통증의학'이라는 블루오션을 열어젖힌 과정이 궁금했다. 지난 14일 김찬병원에서 김 원장을 만나 그의 인생 역정을 탐문했다.

김찬 원장. 그도 30여년전 과거에는 평범한 마취과 의사에 불과했다. 과거 마취과가 다른 진료과를 보조하는 정도로 취급받던 시기에 의료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당시만 해도 통증은 시간이 지나면 곧 사라지는 정도의 개념으로만 여겨졌다.

"지금이야 '통증클리닉'을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과거에는 통증에 대한 인식 자체가 굉장히 낮았어요. 잘 몰랐기에 중요성도 놓치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통증이라는 개념은 모든 병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동반되는 가장 기본적인 신호거든요. 이걸 간과하고 방치하면 통증은 신경 손상으로 이어져 만성화 단계로 넘어가게 되고, 장시간 큰 고통을 유발하게 돼요."

-의료계에서 마취과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보조적이고 주변적인 전공으로 인식되었을텐데요.

"그랬지. 의사는 의사인데 환자를 진료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마취 시작합니다'하고 마취하고 집도의가 수술을 끝낼 때까지 대기하는 단순한 일의 반복이었죠. 내성적인 사람은 적응할 수 있는 일인지 몰라도 내 성격상 도저히 견딜 수 없었어요. 대우도 일반 진료과목 동료의사에 비해 형편 없었고···. 특히 환자하고 교감할 수 없는게 너무 힘들더라구요. 차라리 제주도 어느 마을에 보건소장이나 하는 게 낫다고, 아니 그렇게 하려고 마음을 먹을 정도였으니까···."

-통증의학계의 대부가 제주도 보건소장이 될뻔했다니 큰일날 뻔 했네요. 그 위기를 어떻게 넘긴 겁니까.

"그때가 원주 세브란스병원에 있을땐데 마취과장이 최령 박사셨어요. 제가 하도 못견뎌 하니까 최 과장님이 서울에 있던 몇몇 대학병원 통증클리닉을 소개해주셨어요. 그런데 찾아가보니 형편없는 수준만 확인하고 더 큰 절망에 빠졌어요. 결국 최 과장님이 마지막으로 일본에 가보라는 제안을 하시더군요. 거기 가서도 희망이 안보이면 마음대로 하라면서···.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본에 가게 됐고 결국 그곳에서 신세계를 발견한거지."

이판사판 식으로 건너간 일본에서 그는 불과 며칠 만에 머리를 한대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여태 아무도 가지 못했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도대체 일본에서 뭘 본겁니까.

"당시 일본에서는 통증의 원인을 파헤쳐 싹을 잘라내는 식의 근본적인 치료가 이뤄지고 있었어요. 정말 눈이 번쩍 뜨일 정도였죠. 우리나라에 이 같은 치료시스템이 정착된다면 실로 엄청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말을 못했기 때문에 밤낮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려 노력했고, 1년간 정말 열심히 배우고 또 배웠어요. 생각해 보면 엄청나게 고생했던 시간이었지만, 이때 굳게 결심한 게 있었어요. 반드시 우리나라에 번듯한 통증클리닉을 만들겠다고 말이죠."

물론 당시 일본에 간 마취과 의사가 김 원장 혼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 현장을 경험했다는 인증만 필요했던 다른 의사들과 달리 김 원장은 혹독한 수련의 과정을 다시 거친 점이 달랐다. 1991년 9월, 1년간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곧바로 병원 내에 통증클리닉을 개설했다.

-병원에서 흔쾌히 통증클리닉을 내준건가요.

"대뜸 통증클리닉을 만든다니 병원 측에서 공간을 내줄리 있나요. 결국 수술환자 회복실 한쪽 구석에 침대 하나랑 테이블 하나 놓고 시작했지. 공간의 특성상 제 환자들은 진료를 받으려면 매번 수술복을 갈아입고 들어와야 했어요. 다행히 환자가 조금씩 늘어나면서 수술실을 벗어나 허름한 창고를 하나 얻게 됐어요. 한국에서 처음으로 외래를 볼 수 있는 통증클리닉 공간이 생긴거지."

행운은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고 했던가. 그때 김 원장에게 '기적의 1분'이 찾아온다. 김 원장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1분이.

"KBS '6시 내고향' 원주편 방송을 앞두고 병원 쪽에 섭외 요청이 왔어요. 당시 내가 '다한증' 치료를 수술 없이 성공시켰고, 병원에서 이걸 방송에 내보내기로 한 거죠. 고작 1분 남짓 전파를 탔을 뿐인데, 방송 이후 전국에서 환자들의 문의가 쇄도하면서 병원이 난리가 난거야. 나중엔 대기 환자 수가 무려 9년 치가 밀렸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거기다 환자중에는 유력인사들도 많았고···."

열악했던 근무환경은 한순간에 바뀌었다. 병원 한 층을 통째로 쓰게 됐고 고가의 기계도 지원받으며 병원 내에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통증 관련 학회에서 김 원장이 어떤 내용을 발표하기만 하면 곧바로 보급될 정도로 병원 밖에서의 위상도 높아졌다.

하지만 소위 잘 나가는 죄(?)로 주위의 견제를 받게 된 그는,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든 일터를 떠난다. 이후 당시의 유명세를 입증하듯 김 원장은 국내 유수의 병원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이사장은 아예 그를 직접 승용차에 태워 병원을 안내하며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고 제의했을 정도였다.

-그 좋은 조건을 마다하시고 결국 아주대병원을 택한거네요.

"그게 참. 먼저 후배한테 아주대병원으로 가겠다 했지 뭡니까. 그리고 이 이사장님을 만나 마음을 바꿔먹었지. 그런데 저녁에 집에 가보니 그 후배가 집 앞에서 씩씩대고 있는거야. 이럴 수 있냐고. 그래서 (아주대병원)간다고 했지. 이후에 이 이사장님은 죄송해서 연락도 못드리고 있지요."

이후 아주대병원에서의 그의 시간은 남들과 달랐다. 밤 10시가 넘도록 진료를 보는 일도 다반사고, 환자들이 6개월에서 1년씩 대기하는 상황이니 11년 동안 제대로 된 휴가 한 번 가지 못했다.

-이력을 보니 대한통증학회와 대한통증연구학회 회장을 모두 맡으셨더라구요. 두 단체의 성격이 다소 다른 것 같던데 말이죠.

"2006년 대한통증학회장에 취임하면서 한 가지 구체적인 목표를 세운게 있어요. 통증의학과 신설이에요. 통증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후학을 체계적으로 양성하려면 학과신설이 가장 빠른 길이니까요. 그런데 현실의 벽이 너무나 높더라구. 법도 바꾸어야 하고 타 진료과목의 동의도 필요하고···. 통증학회장만으로는 안되는겁니다. 그래서 치과·신경외과·정형외과 등 훨씬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통증연구학회의 회장으로 취임한겁니다. 다른 분야의 더 많은 의료인들에게 통증의학과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생각을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결국 현재는 포기상태에요."

(김 원장은 개인적으로 성취한 명성 만큼이나 의료계의 부조리와 병원의 폐쇄성에 절망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는 다 마음 속에 묻었다고 했지만, 의료계의 발전을 고민하는 정책당국자라면 김 원장과 만나야 한다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었다.)

통증의학 저변 확대를 위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깊은 체념에 빠졌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하고 열어 둔 길에서 발을 뺄 수도 없었고, 발을 빼게 주변이 놔두지도 않았다.

-결국 수원에 김찬병원을 열었는데, 원장님의 역정을 살펴보면 병원설립에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듯 한데요.

"현실의 벽을 실감하고 나니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히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맘 편히 살자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런데 그때 한 후배가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마취과 의사들은 여전히 독립적이지 못한 환경 속에 있는데, 그런 후배들의 처우를 생각해서라도 부디 나서달라고 말이죠. 비록 통증의학과를 개설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제대로 된 진료시스템을 갖춘 병원급 통증센터가 속속 생겨나면 이 역시 통증 분야의 저변을 넓히는 데 일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가지 않은 길을 다시 한 번 걸어보자고 마음먹고, 지금의 김찬병원을 만든거예요. 최초의 통증클리닉센터 말이지."

2014년 수원에 개원한 국내 최초 통증센터 '김찬병원'은 통증의학이라는 블루오션을 찾아냈지만, 외로운 항해를 감내했던 김 원장의 인생역정이 만들어낸 결실인 셈이다. 그는 이 곳에서 나머지 항해를 계속 이어갈테고, 항해의 목적은 '통증의학의 안착'이다.

김찬병원에는 국내 의료계뿐 아니라 일본, 중국 등지의 의료 관계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국내의료계는 김찬병원의 성공여부를 주시하고 있다.

김 원장은 올해로 만 67세다. 그는 이제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조금씩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선진국에 가장 부러운 점이 기부문화가 활발하다는 점이에요. 어떤 형태가 됐든 기부에 동참하며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구요, 개인적으로 유기견센터를 만들고 싶은 생각도 갖고 있어요."

유기견센터. 난데없지만 이 꿈까지 덧붙이기엔 이미 들은 그의 인생역정만으로 벅차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방사선 치료를 하느라 검게 그을린 김원장의 두 엄지 손톱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인터뷰에 동행한 황 기자는 기사를 정리하면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떠올랐다고 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김 원장이 스스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택한 덕분에 여기까지 왔지만, 외로운 길을 혼자 걸을 숙명까지 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김찬병원 인터뷰4

■김찬 원장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前연세대 원주의과대학 신경통증클리닉 부교수
▲前대한통증학회 회장
▲前대한통증연구학회 회장
▲前아주대학교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
▲現김찬병원 대표원장

/대담=윤인수 편집부국장 isyoon@kyeongin.com · 정리=황성규기자 homerun@kyeongin.com ·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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