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고택기행

[인천 고택기행·3] 창영초등학교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세운 학교 '인천 3·1운동' 시작점

{ 창영초 : 1907년 남촌에 주민성금으로 지어진 인천 최초 공립보통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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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성금으로 1907년 세워진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가 지금의 창영초등학교다. 인천지역 교육사에 이정표를 세운 곳이며, 3·1운동, 광복, 그리고 6·25전쟁까지 한국 근대사를 대표할 수 있는 건물로 역사적으로 보전할 가치가 높다.

서울 3·1운동 소식에 학생들 나흘간 '동맹휴학' 저항… "인천지역 교육사 이정표"
전형적 옛 학교 건축양식 보존가치 一자 복도·커다란 창문 감시 목적 일본식 운영
건물 외벽 곳곳 시멘트 덧칠, 경찰 임시청사 사용시 부역자 처벌 '총탄 자국' 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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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체결한 조일수호조규에 따라 1883년 강제로 개항된 인천항 일대에는 일본인과 중국인, 미국인 등 외국인들이 들어왔다. 그곳에 살던 조선인들은 지금의 창영동 주변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된 이후 사람들은 중국인과 일본인이 사는 지역인 철도 북쪽에 위치한 조계지 일대를 북촌, 남쪽 조선인 마을이 밀집된 지역은 남촌이라고 불렀다.



북촌과 비교하면 남촌지역 주민들의 생활은 모든 면에서 열악했다. 장마철이 되면 마을과 도로가 모두 진흙밭이 됐고, 배설물도 제때 처리해주지 않아 악취가 진동했다. 아이들의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인 밀집지역에는 일본인 자녀의 교육을 위한 일본인 아사히 소학교(인천심상보통학교·현 인천신흥초등학교)가 개항과 동시에 세워졌지만 20년이 넘는 기간 조선인 마을에는 제대로 된 학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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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알릴 때 쓰이던 종.

이에 당시 남촌 주민들은 인천부윤(일제 강점기 인천부의 행정수령)에게 학교 건립을 요구했고, 주민들의 성금을 모아 1907년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지게 됐다. 이 학교가 인천 창영초등학교다.

15일 오전 배다리 등 인천 동구 일대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인천영화관광경영고등학교 이성진 교사와 함께 인천 동구에 위치한 창영초등학교를 찾았다. 교문을 들어서자 붉은 벽돌로 세워진 2층 건물이 맞아주었다. 건물 앞쪽에는 이곳에서 인천 3·1운동이 시작됐다는 안내석이 세워져 있다.

1919년 3월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학생들은 서울에서 3·1운동 소식을 듣고, 3월 6일부터 나흘 동안 동맹휴학을 결정했다. 거리로 나와 만세운동을 시작한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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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의 증축으로 특이한 모습을 갖게 된 초등학교 내부 계단.

이에 일제 경찰은 학교 측을 압박해 교사들이 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하게 했다. 그러나 당시 3학년 학생 김명진과 이만용 등은 학교 건물로 침입해 교사들이 일본 경찰에 보고하지 못하도록 전화선을 끊고 전화기를 파손시키며 맹렬히 항거했다.

이성진 교사는 "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는 공부를 좀 한다는 인천의 조선인들 모두가 이 학교에 다녔을 정도로 지역 주민들의 자존심이었고, 희망이었다"며 "이곳에서 3·1운동이 시작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남아있는 붉은 벽돌 건물은 1922년에 만들어졌다. 학교를 처음 설립할 때도 주민들의 성금을 모았지만 새로운 건물을 신축할 때도 당시 인근 주민들이 200원을 모아 비용을 지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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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실에 전시된 학교 연혁.

벽체 윗부분은 화강석으로 아치(Arch)형을 이루고 있고, 현관은 근세풍 양식을 띤 무지개 모양으로 꾸몄다. 좌·우 대칭면에 넓은 창을 규칙적으로 배열했고, 지붕에는 그 아래쪽 방을 밝게 하기 위한 지붕 창을 만들어 놓았다.

'손장원의 다시 쓰는 인천근대건축'을 쓴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1920~30년대의 학교 건축 양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건축물"이라며 "학교의 특성상 옛날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 경우가 많아 역사적으로 보전할 가치가 높다"고 평했다.

건물에 들어서자 一(일)자 형태의 긴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교실 복도 쪽에는 커다란 창문이 만들어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대부분 학교들의 특징이다. 조선인들을 쉽게 관리하고, 수업 시간에 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할 목적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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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생긴 피탄자국.

이 때문에 당시에는 모든 학교에 반드시 일본인 교사를 한 명 이상 배치하도록 했다. 조선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학교였지만 철저히 일본식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학교에 다녔던 김석배(29회 졸업)씨는 창영초등학교 100년사 회고록에서 "5학년부터는 황국신민화 정책에 따라 모든 학생들은 국어(일본어) 상용정책으로 학교 내에서는 조선어로 말을 하는 것을 금했다. 어쩌다가 실수로 조선어가 튀어나오면 이를 들은 학생의 고발로 실수한 학생의 이름이 벽에 붙게 됐고, 벌점을 매겨 학업성적표에 반영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건물 외벽을 살펴보니 곳곳에 시멘트로 덧칠한 자국이 눈에 띄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고, 이곳은 경기경찰총국 임시 청사로 사용됐다. 이 때문에 이곳에서는 이후 1·4후퇴 때, 보도연맹에 참여했던 부역자를 처벌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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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당시의 특징이 남아 있는 복도 모습.

이성진 교사는 "시멘트는 부역자를 처리하면서 생긴 총탄 자국을 가리기 위해 바른 것"이라며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이곳에서만 200여 명의 부역자가 사살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전쟁이 끝난 뒤, 학교 주변에는 빈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1950년대 학교에 다녔던 박차영(62)씨는 "학교 앞에 꿀꿀이죽 골목이 있었는데 학교에 다니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것도 못 먹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그러나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공립학교라는 자부심은 대단했다고 한다.

박씨는 "우리 학교 아이들은 일본인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신흥초등학교를 '쪽바리 학교'라고 불렀다"며 "어떻게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잘 살았던 신흥초 아이들에 대한 질투심이었겠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학교에 다닌다는 자존심이 더욱 강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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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영초등학교의 100년을 기념한 창영백년비.

창영초 구(舊) 교사는 20여 년 전부터 수업을 위한 장소로는 활용되지 않고 있다. 마룻바닥이고, 오래된 건물인 탓에 정상적인 수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 측은 지난해 리모델링을 실시했으며, 특별실 등으로 교사를 활용할 계획이다. 20세기 초반 조선인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학생들이 수업을 받던 교실에서 21세기의 아이들이 교육을 받게 되는 셈이다.

이성진 교사는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지역 최초의 공립학교로서 인천 지역 교육사에 이정표를 세운 곳"이라며 "이러한 점을 더욱 부각할 수 있는 작업이 앞으로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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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사용했던 옛날 음향기기.


/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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