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칼럼] 조선 붕당 VS 한국 정당

최창렬

발행일 2016-02-17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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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중단 '결단'·'통치' 국민신뢰 전제돼야
野 "총선용 與정치공학적행위" 비난 설득력 없어
진영논리 여론몰이 '국회-국민' 대립시키는 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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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렬 객원논설위원·용인대 교수
북한의 핵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 안보 이슈가 새해 벽두를 강타하고 있다.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여론은 거의 팽팽하게 갈린다. 개성공단 전면중단에 대해서도 찬반 어느 한쪽으로 공론이 모아지지 않는다. 여론조사 업체와 의뢰기관에 따라 찬반 수치도 갈린다. 안보나 경제 영역의 전문가가 아닌 일부 미디어 연사들의 종일 방송이 여론을 정부 쪽으로 기울게 할 개연성은 상존한다. 여야 정치권이 북한의 도발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서도 사드와 개성공단 이슈에 대해 일치된 국론을 도출해 내지 못하는 상황은 낯설지 않다.

20대 국회의원 선거는 55일 남았다. 그런데 선거구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새삼 호들갑 떨면서 정치권을 나무랄 일도 아니다. 어차피 유권자들은 큰 관심이 없고 역대 거의 모든 선거때도 선거구는 선거를 코 앞에 두고 획정됐으니 하는 말이다. 17대 총선거는 불과 선거일 37일전에 선거구가 확정됐다. 지난 19대 선거 때도 40여일 전에 선거구가 획정됐다. 그에 비하면 아직은 시간이 넉넉하다고 생각하는 19대 국회라고 하면 크게 이상할 일도 아니다. 어차피 선거는 치를테고, 선거무효 소송 등은 차후의 문제니까. 쟁점법안이란 현안들도 여야가 크게 합의 못할 쟁점들도 아니다. 소위 테러방지법과 북한인권법도 마찬가지다.

우리 정치의 수준이 그것 밖에 안 되는 상황은 우리의 시민사회의 수준과도 맞물려 있다. 새삼 사회경제적 격차와 이에 대응하는 시민 및 시민사회를 논한다는 것도 부질없어 보인다. 혼돈과 각자도생(各自圖生)이란 말 만큼 현재 한국사회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도 없을 것 같다. 갈등과 현안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해 가는 방식의 문제의 어설픔은 항상 사회를 갈등으로 내몬다. 옳고 그름과 선악에 집착하는 도덕주의적 관점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야의, 보수와 진보의,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각자도생에서 관용과 타협의 민주주의에 관한 토론은 어딘가 격에 맞지 않고 어색해 보인다. 사안마다 철저히 논리 전개의 방식이 다르고 이의 당연한 귀결로서 일말의 유대와 연대를 찾기 어려운 우리네 삶의 모습은 점차 사회 구성원들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내몰고 있다.

개성공단의 전면중단으로 입주 기업이 입을 피해보다는 엄중한 안보이익을 정책의 우선순위로 둘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전면 부정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개성공단의 중단이 법적으로 정당했느냐는 논란은 어차피 정치의 영역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다 높은 층위의 정치를 왜 우리의 지도자들은 의식하지 않는가. 정치와 통치의 차이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국민이 주인이고, 국민의 위임을 받아 대의제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국가에서도 어차피 지도자의 '결단'과 '통치 행위'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 결단이 사후에라도 국민들의 추인과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정치 일상에서 집권측이 상대를 설득하고 반대자를 납득시키는 지난(至難)한 정치력과 노력에 기반해 왔다는 국민의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개성공단의 갑작스런 중단이 20대 총선거에서 정치적 이득을 챙기려 하는 여권의 정치공학적 행위라는 야권 일각의 비판도 설득력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개성공단이 남북관계에서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실질적인 경제적 효과를 차치하고서라도 갑작스런 중단이 124개의 입주기업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미치는 당혹과 절망 등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개성공단의 중단이 북에 대한 제재의 고삐를 죄고 북의 미사일 도발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정치적 예측의 근거도 과학적이지 않은 상황이다. 오히려 역풍도 예견하는 심모원려(深謀遠慮)는 찾아볼 수 없다. 지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공론화보다는 진영 논리와 선입견에 입각한 여론몰이는 국회를 국민과 은연 중에 대립하게 만드는 언술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정당의 형해화와 정당정치의 실종이 객관과 이성이 전제된 공론화를 막고 있다.

'백성의 하늘은 먹는 것'이라고 했던 맹자와 이에 바탕했던 성리학이 이학(理學)에서 예학(禮學)으로 중심이 옮겨가면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정신은 사라지고 붕당의 권력다툼의 명분으로 전락했던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국정당은 붕당의 긍정적 의미조차도 상실했다. 국가적 이슈를 둘러 싼 갈등을 조정하고 공론을 모아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창렬 객원논설위원·용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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