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면 문학평론가 |
'동주'는 웰 메이드(well-made, 잘 만들어진) 영화다. 이준익 감독의 군더더기 없는 연출솜씨도 그렇거니와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작품을 작가의 삶 또는 작가의 의도를 반영하는 등가물로 보는, 이른바 의도의 오류(intentional fallacy)에도 불구하고 윤동주(1917~1945)의 삶과 시와 영화가 잘 배합됐다. 좋은 영화다.
다행히, 윤동주의 묘를 찾아낸 이가 한국문학연구자들이 아니라 재미교포 현봉학 선생과 오무라 마쓰오(一大村益夫, 당시 와세다대 교수)였다는 부끄러운 사실과 암흑기 저항문학의 상징이었던 윤동주가 히라누마 도주(平沼動柱)로 창씨개명을 했다는 불편한 진실도 흥행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저예산 영화인데다가 자칫 서사의 부재에 빠질 수 있는 소재상의 한계도 단편적인 전기적 사실들을, 시퀀스로 만들어 적절하게 배치하고 관객의 감성에 호소하는 시낭송을 통해서 이겨냈다.
또 안소영의 장편소설 '시인/동주'(창비, 2015. 3) 같은 최신 텍스트들이 영화구성에 적잖은 힘을 보태줬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윤동주의 유구한 대중성과 이준익이라는 상표의 티켓파워이다.
여기에 국민정서의 심층을 이루고 있는 반일감정도 다소 도움이 됐고, 윤동주의 오랜 벗이었던 고(故) 늘봄 문익환 목사의 차남 배우 문성근 씨를 캐스팅하는 위트도 돋보였다.
그런데 명백한 작가주의 영화 '동주'에 왜 이런 장치들이 필요한가. 실패의 리스크를 줄이고, 제작비를 건지기 위해서다. 장르문학도 마찬가지다. 장르문학에서 공식들이 계속 반복되는 까닭은 작가가 그렇게 썼기 때문이 아니라 출판업자들의 두려움 때문이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출판사의 이해관계와 안간힘이야말로 장르문학 공식이 지속되는 이유다. 작품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으나 독자들의 특정 장르에 대한 소비의 욕망은 상존하기에 이미 독서시장에서 검증된 패턴과 공식을 반복해서 손님을 끄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르문학의 공식의 다른 이름은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이다.
1972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좌충우돌했을 뿐인데 여기에서 우연히 걸작이 나오고 예술성도 생겨났다는 찰리 채플린(1889~1977)의 고백은, 상품과 예술의 길항과 역설을 잘 보여준다.
역사적 사건이나 작품이 지닌 여러 겹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읽어내는 것을 두껍게 읽기(thick description)라고 하는데, 돼지고기 목살은 두꺼워야 제 맛이듯 장르문학은 이렇게 좀 두툼하게 읽어야 한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창작지원팀장
<저작권자 ⓒ 경인일보 (www.kyeongin.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6] 밋밋한 일상에 주는 위안
-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7] SF 출생의 비밀은 '모방과 오독'
-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9] 로봇의 시대 '윤리헌장' 도입 시급
-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10] 'SF 고전' 권장하는 사회되길
-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11] 한국 초창기 SF문학은 '애국계몽운동'
-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12] 다매체시대의 새로운 문학
-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13] 판타지, 미토스(신화), 데이드림(몽상)
-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14] 세계문학 중심된 '고립성'
-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15] 할리우드 장르판타지 공식 '영웅의 여정'
- [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16] 현실서 독립·분리·혼합 '판타지 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