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감] 이문열 작가

'문학의 진지(陣地)' 부악문원… 문청의 공간으로 지켜졌으면

윤인수·권준우 기자

발행일 2016-03-23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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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15
지난 11일 이천시 부악문원 자신의 집필실에서 작가 이문열이 고락이 넘친 문예인생을 회고하며 활짝 웃고 있다.

살던 집 작가지망생 문학수업 강의실로 첫 개방
이념·정치논쟁 속 문원의미 퇴색… '외로운 싸움'
공적장소 전환해 창작레지던시 유지·활용하고파


작가 이문열이 요즘 고약한 상황에 처했다는 풍문을 접하고, 무슨 일인가 싶어 인터뷰를 청하고 이천 부악문원을 찾은 건 지난 11일이었다. 이문열은 1985년10월5일 이천으로 주민등록을 이전하고 1998년 부악문원을 설립한 이후 31년 가까이 이천 시민으로 살고 있다.

부악문원은 그의 집필실이자 동시대 문청들의 학숙이자 창작공간이다. 그의 생애에서 '이천 시절'은 문학적 성취와 정치적 사변(?)이 버무려진 격랑의 시기였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 '시인(1991)', '선택(1997)' 등 논쟁적 작품을 비롯해 그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변경'(1998)등 주요작품들이 이천에서 탈고됐다.

그에게 부와 명예을 안겨준 초대박 스테디셀러인 '이문열의 삼국지'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문단의 보수우익 대표 논객으로 이념논쟁에 뛰어들었을 땐 선혈이 낭자했던 공간이기도 했다. 2001년 치러진 그의 책 장례식은 치열했던 정치사변의 피날레였다.

그 시절의 부악문원은 이문열에게 외로운 고지전을 감당했던 '참혹한 진지'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그 난리통에 낙향의 염원은 무뎌졌고 이제는 부악문원을 기반으로 이천에 정주할 생각이라 했다. 그런데 그 부악문원이 이제 이문열에게 다른 의미에서 "고약한 일"이 됐다.

-이천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집을 짓고 주민등록을 옮긴게 85년 10월 5일이다. 그 해 봄 대구에서 꽤 좋은집을 팔아 서울로 이주를 했더니 연립주택 살 돈 밖에 안됐다. 그런데 어머니까지 해서 식구가 많았다. 할 수없이 집 근처에 10평 남짓한 집필실을 하나 얻으려니 전세로 1천만원이었다. 계약을 고민하던 차에 이천 사는 친구(조각가 강대철)가 그 돈이면 이천에서 땅 1천평을 살수 있다더라. 촌놈인지라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10평짜리 방보다 땅 1천 평이 훨씬 나아보이더라. 그 때 땅을 알아보고 친구의 빈 집에서 겨울을 났으니 이천에 머문게 32년째인 셈인가?"

-당시 거주 여건이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았을텐데.

"맞다. 처음에 왔을 때는 전기도 없었고 전화기도 마을 이장집에 하나 있었다. 서울에서 전화가 오면 구판장 마이크로 '이문열씨 전화왔어요' 그러면 뛰어내려가서 전화를 받고 그랬지. 이 마을(이천시 마장면 장암리)이 재미있는 마을이다. 설봉산에서 보면 하늘 아래 첫 마을인 셈인데 6·25때 인민군이 여기에 마을이 있는 지도 몰랐다더라."

친구 덕분에 지금은 상당한 이익을 본 셈이다.(웃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땅만 샀으면 정말 엄청나게 남았겠지. 한 100배 쯤 될까.(부악문원 대지는 2천400평이다.) 그런데 살면서 집을 짓고 문원을 조성하는데 지금 땅값 만큼 들였으니 장사의 이문을 따질게 없겠다."

-처음부터 부악문원 세울 생각이었나.

"처음엔 집을 짓고 혼자 있다가 전업작가나 문학지망생들에게 문학수업을 하는 공간으로 개방했던게 문원의 시초다. 그러다 95년에 공사를 시작해 98년에 정식으로 부악문원을 열었다. 그때 식구들도 모두 이곳으로 왔다. 부악은 설봉산의 옛 이름이다. 설봉이라는 이름이 듣긴 좋은데 꼭 기생 이름 같은 게 너무 낭창낭창한 느낌이라 옛이름을 쓴거다.(부악은 부아악의 줄임말로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업은 형상의 산이름. 전국 각지에 같은 이름의 산들이 많다.)"

-이문열의 문학인생에서 이천, 부악문원은 어떤 의미인가.

"글쎄. 그런 의미를 따지기에는 이천 거주 자체가 우연의 소산이었다. 처음엔 고향(경북 영양)가는 길인 이천에 집을 구해놓고 15년 가량 있다가 고향으로 가자는 마음이었다. 우리 또래는 은퇴하고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상식이었다. 95년부터 시작된 고약한 싸움, 그것이 아니었으면 아무리 늦어도 10년 전 쯤, 예순 쯤에는 귀향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약한 싸움이 시작되면서, 내가 문학으로 받았던 것들을 문인들에게 베풀 수 있는 문원이란 장소의 의미까지 퇴색되면서, 여기라도 지키고 있지 않으면 내가 완전히 사라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홀로 고군분투하는 진지가 됐고 패퇴해 물러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싸움이 한창 격화되고 있을 때 이미 50대 중반이었다."

-90년대 중반 부터 시작된 이념논쟁, 정치논쟁의 계기는 무엇이었나.

"사실 원인은 오랜세월 축적되었던 것이고, 싸움의 출발은 문화 헤게모니 개념에서였다. 내가 보수 우파라고 커밍아웃했던 90년대 중반은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두 개의 가치, 산업화라는 물적기반의 근대화 가치와 정치적인 자유화와 민주화 가치의 충돌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그런데 유신시대와 권위주의적 폭압 정치가 지속되는 사이에 문화진지의 한 축인 보수계열이 진보 쪽으로 쏠려버렸다. 그래서 우파임을 자인하고 집중포화를 맞았다. 당시 보수를 자인하는 문학인이 흔치 않았고···."

이문열은 84년 발표한 '영웅시대'로 보수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진보적 페미니스트들은 그의 97년 발표작 '선택'을 남성우월주의자의 독백이라 비난했다. 급기야 2001년 진보세력을 겨냥한 홍위병 발언으로 책 장례식을 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치열한 진영 대결이 한창인 시절에도 많은 문인들이, 심지어 진보진영과 호남 출신 문인들까지 부악문원의 식객(?)으로 거주하며 작품을 썼고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부악문원을 통해 등단한 문학지망생도 십수명이다. 그는 이들의 이름을 거명하기를 꺼렸다.

그들이 원치 않을지도 모르고, 부악문원과 그들의 인연을 밝히는게 여전히 그들에게 부담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 시절의 상처는 여전히 그에게 간단없는 통증을 안겨주고 있었다. 진영대립은 인간을 통섭하는 문학에도 불통의 벽을 세운 것이다. 그는 "참혹한 현실"이라고 했다.

-부악문원과 이천시절은 작가 개인은 물론 한국문단사 유의미한 시공간이다. 그런데 부악문원 때문에 고민이 깊다고 들었다. 왜인가.

"솔직히 말해 초창기에는 부악문원이 나의 것이지 모두의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 수록, 5년 전 무렵부터는 중압감이 생겼다. 예전만큼 강한 적은 없어진 것 같고, 이념적 적대감도 무뎌지면서 고향 갈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니 부악문원이 걸렸다. 고향으로 가려면 여기를 처분해 일부는 고향으로 일부는 서울로 옮겨야 했다. 그런데 부악문원 출신 젊은 친구들이 '선생님 이걸 꼭 없애야 합니까? 형편이 어려우면 모르겠지만 괜찮으면 그냥 두시지요'라고 하더라. 이 장소가 없어지는 것이 안타깝다는 거지. 그 말이 마음에 걸렸고, 당시 형편이 문원을 유지할 정도는 됐고 그렇게 지금까지 온거다. 그런데 지금은 이것이 정말 내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든다. 문단은 내가 여기서 30년을 지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이것을 팔아 다방이 될지 술집이 될지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뀌어도 모른체 하는 게, 내가 완전히 망했다면 몰라도 그것이 할 짓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 자체도 시들해져버렸다. 고향에 가려면 더 전에 갔어야 했다. 지금 간다면 죽으러 가는 것뿐이 더 되겠는가."

부악문원이 그에게 고약한 일이 된 것은 고향갈 생각을 접고 부악문원을 공적 공간으로 인식한데서 비롯됐다. 공적 공간으로 전환하면서도 공간 유지비용을 계속 부담한다면 힘에 부친다고 털어놨다. 부악문원을 창작레지던시로 유지하려면 1년에 1억원 가량 드는데 일부 정부지원을 받아도 본인 부담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부악문원을 이천시의 문화콘텐츠로 유지한다면 이천시의 지원도 가능한 얘기 아닌가. 가령 문학관 형태로….

"작가의 이름을 딴 기념관이나 문학관은 내가 싫어하는 형태 중 하나다. 그것은 죽은 뒤에나 하는 것이지 사람이 살아 있는데···. 다만 부악문원을 공적인 공간으로 활용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고민하다가 작년에 조병돈 이천시장과 남경필 도지사를 만나 의논도 했다. 조 시장은 부악문원 매각은 안된다며 시 혼자 힘으로는 어려우니 경기도와 방안을 찾자 했고, 남 지사는 법규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돕고 싶다고 하더라. 고민의 진행은 현재 여기까지다."

-다른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예산을 들여 유명작가나 작품명을 딴 기념관이나 문학관을 지어 문화콘텐츠로 활용하는 사례가 많다.

"그렇다. 그런데 지방자치단체가 만든 그런 곳들의 사례로 부악문원도 거론되고 있으니 참 할 말이 없다. 물론 이천시에서도 부악문원을 공적인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방안을 달라고 하지만 내 입으로 뭘 해달라는게 영 그렇다."

-사적 재산인 부악문원을 문화적 공공재로 전환하기 위해 예산을 투입하는게 문제로 보이는데 선례가 없나.

"그래서 부악문원 땅 일부를 제공하고 거기에 시가 집을 하나 지어 시의 소유로 하면 좋겠다고 가족들과 결론을 내렸는데 이야기 단계에서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다."

흑백
부악문원 제공

최근 이천지역 문화예술계에서는 부악문원을 이천시의 문화콘텐츠로 활용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다. 이천시도 이에 호응해 부악문원 활용방안을 그에게 요청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이문열 본인은 이런저런 요구를 하기 난감하단다. 셈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경북 산촌 양반의 체모, 혹은 문학과 돈을 분리하던 서생적 풍모의 손상을 꺼려하는 느낌이었다. 고약한 일이겠다 싶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경기도에 창작공간을 마련해 활동하지만 지역과의 소통이 부족해 보인다.

"맞다. 처음엔 여기 분들과 자주 모일 구실도 없고, 몰두해야 할 일들도 있었고, 삶의 환경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으니 서먹서먹했던게 사실이다. 그래도 내 인생의 가장 오랜 기간을 이곳에서 살았고 이제는 마을 사람 모두와 알고 지낸다. 2001년 진보진영이 부악문원에 책 상여를 메고 장례식 퍼포먼스를 벌일 때,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마을 입구에서 막아냈다. 그때 알았다. 내가 여기 사람이 됐구나."

-얼마전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어느 매체에서 일종의 부채감 때문에 맡았다고 표현했던데.

"그 기자가 과장을 한거지. 특별히 시간을 많이 내지 않아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맡았다. 2011년 최고은 작가가 생활고로 숨진 사건을 계기로 설립된 재단인 만큼 설립 취지에 맞는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처음엔 작가 1인당 지원금이 60만~70만원 정도였는데 지금은 지원 인원이 늘면서 지원금액도 형편없어진 모양이다. 예술활동증명서를 내는 것도 어색해 보이고…. 예술활동을 증명할 정도면 어려운 사람이 아닐 경우가 많다. 예술인 복지가 아니라 예술진흥으로 변질된 듯한 느낌인데 이런 걸 바로잡을 생각이다."

-요즘 80년대를 정리하는 작품, 변경의 후속작을 집필중이라고 들었다.

"골치 아프다. 뜸을 너무 오래 들였고 나는 늙어버렸다. 그러는 동안 역사가 왜곡된 인식으로 굳어지고, 주장과 선동이 역사가 되어간다는 느낌이다. 글을 쓰면서도 자꾸 맥이 빠진다. 예를들어 작품 말미에 김영삼이 나오는데 그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그렇다. 내가 보기엔 그의 가치(업적)는 민주화가 아니라, 충돌과 피로 희석시키지 않으면 안될 과거를 공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데 있다. 김영삼이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그를 민주투사로 과잉 투영해 해석하는 것이 내 인식과는 맞지 않다. 한 시대는 똑같은 가락의 반복이 아니라 화성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자꾸 단음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계속 걸리니까 글 쓰기가 어렵다."

-전 시대를 정리해 현 시대의 독자에게 전달하는 일은 늘 고민스럽지 않은가. 요즘처럼 책을 외면하는 세대에겐 더욱 지난한 일 아닌가.

"이야기하기 편한 대상은 예전의 독자들이 맞다. 그러나 전시대의 기록은 중요하다. 기억에는 개인적 기억과 그것이 공유되는 사회적 기억, 후세에 기록될 역사적 기억이 있다. 그런데 기억은 변경되고 조작된다. 새 작품을 준비하는 10년 동안 내 주변의 사회적 기억을 확인해왔는데 굉장한 왜곡과 조작이 있었다. 술에 취해 경찰과 치고받은 젊은 시절의 취객이 장년이 되어서는 전두환 욕을 했다가 경찰에게 맞은 민주화 투사로 변신하는 식이다. 기자 시절 내가 파출소에서 빼준 친구 이야기인데 이런 사례가 무수하다. 독자가 어떻게 읽느냐 보다는 내가 그 시대의 사회적 기억을 어떻게 복원하고 해석하느냐가 심각한 고민이다."

-이제 조금은 너그러워질 연배다.

"맞다. 어떤 것들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이문열과의 대담은 4시간 가량 물 한잔 없이 진행됐다. 대화가 모두 끝난 뒤 그가 말했다. "이런 손님에게 물 한잔 안드렸네." 올해로 68세인 이문열은 여전히 집중하는 청년이었다. 이제 이천시민과 경기도민이 이문열을 변경의 구속에서 풀어주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가 이문열은?

1948년 출생
1970년 서울대 국어교육학과 중퇴
1978~1980년 대구매일신문 기자
1979년 오늘의 작가상
1982년 동인문학상
1987년 이상문학상
1992년 현대문학상
1992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92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수훈장 1993~1996년 세종대 교수
1998년~ 부악문원 대표
1998년 21세기문학상
1999년 호암상 예술상
2009년~ 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2009년 대한민국예술원상
2012년 동리문학상
2015년 은관문화훈장
주요작: 사람의 아들, 황제를 위하여, 젊은날의 초상, 금시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영웅시대, 변경 등

대담/윤인수 부국장 (문화부장) isyoon@kyeongin.com · 정리/권준우기자junwoo@kyeongin.com ·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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