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고택기행

[인천 고택기행·13] '우정의 상징' 舊 인천우체국

근대 통신 시작점 인천… 조선의 '우정(우편행정)' 싹트다

{ 舊 인천우체국 : 1923년 일본 인천우편국 신축 이전 '現 인천중동우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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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백범의 사형집행 막아낸 서울~인천 전화개통 등
통신 발달의 중요성 절감케한 수많은 사화 간직
월남 권유로 1884년 우정총국 인천분국 문 열어
조선 통신기관 탈취한 일본이 지금 자리에 신축
원형기둥·외벽 거친 돌 마감 등 '절충주의' 양식
예산 부족으로 '외부 보수' 못해 흉한 모습 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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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의 백범 김구(1876~1949)는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 육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인천 감영에 수감됐다. 수감 1년 후 사형을 선고받은 백범은 사형 집행 당일 정부의 사면을 알리는 급전(急電)을 받으며 죽음 직전에서 살아났다.

집행 당일 서울-인천 간 전화가 개통됐으며, 그 덕택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범의 일화는 통신의 중요성을 절감케 한 역사적 사건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이처럼 근대 통신 도입 과정에 얽힌 수많은 사화(史話)를 간직한 인천은 근대 통신사(史)의 시발지였다.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도입된 근대 통신 수단은 우편으로, 그 시발지 또한 인천이었다. 월남 이상재(1850~1927)는 1880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서 4개월간 머무르며 일본의 우편제도를 배웠다.

월남은 일본의 우편제도를 조정에 보고하면서 우체국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해 국내 우편제도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84년 조선 조정은 우정총국 인천분국을 열면서 월남을 초대 분국장으로 임명했다.

연중기획 고택기행 인천중동우체국2
1923년 우편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지은 근대식 건물로서 당시의 행정관청으로 웅대한 규모였다. 건립 당시 명칭은 인천우편국이었으며, 1949년 8월에 인천우체국으로 개칭되었다.

우정박물관의 자료에 따르면, 인천분국 창설 당시 우정총국의 일본인 고문이었던 오비 사케아키는 서신을 보내 "우정(우편행정)은 참으로 공적으로 보나 사적으로 보나 천고에 없던 편리한 방법입니다. 경하스런 마음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신중한 마음으로 직무를 집행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축하했다고 한다.

하지만,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서울과 인천의 우편업무는 20여일 만에 중단됐다.

그 이전인 1882년 일본은 자국민의 통신 편의를 위해 영사관(현재 인천 중구청 자리) 내 설치한 간이 우체국에서 우편 업무를 취급했다.

1891년 서울에 '인천우편국 경성출장소'를 설치하면서 일본 통신기관이 늘기 시작했고, 1894년 국내 일본 우편국 수는 29개로 늘었다. 갑신정변으로 중단된 인천시민을 위한 우편 업무는 인천우체사(郵遞司·경동 225번지)가 1895년 설립되면서 시작된다.

3년 뒤 인천우체사는 내동 103번지로 신축 이전했다. 조선 정부는 일본에 우편국의 철폐를 요구했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한일통신기관협정 체결을 강요함으로써 조선의 통신기관을 탈취했다. '우체사'의 명칭도 일본식인 '우편국'으로 바뀐다.

일본의 인천우편국(구 인천우체국)은 1923년 현재의 자리인 인천 중구 항동 6가 1로 신축 이전했다. 우체국 영선계에서 건축을 담당했으며, 착공에서 준공까진 1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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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인천우체국이 연수구 연수동으로 이전한 후 건물은 대수선 공사를 하고 인천중동우체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내부 모습.

평일 오전에 찾은 구 인천우체국(현 인천중동우체국)은 다소 한산했지만, 항동 교차로 면에 좌우로 펼쳐진 듯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면서 행인의 시선을 잡아끌기 충분했다.

한국전쟁의 포화속에서도 지붕 일부만이 파손됐을 뿐 거의 온전히 살아남은 인근의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인 구 인천우체국은 당시 행정 관서 중 가장 웅대한 건물이었다.

모서리에 돌출된 출입구를 통해 실내로 들어서면 여느 우체국과 똑같은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2003년 인천우체국이 연수구 연수동으로 이전한 후 건물은 대수선 공사를 하고 인천중동우체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천중동우체국 관계자는 "대수선 공사를 하기 전 건물 내부는 전부 목재였다"고 했다. 낡은 목재들을 떼어내고 현대식 마감재로 내부를 보완한 것이다.

건물 외부는 고풍스러우면서 화려하다.

문화재청의 자료에 따르면, 구 인천우체국은 당시 유행하던 절충주의(Eclecticism) 양식을 단순화했다.

사거리에 면한 모서리에 낸 주출입구 양쪽에 큰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기둥머리 없는 작은 기둥을 여러 개 받치면서 돌출시켰다. 당시 관공서 건물은 대체로 둥근 돔 모양의 탑옥을 올려놓은 것이 일반적인데 이 건물에서는 생략됐다.

또한 면을 거칠게 다듬는 러스티케이션(Rustication) 기법을 활용한 화강암 기단 위에 벽돌로 쌓은 뒤 모르타르로 마감해 2층 석조 건물의 외관을 연출했다.

근대 건축 전문가인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주 출입구를 사거리에 면한 모서리에 두고 그곳을 정면으로 처리한 방식은 다음 블록에 있었던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 건물과 같다"면서 "다른 점은 조선상업은행 인천지점의 입구는 모서리의 곡선을 따라 설치했고, 인천우체국의 입구는 앞으로 돌출시키고 직선형으로 처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서 "그리스 양식에서 나타나는 원형 기둥, 르네상스 양식의 거친 돌로 마감한 기단부에서 절충주의 양식이 보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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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선 신포역에서 접근할 때 만나는 모서리이다. 좁고 긴 수직 창문선들과 어울려 나눔의 변화를 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칠이 벗겨진 벽면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구 인천우체국은 1982년 3월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됐다.

문화재로 지정되고 만 34년이 흐른 현재, 건물 외부 표면은 군데군데 일어나 있다. 칠이 벗겨져서 떨어진 부분도 있으며, 수포가 생긴 것처럼 부풀어 올라 있는 것도 많다. 문화재로 지정됐기 때문에 함부로 손댈 수 없으며, 일반 페인트가 아닌 가격이 몇 배는 비싼 특수 페인트로 칠해야 하는 점 등이 보수에 발목을 잡고 있다.

현재 인천시에 문화재 관련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에 최소 수년 동안은 이같이 흉물스런 모습을 더 봐야 한다.

우정박물관의 자료에 따르면, 인천우체사 시기의 주요 업무는 인천의 우편물과 서울의 우편물을 교환해 집배하는 것이었다.

경인선 철도 개통 이전까지 인천우체사와 한성우체사의 우전인(郵傳人)은 매일 오전 9시에 우편낭을 메고 오류동까지 걸어갔다. 두 우전인은 오후 1시께 오류동에서 우편낭을 교환해서 돌아갔다. 하루 평균 9시간 이상이 걸린 행보였다.

구 인천우체국은 당시 우편낭에 담긴 지역민의 수많은 사연과 함께 인천 우전인들의 애환을 품고 있는 건물이다. 질곡의 인천 우정사(史)를 간직하고 있는 구 인천우체국의 외부 보수는 이른 시간에 해결돼야 할 것이다.

최연주 인천중동우체국장은 "인천우체국은 우리나라 우편업무를 잉태한 중요한 곳이며, 선배 우정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스민 곳"이라고 설명했다.

/글 =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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