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지진의 포탄 맞은 소나무. /계산여중 제공 |
파괴된 초지진, 초지돈대 복원때 명명
성벽·소나무 포탄 자국 선연히 남아
인천 강화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제일 처음 만들어진 것이 1970년에 세워진 강화대교입니다. 이전까지는 김포의 문수산성 초입에 있는 나루에서 강화의 갑곶돈대 앞으로 배를 타고 건너가야 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답사 문화'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강화도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게 됩니다. 특히 1995년 강화도가 경기도에서 인천시로 편입되면서 인천시민들의 강화행도 많아지게 됩니다. 이런 수요에 맞춰 강화도 남쪽에 새로운 다리를 놓게 되는데, 그것이 2002년 초지진 옆에 세워진 초지대교입니다.
강화도는 수도를 지키는 국방 요충지였기 때문에 많은 군사시설이 들어섭니다. 대표적인 것이 12진·보와 53돈대이죠. 그중에 외부의 세력들이 한양으로 들어가기 위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초지진이었습니다.
외세는 초지진을 넘어서야 강화도와 한양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조선의 입장에서는 초지진에서부터 적들을 막아내야 했던 것입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 육전대(해병대)의 침략을 제일 먼저 받았고 1875년 일본의 운요호 사건 때도 무차별 포격을 받았습니다.
현재 우리가 보는 초지진은 사실 초지돈대입니다. '진'이라는 군사시설은 종4품인 만호와 같은 지휘관이 있던 제법 큰 부대입니다. 지금 초지진처럼 작은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이에 비해 '돈대'는 진과 보에 예속된 작은 규모의 방어시설이었습니다.
요즘의 분대 규모였던 돈대는 최전방에서 적의 활동을 탐지하고 적을 먼저 제압하는 곳이었습니다. 옛 지도를 보면 현재의 위치에는 분명 초지돈대가 있었고 상급 부대인 초지진은 북서쪽의 언덕 위에 있습니다.
하지만 초지진은 현재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돼 그 자리를 알 수 없어 초지돈대를 복원하면서 초지진이라고 명명했던 것입니다.
초지진에는 신미양요와 운요호 사건의 상처를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성벽 아랫부분에는 당시의 포격으로 깨진 성 돌이 그대로 남아있고, 두 그루의 소나무에도 포탄 맞은 자국이 선연히 남아 있습니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조선침략을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자 메이지 유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시다 쇼인은 일본이 국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취하기 쉬운 조선, 만주, 중국을 무너뜨려 복종시키고 조선과 만주에서 경제적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정한론(征韓論)'이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었습니다. 통상 수교 거부정책을 추진했던 대원군 세력이 물러난 조선의 정세를 기회로 여기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조선에 대해 약간의 힘과 압력을 가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강제로 일본을 개항시켰던 미국의 포함외교 전술을 받아들이고 신미양요 때 미군이 작성했던 해도와 강화도의 여러 정보를 얻었던 일본은 자국이 미국에 당했던 그대로의 방법으로 조선을 개항시켰던 것입니다.
/이제은 계산여중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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