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1] 안성 돌미륵

주민, 관광객 오가는 발길잡는 '무심한듯 친근한 존재'

민정주 기자

발행일 2016-08-17 제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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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취재_궁예미륵3
1 안성 기솔리 국사암의 궁예미륵이라 불리는 세 미륵상은 궁예가 안성 죽산에 머물며 스스로 미륵이라 칭했다는 이야기로 전해지며 정식명칭은 석조삼존불상이다. 코부분이 없는 이유는 코를 긁어 가루로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때문이다.

대부분 고려때 건립된 미륵상 지역내 16개·유허지도 2곳 있어… '투박·단순·거대' 특징
죽산에 머물던 궁예 미륵불상 건립과 연관·험상궂지않은 삼존불 구도 국사암 뒤쪽 자리
희망의 신앙으로 수용… '코 갈아 마시면 득남' 등 민중 염원 더해진 많은 이야기 전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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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을 살려준 나무꾼의 후손은 훗날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오성과 한음은 조선시대 명신이지만, 우리 기억에는 재치와 익살꾸러기로 남아있다. 비만 오면 우는 청개구리 이야기는 누구나 한번 쯤 들어본 친숙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발원지가 경기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경인일보는 경기문화재단과 함께 경기도의 숨겨진 문화유산을 찾아 나섰다. 경기학연구센터는 올해 '경기도 31개 시·군 문화원형 상징 선정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기도 문화의 원형이 되는 유산을 찾고, 유산의 가치를 현재에 되살릴 방안을 모색한다.

이로써 천년 경기의 문화저력을 재발견하고 경기도의 위상을 현양하고자 한다. 본지는 15차례 대표 문화원형을 소개한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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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유형문화재 37호인 매산리석불입상.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여름 한낮에, 누군가 생수 한 병을 두고 갔다. 그보다 더 일찍 차려졌을 떡이며 과일이 상한데 없이 정갈하다. 태평미륵 제단 앞은 사철 정성이 모인다. 오가던 마을주민이 한 번씩 들여다보고, 일부러 찾아온 관광객도 있고, 주변 식당을 찾아온 객들이 멀리서 발견하고 구경 오기도 한다.

태평미륵의 정식명칭은 매산리 석불입상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37호다. 미륵당이라 부르는 높은 누각 안에 모셔진 높이 3.9m의 석조 보살상으로 고려 초에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눈이 길고 입은 작다. 목에는 번뇌, 업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얼굴에 비해서 체구는 다소 작고, 좁은 어깨는 조금 처져있다. 두 손의 구부러진 모양이 두드러져 보인다. 사찰에서 보던 불상과는 다르게 투박하고 단순하고, 거대하다. 이것은 안성 미륵의 특징이다.

태평미륵은 여수에서 용인까지 이어지는 17번 국도에서 500여m 떨어진 곳에 있다. 오래전에는 한양에서 부산까지 연결된 영남대로의 길목이었던 곳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누구나 잘 볼 수 있을 만큼 큰 돌미륵이 서 있다. 안성은 예로부터 돌미륵의 고장으로 알려졌다.

안성에는 16개의 미륵불상이 남아있다. 유허지도 두 곳이 있다. 대부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안성에 유독 돌미륵이 많은 것은 지역적 특성과 더불어 불교의 전파과정과 연관이 있다. 안성은 온갖 것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남에서 개성이나 한양을 가려면 안성을 지나야 했다.

한양에서 남쪽으로 갈 때도 마찬가지다. 갓도 고쳐 쓰고, 여장도 다시 꾸리던 곳이다. 매일 장이 서고, 사람이며 물건이며 돈이 넘쳤다. 통로라는 것이 그렇듯, 외침이 끊이지 않았다. 고구려 남쪽 경계선이었고 삼국시대 영토 싸움이 숱하게 벌어졌다.

미륵취재_궁예미륵6
궁예미륵

그리고 궁예가 있었다. 궁예는 안성 죽산에 머물며 스스로를 미륵이라 칭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궁예미륵 불상이 건립된 것은 이와 연관이 있다. 안성문화원 소병성 부원장은 "삼국사기 궁예전에 따르면 궁예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법명을 지어 사찰을 순례했다"며 "안성은 신라 못지않게 불교가 성장했는데 이는 궁예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궁예미륵의 정식명칭은 석조삼존불상이다. 기솔리 국사암에 있다. 국사암은 법상종의 사찰로 쌍미륵사에서 국사봉쪽으로 2km정도 오르면 나타난다. 암자 뒤쪽으로 세 미륵상이 서 있다. 궁예미륵이라고 하지만 험상궂지는 않다. 크기도 작고 단순하게 조각돼있다. 중앙에 궁예를 둔, 삼존불의 구도를 지니고 있는데,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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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미륵사의 거대 불상인 쌍미륵

쌍미륵사에는 거대불상 한 쌍이 사찰을 굽어보고 있다. 두 미륵석불입상 중 체구가 굵고 약간 큰 미륵을 남미륵이라 부른다. 5.4m 높이에 둘레가 4m에 이른다. 남쪽에 있는 날씬한 미륵은 여미륵이다. 여미륵도 높이가 5m, 둘레가 3m다. 중생의 모든 불안을 없애 주고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 손모양을 하고 있다.

미륵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56억7천 만 년이 지나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는 미래의 부처님이다. 중생을 구제할 미륵이 오면 세계는 이상적인 국토로 변해, 땅은 유리와 같이 평평하고 깨끗하며 꽃과 향이 뒤덮인다고 한다. 인간의 수명은 8만4천 세나 되며, 지혜와 위덕이 갖추어져 있고 안온한 기쁨으로 가득 찬다. 이러한 미륵불신앙은 우리나라에서 희망의 신앙으로 수용됐다. 백성들은 국가의 풍요와 안락을 미륵에게 빌었던 것이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미륵신앙에는 더 깊은 민중의 염원이 더해지면서 많은 이야기를 지니게 됐다. 대농리석불입상(대농리 미륵)에는 마을 사람들이 미륵의 위치를 옮기려 하니 오히려 미륵 불상이 땅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안성땅에 힘이 세고 큰 장수가 있었는데 실수로 아양미륵을 다치게 해 전장에서 사망했다는 이야기는 백성들이 미륵에게 가졌던 경외감을 드러낸다. 돌미륵의 코를 갈아 마시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도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지금까지 연구된 바로는, 안성미륵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나말려초(羅末麗初)의 미륵사상을 계승하면서도 궁예와 연관돼 독특한 안성의 미륵불상으로 발전했다.

거대불의 특징은 고려초기 불상의 일반적 특징이고 발이 땅에 묻혀있는 것이 미륵불상이 갖는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한다면, 형태가 소박하고 서민적인 것은 안성미륵이 지닌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호국정신과 결합된다는 점 또한 안성미륵신앙의 특징이다. 태평미륵에 얽힌 이야기 중 하나로 1235년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죽주산성의 방호별감으로 있었던 송문주 장군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몽고군의 남진을 저지한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태평미륵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안성 미륵에 관한 연구는 충분하지 않고, 그 가치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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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미륵

소병성 부원장은 '안성 사람들이 돌미륵을 대하는 태도는 형제지간과 같다'며 돌미륵의 가치를 설명했다.

그는 "매일 같이 있으니 특별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무심한 것 같지만 전혀 거리감없이 친근한 존재"라며 "60대 이상의 안성 사람치고 돌미륵 앞에서 손 한번 안 모아보고, 고개 한 번씩 안 숙여본 사람 없고, 1년에 한두 번은 향불을 피운다"고 전했다.

이어 "돌미륵을 향한 마음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것이고 돌미륵은 안성의 역사, 종교, 민중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며 "안성의 문화원형으로서 더 연구하고 가치를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사진 =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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