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칼럼] 우리는 고래보다 열등하다

이충환

발행일 2016-08-31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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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쪽에 연민 느껴 보호해주려는 혹등고래 마음
기절한 택시기사 놔둔채 골프백 챙겨 떠난 사람들
도덕적 의무까지 법으로 강제하는 사회돼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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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환 인천 시청자미디어센터장
단단하게 뭉쳐있던 마음의 무장을 풀어놓은 토요일 오후는 TV보기에 딱 좋다. 지난 주 역시 마찬가지. 이 채널 저 채널 기웃거리다 EBS에서 방황을 끝냈다. 해외의 고품격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 '세계의 눈'은 그 시간대 딱히 볼 게 없는 대한민국 오십대 남자들에게는 제격이다. 책 읽는 수고로움 없이 게으른 자의 지적(知的) 허기도 제법 채워준다. 그런데 그날 방송한 '고래들의 전쟁'은 여느 토요일 나른한 시선으로 시청하던 다큐멘터리와는 사뭇 달랐다.

남쪽 열대의 바다에서 새끼를 낳은 고래들은 봄이 되면 새끼를 데리고 대장정에 오른다. 목적지는 북쪽 베링해. 적도 부근 바다에서 출발해 두 달 동안 5천km를 헤엄치는 긴 여정이다. 그때쯤 베링해에는 고래들의 먹이인 크릴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 크릴의 향연을 즐기기 위해 고래들은 그 먼 길을 마다않는다. 베링해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150개의 섬으로 늘어선 알류산 열도를 통과해야 한다. 섬과 섬 사이 폭 10km의 좁은 해협 '유니맥 패스'는 고래들이 베링해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이곳으로 혹등고래와 귀신고래들이 몰려드는데 이들을 노리는 또 다른 고래들이 있다. 바다의 최종 포식자인 범고래 무리다. 머리 좋고 사나운 녀석들은 해협의 길목을 지키며 새끼 고래들을 노린다. 절반 정도의 새끼들이 이곳에서 희생된다고 한다.

화면에는 수십 년간 고래를 관찰해온 과학자들조차 미처 보지 못했던 광경이 펼쳐졌다. 어미를 잃은 채 홀로 유니맥 패스를 통과하려던 새끼 귀신고래가 범고래 무리들에게 당하려는 찰나 한 떼의 혹등고래 무리가 새끼 귀신고래를 구하기 위해 울부짖으며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예닐곱 마리로 각각 무리지은 혹등고래와 범고래들은 치열한 육탄전을 벌였고, 마침내 범고래들이 퇴각했다. 몇 해 전에는 혹등고래가 범고래 무리에게 쫓기던 물범을 자신의 지느러미 위에 태운 채 뒤로 누워 20분 동안이나 헤엄쳐 살린 사례도 보고됐다. 약육강식 동물의 세계에서 혹등고래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30년 동안 고래를 연구해온 크레이크 맷킨 박사는 종을 초월해 약한 쪽에게 일종의 연민을 느끼고 보호해주려는 마음, 즉 '공감(共感, empathy)'으로 설명한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똑같거나 비슷하게 느끼는 것을 말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심리적 상태를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느끼는 것을 통해서 지각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며칠 전 막을 내린 리우올림픽 육상 여자 5천m 예선에서 레이스 도중 넘어진 두 선수가 서로 손을 내밀어 경쟁자이기도 한 상대를 일으켜 세운 뒤 함께 결승선을 통과하는 장면은 '공감'의 극적인 표현이다. 공습으로 파괴된 건물 잔해에서 가까스로 구조돼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된 채 멍하니 구급차 의자에 앉아있는 시리아 '알레포 소년'의 모습에서 슬픔과 분노를 느끼는 것은 우리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래의 '공감능력'보다 인간의 그것이 훨씬 열등(劣等)함을 명백하게 입증하는 일들이 잇따르고 있다. 홀로 외롭게 사는 노인들을 등쳐먹는 저급한 사기꾼들, 학자금 마련을 위해 힘들게 일한 학생들의 아르바이트비를 떼먹는 한심한 고용주들, 가족을 위해 가난한 조국을 떠나온 이주노동자를 학대하고 임금을 주지 않는 나쁜 사장님들의 얘기가 지천으로 널렸다. 지난 25일 대전에서 일어난 사건은 거의 정점이다. 택시에 승차했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은 택시기사를 그대로 놔둔 채 트렁크에서 골프백을 꺼내 총총히 떠난 두 사람은 해외에서 골프를 치기 위해 떠나는 비행기를 놓칠까봐 그대로 갔단다. 예순 세 살의 택시기사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현실이 이러한데 인간이 어떻게 고래보다 우등(優等)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도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도덕적인 의무까지 법으로 규정해 강제하는 사회, 그게 사람이 살만한 사회일까.

/이충환 인천 시청자미디어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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