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4] 포천 오성과 한음

점잖은 한음, 짓궂은 오성… 포천서 뛰어노는 설화

민정주 기자

발행일 2016-09-07 제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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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 제공

역사적 사실에 유적들, 풍부한 이야기 더해 전승… 지자체서 축제·거리 조성 등 적극적 활용 나서야

동화책 한 권 넘는 어린시절 에피소드 진실과 다르지만 일화 실록에 기록 '대표적 우정'
이항복 할아버지·아버지 터전, 이덕형 외가 인연… 사후 유생들이 화산·용연서원 모셔
市 마스코트로 2000년부터 캐릭터 제작·한영안내판등 표시 '오성과 한음의 고장' 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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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옛적, 포천에 한 소년이 살았다. 소년의 집에는 감나무가 있다. 감나무 가지는 담장을 넘어 옆집 마당으로 뻗어 자랐고, 그 가지에서도 감이 열렸다. 옆집 대감네는 마당으로 넘어온 감을 차지했다.

소년은 대감의 방문 앞으로 갔다. 창호지를 뚫어 자신의 팔을 대감의 방안으로 밀어넣고 물었다. "이 주먹은 누구의 주먹입니까?" 대감은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느냐"대답했고 소년은 감나무의 감을 돌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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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가 제작한 오성과 한음 캐릭터. /포천시 제공
# 소년은 친구와 함께 놀고 있었다. 어느 날 농부가 급히 이들은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농부의 처가 밭두렁에서 소변을 보았는데, 밭 주인이 화를 내며 관아로 끌려가 곤장을 맞고 싶지 않으면 황소를 바치라 했다는 것이다. 밭 주인은 고을 세도가인 황대감이었고, 사또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똘똘하기로 소문난 두 사람에게 농부는 황소를 빼앗기지 않을 방법을 찾아달라고 하소연했다. 소년과 친구는 꾀를 냈다. 둘은 황대감이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나타나자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황대감은 길을 막고 싸우는 두 사람에게 싸우는 이유를 물었다.

소년이 말했다. "제가 길을 가다가 하도 급해서 이 밭두렁에 오줌을 누려고 하니까 이 친구가 말하기를, 여기다 오줌을 누다가는 황소 한 마리를 빼앗기게 된다며 말리지 않겠습니까? 하도 터무니없는 말이라 그냥 오줌을 누려고하는데 끝끝내 말려서 제가 바지에 오줌을 싸버렸지 뭡니까."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정말 이 고을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친구를 말린 겁니다. 자기 밭에다 오줌을 누었다고 그 사람의 전 재산인 황소를 끌고 갔다고 하던데, 혹시 대감 어르신께서는 그 이야기 모르시나요?"

황 대감은 헛기침을 하며 딴전을 피웠다. 소년이 다시 말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번에 암행어사가 되신 제 숙부께 말씀드려서 혼을 내주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황대감은 그 길로 되돌아가 농부에게 황소를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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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과 한음이 사후에 포천의 유생들이 재산을 모아 사우(祠宇)를 세워 화산서원에 이항복을, 용연서원에 이덕형을 모셨다. 사진은 용연서원 전경. /포천시 제공

오성과 한음 두 사람에 관한 어린시절 에피소드는 동화책 한 권을 채울만큼 많다. 동화책 속에서는 짓궂은 오성이 한음을 자주 골탕먹이지만, 두 사람은 동네사람들이 다 아는 죽마고우다.

흔히 알려진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는 설화다. 설화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이며, 꾸며진 이야기다. 오성과 한음의 어린시절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 아니다. 진짜 이야기는 이렇다.

오성의 이름은 이항복(1556~1618)이다. 호는 백사(白沙)이나 오성부원군에 봉해져 오성대감으로 불리었다. 소년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 보냈으나 곧 학업에 열중했다. 25살 가을, 알성문과에 급제했다.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병조판서를 5차례지냈다. 우의정과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한음의 이름은 이덕형(1561~1613)이다. 호는 한음(漢陰)이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고 성품이 점잖아 총각정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스무살 되는 해 3월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병조판서를 5차례 지냈다. 우의정과 좌의정,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46호 화산서원
오성 이항복 선생을 모신 화산서원. /포천시 제공

설화 연구가 이병찬 대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이항복과 이덕형이 친분을 쌓기 시작한 것은 1580년부터라고 했다. 두 사람은 같은 해에 급제했다. 관직 생활에서 거의 평생 동안 동고동락했다. 두 사람은 성향은 달랐지만 뜻을 함께했고, 서로를 존중했다.

어릴 적 친구는 아니지만, 우정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 이 교수는 "두 사람의 일화는 실록에도 기록이 돼 있고, 설화로는 문헌설화가 70여편, 구비설화는 90~150평 정도 전해진다. 인물에 대해 이렇게 많은 설화가 전해지는 것은 매우 드물다"며 "설화 속 두사람의 성격은 실제와 비슷하다.

이덕형은 젠틀한 성격의 훈남이었고, 수재인데다 모범생이었다. 문헌 설화에도 한음(이덕형)이 장난을 쳤다는 내용은 없다. 반면 이항복은 영정의 표정에서도 짓궂은 면모가 드러난다. 선조도 그의 해학적인 성격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단지 두 사람의 우애가 후대의 귀감이 되어 수많은 설화가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전해진 것은 아니다. 설화가 친구사이의 장난과 놀이만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의 꾀와 협동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 역사에서도 이항복과 이덕형은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이 교수는 "임진왜란하면 이순신과 유성룡만 기억하지만, 오성과 한음도 그들 못지않은 역할을 했다. 명나라 원군 파병을 요청하자는 데 뜻을 같이한 오성과 한음은 위험천만한 먼 길을 서로 가겠다고 다투었다. 결국 외교력이 출중한 한음이 길을 떠났다. 행정에 강했던 오성은 전쟁의 상처를 살피며 내치에 힘썼다. 한음은 유성룡과 함께 상시군사훈련체계를 확립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도기념물24호(이항복선생묘)
경기도 기념물 24호인 이항복 선생 묘. /포천시 제공

설화에는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의 인생관이나 가치관, 바람이 담겨있다.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에도 그렇다. 두 사람에 관한 설화는 제각각의 형태로 전국에 퍼져있는데, 그 중 포천이 오성과 한음을 시의 마스코트로 삼았다. 이항복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포천에 살았고, 이덕형은 외가가 포천이었다는 인연을 내세운 것이다.

이들 사후에 포천의 유생들이 재산을 모아 사우(祠宇)를 세워 화산서원에 이항복을, 용연서원에 이덕형을 모셨다. 이항복의 묘소와 신도비도 포천 가산면에 있다. 포천시는 2000년부터 오성과 한음의 캐릭터를 제작해 인쇄물과 환영 안내판 등에 표시하며 포천이 오성과 한음의 고장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아직 이러한 활용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원형을 상징화하고 활용하는 것은 교훈, 교육적 가치 외에도 여러 장점이 있지만,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 별로 없다"며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과 남겨져 있는 여러 가지 유적들, 거기에 더해서 풍부한 이야기도 전하고 있으므로 관련 축제나 박물관 및 거리조성 등 더 적극적으로 알리고 활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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