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고택기행·38] 짜장면 박물관 '공화춘'

짜장면을 세상에 알린 곳… '방치된 역사' 박물관으로 되살려
{공화춘 : 기록상 이르면 1917년, 늦어도 1934년께 현재 장소서 영업}

김주엽 기자

발행일 2016-09-29 제9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연중기획 고택기행 공화춘1
짜장면을 처음으로 메뉴에 올린 중식당 '공화춘(共和春)'은 서양의 건축기법과 중국 전통건축기법이 결합돼 만들어진 유일한 청국 조계지 건물로 평가된다. 사진은 인천시 중구 차이나타운 공화춘 건물로 현재는 짜장면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1900년대 초 선린동 위치한 '산동회관'
처음으로 메뉴에 짜장면 올린 중식당
부두서 일하던 中 산둥지방 중국인들
간단하게 끼니 때우려고 만들어 먹어

외벽 모자이크 타일 변화과정 보여줘
2층은 마당을 방들이 둘러싼 '합원식'
中전통건축에 서양기법 결합 큰 의미
1983년 폐업이후 관리안돼 내부 훼손

2016092801001727100085015
인천항이 개항한 1880년대 인천에는 수많은 외국인이 살고 있었다. 그중에는 많은 자본력을 바탕으로 조선의 상권을 침탈하기 위해 입국한 일본과 중국의 상인이나 조선인에게 선교를 하기 위해 들어온 서양인도 있었지만, 단지 돈을 벌 목적으로 인천에 자리 잡기 시작한 중국 산둥(山東) 지방에서 건너온 쿠리(苦力·하역 인부)들도 있었다.

시인 박팔양은 '인천항'이라는 시에서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로 붐비던 부두 풍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상해로 가는 배가 떠난다/…/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많은 목숨을 싣고 떠나는 배다/…/ 부두에 산같이 쌓인 짐을/ 이리저리 옮기는 노동자들/ 당신네들 고향이 어데시요? / '우리는 경상도' '우리는 산동성'/ 대답은 그것뿐으로 족하다는 말이다

KakaoTalk_20160928_103106982
1950년대 공화춘 전경. /인천 역사자료관 제공

인천항 부두에서 일하던 산둥 지방 중국인들은 부둣가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음식을 만들었다. 저임금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차오장멘(炒醬麵)', 우리나라 말로는 짜장면이다.

인천 중구 '짜장면 박물관' 관계자는 "초기 짜장면은 삶은 국수에 된장과 채소를 얹어 비벼 먹는 화교들의 '고향음식'이었다"며 "돈을 벌기 위해 인천에 온 산둥지방 화교들이 고향 생각이 간절할 때 많이 요리해 먹던 음식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짜장면은 고급 중식당들의 메뉴에 이름을 올리면서 본격적인 중국 요리로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1900년대 초 중구 선린동 근처에 있었던 '산동회관'은 이 짜장면을 처음으로 메뉴에 올린 중식당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청나라 조계지인 중구 선린동 주변에는 중국인 무역상을 위해 '항잔'(창고업을 겸한 중매업)이라는 상점이 많았는데 '산동회관'도 그중 하나였다.

'산동회관'을 세운 우희광(于希光·1886~1949)은 1912년 중국 신해혁명(1911년)이 일어나 청조의 전제정치가 막을 내리고 공화정을 표방한 중화민국이 탄생하자, '공화국 원년의 봄'을 의미하는 단어로 가게이름을 바꿨다. 바뀐 가게 이름은 짜장면을 처음으로 판매한 것으로 알려진 '공화춘(共和春)'이다.

27일 오전 지금은 중구 짜장면 박물관이 조성된 공화춘을 방문했다. 당시 산동회관은 현재 짜장면 박물관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의 장소인 중구 선린동 38로 옮겨 온 시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연중기획 고택기행 공화춘5
당시 공화춘 내부를 재연한 짜장면 박물관 모습.

다만, 1917년 현재의 장소인 선린동 38의1 건물을 공화춘을 비롯한 여러 명의 화교가 공동으로 매입한 기록이 남아있고, 1934년 7월의 인천지역 화교 상인 명부에 중화요리점으로 공화춘이 등재된 점으로 미뤄 공화춘은 이르면 1917년께, 늦어도 1934년께는 지금의 장소에서 중화요리점 영업을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공화춘 외부는 현재에도 건축 당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벽돌로 마감된 외부는 곳곳에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돼 있는데 이는 최초 건축 당시부터 현재까지 몇 번의 변화과정이 있었던 것을 알려주고 있다.

전형적인 중국식 중정형 건물의 특색을 갖고 있는 건물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붉은색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이 계단은 연회장과 출입구를 이어주던 것으로 당시 공화춘은 1층은 주방으로 사용됐고, 2층은 연회장으로 활용됐다고 한다. 공화춘이 당시 고급 중화요리점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김윤식 인천 문화재단 대표는 "인천시청이 현재 중구청 자리에 있던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공화춘은 인근에 중화루와 함께 고관대작들만 출입하는 최고급 중화요리점이었다"며 "경인지방 5대 중화요리점으로 명성을 유지했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공화춘 2층은 합원식(合院式)으로 만들어졌다. 베이징에서 광둥까지의 민가 대부분의 건물에서 활용된 '합원식' 구조는 가운데 마당을 방들이 둘러싼 형태로 돼 있다.

연중기획 고택기행 공화춘7
박물관 입구에 전시된 과거 공화춘 간판 모습.

현재 공화춘도 가운데 계단을 여러 곳의 방이 둘러싼 구조로 돼 있다. 건물 내부 기둥과 벽, 문 등에 운문(雲文), 용문(龍文), 봉황문(鳳凰文) 등 길상 문양과 수(壽), 복(福), 록(綠), 희(禧), 춘(春), 하(夏), 추(秋), 동(冬) 등의 문자 문양을 사용하는 등 중국 산둥지방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식을 했다.

하지만 왕대공 목조 트러스 구조로 돼 있고, 영국식 벽돌쌓기 등 당시 서양에서 많이 사용되던 건축 기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한양대 건축학과 한동수 교수는 2008년 발표한 '인천 선린동 공화춘의 건축 특성'이라는 논문에서 "공화춘은 서양의 건축기법과 중국 전통건축기법이 결합돼 만들어진 유일한 청국 조계지 건물로 그 역사적 가치와 건축적 의미가 높게 평가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화춘 내부는 초창기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다. 영업을 목적으로 하는 식당이었던 탓에 중화요리점 운영 당시에도 내부 수리가 많이 이뤄졌고, 지난 1983년 가게 문을 닫은 직후 장기간 방치되면서 건물 내부가 많이 훼손된 탓이다.

다행히 지난 2006년 인천시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고, 2012년 짜장면 박물관이 만들어지면서 보전과 관리가 이뤄지고 있다.

강덕우 인천역사자료관 전문위원은 "당시에는 문화재라는 개념이 없었던 데다 개인이 소유한 건물이었기 때문에 내부가 변경되는 것을 막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며 "건물이 철거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지만 1983년 가게가 폐업할 당시에 지자체에서 관심을 갖고 나섰으면 더 잘 보전돼 있었을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김주엽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