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7] 의정부 의순공주

나라·가문 위해 대의에 순종한 비운의 환향녀 금오리에 깃들다

민정주 기자

발행일 2016-10-05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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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순공주 묘-의정부 문화원 제공
의순공주 묘. /의정부 문화원 제공

아버지 금림군이 효종 양녀로 바친후 청나라 도르곤과 결혼·6년만에 조선으로 돌아와
지역엔 실록과는 다른 '족두리 산소' 전설… 풍년 등 기원 '의정부 정주당 놀이' 전해져
市·문화원 "가치 인정 이벤트 아닌 다양한 홍보" 2009년부터 본격 문화원형 사업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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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국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고, 슬픈 이야기이다.

"청나라에서 공주가 예쁘다는 소식을 듣고 결혼을 강요하자 효종(孝宗)께서 걱정이 태산 같다고 하시자 금림군(錦林君) 할아버지께서 효종(孝宗)의 근심을 덜어드리기 위해 자기 따님을 효종에게 바치자 기뻐하시며 궁중에 불러들여 술까지 같이 드셨다고 한다."

금림군 이개윤의 자손은 여인에 대해 이렇게 알고 있었다. 여인은 자신이 바쳐지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바쳐졌고, 바쳐져서 한때 청의 실권자였던 도르곤의 첩이 됐다. 여인의 의지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병자호란 이후 청은 조선에 국혼을 청했다. 거절할 수 없는 청이었다. 효종에게는 딸이 여섯 있었지만 청에 '공주는 이제 2살에 불과해 국혼 대상이 될 수 없다' 고하고 종실, 또는 대신의 딸 중에서 대상자를 찾았다.

금림군 이개윤은 효종과는 먼 친척이었지만, 국혼의 여건을 갖추기 위해 효종과 5촌 형제로, 그 딸은 효종의 양녀로 입적했다고 꾸몄다. 효종은 이개윤의 딸에게 '의순공주'라는 칭호를 내렸다.

'대의(大義)에 순종(順從)'한다는 뜻이다. 의순공주가 시녀들과 청으로 떠난 후 효종은 의순공주의 오빠 이준(李浚)을 장릉 참봉(章陵參奉)으로, 이수(李洙)를 전설사별검(典設司別檢)으로 삼았다.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대복진(大福晉: 정실 중 으뜸 부인)이 된 지 7개월 만에 도르곤이 갑자기 사망했다. 의순공주는 도르곤의 수하장에게로 보내졌으나 1년 남짓 후에 그도 죽었다. 아버지 금림군은 청에 딸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간청했다. 청이 이를 허락해 의순공주는 6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의순공주를 맞이하는 조선의 표정은 착잡하고 비통했다. 의순공주는 조선의 치부였고, 조정은 의순공주의 환국이 또 다른 사단을 불러올까 걱정했다. 그래서 의순공주의 환국을 요청한 금림군을 삭탈관직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의순공주의 새로운 이름은 '환향녀(還鄕女)'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라 썼지만, 절개를 잃은 여인이라고 비하하는 뜻에서 '화냥년'이라 불렸다. 청에 끌려갔다 돌아온 모든 여인들의 이름이었다.

실록의 기사에는 의순공주가 환국 후 6년을 살다 병들어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27살이었다. 의정부 금오리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이와 다르다.

'족두리 산소'에 관한 전설에 따르면 병자호란이 끝난 후 금오리에 사는 왕족 금림군의 딸이 왕명으로 청나라에 붙들려가다가 오랑캐 놈에게 정조를 짓밟히는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정주(定州)땅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이때 몸은 물 속에 가라앉고, 쓰고 있던 족두리만 물에 떠올라 이것을 건져다가 부친에게 주었다. 이를 받은 금림군이 족두리로 의장(衣葬)장사를 지내고 묘지를 조성했다. 사람들이 이를 족두리 산소라고 부르며 나라 위해 죽은 공주를 애처로워 했다고 전해진다.

의순공주의 이름은 족보에서 지워졌고 아무도 그녀를 위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딸의 죽음을 슬퍼한 의순공주의 어머니는 날마다 천보산 꼭대기에 올라 정주 땅을 내려다보며 넋을 달랬다. 이곳을 정주당이라, 산봉우리는 공주봉이라 불리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정주당은 폐허가 됐고, 공주도 잊혀졌다.

한편, 전쟁이 끝나고도 조선의 고장들은 평화롭지 못했다. 전염병이 돌았고 흉년이 들었다. 금오리에도 횡액이 자주 발생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의순공주의 넋을 달래주지 않아 일어나는 재앙이라는 말이 돌았다.

의순공주대제(사진제공 의순공주대제보존회)
의순공주 대제. /의순공주대제보존회 제공

마을 사람들은 정주당 터에 올라가 제를 지냈다. 마을에 풍년이 들고 재해(災害)가 없어져 해마다 3월 초순 좋은 날을 택하여 제를 지냈다. 제가 끝나면 마을사람 모두가 국수와 음식을 나눠먹고 온종일 신명나게 즐기던 풍습이 금오리에 전해 내려오는데 이것이 '의정부정주당 놀이'다.

의정부정주당놀이는 의순공주를 제신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던 마을 풍물굿이다. 한국전쟁이후 중단됐던 것을 지난 2004년 지역 청년들이 주축이 돼 재연을 시작했다. 지금은 의정부문화원과 손잡고 매년 봄 열리는 지역 행사로 자리 잡았다.

정주당놀이-문화원 제공
'의정부 정주당놀이'는 의순공주를 제신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던 마을 풍물굿으로 2004년 지역청년들이 주축이 돼 재연하기 시작했다. /의정부 문화원 제공

날이 택해지면 제주를 선발하고, 마을사람들은 며칠 전부터 산가락, 상주가락을 연습한다. 풍물패들이 집집마다 돌며 제수를 추렴해 마을공동으로 제례를 마친 후 국수를 끊여 먹고 신명나게 놀며 화해와 화합을 청한다.

의순공주대제보존회의 의순공주 대제도 이 무렵 시 행사로 확대됐다. 장영순 만신이 의순공주의 넋을 달래고 의정부시의 평안을 기원하고자 1996년부터 시작한 전통굿이다.

2005년 문화원이 문화원형 발굴 사업을 시작했을 때 의순공주가 주목을 받았던 것은 이러한 지역 내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다. 문화원 관계자는 "문화원형을 발굴하기 위해 시놉시스를 공모했을 때 의순공주 이야기가 다수 거론됐다"며 "처음 정주당 놀이를 시작했을때는 의순공주 문중에서 불편함을 내비쳤지만 의정부 안에서 의순공주를 높이 평가하니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뮤지컬 의순공주-문화원 제공
2010년 제작해 의정부예술의전당에서 공연했던 '뮤지컬 의순공주'. /의정부 문화원 제공

의정부시와 문화원은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의순공주를 주제로 문화원형 사업을 벌이고 있다. 2010년 '뮤지컬 의순공주'를 제작해 의정부예술의전당에서 공연했을 때는 6천여 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의정부시립무용단에서는 창작무용극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형 문화사업은 예산 부족으로 한차례 이벤트로 끝나 아쉬움을 남겼다. 문화원 관계자는 "문화원형의 가치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지만 예산 문제로 보다 적극적인 사업을 벌이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라며 "다양한 홍보 아이디어를 통해 꾸준히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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