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8]광명 민회빈 강씨

'여성'이라는 운명으로
조선의 역사속에 가려진,
왕비가 되지못한 '비운의 세자빈'

민정주 기자

발행일 2016-10-12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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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오전 광명시 학온동에 민회빈 강씨인 강빈이 묻힌 사적 357호 광명 영회원(永懷園). 민회빈 강씨의 일생은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여성 리더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최근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병자호란 화약조건으로 소현세자와 청나라 끌려가 '심양관'서 무역·국제 정세파악
인조 독살 휘말려 사약·원손 형제 유배… 70여년 지난후 숙종때 '민회' 시호 내려져
지역 문화유적 범주 넘어 볼모 생활 하던 중국에서의 행적 등 조사작업 필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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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인생에는 결정적 순간이 있다. 화양연화든 비래횡화든, 인생길의 한굽이를 이루는 시간이. 그 시간은 인생을 바꾸고, 때로는 나라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1627년, 조선 인조 때 우의정 강석기의 딸은 소현세자 빈이 됐다. 가례를 올린 후 반포된 교서에는 '선인의 교훈대로 덕을 기준으로 하여 유순한 이를 힘써 구하였고, 조정에서 제신에게 물어서 명문가 출신을 얻었다'고 기록됐다. 강빈은 가례 10년이 되는 1636년 3월 원손(왕세자의 맏아들)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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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청의 기동대는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달렸다. 원손과 왕자들, 백관의 가족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떠났다.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도성은 무방비인 채로 함락됐다. 이듬해 1월에 강화성도 함락됐다.

강화도 수비를 맡았던 이들은 가장 먼저 도망쳤다. 강빈은 원손을 피신시켰다. 인조는 항복했다. 화약 조건에 따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는 볼모로 끌려가 청나라 심양에서 살았다.

청의 감시와 통제 아래 속환과 군사징발 등의 압박에 시달렸다. 소현세자는 황제의 명에 따라 사냥이나 참가하거나 청과 명의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강빈은 혼자 남아 심양관의 살림을 돌보아야 했다. 볼모로 끌려간 이들이 거주하는 심양관의 운영과 경비도 큰 문제였다. 처음에는 청이 식량과 일용품을 지급했지만, 몇 년 후부터는 농사를 지어 비용을 해결하라고 했다.

1637년부터 1644년까지 볼모 생활을 한 끝에 소현세자와 강빈은 조선으로 돌아왔다. 인조는 돌아온 아들 내외를 반기지 않았다. 청이 세자를 돌려보낸 것은 자신을 입조케하고 세자를 왕으로 세우려는 의도라고 의심했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해에 병으로 급서했다.

인조는 원손이 있었지만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1646년 가을에는 자신의 음식에 독이 들었다며 강빈의 나인들에게 죄를 물었다. 심양에서 '잠도역위(몰래 왕위를 바꾸려 함)'의 음모를 꾸며 독약을 넣었다며 강빈은 후원 별당에 가두었다.

강빈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인조는 강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부친의 관직을 삭탈하고 모친과 오라비 4명을 죽였다. 원손 형제들은 제주도에 유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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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빈에게 민회(愍懷)라는 시호가 내려진 것은 70여 년이 지난 후인 숙종 44년이다. 숙종은 강빈이 지위를 잃고 죽은 것을 가슴 아파하며 시호를 내렸다. 부친의 관작이 복위되고 형제들도 신원됐지만 강빈의 삶이 이제와 더 안타까운 것은 심양에서의 행적 때문이다.

'심양장계', '심양일기' 등에 따르면 강빈은 적극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재산을 모았다. 조선의 선진 농법으로 경작지에서 매년 큰 수확을 얻고, 청국과의 무역거래로 돈을 벌었다. 수입금을 당시 전쟁 포로로 끌려와 노예시장에서 매매되는 조선인들을 속환하는 데 사용해 많은 조선인을 구했다.

더불어 심양관은 국제 무역의 거점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인조실록'에도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두고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하느라 관소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고 기록돼있다. 볼모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갈 때 강빈은 상당한 재물을 가지고 갔다.

1644년에 이들은 관소를 옮겼다. 명을 몰아낸 청이 북경으로 천도한 것이다. 북경에서 강빈은 소현세자와 함께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기술을 접했다. 개방과 실용주의적 면모를 갖추어 나가는 한편 명-청 교체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며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새로운 조선의 모습을 꿈꾸었다.

유순한 덕을 갖추었던 세자빈은 불행하고 혼란한 시기에 스스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여성 리더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조선의 신하들은 역모의 혐의가 없다는 간쟁에도 끝내 멸문지화를 당한 강빈의 운명을 안타까워했다.
왕비가 되지 못해서, 여성이라서 역사 속에 가려져 있던 강빈의 일생은 요즘 사람들에게도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남긴다. 최근 민회빈 강씨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다큐멘터리나 소설 등에서 재조명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여성 리더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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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온동에 묘소·1903년 '영회원'으로 변경
문화재청 관리 올해 사유지 매입 주변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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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시 학온동에 민회빈 강씨의 묘소가 있다. 민회원으로 불렸으나 1903년 영회원(永懷園·사적 제 357호)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애기릉', '아왕릉'이라고도 한다. 주변에 치석된 석재와 기와조각이 있어 부속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06년 이전에는 문화재청이, 2006년부터 2013년까지 광명시가 관리했다 현재는 다시 문화재청이 관리하고 있다. 올해 일부 사유지를 매입해 주변을 정비했고 수목, 벌초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학계나 문화계의 관심에 비해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강회빈 민씨를 지역의 문화유적, 국내 역사인물의 범주를 뛰어넘어 행적을 기리고 가치를 알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신춘호 대표는 "조선의 역사는 왕을 중심으로 기록돼 강빈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많지 않지만 우리 문화원형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인물"이라며 "강빈의 역사적 행적과 면모를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곳은 바로 볼모 생활을 하던 심양이므로 중국의 역사적 장소도 조사하고 관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심양으로 간 사람들의 연행로를 직접 오가며 당시의 유적을 연구한 신 대표는 "요즘은 관광하러 심양으로 가는 한국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중국의 고궁만 보고 오게 된다.

상해처럼 심양도 이국땅에서 우리의 역사성을 세울 수 있는 곳 중 하나"라며 "강빈의 연행길을 따라가면 당시의 국제정제와 한중관계, 무역과 사신들의 행적 등을 파악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사진 =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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