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9]안산 표암과 단원

신분도, 나이도 뛰어넘는 40년 교유
조선후기 미술사 빛나는 족적 남다

민정주 기자

발행일 2016-10-19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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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 자화상(사진/안산문화원 제공)
강세황 자화상. /안산문화원 제공

'예원의 총수' 강세황, 안산 청문당 시절 중인이었던 어린 김홍도 제자로 인연 맺어
호암미술관 소장한 '송하맹호도' 운치있는 소나무와 치밀한 호랑이 공동작업 '걸작'
市, 18년째 미술제 진행·자료 체계적 연구수집… 도시전체 단원 인물관련 문화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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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사능(士能, 김홍도의 字)이 어려서 내 문하에 다닐 때에 그의 재능을 칭찬하기도 하였고, 그에게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였다.중간에는 같은 관청에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함께 지냈고, 나중에는 함께 예술계에 있으면서 지기다운 느낌을 가졌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시문집 '표암유고'에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에 관해 쓴 내용이다. 강세황이 김홍도보다 서른 살쯤 많았고, 신분도 달랐지만,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로, 직장 동료로,친구로 40년 세월을 함께하며 조선 후기 미술사에 업적을 남겼다.

송하맹호도, 90.4 x 43.8 cm
강세황이 소나무를, 김홍도가 호랑이를 그렸다는 '송하맹호도', 90.4×43.8㎝ /호암미술관 소장
강세황은 명문가 출신의 18세기 대표 문인화가다. 그는 조선후기 미술을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시·서·화에 고루 뛰어난 삼절(三絶: 3가지 재주에 뛰어난 사람)로 칭송받는 한편, 서양화풍을 수용하고, 참신한 소재를 채택했고, 채색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추구했다. 그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르를 그렸다.

조선의 문예부흥기로 불리는 영·정조시대 화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예원(藝苑)의 총수'였다. 어려서부터 재능을 보이며 시를 짓고 서예에도 능했다. 처남 유경종 등과 함께 안산 청문당(安山淸聞堂 , 경기문화재자료 제94호)에서 시를 짓고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는 문예 전반에 걸친 해박한 지식과 안목으로 비평가로서 업적도 남겼으며, 61세 이후 관직에 진출해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기로소에 입소했다. 기로소는 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관리들만 들어갈 수 있는 관서로 강세황의 할아버지부터 3대가 연속으로 기로소에 입소했다.

김홍도는 중인 신분이었다. 그는 이른 나이에 도화서의 화원이 돼 20대 초반에 궁중 화원으로 명성을 날렸다. 29세에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이에 대한 포상으로 사포서 감목관이 됐다. 두 달 후 강세황이 같은 곳으로 발령을 받아 두 사람은 함께 근무했다.

30대의 김홍도는 생동감 넘치는 풍속화로도 이름을 알렸다. 40대에는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에 가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왔고, 정조의 어진을 그려 중인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직책인 충청도 연풍현감을 지냈다.

김홍도는 외모가 빼어나고 성격은 자유분방했다. 음악도 즐겼고, 한시 짓기에도 능했다. 지필묵이 부족할 정도로 가난한 때도 있었지만 생활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화가 조의룡이 쓴 '호산외사'에 그의 성격을 드러내는 구절이 있다. '집이 가난하여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돈이 없어 그것을 살 수 없었는데 때마침 돈 3천을 보내주는 자가 있었다. 그림을 요구하는 돈이었다.

이에 그중에서 2천을 떼내어 매화를 사고, 8백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는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梅花飮)을 마련하고, 나머지 2백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의 계책도 못 되었다.'

안산문화원 이우석 팀장은 "관리로서도 유능하지는 않아 파직당했는데, 그 이후의 삶은 궁핍했다. 외아들 김양기에게 미술공부를 시킬 돈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들도 산수와 수목에 능한 화원이 됐다"고 말했다.

안산 청문당 전경2 (사진/안산문화원 제공)
안산 청문당 전경. /안산문화원 제공

강세황과 김홍도의 인연이 시작된 곳은 안산이다. 강세황은 30대 초반부터 30년 동안 처가가 있던 안산에 살았다. 김홍도는 젖니를 갈 무렵부터 그에게 그림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강세황은 김홍도를 두고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하는 것이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 것이 없으니 옛적에는 이런 솜씨는 없었다'고 썼다.

강세황, 〈영통동 입구〉, 송도기행첩 중,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 '영통동 입구'-송도기행첩 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위) ,강세황 '玄亭勝集' 1747년, 紙本水墨, 34.9×50㎝, 柳承鳳 소장. /안산문화원 제공

당대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이자 화가인 강세황은 김홍도의 솜씨가 천부적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송하맹호도'는 두 사람이 함께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강세황이 소나무를, 김홍도가 호랑이를 그렸다고 한다. 소나무는 문인화풍으로 운치있게 표현됐고, 호랑이는 치밀하게 묘사돼 긴장감이 느껴진다. 김홍도는 '어살', '매해파행', '균와아집도' 등 안산 앞바다의 풍경을 그린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김홍도- 타작_행려풍속도병
김홍도 '거리의 판결'-행려풍속도병(왼쪽) , 김홍도 '타작'-행려풍속도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런 이유로 문화관광부는 1991년에 안산을 단원의 도시로 명명했다. 안산에서는 18년째 매년 10월 단원미술제가 진행되고 있다. 1999년 '단원전시관'으로 고잔동에서 개관한 단원미술관은 상록구로 자리를 옮겨 관련 전시와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단원미술관 관계자는 "단원의 도시로 어울리는 문화·인문학적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단원학술심포지엄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단원에 대한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연구·수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2년에는 김홍도의 호를 행정구역명으로 정해 '단원구'가 생겼다.

지난해에는 안산학연구원 주관으로, 청문당에서의 복날 모임을 그린 강세황의 작품 '현정승집도' 재연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진준현 서울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안산은 단원이라는 인물을 통해 도시 전체의 문화를 형성해가고 있는 것 같다"며 "안산에서 진행하는 세미나나 강연 등에 가면 안산시민들을 중심으로 단원이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또한 "인위적일 수 있으나 지자체 공무원들부터 시작해 모든 관계자들도 이 분야에 익숙해진다는 건 바람직한 일"이라며 "이런 사업을 통해 문화원형으로서의 가치와 더불어 우리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가 높아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글 = 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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