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경기, 문화원형으로 읽다·10]고양 행주산성

권율의 '부릅뜬 충정'에
3만 왜군마저 추풍낙엽
국난 극복 '민족의 성지'

권준우 기자

발행일 2016-10-26 제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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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정상에 위치한 행주대첩비와 대첩비각./고양시 제공

진주·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중 하나로 불려
여인들이 전투에 참여 돌 날랐다는 '행주치마 설화'로도 유명
시원한 한강 조망 볼거리… 매년 3월 행주대첩제 등 행사 다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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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발발한지 10개월여 왜의 기세가 막바지로 치닫던 1593년 2월, 전라도관찰사 권율 장군은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병력을 행주산성에 집결시켰다. 전란의 발톱이 전국을 할퀴고 간 상황에서 정병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모인 병력은 수중의 관군 5천여 명과 승병 1천여 명이 전부,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백성과 아녀자들까지 끌어모았지만 전 병력은 채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반면 이들이 상대해야 할 적병은 총대장 우키타(宇喜多秀家)를 필두로 3만여 군이었다.

어린아이가 봐도 흑과 백이 명확한 상황. 그러나 권율 장군은 이기기 위한 준비를 했다. 토성에 목책을 대어 성벽을 이중으로 쌓고 은밀히 병사들을 성 안으로 옮겼다. 병사에게 재를 담은 주머니를 차게 했고, 민병들에겐 이번 전투에 나라의 명운이 걸려 있음을 주지시키며 사기를 북돋았다.

왜군은 이달 12일 채 동이 트기도 전에 제1 대장 고니시를 선봉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성 안의 조선군은 일제히 화포를 발사하고 강궁의 시위를 당겼다. 벼랑 뒤에 흐르는 강을 등지고 반대편 언덕에 목책을 세운 지형의 유리함에 1진은 전투 시작과 동시에 궤멸했다.

곧이어 2군이 들이닥쳤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숨돌릴 새 없이 다시 3군이 달려들었다. 1~3군이 연이어 당하는 것을 본 총대장 우키타는 크게 노해 4군을 선두에서 이끌고 진격해왔다. 아녀자들은 치마로 쉴새 없이 돌을 날랐고, 미리 준비한 물로 목책에 붙은 불을 껐다.

마침내 일본군은 퇴각을 시작했다. 최소한의 인원 손실로 3배에 달하는 병력을 물리친 대승이었다. 그러나 권율은 대승에 만족하지 않고 달아나는 왜군을 추격해 130여 명의 목을 더 베어냈다. 이것이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로 불리는 행주대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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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장군 동상(왼쪽), 충의정 /고양시 제공

오늘날 고양시의 대표적 사적지로 보존된 행주산성은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지우고 한적함을 간직한 채 덕양구 행주동에 자리해 있다.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은 해발 125m의 야트막한 산이다. 산성 입구에서 눈에 들어오는 아담한 산세는 이곳이 정말 혈투가 벌어졌던 현장이 맞는지 작은 의구심을 품게 할 만큼 일상적이고 조용하다.

그러나 벼랑을 끼고 한강을 등진 행주산성이 전략적 요충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끝없는 전란을 지켜본 땅이다.

행주산성이 언제 축성됐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한강 유역을 둘러싼 고구려와 백제·신라 간의 전투가 치열했던 당시 백제가 육로와 수로를 통제하기 위한 거점성으로 쌓은 것이 아니냐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산성 관광안내소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장검을 빼어 짚고 선 권율 장군 동상을 볼 수 있다. 주변으로는 관군과 승병, 민병과 아녀자 등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주역들에 대한 소개가 동판으로 새겨져 있어 보는 이의 이해를 돕는다.

중앙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홍살문(궁전·관아·능·묘·원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빠지는 길이 오른쪽으로 나 있다. 문을 지나 5분 여를 걸으면 권율 장군의 제사를 모시는 충장사가 눈에 들어온다. 앞마당에는 행주대첩비가 세워져 있다.

행주산성 안에는 권율 장군을 기리는 대첩비가 3개 있는데 충장사 앞에 세워진 비석은 헌종 시절 지금의 행주대교에서 약 200여m 떨어진 곳에 권율 장군을 기리는 사당을 세우면서 함께 만든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사당이 포탄에 불타 없어져 비만 행주산성으로 옮겨 왔다.

충장사 위 대첩기념관에선 행주대첩도와 당시 사용했던 무기들이 전시돼 있다. 흔히 행주대첩의 무기는 여인들이 행주치마로 옮긴 돌을 가장 먼저 떠올릴 테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끈 건 소질려포통, 대질려포통, 화차 등 당시로써 대단히 선진화된 무기들이 투입된 덕분이라는 사실이 미루어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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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충장사 안에 모셔진 권율장군 초상화, 산성 조광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덕양정, 행주산성에서 바라본 일출. /고양시 제공

행주산성 곳곳에는 행주산성과 행주치마 설화에 대한 소개문이 세워져 있다. 행주대첩에서 치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옷 위에 덧댄 자그마한 치마로 돌을 날랐다 해서 행주치마라 이름 붙여졌다는 설화다. 너무도 유명해 이젠 상식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단순 속설이라는 분석이 학계에선 더욱 지배적이다.

기록에 의하면 행주대첩 훨씬 이전인 중종 12년(1517년)에 발간된 '사성통해'에 행주치마와 관련된 언급이 등장하며, 행주 자체는 오늘날의 뜻과 마찬가지로 예전부터 사용된 어휘기에 산성과 대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주산성 뒤편에는 여인들이 날라다 던지기 좋은 돌무더기를 쉽게 볼 수 있는 토양이 있어 전쟁 당시 행주치마를 활용한 여인들의 조력이 큰 힘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정상 부근에 세워진 덕양정에 다가가면 사방이 트인 한강 유역의 절경이 눈을 즐겁게 한다. 김포공항으로 이어지는 올림픽대로와 파주로 연결된 자유로가 강을 사이에 두고 한 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론 평야 지대가 펼쳐져 높지 않은 산임에도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탁 트인 조망이 보는 이에게 짜릿함을 선사한다.

산성에서 북쪽으로 내려오는 길에선 토성과 문터가 차례로 나와 전략 요충지로서 산성의 진면모를 제대로 볼 수 있다. 흙으로 형성됐지만 누구나 산성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경사도와 탄탄함은 시원한 조경과는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행주산성은 오늘날 고양시의 대표적 문화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행주대첩이 있었던 날을 양력으로 환산해 매년 3월 14일 행주대첩제를 열고 있다.

또 행주산성의 이름을 딴 고양행주문화제는 올해로 29회를 맞았고, 행주산성 해맞이 축제, 휘호대회 등 다양한 행사도 이어지고 있다. 행주산성은 자유로와 이어진 접근성과 그 풍광 덕에 드라이브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고양문화원 방규동 원장은 "행주산성은 국난극복의 상징이며 민족의 성지이자 삶의 터전"이라며 "행주산성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관련 보고서 발간, 뜻을 기리는 휘호대회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 중이니 더 많은 국민이 민족의 얼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으면 한다"고 말했다.

/글 = 권준우기자 junwoo@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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