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고택기행·41]미쓰비시 줄 사택

돈 없고 힘 없던 시절, 서로 부대끼며 희망을 품었던 공간
{ 줄 사택 : 10개 가구가 이어진 연립 건물… 현재 87채 남아 }

신상윤 기자

발행일 2016-10-27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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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방 2개 등 이어진 형태… 우물·화장실은 공용
아침마다 '뒷간' 전쟁에 옆집 코 고는 소리 다들려

강점기 '히로나카상공' 부평공장 사택으로 지어져
1942년 경영악화로 미쓰비시에 공장과 함께 넘어가
조선인 직원 1천명 달했지만 임금도 제대로 못받아
이후 미군부대 근무자·무명 밴드들 모여들어 '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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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부평구에 삼릉(三菱)이라는 지명이 있다. 인천 도시철도 1호선 동수역 3번 출구에서 부평2동주민센터 방향으로 5분 가량 걷다 보면 나오는 동네가 삼릉이라고 불린다.

삼릉이란 일제강점기 일제가 전쟁 수행을 위해 군수 물자를 제작했던 전범 기업 미쓰비시의 한자어로, 현재도 이 일대에선 이 지명을 이용한 상가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삼릉은 미쓰비시 기업의 로고인 '세 개의 마름모'를 의미한다. 지난 24일 오전 10시께 인천시 부평구 부평2동 미쓰비시 줄 사택 일대를 찾았다.

2m 정도 높지 않은 지붕들이 줄지어선 이곳은 태풍이라도 불면 쓰러져버릴 것 같았다. 건물은 가로 10m, 세로 30m 가량 되는 넓이의 직사각형 형태로 이어져 10가구가 한 건물에 촘촘히 들어가 있는 모습이다. 한 가구 당 30㎡도 채 안 되는 공간인 것이다.

주택 곳곳엔 무너진 지붕과 구멍 뚫린 외벽만 남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도 자아내고 있었다.

연중기획 고택기행 부평삼릉4
줄 사택이라고 부르는 인천시 부평구 부평2동 일대의 집의 전경 모습이다. 각 건물에는 10가구의 집들이 있었으며, 현재는 87가구만 남아 있다. 이 사택에서 살던 사람들은 히로나카상공과 미쓰비시중공업 등에서 근무했던 조선인들이었다. 이후 미군 부대에서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과 서민들이 모여 살던 공간으로 변모해갔다.

미쓰비시 줄 사택은 하나의 건물에 10개의 가구가 이어진 연립 건물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줄 사택(社宅)'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10개 가구가 살 수 있는 연립 건물이 10개가량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사택은 87채가 전부다.

이 건물 내부에는 화장실이 없었고, 건물의 한쪽 끝 칸에 공중화장실을 설치해 둬 주민들이 이용했다. 또 공용 우물이 있어 지하수를 퍼 올릴 수도 있었다고 한다.

이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건물 내부를 비교적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집에 들어가면 아궁이가 있는 부엌과 방 하나, 다다미로 된 작은 방 하나 등이 이어져 있었다고 했다.

1955년 미쓰비시 줄 사택에서 태어난 김재선(61) 씨는 "나무 골격으로 돼 있는 건물이 줄지어 쭉 이어져 있었는데, 집 구조는 부엌과 방 두 개가 연달아 이어져 있었다"며 "집 안에 7~8명이 모여서 살았는데 좁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당시 어른들은 대부분 미군 부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집들이 붙어 있고 천장은 쭉 이어져 있다 보니 옆 집 싸우는 소리와 코 고는 소리 등이 그대로 다 들렸다"고 했다.

또 1965년 생으로 5살 때 이 줄 사택으로 이사를 온 이모(51) 씨는 "가장 끝에 있는 공중화장실을 쓰려면 아침마다 전쟁을 치렀던 기억이 있다. 또 한 달에 한 번 화장실 오수를 푸는 날은 온 동네에 냄새가 돌았었다"며 "집이 길가보다 조금 낮게 돼 있어서 비가 오면 물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일도 허다했다"고 설명했다.

이 줄 사택은 당초 미쓰비시가 세운 것은 아니다. 미쓰비시 이전에 1912년 부산에서 세워진 히로나카상회(弘中商會)가 1924년 경성으로 이전하면서 기계판매와 수리를 겸하는 공장을 세웠고, 이후 히로나카상공(弘中商工)을 세워 제2공장인 부평공장을 건설하면서 공장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살 수 있는 사택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히로나카상공의 종업원은 1939년 말 사원 38명, 공원 1천180명 등 모두 1천495명에 달했다. 공원 가운데 부평공장에만 1천88명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부평공장에는 기술자양성소와 숙련공 양성을 위한 공원양성소도 설치돼 있었다.

그러나 잇따른 공장확장과 수익률 저하 등에 따른 경영문제로 1942년 부평공장을 당시 600만 원을 받고 미쓰비시중공업에 양도한다.

미쓰비시는 히로나카상공의 부평공장을 인수해 1천여 명에 달하는 근로자가 일하는 미쓰비시제강 상인천제작소를 운영하는데, 이 때 히로나카상공이 세웠던 사택도 같이 넘겨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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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사택은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주를 하지 않게 되면서 지붕과 건물 외벽들이 무너져 방치돼 있는 곳이 많다 .

이 사택들은 두 곳으로 구분돼 있는데 경인선 남쪽으로 구(舊)사택과 신(新)사택 등으로 불린다. 구사택은 히로나카상공이, 신사택은 미쓰비시제강이 만들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신사택이 있던 곳에는 일부 단독사택과 양성소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철거됐다.

군수기업이었던 미쓰비시 공장에서 일했던 조선인들은 1천여 명에 달했으나 이들은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미쓰비시 줄 사택은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 미군이 부평을 차지하면서 미군 부대의 일을 하며 사는 한국인들과 무명 밴드들이 모여드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플로어 밴드(Floor Bands), 하우스 밴드(House Bands), 오픈 밴드(Open Bands) 등으로 불리며 미군 영내 클럽과 부대 주변 클럽들을 오가며 음악 활동을 했다고 한다.

김정아 부평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미쓰비시 줄 사택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군수 기업이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인력이 필요했고, 그 인력이 머물 수 있는 거주공간을 마련한 사례"라며 "공용화장실 등을 볼 때 고급 주거 환경은 아니었으나, 돈 없고 힘 없는 시절 한국인들이 모여 살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됐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한편 부평역사박물관은 부평 일대에서 일본 기업들에 동원됐던 조선인들의 노역 수준이나 실생활 조사 결과를 올 해 안에 발표할 예정이다.

글 = 신상윤기자 ssy@kyeongin.com·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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